큐레이터를 일컫는 말들: “지암 뚜옌(Giám tuyển)”에서 “삭 뜨리엔 난(Sách triển nhân)”까지

부 득 토안(Vũ Đức Toàn)

본 글은 용어의 변화를 들여다보며 지난 20년 간의 미술사 담론을 재조명할 것이다. 베트남 근대 미술의 태동기에 여러 “외국어”가 등장했다. 2000년 이전까지 “큐레이터”는 그러한 “외국어”였으나 난데없이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외국어” 단어는 당시 미술계에서 어떻게 인식되었는가? 단어를 둘러싼 오해는 없었는가? 당시 “큐레이터”의 역할은 어떻게 정의되고 인식되었는가? 2000년대 이후, 이 “외국어”에 대한 번역어로 “지암 뚜옌(giám tuyển)”이 등장했다. 이는 단지 번역의 관점에서의 해결책이었을 뿐인가? 혹은 초창기에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용어를 이해가능케 하는 어떠한 미학적 신념을 반영하는가? 2010년 이후 줄곧, “지암 뚜옌(giám tuyển)”은 어려움 없이 널리 사용되었다. 본 글의 목적은 다양한 용어에 대한 개인적 관찰 및 기록을 통해 베트남 큐레이터 세대 간의 변화를 탐구하는 것이다.

  2000년대 초반경, 베트남 현대 미술은 이미 몇 년째 전개되는 중이었다. 현대 미술 활동과 관련하여, 미술 전시 혹은 프로젝트를 조직하는 역할을 지칭하기 위해 “큐레이터”라는 용어는 처음에는 종종 사용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용 빈도가 증가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큐레이터는 무엇이며 큐레이터십에는 어떤 것이 포함되는지에 대한 미술계 내 이해와 인식은 상이했고 이 용어와 관련해 여전히 혼란과 논란이 많은 상황이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느 후이(Như Huy)[1]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 그는 “큐레이터”의 번역어로 “지암 뚜옌(giám tuyển)[2]”을 도입했으나 많은 이들은 사용을 꺼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오늘날에는 베트남 미술계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용어가 되었다. 이에 힘입어 “큐레이터”의 번역어를 표준화하고자 하는 관습이 생겼다. 그럼에도 여전히 다른 번역어를 도입하고자 하는 여러 노력은 이어졌다. 몇 년 전 등장한 “삭 뜨리엔 난(sách triển nhân)”이 그 예다. 응우옌 떼 손(Nguyễn Thế Sơn)이 제안한 것으로 알고 있는 이 용어는 중국어 기반의 단어다. 이러한 어휘적 다양성은 옛말을 대체하는 새로운 말로도, 어느 것이 더 적절한가를 가려내는 시도로도 인식되어서는 안 된다.

  당시, “삭 뜨리엔 난(sách triển nhân)”의 등장은 “지암 뚜옌(giám tuyển)”의 의미와 개념을 더 깊게 이해할 기회를 제공했다. “삭 뜨리엔 난(sách triển nhân)”에서 “삭(sách)”은 “전략” 혹은 “전략적 계획/기획(sách lược)”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으며, 전략적 비전을 본질적으로 내포한다. 더 엄밀한 의미에서, 이는 모든 큐레이터 활동의 핵심 역량이다. 비전이 없다면 큐레이터의 모든 일은 아트 프로젝트 매니저, 코디네이터, 혹은 해당 예술기관 내 여타 직책의 일과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비전이 있는 큐레이터는 전체적인 상황을 예견함으로써 프로젝트 혹은 전시의 구조를 그릴 수 있다. 그러므로, “뚜옌(tuyển, 선택하다)”의 과정 또한 발견의 과정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큐레이터가 행하는 선택 행위는 굳이 순차적 과정을 따를 필요가 없고 오히려 큐레이터가 전체적인 시나리오를 인식함에 따라 거의 동시적으로 일어난다. 그렇다면 “삭 뜨리엔 난(sách triển nhân)”의 본질인 “삭(sách, 전략)”이 본질적으로 “뚜옌(tuyển, 선택)”의 일부라고도 할 수 있는가? 문제는 이가 용어 자체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큐레이터의 성격과 스타일은 “지암(giám, 감독하다)”의 행위보다 “뚜옌(tuyển)”의 행위에서 더 잘 드러난다.

