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인도네시아의 리얼리즘 운동, 혹은 아시아의 가능성: 수조요노(S. Soedjojono)의 작업 세계에 대한 간략한 일별」

  아시아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본, 인도, 중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등으로 나열될 수 있는 영토의 집합인가, 동북반구에 위치한 대륙인가, 유럽과 아메리카의 반대 항에 놓이는 위상학적 공간인가? 혹은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를 비롯한 제3세계의 기획들에서 보이는 일종의 유토피아적 장소인가?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제안이 가능하겠지만, 근본적인 의미에서 아시아적인 것이란 결국 공허한 보편 속에서 특수자의 자리를 찾는 기획과 관련되지…

목계지덕木鷄之德의 조증

  장자 외편外篇 달생達生에 목계지덕木鷄之德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닭 싸움을 좋아하던 왕이 ‘기성자紀渻子’라는 사람에게 맡겨서 최강의 투계鬪鷄로 기르도록 명하였고, 열흘이 지나서 물었다.“닭이 이제 싸울 만한가?”“아직 안 되었습니다. 지금은 쓸데없이 허세를 부리고 자기 힘만 믿습니다.”다시 열흘이 지나 왕이 물었다.기성자가 대답했다.“아직 안 되었습니다. 다른 닭의 소리와 그림자만 보아도 쉽게 반응하고 덤벼듭니다.”또다시 열흘이 지나 왕이 물었다.기성자가 대답했다.“아직 안 되었습니다. 간신히 참기는…

미술비평은 왜 실종됐을까?

  다 아는 이야기를 해보자. 여기에 전업 미술비평가가 있다. 이 사람은 어떻게 해서 먹고살까? 운 좋으면 대학 강의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교수도 아니고 강사법이 개정된 이후 계속 주어지던 강의도 이제 하나만 남았다—달랑달랑한다. 간간이 미술잡지란 곳에서 원고 청탁이 오는데 그런 곳의 원고료라고 해봤자 뻔할 뻔자다. 미술 매체에서 들어오는 청탁은 대다수 값싼 원고료에 짧은 지면이 주어진다. 비평계의…

I’m So Sorry But I Love You

*이 글은 영화 <소년시절의 너>의 강한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극장에서 영화 <소년시절의 너>를 보던 중이었다.   뜬금없이 빅뱅의 <거짓말> 뮤직비디오가[1] 떠올랐다.   <거짓말> 뮤직비디오는 그야말로 한 편의 영화 같다. 이 작품은 주인공(권지용)이 도망치다가 어느 여자와 전화를 한 뒤 체포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후 여자가 일상적인 일을 하는 중간중간 흑백 장면이 교차되며 사건의 내막이 드러난다. 여자는 어떤 남자의 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반격하다가 그를 죽이고…

집단 자살을 소망해도 될까요?

* 본 글에는 독자에 따라 불쾌감을 유발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쿠에타핀, 카바마제핀, 리튬, 모든 벤조디아제핀과 비벤조디아제핀계 약물에 영광과 축복 있으라. 부모는 솜씨가 서툴러 손상된 인간을 낳았고 약물이 나를 손보고 있습니다. 반 쪽짜리 인간의 우화를 악착같이 파고들었던 때가 있다. 반편이는 나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을 주는 불충분한 얘기들. 넉살 좋게 존재론을 주워섬기는 종자들은 제발…

예술을 먹고 기도하라, 때늦은 보수적-낭만적 편지로서 비평

  매우 고통스러운 꿈을 떠올려보자. 나는 출구가 없는 곳에서 뛰고, 또 뛰다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휘말려 끊임없이 가라앉는다. 그 꿈이란 우리 삶에서 우리를 추락시키는 일련의 사건 속에 틀어박혀 있는 것에 가깝다. 그러한 문제적인 삶이란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로 빼곡한 악몽이다. 검은 개들은 꼬리를 흔들며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우울은 퇴치되지 않는다. 온갖 증오 어린 말들이 나를 가격하고,…

여성이라는 난제 : 얄팍한 성기를 넘어선 범주를 상상하기

  지난 6월 3일에서 13일까지의 아주 짧은 기간, 김현주의 <프레임>이라는 전시는 여성과 사회인으로서 느낀 곤란을 점묘 드로잉을 통해 그려내고 있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한 작업 당 6개월에서 2년까지도 소요되는 각고의 소산이다.)   나는 마침 더현대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앤디워홀의 전시를 보고 났던 터라 당혹감이 꽤나 컸는데, 작가의 노력이 주류 미술사가 일궈온 개념들에 관한 개인적 반발처럼 보였기…

동료 선후배 문인 여러분께

  비평웹진 ⟪퐁⟫은 기본적으로 시각예술을 다루는 웹 저널입니다.  그러나 최근 문예계의 소설가 이기호가 제기한 <대한민국예술원법> 문제는 문인, 영화인, 미술인을 막론하는 사안이라 여겨집니다. <echo>는 텍스트 크리틱을 통해 비평에 관한 토론을 촉발하는 동시에, 예술계 저변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가시화하고 기록하는 목적 또한 가지고 있기에 저자의 동의를 받아 페이스북에 게재된 전문을 수록합니다. 문제에 동참하는 서명은 아래 링크를 통해 가능합니다….

적대의 은어

 * 본 고는 퍼블릭 아트 2020년 10월호에 게재된 권태현의 <변화의 키워드: 프로그램 교차되며 확장되고, 어긋나며 연결되는 순간들>에 대한 메아리입니다.   하나의 현상을 두고 인간의 말은 여러 가지 해석에 달라붙는다. 상찬할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해석이 동등한 설득력을 지닌다고 보긴 어렵다. 이런 주장에 쏟아질 뻔한 반응들은 이미 지겹다. 텍스트는 각자의 보기를 드러내는 점에서 중요하고, 위계란 없으며,…

집 나간 주체와 망상 기계들 : 서사는 어떻게 공예품이 되었나

1.  1975년, 스위스의 전시 기획자 하랄트 제만(Harald Szeemann)은 <독신자 기계>라는 이름의 전시를 기획했다. 이 전시는 굵직한 모더니즘 소설들과의 연관을 큰 특징으로 하고 있었는데, 제만은 프랑스 작가 미셸 카루주(Michel Carrouges)가 발표한 『독신자 기계』라는 책을 전시의 중요한 참조점으로 삼았다. 카루주는 마르셸 뒤샹의(Marcel Duchamp)의 그 유명한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1915-1923)(이하 <큰 유리>로 약칭.)에 대단히 매료되었던 작가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