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듭” 풀기: 베트남 민족학 박물관 내 천주교 문화 관련 전시에서 큐레이터의 책무

부 띠 하(Vũ Thị Hà)

  2008년 11월에 베트남 민족학 박물관(이하 “VME”)에서 천주교 문화 관련 전시가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같은 해 8월, 숙고 끝에 전시를 12월로 연기하기로 결정되었다. 그즈음, 호안 끼엠(Hoàn Kiếm) 지구) 나 쭝(Nhà Chung)가 42번지 및 동 다(Đống Đa) 지구) 응우옌 루옹 방(Nguyễn Lương Bằng)가 178번지 토지를 둘러싼 하노이 시 정부와 교회 간의 갈등은 점차 심화하여 시위가 열리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전시 조직위와 VME 운영진은 추가 기간을 할애해 전시 세부 사항을 세밀히 검토해야 했다. 2008년 12월 10일, 천주교 측 시위자들의 재판으로부터 단 이틀 뒤, 《성례 속에 사는 것–동시대 베트남의 천주교 문화(Living in the Sacraments – Catholic Culture in Contemporary Vietnam)》 전의 막이 올랐다. 전시 오프닝에는 많은 종교계 지도자 및 성직자, 신자들이 참석했다. 전시는 호평을 받았고, 당시의 사회문화적 현상 그 자체가 되었다. 많은 이들이 그토록 민감한 시기에 그런 전시를 어떻게 혹은 왜 조직했는지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전시는 놀랄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전시에 참여했던 큐레이터와 함께, 베트남 천주교 교리의 역사적 이정표와 천주교가 베트남에 “뿌리내린” 과정(전시 당시까지도 천주교에 대한 편견을 형성한 “괴리들”)을 살펴보자. 전시를 조직하는 과정에서 마주한 “매듭”을 뒤돌아보고 함께 이 “매듭”을 풀어보자.

천주교 전파와괴리들

  학자들은 베트남에 천주교가 처음 전파된 시기를 1533년으로 본다[1]. 그 이전, 베트남에는 이미 고유의 문화적 요소와 유교, 불교, 도교 사상이 상호보완적으로 융합되어 있었고, 특정 시기에는 한 요소가 다른 요소보다 더 중시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주교가 전파되며 여러 새로운 가치 기준이 함께 유입되었다. 이후 천주교가 베트남 사회에 뿌리내리는 과정에서 여러 이유로 “괴리들”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천주교 공동체 및 신앙과 관련된 갈등 및 편견이 생겨났다.

사회문화적 갈등부터 정치적 갈등까지

  천주교는 성삼위일체를 섬기는 일신교다. 베트남 전파 초기, 천주교는 여타 종교와 전통 신앙을 “따오 조이(đạo dối)”, 즉 거짓되고, 미신적이고, 그릇된 가르침으로 여기고 신자들이 다른 종교의 신을 모시는 것을 금했다[2]. 조상숭배에 관해서는 (적어도 1962~65년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때 까지는)[3] 언제나 오직 부모만 섬기라 가르쳤고, 이는 곧 제사에서 예를 표할 때 절을 하지도, 향을 피우지도, 무언가를 바치지도 말라는 의미였다[4]. 따라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베트남의 천주교 신자들은 신앙을 택하는 순간 조상님 섬기기를 포기해야 했다[5]. 천주교는 또한 일부일처제를 지지했다. 이러한 천주교적 이념들은 다양한 사회 계층으로부터의 반발을 마주하게 된다[6].

  정치적 이념 측면에서, 봉건시대에는 때에 따라 불교 혹은 유교가 다른 종교보다 중시될 때도 있었으나 근본적으로는 논쟁적 성격의 갈등은 없었다. 그러나 “천주교 전파 이래 베트남에서 국가와 교회의 관계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7]”. 천주교가 베트남에 전파된 시기는 지대한 사회적 위기의 시대였는데, 초반에는 종교와 상업을 통해 서구 문화와의 접촉이 이루어졌다. (17~18세기) 봉건 왕조가 무역선과 함께 당도한 서구 선교사[8] 의 천주교 선교활동을 열린 태도로 환영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무역을 통한 귀중품 구매와 전쟁을 대비한 유럽산 무기 구매다. 선교활동은 도착한 무역선에 따라 결정되었다. 선호되는 물건과 무기를 싣고 온다면 통치자들은 대중의 반발을 “못 본 척”했다. 그렇지 않은 경우, 대중의 마음을 얻고자 선교 활동을 제한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떠이 선(Tây Sơn) 왕조(1788~1802)의 반-천주교 기조는 종교-문화적 이유보다는 정치적 이유에서 기인하는데, 천주교 선교사 및 신도들이 당시 정권에 대한 응우옌 안(Nguyễn Ánh)의 불복종을 지지한 것이 주된 이유다. 19세기 응우옌(Nguyễn) 왕조의 강력한 천주교 금지 정책의 경우, 서구 열강의 침략 위협으로 인한 국가 안보의 문제뿐 아니라 유교를 공식 종교로 법제화하는 문제와도 관련 있었다. 그러나 천주교회와 국가권력 간의 갈등을 심화한 핵심 요인은 문화적, 영적으로 중시되던 조상숭배 풍습 및 일부일처제 결혼 관련 갈등이었다. 게다가 천주교회는 정부와 공존해 왔다. 그렇기에 국가와 천주교회의 관계는 마치 두 동등한 기관의 관계와 같았는데, 이는 그간 베트남 내 국가와 종교의 관계와는 완전히 달랐다.

