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을 보이는 「풍요」의 장치

강선학
2024.08.30
<바벨1>,각 400×400×2800cm, 2023.
<전쟁>, 500×250×250, 복합재료, 2020.


  플라스틱 음료수 통과 술통, 종이박스, 장난감 자동차, 비행기 따위로 이루어진 <전쟁>이라는 이야기는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새로운 사실성이다. 재현이라고 하기도 뭐하다. 유희에 가깝다. <바벨>과 <영생>에서 이야기는 노골적이다. “성공적인 예술작품의 재귀적 속성을 불러내는 것은 오직 매체라는 단어뿐”[1]이듯 세상의 이야기를 재현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밖에 있는 것의 재현이 아니라 ‘그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온갖 잡동사니를 모은 <욕망>은 그래서 정당하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우리가 사전에 우리에게 부여한 개념들을 통해 세상을 이해한다. 조현경은 그 지점에서 자신의 어투로 상품의 이야기를 다시 만든다. 어투의 진부함이나 어눌함은 TV와 영화의 시청 효과가 만드는 충족된 내러티브가 있는 삶을 기대하도록 길들인 것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의 작업은 반복과 세뇌에 가까운 이 시대 일상의 다른 욕망이자 얼굴이다. 그리고 결핍에 대한 이야기다. 미하일 바흐친의 ‘주체화의 전이’라고 한 개념을 빌려 말한다면, “‘표현의 질료’가 ‘형식적으로 창조적’이 되는 순간, 즉 작가와 관람객 사이의 전이의 순간을 가리킨다”[2]는 점에 방점을 두어야 할 작업이다.

  물성이 사물을 대신하고, 사물이 양식으로서 대체된다. 기술이 재료를 대신하면서 매체로서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 기술은 작품 구성 방법으로 상식적이어야 한다. 기술 자체가 하나의 표현으로 기능해야지 너무 과도하면 기술이 돋보이게 되고 기술을 매개로 한 표현이 들어설 자리를 읽게 된다. 때로 기술에 매료되어 그것이 곧 표현인 양 오해 하는 사례도 없지 않다. 그런 과잉만 통제할 수 있다면 기술이 매체가 될 수 있다. 조현경의 분절과 접속의 방법은 그런 기술로 오해될 수 있지만, 도리어 그런 기술을 의미적 차원에서 해체 시킨다. 상품이라는 사물이 매체로서 형식이나 내용이 된다.

  그에게서 상품은 대부분 사물이자 물성이며 표현 매체다. 상품이라는 익숙하고 엉성한 조합이 진부하다는 인상을 주지만 그 진부함은 현대의 대중적이고 일상적인 사물이 주는 사회적 기호로서 상징성 혹은 통상적 의미 안에서 구축된다. 이번 전시[3]에 내놓은 오브제들은 확장된 영역의 조형성보다 확장된 서술의 방법으로 부각 된다. 다들 너무 안이하게 통상적 의미를 사용해서 메타적 확장보다 조합의 기술로 설치작업을 오해하기도 하지만, 역설적 맥락이 두드러진다.

  문화란 우리를 싸고 있는 일상성이다. 거주, 식생활, 교통, 소통 매개, 그 매개를 움직이는 문화적 코드까지 모든 것이 일상이자 세계이다. 그런 면에서 상품의 속성들은 이 시대 문화를 노골적이고 가감 없이 보여준다. 우리는 그 속에 그것들을 이용하면서 산다. 말하자면 예술가는 감각적이거나 개념적인 세계와 맺는 관계를 그의 삶의 맥락 속에서 지속 가능한 세계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현재가 제공하는 환경에 거주한다. 그의 작업의 매개인 상품들, 오브제들은 세내어 쓰는 일시적인 사용체일 뿐이다. “예술가는 문화에 세 들어 사는 사람”[4]인 셈이다.

<영생>, 400×400×2800, 복합재료, 2023.


  이번 전시에 설치된 오브제들, 구체적인 작품으로서 형태와 물성, 그리고 조합의 양식과 구조적 밀도감을 관찰하다 보면, 얼핏 엉성하고 진부하다는 인상도 그렇고 세 들어 산다는 의미도 거기에 연유한다. 너무 익숙한 사물들에서 목격하는 상투적인 형태와 구조, 느슨한 조합, 합체는 어딘가 가볍고 일차원적이다. 방법적으로 어떤 조합도 가능하기에 생뚱맞은 구석이 없지 않다. 때로 작업이 강박적 의도로 인해 어색하고 억지스럽다는 인상도 피하기 어렵다. 그 어색함 때문에 작업의 정밀한 사유를 의심하고 치밀한 사유의 결과라기보다 감각적인 이미지들을 쉽게 조합해서 내보이려는 안이함, 진부한 기술로 여겨지게 한다.

