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가 과잉될수록 권력은 짙어진다: 송예환 작가의 작품을 중심으로

  바야흐로 웹의 시대다.  눈 뜨자마자 찾게 되는 스마트폰 속 어플리케이션도 웹, 출근해서 마주하는 프로그램도 웹. 가볍게 일상 대화를 나누는 채팅부터 정보를 검색하는 사이트까지. 모든 온라인 행위에 웹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없다.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을 창시한 팀 버너스 리(Tim Berners-Lee) 또한 웹을 만들 당시 이 정도의 영향력을 갖게 될지 몰랐다고 언급하는 것만 보아도…

2024년에 영혼을 개조하라: 문화대혁명의 영화 상영에서 칸예 웨스트의 리스닝 파티까지

칸예 웨스트의 리스닝 파티는 영화 매체의 본질적인 특성, 그것이 다양한 객체들에 의해 건축되는 체험이라는 점을 명료히 보여준다. 신중국의 전영단이 마오의 신체 혹은 사회주의 이념을 스크린을 비롯해 야외 상영이 펼쳐지는 편벽하고 가난한 마을, 결정적으로 인민의 시선에 의해 구현된다는 점을 이미 증명했듯 말이다. 제임스 터렐이 만든 로덴 분화구는 칸예 웨스트가 공연하는 무대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곳은 아이맥스 영화를 위한 세트장이면서 또한 터렐 개인의 작품으로 인준받는다. 이처럼 칸예 웨스트는 포스트 시네마의 영상이 언제나 수십 겹의 의미를 휘두르고 있다는 사실에 집중한다. 그의 리스닝 파티는 앞서 말한 벤야민의 아우라 개념을 완벽히 되살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신중국의 전영단이 아우라 개념을 국가-미디어-인민 삼항 관계에서 완전히 다른 종류의 감각으로 전환시켰듯 칸예의 리스닝파티 역시 우리가 종교라 부르는 것, 혹은 영화라 부르는 것, 예술이라 부르는 것의 혼종 상태를 아우라를 산출하면서 구현한다. 신중국이 마오가 절대자의 신체를 형상화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말했다. 이 신체는 묘사될 수 없는 종류의 절대이면서, 항상 복제되어 상연되는 무대였다면, 리스닝 파티 속의 칸예 웨스트는 일종의 창문이다. 스트린베리가 ‘별은 하늘에 난 구멍’이라고 인식했듯, 잡다한 사물들과 인간의 협연으로 이뤄진 리스닝 파티 속의 칸예 웨스트는 모든 시청자의 시선을 이끄는 구멍이다. 이때, 포스트-시네마적 환경에서 아우라의 개념이 재정의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문둥병을 낫게 하는 위대한 왕의 손, 어딘가에 숨어있는 머리 잘린 불상과는 달리, 지극히 비환원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은총’이자 ‘카리스마’다. 이는 언제나 칸예 웨스트의 맥시멀리즘적인 편곡이 그러하듯, 복잡성을 요한다. 혹은 지저스 이즈 킹에서 그러하듯 수많은 코러스들이 몸을 섞는 반향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다. 칸예 웨스트의 아우라는 마오쩌둥이 이미지로 재현되며, 그 절대성을 잃어버렸듯, 다양한 미디어에서 편재된다. 이는 종교적인 것이 오늘날 취한 진정한 문제, 절대적인 것의 상실을 뜻한다.

건축적, 표면으로서 무빙 이미지

이제 이미지들은 유토피아를 창출하고자 하는 목표를 갖지 않는다.– 데이비드 조슬릿 [비디오] 프로젝션을 수용하자 이미지와 관람객과 주위 구조물(architecture) 간의 관계가 급격하게 달라졌다.– 에리카 발솜[1]     백남준아트센터는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생중계 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의 4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에서 백남준의 1977년 텔레비전 작업 <과달카날 레퀴엠 Guadalcanal Requiem>(1979년 재편집)을 영사(projection)했다. 관람 동선상 첫 작품으로, 적어도 그렇게 의도한 것으로…