  특히 민 망(Minh Mạng) 황제(1820~41년 재위), 띠에우 찌(Thiệu Trị) 황제(1841~47년 재위), 뜨 득(Tự Đức) 황제(1848~83년 재위)의 반-천주교 칙령 이후 1858년, 프랑스는 후에(Huế) 왕조가 천주교 선교사를 박해하고 자유무역에 대한 프랑스의 외교적 요청을 거절했다는 구실로 베트남을 침략했다.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침략이 점차 심화하는 가운데 베트남의 천주교 선교사 및 신자 다수는 (선교사의 영향으로) 고국 베트남에 대항했다[9]. 이에 뜨 득 황제는 더욱더 강력한 반-천주교적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고, 프랑스는 이를 침략의 추가적 구실로 삼았다. 프랑스의 압박으로 응우옌 왕조는 1962년 5월 제1차 사이공 조약(Nhâm Tuất 조약)에 강제 서명해야 했고, 조약에 근거해 동남부 세 주(州)를 프랑스에 빼앗기고 반-천주교 정책을 철회했다. “프랑스를 몰아내자, 천주교인을 죽이자(Bình Tây, Sát Tả)”[10]라는 슬로건 하에 반 떤(Văn Thân) 운동[11]에 참여했던 베트남 중부의 관료 및 애국주의 유교 학자들은 강하게 반발했고, 이는 여러 건의 천주교인 학살로 이어졌다.

  8월 혁명(1945)과 디엔 비엔 푸(Điện Biên Phủ)에서의 승전(1954) 이후 1954~75년, 천주교의 지리-종교적 양상이 완전히 바뀌어 천주교 신자의 9분의 7이 남부에 위치하고 응오 딘 지엠(Ngô Đình Diệm) 정부는 천주교에 의지하게 되었다[12]. 더불어 1970~80년대 북부 베트남에서는 천주교와 사회주의의 결속에 영향받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국경에서의 전투, 그리고 보조금 체제[13]로 인한 사회경제적 울분을 예로 들 수 있다. 정부가 보조금 체제를 철회하고 통합적 개혁기에 진입했을 때 베트남 천주교회 역시 “민족의 행복을 위해 나라의 심장에서 복음 속에 살라”[14] 는 정책을 강조했고, 천주교와 국가의 관계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천주교 관습 천주교와 기타 공동체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 갈등들

  천주교 활동의 초기 형태는 공식 역사로는 크게 기록되지 않았고 (선교사들이 교회 또는 가족에게 보내는 서한 등) 비공식적 역사 자료에만 언급되어 있다. 이들은 17세기 초반까지의 초창기, 특히 베트남 중부 꽝 남(Quang Nam)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이 정상적인 종교활동을 했음을 보여준다. 반면 같은 시기 북부에서는 종교갈등으로 인해 천주교 및 기타 공동체 간 의견충돌이 빚어져 신앙 활동에 영향을 미쳤다. 응우옌 홍(Nguyễn Hồng)은 1631년부터 북부에서 천주교 순교자가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본다.[15]

  이러한 갈등은 또한 “천주교와 타 종교의 통합(gián tòng lương/giáo)” 구조 기반 천주교 마을의 형성에도 기여했다. 마을 및 교구 형성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촉진되기 시작했는데[16], 목표는 천주교 신자의 지역적 집중을 통한 신앙생활의 편의성 도모였다.

  즉, 전통문화와 천주교 문화의 갈등은 광범위하고 지대한 문제로, 베트남 내 일부 비-천주교인, 전통 종교 지도자, 정부 관리의 반-천주교주의와 봉건 왕조의 반-천주교 정책으로 이어졌다. 또한 그 결과 천주교 및 비-천주교 공동체 간의 사회적 차별이 생겨났다. 신자와 비신자 간의 결혼 제재, 천주교 마을로 인한 천주교 및 비-천주교인의 거리감 심화, 과거 갈등으로 인한 천주교 신자에 대한 공격 심화 등이 그 예다.

  천주교 문화 관련 전시가 처음 제안되었을 당시, 베트남 내에서 천주교 공동체에 대한 비-천주교인의 이해는 매우 제한적이었고 대부분의 경우 일방적이고 편향되어 있었다.

전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 “매듭풀기

  VME의 여타 주요 전시처럼 본 전시 역시 (2005년부터 2008년까지) 오랜 기간을 거쳐 준비되었다. 민감한 주제에 대한 전시인 만큼 담당자와 VME 이사회는 여러 “매듭”을 풀어야 했다.

  • 천주교에 대한 전시인가, 그리고 불교가 아니라 천주교 전시가 주자인가?

  전시 브레인스토밍 단계에서 몇몇 종교 지도 단체가 제기한 문제다. 위계적 사고방식에 따라 베트남 내 많은 사회활동에서 불교가 우선시되고 첫 번째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왜 VME는 이 순서를 뒤집는가? 왜 불교가 아닌 천주교 전시가 첫 주자가 되었는가? 이것이 위계/우선권의 변경을 뜻하는가? 전시기획에 찬성하는 이들은 이 질문에 당황했고 근심에 잠겼다. 적절한 답변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전시가 간섭받거나 연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기존의 위계적 사고방식이 VME 활동에도 반영되어야 하는가? 우리의 답은 확고하게 “그렇지 않다”였는데, 박물관은 다양한 문화와 그 주체를 존중하고 동등하게 제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문화 기관이기 때문이다. 박물관의 원칙은 문화 혹은 종교를 위계적 질서에 따라 “줄세워” 보이는 것이 아니다. 전시 순서를 결정하는 것은 주로 사회의 관심사, 연구자들의 관심사, 유물의 가용성, 접근성, 수집 가능성, 그리고 후원자로부터 예산을 끌어오는 능력이다. 문화를 제시하는 데에 있어 박물관의 접근법은 정치계의 접근법과 다르다. VME 측은 여러 대화 및 기타 소통을 통해 이러한 입장을 확실히 표명했고, 끝내 종교 문제를 담당하는 정부 관리들로부터 지지를 얻어냈다.

