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큐레이션: 작품 개념의 위반
포지티브&네거티브 큐레이션
전시 일반을 통해 구축되는 갤러리 공간은 어떤 방식으로 침범되고, 점령되며, 분할되고, 표명되고 있는가? 그것의 시초적인 중립성과 임의성은 큐레이터와 작가들의 어떤 실천을 통해서 변용되고 재조직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수의 전시들이 갤러리 내부에서 암묵적으로 지켜왔던 불문율은 무엇이었는가.
일반적으로 봤을 때, 출품된 작품들이 설치되는 순간은 하나의 비어있던 캔버스가 채워지는 과정과 유사하다. 작가의 스트로크를 통해 점차로 여백을 지워나가는 동시에 특정한 형태를 구축하는 회화는 3차원 갤러리 공간의 소모와 닮아 있다. 이전의 전시가 철수되어 텅 비어있던 갤러리의 공간은 다음 전시의 작품들이 배치되기 시작하면서 점차로 전례 없는 형상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갤러리의 공간은 스스로의 신체를 능란하게 만곡하는 요기yogi처럼 보인다. 전시에 따라, 큐레이터와 작가들의 협력과 반목에 따라, 작품의 매체와 매스에 따라 무한한 내용과 형태가 창출된다. 이때 큐레이션에서 공간의 문제는 다소 부차적이고 번거로운 문제처럼 취급된다.
이는 큐레이션의 프로세스에 기인한다. 먼저 큐레이터는 전시에 관한 기획을 구상하고, 기획에 부합하는 작가 내지는 작품을 선별한다. 여기서 큐레이터는 단순히 기획과 작품의 의미가 맺는 내용상의 통일뿐만 아니라, 작품의 쉐잎, 매스, 작품 간의 콤비네이션, 메시지 상의 순열, 챕터, 시너지에 이르기까지 다종다기한 요소들을 안건으로 상정한다. 와중에 큐레이터에게 주어진 갤러리의 물리적 구조는 ‘현실적 장벽’처럼 드러난다. 이 방해 요소는 말 그대로의 방해라기보단 차라리 반응에 가까운데, 기획과 배치에 관한 관념적인 태도를 수정하거나 타협하게 만드는 하나의 적법한 장애물이다. 이 현실적인 제약을 통해서 기획은 관념적인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불확실성과의 마찰을 빚는 실천적인 행위라는 점을 보장받게 되며, 나아가 전시는 복합적인 행위라는 인준을 받게 된다.
텅 비어있는 갤러리는 근본적으로 현실적인 제약을 두르고 있지만(m²라는 추상적 단위에서부터 기둥, 벽면, 채광, 인접한 도로를 오가는 차량의 굉음에 이르기까지) 그와 같은 제약을 에두르거나, 뒤덮거나, 종속되거나 넘어서는 실제적인 과정을 통해서 전시의 특수성을 약조하기도 한다. 이때 큐레이터는 각종 물리적인 제약을 극복하고 작품이 성물처럼 오롯하게 빛날 수 있도록 공간을 통제할 책임을 부여받는다. 그는 전시 기획에 따라서 관람에 효과적인 동선과 메시지를 고려하여 작품을 배치하는 동시에, 각 작품이 제 위치에서 어떠한 훼방 없이 최고의 스피치를 전달할 수 있도록 공간을 분할해야 한다.
그렇다면 작품을 설치하는 과정에서의 큐레이션을 포지티브 스페이스positive space와 네거티브 스페이스negative space 공간에 관한 디자인 실천 행위로 간주할 수 있다. 실제 전시 설치에서 작품이 공간을 차지할 구역을 설정하는 포지티브 큐레이션 행위만큼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여백의 양을 얼마만큼 조율하고 할당할 수 있느냐의 능력이다. 근본적으로 작품은 갤러리 내부의 임의적인 공간 어디에든 설치될 수 있다. 또한 작품이 가진 물리적인 크기만큼 항상적으로 요구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가정되고 소비된 공간이다. 그렇기에 큐레이션 행위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어디다 무엇을 거느냐’는 포지티브 스페이스 기반의 큐레이션이 아니라, 얼마만큼의 여백과 구획을 통해서 작품들을 떨어뜨려 놓고 작품군을 조율할 것이냐의 네거티브 큐레이션 감각이다.(이는 좌대-작품 간의 가시적이고 한정적인 논의를 뛰어넘어 고려되는 비가시적 요소이다.)
이 네거티브 큐레이션의 중요성은 작품이 스스로의 자율적인 위상을 담보 받아야 한다는 인식에 기인한다. 존재하는 모든 전시를 통제하는 단 하나의 율법이 있다면 작품이 갖고 있는 의도가 특정한 환경에 의해 훼손되지 않고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작품이 제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지받아야 한다는 인식이 근본적일 때 큐레이션 행위는 생기론적이다. 작품의 총체적 바이탈리티를 상정하고 배치에 따라 플러싱하는 행위로써의 긍정성이 큐레이션의 지반을 다진다. 여기선 오직 가산의 경제만이 순환한다. 작품의 감산은 어떤 방식으로든 큐레이터의 무능과 직결된다.
작품은 생물체처럼 다루어진다. 이는 작품이 의도를 갖고 말을 건네기 때문이기도 한데, 더 정확히는 수용자에 따라 다른 의미를 생산한다는 합의가 존재하는 이상 그것은 TPO에 따라 매번 다른 말을 건넬 수 있는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의 통시적인 합의를 초과한 어떤 공시성이 전제되고 있다. 역사적인 모든 사물군이 작품으로 선별되어 승인되고 표현될 때 그것의 개별성, 독특성을 담보하기 위한 조건은 공간이었다. 가시성의 한계가 권력의 한도이듯, 작품 주변을 채운 허공의 두께는 작품의 중요도와 호응했다. 따라서 작품에게 공간은 작품성을 입증할 쟁취의 대상이기도 한 동시에 승자의 점령된 영토이며, 점유한 공간 너머의 네거티브 스페이스에 자신의 아우라를 빌어 통제권을 행사할 토양으로 책정된다.
