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방송 문화에서 인기 방송인의 몰락을 이르던 용어인 ‘나락’이 이제 와 확장된 의미를 가지게 된 일이 내겐 신기하게 느껴진다. 본래도 ‘나락(奈落)’은 ‘밑이 없는 구멍’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어원처럼 탈출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를 이를 때 종종 사용되곤 했으나, ‘나락도 락이다’ 밈과 피식대학의 유튜브 콘텐츠 <나락퀴즈쇼>의 성공을 계기로 인터넷 하위문화에서 사용하는 ‘나락’의 의미와 수평적으로 연결된 것 같다. ‘음지’ 문화의 상징과도 같은 만화가 겸 유튜버 카광의 콘텐츠 <나락의 삶>은 서로 인접해 있는 나락의 두 의미를 시사교양 다큐멘터리의 문법 위에서 매끈하게 통합해 낸 사례인데, <나락의 삶>이 종합하고 있는 ‘나락’의 기호 체계는 음지 문화에서 십수 년간 축적된 밈 이미지들이 질서 없이 뒤섞인 혼성모방을 통해 성립한다. 이 과정에서 나락의 주변적 의미들이 지시하던 여러 수렁과 실패, 좌절들은 나락의 강렬한 이미지와 단어 자체의 말맛으로 인해 휘발되고 인터넷 밈의 지위를 획득했다.[1]
“한국에서는 잘못을 저지르면 (리믹스에 사용되는) 악기가 된다”는 말처럼, 이때 인터넷 밈으로서 ‘나락’은 물의를 일으킨 공인의 이미지를 해체하고 살해하는 절차인 ‘캔슬 컬처’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캔슬 컬처가 적어도 표면상으로 ‘논란’의 공론장에서 학교폭력, 갑질, 뒷광고 등을 도덕적으로 판결하고 징치하는 사회적 공연인 반면, 논란을 떠받치고 있는 사이버렉카들의 영상, 커뮤니티의 게시물들은 ‘논란’이라는 장소를 초과하는 거대한 군집을 일시적으로 이루고, 곧이어 나락의 락 페스티벌이 개최된다. 이 축제에서 무대에 올라 ‘캔슬’되는 개별 인물이나 사건들의 귀책이나 원인은 중요하지 않다. 문화연구자 안희제가 지적하듯, 논란을 증폭하고 확산하는 나락•논란의 네트워크 자체가 이미 논란의 골자다. 이 네트워크를 제외한다면 남는 것은 정말로 ‘바닥이 보이지 않는 구멍’으로서 나락의 이미지뿐일 것이다. 나락은 텅 빈 기호이자 인터넷 밈으로서 다크투어 상품으로 재개발된다. 관광객들은 튼튼한 끈을 몸에 묶고 구멍 속으로 번지점프를 할 수도 있고, 스카이워크 위를 걸으며 스릴을 즐길 수도 있다. 이런 가운데서, 정녕 ‘나락도 락이다’라고 무구하게 외칠 수 있을까?
