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훈: 적정 노출의 감도

전민지
2024.11.10

민중들이 노출된(exposés)다.”[1]

  조르주 디디-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은 민중의 노출이 과잉과 축소라는 역설적 상황에 놓여 있음을 짚으며 『민중들의 이미지』의 서문을 열었다. 스펙터클 제조기로 기능하는 현대 미디어와 매년 쏟아져 나오는 다큐멘터리에서 드러나듯이, 민중의 형상은 숱한 이미지를 통해 재현되어 왔다. 당연하겠지만, 여기에서 그들이 노출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평범한 소시민들이 가시화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때 비-민중이라고 여겨질 만한 이들은 마침내 민중의 존재를 인지하고, 민중 역시 나름대로 주체성을 등에 업고 렌즈를 대면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종종 과하게 형상화된다는 점이나 필요 이상으로 가려진 채 등장한다는 점은 각기 다른 이유로 민중의 실제를 위협한다. 즉, 디디-위베르만에게 있어 노출된 민중은 과도한 일반화나 틀에 박힌 재현 방식에 의해 종국에는 사라질 위험에 처해 있는 약자이기도 하다.

  물론 이름 없는 자들의 삶을 드러내어 조명하는 과정은 인간성을 회복시키고, 계층과 무관하게 사회의 각 면면을 수면 위로 떠올린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민주적이다. 그러나 그들의 슬픈 (혹은 슬퍼 보이는) 일상을 렌즈 앞에 친절히 가져다 두고 윤리의식을 논한다는 것은 이미지 생산 절차에서 흔히 발견되는 오류다. 맹목적인 관찰이 기계로 찍어낸 듯한 이미지를 양산할 때, 민중은 결국 무력해진다. 그렇다면 이들은 재현의 여부와 관계없이 언제나 그늘에 가려진 채 위태로운 줄타기를 이어가야 하는가? 범주화되는 이들 사이 균열을 헤집고 각각의 피사체가 지니고 있는 나름의 성질을 충분히 담아내는 행위란 가능한가? 양지훈(1995~)이 지난 몇 년간 다큐멘터리의 전형성을 재구성하며 고심했던 질문은 요컨대 이런 것일 테다. 2024년 웹진 「더미덤피이미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듯이, 그가 집중하려 한 부분은 “범주를 상정하고 들어가지만, 다시 그 범주에서 벗어나는 [개별적] 이미지”였다.[2] 반복 노출되면서 점차 타자화된 민중이라는 대상은, 궁극적으로 총체이자 개인이 됨으로써 구출된다.

이미지 1~3. 양지훈, <포수(The Shooters)>, 2022, 단채널 영상, 스테레오 사운드, 30분 43초.

 
선함과 착함의 아수라장

  여기 착함과 선함, 건전함으로 과부하가 걸린 스크린이 있다. 민중을 노출하는 이미지에는 대체로 정답이 있다. 특정한 진영 논리의 구조를 호출하지 않더라도, 영상 속 누군가는 선량한 주인공이고 누군가는 악랄한 범법자다. 양지훈은 이러한 양극단의 세계에서 탈주하기 위해 선함과 착함이라는 손쉬운 수식어를 걷어내기로 한다. 선과 악의 구도가 공고해질 때 사실관계는 가려지거나 얄팍하게 소비되기 일쑤다. 작가가 카메라를 드는 이유는 ‘착한 영화’가 오히려 폭력적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과 연동된다. 아무리 수정주의적 역사관을 기반으로 한다 한들, 실존하는 인물 및 사건을 재현하는 데에 있어 관습적으로 동원되는 프레임이 있다면 이는 특정한 이미지 소비를 가속할 뿐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발판 삼아 양지훈이 2022년 본격적인 영상 작업으로 발표한 <포수>는 신파극의 장르 문법과 소위 ‘휴머니즘’의 경로를 피해 간다.[3]

  작가는 할아버지 양서옥이 제주 4.3 사건의 피해자였음을 우연히 알게 됐다. 기사를 통해 접한 가족사는 그가 카메라와 함께 제주 집을 찾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양지훈이 고향에 다다랐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던 이는 피해자라는 명찰을 단 피사체가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언제나처럼 돌담 너머 길을 걷고, 때때로 동네에서 트랙터를 타며, 텔레비전을 보며 귤을 먹는다. 제주 4.3 사건의 피해자라면 응당 지닐 법한 태도, 나아가 타인에 의해 요구되는 눈물은 화면에 부재한다. 역사적 비극으로부터 생긴 트라우마를 고백하는 인물 역시 등장하지 않는다. 양서옥은 반복되는 손자의 질문을 꺼리다 곧이어 운을 뗀다. 그의 고백에는 폭도로 몰렸던 그가 생존을 위해 토벌대에 가담하기도 했다는, 작가 역시 예상치 못했던 양가적 내용이 담겨 있다. 양지훈은 카메라를 끄지 않고 할아버지의 과거를 끈질기게 포획한다.

