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멀 히스토리 호스피탈
동물이 나오는 영상물
동물이 나오는 세상의 모든 영상물들은 동물의 모습만 담겨있는 영상과, 동물과 인간이 함께 담긴 영상으로 분류될 수 있다. 이 두 분류는 다시 야생을 배경으로 한 영상과 문명을 배경으로 한 영상으로 각기 분류된다. 도식화하여 사례를 들자면 아래와 같다.
A의 경우 야생 속의 동물의 모습을, B의 경우 야생 속의 인간과 자연의 모습을, C의 경우 문명 속의 동물의 모습을, D의 경우 문명 속의 인간과 자연의 모습을 담고 있다. B와 C의 공통점은 인간이 전제한 조건 하에 문명과 자연의 갈등이 문제없이 봉합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이에 반해, A와 D는 문명과 자연이 양립하기 힘든 정황들을 제시하기도 한다.[4]
권동현X권세정[5]의 영상물은 D의 분류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들은 반려견 ‘도도’와의 시간을 담은 영상물, <세디, 도도와 만나는 방법>(2021)을 필두로 문명이 어떻게 자연과 조화할 수 있을지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탐구해 왔다.
다만 그 탐구는 ‘문제 해결 방안’을 도출해 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디자인적이거나 사회학적인 방식이라기보다는 문제 상황을 징후로 드러내는, 소위 병리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다. A 분류의 자연 다큐멘터리에서는 주체가 소거된 문명과 자연을 대립시키는 데 반해, 권권의 영상물들의 경우 주체-즉 권동현과 권세정-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문명과 자연 간의 투쟁의 상흔을 시각화하는 것에 가까운 것이다.
권권의 근작, <세디, 도도와 만나는 방법>(2021), <러브 데스 도그 시티> (2022), <러브데스도그&에필로그(프롤로그)> (2024)를 중심으로 이들이 드러내는 징후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세디, 도도와 만나는 방법>
– 기계라는 장치를 통해 드러나는 징후
노화로 거동이 불편해진 반려견 도도. 권권은 도도의 분리 불안을 덜어주기 위한 방편으로 반려견 돌봄 기능이 탑재된 로봇을 구매하게 된다. 모바일을 통해 원격으로 조종되는 이 로봇은 반려인이 집을 비운 동안 반려견에게 사료를 준다던지 원격 화상 채팅을 통해 반려인의 모습과 음성을 반려견에게 실시간으로 매개해준다던지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권권은 어딘가 부족하다 느꼈는지 도도에게 친숙한 인물의 얼굴을 캐스팅하여 로봇에게 씌워준다. 꽤나 정교하게 제작된 인두겁을 뒤집어쓴 이 로봇의 이름은 ‘세디’. 아마도 도도의 정서적인 안정을 기대하고 제작되었을 이 괴상한 기계장치는 도도와 대면하게 되지만 도도는 반응하지 않는다. 정해진 시간에 사료를 준다거나, 핸드폰 액정을 통해 소통한다거나, 인간의 얼굴 형상에서 교감의 단초를 마련한다거나 하는 모든 기능이 너무도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도는 인간이 아니다. 도도가 세디에 반응하지 않으니 세디-의 뒤에 숨어있는 권권-도 반응할 수 없다. 권권은 교감에 실패한다. 세디는 무력하고 불쾌하며 겉도는 존재이다.