〈나락퀴즈쇼〉는 퀴즈쇼의 포맷을 빌려 이처럼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일부가 된 ‘캔슬 컬처’를 풍자한다. “당신도 언젠가 나락을 간다”는 진행자 김민수의 살벌한 경고는 게스트에게 임사체험의 기회를 유쾌하게 제공한다. 애당초 게스트를 나락에 보내기 위해 짜여져 있는 쇼에서, 게스트는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을 고르거나 인물의 헤어스타일 사진만 보고 독립운동가인지 친일파인지 가려내야 한다. 이 각각의 문제들은 곧장 과거의 어느 연예인들의 특정한 ‘정치 성향 논란’, ‘역사 무지 논란’ 등의 부조리함을 환기한다. 물론 진행자 혼자서 나락의 문을 열 수는 없기에, 〈나락퀴즈쇼〉에서는 누구도 나락에 가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캔슬 컬처는 논란 바깥의 제삼자들에게 권한 위임을 통해 확산되는 사회적 공연이지만, 〈나락퀴즈쇼〉의 디제시스에는 게스트의 ‘처형’을 집행할 관객도, 방청객도 존재하지 않는 탓이다. 엄격하게 무표정을 유지하는 피식대학 크루들, 그리고 유일한 참관인으로 초청된 게스트의 매니저가 ‘웃참’하는 장면이 웃음을 자아내는 요소로 작동할 뿐이다. 충주시 유튜브 운영자로 인기를 얻은 김선태 주무관은 〈나락퀴즈쇼〉에 게스트로 출연해 지난 시장 선거에서 누구에게 투표했냐는 질문에 ‘투표를 안 했습니다’라고 답한다.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는 이 순간 공인이 ‘논란’에서 ‘탈압박’[2]하는 생존형 기술로 연결된다. 안티페미니즘 성향의 커뮤니티에서 자주 인용되는 아이유의 JTBC ‘뉴스룸 문화초대석’ 인터뷰 사례처럼 말이다. 아이유는 ‘여성 솔로 가수가 골든디스크 대상을 11년 동안 받지 못한 이유’를 물어보는 손석희 앵커의 질문에 ‘가수가 대상을 받는 일이 힘들다’며 빠져나온다. 그녀의 인터뷰는 ‘정치적 의도’가 다분한 상황에서 ‘우문현답’으로 빠져나온 사례로 칭송받는다. 그 뒤엔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 이미 나락에 빠진 몇몇 연예인들의 사례들이 배경 삼아져 있음은 당연하다. 아이유의 현답은 그녀의 스타로서의 자격을 증명하는 동시에 그에 대조되는 수많은 나락들을 꾸짖는 모범답안으로 기능한다.
이쯤 되면 캔슬 컬처는 미투 운동 등에서 소수자들이 택한 ‘최후의 수단’이자 연대 전략이길 벗어나고 사회적 의례의 형식만을 강탈하고 폐기하는 것이나 다름 없어진다. 고개 숙여 사과하는 공인의 이미지와 손글씨로 적은 그의 사과문은 재조립하여 그를 조롱하는 놀이의 퍼즐 조각이 된다. (그림 1) 미디어학자 이토 마사아키는 이렇듯 캔슬 컬처가 사회 문제와 논란을 해결하는 ‘최초’의 수단이 되어버렸다고 탄식한다. 아이유처럼 능숙하게 논란의 ‘불씨’를 잠재우지 않는다면, 논란과 나락은 이제 어떤 유예기간이나 재심청구 기회 없이도 당신을 덮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최초의 수단으로써 캔슬 컬처는 문제를 도덕은커녕 사회적인 것으로 간주하기조차 거부한다. 도덕은 어둠을 캔슬하고 다수자를 다수자로 공인하는 토큰으로 활용되는데 그친다.
논란의 참여자들은 흔히 ‘사이버 재판관’으로 비유되지만 실은 도덕 감정을 투자하고 포트폴리오를 굴려나가는 개인 투자자에 더 가깝다. 유행이 유행에 따르는 이와 그렇지 않은 자 사이에 차이를 확신시키다가 유행이 사회 전체를 덮는 순간에 차이가 사라지듯이, 논란이 커질 때 도덕의 이미지는 활발히 홍보되다가 논란 당사자가 나락으로 빠지는 순간에 도덕이라는 구실과 함께 차이가 사라진다. 도덕은 결코 논란의 목적이 아니다. 소속 아이돌의 ‘인성 논란’으로 기획사의 주가 그래프가 파랗게 물들어 ‘나락장’에 들어서면 실로 많은 이들이 이득을 본다. 그가 본디 나락과 거리가 먼 인물이었을수록, 그가 받고 있던 ‘대중의 사랑’이 많으면 많았을수록, 나락장에는 더욱 많은 판돈이 걸리게 된다. 이 추락의 낙차, 위치에너지는 나락장에서 거둘 수 있는 불로소득에 비례한다. 진작에 ‘쎄함’을 느꼈다며 ‘숏’[3]을 쳤던 투자자들은 수익을 정산한다.
