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OW YOUR MEME, 동시대 미술이라는 밈

강현
2024.10.20

예술에 있어 포스트 시네마란 무엇인가

  근래 첫 개인전을 가지거나 개인전 이전부터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는 작가들이 있다. 대개 인터넷 공간에서 흔히 서브컬처로 여겨지는 짤방, 쇼츠, 유행어와 같은 인터넷 밈뿐만 아니라 컴퓨터 게임, AI 생성 이미지와 같은 디지털 컨텐츠를 아우르며 이러한 뉴미디어 기반 문화소를 핵심 소재로서 다루는 공통점이 있다.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생으로 이뤄진, 세미 밀레니얼 세대의 작가들이 점차 예술계에 등단하기 시작하면서 자신들이 향유하고 있는 문화의 표현형과 그에 대한 감각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와 주제로 삼는다는 점에서, 같은 문화적 동질성을 공유하며 세대적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젊은 관객들에게도 호응을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처럼 뉴미디어 환경에서 활발하게 이뤄지는 인터넷 밈과 같은 서브컬처 요소를 직접 작품으로 전유하는 작업을 곧바로 ‘포스트 시네마’적이라고 범주화할 수 있을까? 애시당초 예술에 있어서 ‘포스트 시네마’란 무엇일까?

  우선 학술 분과로서 영화학에서 포스트 시네마가 어떻게 논의되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포스트 시네마에서 포스트라는 접두사가 보여주듯이 시네마를 둘러싼 환경과 매체적 변화에 초점을 맞춘 담론이다. 90년대 후반부터 점차 디지털 매체가 본격적으로 시네마 제작 환경에 적용되기 시작하는 것과 인터넷 환경의 전면화가 맞물리며 영화 관람의 시청각 환경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매체적 혁신이 시네마의 본질적 요소라고 여겨지던 것들에 ‘위협’을 가하기 시작한 것으로 이해되면서 본격적인 포스트 시네마 담론의 시동이 걸렸다.

  디지털화는 “관객이 (정지된 화면을) 응시함으로써 경험하는 가상의 이동성만이 아니라 … 이동성의 심대한 확장”을 가져왔다.[1] 모두가 다양한 형태와 성능의 출력장치-스크린을 휴대하며 언제 어디서든 자유롭게 영화를 관람할 수 있으며 영화의 재생과 정지, 배속 등을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는, 여태껏 허락된 적 없었던 권한도 얻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제작과 유통, 편집, 보존 부문에서 필름이라는 영화의 물리적 기체가 갖는 특성-한계마저 ‘극복’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매체가 가지는 물성과 그 물성에 기반하여 성립하는 표현 문법을 강조하는 매체 특정성의 관점에서 디지털화가 촉발한 포스트 시네마의 ‘포스트’는 “이전 시대와 그 시대 고유의 양식이 종료되고 변형되었음”을 의미했다.[2]

  그러나 초기 ‘디지털 임팩트’가 불러온 학술적, 산업적, 장르적 충격은 과도기를 지나 디지털 뉴미디어 환경이 전면화되면서 완화되었고, 이러한 환경을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로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이뤄졌다. 특히 이러한 접근법 중에서 매체 자체의 변화뿐만 아니라 그 매체들 둘러싸고 있는, 장르 의미를 생산하는 관련 대상들과의 다양한 관계망들을 살펴보는 논의가 출현했다. 앙드레 고드로Andre Gaudreault와 필립 마리온Philippe Marion은 《영화의 죽음? The End of Cinema?》에서 영화미디어학적 이해로서 포스트 시네마가 갖는 의의에 관해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결과적으로, 매체의 정체성은 항상 조정되어야 하고 때로는 재정의되어야 한다. 즉 매체의 정체성은 수많은 복잡한 질문에 걸려 있다. 우리는 매체의 특징성이 결코 분리나 고립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특히 디지털 시대에, 매체에 접근하는 바람직한 방법은 이 매체가 다른 매체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매체를 이해하는 방식은 매체의 차원-경계를 열고 매체 정체성의 다른 프리즘과 함께 그 필연적인 중간 관계 안으로 진입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 하나의 매체는 매체와 매체의 혼합을 관리하는 방법을 통해 그 특징을 확보한다는 것이다.[3]

  이러한 조정과 재정의로 이해되는 포스트 시네마 담론은, 포스트를 종료와 변형이 아니라 화이트헤드적 의미에서 ‘과정’의 존재론이자 시네마가 다른 대상들과의 관계와 위치라는 상대적 좌표를 재설정re-location하는 작업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토마스 엘새서Thomas Elsaesser는 “디지털화를 기술적 기준보다는 영화의 역사와 영화 이론에 대한 오늘날의 이해를 다시 생각하도록 하는 하나의 영점으로 고려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지도 모른다”고 말했으며,[4] 프란체스코 카세티는 “포스트-시네마는 한 모델의 종말이 아니라 오히려 시네마가 원래 갖고 있던 특성들의 귀환이다. … 포스트-시네마는 또한 탐구되지 않은 채 버려졌던 가능성들의 실현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러한 포스트 시네마 담론을 통해서 매체란 “미적 대상과 매체의 역동적인 불안정성과 비순수성, 가변성을 인식하게 하고, 이를 통해 영화의 역사와 현재를 지속적으로 재창안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내포된 외연’”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5] 예술 매체가 “부단한 자기 변신mutation이 역설적으로 자기 존립subsistence의 방법론”[6]이란 인식을 확인했다면 다시 글머리에서 던진 질문으로 돌아가서 답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포스트 디지털이란 급격한 환경 변화를 시네마가 어떻게 수용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할지 탐색하고 시도하는 것이 포스트 시네마 담론이었다. 그렇다면 단순히 포스트 인터넷에서 이뤄지는 ‘시네마 이후’의 문화, ‘시네마 아닌 것’으로서의 컨텐츠를 다룬다는 이유만으로 포스트 시네마적이라고 범주화하는 것은 ‘시네마의 죽음’만큼이나 고정된 정체성을 상정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한 이해는 국제정치학에서 국가를 침투 불가능하고 단일한 통합체로 파악하고, 그러한 국가들끼리 작용-반작용 운동을 주고받는다고 상정하는 ‘당구공 모델billiard model’의 매체론적 판본이라 환언할 수 있다. 그리고 국가를 정의하는 방식 때문에 당구공 모델이 암상자black box 모델로도 불린다는 점을 떠올리면, 그것이 마찬가지로 브뤼노 라투르가 말한 블랙박스화―성공적으로 이뤄진 ‘번역’ 작업을 통해서 나타난 이종적 하이브리드가 사후에 하나로 응축되고 단순화된 상태―이기도 하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라투르의 행위자 연결망 이론ANT을 참조한다면, 예술, 그중에서도 회화나 조형, 퍼포먼스 등 각각의 세부 장르들도 다른 매체와의 새로운 관계망 속에서 각자 나름의 포스트-의 국면conjunction을 구성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포스트-시네마가 성립한다면, 마찬가지로 포스트-회화, 포스트-사진, 포스트-텔레비전, 포스트-카메라, 포스트-책, 포스트- 포스트- 포스트- …의 무한한 과정과 그 연쇄가 예정되어 있다. 그 연쇄 속에서 떠오르는 네트워크를 살펴야만 우리는 동시대적인 예술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포스트는 단절과 이후를 뜻한다기보다 모든 과정적 상태 속에서 현재 위치 표시를 위해 임시로 박아둔 말뚝post을 의미한다.

