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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iám tuyển” to “Sách triển nhân”

The paper will begin with observations of linguistic changes as a re-examination of art historical discourse of the past 20 years. There were “foreign terms” emerging during the nascent period of contemporary art in Vietnam. Before 2000, “curator” was a “foreign term,” but it didn’t just appear out of nowhere. How was this “foreign term”…

안락사 가위바위보

안락사 가위바위보

“이제 저 좀 죽여달라”고 사정하던 99세의 노인이 어느 날 새벽 수액줄에 목을 감아 자사自死했다. 와락 다가온 사건이었다. 마치 나 홀로 양 손으로 가위바위보를 하듯, 다음처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명이라는 추상은 절대적으로 옹호되어야 할 영역인가? 죽음을 삶의 일부로 통합하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대상으로 간주할 수 있나? 질병과 고통을 이유로 안락사를 택하는 것은 목욕물과 함께 아이를 버리는 격으로 생명을 제거해버리는 우를 범하는 걸까? 질병과 고통마저 남김없이 살아내는, 생의 남은 한 방울까지 짜먹는 일은 삶의 풍부함을 누리는 행위인가? 안락사는 운명의 자기결정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정해진 운명을 앞당기는 행위일 뿐인가? 안락사의 요청은 자기 삶으로부터의 무책임한 도피인가? 아니면 자기책임의 윤리 안에서 가능한 시나리오인가?

따로국밥 상호작용 ‘우리가 남이가’

최근 문화공동체 □□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단체와 업무적으로 엮이는 일이 있었다. 그들의 독자적인 운영 방식을 보고 있자니 ‘공동체’를 어찌 이리도 당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문화예술 속 세계는 늘 그들만의 리그로 존재하는 것 같다. 일부 지식인으로 치부되는 이들의 보수성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어 새로운 목소리나 창의적인 시도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기존의 틀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크다. 일부 단체는 권력 남용을 통한 갑질을 일삼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정말로 ‘공동체’라는 이름에 걸맞은 가치를 실현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겉으로는 잘 포장된 속 빈 강정 같다. 공정한 예술 환경 조성이 그리 힘든 일일까? 그들의 무례함에 여러 번 따져 물어봐도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직도 순진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이런 단체가 한 지역을 대표하는 영향력 있는 활동가들의 모임이라는 사실이 참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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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어로서 예술가 – 근원으로 가는 세 가지 관문에 관하여

미술과 시대의 변화를 거센 물살에 비유한다면, 비평가는 맨 앞에서 파도 타는 사람인가, 아니면 맨 뒤에서 첨벙대며 따라오는 사람인가? 광풍을 맞으며 돛대 끝에 매달려 있는 사람인가? 혹시 그는 등대지기인가? 아니면 해변에서 관망하는 사람인가? 무엇이 됐든 유행의 최첨단에 서야 한다는 의무감, 그렇지 않으면 도태될 거라는 두려움. 동시대 미술비평가 중에 이런 군더더기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것을 압박감이라 부르든 은밀한 욕망이라 부르든 말이다. 미술과 세계에 대해 한마디 보태려는 사람은, 제일 먼저 인정 욕구라는 강력한 장애물이 자기 안에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남 이야기가 아니고 내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