  이때 술, 고기, 귤의 반복적 등장은 제사상의 도상 해석적 접근을 일정 부분 요청한다. 이들은 제례음식의 일부라는 점에서 추모의 의미를 강조하는 듯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할아버지와 손자가 함께하는 흔한 저녁 식사다. 떠난 자를 기리는 대신, 두 명의 산 자들은 영상 곳곳에서 철저히 서로를 위한 소주잔을 기울인다. 더불어 숯불 위에서 구워지는 고기는 작가가 꾸린 연극 무대의 한 장치처럼 보이는데, 이에 관해 김일란은 냉동 포장육의 질감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인서트 이미지가 가해자로서 할아버지의 위치를 은유한다고 분석했다.[4] 그러나 생존자이자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양서옥의 삶은 그저 쉽게 몇 개의 형용사로 재단할 수 없다. 삶의 문제를 목전에 두고 윤리적 판단이 요구된다면, 누구나 모순이라는 망령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선악이 뒤엉킨 과정을 거쳐 아수라장에 남게 된 이들에게는 적당한 호칭조차 없다. 모종의 이유로 대문자-역사에서 존재가 말소되었던 이들은 양지훈의 작업을 투과하며 각자 다른 모양과 굵기를 지닌 뿌리를 차츰 내린다.

이미지 4~6. 양지훈, <도라지(Toraji)>, 2024, 단채널 영상, 스테레오 사운드, 35분 15초.

 
날것의 비린내

  그런가 하면 2024년 작 <도라지>는 일본 여행 브이로그라는 형식적 탈을 쓴 채 재일조선인, 즉 자이니치를 다룬다. 작가의 대학 시절 동기와 그의 가족, 지인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영상은 일상적이기 그지없다. 나고야에서 보낸 나흘간 양지훈은 친구의 주변인들을 만나 시간을 보내며 조선학교에서의 경험, 일본에서의 생활 등에 관해 가볍게 묻는다. 이때 스크린에는 그 어떤 절박함도 드러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부터 몇십 년간 핍박받아 온 재일조선인의 삶과 그 투쟁의 족적을 그러모으겠다거나, 세상을 바꾸기 위해 정치적 제스처를 직설적으로 던지겠다는 다큐멘터리 영화‘스러운’ 태도는 여기에 없다. 서사의 중심이자 주인공이어야 할 인물들은 대부분 블러 효과에 가려져 타의적 익명성을 얻는다. 크레딧의 출연진 목록 역시 작가 본인을 제외하면 모두 ‘xx 형’, ‘xx 형의 친구 10’, ‘아이치 조선초급학교의 학생들’ 등으로만 채워져 있다. 그와 반대로, 핸드폰을 든 자신의 모습을 전신거울에 비추어 보며 화면에 간혹 등장하는 양지훈은 감독이라기보다 차라리 유튜버의 전형과 가깝다.[5]

  재일조선인의 불안정한 삶과 일본 내 자이니치 차별을 전반적으로 다룬 <우연히도 최악의 소년>(2013), <하드 로맨티커>(2011), <수프와 이데올로기>(2022) 등의 영화를 되짚어보면, 양지훈의 접근 방식이 평범하지는 않음을 직감하게 된다. 작가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수다를 떠는 나고야 방문객 1이 되어 그들을 옭아매던 연민의 권력과 타자화 문법에서 이탈하기로 한다. 재일조선인으로 집단화되곤 하는 영상 속 인물들은 실제로 사명감과 거리가 멀다. 영상 속 등장인물은 대체로 카메라에 익숙하지 않고—“잘 됐어?” “뭐가?” “영상.”으로 시작하는 엔딩 크레딧 영상을 돌이켜 보자—날것의 행동을 한다. 양지훈이 촬영한 결과물을 모른 채로, 그것이 어떻게 편집될지 모르는 상태로, 평범한 집에서 특별할 것 없는 저녁을 차려 먹고, 이따금 술잔을 맞댄다. “가족들 사는 거 다 똑같다”는 말과 함께 막을 내리는 작가의 영상은 스펙터클로서의 비극을 좇지 않는다. 설령 강제 징용이라는 비극이 시작점에 웅크리고 있었다 하더라도, 작가는 실재하는 누군가의 삶이 단순한 멜로 드라마적 은유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그렇다면 의도치 않게 피해자 ‘덩어리’가 된 이들은 ‘공동체’로서 의미를 갖는가? 그들과 우리를 구분 짓는 과정에서 사방에 놓이게 된 경계는 끝끝내 출구 없는 틀을 구축해 피해자와 비-피해자 간 구도를 견고히 한다. 피해자는 피해자여야만 하고, 생존자는 생존자여야 하는 동정의 시대가 도래한 지는 꽤 오래되었다. 이와 관련해 윤아랑은 임흥순의 <비념>(2012), <위로공단>(2014) 등을 예시로 들며 ‘잠재적인 공동체’라는 개념이 “차이와 함께 형성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차이를 잠재우고 형성되는 공동체”임을 꼬집었다.[6] 공동체의 범주에는 부정적인 것이 감히 들어갈 수 없다는 이전 세대의 감각, 다듬어지지 않은 개인은 선량한 공동체에서 그만의 특질을 드러낼 수 없다는 전체성의 과잉. 결국 소문자-역사가 여럿 모이게 되면 대문자-역사의 오류를 답습할 염려가 생긴다. 역사 서술의 장대한 가능성을 잠시 제쳐두고, 작가는 이쯤에서 총체와 개인 사이 회색지대로 고개를 돌려 다큐멘터리가 현현해야 할 날것을 하나씩 저며낸다.