  이러한즉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주제는 ‘포스트 시네마를 잘 체현하는 작가’가 아니라 ‘포스트 시네마라는 매체론적 고민을 추동시킨 포스트 국면을 예술은 어떻게 마주하고 있으며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이다.

포스트 예술, 빈곤함에서 풍부함으로

  포스트 국면 속에서 예술의 위치를 이해하는 데 있어 히토 슈타이얼의 작업을 선행연구로서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텍스트와 작업을 통해서 포스트 국면을 구성하는 핵심 개념을 포스트-재현, 포스트-진실, 포스트인터넷으로 크게 세 가지로 제시한다. 각 개념의 내용을 여기서 상세히 다룰 수는 없지만 이 세 개념은 모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 근간에는 소위 근대성으로 여겨지는 주체, 진실, 객관, 인간중심주의와 같은 패러다임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전환의 흐름이 현대 사회에 들어서는 군산복합체 기술이나 자본주의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는 문제의식까지 나아간다.

  슈타이얼은 근대적 패러다임이 기능부전에 빠진 포스트 국면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대상으로 그러한 환경 안에서 생성되고 유통되는 이미지에 집중한다. 그는 디지털 이미지가 생산되고 유통되는 과정 속에서 다양한 이유로 가해지는 다양한 변형과 변조로 인해 생겨나는 복제된 이미지 존재를 ‘빈곤한 이미지’라고 명명한다.

  빈곤한 이미지는 움직이는 사본이다. 화질은 낮고, 해상도는 평균 이하, 그것은 가속될수록 저하된다. 빈곤한 이미지는 … 해상도에 따라 순위와 가치가 매겨지는 외양의 계급사회 내의 룸펜 프롤레타리아다. 빈곤한 이미지는 업로드되고 다운로드되고 공유되고 재포맷되고 재편집된다. 그것은 화질을 접근성으로, 전시 가치를 제의 가치로, 영화를 클립으로, 관조를 정신분산distraction으로 변환한다.[7]

  슈타이얼은 이미지 존재론에 유물론적 관점을 도입하면서 동시에 계급적 구도를 삽입한다. 이를 통해서 그는 기술복제성과 매체성에 대한 벤야민의 선구적 사유를 참고하여 동시대적 존재가 담지하고 있는 모순―양가성을 발견한다. 나아가 그 양가성을 통해서 동시대적 패러다임을 내파implosion하고자 하는 미학적 전략을 채택한다.[8]

  빈곤한 이미지는 익명의 전 지구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마찬가지로 공유된 역사를 창조한다. 이동함에 따라 동맹을 만들어내고, 번역 혹은 오역을 끌어내며, 새로운 공중과 논쟁을 창조한다. 빈곤한 이미지는 자신의 시각적 실체를 잃음으로써 일말의 정치적인 가격을 회복하고, 새로운 아우라를 부여한다. 이 아우라는 더 이상 ‘원본’의 영원성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사본의 무상함에 발 딛고 있다.[9]

  디지털 미학 가속주의digital aesthetic accelerationism라 부를 수 있는 이러한 슈타이얼의 전략은 근간으로 삼고 있는 벤야민의 사유가 가지는 태생적 한계를 함께 공유하고 있다. 19세기에 들어서 빠르게 확산 중인 자본주의 체제와 모더니즘 담론은 인간 정신에 관해 큰 관심을 가졌다. 특히 연구의 방향성은 노동자의 주의력(몰입) 유지와 재생산에 맞춰졌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신분산 상태는 오히려 “노동의 근대적 배치들 자체”로 인해 촉발된 것이었다.[10] 벤야민은 당시에 동시대적 매체이자 정신분산 장치였던 영화와 ‘산만한 관객’의 존재양식을 통해 부르주아 문화에 대한 타도라는 정치적 혁명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그가 자본주의적 정신분산 상태로부터 발견한 정치적 가능성에 대한 희망은 여러 연구자가 지적한 바와 같이, “대중에 의한 예술의 새로운, ‘산만한’ 종류의 지각과 수용이 갖는 진보성”이 “도대체 어디에 근거를 두는 것인지가 분명치 않은”[11] 이상주의에 머문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를 슈타이얼의 전략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할 수 있다.