한편, 나락에 빠진 이에게 ‘나락행’이라는 사건은 논란이라는 닫힌 내러티브의 결말부로 그의 삶에 정박해 버린다. 이전에 논란 당사자가 수행했던 모든 발화와 행동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나락에 의해 재규정되고, 사과문이나 해명은 과거의 ‘증거’들에 미달하는, 진정성이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논란은 그가 지금껏 살아온 생애에 통일성과 논리적 응집성을 요구하지만, 그 누구도 자신이 한 말로 스스로를 반박하는 ‘내로남불’을 피할 순 없다. 서로 다른 원인과 특이성을 가진 사건들은 ‘나락’이라는 내러티브 장치에 의해서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단 하나의 서사로 수렴한다. 누군가가 처신을 잘못해서, 그것은 그의 타고난 도덕적 결여 때문이어서, 그로 인해 팬들의 사랑과 기대를 배반해서, 나락에 갔다는 것이다.
이것은 엄밀히 말해 내러티브랄 수도 없다. 도덕의 내용이 아니라 도덕의 이미지와 불화하는 삶의 본래적인 균열들을 살해하는 절차로서 논란은 역설적으로 사건을 더 들여다보지 않으려는 공장식 정보 처리다. 축적되어 있는 나락의 밈 이미지 체계는 그 자체로 오물을 외부로 유출하지 않는 안정성 높은 처리시설이 된다. 나락의 강력하고도 파멸적인 이미지가 논란이 소환하는 도덕 의례의 토대 없음을 보충하는 동시에, 이 토대 없음이 나락을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조형한다. 종국에 나락은, 그 자신이 가지는 비판으로서의 성격과 함께 전적으로 스펙터클로 회수된다. 나락의 스펙터클의 성격이 여기서 간명해진다. 기 드보르의 말을 빌리자면, 나락의 스펙터클은 경험을 말소한 관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 덕에 나락에서 허우적거리는 삶들은 시청자들에게 확실한 위안이 된다. 자유 낙하에 대한 불안은 일시적으로 해결되고, 불가역적인 퇴락에 빠진 이들은 현실의 문젯거리들과 균열을 자신의 몫인 양 끌어안고 이미지의 자살을 택한다.
이 지점에서, 희생자들의 후일담을 상상해보기 위해 글의 처음에서 언급했던 나락의 다른 용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나락의 다른 모습은 곧 ‘엽기’스러운 ‘음지’이다. ‘나락’이 본래 아프리카TV 등 인터넷 방송에서 크리에이터가 논란을 통해 인기를 상실해 몇 안 남은 시청자를 위해 더 저질스럽고 선정적인 콘텐츠를 만들게 되는 일을 이르던 것처럼, 캔슬컬처에서 나락의 하수구 너머는 인터넷 하위문화의 쓰레기 하치장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캔슬 컬처의 참여자들은 나락 이후의 삶을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보다 ‘바닥’에 가까운 음지 문화에서 나락은 비록 그것이 텅 빈 이미지에 불과할지라도 참여자들에게 적극적인 응시와 관찰, 분석의 대상이 된다. 이는 음지가 양지를 지탱하고 있는 하부 구조라는 세계관 속에서 심연이 곧 실재의 파편처럼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나락과 음지 이미지의 추잡함과 천박함은 전도된 포르노그래피와 같다. 포르노 중독자가 사정을 지연하고 욕망을 끝없이 지연하듯이, 나락과 음지의 이미지는 혐오감을 통해서 응시를 지속시킨다. 슬라보예 지젝은 성기를 과대하게 클로즈업하는 포르노그래피가 매혹과 혐오를 동시에 불러일으키면서 실재를 향한 열망을 자극한다고 말한다. 이 매혹과 혐오는 프로이트가 언캐니라고 이르는 것에서 그러하듯이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려있다. 마크 피셔가 지적했듯이, 운하임리히의 보다 정확한 영역어는 언홈리(unhomely)이다. 음지에 거주하는 이들에게 음지는 모성의 디스토피아이자 조금 어두컴컴하지만 즐거운 집이다. 그러나 이 집의 지하실 문은 잠겨있으며, 그곳은 두렵고 낯선, 바로 그래서 문고리를 돌리게 만드는 공간이다.