  • 전도 수단이라는 오해를 사지 않고 천주교 전시를 기획할 방법은 무엇인가?

  전시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천주교 문화는 베트남 문화의 일부’라는 것이다. 큐레이터는 언제나 전시를 올바른 방향으로 기획하고, 올바른 메시지를 전달하고, 뜻하지 않게 전시가 전도 활동으로 비치지 않게끔 하고자 노력했다. 당연히 정부 측에서도 비슷한 우려를 표했다. 객관적으로든, 주관적으로든 전시가 “전도 활동”으로 인식되거나 평가된다면, VME 입장에서는 정부의 시선뿐 아니라 박물관 윤리의 면에서도 큰 문제가 된다. 박물관 입장에서 종교적 교리를 주입하는 어떠한 방식도 피해야 한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현실 속 대다수 비-천주교인은 천주교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천주교인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 게다가 문화는 서로 다른 지역, 계층, 직업 등의 요소를 포괄한다. 천주교 공동체를 이해하려면 천주교인의 생각, 행동 관습, 지역적 의례 또한 알아야 한다. 여러 주교 및 사제, 학자와의 논의를 거쳐 여러 입장의 상이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제안된 것은 일상적 천주교 활동과 연관된 성례를 통해 천주교를 소개한다는 기획이었다. 《성례 속에 사는 것–동시대 베트남의 천주교 문화(Living in the Sacraments – Catholic Culture in Contemporary Vietnam)》 전시에서 VME는 평범한 천주교인의 인식과 관례를 통해 천주교 문화를 제시하고자 했다. 이러한 접근을 통해 어떻게 천주교가 천주교인의 삶과 공동체에 필수불가결한 부분이자 하나의 문화가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연구-소장팀이 전시 준비 과정에서 천주교인의 삶에 대해 더 배우고자 했을 때, 많은 신자들은 자신도 잘 알지 못한다며 사제와 얘기해 볼 것을 권했다. 사제라면 천주교, 천주교 교리, 그리고 교구민의 삶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가 자기 성당의 사제를 소개해 주고 싶어 했다. 현장 조사 당시, 우리는 교구 담당 사제들을 먼저 만나 전시의 목적을 소개하고 전시 아이디어를 논의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천주교인 가족과 보내며 지속적으로, 그리고 조화를 이루며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그들이 주변에 VME 직원이 머무는 것에 익숙해지게 하기 위해 여러 교구 및 천주교 공동체 현장에서 긴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천주교인들이 말하고, 스스로를 표현하고, 천주교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듣고, 배우고,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천주교인의 삶과 이야기를 이해하고 싶음을 설명했다. 우리는 그들이 일상 속 이야기를, 기쁨과 슬픔을, 삶에서 마주하는 어려움을 공유해주기를 바랐다. 이 전시를 통해 천주교인은 천주교 문화를 공유하고 비-천주교인은 그 문화와 삶을 이해하는 가교가 만들어지기를 원했다. 우리의 의도를 이해하자 그들은 개방적이고 열성적인 태도로 우리와 관계 맺고, 정보를 제공하고, 이야기를 공유하고, 전시할 유물을 찾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 천주교 유물, 특히 성물을 어떻게 수집할 것인가?

  VME에는 천주교 소장품이 거의 전무했기에, 연구-소장팀에게는 전시품 수집이 주된 우려 사항이었다. 연구 및 수집을 위한 출장 중에는 여러 어려움을 마주하게 되었는데, 예를 들어 전시 컨셉에 필수적인 유물 한 점을 얻기 위해 일 년 내내 협상과 설득을 하고도 실패하는 일이 번번했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행운이 따라주기도 했다. 남 딘(Nam Định)성 포 쿠엉(Phó Khuông) 씨 일가는 몇 대째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부이 쭈(Bùi Chu) 교구 및 푸 냐이(Phú Nhai) 대성당을 위해 조각상을 제작해 왔다. 이전에 많은 이들이 언급하기로 푸 냐이, 박 닌(Bắc Tỉnh), 룩 투이(Lục Thủy), 닌 끄엉(Ninh Cường), 그리고 남 딘성 쑤언 박(Xuân Bắc) 등지의 교회에 모셔진 조각상들은 (흔히 “더 포(the Phó-s)”라고 불리는) 트란(Trần) 가문에 의해 제작 및 유지 보수된다고 하였다. 이 조각상들은 독특하고 생기 있는 스타일로, 특별한 “점정(eye-dotting)” 기법 덕에 풍부한 감정을 전달한다. 남 딘성 푸냐이 교구로의 첫 현장 조사에서 우리는 이 가문과 연이 닿았다. 이후 2005년부터 2007년까지 3년 동안 여러 차례의 현장조사를 통해 연구-소장팀은 이 가문을 종종 방문하여 관찰하고, 질문을 하고, 사진을 찍었으며, 가끔은 지나는 길에 그저 들르기도 했다. 2007년이 되자 이들은 연구-소장팀을 가족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한번은 이 가문 5대의 유일한 상속자인 트란 꾸옥 훙(Trần Quốc Hưng) 씨가 우리에게 낡고 해진 비닐봉지를 건네주며 그 안에는 가문 대대로 내려온 매우 귀중한 가보가 들어있다고 했다. 봉지 안에는 책 한 권과 앨범 한 권이 있었다. 책은 매우 낡은 상태로 앞의 몇 페이지는 사라진 채였고, 몇몇 페이지는 떨어져 나가는 중이거나, 가장자리가 닳았거나, 모서리가 사라지고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묘사한 그림들이 실려 있었고, 함께 적힌 설명문은 짧았으나 그림의 내용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했다. 낡은 앨범에는 예수, 성모 마리아, 성인들, 베트남 및 해외의 추기경들이 그려진 엽서, 드로잉, 사진이 여럿 있었다. 훙 씨는 가문의 조각상 제작 비법이 이 앨범에 들어있다고 했다. 옷자락의 우아한 흐름부터 섬세한 모습, 부드러운 손, 그리고 천상에서 내려온 것만 같은 그림 속 얼굴까지, 그의 가문은 이 실제와 같은 묘사를 본떠 조각상을 만든 것이다.