  이미지의 빈곤함을 오디언스/민중적 대안 공간에서의 이미지 제작의 조건으로 파악하는 접근은, 들뢰즈가 “더 이상 가능하게 할 수 없”으며 “모든 가능한 것을 소진”해버렸지만 역으로 순수한 생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존재로 보았던 ‘소진된 인간’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12] 그러나 그러한 생성이 반드시 체제를 전복하거나 내파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홈 파여져’ 있다고 할 수 없으며 생성 이후에도 얼마든지 ‘국가’적인 것에 포섭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소진된 이미지exhausted image로서의 빈곤한 이미지가 갖는 양가성에 대한 슈타이얼의 전략에는 내파 이후의 청사진이 부재하다.

  이러한 전략적 한계보다 더욱 중요한 지적은 슈타이얼이 최전선으로 삼았던 전선이 동시대에는 더욱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으며 주요 전장이 다른 풍경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정말로 포스트-재현 패러다임에 의해 구성되고 있는 기술복제적 이미지들은 ‘빈곤’하기만 하는가”라는 의문형으로 표현할 수 있다.

  슈타이얼의 미디어 작업 속에서 이미지는 지속적인 ‘열화’되거나 의미와 맥락 그리고 미디어 사이에서 끊임없이 유통(교차-교란)되기만 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물질계와 디지털계의 공간 지각이 뒤섞인 현상을 가리키는 피지털phygital-하이브리드 대상[13]을 향한 슈타이얼의 시각에서 물질적인 것은 디지털에 대해 항상 열세로만 그려지고, 인터넷에서 이뤄지는 기술복제는 자유낙하 속 만유인력 법칙과 열역학 법칙에 묶여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가속화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이미지가 지속적인 빈곤함을 향하는 경향성을 지적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그 반대항에 위치한 ‘풍부함’ 혹은 ‘과포화’와 같은 개념이 규명되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이미지의 하층계급에 속하는 ‘빈곤한 이미지’ 개념을 역전시켜, 높은 선예도와 해상도를 가진 기술복제시대 이전의 아우라적 이미지들, 원전과 원본, 현실과 실재, 이미지-부르주아를 가리키는 것은 무의미하다. 여기서 빈곤한 이미지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풍부한 이미지ample image’[14]를 제시하고자 한다. 풍부한 이미지는 단순히 빈곤함이 해소된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풍부한 이미지라는 이미지의 존재방식은 빈곤한 이미지와 어떻게 다른가?

풍부한 이미지, 증폭과 과잉의 미학

  코로나라는 미증유의 경험과 함께 플랫폼이란 매체를 통해 더욱 가속화된 자본주의 운동과 인터넷 기술의 다방면 적용이 이뤄지면서 슈타이얼이 논하던 국면과는 전혀 다른 풍경의 국면이 펼쳐지게 되었다. 특히 코로나로 인해 다양한 분야에서 비대면을 위한 기술과 장치들이 생활 속 미시적 차원에도 도입되었다. 그중에서 특히 인공지능 기술은 국가 주도로 이뤄진 현금 유동성의 가속화와 평행을 이루면서 생성형 인공지능 기술은 비약적 발전을 이뤘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연구실에서 나와 인공지능 구독 서비스 형태로 제공되어 일반인들이 생활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직접 사용할 수 있게 되자 본격적인 ‘이미지 생산’ 체제가 구축되기 시작했다.

  AI를 통해서 만들어진 무수한 컨텐츠 중에서 특히 생성된 이미지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특징들은 경탄과 경악, 상찬과 비판 등 여러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일부에서는 이를 창작에 관한 상상력이나 작가의 고유성과 같은 다양한 예술적 관념들을 새롭게 갱신해야 한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또한 AI가 사실관계를 참고하지 않고 그럴싸한 대답을 꾸며내는 환각halluciation 문제처럼, 현재 AI에 적용되는 공개, 일반, 생성과 같은 개념들이 기술용어로 다뤄지면서 관념적 ‘환각’이 발생하기 때문에 기술 이해를 위해 새롭고 신중한 개념어 설정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었다.[15]

  AI라는 신기술이 확산하는 상황을 직면하면서 일종의 포스트 AI 국면을 맞이하고 있는 와중에 이러한 기술이 최종적으로 ‘출력’하는 표면적 차원보다 좀 더 기술 자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예술에서 발생하는 ‘기술지체’ 현상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는 논의도 있었다.[16] 그러나 개인적으로 문화 연구자로서 좀 더 집중하고 싶은 문제는 결국 이렇게 이미지를 생산할 수 있는 도구가 ‘민주적’으로 제공되고, 이미지가 저렴한 가격에 만들어지기 시작하고, 그렇게 생성된 이미지들이 빠르게 집적되는 현상까지 포함하여 최종적으로 이미지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과 감각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느냐는 문화적 측면이다. 이를 검토하기 위해서 AI 생성 이미지가 가지는 몇 가지 특징을 확인해 보고자 한다.

  근래에는 생성형 AI가 뱉어내는 이미지들, 특히 오타쿠 컬처에 기반한 캐릭터 일러스트 분야에서 조금의 감식안만 있어도 인공지능 일러스트라는 사실을 파악하기 쉽게 되었다. 언어화하기 어려운 화풍이나 구도와 같은 감성적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일러스트의 중심이 되는 핵심 캐릭터를 제외한 배경인물mob이나 배경미술 부분에서 상대적으로 ‘불필요하게’ 높은 선예도와 해상도를 가지거나 지나치게 섬세한 묘사를 넣는 경향이 있음을 사람들이 알아챘기 때문이다. 즉, 인간 작가라면 적당히 ‘뭉개는’, 압축과 생략으로 표현될 대상들이 인공지능 생성에서는 과하게 묘사되고 정보값을 가지게 된다는 의미다. 물론 정교한 프롬프트 교정을 통해서 이와 같은 정보 우선도, 선택과 집중, ‘자연스러운’ 묘사의 안배와 같은 메타적인 속성들도 표현해 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현재 극소수의 숙련자를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AI를 통해 생성해 내는 이미지들은 과도하게 ‘풍부한 이미지’로 드러난다.