예컨대 오늘날까지 디시인사이드에서 유저들이 서로를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인 ‘게이’는 이 지하실에 거주한다고 상상된 존재들이다. 이는 남성 동성애자들을 직접 지칭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음지에서 웃음과 관심으로 추동되는 호모소셜의 물에 비친 환영에 불과하다. 음지의 합법적 지배자로 여겨지는 남성들은, 남성에 미달한다고 여겨지는 게이, 도태남, 하남자, 그밖에 (비)남자들의 정체성의 찌꺼기들을 마구잡이로 빌려 쓴다. 2000년대 인터넷을 떠돌았다면 누구든 한 번쯤은 걸려들었기 마련인 ‘낚시’ 링크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미끼는 ‘레바논 다이빙 사고’를 비롯한 고어 사진들과 ‘미트 스핀’과 같은 게이 포르노 합성물이었다. 이들은 모두 ‘엽기’라는 모호한 범주로 묶여 불렸다. 이 엽기 취향은 디시인사이드를 비롯한 한국 인터넷 문화 특유의 정서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너도 병X, 나도 병X’라는 정서적 평등주의였다. 고어하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의 생명력은 인터넷의 전방위적 확산과 함께 점차 사라졌지만, 엽기 문화 중 ‘붕탁물’로 대표되는 ‘게이’ 모티프만큼은 음지 문화에서 계속해서 공동체의 아교로 사용되며 생명력을 이어왔다.
엉덩국의 만화 〈성 정체성을 깨달은 아이〉는 붕탁물 문화에서 ‘게이’라는 상상적 고안물의 특성을 극명히 보여준다. 이 만화에서 호기심에 처음 게이바[4]에 간 소년은 “들어올 땐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땐 아니란”다는 ‘게이’들에게 붙잡혀 게이로 ‘제작’된다. 6년 후, 그는 같은 위치에서 동일한 대사를 던지는 위치가 된다. 여기서 확인되는 ‘게이’라는 형상은 섹슈얼리티의 가소성의 혐오적 독해를 바탕에 두고 있다. 엉덩국의 만화에서 우연한 사고로 ‘게이 같은 짓’을 한 이성애자 남성들은 정말로 ‘게이’가 된다. 입을 벌리고 있는 쾌락에서 탈출구는 없다. 여기서 붕탁물이 ‘디나이얼 게이’인 이성애자 남성들이 동성애를 향한 내적 공포와 욕망을 규율하는 방편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붕탁물의 만화의 작가와 시청자들이 자발적으로 ‘나도 이러다가 게이 될지도 모르겠’는 나락으로의 트랜스 상태까지 친히 내려왔다가 돌아간다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합성 소스로서 붕탁물은 남성 이성애자가 ‘게이’로 탈바꿈하는 순간을 끝없이 반복한다. ‘게이’들은 붕탁물 속에서 소진되지 않는 향락을 누린다. 붕탁물의 애청자들은 ‘게이’나 ‘여장남자’ 콘텐츠에 ‘절여진’ 나락으로의 트랜스 상태에서 혐오와 매혹을 동시에 경험한다. 붕탁물 속 ‘빌리 해링턴’은 시청자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영원한 오르가즘의 세계로 시청자를 끝없이 유혹하는 바로 그 순간에 밀어낸다. 만약 경계를 넘어 들어가면, 돌이킬 수 없는 신비한 가소성이 이들을 영원토록 나락에 붙잡아둘 것이라며 위협하기 때문이다.