  다른 어느 날, 훙 씨는 정사각형, 직사각형, 그리고 삼각형 모양의 나뭇조각이 여럿 담긴 플라스틱 바구니를 가져왔다. 나무 조각의 앞뒷면은 모두 반짝이는 검은 빛이었고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이 나무조각이 바로 조각상의 몸, 옷, 혹은 수염에 사용하는 무늬 틀이라고 설명했다. 이것들을 왜 이제서야 보여주는 것인지 묻자 그는 농담조로 말했다. “어떤 사람들인지 간을 보고 나서야 보여주든 말든 하지!”

  훙 씨에게는 매부가 한 명 있는데, 바로 꽁(Công) 씨다.[17] 그가 어느 날 조심스레 알려주기를, 훙 씨에게는 매우 귀중한 성 빈센트 상이 있는데 포 기아(Phó Gia)[18]가 조각한 걸작으로 얼굴과 손발이 상아로 만들어졌다는 것이었다. 꽁 씨는 그 조각상을 전시할 수 있을지 요청해 볼 것을 권했다. 수 차례의 설득 끝에 마침내 훙 씨는 우리를 2층으로 데려가 조각상을 보여주었다. 유리 진열장 안에서 위용을 뽐내는 조각상은 높이가 50~60cm 정도 되었고 매우 아름다웠다. 이 조각상을 전시한다면 VME는 두 가지 이야기를 전할 수 있었다. 하나는 천주교 신앙 속 기적을 행한 한 성인에 대한 이야기요, 다른 하나는 5대에 걸쳐 조각상을 만들어 온 가문이 제작한 아름다운 작품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의 끈질긴 설득에도 불구하고 훙 씨는 숙고 끝에 세 가지 이유로 전시를 거절했다. 첫째, 이 조각상은 조상님으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인데, 운 좋게도 다른 누군가로부터 해당 조각상의 수리를 의뢰받았고 이후 의뢰인을 설득해 조각상을 보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기적을 행했다고 여겨지는 성 빈센트의 조각상인 데다 교회에 봉헌하기 위해 축성을 받았기 때문에, VME에 판매한다면 가문에 불운이 닥칠까 염려된다는 것이다. 셋째, 천주교 조각상 수집가들이 매긴 조각상의 가격은 무려 10,000달러인데 VME 예산으로 구매하기는 어렵지 않겠냐는 것이다. 훙 씨는 포 기아가 제작한 다른 조각상을 구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실제 전시에서는 트란 가문을 소개하는 섹션에 세 점의 유물을 전시했다. 포 기아가 제작한 성 도미닉 조각상[19], 낡은 앨범, 그리고 무늬 틀 한 점이었다. 또한 훙 씨에게 의뢰해 제작한 높이 1.8m의 고통의 성모 마리아상을 전시 오프닝 장소에 설치했다. 이로써 트란 가문의 다섯 세대에 걸친 천주교 조각상 제작의 전통을 소개하는 섹션은 만족스럽게 꾸려졌다.

  VME 팀과 유물 대여자 간의 협상 중에는 수많은 숙고가 필요했던 건도 있다. 죽음 직전의 께 리엣(kẻ liệt, 매우 병든 자)[20]이 성 십자가에 입 맞출 수 있도록 허락하는 성 카멜리오의 동상과 관련된 협상이었다. 이 나무 조각상의 주인은 께 리엣회 수장이었는데, 께 리엣회는 하이즈엉(Hải Dương) 지역 한 교구에 위치한 심히 병든 자를 위한 기도회(Association of Prayers for the Very Sick)의 일원으로써 임종 직전의 천주교인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종부성사를 해주는 협회였다. 조각상은 그의 집, 키 큰 옷장 위에 놓여있었다. 첫 회의부터 그 이후의 방문에 이르기까지, 그는 께 리엣회의 활동과 활동 중 마주한 어려움, 회원들의 헌신에 관해 열린 태도를 보였다. 께 리엣회의 독특한 천주교 문화에 대해 알게 된 우리는 이를 전시에서 소개하고 싶었고, 그리하여 병자들을 위한 기도회를 함께할 것과 의례 용품을 수집해 줄 것을 제안했다. 그는 병자가 성십자가에 입 맞추도록 허락하는 성 카멜리오상을 가리켰다. 께 리엣회 활동을 가장 잘 상징하는 상이었다. 조각상에 대한 그의 설명에 VME 팀은 매우 흥분했는데, 천주교 내 죽음의 개념 및 관련 문화적 관습을 소개하는 “영원의 왕국으로의 여행”이라는 주제를 어떻게 기획할지 고민 중이었기 때문이다.