  생산적 적대 신경망Generative Adversarial Network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이미지가 ‘노이즈’를 시시각각 증가 및 감소시키는 과정[17]의 시각적 연속성은 말 그대로 ‘아날로그(연속)’적이며 절단면이 없이 매끄러운seamless “아말감적 변형”,[18] 고체와 액체 상태가 중첩된 유동적이며 끊임없이 변화하는morphing 하이브리드로서 과도하게 매끄럽고 풍부한 질감을 보여준다. 그렇게 유질감의 번들거리는 변형꼴은 조절되는 노이즈들이 빚어내는 무한성을 어렴풋이 느끼게 하며, 레프 마노비치가 뉴미디어가 촉발하리라고 생각했던 공간적 몽타주spatial montage를 개체 단위 차원에서 달성할 뿐만 아니라 아득히 초월한다. 시간적 몽타주가 두 이미지가 순차적으로 배열되며 빚어내는 충돌과 긴장으로 의미를 발생시키는 방법이었다면, AI 이미지에게 몽타주의 시간적 틈은 보충make up되고 보정make ready되어 채워진다. 이러한 이미지 보간interpolation을 통해 몽타주를 ‘극복’하고 의미 대신 정보가 출현한다.

  기술복제를 통한 아우라의 소실도 생성형 AI 시대에 들어서자 엔트로피의 역전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프리츠 랑의 영화 〈메트로폴리스Metropolis〉(1927)가 “파손부문, 더러워진 부문과 긁힌 자국들이 사라져” 디지털 복원 작업을 거쳐 ‘완전판’이 되는 것도,[19] 100여 년 전 흑백영화 〈어 트립 다운 마켓스트릿A Trip Down Market Street〉이 인공지능 기술로 이뤄진 프레임 보간과 업스케일링을 통해 4K 해상도 60프레임 컬러 영상으로 ‘리마스터’되기도 했다.[20] 필름이라는 매체적 물성을 역전시키거나, 나아가 원본은 뛰어넘는 재현적 원본성을 성취하기도 한다. 아우라는 복제로 인해 소실되기도 하지만 이제 분산투자되고, (픽셀적) 폭등 폭락을 반복하는 금융적인 성질을 띠게 되었다. 그것은 분명 슈타이얼이 말한 ‘사본의 아우라’ 혹은 “새로운 아우라”와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생성형 인공지능을 이용하는 유저 개인에게는 낮은 코스트로 엄청난 양의 ‘오리지널’ 이미지를 생성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양적인 풍부함을 갖기도 한다. 복사와 붙여넣기, 재포맷과 재편집의 순환 속에서 빈곤한 이미지가 ‘복제’되며 과잉에 도달했다면, 풍부한 이미지는 거대언어모델이라는, 저작권을 일시정지시키고 약탈적인 데이터 크롤링과 딥러닝 과정[21]을 통해 원본과 표절 사이를 ‘보간’하며 창작(생성)의 영역에서도 과잉에 이르렀다.

운하임리히로서의 인공지능 이미지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빈곤한 이미지가 자신을 빈곤하게 만드는 지배적인 이미지-기술 체제에 대한 풍부한 생성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풍부한 이미지도 마찬가지로 오류error, 충돌conflict, 환각 등 자신의 풍요로움 속에 빈곤함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AI 생성 이미지에서 현재 가장 한계로 자주 지적되는 것은 멀쩡한 다섯 손가락을 제대로 묘사하지 못한다는 점일 것이다. 그 외에도 젓가락을 사용하는 손동작을 표현하지 못하는 다소 황당한 출력 오류를 빈번히 일으키기도 한다. 섬세하고 복잡한 형태의 손모양을 데이터로서 ‘이해’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그보다 근본적으로 이러한 오류가 발생하는 이유는 AI가 생성한 이미지는 어디까지나 학습 데이터에 근거한 근사치의 도출이라는 점에서 항상 오류가 허용(margin of error)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원본이 담아내고 있는 실재를 원본으로부터 다시 ‘복원’시켜 “새로운 아우라를 부여”하던 AI 영상 기술도 마찬가지로 특유의 빈곤함을 드러낸다. 가령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듀얼〉의 경우, 전문 감수를 거치지 않고 무성의하게 AI 기술을 일괄 적용하여 “4K 해상도일 뿐, 이중으로 겹치는 윤곽선과 떨림, 블록 노이즈와 계조의 무너짐뿐 아니라 사물의 형상을 밋밋하게, 마치 수채화 그림처럼 뭉개져 영상이 망가지는 현상”을 일으켰다.[22]

  생산적 적대 신경망 모델을 작동시켜 몰핑morphing하는 도중에 정지시키면, 아직 정리되지 않은 풍부한 노이즈를 한껏 품고서 녹아내려 무언가로 변해가는 도중의 기괴한 이미지가 된다. 어쩌면 AI 이미지에게 노이즈는 존재론적 조건일지 모른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AI가 생산한 이미지를 AI 학습에 되먹이고 다시 출력하는 피드백을 반복하자 갑작스럽게 모델 붕괴collapse가 일어나는 현상이 보고되기도 했다.[23] 이러한 붕괴의 원인은 AI가 반드시 학습된 데이터만을 참고하기 때문에 생성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오류 허용치를 학습하고 다시 예측하며 오류 허용치가 증폭되는 경향을 띠기 때문이다.

그림 1 nature, “AI models fed AI-generated data quickly spew nonsense” 기사에 첨부된 모델 붕괴 예시
그림 2 TensorFlow, “딥드림(DeepDream)” 중 이미지 예시(출처: https://www.tensorflow.org/tutorials/generative/deepdream?hl=ko)

  
  이러한 풍요롭지만 풍요롭기 때문에 빈곤해지는 이미지는 본래 빈곤한 이미지의 의미에서 빈곤하지 않다. 슈타이얼이 말한 빈곤한 이미지는 압축과 재포맷을 거듭하며, 출현과 망실이란 단절 혹은 투박한 단면의 노출, 다중 레이어의 콜라주와 하이퍼텍스트의 몽타주 형태로 유통되는 과정에서 거칠고 자글자글해지는 것―바싹 튀겨진deep fried 이미지[24]가 되는 것이었지만 AI가 만들어내는 빈곤함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오히려 풍부한 노이즈를 머금게 되어 섬뜩함unheimlich과 낯섦, 불안을 느끼게 만드는 AI 이미지들은 몽환deep dream[25]과 같은 이미지로 수렴된다는 점은 무척 흥미로운 지점이다. 빈곤한 이미지가 생성의 풍부함을 가진 존재양식이었다면, 풍부한 이미지는 에러의 빈곤함을 머금은 존재양식인 셈이다.

