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분야에서의 필드워크

개요   예술 분야에서 리서치와 필드워크라는 것은, 기존에 고증이라는, 즉 보다 “정확한” 재현을 담보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미명 하에 행해지던 수단적 성격을 뛰어넘어, 오늘날에는 창작의 핵심적 과정으로 자리 잡았다.[1] 어떻게 보면 이것은 95년에 인류학 선집 The Traffic in Culture의 지면에서 처음 등장한 글 「민족지학자로서의 예술가?」에서 미술사학자 할 포스터가 전반적으로 회의적인 눈으로 바라봤던 예술계 내 동향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라고…

<오징어 게임>: 게임의 수용소에 갇힌 시민들과 밈적 이미지의 존재론에 대하여

  <오징어 게임>을 부정적으로 보는 평자들은 보통 작품의 선정적 수위, 빈곤층에 대한 묘사, 그 외에도 개별적인 배역에 대한 묘사의 적절성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한 지적들은 모두 나름의 타당성을 지니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드라마의 더 본질적인 측면을 간과할 수밖에 없다는 인상을 준다. 여기서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앞서 언급한 평자들의 비판에 대해 지금까지 제출된 반론들을 떠올려보도록…

‘체계의 완성자’ 헤겔?

  헤겔은 많은 경우 ‘독일 관념론 체계를 완성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알려져 있는 것과는 달리 그는 그 자신의 체계도 완성하지 못했다. 사실, 그가 출간한 저작은 <정신현상학>, <논리의 학문>, <백과전서>, 그리고 <법철학 강요>, 이렇게 넷뿐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중에서 ‘학문적 엄밀성’을 갖추어 상술한 저작은 오직 <논리의 학문>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가?   <정신현상학>은 앎(Wissen; knowledge)을 확장해…

<파르마코-AI> 혹은 언어 모델이라는 파르마콘

* 본문의 본고딕L+기울임 강조 표기는 <파르마코-AI>에서 발췌한 GPT-3에 의해 생성된 글(필자 번역)이며, 마지막 문단의 본고딕L+기울임 표기는 카카오브레인 KoGPT에 의해 생성된 글이다.    “인공두뇌학적 작가로서, 나는 여성과 논바이너리 인물 들의 경험을 중요시하는 새로운 형식의 문학을 향한 생성적 엔진으로 GPT를 활용하는 작업에 관심을 갖는다. 인공두뇌학적 사상가로서, 나는 지속 불가능한 현실을 영속시키는 서구적 의식 매개체의 표현으로 GPT를 이해하는 작업에…

비평의 ‘위드’는 가능한가: 비평가 22인의 릴레이 인터뷰①

“진리인 것은 오직 무한할 때만타당한 것과 구분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1]-알랭 바디우-   이 릴레이 인터뷰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됐다. 사람을 만나지 말라고 권유하는 이 시기에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가 궁금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생각할 거리는 점점 많아지므로, ‘비대면’ 사회라면 그만큼 많은 생각들을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다른 한편 나에겐 그런 마음이 있었다. Zoom과…

비평의 ‘위드’는 가능한가: 비평가 22인의 릴레이 인터뷰②

“글을 쓰는 것이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김철홍-영화   잘 모르겠다. 글을 쓰는 것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그런 게 있을까 싶다. 그런 게 있다면 글을 쓰는 사람이랑 안 쓰는 사람의 삶에 어떤 차이가 있다는 것인데, 이런 방식으로 접근해서 생각해보니까 떠오르는 게 있다. 더 피곤하다는 것이다. 때로는 글 같은 건 아예 안 쓰면서…

비평의 ‘위드’는 가능한가: 비평가 22인의 릴레이 인터뷰③

“글을 쓰는 것과 삶 사이를 이어줄, 지속 가능한 연결고리 같은 게 있을까요.” 이광호-영화   애초에 삶과 글이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을 잘 하지 않는 편이라, 그 둘을 동등한 대상으로 두고 다른 연결고리를 찾기보다는 삶 자체를 지속 가능하게 하는 것이 글쓰기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서정화-미술   위에서 이야기했듯 글쓰기와 삶이 별개의 것이 아니기에, 둘 사이를 잇는 연결고리라는…

포스트코로나 시대: 미술계와 관료주의적 작동방식(Modus Operandi)

포스트코로나 시대와 국공립 후원 프로그램   2019-2020년 코로나가 미술계에 불러온 지난 2년간의 변화는 전 세계적으로 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정도로 크고 중요했다. 세계 대전 직후부터 있던 파리의 화랑이 닫는다든지, 뉴욕의 유명 화랑들이 합병을 하였다. 이미 국가와 문화의 경계선을 넘어서 존재하는 미술시장에 코로나가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또한 뉴욕이나 유럽의 주요 미술관에서 지난 20-30년간 구겐하임, 휘트니, 워커센터…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마음들

  그 길로 가지 않았더라면, 노인을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 다른 노인이 다른 길에서 출몰했을 것이다.   노인은 길목에서 전단을 돌리고 있었다. 그는 나를 발견하더니 이쪽으로 몸을 틀었고, 나는 그를 맞을 준비를 했다. 그는 터벅터벅 다가와서 종이를 내밀었다. 신축 오피스텔 매매 전단이었다. ‘역세권, 지금이 기회’라는 문구가 보였다. 여기까진 현대인이 흔하게 겪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동사로서의 페인팅

  페인팅에 필요한 조건을 적어보자. 캔버스와 페인트, 브러시, 팔레트가 먼저 떠오른다. 캔버스의 수직 각도를 맞춰 줄 이젤도, 페인트를 섞기 위해서 적절한 미디엄도, 그것들을 놓을 스튜디오(혹은 그에 준하는 장소)도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대상(그것이 재현불가능한 어떤 것일지라도)과, 그것으로부터 페인터에게 떠오른 어떤 심상(그 장소가 머리인지 가슴인지는 단정할 수 없겠지만), 그리고 그 심상을 브러시로 캔버스에 옮길 몸도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