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전 이후의 선전물들: 이대 시위에서 MC무현, 그리고 성재기까지

탈정치? 미적 정치의 재출현   2016년, 이대 시위라고 이름 붙여진 독특한 정치적 사건이 출현한다. 이 낯선 정치적 사건에선 과거의 시위나 운동을 표상하던 전형적 형식인 민중가요나 저항가가 울려 퍼지는 대신 아이돌 그룹 소녀시대의 대중가요가 불려졌다. 그리고 시위의 주최측은 ‘운동권 총학의 참여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집단 행위가 ‘정치색을 띤 어떤 외부세력과도 무관하다’고 밝혔다. 그들은 이 사건이 흔히 생각하는…

자연의 가상화, 가상의 자연화

자연은 인간 외부의 물질적인 삶의 토대이면서 인간 내부의 본성(nature)을 동시에 가리키는 낱말이다. 자연과 마주한 인간은 자신의 노동력이라는 하나의 자연력으로서 외부의 자연과 내부의 자연을 함께 변형한다. 우선 자연은 인간 외부에서 그 자체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동시에 인간에 의해 역사적으로 구성된다. 레닌은 자신의 저서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당대의 철학적 유물론이 우리의 의식 밖에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라는 그런 물질의 유일한…

보이스 볼텍스 Voice Vortex : 영화 <그녀>와 <아노말리사> 속 목소리의 풍경

발성 영화에는 위압적이고 모두 볼 수 있는 명령권자인 음성 존재들 옆에,완전한 지(知)와 시각이 부여받지 못한 의심하고 있는또 다른 종류의 음성 존재들이 언제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미셸 시옹 『영화의 목소리』 0.   내 나이 스물하고도 세 살 무렵, 조금은 특별한 이유로 이비인후과에 간 적이 있다. 통상적인 진료를 목적으로 병원을 찾은 것이 아니라 목소리 교정을…

폭★8의 시학, 심영물

  심영물만큼 오랜 수명을 지닌 밈은 없을 것이다. 2000년대 초중반에 생겨나 이제는 밈의 대명사라고 불릴 정도니까. 심영물은 〈야인시대〉의 64화 속 고자라고 진단을 받은 심영이 내가 고자라니!라고 외치는 장면을 절취한 것이다. DC합필갤에서 시작한 이 밈은 그때 유행했던 싱하형, 빠삐놈 등 당시 여러 밈들과는 다르게 혼자 생존해 유튜브에 살아남아 있다. 심영이 밈으로 처음 쓰일 때는 “내가 고자라니”라고…

다크 큐레이션: 작품 개념의 위반

포지티브&네거티브 큐레이션   전시 일반을 통해 구축되는 갤러리 공간은 어떤 방식으로 침범되고, 점령되며, 분할되고, 표명되고 있는가? 그것의 시초적인 중립성과 임의성은 큐레이터와 작가들의 어떤 실천을 통해서 변용되고 재조직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수의 전시들이 갤러리 내부에서 암묵적으로 지켜왔던 불문율은 무엇이었는가.   일반적으로 봤을 때, 출품된 작품들이 설치되는 순간은 하나의 비어있던 캔버스가 채워지는 과정과 유사하다. 작가의 스트로크를 통해 점차로…

지금 여전히 귀귀의 만화를 본다는 것은

00.   웹툰 작가 귀귀는 흔히 병맛 만화의 대부로 여겨지곤 한다. 그의 초기 만화인 ‘정열맨’과 ‘열혈 초등학교’에서 두드러졌던 특유의 미학은 당시 한창 유행하고 있던 ‘병맛’의 문화를 관통하는 듯 보였다. 한편으로 그는 굉장히 문제적인 작가로 또한 알려져 있다. 이는 그의 만화가 병맛으로 알려져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굉장히 이질적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병맛’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대상에…

모든 초고는 방언이다 The first draft of anything is vernacular

  나는 창작자다. 사후에 무언가를 논평하기보다는 먼저 나서서 일을 벌이는 것을 선호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처럼 미술 비평 웹진에서 원고요청이 들어왔으니, 미술계의 글쓰기 행태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다소 인상에 근거한 직관적인 의견들처럼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파편적인 인상도 오랜 시간 중첩되면 풍경이 되는 법이다. 그리고 그런 완고한 풍경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도구는…

예술분야에서의 필드워크

개요   예술 분야에서 리서치와 필드워크라는 것은, 기존에 고증이라는, 즉 보다 “정확한” 재현을 담보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미명 하에 행해지던 수단적 성격을 뛰어넘어, 오늘날에는 창작의 핵심적 과정으로 자리 잡았다.[1] 어떻게 보면 이것은 95년에 인류학 선집 The Traffic in Culture의 지면에서 처음 등장한 글 「민족지학자로서의 예술가?」에서 미술사학자 할 포스터가 전반적으로 회의적인 눈으로 바라봤던 예술계 내 동향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라고…

<오징어 게임>: 게임의 수용소에 갇힌 시민들과 밈적 이미지의 존재론에 대하여

  <오징어 게임>을 부정적으로 보는 평자들은 보통 작품의 선정적 수위, 빈곤층에 대한 묘사, 그 외에도 개별적인 배역에 대한 묘사의 적절성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한 지적들은 모두 나름의 타당성을 지니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드라마의 더 본질적인 측면을 간과할 수밖에 없다는 인상을 준다. 여기서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앞서 언급한 평자들의 비판에 대해 지금까지 제출된 반론들을 떠올려보도록…

‘체계의 완성자’ 헤겔?

  헤겔은 많은 경우 ‘독일 관념론 체계를 완성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알려져 있는 것과는 달리 그는 그 자신의 체계도 완성하지 못했다. 사실, 그가 출간한 저작은 <정신현상학>, <논리의 학문>, <백과전서>, 그리고 <법철학 강요>, 이렇게 넷뿐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중에서 ‘학문적 엄밀성’을 갖추어 상술한 저작은 오직 <논리의 학문>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가?   <정신현상학>은 앎(Wissen; knowledge)을 확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