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을 보이는 「풍요」의 장치

문화란 우리를 싸고 있는 일상성이다. 거주, 식생활, 교통, 소통 매개, 그 매개를 움직이는 문화적 코드까지 모든 것이 일상이자 세계이다. 그런 면에서 상품의 속성들은 이 시대 문화를 노골적이고 가감 없이 보여준다. 우리는 그 속에 그것들을 이용하면서 산다. 말하자면 예술가는 감각적이거나 개념적인 세계와 맺는 관계를 그의 삶의 맥락 속에서 지속 가능한 세계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현재가 제공하는 환경에 거주한다. 그의 작업의 매개인 상품들, 오브제들은 세내어 쓰는 일시적인 사용체일 뿐이다. “예술가는 문화에 세 들어 사는 사람”[4]인 셈이다.

안락사 가위바위보

안락사 가위바위보

“이제 저 좀 죽여달라”고 사정하던 99세의 노인이 어느 날 새벽 수액줄에 목을 감아 자사自死했다. 와락 다가온 사건이었다. 마치 나 홀로 양 손으로 가위바위보를 하듯, 다음처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명이라는 추상은 절대적으로 옹호되어야 할 영역인가? 죽음을 삶의 일부로 통합하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대상으로 간주할 수 있나? 질병과 고통을 이유로 안락사를 택하는 것은 목욕물과 함께 아이를 버리는 격으로 생명을 제거해버리는 우를 범하는 걸까? 질병과 고통마저 남김없이 살아내는, 생의 남은 한 방울까지 짜먹는 일은 삶의 풍부함을 누리는 행위인가? 안락사는 운명의 자기결정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정해진 운명을 앞당기는 행위일 뿐인가? 안락사의 요청은 자기 삶으로부터의 무책임한 도피인가? 아니면 자기책임의 윤리 안에서 가능한 시나리오인가?

따로국밥 상호작용 ‘우리가 남이가’

최근 문화공동체 □□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단체와 업무적으로 엮이는 일이 있었다. 그들의 독자적인 운영 방식을 보고 있자니 ‘공동체’를 어찌 이리도 당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문화예술 속 세계는 늘 그들만의 리그로 존재하는 것 같다. 일부 지식인으로 치부되는 이들의 보수성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어 새로운 목소리나 창의적인 시도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기존의 틀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크다. 일부 단체는 권력 남용을 통한 갑질을 일삼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정말로 ‘공동체’라는 이름에 걸맞은 가치를 실현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겉으로는 잘 포장된 속 빈 강정 같다. 공정한 예술 환경 조성이 그리 힘든 일일까? 그들의 무례함에 여러 번 따져 물어봐도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직도 순진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이런 단체가 한 지역을 대표하는 영향력 있는 활동가들의 모임이라는 사실이 참 씁쓸하다.

연어로서 예술가 – 근원으로 가는 세 가지 관문에 관하여

미술과 시대의 변화를 거센 물살에 비유한다면, 비평가는 맨 앞에서 파도 타는 사람인가, 아니면 맨 뒤에서 첨벙대며 따라오는 사람인가? 광풍을 맞으며 돛대 끝에 매달려 있는 사람인가? 혹시 그는 등대지기인가? 아니면 해변에서 관망하는 사람인가? 무엇이 됐든 유행의 최첨단에 서야 한다는 의무감, 그렇지 않으면 도태될 거라는 두려움. 동시대 미술비평가 중에 이런 군더더기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것을 압박감이라 부르든 은밀한 욕망이라 부르든 말이다. 미술과 세계에 대해 한마디 보태려는 사람은, 제일 먼저 인정 욕구라는 강력한 장애물이 자기 안에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남 이야기가 아니고 내 이야기다.