  AI가 만들어내는 기술복제 혹은 기술삽입적 이미지들은 오히려 빈곤하다 못해 풍부하며, 그 풍부함은 더 큰 무의미와 쓸모없음으로 풍족하게 채워지고 있다. 풍부한 이미지는 빈곤한 이미지와 대립하며 이를 무화하거나 쫓아내지 않는다. 오히려 빈곤한 이미지와 함께 놓이며 이미지 과잉의 의미를 ‘풍부’하게 만들고 포스트 AI라는 새로운 미학적 전선을 요청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AI는 인터넷상의 데이터를 마구잡이로 학습에 사용하면서[26] 프롬프트 최적화를 위한 지속적인 조정/수정 과정을 거쳐 이미지를 생성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무한히 이뤄지리라 극단적으로 가정한다면 앞으로 인류에게 이미지란 학습용 데이터이자 근본적으로 미완성이며 잠정적인, “영원한 베타 버전”이 될 것이다.[27] 이미지가 처한 포스트 AI 상황은 차용, 편집, 재활용되며 다양한 관계 속에서 재프로그래밍되는 포스트프로덕션의 최신 판본이자 궁극적인 도달점이라고 할 수 있다. 영원한 ‘생성’의 ‘과정’―출력과 학습에 놓여 있는 AI 이미지는 잠재적인 미완성본이자 불필요한 부산물이라는 점에서 매번 과잉 생산될 수밖에 없다. AI 이미지가 이미지로서 가지는 생명력은 즉각적prompt이다. 그리고 이런 찰나적 이미지의 과잉생산은 당연하게도 자본주의적인 과잉생산 문제를 이미지 차원에서도 반복하게 한다.

  생성형 AI 시대 이전,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이미지 자본주의하에서 무가치함=‘쓰레기’ 이미지를 담당하던 것은 (슈타이얼의 표현을 빌리면) ‘이미지-스팸’ 존재였지만, 이제는 스팸이 아니라 슬롭slop이다. 슬롭은 “쓸모없고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인공지능 컨텐츠”를 의미한다.[28] 녹아서 흐르다가 굳은 지방, 거기에 달라붙어 엉긴 찌꺼기와 오물. 아말감처럼 항상 유동성과 접착성 이미지를 내포하는 슬롭은 유동성 시대에 걸맞은 쓰레기 존재의 최신 형상이다. 이러한 슬롭은 모델 붕괴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자기파괴를 일으킬 정도로, 데이터 유통의 ‘동맥경화’를 일으키며 원활한 유통과 흐름을 저해한다. 나아가 노출도, 트래픽 등 관심경제 하에서의 경제 활동을 위해 구글과 같은 대형 검색 사이트의 검색 엔진 최적화SEO 알고리즘을 추정하고 이를 공략하여 상위 페이지에 노출되기 위한 클릭베이트clickbait로서 막대한 쓰레기 이미지와 키워드를 담은 페이지 생성에 인공지능이 활용되기도 한다.[29] 이 경우 AI 이미지는 기묘한unheimlich 동시에 유해한 난치성unheilsam 이미지다.

  그렇다면 다시 본래 주제로 돌아가 보고자 한다. 포스트 AI 국면에서 우리들의 이미지에 대한 인식과 감각을 어떻게 갱신되고 있는 것일까. 슈타이얼이 빈곤한 이미지를 통해 유통 차원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전면화했다면, AI 이후로 기존 이미지뿐만 아니라 앞으로 만들어질 이미지마저 모두 예비적 존재로서 존재에 선행하여 이미 포섭된 상황은 유통 이전의 창작 차원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다룬다. 동시대 이미지는 ‘신체 없는 기관’이다.

  그렇다면 슈타이얼이 논한 빈곤한 이미지는 AI가 촉발한 풍부한 이미지 앞에서 다시 한번 존재론적으로 빈곤해진다. 생성의 잠재력마저, 사본의 아우라마저 AI 학습과 생성을 위해 탈취당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중의 빈곤함은 빈곤한 이미지를 19세기 핍박받는 프랑스 민중과 마찬가지로 ‘비참한 이미지L’image misérable’가 된다. 또한 스크린으로부터 추방된 것이 아니라 다시 AI를 위한 데이터로 더욱 요구되고 모니터 스크린으로 빨려 들어가 붙들리게 되어 다시금 ‘스크린의 저주받은 자들the wretched’로 되돌아간다.

인터넷 밈 미학, 비참함에서 출발하기

  그렇다면 포스트 AI 국면에서 예술이란 이미지의 최전선에서 여전히 ‘창작’되고 있는 이미지와 작가들의 작업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우선 풍부한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빈곤함을 민감하게 포착하는 사례로 노상호의 AI 회화 작업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노상호는 인간의 눈에는 오류로 포착되는 이미지가 “굉장히 신화적인 이미지”로 드러나기도 한다고 본다. 그러면서 인공지능이란 필터를 통해서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 속에서 나(인간)의 위치를 강하게 재인식하게 된다는 반성적 효과를 지적한다.[30] 노상호는 “디지털 세계에서는 더 강하게 아날로그를 느끼고, 아날로그에서는 더 강하게 디지털을 느끼게 되는 잠깐의 순간들”을 주제로 삼고 있다. 전시 《홀리》(2024)에서 전개되는 AI 생성 이미지가 가지는 횡단성을 일종의 신성으로 이해하는 것은 앞서 다룬 풍부한 이미지로서 갖는 성질을 직접 탐구하는 작업이라 볼 수 있다.