도도와 세디의 일화를 담은 20분 남짓한 이 영상물은 관객들이 도도에게 이입할 수 있는 여지를 거의 주지 않는다. 도도는 시종일관 무관심하고 시종일관 거동이 불편하며 시종일관 ‘저쪽’에 있다. 단 한 번 도도가 세디와 적극적인 접촉을 행하는 장면은 그가 세디의 입술에 묻은 음식물 찌꺼기를 핥아먹는 장면[6] 뿐인데, 아마도 권권이 연출해 놓았을 저 장면에서 유일하게 도도는 의지를 갖추고 행동을 주도하는 주체가 된다. 반면 입술에 덕지덕지 음식물을 묻힌 채 무표정한 세디와 스크린 앞에 앉아 저 광경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관객은 속수무책으로 입술을 내어줄 수밖에 없다. 날름거리는 도도의 혓바닥에 점령당한 입술이 간질거린다. 움직일 수 없다. 노견 특유의 미지근하고 축축한 콧김과 차게 식은 밥 찌꺼기의 냄새가 인중을 적신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다. 만약에 세디에게 저 인두겁이 씌워져 있지 않았더라면 이런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제서야 깨닫는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다큐멘터리이다. 권권은 도도와의 교감의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들은 세디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 권권은 교감에 성공하였다. 우리는 세디처럼 무력하고 세디처럼 불쾌하며 세디처럼 겉도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세디는 이중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몸이 불편한 노견을 위한 물리적/정서적 돌봄을 수행하는 데에 실패한 기계로써의 정체성과 그런 실패에 기인한 열패감을 관객에게 효율적이고도 강렬하게 전달하는데 성공한 기계로써의 정체성이 겹쳐져 있는 것이다. 이 이중의 작용을 통해 세디는 영상물 안에서 꽤나 성공적인 ‘장치’로 작동한다. 하지만 이 영상물, <세디, 도도와 만나는 방법>은 어떤 ‘장치’가 아니다. 권권은 잠깐이나마 진심으로 세디를 통해 도도와 교감하기를 기대했었기 때문이다. 곧 떠날 반려견을 위해 자신들이 행할 수 있는 ‘예술적 실천’을 시도하고, 그 실천이 무참히 실패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그 기록을 적절히 가공하여 세상에 내놓는 이 일련의 과정에서는 문명과 자연의 상생이라는 문제의식이나 반려문화에 대한 동시대인들의 의식 개선이라는 목적성을 찾아볼 수 없다. 사랑과 죽음 간의 역설에서 기인하는 실존적 무력감과 그런 무력감이 징후적으로 시각화된 결과물이 바로 <세디, 도도와 만나는 방법>이다. 영상의 말미[7]에서 서정적인 피아노 선율과 함께 던져지는 낭만적인 메시지[8]와 눈부신 햇살을 배경으로 서 있는 도도와 세디의 모습[9]이 단순한 신파로 느껴지지 않는 까닭은, 기괴하고 낯선 숏들과 분열증적인 시퀀스 구성으로 일관해 온 영상의 동일성을 해쳐가면서 까지 끝끝내 도도와 세디를 아름답게 담아야만 했던 정신 나간 질병, 사랑이라는 질병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온전히 가닿을 리가 만무한 타자를 향해 잘못된 장치[10]를 휘두르며 돈키호테처럼 돌진하게 하는 그 질병. 엔딩 크레딧을 포함한 이 영상물 전체가, 사랑의 징후이다.
<러브 데스 도그 시티>
– 언어라는 장치를 통해 드러나는 징후
노견 도도를 돌보기 위해 로봇 ‘세디’를 제작했던 권권은 도도와의 교감에 실패한 후, 인간과 비인간이 소외됨 없이 공존할 수 있는 방편에 대해 탐구한다. <러브 데스 도그 시티>는 그 탐구의 과정을 기록한 영상물이다. 도입부에서는 한국전쟁 이후의 도시화, 70년대 새마을 운동 때의 방견 단속, 80년대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 건립과 90년대 신도시 개발 등의 과정을 거치며 반려견들의 생활 환경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를 보여준다. 개들은 인간의 편의에 따라 버려지거나 장려되거나 안락사되거나 소형화되는 등의 부침을 겪으며 가능한 한 무해하고 안전한 형태로 인간 곁에 정착한다.
반면 영상은 이러한 ‘길들임’의 과정에 역행하는 실천들 또한 보여준다. 목줄 없는 반(半) 방목 상태의 반려견 ‘초롱이’, 화학비료나 농약 없이 야생동물과 상생하는 ‘자연 재배 농법’을 실천 중인 ‘송희’, 지리산의 반달가슴곰 복원을 시작으로 백두대간 생태 축을 복원하려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국립 생태원’, 최상위 포식자인 회색늑대를 수입하여 그 하위 생태계의 개체 수 조절을 시도한 ‘옐로스톤 국립 공원’ 등이 그 사례이다.
권권은 인간중심적인 관점과 생태주의적인 관점 사이에서 어느 한 쪽의 의견에도 동조하지 못한 채 영상을 마무리한다. 애초에 이 두 관점 사이에서의 ‘선택’의 문제 이전에 이 두 관점에 대한 진술이 모두 이중구속[11]을 유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러브 데스 도그 시티>는 인간 중심적인 관점을 ‘비인간에 대한 착취와 억압’으로, 생태주의적인 관점을 ‘비효율과 불확실한 위험에 대한 감수’로 바라본다. 이념의 성취나 전망이 아닌 부작용을 중심으로 접근하는 한, 우리는 그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다.