나락도 락이다! – 캔슬 컬처와 캔슬 할 수 없는 존재들

인터넷 방송 문화에서 인기 방송인의 몰락을 이르던 용어인 ‘나락’이 이제 와 확장된 의미를 가지게 된 일이 내겐 신기하게 느껴진다. 본래도 ‘나락(奈落)’은 ‘밑이 없는 구멍’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어원처럼 탈출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를 이를 때 종종 사용되곤 했으나, ‘나락도 락이다’ 밈과 피식대학의 유튜브 콘텐츠 <나락퀴즈쇼>의 성공을 계기로 인터넷 하위문화에서 사용하는 ‘나락’의 의미와 수평적으로 연결된 것 같다. ‘음지’ 문화의 상징과도 같은 만화가 겸 유튜버 카광의 콘텐츠 <나락의 삶>은 서로 인접해 있는 나락의 두 의미를 시사교양 다큐멘터리의 문법 위에서 매끈하게 통합해 낸 사례인데, <나락의 삶>이 종합하고 있는 ‘나락’의 기호 체계는 음지 문화에서 십수 년간 축적된 밈 이미지들이 질서 없이 뒤섞인 혼성모방을 통해 성립한다. 이 과정에서 나락의 주변적 의미들이 지시하던 여러 수렁과 실패, 좌절들은 나락의 강렬한 이미지와 단어 자체의 말맛으로 인해 휘발되고 인터넷 밈의 지위를 획득했다.[1]

투사를 위한 문학-팔레스타인 시론: 사랑으로 저항하기

팔레스타인 문학의 푼크툼   문학이란 무엇인가? 그 질문은 곧 문학의 역사를 되묻는 질문이기도 하고, 대문호들이나 빼어난 문학자들의 존재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내게 문학은 글로 쓰는 찌르는 행위이다. 찔리면 아프다. 현실에서 찔리면 피를 흘리지만, 문학의 상상계에서 찔리면 눈물을, 좀 더 깊은 층위에서 찔리면 검은 담즙을 흘린다. 문학 용어를 빌리면 멜랑꼴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좋은…

최근 팔레스타인 저항과 중동의 역학 관계

001. 2021년 5월 11일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로켓을 쏘자 세계 주류 언론들은 일제히 ‘하마스 대 이스라엘의 폭력’이라고 보도했다. 둘 사이의 폭력에 무고한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사람들만 희생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팔레스타인 문제의 본질을 포착하지 못하는 접근법이다. 002. 이 글에서는 최근 이스라엘이 벌인 팔레스타인 공격의 직접적인 배경을 간단히 짚은 후, 더 근본적인 문제인 중동 지역에서의 제국주의 이해관계와 갈등에 관해 살펴보고,…

연속혁명은 무엇이고 어떻게 팔레스타인 해방 문제에 적용되는가

  먼저 ‘연속혁명론’의 말뜻부터 살펴보자. 연속혁명론은 연속혁명 이론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연속혁명은 이론이 아니라 전략이다. 이론은 법칙과 원리ᆞ원칙의 체계다. 반면 전략은 계획, 기본 계획이다. 러시아 혁명 이래로 연속혁명이 일어난 적이 없다. 혁명이 연속되지 않고 중간에 멈췄다. 연속혁명이 ‘이론’이라면 그러지 않았어야 한다. 그러나 연속혁명은 ‘전략’인데 아무도 그런 전략을 세우지 않았거나, 그런 전략을 세운 세력이 너무 미약했기에 실행되지 못했다. 그래서…

셰헤라자데의 시네마: 천세 번째 이야기

무리수보가 큰 실수의 수행성에 관한 유연한 설화(괄호 안의 글은 독백으로) 머리말   이 이야기는 우연한 실화로부터 출발한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171쪽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조천지서는 약 한 달 전인 3월 6일 고문치사 사건이 벌어지는 바람에 경찰관 대부분이 교체돼 상대적으로 방어하기에 불리한 상태였지만, 4월 3일 새벽 무장대의 공격을 받았을 때 한 사람도 피해를 보지 않았다. 이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