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계지덕木鷄之德의 조증

출처 : 작가제공

  장자 외편外篇 달생達生에 목계지덕木鷄之德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닭 싸움을 좋아하던 왕이 ‘기성자紀渻子’라는 사람에게 맡겨서 최강의 투계鬪鷄로 기르도록 명하였고, 열흘이 지나서 물었다.
“닭이 이제 싸울 만한가?”
“아직 안 되었습니다. 지금은 쓸데없이 허세를 부리고 자기 힘만 믿습니다.”
다시 열흘이 지나 왕이 물었다.
기성자가 대답했다.
“아직 안 되었습니다. 다른 닭의 소리와 그림자만 보아도 쉽게 반응하고 덤벼듭니다.”
또다시 열흘이 지나 왕이 물었다.
기성자가 대답했다.
“아직 안 되었습니다. 간신히 참기는 하나 상대를 노려보는 눈초리가 사납고 사나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다시 열흘을 지나 왕이 묻자, 기성자가 대답했다.
“이제 됐습니다. 상대가 울음소리를 내어도 아무 변화가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상대에게도 동요하지 않고, 평정을 유지하며 마치 나무로 깎아 놓은 닭木鷄같습니다. 그 덕德이 온전해진 것입니다. 다른 닭은 감히 상대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부리를 감출 것입니다.”」[1]

  도박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한 고사이다. 목계지덕을 갖추고 잃은 것에 연연하지 않는 것. 크게 따고자 하는 심리를 버리고 돌발에 당황하지 않으며 평상심을 유지하라는 의미를 강조할 때 쓴다. 하우스나 랜드, 사설 토토에 이르기까지 이 덕목을 강조하는 도박인들이 많다. 본래 일화가 투계라는 도박에서 비롯되었으니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도박 중독자들의 수기를 즐겨 읽고, 직접 해본 적도 서너 번 있는데 소소한 안줏거리 일화들이 있지만 결정적으로 도박에 깊이 빠지지 않게 된 이유는 과거 언젠가 강원랜드에서 빅휠(커다란 원반을 돌려서 멈추는 곳에 돈을 거는 것)을 돌릴 때의 일 때문이었다. 빅휠의 원리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출처 : 작가제공

  그리고 원반의 구획도 짐작 가능하리라. 실버, 골드, 에메랄드, 다이아몬드, 크리스탈, 조커, 메가로 나누어진 랜드의 빅휠은 보통 처음 오거나 다른 게임을 대기하는 사람들이 십만 원 칩을 골드(2배)에 넣어 불리는 소소한(?) 게임이다. 문제는 내가 앉았을 때 나의 환청이 귓가에 꽂히도록(그는 평소에 조용히 말한다) “40배에 걸어”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칩을 내려놓는 위치가 서로 다르기에 보통 아래쪽 낮은 리스크에 칩이 쌓이고 하이 리스크인 곳에는 칩이 없는데 그 텅 빈 곳이 눈에 들어왔다. 딜러들은 이런 귀여운 변수에 반응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깔끔하게 칩을 걷고 단정하게 자신의 손에 아무것도 없음을 보이며 휠을 돌렸다. 시간이 느리게 갔다. 평소대로 가는 듯도 했다. 이윽고 휠이 멈췄을 때 그 칸은 조커에 있었다. 사람들이 나를 쳐다봤는지도 모르겠다. 왜냐면 바로 다음 목소리가 꽂혔기 때문이다. “이번엔 골드” 나는 첫 승리의 의기양양을 느끼기도 전에 어리둥절했고 호승심이 일었는지 신뢰감이 일었는지 유쾌했는지 골드에 칩을 세 개 올렸다. 결과는 당연히 골드였다.

  그리고 빅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뒤숭숭한 마음이 일어서 담배를 피우다가 구석에서 캠페인 차원의 도박 중독 예방 만화도 좀 보다가 100원짜리 슬롯도 몇 번 굴리고 악명 높은 시카고 머신 뒤에서 구경도 하다가 맥없이 돌아왔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생각했다. 그것이 왜 승리의 기억이 아닌 술자리 무용담 정도의 너절한 취급이 되는지. 왜 그러려고 하는지. 그 얘기에서 무엇을 얻고 싶은지. (기이한)도움을 받으며 40배를 땄을 때 나는 ‘내가 옳았다’는 황홀감에 잠시 도취하였는데 이것은 조증 삽화의 증상과 유사하다. 당연히 환청을 의식해 ‘이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지만, 수중에 들어온 돈은 이것이 내 행동의 결과임을 남겨주었고 얼마를 걸었는지는 상상에 맡기겠지만 40배로 불어난 돈을 ‘이것은 환청의 농간이야!’라고 랜드에 반납하고 올 것도 아니잖은가? 그리고 그런 비일상적 경험은 도리어 기억에 각인되어 내게로 하여금 평생 기억하게 할 것이다. 나는 보기 좋게 농락당했다. “네가 통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네가 선택하는 거라고 생각해?” 나는 틀렸고 병이 옳았다.