붕탁물의 전통을 녹여내는 인터넷 밈 ‘해병문학’도 이같은 세계관을 구축함으로써 음지의 모순과 균열을 형상화하는 사례다. 해병문학은 해병대의 병사 부조리가 계속되자 이를 영웅담의 형식으로 패러디하는 데서 시작된 공동창작문학이다. 당초 징병제의 문제점과 해병대의 마초주의를 비판한다는 목적에서 시작했지만, 해병문학이 그리는 세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엽기문화의 계승자들이 모여들어 분류되지 않는 끔찍하고 어리석은 것들을 던져 넣는 림보로 작동하게 된다. 항의가 진부해진 세계에서는 자해가 유일하게 가능한 제스쳐가 된다. 해병문학에서 해병대 병사는 고작 수초의 ‘마라톤 회의’ 이상으로는 숙고할 수 없는 단세포들이면서, 동성 강간과 인육 섭취를 일삼는 악한들이자 그 자체로 비체들이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군생활 속에서 섹스하고 토하고 배설하고 그걸 다시 섭취하며 자족하는 이들은 반성적 무기력을 애써 유쾌함으로 치환하려 하는 것만 같다. 나락에서 파국은 이처럼 일상이 된다. 선임의 징벌로 ‘해병 수육’이 되어버린 병사들이 다음 날이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되살아나듯이, 파국은 근미래에서 존재감을 뽐내기만 할 뿐 아니라 러브크래프트의 코스믹 호러에서처럼 몇 번이고 반복된다. 붕탁물을 위시한 음지 문화는 파국을 위악적으로 반복하며 나락을 연습한다. 어떤 삶들의 비참함,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위태로움은 나락의 바깥에서 진행되는 ‘지속 가능한’ 삶들에 고통스러운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인터넷 밈을 통해 음지인들이 공유하는 나락의 정서가 현실의 빈곤함이나 약자성으로 곧장 이어지는 것은 아님을 다시 한번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음지 커뮤니티의 ‘도태’되었다는 자기의식은 현실 공간의 ‘도태남’들을 지하실로 몰아넣으면서 성립하기 일쑤다. <나락의 삶>이 <인간극장>,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등 시사교양 다큐멘터리의 형식을[5] 빌려 가공하는 리얼리티는 가공되지 않은 돌출부들, ‘선 넘는’ 질문에 당황하는 인터뷰이의 표정, 치워지지 않은 방의 난잡함, 너무 크거나 왜소한 몸 등을 근거로 성립하지만, 이러한 순간들의 독특성(과 소수성)은 체계의 안정성을 위해 그 바깥에 있는 예외적인 것으로 가정되고 배치된다. 붕탁물에서 게이라는 상상적 고안물 역시 현실의 동성애자들과 유사성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추상화된 존재들이지만, 당연하게도 이 오배를 가능케 하는 호모포비아는 현실의 동성애자들을 향한다. 액정 화면을 통해서만 판결을 내릴 뿐인 논란의 결과 현실의 누군가가 ‘캔슬’되어 나락에 가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이미 언제나, 너무나도 현실이다. 나락의 상상적 영토는 실제의 나락, 빈곤함, 더러움, 어리석음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서로를 ‘게이야’라 부르며 은밀히 형성되는 커뮤니티에서조차 아무도 동성애, 나아가 나락을 자신의 손으로 만지려 하지 않는다. 이들은 언제고 화면 속에, 안전한 희생양으로 남아 있는다.
그 결과 자신에게 달린 사랑과 자본, 자신의 인생을 개선할 기회를 걷어차고 보란 듯이 나락으로 기어들어가는 자들은 발언권을 뺏긴다. 어리석은 이들의 선택을 조소하는 사이버렉카들의 영상에서는 ‘국평오’(국민 평균은 오등급)를 운운하는 댓글들로 범람하지만, 그 자리에 정작 평균 이하의 삶들의 발언대는 없다. 그들은 삶으로 이미 발언을 끝냈다고 여겨진다. 정작 그들은 ‘캔슬’할 수도 없는 존재들임에도 말이다.