  반면에 AI나 그로부터 출력되는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고, 글머리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짤방, 쇼츠, 유행어 등 인터넷 밈과 같이 기존의 빈곤한 이미지들―이제는 비참한 이미지가 된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작업도 있다. 이 작업들이 흥미로운 지점은 인터넷 밈 이미지가 조성되는 원리 자체를 참조하면서 이를 탐구하는 일종의 ‘밈 미학’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가오 항Gao Hang, 오스틴 리Austin Lee, 네이선 헤미Nathan Hemi, 다니엘 아서Daniel Arthur 등 전세계의 밈 회화 예술가들이 그린 작품을 ‘재게시’하는 itsnotgallery와 같은 인스타그램 계정의 ‘콜렉티브’를 살펴본다면 인터넷 밈과 캡처, 스크린샷 등 파편적 이미지와 그 논리를 재생산하는 작업들이 상상 이상으로 많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국내에서는 박진영(잔디)의 캣 밈 아트, 김경모의 인터넷 밈 콜라주(《억겁의 시간이 지난 뒤의 너에게》, 2022), 문은주의 밈 페인팅(《MEME CARNIVAL》, 2021), 장승근의 디지털 아이eye 콜라주 작업(《ᄊᆞ이버 펑크》, 2021), 김희준의 액션-로우 폴리곤 회화, 안태원의 텍스처 모핑적 회화와 조형(《PPURI》, 2024), 신종민의 로우 폴리곤-모딩 조형(《ADD-ON》, 2024), 남다현의 문화적 경험-모사 작업(《MoMA from TEMU》, 2024), 김토담의 캐릭터 패러디 작업(《?》, 2023) 등.

  언급한 모든 작업들을 하나의 개념으로 묶어내는 것은 부적절하며, 구체적인 방법론과 주제의식에서는 크고 작은 차이들이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여기서 다뤄지는 이미지들은 분명히 밈으로 대표되는 인터넷 이미지가 빚어내는 감각을 공통적으로 염두하고 있다. 인터넷 밈을 구성하는 미학과 조슬릿이 논한 “이미지의 복합적인 소통 능력”[31] 혹은 “공간, 시간, 장르, 스케일을 놀랍도록 다양한 방식으로 가로지르는 네트워크의 논리”[32]는 그 성질을 분명하게 공유한다.

  특히 인터넷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디지털 특성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서 에어브러시가 주로 채택되는 점은 흥미로운 지점이다. 직접적으로 “컴퓨터로 그린 것 같은 효과”를 노리는 것뿐만 아니라 즉각적인 흡착을 통한 “속도감”과 부드럽고 흐릿하게 표현되는 선의 외곽 나아가서는 물감, 붓터치, 화풍 등으로 표현되는 화가 “자신의 신체를 배제”하는 거리감이나 작가의 의도를 벗어나는 우연성마저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디지털이나 인터넷 밈 미학을 직접 프로그램으로 삼는 작업들은 밈과 존재론적으로 큰 차이를 갖지 않고 ‘심도depth도 배면rear도 없는’ 이미지가 된다. 그것은 “(밈을) 오로지 밈 차원에서 소비하는 방식”[33]―“인터넷상에서 이루어지는 이미지의 존재방식인 확산력을 재현”[34]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예술이 밈 프로그램을 통해서 밈을 만들고 발신하면서 나아가서는 스스로 밈이 되는 작업은 빈곤한 이미지-되기를 주요 전략으로 삼는다. 이러한 전략은 인터넷 아트가 취하는 전략과는 다르다. 인터넷 아트는 “물질성과 비물질성, 디지털과 비-디지털, 온라인과 물리적 공간의 경계를 와해하고 재편하는 것을 목표로”[35] 삼으며 매체적 교차성을 탐구하는 반면, 인터넷 밈 미학은 매체에 대한 집중보다는 그러한 교차성을 조건으로 삼아 출발하여 행위자로서 이미지가 어떻게 존립하고 활동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문화개방 시기는 곧 ‘글로벌한’ 이미지-언어가 네트워크 내부로 흡수되고 그 안에서 재편되어 유통되기 시작하며 문화적 장과 장벽이 흐릿해진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원체험을 공유하는 세미 밀레니얼 세대 작가들에게 인터넷 밈 이미지는 포스트 AI 국면 아래 비참한 이미지로서 (사본이 아닌) 원본의 아우라를 갖는 이미지로 받아들여진다. 포스트 AI의 풍요로움이 증폭될수록 비참한 이미지에 대한 감각은 노스탤지어에 가까운 정서로 드러난다.

  이런 노스탤지어적 태도의 사례로 들 수 있는 것이 안태원의 작업이다. 지난 7월에 있었던 안태원의 전시에서 조성된 ‘태움 공간’은 히로시마의 그림자로 알려진, 피폭자의 그을린 그림자 이미지를 차용하여 “오늘날 모든 존재는 정보로서 태워지며 파편화되고” 있는 세태를 묘사한다. 김윤익은 《PPURI》 전시 서문에서 “정보의 유동성을 예술 창작 방법으로 끌어안고 있는 오늘날의 예술가들”과 그들이 갖는 “인터넷과의 연합적인 관계 속에서 예술가의 시도와 정체성”을 ‘인터넷 반려종’이라 부르기를 제안한다. 현대적 삶에서 인간 존재의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 된 인터넷은 인간을 자신의 반려종으로 갱신한다. 한편으로 안태원은 비-인터넷적인 것 즉 신체적인 것, 로컬적인 것에 대한 회복을 욕망하지만,[36] 그 회복을 위한 시도가 역설적으로 대상을 정보화‧밈화 하는 방법이라는 수행적 난처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즉 태움 공간을 채운 그림자-그을림은 그림자가 존재의 ‘반영’이란 점과 그을림이 존재 사멸의 ‘현현’이란 점에서 부존재의 감각을 이중으로 상기시킨다.

그림 3〈what happened to hiro in the blue room〉, 안태원, acrylic on canvas, 2022.
그림 4 〈Hiro is everywhere〉, 안태원, acrylic on resin, 2024.