  전시에서 피와 상처로 뒤덮여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보여주거나, 죽어가는 사람을 전시해 천주교인의 죽음을 다룬다면, 비-천주교인들의 반감을 사거나 아동 관객에게 적절하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이 조각상을 전시한다면 “죽음”이라는 테마를 “안전한” 방식으로 다룰 수 있었다. 그는 필요한 물건과 제례 용품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하면서도 조각상 대여에 관해서는 “성인께서 동의하시는지 허락을 구해야 한다”며 확답을 미뤘다. 별다른 결실 없는 방문이 이어졌고, 타이 하(Thái Hà) 및 나 쭝(Nhà Chung)에서의 사건들[21]로 그를 설득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의 입장에서도 VME를 방문해 전시 준비 과정을 참관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정부 기관과 천주교회의 웹사이트 및 언론을 통해 하노이에서의 이벤트들에 대한 정보도 놓치지 않았다. 한편, 큐레이터들은 그 조각상을 전시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로 전시 디자인 과정에서도 조각상을 위한 공간을 남겨두었다. 2008년 11월 29일, 전시 오프닝을 단 11일 앞둔 날, VME는 조각상을 빌려오겠다는 결연한 각오로 사람(큐레이터 1명과 보존 전문가 1명)을 주인네 집으로 보냈다. 새벽부터 오후 5시까지 설득이 이어졌으나 소득은 없었다. 이 전시가 국가기관에서 주최되기 때문에 혹 정권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면, 전시의 순수한 목적을 열렬한 지지했을 뿐인 자신이 천주교 공동체와 께 리엣회에게는 “배신자”로 여겨지게 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VME는 전시에 있어서 정권의 간섭을 받지 않고 주제를 충실히 전달하고자 항상 최선을 다한다고 설득하자, 그는 한쪽에는 국가와 정부 기관을, 다른 한쪽에는 천주교 공동체와 께 리엣회를 두고 내적인 갈등을 겪는 듯했다. 마침내 저녁 6시경, 그는 뜻밖의 결정을 내렸다. “좋소, 성상을 가져가시오!”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성인의 “허락을 구하고” 조각상을 포장했다. 혹여나 그가 마음을 바꾸기 전에 서둘러 집을 떠났다.

  • 성물을 어떻게 전시할 것인가?

  우리가 마주한 또 하나의 민감한 문제는 바로 성물, 즉 사제의 “축성”을 받은 물건들을 어떻게 전시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우리는 천주교 성물에 대한 사전 조사를 통해, 천주교에서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성물은 자연스레 성스러움을 잃는다고 여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22] 그러나 해당 전시에서 우리는 전시품에 일상적인 천주교 관례에서 사용될 때와 비슷한 수준의 예를 표하고자 노력했다. 연구 과정에서 종종 천주교인들을 만나 성물을 다루는 적절한 태도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전시 오프닝 전날, 전시에 협조해 준 하노이 성 요셉 대성당 측을 초대해 전시를 검토하고 혹여 불만족스럽거나 천주교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 있다면 말해주기를 요청했다.

  대부분의 피드백은 성물을 올려둔 단상의 높이가 예를 제대로 표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것이었다. 그 즉시 디자인팀과 함께 단상 높이를 수정했다. 예를 들어, 성체 안치기를 받치던 목재 단상을 10cm 높이고 흰 천으로 덮고, 조각상 단상을 추가로 제공하고, 마네킹에 그저 걸쳐두었던 사제용 제례의 속에는 장백의를 덧대고, 부활절 초는 촛대과 함께 위치를 재조정했다. 그러나 피드백에도 불구하고 성물 소유주의 자문에 따라 그대로 둔 부분들도 있는데, VME는 언제나 전시품의 현지 맥락을 존중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하 띤(Hà Tĩnh)성 깜 니우엉(Cẩm Nhượng) 지역의 한 가문의 소장품인 제단 두 점이 그 예다. 하노이 대성당 측은 제단이 너무 낮게 놓여있어 위치를 높여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해당 제단 주인이 속한 천주교 공동체는 하띤성에 위치해 있는데, 바다 근처의 어업 마을이라 대부분의 사람이 태풍 때문에 층고가 낮은 단층 주택에 살았다. 그렇기에 소유주 가족은 제단 하나는 집 한가운데 낮은 장식장 위에 두었다. 다른 하나는 침대 머리맡에 두었는데, 주인이 병치레가 잦은 노인이라 잠자기 전 편히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하노이 대성당 측에서 우려를 표한 다른 전시품으로는 전시장 입구에 놓인 고통의 성모상이 있다. 푸냐이 교구에서 주로 부활절에 사용한 조각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체포되어 십자가에 못박힐 당시 성모의 슬픔을 묘사한 작품이다. 이 조각상과 예단 제작을 의뢰할 때 연구-소장팀은 푸냐이 교구의 조각상을 모델로 삼았다. 그렇기에 성모는 검은색 겉옷을 입고 있다. 하지만 하노이 대성당 측은 부활절 기간에 성모는 슬픔과 애도를 표하는 보라색 겉옷을 입어야 한다는 피드백을 주었다. 그러나 푸냐이 교구와 해당 교구가 속한 부이 쭈(Bùi Chu) 교구에서 비탄에 빠진 성모는 검은 겉옷을 입는다. 이에 VME 측은 푸냐이 교구의 정신과 문화에 따라 성모의 검은색 겉옷을 고수했다. 이러한 예들은 VME가 미감뿐 아니라 성물에 적절한 예를 표하는 면에서도 유물을 적절하게 전시하고자 여러 관계자와 함께 숙고하고 상의하였음을 보여준다.