  그가 차용한 사물들은 기본적으로 밀도를 갖는 완강한 구성체의 속성보다 가볍고 쉽게 부서지고 일회적인 소비를, 일정한 시간 안에 해체되거나 파괴되어 버려야 하는 속성을 보인다. 소모하기 위한 시간 단축이라는 기묘한 현대의 기술적 특징을 가진 것들이다. 재빨리 소비되는 것으로서 물성, 가벼움, 쉽게 쥐고 버릴 수 있는 사물들이다. 그런 것을 모아서 진중한 어떤 것을 재현하기보다 가볍고 일시적이고 엉성하고 부자연스러운 것을 양식으로 삼아 접근한다. 일종의 역설이지만, 그것으로 <전쟁>과 <욕망>에 저항하는 것이다. 조형적 완결성을 얻고자 하는 조형물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성급하게 소멸하는 사물들, 상품들의 물성을 보아내고, 그에 맞대응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지향하는 의미와 형식에서 여느 설치와 차이를 만든다. 흔히 말하는 형식적 특징으로서 아상블라주가 아니다. 이질적 접합으로 기존하는 의미맥락이나 논리를 벗어나 무의미로써 조형을 만드는, 추상적 조직을 특성으로 삼는 아상블라주와 다르다. 도리어 공감으로서 비물질적 방법을 시도한다. 이질적인 것이 함께 있음으로써 새로운 내면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차이가 그의 방법적 특이성이다. 외부 부착이 아닌 간질적interstitial difrerentiation분화를 통해 공감을 얻고자 한다. “서로 다른 맥락의 이미지나 사물, 양식을 병치하거나 중첩시켜 시간적 어긋남을 만들어내는”[5] 방법을 목격하게 되는 것도 이런 장치들이다. 그 사물들의 특성, 상품이 가진 물성을 드러내게 하는 태도, 말하자면 사물들끼리 말하게 한다. “사물은 결코 수동적이거나 관성적인 것이 아니다. 사물은 자신 이외의 사물을 촉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사물은 우리를 움직이거나 자신을 느끼도록 강요한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사물은 그것을 포섭하고 싶어 하는 상관주의 도식으로부터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다.”[6]

<욕망> 300×30×200, 복합재료, 2021.


  우리의 읽기에는 항상 우리에게 부여한 선재 된 개념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려는, 그런 함정이 예비 되어 있다. 엄숙한 의미와 엄숙한 조형적 밀도를 요구하는 것은 서로 다른 차원이다. 의도가 좋으면 작품도 좋다는 오해도 그런 데서 연유한 것이다. 그는 우리의 사물에 대한 관습, 사물이 우리의 일상에서 요구하는 것들의 세계를 다르게, 상품의 이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가 채용한 오브제들은 사실, 편하게 읽히는 아상블라주로 키치와 팝, 설치의 감성이 혼재된 인상을 주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인상은 “사회적인 것은 우리가 그것을 인식할 때 또는 판단할 때 이미 거기에 있다”[7]는 것과 중첩된다. 너무 친근한 오브제라 조형적인 탐색이기보다 사회적 의미를 던지고 있다는 인상이 그런 것이다. 그 인상은 방법이 아니라 공감이라는 비물질적 차원을 엿보게 한다. 그의 오브제는 우리가 빠져 있는 일상이고, 조형적 함정이자 정서이다. 이미 쓰임을 다한 과거의 사물 혹은 기호들이지만, 과거의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과거는 엄밀하게 말해서, 우리에게 현재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열리는 현대사회를 읽게 하는 기호이자 상징으로 열리는 장(場)과 같다. 그래서 외부 부착이라는 분절적 접합이 아니라 사회적 의미를 가공하는 공감으로서 차이를 살피게 하는 것이다.