  
  도나 해러웨이는 상호작용하며 내적 연결로 이뤄진 반려종 관점을 도입하여 재세계화reworlding로의 운동을 사유하지만, 인터넷 반려종은 오히려 인터넷과 밈 안에서 소외를 느끼고 노스탤지어의 심상에 휩싸인다.[37] 반려종으로서 존재론적 갱신을 이뤘어도 ‘시대착오적’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차라리 해러웨이의 접근보다는, 현대 과학 기술이 자연을, 사물을, 인간을 몰아세우며 존재 본질을 위태롭게 만든다는 하이데거의 기술 비판 태도에 가까울지 모른다. 〈Hiro is Everywhere〉 시리즈(2021-)가 작가의 반려묘 히로란 3차원 ‘객체’를 2D 이미지로 언랩unwarp하여 텍스처 맵핑으로 모든 곳의 ‘스킨’에 출현한다. 하지만 ‘어디에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는 흔한 경구처럼, 히로의 이미지가 어디에나 출몰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히로란 실제 존재에 대한 감각은 희미해진다는 사실이 은폐된다. 인터넷 공간을 가득 메운 누군가의 고양이 이미지[38]에 항상 사람들은 “나만 없어 고양이”를 외치지만 ‘태움 공간’ 안에서는 보편적-고양이-없음 상태에 놓인다. 풍부한 이미지 속에서 ‘진짜’ 고양이를 잃어버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진정성과 존재에 대한 상실감과 그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흐릿하게 느끼는 것뿐이다. 해러웨이라면 “이상한 형태의 알 수 없는 종류의 종”을 반려로 삼으며 재세계화를 향해갈지 모르지만, 안태원의 작품 안에서 세계는 피폭 이후post-bomb의 인터넷 폭심지 풍경을 바라보는 ‘죽어가는 세계dying earth-ing’처럼 느껴진다.

  반면에 인터넷 밈 이미지에 대한 노스탤지어적 정서를 공유하지만 한편으로 문화개방 시기 이미지와 네트워크의 폭발적 확산이 주는 쾌락의 원체험을 동시대에 겹쳐내고자 하는 남다현의 작업도 있다. 남다현은 어렸을 때부터 특기였던 지근거리에 있는 사물item을 “필사”하는 방법론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러한 필사는 인터넷 아트에서 말하는 소위 ‘복사 붙여넣기’ 방법과 외적으로 유사하지만 한편으로는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인터넷 아트에서 복사 붙여넣기는 동시대적 미디어 환경에서 이미지가 처한 존재론적 상황에 대한 폭로와 성찰을 목표하지만, 남다현의 필사(모사)는 대상의 등신대적life-size 재현을 목표로 삼는다. 텍스트를 고스란히 옮겨쓰는 필사가 텍스트의 의미도 또한 고스란히 필사자의 심상에 옮기기 위한 행위이듯이 남다현은 아이템의 기능과 그로 인해 촉발되는 경험마저도 일대일 스케일로 재현하고자 한다. “하나의 제품이 아니라 공간을 복제함으로써 … 시각적 복제를 넘어 경험의 복제를 담아내고자” 할 때,[39] 공간은 제품(가구, 가전, 소품, 생물)의 네트워크다. 따라서 처음에는 교과서나 신문에서 출발하던 필사는 지하철 개찰구, 복권방, 부동산 등의 공간과 함께 지하철 환승과 개찰구 통과, 복권 구매와 긁기, 부동산 계약 등의 상호작용(경험)도 온전히 재현하고자 한다.

그림 6 남다현, 전시 《부정승차의 유혹》, space mm, 2024.
그림 남다현, 《제프쿤스 파격세일》, 갤러리 워터마크, 2023.

  
  남다현은 물질적인 사물 네트워크로서의 공간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가상적인 ‘문화’마저도 공간적으로 필사하고자 한다. 《Isekai-Ora》(2022)에서의 캡슐 뽑기, 미니 캐릭터 스티커를 포함된 포켓몬빵 매대, 국내 애니메이션 오프닝 영상과 같은 포켓몬 컨텐츠 전시, 《SB-129 part1, 2》(2022)에서 애니메이션 〈스폰지밥〉의 에피소드를 모티프로 삼은 ‘셀프 굿즈’나 밈 영상, 《어른제국의 역습》(2024)에서는 2000년대의 HTML 홈페이지 특유의 과장된 키치 감성을 박물관 형식에 빗대어 물질‧공간화한다. 그리고 최신 작업 《MoMA from TEMU》에서는 현대미술에서 명작으로 취급받는 작품들을 노골적으로 ‘베끼’면서 현대미술 경험과 제도 자체를 재현한다. 이처럼 사물(상품)에서 시작되어 그 뒤에 놓여 있는 경험이나 제도를 아우르는 문화(특히 2000년대 작가 본인의 유소년기 문화)까지 재현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의도치 않게 외형적 필사를 넘어서 현대 자본주의에서의 상품 존재방식을 필사한다. 남다현의 필사 작업은 등신대적 재현이란 점에서 디지털화된 컨텐츠의 소실 없는 재방영repeat의 연장선에 놓이는 동시에 “정교한 불법 카피 제작과 방식은 비슷하지만 … 디자인을 넘어서 당시의 원단과 제작 방식, 공장 기계 등의 생산 기법과 설비는 물론, 당대의 문화와 사회상까지 담아내려는 집요함”[40]을 추구하는 장인 정신의 ‘복각replica’으로 이해할 여지가 있다.