  그렇다고 나의 환각들이 모두 내게 선의를 품고 장기적이고 객관적인 전망을 열어주며 정보를 제공하는 씽크탱크들인 것은 아니다. 당시의 경험을 해석하면 첫째, 어느 지혜롭고 현명한 환각이 차기 도박중독자가 될 새싹의 미래를 염려하여 그에게 간단한 도박의 이치를 깨닫게 했다. 둘째, 어느 치사하고 비열한 환각이 조증의 단맛과 유사한 도박의 맛을 더 맛보게 해주려 손수 도움을 주려다가 반면교사가 되었다. 단순한, 둘 중의 하나의 경우일 뿐이다.

  실제 중국에서 지금도 목계를 어원을 고려한 의미로 쓰이는지, 단순한 조합으로 쓰이는지 모르지만, 번역서로 읽었을 때 대부분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가 된, 굳은, 이런 의미로 번역되어 사용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나무닭은 아시다시피 최고의 싸움닭이다.

  나는 1형 양극성 장애에 약간의 반사회성을 섞고 환각과 환청, 망상이 있는 정신증을 첨가하고 몇 가지 신체화 증상(신체적 증상을 보이는 병증이지만 원인 미상 또는 정신의학과적인 이유를 원인으로 하는)을 덧붙인 사람이다. 혹자는 중증정신질환자라 말하고 혹자는 조울증 환자라고 소개하지만 빌어먹을 근심 환患 자를 붙이는 환자라는 말은 조금 지겹지 않은지. 각설하고 나의 주主병인 양극성 장애는 계절성이라 간단하게 말하면 여름엔 조증이 오고 겨울엔 우울증이 오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번 여름에도 조증이 왔다. 조증은 사람을 들뜨고 흥분시키며 기민하고 재빠르게 만들고 생각의 속도와 폭을 향상하며 사고의 회전이 매우 빨라지고 언변, 작문 능력이 크게 늘어 쓸모가 많고 사회성도 좋아지며 생산성도 늘어나고 심지어 식사나 수면 같은 번거로운 일을 하지 않아도 신체도 함께 호응하며 사람을 아주 천재가 되었다고 생각하게 하는 병이다. 그리고 그옆에는 죽을 만큼 초조하고 불안해지며 모든 감각이 미칠 정도로 예민해지고 더 많이 보이고 더 많이 들리며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느껴서 무슨 일이든 하며 옳다고 여기는 건 무조건 옳다고 믿고 때로는 난폭해지며 때로는 폭력적이 될 수도 있으며 전국 팔도를 배회하다가 실려 갈 수도 있는 병이다. 그리고 나는 조증을 선택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다. 그러면 정신병자들은 내가 선택했고, 내가 제어할 수 있다는 마음이나 의지를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질병을 앓는 사람들이 질병을 택했는가? 그것의 변화를 ‘통제’ 할 수 있는가? 나는 어느 인터뷰에서 ‘표현하길’ 지금의 병에 적응해야 한다고 말한 인물이 되었다. 어떤 면모에선 적절할 수 있으나 적확한 표현은 아니다. 기왕지사 정신병이라는 더러운 싸움판에 내던져진 바 어떻게 하면 싸움을 이어갈 수 있는지 말하고 싶었지만 잘 전달되지 못했다. 필리핀의 투계 판에서는 싸움판에서 이긴 닭이든 진 닭이든 둘 다 요리 닭으로 결말을 맞는다고 한다. 많은, 아마 대부분의 정신병자들은 자신의 정신병이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임을 직감한다. 그것은 증세나 예후와 사람마다 케이스가 매우 다르지만 심각한 상태의 병자들이 자연히 자신의 말로에 대해 차마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을 품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그들에게 함부로 평정을 갖추길, 마음을 흐트러뜨리지 말길 바라는 나부랭이의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렇다고 죽음을 각오한 비장한 마음으로 병과의 결투에 임하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금번의 조증 삽화를 겪으며 나는 조증이 상륙한 이래 처음으로 ‘만반의 대비’를 준비했다. 의사와 전쟁에 임하는 총사령관과 장군의 마음으로 전투적인 토론을 거쳐 약물을 전부 조정하고 모든 일정과 미팅을 취소했고, 공개적 글쓰기를 중지했으며 모든 SNS 활동을 중단했다. 중요하지 않은 대화는 내뱉지 않았고, 운전 연습도 멈췄다. 지극히 단조로운 생활을 유지하며 나날을 보냈으나 결국 조절에 실패했다. 한두 달까지는 어찌어찌 넘길 수 있었지만 석 달이 넘어가자 대추 두 알 오이 세 알 정도 되는 인내심이 좌시할 수 없었다. 사건·사고가 생기거나 실수를 한 것은 크게 상관없는데 조증 삽화 동안 아무런 생산적인 결과물을 남기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파도쳤다. 곧바로 우울증 증상이 일어났고, 혼재성 삽화(우울증 증상과 조증 증상이 혼합해서 일어남)에 돌입했다. 삽화를 겪으며 나는 계속 장자의 목계에 대해 생각했다. 그렇게 하고 싶었다. 환경도 충분히 가능했고, 사회적인 일정은 미친듯한 안정제를 쓰면 잠시간은 흉내 낼 수 있으니까. 

