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와) 함께/안에서/반하여 (with/within/against) – 엘시&마셜: 피드백 #7

    페미니즘이란 개념이 등장하기 이전의 시대를 살았던 엘시 맥루한(1889-1961)은 일로쿠셔니스트이자 웅변술가였다. 그녀는 여성들에게 주어진 전통적 역할인 양육과 가사노동을 거부하고, 가정부를 고용한 뒤 공연 투어를 떠났다. 남겨진 아들과는 편지를 통해 지적 교류를 이어갔다. 그 아들은  “미디어는 메시지다” 의 태제로 잘 알려진 미디어 이론가 마셜 맥루한이다. 어머니 엘시의 공연술과 체현적 지식은 마셜로 하여금 미디어(몸,목소리)와 메시지(의미)를 분리해 사고하는 방식을…

동시대 한국 조각에서 매체의 문제: 현남과 최태훈의 플라스틱 조각을 중심으로

혹자가 “파우스트적인 재료”라 부르기도 했던 플라스틱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적인 함축을 동시에 지니는 현대성의 집약체이다. 플라스틱은 20세기 발명과 합성의 상징체로, 기술 발달을 통한 인류의 진보를 꿈꾸며 인간의 상상과 창조의 자유를 주장했던 근대정신의 산물이다. 플라스틱의 개발과 확산이 가져온 물질적 유토피아는, 오래도록 인간 활동에 한계를 지우던 물질 특성상/공급상의 제약을 풀어주며 물질적, 문화적 민주주의를 낳고 사회계층 간의 경계를 허물었다. 여러 천연재료의 특성을 모방하거나 보완할 수 있으며, 실크, 상아, 모피 등 희귀하고 값비싼 재료로 만들었던 물건들을 값싸게 대량생산할 수 있게 되어 인류에 전례 없는 풍요가 찾아왔다. 제조 과정에서 인간은 신에 버금가는 창조력을 가지며 물질을 연금술적으로 변화시켰고 빠른 생산과 소비주기는 모더니티가 지향한 속도와 운동감에 대한 감각과 맞닿아 있다.

<진단과 절망: 미술계의 ‘불독화’ 현상과 ‘차축붕괴’ 이후의 방향상실>

  #1. “어린 양이 제7의 봉인을 뜯었을 때, 하늘은 반시간 정도 침묵했다.”[1] (계 8:1)   #2. “우리들이 알고 있는 5천 년간의 인류 역사는 그보다 수백 배나 긴 선사시대와 어떠한 측정으로도 불가능한 미래 사이에 놓여 있다. 지상에 인류가 생존한 이후 그러한 역사란 장구한 시간에 비하여 보면 지극히 짧은 시간에 불과하다. 역사는 선행하는 세계에 대하여 개방되어 있고…

<메이드 인 경상도> 띄엄띄엄 관찰기

  깔끼..? 피식대학의 《메이드 인 경상도》(이하 《경상도》)를 처음 봤을 때 경상도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하다. 경상도 사투리 아닌 것 같다, 혹은 재미없다. 그도 그럴 것이 경상도 사람들에게 짭투리는 그렇게 새로운 주제가 아니다. 오히려 새롭고 신선한 것은 제대로 된 사투리인데, 최근 조국이 부산을 찾아 “고마 치아라 마”를 시전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거센 파도”를 일으킨 것을…

《Cryptopatriology: 환상종아버지학》 개론: 패륜의 윤리- 장벽을 허무는 장치로서의 ‘패드립’을 위하여

  극우로 유명한 일본의 만화가 쿠메타 코지는 그의 만화 <안녕 절망선생> 157화에서 “실제로 이웃나라에는 사람을 매도하는 말이 일본어의 몇 배나 있기 때문에, 마치 인사하듯 매도하니까 일일이 신경을 쓰면 끝도 없다고 하네요.”라고 말했다. 그의 만화가 가진 극우적 성격을 비판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대부분의 한국어 화자는 쿠메타 코지의 이 발언만큼은 쉽게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설령 본인은 비속어를…

강철 대오 – 오민수의 설치

마지막 파업 때 끝까지 싸운 이는노조 간부가 아니라 연극반원이었다네요―심보선, 「예술가들」(2017) 1.   때로는 가장 구태스러운 질문이 가장 전위적인 예술을 만들어낸다. 오민수의 예술이 그렇게 만들어진다고 느꼈다. 우리에게 그의 설치는 넓은 의미의 ‘참여’에 대한 투철한 인식과 옹호처럼 보인다. 화염병은 예술이 될 수 있지만, 예술은 화염병이 될 수 없다. 둘 사이의 긴장을 포기하면 예술은 사라지고 만다. 이 자명한…

오독, 사랑, 목구멍을 넘어가는 인용부호들: 김재원의 작업과 함께

“정말 하고 싶은 말을 못 하게 될 때, 그 말들을 아랫입술과 이빨 사이에 보관해 놓았던 것 같다. 이 느낌은 진짜 친한 가까운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을 못 할 때 느껴졌다.”[1]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 하지만 ‘나’는 십여 년 전에 일기장 종이에 눌러쓴 이 구절을 피해 갈 방법을 찾지 못했다.[2] 매번 김재원 작가의 작업을 눈앞에…

강은희 작가론 : 기술혁신 속에서

  2019년 겨울부터 사회를 위축하게 만든 코로나19(SARS-CoV-2)의 흔적은 이제 몇몇 기관과 기업에 정착된 재택근무 정도뿐인 것 같다. 아직 절멸하지는 않았지만, 2024년 5월 한국 정부는 중앙방역대책본부를 해제하여 사회가 엔데믹을 맞이하고 있음을 밝혔다. 21세기에 들어 의학 기술과 보건의료 체계가 발전을 거듭하고 있지만, 바이러스 역시 정체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새로운 사회는 새로이 대두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분주하다. 2020년대…

포스트/영화적인, 포스트/주체적인

시네마틱 vs. 시네마토그라픽   《서머스페이스 (Summerspace)》는 효과로서의 시네마틱과 기술적인 체계를 강조한 시네마토그라픽이라는 두 가지 단어를 함께 적용해 볼 수 있는 전시이다. 하나는 직역하면 ‘영화 기술적’이라고 불릴 수 있는 ‘시네마토그라픽(Cinematographic)’이 있고 다른 하나는 ‘시네마틱(Cinematic)’이 있다. ‘시네마토그라픽’이 사진을 이어 붙여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협의의 영화적인 효과를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된 단어라면, ‘시네마틱’은 활동사진의 원리를 언급하지 않아도 되는 영화적이거나 극적인…

로컬리티-모빌리티: 시간의 주름을 통과하는 이미지

1. 들어가며   시작하기에 앞서 이 글에서 ‘로컬리티’는 탈-중심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으며, 종종 각별한 이미지 속에서는 로컬리티라는 개념이 탈-중심과 동의어에 가깝게 혼용되었음을 밝혀두고자 한다. 제목으로 사용된 로컬리티라는 단어의 쓰임 속에서 이미 탈-중심이 내포되었음은 물론이고 오민욱 감독(b.1985)[1]의 영상작업 속에서 지역의 역사와 서사는 흘러가는 풍경이미지를 통해 증언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감독은 우리의 근현대사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