  “삭 뜨리엔 난(sách triển nhân)”에서 “뜨리엔(triển)”은 “뜨리엔 난(triển lãm)”, 즉 전시를 일컫는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의미론적으로 정확하지 않더라도, 이 단어가 “트리엔 까이(triển khai, 시행)”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큐레이터는 창조자 및 제안자일 뿐 아니라 “지암(giám)”의 행위(관리감독, 모니터링, 주의 등등)를 통해 프로젝트/전시를 계속해서 시행하는 사람이다.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또한 혼자서 일하든 팀으로 일하든, 큐레이터는 이 지적인 작업과 거리를 두고 단순히 참여하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능동적 행위자다. 근접성의 면에서 큐레이터는 언제나 미술가 가까이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기억해야 하는 것은, “지암(giám)”과 “뚜옌(tuyển)”의 행위가 완전히 별개의 단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프로젝트/전시에 대한 전략과 구조가 있다면, 운영 단계를 위한 한계가 어느 정도는 설정될 수밖에 없다.

  큐레이터라는 직업을 이야기할 때, 용어 자체로부터 여러 논의가 시작될 수 있다. 예컨대 큐레이션 스타일에 차이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뚜옌(tuyển)”에 더 집중하는 반면 “지암(giám)”에 있어서는 다소 느슨할 수 있고, 다른 누군가는 그 반대일 수 있다. 누군가는 전략적 기획에 매우 집중하는 반면 시행과 운영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다른 누군가는 모든 면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조화할 수도 있다.

  또한 현재 두 가지 상이한 종류의 큐레이터가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큐레이터, 그리고 미술가/큐레이터다. 각각 장단점이 있다. 큐레이터가 미술가를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미술가에게도 큐레이터를 이해하는 것이 득이 될 수 있다.

다시 큐레이터십의 역사적 이정표로 돌아가자.

  트란 루옹(Trần Lương)[3]이 최근 의뢰한 글에서 2003년의 일화를 소개한 적이 있는데, 바로 《Green Red & Yellow》[4]  전에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한 친구가 큐레이터를 전시를 조직하는 누군가로 두루뭉술하게 설명하고 이해를 돕기 위해 감독에 비유했고, 나는 큐레이터란 무엇인가에 관해 깨달음을 얻었다. 당시 내 무지는 “장님과 코끼리” 일화와 비슷했고 다소 우스울 정도다. 나는 당시 트란 루옹을 마치 MC/진행자와 비슷한 무언가로 인식하면서도 뭔가 더 중요하고 특별한 역할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즈음, 나는 순진하게도 큐레이터의 주된 임무는 비영리 예술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예산 혹은 자금원을 발굴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한 동료는 “오 글쎄, 딱히 큐레이터가 잘하는 일은 아니야. 예산 확보 전문가라고 하긴 어렵거든”이라고 말하며 나를 정정했다.

  2006년 후반, 졸업 논문 주제를 제출할 때였다. 나는 “베트남 큐레이터(큐레이터십)의 현재”라는 주제를 제안했다. 가까운 몇몇 친구들과 트란 하우 옌 떼(Trần Hậu Yên Thế) 교수님의 응원에 힘입어 열정에 불탔다. 그런데 예비 심사를 맡은 교수들은 최근 동시대 미술 활동에서 큐레이터가 어떤 일을 맡는지 잘 알지 못하는 분들이었고, 그들에게 “지암 투옌(giám tuyển)”은 완전히 새로운 문제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큐레이터”라는 원어를 쓸 것을 제안했다. 이후 전체 교수진 앞에서의 공식 심사에서 내 주제는 반려되었는데, 교수들의 몰이해 때문이었다. 그들은 불분명한 문제는 굳이 들추지 말고 시간에 맡기라고 조언했다.

  2007년 후반, 순수 예술 연구 협회(Fine Arts Research Institute) 면접 당시 들었던 핵심 질문은 “학부 성적은 어땠고 졸업 논문 주제는 무엇이었나요?”였다.

  나는 “성적 우수생으로 졸업했고, 졸업 논문 주제는 ‘회화에서의 움직임과 정지의 관계’였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면접관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동시대 미술 활동에 참여하고자 하는 역동적인 학생이라는 소개를 받아 뵙게 되었는데, 5년 간 공부하면서 이런 지루한 것보다 좀 더 흥미로운 주제를 생각해 보진 않았나요?”