노출된 민중 구하기

  마지막으로, ‘제대로’ 찍기란 무엇인지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영상 촬영의 일반적인 단계를 고려해 보자. 작가 개인의 테크닉이나 피사체의 심미적 요소가 ‘잘’ 찍는 것에 결부되는 개념이라면, 빛의 노출은 제대로 된 기록 여부를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일종의 선결 조건이 된다. 이는 렌즈에 들어오는 빛이 과하거나 부족할 때 촬영 대상의 본모습은 사라진다는 점에 기인한다. 과도하게 밝은 영상은 세부 이미지를 소실해 버리고, 색감을 잃어 어두워진 화면은 필요한 시각적 정보를 가리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양지훈은 적정한 광량을 찾아 빛을 제어하며 나름의 책무를 수행하기로 한다. 그 조정 방식이 셔터 스피드든 조리개든, 작가가 포착하는 민중은 그간의 피로감을 하릴없이 토로하며 과소 노출과 과잉 노출의 늪에서 헤엄쳐 나온다. 이로써 그들은 알맞은 노출값을 거쳐 평범하고 비-영웅적인 존재성을 인정받는다.

  한편, 디디-위베르만은 또 다른 글 「감각할 수 있게 만들기」에서 “가장 뛰어난 역사가들은 뚜껑—인민들에 대한 억제의, 압제의 뚜껑—을 여는 데 가장 효과적으로 기여하는 사람들”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일견 무관하게 작동하는 듯하나, 양지훈의 작업은 역사가의 그것과 뜻밖의 유사성을 지닌다. 작가는 억눌린 역사 너머 민중을 꺼내기 위해 갓 뚜껑을 열기 시작했다. 물론 한 제주도민의 손자나 나고야를 거닐던 브이로거로부터 관객을 강력하게 설득할 만한 다큐멘터리적 방법론을 찾아보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2023년 말 열린 양지훈의 개인전 서문에서 함연선은 ‘슛(shoot)’이라는 영단어의 다의성을 짚었다. 총을 쏘는 행위나 총을 쏨으로써 누군가를 해하는 행위, 나아가 영화와 사진을 촬영하는 행위, 스포츠 경기에서의 득점하는 행위 등이 모두 슛이라는 것이다. 지금 양지훈은 한껏 헐거워진 기존 다큐멘터리의 외연에 총과 카메라를 격발하고 있다. 그렇게 그의 천연덕스러운 시도는 결연한 슛이 되어 눈앞의 그물망을 흔든다.

  * 이 원고는 예술경영지원센터 지원 특별 기고로 게재되었습니다.


[1]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여문주 역, 『민중들의 이미지 – 노출된 민중들, 형상화하는 민중들』, 현실문화A, 2023. 13쪽.

[2] “양지훈 – 애처로운 포수의 몸짓”, 「더미덤피이미지」, 2024. http://dummydumpyimage.com/view.php?id=20

[3] <포수>는 유사한 주제의 영화 <끝나지 않은 세월>(2005), <지슬>(2013) 등과 비교했을 때 그 혁신성이 더욱 드러난다는 점에서 “모더니즘 4.3 영화의 탄생”, “4.3 영화의 새로운 길”이라는 평을 받았다. 이정원, “[기고] ‘포수’, 모더니즘 4.3 영화의 탄생”, 「제주의소리」, 2023.11.15. https://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421077

[4] 김일란, “<포수> 인권해설”, 28회 인천인권영화제, 2023. https://inhuriff.org/5786/

[5] <포수>나 <도라지>는 카메라를 든 작가의 모습에서 시작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두 작업에서 작가 자신이 전면에 등장한다는 지점은 그 또한 ‘노출된 민중들’의 일부임을 예시한다. 양지훈 작가와의 인터뷰, 2024년 6월 14일.

[6] 윤아랑, “정당화하는 관점: 임흥순에 대한 불만”, 「마테리알」, 2022. https://ma-te-ri-al.notion.site/15-30-17-00-cdc4b5badb6447f6bcaf219663968616

[7]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감각할 수 있게 만들기」, 알랭 바디우 외, 서용순, 임옥희, 주형일 역, 『인민이란 무엇인가』, 현실문화, 2014. 117쪽.

[8] 함연선, 《양지훈 개인전: 다르게 총 쏘기》(2023.12.12.~12.31, 상업화랑 을지로) 서문, 2023. https://archivist.kr/show/show_scroll.php?idx=1702352646

댓글

댓글 작성하기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