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빙/리빙 이미지로서의 VR에 관한 연속적 질문

  ‘무빙 이미지(Moving Image)’라는 개념은 그 명칭에서 드러나듯 직관적이고도 (여전히) 모호하다. “기억의 천재 푸네스의 완벽한 재현보다는 사막에 버려져 동물이 서식하는 누더기 지도에 가깝다”는 말과 같이,[1] 그의 유형학은 기존의 관념을 파괴하는 동시에 무한히 팽창한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부터 탄생하게 된 여러 매체와 장르, 그리고 그들 사이의 경계가 무너져 내린 포스트-미디어적 순간들을 복기하는 대신, 우선 용어 자체의…

자본주의 스탈리니즘

이 세계의 문제   전체주의와 후기전체주의의 도식을 갈파함으로써 스탈린주의의 기조를 비판하려 했던 바츨라프 하벨의 노력은 오늘날 아이러니하게도 스탈린주의와 현 자본주의의 형식적 차이에 관한 명료한 인식을 제공한다. 하벨의 주장대로라면 후기전체주의 체제는 특정 집단의 선도적인 정치적 노선이 아니라 복잡하고 장기간에 걸친, 아주 교묘해진 ‘사회의 자기 침해’인데, 다음 다섯 테제가 사회적 자기 침해로서의 후기전체주의적 스탈린주의 비판을 위해 그가…

QR

  지겨운 이미지에 대해 말해볼까? 지루하고 재미없는 것에 대해서 말이야. 자, 편안히 앉아봐. 아니 서 있어야 할까? 걸어야 할지도 모르니까. 눕고 싶다고? 누워도 상관없지. 편안한 게 중요하니까. 자 그럼, 편안히 있어 봐. 이제 눈을 감고 아무것도 없는 흰 상태를 상상해보자. 아무것도 없는 흰 상태. 이 흰 것은 꽉 막힌 듯 느껴지는 움직이지 않는 딱딱한 하얌이야. 눈을…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리얼리즘 운동, 혹은 아시아의 가능성: 수조요노(S. Soedjojono)의 작업 세계에 대한 간략한 일별」

  아시아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본, 인도, 중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등으로 나열될 수 있는 영토의 집합인가, 동북반구에 위치한 대륙인가, 유럽과 아메리카의 반대 항에 놓이는 위상학적 공간인가? 혹은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를 비롯한 제3세계의 기획들에서 보이는 일종의 유토피아적 장소인가?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제안이 가능하겠지만, 근본적인 의미에서 아시아적인 것이란 결국 공허한 보편 속에서 특수자의 자리를 찾는 기획과 관련되지…

목계지덕木鷄之德의 조증

  장자 외편外篇 달생達生에 목계지덕木鷄之德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닭 싸움을 좋아하던 왕이 ‘기성자紀渻子’라는 사람에게 맡겨서 최강의 투계鬪鷄로 기르도록 명하였고, 열흘이 지나서 물었다.“닭이 이제 싸울 만한가?”“아직 안 되었습니다. 지금은 쓸데없이 허세를 부리고 자기 힘만 믿습니다.”다시 열흘이 지나 왕이 물었다.기성자가 대답했다.“아직 안 되었습니다. 다른 닭의 소리와 그림자만 보아도 쉽게 반응하고 덤벼듭니다.”또다시 열흘이 지나 왕이 물었다.기성자가 대답했다.“아직 안 되었습니다. 간신히 참기는…

미술비평은 왜 실종됐을까?

  다 아는 이야기를 해보자. 여기에 전업 미술비평가가 있다. 이 사람은 어떻게 해서 먹고살까? 운 좋으면 대학 강의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교수도 아니고 강사법이 개정된 이후 계속 주어지던 강의도 이제 하나만 남았다—달랑달랑한다. 간간이 미술잡지란 곳에서 원고 청탁이 오는데 그런 곳의 원고료라고 해봤자 뻔할 뻔자다. 미술 매체에서 들어오는 청탁은 대다수 값싼 원고료에 짧은 지면이 주어진다. 비평계의…

I’m So Sorry But I Love You

*이 글은 영화 <소년시절의 너>의 강한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극장에서 영화 <소년시절의 너>를 보던 중이었다.   뜬금없이 빅뱅의 <거짓말> 뮤직비디오가[1] 떠올랐다.   <거짓말> 뮤직비디오는 그야말로 한 편의 영화 같다. 이 작품은 주인공(권지용)이 도망치다가 어느 여자와 전화를 한 뒤 체포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후 여자가 일상적인 일을 하는 중간중간 흑백 장면이 교차되며 사건의 내막이 드러난다. 여자는 어떤 남자의 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반격하다가 그를 죽이고…

집단 자살을 소망해도 될까요?

* 본 글에는 독자에 따라 불쾌감을 유발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쿠에타핀, 카바마제핀, 리튬, 모든 벤조디아제핀과 비벤조디아제핀계 약물에 영광과 축복 있으라. 부모는 솜씨가 서툴러 손상된 인간을 낳았고 약물이 나를 손보고 있습니다. 반 쪽짜리 인간의 우화를 악착같이 파고들었던 때가 있다. 반편이는 나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을 주는 불충분한 얘기들. 넉살 좋게 존재론을 주워섬기는 종자들은 제발…

예술을 먹고 기도하라, 때늦은 보수적-낭만적 편지로서 비평

  매우 고통스러운 꿈을 떠올려보자. 나는 출구가 없는 곳에서 뛰고, 또 뛰다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휘말려 끊임없이 가라앉는다. 그 꿈이란 우리 삶에서 우리를 추락시키는 일련의 사건 속에 틀어박혀 있는 것에 가깝다. 그러한 문제적인 삶이란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로 빼곡한 악몽이다. 검은 개들은 꼬리를 흔들며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우울은 퇴치되지 않는다. 온갖 증오 어린 말들이 나를 가격하고,…

여성이라는 난제 : 얄팍한 성기를 넘어선 범주를 상상하기

  지난 6월 3일에서 13일까지의 아주 짧은 기간, 김현주의 <프레임>이라는 전시는 여성과 사회인으로서 느낀 곤란을 점묘 드로잉을 통해 그려내고 있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한 작업 당 6개월에서 2년까지도 소요되는 각고의 소산이다.)   나는 마침 더현대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앤디워홀의 전시를 보고 났던 터라 당혹감이 꽤나 컸는데, 작가의 노력이 주류 미술사가 일궈온 개념들에 관한 개인적 반발처럼 보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