  나는 대답했다. “교수들이 정해주신 주제입니다. 저는 원해 “베트남 큐레이터(큐레이터십)의 현재”라는 주제를 제안했는데 승인되지 않았습니다.”

  면접관은 대답했다. “그럴 만하죠. 베트남 내 큐레이터십에 대해서는 연구할 만한 게 거의 없어요. 지금 제일 눈에 띄는 큐레이터는 트란 루옹이에요. 최근 사이공에서 느 후이가 두각을 보이고 있고요. 이 분야에서 연구할 게 나오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겁니다.”

  근 15년이 흘러 응우옌 예술 재단(Nguyen Art Foundation)에서 소장품 전시를 맡을 큐레이터를 공개 모집한다는 소식을 읽었을 때, 전국에 큐레이터라고는 한 명뿐이던 15년 전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공개 모집 소식 자체가 큐레이터십 지형이 다양하고 풍부해졌다는 증거였다. 마찬가지로 이번 학회를 조직할 때도 국내 큐레이터 20~30명의 명단을 추리는 것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부가적 논의들에서 있는 것은?

  • 최근 미술가/큐레이터인 응우옌 후이 안(Nguyễn Huy An)과 가볍게 차와 와인을 마시며 준비 중인 학회 논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미술계에 막 진입했던 때에 대한 회상을 나누었다. 응우옌 후이 안은 한 친구를 언급했는데, 재능 있지만 어딘가 “원시적”인 미술가로, 큐레이터의 일에 대해 일반인이나 할 법한 설명을 했다고 한다. 당시, “큐레이터”라는 말은 잘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 친구는 큐레이터를 시장 질서를 유지하고, 야채 장수들이 생선 장수와 자리를 바꾸지 않도록 지켜보고, 고기 장수 자리와 곡물 장수 자리를 분리하고, 시장 내에 구조화된 흐름을 만들어 전반적인 혼란을 방지하는 역할로 비유했다고 한다.

  지나치게 단순하고 맥락 의존적인 비유이긴 하지만 나름의 논리가 있었으므로, 우리 둘 다 어느 정도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과연 이런 단편적인 이해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이 큐레이터의 책임이자 권위라고 생각하게끔 “부채질”할까?

  추후 다른 맥락에서, 그러니까 미술가들과 큐레이터 간의 회의 자리에서, 한 친구가 여전히 현장 조사, 스케치, 작품 제작은 미술가의 일이고 큐레이터가 할 일은 최종 전시 셋업 및 모양새 다듬기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에겐 완전히 동의하기엔 어려운 견해다. 미술가들은 자신의 작업이 전시 공간에서 어떻게 보여야 할지 가장 잘 이해하고 있고, 본인들이 상상하는 대로 작업을 선보이기 위한 최고의 진열 방식을 알고 있다. 가끔은 미술가가 생각하기에 핵심적인 어떠한 요소를 큐레이터는 불필요하다고 여길 때도 있고, 그 반대일 때도 있다. 따라서, 미술가는 본인의 작업이 작업실뿐 아니라 특정 프로젝트 혹은 전시의 구체적인 맥락 내에서 어떻게 보일지 이해해야 한다. 본인의 제안을 큐레이터와 논의해야 한다. 작업을 보이는 것을 큐레이터의 전문 분야라고 하기는 어렵다. 잘하든, 못 하든 간에.

  내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한 동료가 정면 반박했다.

“Appendix 그룹이 《하늘을 나는 사람들과 스카이라인 4(Skylines with Flying People 4, 이하 “스카이라인 4”)》에서 미술가 29명의 작업을 큐레이션 했을 때 본인이 한 일을 생각해봐요. 대부분의 미술가가 수동적으로 본인 작업을 당신에게 제출하기만 했다고요.”

  맞는 말이지만 억울한 건 없다. 우리는 큐레이터의 역할을, 참여 미술가들은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객관적으로 모두가 직업정신을 갖고 본인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본다. 그렇다면 여기서 역할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우리는 (이전 《스카이라인》 시리즈와 달리) 《스카이라인 4》에 전시할 작품을 의뢰할 때 특정 미술적 맥락에 근거해 매우 투명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제안했다. 당시의 구체적인 사회적 맥락(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중이었다)으로 인해, 운영을 위해서는 모두에게 적용되는 규칙과 관례를 만들어야 했다. 큐레이터와 미술가 간 외에도 여러 측면에서 제약이 있었다. 창고 주인과 우리, 그리고 코로나-19 팬데믹의 사회적 환경이 초래하는 위험이 증가함에 따라 창고 주인들이 져야 할 보안 및 안전 관련 법적 책무 같은 것.