  의사에게서 모든 금지령이 해제되었을 때는 이미 계절이 바뀌어 있었다. 생산성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무능력감, ‘아무것도 안 했다’ ‘쓸모가 없다’라는 허탈함은 여전히 남아있다. 조증이라는 중력에 이끌린 수많은 소행성 같은 근사한 생각들도 남김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한켠에 내가 깎다 만 나무 닭이 있었다. 무엇을 위해 조증과 싸우려 했을까? 사회적인 위신을 실추하지 않기 위해? 돈을 잃지 않으려고? 자신의 장악력을 시험해보기 위해? 나는 가장 최상의 조건이 마련된 상태에서도 목계지덕을 갖추지 못했다. 그런 나에게 다음 기회가 올 것인가? 아마 살면서 없을 것이다. 이 닭이 내가 만든 최고의 닭일 것이다. 그렇게 싸움판에서 이겼는지 졌는지 모르는 우리 닭은 이름 모를 요리가 되며 해를 마감했다. 누군가에게 판돈을 몰아줬고 누군가에겐 실망과 탄식을 안겨주고 사라졌다. 어떤 소수의 사람들은 그 시합을 잠시 돌이켜볼지도 모르고, 그보다 더 적은 사람들은 가끔 그때의 닭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다. 내 병과의 싸움은 결국 사람이든 병이든 둘 다 말로가 같고, 우리가 아무리 치열하게 싸웠든 그것은 질병의 이름으로, 혹은 내 이름으로만 기록될 뿐이며 싸움에서 패배한 자는 잊혀지고 싸움에서 이겨냈다 여겨지는 이들은 기억될 수도 있겠지만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목계지덕으로 도박의 심리에 대해 훈수를 두는 사람들은 주로 거하게 잃어본, 중독 상태이든 단도[2]를 했든 도박을 오래 했으며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이들이다. 어떤 사람은 고사성어를 빌어 ‘이런 마음으로 도박에 임하라!’라고 포켓몬 트레이너처럼 권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이 정도는 되어야 고작 도박으로 잃은 것에 인생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하며 어떤 이들은 ‘이런 경지에 올라야 진정 도박을 즐길 수 있으니 그 수준이 되도록 노력해라’라고 어흠대기도 한다. 정신병은 선택한 것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앞날과 미래를 일부 박탈당한 것도 맞지만 그 상태에서 멈추면 이를테면 싸움판에서 싸우지 않고 상대와의 싸움을 피하는 투계가 된다. 이긴 투계도 진 투계도 모두 죽지만, 이렇게 싸움을 하지 않아 살아남은 닭 또한 투계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여겨져 그 이유로 죽는다. 어쨌든 우리는 정신병이라는 이 원치 않는 전장에서 인생이나 일상의 일부를 잃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종종 생각한다. 그 깎다 만 어설픈 나무닭. 그리고 거기에 돈을 좀 걸어볼걸. 그리고 따면 내가 받은 돈에 대해, 진다면 내가 느낄 아쉬움을 남길 수 있었을 텐데. 그것이 소위 우리의 ‘잃어버린 시간’에 각인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걸 바탕으로 내가 무언가 하려 했던 것들을 다시 기억할 수 있을 텐데!

  내가 다시 도박을 하지 않을 거란 말은 거짓말이다. 나는 마카오에 가면 그곳에서 기계를 돌릴 것이고, 어쩌다 라스베가스에 가게 되면 기꺼이 칩을 던져댈 것이다. 경마 잡지도 제대로 읽어내리지 못하면서 경마장도 또 갈지도 모르고, 그밖에 잡다한 자리에서 우연과 확률을 빙자한 내기 놀음을 할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병과 나와 계속되는 도박을 할 것이다. 


[1] 『장자』, 장자, 오강남 역, 현암사, 1999 와 동양고전종합DB 참고

[2] 도박중독자들이 완전히 도박을 끊음을 의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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