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왕: 지방 미술대생 수기, 당사자라서 반박 안 받음

지방 미술대학 생활에 관한 짧은 수기   2012년 지방 미대의 디자인학과에 입학했다. 첫 1학년 동안은 그냥 재미가 있었다. 노는 것도 노는 것이지만, 대부분의 과제가 ‘잘’ 그리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림을 ‘잘’ 그리는 것과 미술에 대한 이해를 성숙시키는 일은 아주 다른 것이다. 당시 내가 미술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냐면, 학교에서 광주비엔날레를 데려갔었는데 아주 빠른 걸음으로 전시를 훑고,…

디자인 비엔날레의 무게

  ‘미술 전시’가 그러하듯, 근래 빈번해진 ‘디자인 전시’ 역시 종류가 다양하다. 아마도 이를 세 종류로 대별할 수 있을 듯하다. 하나는 자본주의 상품 시장에서 유통 중이거나 유통하려는 각종 디자인 결과물을 소개하는 데 치중하는 전시로, 대체로 ‘페어’ 혹은 ‘박람회’라는 이름이 붙는 유형이다. 두 번째는 어느 정도 시차를 가진 인물이나 사건에 주목하는 전시로, 보통 광범한 자료에 기반하며 종종 ‘아카이브’라는 수식어가 붙는 부류다. 세 번째는 디자인을…

돈 내고 모이는 시대 : 스터디 모임의 상품화 현상에 대하여

  취향 공동체. 이는 아마도 오늘날 2030 세대의 여가 생활을 설명하기 위해 가장 흔히 사용되는 단어일 것이다.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들이 커뮤니티를 이루고 정기적으로 모이는 이러한 현상을 두고 혹자는 ‘소셜링 문화’라고 이름 붙이기도 하고,[1] 혹자는 사라진 ‘마을 공동체’에 대한 대안으로 삼기도 한다.[2] 이러한 문화적 현상에 대하여 학계에서도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본 고에서는 취향 공동체가…

만보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가 안 되지만,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가 된다.– 찰스 대너 뉴스를 찍어내서 소동을 일으키는 것이 신문의 의무다.– 시카고 타임즈   이것은 만보. 쉴 새 없이 치달리는 속보의 세계에서 후발선제의 묘리가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한 느릿한 송출이다. 나로 말하자면 <뉴스페이퍼>의 비공식 리포터이자, 합의되지 않은 54번째 참여자 되시겠다. 뉴스페이퍼 ISSUE NO.3는 각 필자들에게 ‘신세계’라는 단어만을…

그 마왕은 누가 쓰러뜨렸을까?: 비디오 게임에서의 플레이어와 루두스 장치

  <드래곤 퀘스트 11>의 한 전투는 이렇게 진행된다. 주인공 ‘용사’는 6개의 오브를 모아 용사의 검을 부활시킨다. 이때 그들의 뒤를 추격해온 마왕 우르노가의 부하 호메로스가 용사 일행을 습격한다. 이어지는 전투 시퀀스에서 호메로스는 ‘어둠의 오라’를 두르고 무적 상태가 된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호메로스를 결코 쓰러뜨릴 수 없다. 이러한 게임 문법에 익숙한 플레이어 대부분은 그냥 패배를 하나의 서사로 받아들이고…

가장 동시대적 지역성으로서의 초지역: 어느 지리학자의 그림

* 이 원고는 문헌조사 및 사례취재를 바탕으로 작성한 내용에 허구적 상황을 가미한 사실적 픽션임을 밝힙니다. * 들어가며 *   안녕하십니까. 지리산대학교 지리학과 이지오입니다. 이런 자리가 처음이라 긴장되네요. 폭설로 교통이 불편한데도 이렇게 많은 분들이 와 주셔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오늘 이 대회에서 제가 발표할 주제는 ‘초지역적 거주의 발생 배경과 양상, 그리고 그에 따른 공간전략’입니다. 초지역,…

친애하는 우리에게

  서간체로 글을 씁니다. 저는 종종 비공개 블로그에 일기를 쓸 때도 서간체로 쓰곤 합니다. 그러면 일기가 연애편지처럼 쓰입니다. 사생활을 나열한 계정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자가 아니라면 그 글을 읽을 수 없을 텐데도, 저는 답장을 기다립니다. 손쓸 수 없을 만큼 고약한 심보입니다. 하지만 이번만은 정당한 심보라고 합시다. 지역성은 상호 호명과 무관하지 않으니까요. 창작자로서 지역을 호명하고, 호명을…

규범 사이를 미끄러지는 변명들: 고요손 개인전 《섬세하게 쌓고 정성스레 부수는 6가지 방법》에 부쳐

  근래 부쩍 늘어난 식음료 브랜드와 미술의 협업을 보면 이는 정체된 동시대 미술에 있어 매우 쉽고 간편한 그리고 매력적인 대안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매체 이후를 상상하는 전략은 매체의 질적 완성 이후에 와야 할 터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양상은 손쉬운 도피로 그치는 탓이다. 이것은 낯선 영역에 대한 시도를, 확장이란 미명 하에 쉬이 긍정해버리는 미술 비평의 나태에…

아카이브라는 에코챔버를 부수고 싶다는 미스테리한 욕망: 최근 관람한 두 개의 전시를 경유하면서

0. 어떤 의심   작가가 그린 그림은 어떻게 어느 한 시절의 특정한 풍경으로 독해될 수 있는 것일까? 그 시절의 풍경을 기억하는 사람이 봤을 때, 그 그림이 실제로 꽤 닮았기에? 아니면 작품의 제목이며, 작품의 제작연도와 지역에서 오래 활동한 작가의 이력이 근거로 작동하기에? 하지만 이걸로 정말 충분한가? 이것은 어째서 자연스러운 것이 되는가? 작품에 대한 인식과 그 조건에…

성병의 재구성

  수전 손택은 질병에 대한 환상이 질병으로부터 파생된 것으로 이해하고 의미를 빼앗으려 했지만, 근래의 풍경은 “질병은 질병이며, 치료해야 할 그 무엇일 뿐이다”라는 그녀의 공식을 무심하게 건너뛴다. 감염성 질환은 신체 간의 물질적 교환이나 그녀가 반대했던 질병-의미의 사슬에 그치지 않고 공동체 전체에 증상을 지핀다.(식별불능에서 비롯되는 공포, 일상의 상실에 대한 불안, 사회적 분위기의 극단적 침체) 그녀의 시도는 애초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