기묘한 것은 권권이 이 영상을 통해 이중구속을 유발하는 ‘권위자’의 입장과 이중구속에 포획되는 ‘대상자’의 입장을 모두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이미 각기 모순을 내포한 두 개의 상충되는 메시지에 ‘권위’를 더하려는 제스쳐를 취함[12]과 동시에, 그 메시지 하에서 그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는 대상자의 난감함을 우회적으로 표한다.[13] 이런 진술 방식은 분열증적이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권위자와 그 메시지를 해석해서 ‘행동’을 취해야 하는 대상자가 모두 권권이기 때문이다. 이 분열증은 영상의 언어 운용에 있어서 몇 가지 형식적인 차원의 징후를 발생시키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1. 내레이터의 캐릭터 설정 : 내레이션 음성은 영어 기반의 내레이션 AI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영어권 외국인의 한국어와도 같은 억양과 발음을 보여준다.
2. 내레이션의 언어 설정 : 어눌한 한국어로 온갖 사료들을 읊어대던 내레이터는 갑자기 유창한 영어로 내레이션을 하기 시작한다.[14] 그리고 이 영어 내레이션의 내용을 번역한 자막은 제공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점은, 어눌한 말투로 진행되는 한글 내레이션은 ‘권위자’의 목소리를, 유창한 말투로 진행되는 영어 내레이션은 ‘대상자’의 목소리를 담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온갖 권위 있는 기관들로부터 공수하여 그 객관성이 입증된 사료들은 어눌한 한국어로 읊게 하는 데 반해, 개인적인 기억이나 상상으로 재구성된 억압된 심리상태를 보여주는 우화는 번역도 붙지 않은 유창한 영어로 이야기하게 하는 것은 아마도 언어의 ‘내용’적인 차원에서의 ‘권위자’와 ‘대상자’ 간의 위상[15]을 언어의 ‘형식’적인 차원에서 뒤집어보려는[16] 시도일 것이다. 권위자의 음성이 어눌해지고 대상자의 음성이 유창해질 때, 권위자의 단언은 힘을 잃고, 대상자의 의심은 설득력을 갖게 된다. 이중구속의 상태에 균열이 가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균열을 출구 삼아, 권권은 어디론가로 나아가야 한다. ‘수천 번을 환생하며 이 순간을 기다렸다’[17]며 어항 밖으로 뛰쳐나가는 엔딩 크레딧의 인간 개구리[18]처럼.
<러브데스도그&에필로그(프롤로그)>
– 꿈이라는 장치를 통해 드러나는 징후
<세디, 도도와 만나는 방법>을 통해 인간과 동물 간의 교감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러브 데스 도그 시티>를 통해 문명과 야생동물이 투쟁해 온 발자취를 쫓던 권권은, <러브데스도그 & 에필로그(프롤로그)>를 통해 문명의 야만성을 확인한다.
영상은 일본의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가 식민지 조선의 당시 생활상을 기록한 사진들로 시작된다. 조선인의 신체, 풍습, 유물, 노동 및 조선의 ‘개’에 대한 방대하고도 상세한 이 기록물들은 인류학적 차원에서의 학술 자료임과 동시에 ‘내선일체’라는 이념을 정당화해주는 근거이기도 했다. ‘조선의 진돗개와 일본 본토의 아키타견이 유전학적으로 연결되므로, 조선과 일본은 생물학적으로 둘이 아니다’라는 식이었다. 조선의 개를 조선인의 환유[19]물로 설정한 이 논리[20]와 마찬가지로, 조선인과 조선의 사물, 조선의 동식물은 일본의 식민지배라는 맥락 하에 동등한 것으로 다루어진다. 포식자 개구리의 입장에서 잠자리와 귀뚜라미가 동일하게 하찮은 것처럼, 포식자 뱀의 입장에서 개구리와 생쥐가 동일하게 하찮은 것처럼, 포식자 일본의 입장에서 식민지 조선의 모든 문물은 동일하게 하찮다. 권권은 그들이 기대해 마지않던 ‘인간과 비인간이 동등해지는 국면’을 ‘식민’이라는 야만적인 정황 하에서 예기치 않게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사료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영상은 공원에서 한가롭게 노니는 오늘날의 개들의 모습, 그리고 비틀대며 힘든 숨을 내쉬는 ‘도도’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크레딧으로 넘어가고, 이 크레딧 이후에는 전체 영상의 1/5에 달하는 에필로그가 진행된다. 영상 속의 한 인물[21]이 꾼 꿈을 그려내고 있는 이 에필로그는 빙하기에 생존에 어려움을 겪던 인간들이 D[22]라는 존재들과 조우하는 순간을 감각적으로 묘사한다. 아직 주종관계도 협력관계도 아닌, 서로에게 절대적으로 타자인 두 종의 만남의 순간은 경계심과 긴장감으로 시작하여 ‘어쩌면 우리는 풍요롭고도 평화로운 미래를 함께할 수도 있겠다’는 불확실하고도 긍정적인 전망으로 나아간다.