정리하자면 갤러리의 공간은 가변적이고 임의적이며 중립적인 공간이다. 비어있을 수도 있고, 들어차 있을 수도 있다. 공간 일부를 차지하면서 포지티브 스페이스를 생성하는 작품은, 동시에 네거티브 스페이스를 통해 자신의 영토 주권을 보장받아야 한다. 네거티브 스페이스까지 고려되지 않고서는 ‘온전히 표현될 권리’가 침해되지 않는 환경을 약조받을 수 없으며, 이윽고 작품은 뭉개지고 만다. 이것이 작품에 있어 공간에 관한 초역사적 1원리이다.
다크 큐레이션
위・<White hole>, 삼채널 영상설치, 조해나, 2021.
아래・<cd /웹사이트 구조의 편집과 활용/rmg.co.uk>, 가변설치, 구자명, 2021.
촬영: 임현준
⟪그리니치 천문대를 공격하라⟫전에선 여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하나의 큐레이션 형태가 출현했다. 구자명의 철골 프레임에 의해서 분리된 이 냉막한 공간은 출입이 철저하게 통제당하는 군사지역을 떠올리게 한다. 일차적으로 이 공간에서 느끼게 되는 당혹감은 일반적인 전시 동선이 완전히 박탈됨에 따라 좌우로밖에 움직일 수 없는 제한을 겪게 되면서 나타난다. 이 전시에서 갤러리 안의 동선을 내키는 대로 만들어내던 자유로운 관람자 주체는 소멸하고, 2차원으로 압축된 공간에서 설치물들을 관망할 수밖에 없는 객체만이 살아남는다. 그러나 공간에 대한 시사점은 이 체험적인 구간에도, 저 너머에 노출 중인 네거티브 스페이스에도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작품 간의 결합을 통해 완전히 메워지고 소멸된, 그럼에도 무無의 형태로 자리하는, 마치 저 우주의 암흑물질과도 같은 공간에 존재한다.
이것은 거리와 공간에 관한 문제이고, 나아가 작품의 개별성에 관한 문제이다. 구자명의 작업 <cd /웹사이트 구조의 편집과 활용/rmg.co.uk>의 철골 프레임 위로 조해나의 <White hole>이 올라서 있게 됨으로써, 각 작업은 각자가 가져야 할 거리를 갖지 못하고 샴처럼 붙어버린다. 이를 통해서 작품의 독립성과, 개별 작품이라는 정당화의 권리 자체가 전시 안에서 박탈된다. 바로 이 사라진 공간에 의해, 네거티브라고도, 포지티브라고도 할 수 없는 이 공간에 의해, 그럼에도 ‘사유될 수 있는’ 이 공간에 의해 기존의 실천과 확연히 구별되는 큐레이션이 관측된다. 작가주의적인, 자율적인, 개인적인, 낭만주의적인 모든 개념의 흡수, 그와 같은 개념들에 대한 절대적인 위반, 경계에 관한 무자비한 종식과 그로 인해 발생한 접경의 아이러니한 선명함이 바로 이 사라진 공간에 의해서 도출된다.
이때 스스로를 작품으로 규정할 논리 일반에 관한 개연성이 전면으로 문제시되면서 작품의 생생함, 그것의 활기, 플러싱 행위로써의 큐레이션 일체가 타오르기 시작한다. 이 전시에서 서포터로서의 큐레이터는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작품을 상호 충돌시킴으로써 작품으로서의 공시적 계율 일체를 침범하는 부도덕한 큐레이팅만이 자리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큐레이터와 작가의 수직적 위계에 관한 의혹이 가중되기 시작한다. 여기선 작품이 작품으로 존재할 수 있는 근거 일체가 부정되고 있다. 작품을 ‘쌓아놓아’ 잡동사니처럼 취급하고, 작품의 생생함을 엉겨 붙은 잿빛으로 물들이며, 기본권을 말소하는 억압적인 큐레이션을 행사해 작품을 큐레이터의 권속처럼 다루는 불온한 큐레이터십이 부각된다.
그러나 이 야만적인 큐레이션은 오롯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작품이라는 기만적이고 강력한 환상에 대한 기각을 요청하며, 전시 내부에서 균질적이고 수평적인 배치 형식을 통해 다원적인 환상을 조직하던 문화 일반을 배반하는 이질적인 환상을 제시한다. 작품 간의 수직적 배치는 작가-큐레이터 간의 위계적 관계를 넘어, 여타의 미술관이 수평적인 작품 배치를 통해 강화하던 다원적 이데올로기를 불쾌하게 고발하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작품 각자의 개성과 정체성이 순수하게 주장될 수 없는 접면을 갖게 되면서 추문에 부쳐지고, 이 폭력적인 접면이 작품의 완전체를 훼손하게 되면서 기존의 만연한 큐레이션과 속성을 달리하는, 음의 속성을 갖는 큐레이션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논쟁할 싹이 뿌려진다. 상이한 작업들을 접붙이는 행위는 키메라의 실험처럼 보이기도 한다. 키메라가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이유는 주체성의 소실에 관한 두려움과 연관된다. 그렇지만 전시 전경을 다시금 들여다보라.
벨레로폰[1]과의 사투가 번복될 것이다.
[1] 그리스 신화에 기록된 영웅. 납을 굳힌 창으로 키메라를 죽였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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