풀지 못한매듭들

  연구자 및 전시 조직자들은 다양성과 정보성 증진을 위해 연계와 연결의 접근 방식을 실행하고자 했다. 과거를 반영하기 위해 동시대의 이야기를 활용하는 것, 장소와 장소를 연결하는 것, 그리고 개인의 이야기를 특정 장소에서 발생한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과 연결하는 등이다. 이를 통해 관람객은 전시 이후에도 VME 외부의 다양한 참조자료들을 탐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상이한 입장 간 갈등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전시는 베트남 천주교 역사 속 주요 이름을 언급함으로써 이러한 연계적 방식을 성공적으로 사용했다. 대표적으로 닌 꾸엉(Ninh Cường), 남딘성 부이 쭈, 닌 빈(Ninh Binh)성 팟 디엠(Phát Diệm), 타인 호아(Thanh Hóa)성 바 랑(Ba Làng) 등이 있다. 바 랑[23] 은 1975년 미국으로 이주해 현재 뉴 올리언스에 거주 중인 천주교인들과 관련되어 있다. 이들은 지난 반세기 동안 바랑에서 동 나이(Đồng Nai)성으로, 다시 롱 쑤옌(Long Xuyên)으로, 또다시 뉴올리언스로 이주했으나 아직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전시품인 흰 세례식 셔츠와 바랑에서 발급된 결혼 증명 교리문답 한 쌍은 여러 연결과 반추를 낳는데, 특히 같은 시기를 살았던 이들, 이 역사를 아는 이들, 그리고 이 지역들과 관련된 베트남 및 해외 거주민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한편, 연계 시도가 실패한 사례도 있다. 예를 들어 조직위는 라 방(La Vang)의 성모상[24]과 연계될 수 있는 다양한 상징을 찾고자 했다. 사이공 정권은 라 방의 성모상이 그려진 우표 세트를 발생하여 1962년부터 1975년까지 유통한 적 있다. 여기서 성모 마리아는 긴 옷을 입고 머리에는 왕관을 쓴 채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모습으로 그려진다. 우리는 이 우표 세트가 성모상 이야기와 연결될 좋은 전시품 감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VME도, 하노이의 친분이 있는 우표 수집가들도 이 우표를 갖고 있지 않았다. 이때 인터넷을 통해, 호찌민 시에 사는 뗌 비엣(Tem Viet) 웹사이트의 운영자인 풍 다이 훙(Phùng Đại Hùng) 씨가 이 귀중한 우표를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우표를 건네받은 우리는 환희에 찼다.

  알렉산드르 드 로드(Alexandre de Rhodes, 1593~1660)는 라틴어를 이용해 베트남어를 음차하는 업적을 세운 선교사다. 우리는 드 로드 또한 우표에 묘사된 적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번에도 풍 다이 훙 씨가 드 로드가 그려진 우표 두 세트를 기증했다. 한 세트는 프랑스 인도차이나 정권이 1943년에 발행한 것이었고, 다른 한 세트는 마찬가지로 프랑스가 발행했으나 베트남민주공화국 정부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이 두 번째 세트를 전시한다면, 8월 혁명 이후 봉건 식민 정권에서 베트남민주공화국으로의 점진적 전환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었다. 세 번째 우표 세트는 베트남 공화국이 발행한 것이었다. 우표 위에는 드 로드 신부의 모습 및 이름과 더불어 펼쳐진 책이 그려져 있는데, 한쪽에는 “나라의 문자”, 다른 쪽에는 “우리의 언어”이라고 적혀있다.

  이 희귀한 전시품은 다양한 층위의 관람객에게 연계의 경험을 줄 것이었다. 하지만 숙고 끝에 이 우표들을 전시하지 않기로 했는데, 전시품 특유의 “민감성” 때문이었다. 이 경우, 라 방의 성모상 우표를 전시하는 것과 라 방 지역을 다루는 것 사이의 선택은 관점의 차이로 인한 암묵적 동의 하에 결정되었다. 라 방 지역 천주교회에 집중하기 위해 성모 우표는 전시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한 것이다. 또한 드 로드 선교사와 관련된 유물도 전시하지 않고, 대신 드 로드의 초상화와 “8일간의 설교”라는 책만 전시하기로 했다.

결론

  《성례 속에 사는 것–동시대 베트남의 천주교 문화(Living in the Sacraments – Catholic Culture in Contemporary Vietnam)》와 같은 비상설 기획전이 역사 쓰기에 이바지할 수 있는지 묻는다면, 내 대답은 예와 아니오, 둘 다다. 예, 라고 대답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긍정적 결과를 고려하면, 이 전시는 민감한 시기에 민감한 주제를 다루었고 여러 도전과제를 해결하고자 다양한 큐레이팅 전략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박물관 관행의 역사적 이정표가 될 것이다.

  한편, 아니라고 대답한 이유는 우리가 천주교 관련 역사적 사건을 새로 쓰지도, 바꾸지도, 지우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이 전시는 박물관, 후원자, 연구자뿐 아니라 천주교 고위 인사 및 신자들과의 회의, 협상, 합의를 통해 만들어졌다. 이 전시는 결심과 열정, 그리고 숙고를 통해 역사적 사건에 대한 객관적 사실을 전달하고자 했다. 신자와 비신자 간 상호 이해를 도모하고, 편견을 줄이고, 천주교인들이 다양하고 풍부한 베트남 문화의 맥락 속에서 천주교 문화에 더욱더 자부심을 느낄 가교 역할을 한다.

저자 소개
부 띠 하(Vũ Thị Hà, 1982년생)는 베트남 종교연구원 기독교연구소(Office of Christianity at the Institute for Religious Studies) 및 베트남 사회과학원(Vietnam Academy of Social Sciences) 연구원이다. 2001년 하노이 사회과학 및 인문학 대학에서 역사학 학사 학위를, 2019년 베트남 사회과학원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03년부터 2023년까지 베트남 민족학 박물관(Vietnam Museum of Ethnology)에서 근무하며 연구 및 소장품 수집, 다양한 베트남 민족 문화 관련 전시 조직 등에 참여했다. 현 관심사는 도시 인류학, 사회문화적 변화, 그리고 도시화의 맥락 속에서 베트남 내 민족 집단의 적응 과정의 개인적 일화를 통한 연구다. 각 개인이 일상에서 문화적 다양성의 창조를 능동적으로 수행하고 또 이에 기여한다고 믿는다.