〈나락의 삶〉에 등장하는 게스트들은 자신의 나락됨을 변명하는 대신 1인 방송을 통해 전시하면서 생계를 이어간다. 미래와 삶의 지속성이 불투명한 이들에게, 자기 전시는 당장의 비참함과 결여를 손쉽고 유쾌하게 환금하는 수단이다. 시청자가 직접 감당하기 힘든 수준의 비참함은 ‘빈곤포르노’나 시사예능의 포맷을 통해서만 인식 가능하게 번역된다. 시청자들이 나락을 오해하는 만큼, 나락도 시청자를 속인다. <나락의 삶>이 특수한 지점은, 주로 촬영대상의 고립된 이미지와 댓글창 사이에서 성립하던 위계적 관계를 영상의 디제시스 안으로 비교적 수평적으로 옮겨놓고 있다는 점이다. 탈동성애 다큐멘터리나 <나락의 삶>이 레퍼런스 삼는 시사교양 프로그램과 달리 인터뷰어를 자처하는 카광 자신의 ‘음지성’(이자 소수성)은 인터뷰이와 공명하며 뒤틀린 라포를 형성한다. 지금껏 나락의 이미지가 스타를 스크린 속에 고립시키는 스타 시스템(폴 비릴리오)의 전도된 버전이었다면, <나락의 삶>에서 나락들은 주눅 들어 있지 않다. 삶을 개선할 것을 다짐하며 소파에 앉아 눈시울을 붉히지도 않는다. 시사교양의 문법이 일반인을 취재대상으로 삼음으로써 확보한 리얼리티를 감정을 극화함으로써 보수적으로 중화했다면, <나락의 삶>은 그 문법을 폐기하고 의식적으로 우회함으로써 이들이 처한 개인적, 사회적 부조리를 외시하는 효과를 낸다.
이러한 시도가 기성 미디어에 비해 더 ‘정확하게’ 실재를 재현하고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버리고 만 감은 있지만, 이 모든 시도는 애초에 비참함, 빈곤함과 대화가 불가능한 ‘평균’ 위에 수립된 인터넷의 담화 주체들이 스스로의 주체성을 정초해 내는 사이클 속에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 인터넷 하위문화에서 음지, 심연, 나락은 체계 바깥에 있어 안전한 유희의 대상으로 여겨지나 바로 그 덕분에 진지한 탐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때 댓글에서 빈번히 인용되곤 하는 ‘우리가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본다’는 니체의 아포리즘이 이러한 응시와 탐구의 소실점 중 하나로 놓여있음은 분명하다. 도덕의 이미지 소비로 숙고를 대체하는 동시대의 피로함과 무기력함에도 불구하고, 나락 이미지의 외시적이고 전염되는 속성은 저속함과 어리석음 위에 견고하게 배치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구조를 계속해서 역동하게 만든다. 누군가를 나락으로 보내는 일이 가학적 흥분 위에서 이루어지는 반면에, 음지에서 나락의 이미지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일은 따라서 언제고 ‘길티 플레저’로 남아있을 것이다. 이 길티 플레저의 장에서는 누구도 최종적으로 유죄 판결을 받지 않는다.
물론 이런 유예와 급진성은 폐쇄적인 밈과 나락의 스크린 안에서만 유효하다. 그러나 (시몬 베유가 힘주어 말한 대로) 우리가 나락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을 때에만, 환상이 사라지고 실재가 나타나기를 기대해 볼 수 있다. 서로의 빈자리와 결여를 채우는, 조금 다른 상상력과 조금 다른 경로의 모색이 모두를 살게 하기 때문이다. 이 난장판 속에서 살아가는 일 자체가 그 빈자리 위를 영원히 공회전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런 한에서, 나락은 언젠가 정말로 락이 될지도 모른다.
[1] 인터넷 하위문화의 사회적 방언이었던 ‘나락’이 본격적으로 ‘밈’이 된 것은 인터넷 방송인 감스트의 발언을 합성 소스로 활용해 리믹스한 <나락송>의 덕택이었다.
[2] 여러 명의 수비수에 둘러싸인 ‘압박’ 상황에서 빠져나오는 축구 기술을 일컫는 용어이나, 난감한 상황이나 질문에서 빠져나오는 사회적 기술을 보다 확장적으로 이르기도 한다.
[3] 주식이나 비트코인 거래에서 ‘숏(short)’은 향후 코인 시세가 하락할 것에 배팅을 하는 포지션이다.
[4] 만화 속 ‘홍콩행 게이바’를 찾은 이들의 복장을 보면 실은 SM바에 더 가까워 보인다.
[5] 문제 상황에 놓인 일반인들의 모습을 전시하는 이들 시사교양 프로는 인터넷 밈의 다양한 소스를 제공하는 원천이기도 했다.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엄마도 사람이야 사람’ 등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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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라는 단어가 게시판 이용자의 준말이 아니었나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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