인간과 비인간이 소외됨 없이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하던 권권은 일제강점기의 사료들을 통해 기술의 발달과 무관한 인류의 야만성을 확인한다. 이들의 입에서, ‘문명’을 버리고, 생산량을 포기하고, 생존률을 낮춘 선사시대 야생의 디스토피아(≒유토피아)에 대한 잠꼬대를 듣게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23] 어금니를 악물고 낮게 읊조리는 저 잠꼬대에서는, 타인이라는 지옥이 싫어 인류를 멸망시키는 <에반게리온>[24]의 이카리 신지나 삶과 죽음의 고통이 오기 전에 우리가 스스로 먼저 죽자 외치는 이랑의 <환란의 세대>에 담겨있는 것과 유사한 타나토스[25]가 느껴진다. 생존하여 개척하고 쟁취하는 에로스[26]가 아닌, 내버려두고 포기하고 파괴하는 타나토스. 현생 인류의 에로스가 성취해 낸 문명의 역사가 결국 타자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야만’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문명과 이기를 포기하고 ‘야생’으로 돌아가 다시 역사를 써 보자는 극단적인 제안.
어찌 보면 통렬할 수도 있는 저 잠꼬대가 일말의 불안함을 남기는 것은, 꿈자리를 읊조리던 영상 속 인물의 마지막 대사, ‘그 뒤에 뭐가 더 있는데 잘 모르겠어’[27] 때문이다. 선사시대 인류와 개의 관계의 변화 양상을 추측하자면 다음과 같다 :
1. 인류와 D는 협력관계를 맺는다. 인류의 지능과 D의 감각은 시너지를 일으켜 생존에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된다.
2. ‘협력관계’였던 인간과 D의 관계는 ‘주종관계’로 재편된다. 확보한 수확물들을 관리하고 나눠주는 것은 인간일 것이기 때문이다.
3. D의 후각과 민첩함, 호전성을 활용한 부족은 식량의 생산량을 늘려 더 강성해질 것이다.
4. 강성해진 부족은 상대적으로 약해진 부족을 침략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류 최초의 군용 D가 출현한다. 강한 인간에게 충성하며 약한 인간의 목줄기를 물어뜯는 군용 D.
5. 군용 D를 갖춘 부족은 영토를 넓혀가며 더욱 더 부강해진다. 영토를 넓히는 과정에서 부족은 다른 지역의 다양한 D 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서로 다른 종인 D1와 D2 간의 교잡이 이루어진다.
6. 그 와중에 사냥이나 전투에는 부적절하지만 외형이나 공감능력이 뛰어난 Dn들이 태어날 것이다. 심미적이고 정서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인류 최초의 애완 D, 출현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일구어내는 것은 인류의 에로스이다.
삶은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계속될 것이다. 결국 인류멸망의 꿈을 포기하고 외로운 현세를 살아가기로 결정한 에반게리온의 이카리 신지 처럼, ‘모두 다 죽자’고 노래했지만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계속해서 새로운 음악을 만들고 있는 이랑 처럼 말이다. 권권이 다시 써 내려가야 할 미래의 역사에서, 인류는 새로운 에로스의 기술을 개발해야만 할 것이다.
질병과 징후, 그리고 처방
예술이란 종종 돌팔이 의사들의 처방전이나 꾀병 환자들의 징후처럼 느껴진다. 하필 ‘돌팔이’인 이유는 문제 상황을 엉뚱하거나 참신한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하필 ‘꾀병’인 이유는 문제 상황이 유발하는 증상을 ‘스스로 자아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문제상황’ 자체가 허구라거나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술가가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창작’이라는 독특한 도구를 통한 처방이나 징후는 우리로 하여금 문제 상황을 더 입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해 준다.