역자 소개
윤가람은 시각예술에 뿌리를 두고 말과 글을 만지는 통번역사다. 모어는 시각 언어, 직업적으로는 한국어와 영어를 잇는다. 눈에 띄는 글자와 이미지는 모두 머릿속에서 따라 읽고 그려봐야 직성이 풀리고, 다양한 종교에 관심이 많다. 문화재단 국제교류 프로젝트 및 국제행사 준비 회의, 개발도상국 개발 프로젝트 등에서 통번역을 맡았고, 올 여름에는 미술 관련 프로젝트 및 출판물 번역에 집중하고 있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회화를 전공, 예술학을 부전공하고 미술가, 기획자, 독립출판인 생활을 거쳐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 한영과를 졸업했다.


[1]  Nguyên Hồng 1959, Lịch sử truyền giáo Việt Nam (volume I), Hiện tại Publishing House, HCMC, p. 14.

[2] Phạm Huy Thông (2013), “Đạo Công giáo với tư duy người Việt”, accessed February 4, 2015, http://conggiao.info/news/2146/17282/dao-cong-giao-voi-tu-duy-nguoi-viet.aspx.

[3] 1965년부터 1975년까지 전쟁 상황에서, 교회 개혁 및 통합이 베트남 천주교회의 기본 지침으로 여겨지는 일은 드물었다. 추가 참고 자료: Giáo hội Công Giáo Việt Nam, Niên giám 2004, Tôn giáo Publishing House, Hà Nội.

[4] 조상숭배의 문제는 천주교 내에서 수 세기간 논의되었으나 교회 대다수 및 몇몇 비주류 교파의 비타협적인 태도가 만연했다. 참고자료: Nguyễn Khánh Diệp (2016), “Vấn đề thờ cúng tổ tiên của tín đồ Công giáo người Việt”, Tạp chí Nghiên cứu Tôn giáo, no. 4, pp. 65-94, and Vũ Thị Hà (2016), “Những xung đột trong quá trình du nhập Công giáo vào Việt Nam và sự hòa nhập xã hội của người Công giáo”, Tạp chí Khoa học xã hội Miền Trung, no. 6, p. 22-30.

[5] Nguyễn Khánh Diệp (2016), “Vấn đề thờ cúng tổ tiên của tín đồ Công giáo người Việt”, Tạp chí Nghiên cứu Tôn giáo, no. 4, pp. 65-94.

[6] 천주교 전파 과정에서 (전통적인 종교와 이념을 대표하는) 유교도 및 승려, 사제들은 언제나 외국에서 온 천주교 선교사들을 비난했는데, 그 주된 이유가 응우옌 홍(Nguyễn Hồng)의 견해에서는 “비난을 위한 비난”이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참고자료: Nguyễn Hồng (1959), Lịch sử truyền giáo ở Việt Nam, Vol. I, Hiện tại Publishing House, Sài Gòn, p. 130.

[7] Nguyễn Quang Hưng (2007), Công giáo Việt Nam thời kỳ triều Nguyễn (1802-1883), Tôn giáo Publishing House, Hà Nội, p. 139.

[8] 예컨대 1614년, 응우옌 호앙(Nguyễn Hoàng)의 아들인 사이 부엉(Sãi Vương) 은 부조미(Buzomi) 신부를 따뜻하게 맞이했다. Wls(Trịnh) 가문을 물리치기 위해 전투력을 강화하겠다는 일념으로 가득 찬 왕이 종교적 문제는 거의 신경 쓰지 않았기에 선교사들은 자유로이 포교 활동을 할 수 있었고 심지어는 존중받기까지 했다. 당시 왕은 무기, 탄약, 금속제 물품을 위해 포르투갈과 교역을 지속하고자 했고, 선교사들은 이 교역선을 통해 베트남에 왔다(Nguyễn Hồng 1959, Lịch sử truyền giáo ở Việt Nam, pp. 53-54). 1618년, 포르투갈은 왕조와의 관계를 강화하고자 남쪽으로 사절단을 보내며 선교사들에게 포교의 자유를 보장해 줄 것을 요구했다. 왕은 사절단을 환영하며 선교단에 자신의 붉은 인장으로 봉인한 칙령을 내렸는데, 이는 남쪽에서 선교사들의 이동 및 설교의 자유를 보장하며 이를 방해하는 자는 엄벌한다는 내용을 군주들이 보증한 칙령이었다(Nguyễn Hồng 1959, Lịch sử truyền giáo ở Việt Nam, p. 68).

[9] Phạm Huy Thông (2011), Ảnh hưởng qua lại của đạo Công giáo và văn hoá Việt Nam, Tôn giáo Publishing House, Hà Nội, p. 348.

[10]  “빈 따이(Bình Tây)”는 서구 침략자, 특히 당시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자는 뜻이고, “쌋 따(sát Tả)”는 “Tả”교, 즉 천주교를 따르는 이들을 죽이자는 뜻이다.