  이렇게 애초부터 제한사항이 숨 막히도록 많은 전시에 미술가들이 자발적으로 참여 의사를 표한 이유는 무엇일까? 큐레이터에게도 자유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모두가 같은 상황이었다. 각자의 능동적인 선택이었고 자신이 피해자라는 생각을 할 여지도 없었으므로, 미술가도 큐레이터도 잃어버린 자유를 울부짖지 않았다. 대신 서로를 격려했다. “우린 함께 요상한 게임을 하는 거고, 거의 끝나간다.”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미술가와의 대화를 거절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화를 나누었다. 모든 일은 논의와 결정을 거쳐야 했다. 이러한 형식을 갖추게 된 것은 너무 많은 것이 창고 주인의 통제 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큐레이터로서 내 전략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프로젝트를 현실화하는 것이었기에, 주어진 상황을 따라야만 했다. 그리고 나는 계약서에 명시된 법적 의무에 따라 프로젝트를 실행했다.

  한 마디로 이 프로젝트에서 미술가들이 상황을 얼마나 잘 인식하는가는 그들이 큐레이터가 짊어진 위험부담을 얼마만큼 이해하는가에 달려있었다. 큐레이터는 모든 것이 확실히 실행되고 지속되도록 하는 사람이며, 미술가는 큐레이터가 내놓는 제안에 대한 가장 엄격한 판단자가 된다. 만일 미술가가 큐레이터의 의견에 동의를 했음에도 만족감까지 느끼지는 못했다면, 이는 미술가를 만족시키는 것이 큐레이터의 소관이 아닌 탓이다. 더군다나 지금 언급 중인 이 프로젝트에서는 내가 바로 그 큐레이터다. 내가 만일 미술가였다고 가정해 본다. 전문적인 이유가 있는 한 큐레이터와 뜻을 맞추지 않을 이유가 없다. 더 나은 전체를 위해 큐레이터가 나를 꼭 필요로 한다는 생각이 들 테니까.

《하늘을 나는 사람들과 스카이라인 4》(2021, 하노이) 전시 전경
  • 부정확성의 여지가 작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때때로 비유를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큐레이팅 관습의 개념과 큐레이터라는 직업에 대한 전반적인 개괄을 포함하여, 포괄적이고 접근가능한 참고 자료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몇몇 특정 사례에서는, 특히 제3자에게 큐레이터의 역할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할 때는 여전히 비유와 참조의 방법을 종종 쓰게 된다. 이는 일차적으로 이미 정의된 것의 기존 맥락에 기반한다. 즉, 우리가 비유와 참조에 사용하는 것에는 이미 비유 대상을 명료화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 체계가 있다. 그렇기에 종종 사람들이 큐레이터를 영화감독이나 축구 코치에 비유하는 것을 보게 된다. 두 비유 모두 한계를 갖고 있다. 게다가 지극히 제한적으로만 성립한다. 2007년, 미술계 내 누군가는 큐레이터와 감독은 다르고 둘을 비교하기도 어려우며, 굳이 비유해야 한다면 개인적으로 큐레이터는 감독보다 제작자에 가깝다고 본다고 말한 바 있다. 최근에는 큐레이터 레 뚜안 우옌(Lê Thuận Uyên)[5] 을 비롯한 이들과 와인 및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 적 있는데, 이 때 논의의 주제도 ‘큐레이터를 어떤 직업과 비교할 수 있을까’였다. 나 또한 큐레이터를 축구 코치에, 미술가를 축구 선수에 비교하는 것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다. 축구 구단 내에서 적절한 대상을 찾는다면, 큐레이터를 기술 감독(스포츠 디렉터)에, 미술가를 코치에 비유할 수 있겠다. 물론 그날의 대화는 별다른 결실을 맺지는 못했다. 다른 사람들은 축구는 알아도 큐레이팅은 잘 몰랐고, 반대로 레 뚜안 우옌은 축구를 잘 몰랐다. 우리는 그저 웃긴 일화 정도로 여기고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하노이에서 열릴 학회에서 큐레이터 느 후이를 만날 날이 기다려진다. 축구를 아는 큐레이터이므로, 이 비유에 대해 적절한 평가를 해 줄 것이다.