권권의 경우 ‘돌팔이 의사’라기보다는 ‘꾀병 환자’에 가깝다. 그들이 현실의 특정 국면에서 마주치게 되는 문제상황은 스스로의 내적 투쟁 과정을 거쳐 징후적으로 시각화된다. <세디, 도도와 만나는 방법>에서 기계라는 장치를 통해, <러브 데스 도그 시티>에서 언어라는 장치를 통해, < 러브데스도그 & 에필로그(프롤로그)>에서 꿈이라는 장치를 통해 드러나는 징후들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나와 개, 혹은 우리와 동물, 혹은 인류와 지구의 관계에 대해 전에 없던 방식으로 곱씹게 된다. BBC 다큐멘터리 감독의 저녁 식단에 대해 상상하게 된다.[28] 제주견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 야생 멧돼지의 생태를 걱정하게 된다.[29] 고양이 유튜브에서 ‘귀여움’을 소비하고 있는 구독자들의 정치 성향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30] 그렇게 우리는 권권의 질병에 전염된다.
병세가 중한 이들이 생긴다면 함께 모여 처방에 골몰해 보아도 좋겠다.
* 이 원고는 예술경영지원센터 지원 특별 기고로 게재되었습니다.
[1] 세계 곳곳의 야생 동물에 대한 다큐멘터리 시리즈. 각 에피소드는 사막, 산, 심해, 얕은 바다, 숲, 동굴, 극지방, 담수, 평야, 정글 등 다양한 서식지 다룬다.
[2] 제주도의 토종견에 대한 다큐멘터리. 멸종된 것으로 알려졌던 제주의 야생 멧돼지들이 갑자기 출몰하여 농가에 피해를 주자 사냥본능이 강한 제주견을 투입하여 멧돼지를 효율적으로 제압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3] 반려묘들의 일상을 기록한 유튜브 채널. 사람의 모습이나 목소리는 등장하지 않으며, 주로 고양이들이 집안에서 연출하는 귀엽고 앙증맞은 모습들을 담고있다.
[4] BBC나 National Geographic 류의 자연 다큐멘터리에서는 종종 인간의 환경파괴를 중요한 주제로 삼는다.
[5] 이하 ‘권권’
[6] 13min 57sec
[7] 17min 13sec
[8] 18min 20sec,‘도도와 밤세가 이끌어 준 오작동의 순간을 기억하며’
[9] 노쇠한 도도가 실금하여 남긴 노란 소변마저 아름다워 보인다.
[10] =세디
[11] 영국의 언어학자 그레고리 베이트슨이 주창한 개념. ‘권위자’와 ‘대상자’간의 의사소통 과정 중 발생하는 딜레마를 다룬다. ‘이중구속’은 권위자의 ‘모순된 메시지’를 받은 대상자가 그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는 모순된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12] 크레딧에 표기된 사료 인용처의 목록 : 서울역사 아카이브, 대한 주택공사, 서울시, 서대문구 역사박물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국가기록원, 국토지리정보원, AP archive, 국립고궁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국립국악원
[13] 26min22sec ~ 28min19sec. 한밤에 길에서 마주친 개에 대한 우화
[14] 26min 22sec
[15] 권위자>대상자
[16] 권위자<대상자
[17] 29min
[18] 2000년도에 제작된 Sega사의 <Seaman>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대사가 인용되었다.
[19] 어떤 대상을, 그것의 속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다른 낱말을 빌려서 표현하는 수사법. 성인 남성을 ‘넥타이’로, 우리 민족을 ‘흰옷’으로 표현하는 것 따위이다.
[20] 물론 허술하기 짝이 없는 논리이다. 수사적인 차원에서의 동일성을 실제적인 차원에서의 동일성으로 확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숭이 엉덩이도 빨갛고 사과도 빨갛지만 우리는 원숭이 엉덩이를 과도로 깎아서 아삭아삭 씹어먹지는 않는다.
[21] 권권 중 1인
[22] 아마도 ‘dog’의 약자
[23] <러브 데스 도그 시티>의 ‘초롱이’나 ‘송희’와 같은 삶의 태도 또한 극단적으로는 이러한 야생의 유토피아를 전망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24] 구 극장판 <End of Evangelion>, 1997
[25] 죽음 충동, 혹은 파괴 본능.
[26] 삶의 충동. 혹은 사랑의 욕망.
[27] 23min 40sec
[28] (의외로 육식 할지도?)
[29] (의외로 잘 지내고 있을지도?)
[30] (의외로 좌파적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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