정여름론: 역사의 탐정이 되는 법

수사착수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2020년 모두가 방 안에서 움츠러들 때, 작가 정여름은 게임 <포켓몬 고>로 역사를 탐구하는 흥미로운 방법을 제시했다. 어느 날 공동작업을 하던 피디가 우연히 용산 미군 기지 안에서 평화의 요새(Fortress of Peace)가 포켓몬 고의 평화의 포트리 마을(Fortree of Peace)로 표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현실의 미군 기지는 허가받은 자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반면,…

작가-렌즈-세계의 상리공생 : 송세진 영상작업에서의 물질성과 몸

0   이미지는 유리를 경유한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기록된 이미지는 영사기 렌즈를 통해 보는 이에게 전달된다. 이미지의 형성 과정에서 유리는 빛의 굴절과 투과를 통해 정확한 시각적 경험을 가능하게 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물리적 세계를 시각적으로 재현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환영(Illusion) 속에서 관객은 각자 만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을 경험하고 감각한다. 인간은 단순한…

아버지의 축복[1]- <피규어 오브 패밀리(Figure of Family)>(2023)에 대한 고찰

  부모를 거부할 때 나는 무엇을 잃는가? 나는 존재 전체를 잃는다. 부모를 통해서 오는 삶의 축복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2] 그래서 고통스럽다.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계속되고,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신을 망가뜨리게 된다. 나는 바로 서지 못한다. 가족을 바로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가족 관계의 장(場)에서 누군가 배제되면, 나머지 가족 모두가 그 빈자리 때문에 고통받는다. 부재하는…

양지훈: 적정 노출의 감도

“민중들이 노출된(exposés)다.”[1]   조르주 디디-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은 민중의 노출이 과잉과 축소라는 역설적 상황에 놓여 있음을 짚으며 『민중들의 이미지』의 서문을 열었다. 스펙터클 제조기로 기능하는 현대 미디어와 매년 쏟아져 나오는 다큐멘터리에서 드러나듯이, 민중의 형상은 숱한 이미지를 통해 재현되어 왔다. 당연하겠지만, 여기에서 그들이 노출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평범한 소시민들이 가시화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때 비-민중이라고 여겨질 만한 이들은 마침내 민중의 존재를…

머피염의 브리콜라주: 설치 vs. 연극 vs. 영화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의 다이앤 쿠투(Diane L. Coutu) 편집장은 ‘역경에 부딪혀도 극복하고 일어나는 힘’, 즉 복원력의 비밀을 세 가지에서 찾았다. 첫째, 냉정한 현실 직시, 둘째, 의미 창출, 셋째, 브리콜라주(Bricolage)[1]이다. 이 중에서 적절한 도구나 재료 없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즉석에서 고안하는 능력을 일컫는 ‘브리콜라주(Bricolage)’는 어원상으로도 복원력과 연관된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반등한다’라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

증언하는 이미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상작업을 중심으로(상)

  1. 들어가며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데 실패한다고 롤랑 바르트는 말하였다. 왜냐하면 한 대상에 대해서 펼쳐지는 의미란 텍스트의 몽타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텍스트에 기록된 의미 속에서 이 세계의 이야기를 추적하기 보다는 오히려 이미지 속에서 은폐되어 있던 것을 복원시키는 과정 중에서 잠재적인 영화 이미지의 의미는 비로소 매순간 새롭게 재생산 될 것이다….

증언하는 이미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상작업을 중심으로(하)

4. 증언하는 이미지: 영화 <메모리아 Memoria>(2021)[1]를 중심으로   앞선 두 작품과 다르게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비교적 최근작품인 영화 <메모리아>(2021)는 랑시에르의 표현처럼 시청각 이미지의 재분배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조작(operation)에 가까운 작품이다. 영화는 인접예술과 매체들의 혼종적 결합을 통해서 지금도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 기존의 장르영화나 흥행작들과 달리 아피찻퐁 감독의 깊은 사유 속에서 만들어진 영상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속성은 영화라는 매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