  그의 설치는 접합의 생경함, 혹은 조형적 요소로서 완결성을 향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조응하려 애쓴다. 분절적 접합이 아니라 ‘함께 있다’는 공감을 차이로 가진다. 현대의 복잡성, 다각적 맥락으로 삶과 정치. 사회, 문화적 환경을 관계로 살피게 한다. “아상블라주의 교착적 부착은‘….그리고….그리고….그리고…and….and….and’인 반면, 조응의 분화적 공감은 ‘…와 함께….와 함께….와 함께….with….with….with’이다. ‘공감’은 보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것’이며 사물들의 간극 그 내면성에서 작동하는 느낌-앎의 한 형태이다.”[8] 조형이 아니라 삶이고 사회적 발언이다. 지식 혹은 인식의 하나로 오브제를 통해 재현하려는 의미가 아니라, 느낌으로서 물성, 상품이라는 사물이 드러내는 세계에 대한 공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번 전시가 그런 이야기(공감)를 얼마나 성공적으로 끌어낸 지는 판단하기 쉽지 않다. 피드백이 없는 지역의 문화적 사정이 어떤 전시라도 그렇게 만들고 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의 작업을 예사로 넘길 일은 아니다. 아상블라주는 “너무 정적이고, 그것을 구성하는 실제들이 실제로 어떻게 서로 결속되는지를 답하지 못한다.”[9] 그에 비해 상품이라는 오브제의 익숙함, 그리고 그것들의 조합이라는 느슨함이야말로 그가 차이를 지각하는 지점이다. 그 지점이 ‘조형적’이라느니 ‘조형의 확장’이라느니 ‘환경과 예술’이라는 애매한 서술에 대응해서 사회적 공감이라는 요청을 문제로 던져준다.

  현재 우리를 감싸고 있는 사물들, 특히 소모되어야 하는 속성을 기반으로 한 사물들은 우리 사회의 욕망이자 결핍이며 후기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덤으로 자문하게 하는 사물-의미들이다. 설치라는 작업이 가진 가변성과 장소특정성이나 오브제의 비맥락적인 조우는 일상적인 형태와 다른 ‘사회적 사실’을 ‘사물들’로 고려하라는 유명한 명제 안에서 연장될 수 있는 개념이다. 비물질적인 사회적 현상이나 사건들을 사물(상품)로 대체하는 것이다. 일상의 진부한 현상(상품)을 감각적 사건으로 전환하는 일이다.

  “우리는 더 이상 현대미술 작품을 쭉 돌아봐야 할 하나의 공간으로 생각할 수 없다(‘지주의 소유지 들러보기’는 수집가의 그것과 유사하다). 작품은 이제 경험해야 할 지속적인 시간으로서, 제한 없는 대화를 위한 통로로 드러난다.”[10] 그의 작업은 니콜라 부리요가 말하듯 어떤 기원과 목적에 대한 진술을 전제로 하는 하나의 예술 이론이 아니라 일종의 형태에 대한 이론이다. 기존하는 장르로 구분되기보다 하나의 관계로서 분리되어 있는 요소들을 서로 만나게 할 뿐이다. 물론 ‘사회적 비판에 대한 완화된 형태의 표현을 재현하는’ 진술의 위험이 없지 않다.

  그러나 작가나 감상자 모두, 시각이미지가 우리를 지배하는 시대에 “시각적 도구인 미술을 통해 세계를 보려는 탐욕스런 집념을 잃지 않으려 노력”[11]해야 한다. 마치 온갖 잡동사니를 모아 그 내면성의 작동을 살펴 우리 시대를 읽으려는 것처럼, 그런 노력으로 세계를 읽어내는 그의 어눌한 어법에 주목해보는 것이다. 그의 어눌함은 세련되고 화사하기조차 한 근래 매체 미술의 흐름에 거부와 부정의 몸짓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조형적 성취보다 인간조차 상품으로 소모되지 않게 하려는 안간힘을 보는 것이다.

《풍요 – 디자이너를 위한 기념비》(2024, 창원상산아트홀) 전시 전경, 한 장면.




[1] 로잘린드 크라우스, 최종철 옮김, 『언더 블루 컵』 현실문화연구, 2023. p.41

[2] 니콜라 부리요, 현지연 옮김, 『관계의 미학』 미진사, 2011. p.181

[3] 조현경 개인전. 「풍요」 경남 창원 성산아트홀 제1전시실, 2024.5.29-6.3

[4] 니콜라 부리요, 현지연 옮김, 『관계의 미학』 미진사, 2011. p.21

[5] 진 로버트슨, 크레이그 맥다니엘, 문혜진 옮김, 『테마 현대미술 노트』 두성북스, 2011. pp. 192-193

[6] 스티븐 샤피로, 안호성 옮김, 『사물들의 우주』 도서출판 갈무리, 2021, p, 29

[7] 메를로 퐁티, 류의근 옮김, 『지각의 현상학』 문학과 지성사, 2002. p.543

[8] 팀 잉골드, 차은정 권혜윤 김성인 옮김, 『모든 것은 선을 만든다』 OIUI, 2024. p.51

[9] 팀 잉골드, 차은정 권혜윤 김성인 옮김, 『모든 것은 선을 만든다』 OIUI, 2024. p.22

[10] 니콜라 부리요, 현지연 옮김, 『관계의 미학』 미진사, 2011. p.23

[11] 니콜라 부리요, 박정애 옮김, 『래디컨트』 미진사, 2013.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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