[11] 학자 트란 트룽 히에우(Trần Trung Hiếu)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반 떤(Văn Thân) 운동은 유교 학자, 특히 학위 및 허가증 소지자들이 주도한 애국주의 운동으로 1864년 북부 및 중부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 시발점은 1864년 북부 및 중부의 간(間) 주(州) 시험의 후보자 수천 명이 참여한 시위로, 응우옌(Nguyễn) 왕조가 제국주의 프랑스에 동부 코친차이나의 세 주(州)와 꼰 론(Côn Lôn)섬을 넘겨주는 내용의 제1차 사이공 조약(1862)에 서명한 데에 대한 반발이었다. 시위자들은 천주교가 외세 침략을 불러왔고 신자들은 이를 도왔다고 여겨 그 죄를 묻고자 했다. 그들은 제국주의 프랑스를 물리치려면 내부의 적, 즉 천주교 신자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Trần Trung Hiếu (2024), “150 năm khởi nghĩa Trần Tấn – Đặng Như Mai (1874 – 2024): “Phen này quyết đánh cả triều lẫn Tây””, Tạp chí Văn hóa Thông tin Nghệ An, vol. 1, pp. 44-49).
트란 반 지아우(Trần Văn Giàu)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1874년 북부 및 중부에서의 운동이 반 떤(Văn Thân) 운동의 애국주의자들에 의해 시작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평범한 천주교 사제 및 신자와 제국주의 프랑스에 부역한 천주교인을 구분하지 못하고 ”천주교인을 죽이자(sát Tả)’를 ‘프랑스를 몰아내자(bình Tây)’의 전제조건으로 삼는 정치적 오판을 내린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Trần Văn Giàu (1973), Sự phát triển của tư tưởng ở Việt Nam, vol. 1, Khoa học xã hội Publishing House, Hà Nội, p. 353).

[12] Đỗ Quang Hưng (2006), “Công giáo và dân tộc ở nước ta trong bối cảnh đất nước quá độ đi lên chủ nghĩa xã hội”, accessed December 1, 2023, https://his.ussh.vnu.edu.vn/vi/news/bui-minh-hanh/cong-giao-va-dan-toc-o-nuoc-ta-trong-boi-canh-dat-nuoc-qua-do-di-len-chu-nghia-xa-hoi-5816.html

[13] 역자 주: 베트남의 “subsidy period” 혹은 “subsidy time”은 베트남 전쟁 이후 1975년부터 1985년까지 대부분의 베트남 국민이 보조금 혹은 배급에 의존했던 시기를 일컫는다. 국민의 70%가 빈곤선 이하의 삶을 산 것으로 추산된다. 출처: https://www.asianstudies.org/publications/eaa/archives/viet-nam-in-the-twenty-first-century-the-unbreakable-bamboo/

[14]  Hội đồng Giám mục Việt Nam (1980), Thư chung năm 1980.

[15] 판시코 끄엉(Phanxicô Cương)이 천주교회에 대한 신념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호앙(Hoàng) 군주에 의해 참수당한 때. 추가 참고자료: Nguyễn Hồng (1959), Sđd, p. 207.

[16] Nguyễn Hồng Dương (1997), Làng Công giáo Lưu Phương (Ninh Bình) từ năm 1829 đến năm 1945, Khoa học xã hội Publishing House, pp. 82-83.

[17] 그는 우리가 (2005년) 첫 현장 조사에서 만난 첫 천주교인이다. 하노이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가문의 종교 활동에 보탬이 되기 위해 수공예 개발에 힘썼다. 훙 씨네 근처에 살았다.

[18] 가문에서 2세대째 조각상을 제작했던 훙 씨 조부로, 근방에서 제일가는 조각가로 여겨졌다.

[19] 조각상의 얼굴과 손은 원래 상아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이후 손 부분이 소실되어 훙 씨가 목재로 보수했다. 전통 공예를 이어가는 세대 간의 연결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20] 고통받거나, 병들거나, 죽어가는 이를 일컫는 말.

[21] 역자 주: 2008년 11월, 타이 하(Thái Hà)에서 천주교 반대파가 성 제라르도 성당 파괴를 시도하는 등의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같은 해 9월 나 쭝(Nhà Chung)에서는 정부가 공원 및 놀이터 등을 짓기 위해 옛 교황청 대사관 철거를 결정한 후, 새벽에 경찰이 대주교의 집 및 성 요셉 성당과 인근 지역을 격리 및 통제하고 외부와의 통신을 차단해 천주교인들이 집단 찬송 및 기도를 하는 일이 발생했다. 출처는 https://www.asianews.it/news-en/Thousands-of-Catholics-bring-solidarity-to-Thai-Ha-13784.htmlhttps://www.vietcatholic.net/News/Html/62766.htm

[22]  Laurel Kendall, Nguyễn Văn Huy, Vũ Thị Hà, Vũ Thị Thanh Tâm, Nguyễn Thị Hiền (2013), “Is it a sin to sell a statue? Catholic Statues and the Traffic in Antiquities in Vietnam”, Museum Anthropology, Vol. 36, No. 1, pp. 66–82. DOI: 10.1111/muan.12005

[23] 타인 호아(Thanh Hoá)주 띤 지아(Tĩnh Gia) 구역 하이 딴(Hải Thanh) 코뮌에 위치한 마을. 1627년 3월 19일 선교사 알렉산드르 드 로드(Alexandre de Rhodes)는 끄어 방(Cửa Bạng, 오늘날 바 랑(Ba Làng))에 당도해 선교 활동을 펼쳤다. 1954년 제네바 협약 이후 바 랑 지역의 천주교 교구민들은 남부로 이주했고, 그 중 다수는 다시 미국으로 이주했다.

[24] 라 방(La Vang)은 꽝 찌(Quảng Trị)성 하이랑(Hải Lăng) 구역에 위치한 곳이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18세기 후반의 베트남 봉건 정부가 천주교를 강하게 억압하던 중, 1798년 해당 지역에서 성모 마리아의 환영이 나타났다고 한다. 라 방의 성모상은 대체로 전통 복장인 아오자이를 입고 아이들 안고 있는 베트남 여성으로 묘사된다. 오늘날 베트남 천주교인들은 라 방을 성지이자 주요 순례지로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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