저자 소개
부 득 토안(Vũ Đức Toàn, 1982년생)은 베트남 하노이 출신의 미술가로, 주로 퍼포먼스 및 설치 작품을 선보인다. 관객과 공연자의 관계, 사회적 관습, 이미 종료되었거나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역사적 시기와 관련된 맥락을 주로 다룬다. 베트남 예술대학(Vietnam University of Fine Arts) 미술사 및 미술이론 학부를 졸업했다. 2005년부터 현재까지 베트남 순수예술 협회(Vietnam Fine Arts Association)의 에디터로써 협회의 여러 발간지를 맡고 있다. 2010년에는 응우옌 후이 안(Nguyen Huy An)과 함께 하노이 기반 퍼포먼스 그룹인 Appendix 그룹을 창립했다. 개인전으로는 《모든 취소된 신혼여행(Mỗi Tuần Trăng Vỡ Mật, Á 스페이스, 하노이, 2023)》와 《Disorderly Departure(나산(Nhà Sàn) 콜렉티브, 하노이, 2017)》이 있다. 대표적인 퍼포먼스 아트 축제 및 그룹전으로는 《남쪽 섬으로의 귀환(Returning to the island of the South, 대만, 2017)》, 《MoT+++ 퍼포먼스 아트 축제 및 레지던시(HCMc, 2017)》, 《Guyu Action(중국-홍콩-대만, 2016)》, 《PAN ASIA 5(한국, 2012)》, 《양성 종양(U Lành Tính, 하노이, 2011)》이 있다. 2013년부터 나산(Nhà Sàn) 콜렉티브의 큐레이터 이사회의 일원을 맡고 있다. 큐레이터 개인으로서 다음의 전시를 선보였다. Appendix 그룹과 함께한 《하늘을 나는 사람들과 스카이라인 4(Skylines with flying people 4, 하노이 Mini Kingkho, 2020)》, 《4th Quarter Report (하노이 Á 스페이스, 2023)》, 《여백의 심장(Heart on the Margin, 하노이 Manzi Art Space, 2023)》, 《아침-정오-오후-저녁(Morning–Noon–Afternoon–Evening, 하노이 Á Space, 2022)》, 《IN:ACT(나산(Nhà Sàn) 콜렉티브, 2017~현재)》, 《설익은 우육(Tái Nạm, 하노이 Mơ Art Space, 2022)》.

역자 소개
윤가람은 시각예술에 뿌리를 두고 말과 글을 만지는 통번역사다. 모어는 시각 언어, 직업적으로는 한국어와 영어를 잇는다. 눈에 띄는 글자와 이미지는 모두 머릿속에서 따라 읽고 그려봐야 직성이 풀리고, 다양한 종교에 관심이 많다. 문화재단 국제교류 프로젝트 및 국제행사 준비 회의, 개발도상국 개발 프로젝트 등에서 통번역을 맡았고, 올 여름에는 미술 관련 프로젝트 및 출판물 번역에 집중하고 있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회화를 전공, 예술학을 부전공하고 미술가, 기획자, 독립출판인 생활을 거쳐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 한영과를 졸업했다.


[1] 응우옌 느 후이(Nguyễn Như Huy)는 큐레이터, 시인, 미술비평가, 번역가이자 베트남 사이공에 위치한 아트 프로젝트 기반 공간인 Zero Station의 창립자다.

[2] “지암 투옌(giám tuyển)”이라는 용어는 중국어 기반의 베트남 단어(한월어)로, 관리감독을 뜻하는 “지암(giám)”과 선택/선별을 뜻하는 “뚜옌(tuyển)”으로 구성되어 있다.

[3] 트란 루옹(Trần Lương)은 베트남 하노이 기반의 미술가/큐레이터다. 또한 나 산(Nhà Sàn) 스튜디오의 창립자 두 명 중 한 명이자 APD Center의 창립자 겸 현 디렉터이기도 하다. 두 곳 모두 베트남 하노이에 있다.

[4] <Green Red & Yellow>는 트란 루옹(Trần Lương)이 큐레이팅한 동시대 예술작품 16점을 선보인 전시로, 2003년 10월 3일부터 10일까지 하노이 괴테 인스티튜트에서 열렸다.

[5] 레 뚜안 우옌(Lê Thuận Uyên)은 베트남 하노이 기반의 큐레이터로, 현재 The Outpost Art Organisation의 미술 감독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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