  물론 이러한 노스탤지어적 운동성이 자칫하면 일종의 퇴행이나 안주로 여겨질 우려도 분명히 존재한다. 포스트 AI 국면에서 이미지의 의미를 회복하기 위해서 자신의 원체험으로부터 ‘유의미한’ 이미지의 논리를 빌려오는 것은 안이한 전략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회복이든 복각이든 인터넷 밈 미학에 대한 노스탤지어적 시도들이 역설적이게도 결과적으로 관객들에게 밈 이미지와 구분되지 않고 오히려 밈 이미지의 연쇄 중 하나로 회수되거나 밈 자체가 된다는 점이다. 밈 미학을 직접 이식함으로써 의도와 무관하게 미술에서의 이미지가 철저하게 밈으로 드러나는 역설. 이를 통해 포스트 AI 시대에 철저하게 비참한 이미지가 됨으로써 이미지는 풍부함에 대한 대안적 역량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스크린의 저주받은 자이지만 저주는 동시에 특정한 힘의 소유를 가리키기도 한다.

  저주받은 자란 표현은 곧장 2015년 경부터 유행한 인터넷 밈 ‘커스드 이미지cursed image’를 떠올리게 만든다. “과거의 매체를 통해 생산된 대상들을 모조리 하나의 정보로 변환하여 기록‧저장하는 시공” 인터넷에서 “누가 어느 때 어느 곳의 어떠한 상황에서 촬영했는지 모를 이미지에 ‘저주받았다’는 저주를 내리”는/선언하는 커스드 이미지 밈은, “본래부터 불안하게 하는 점이 어느 부분에도 없”지만 “완전 평범하기 그지없는 순간이 카메라와 제가 준 새로운 맥락을 통해 무언가 다른 것으로 변형”된다는 커스드 밈 창시자의 설명은[41] 뒤샹의 다다이즘 전략의 현대적 판본이라 해도 좋다. 그러나 동시에 큰 차이도 존재하는데, 인터넷을 바탕으로 하여 “누구나 이미지에 저주를 부여할 수 있”으며 “촬영자의 존재는 잘려나간 채” 저주의 힘이 “다수의 익명”에게 이양된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이미지 배면의 본래적 맥락들을 전부 소실한 자글거리는 이미지는 저주가 내려지는 것과 별개로 인터넷에 업로드된 순간 모든 이미지는 그 자체로 잠재적으로 저주받은/받을 존재가 되어 “‘애초부터 기이한 것’으로 뒤바뀐다.”[42] 그것은 포스트 AI로 인해 이미지는 애초부터 기이한 것, 저주받은 것, 존재 자체가 빈곤한 것―비참한 이미지로 드러나는 것과 상동적이다.

  밈 이미지가 심도도 배면도 없는 이유는 아직 의미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의 반(半)존재로서의 이미지가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맥락에서 소환되고서 ‘밈’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맥락에 놓임으로써 촉발된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비로소 밈 이미지는 새로운 의미 회로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 이런 고맥락적 속성 때문에 AI는 밈스러운 이미지를 생성할 수는 있어도 어떤 이미지를 밈으로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본디 밈 이미지는 심도와 배면을 가진 이미지 자체의 힘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작동하는 장(場)으로서의 힘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다시 말뚝으로서의 포스트를 떠올리게 한다. 포스트 AI의 국면은 비참해지는 것을 어떻게든 조건으로 삼아 구태여 스스로를 비참한 이미지로 내보여 그것을 철저히 함으로써 좌표를 찾아가고 있는 셈이다. 즉 비참함의 운명을 자각하면서도, 매번 무대 위에서 상연되는 부조리극처럼 반복해서 행해지는 것이 밈이 되어 가는 동시대 미술의 추구미이자 도달가능미일지 모른다.

  * 이 원고는 예술경영지원센터 지원 특별 기고로 게재되었습니다.


[1] Vittorio Gallese and Michele Guerra, 《The Empathic Screen》, Oxford University Press, USA, 2019, p.183, 재인용: 박선(2023) p.13

[2] 데이비드 조슬릿, 이진실 옮김, 《예술 이후》, 현실문화연구, 2022, p.11

[3] Andre Gaudreault and Philippe Marion, 《The End of Cinema?》, Columbia University Press, USA, 2015, chapter 5. 번역문 출처(https://blog.naver.com/ungzx/223499257833)

[4] 정찬철, 〈시네마에서 포스트시네마로의 전환에 관한 연구〉, p.170에서 재인용

[5] 대학지성In&Out, “‘영화미디어학’이란 무엇인가”, 2020.1.12, https://www.unipres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4

[6] 신양섭, 《스탠리 카벨의 오토마티즘 이론의 세 가지 주제 요소들》, 연세대학교출판문화원, 2023, pp.72-73

[7] 히토 슈타이얼, 김실비 옮김, 《스크린의 추방자들》, 워크룸프레스, 2018, p.41

[8] 김지훈, (2017), “포스트-재현, 포스트-진실, 포스트인터넷: 히토 슈타이얼의 이론과 미술 프로젝트”, 현대미술학회 21권(2), p.91

[9] 히토 슈타이얼, 같은 곳, p.56, 강조는 인용자

[10] 조너선 크레리, 유운성 옮김, 《지각의 정지》, 문학과지성사, 2023, pp.34-35

[11] 최성만, 〈해제: 현대 매체미학의 선구자,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사진의 작은 역사 외》, 길, pp.5-34 재인용

[12] 질 들뢰즈, 이정하 옮김, 《소진된 인간》, 문학과지성사, 2013, pp.40-43

[13] 이광석, 《피지털 커먼즈》, 갈무리, 2021

[14] 빈곤poor에 상반되는 부유rich 대신 풍부ample을 적용한 이유는 아래 내용에서 다루듯이 코로나 경험이 다양한 분야에서의 기술 적용과 플랫폼 자본주의 확산의 기존 경향성을 증폭시켰기amplify 때문이다. 또한 인공지능 기술에 기대어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증폭시켜주리라는 코로나 이후에 만연해진 낙관적인 기술 유토피아니즘의 태도를 염두한 것이기도 하다. Newsweek, “The Age of Humanaity: How AI Can Amplify the Human Trinity”, 2024.5.18, https://www.newsweek.com/age-humanity-how-ai-can-amplify-human-trinity-1879770

[15] 세마코랄, “AI를 위한 새로운 이름 짓기”, 2023.7.20., http://semacoral.org/features/youjinjeon-renaming-ai-against-labeling-technology#fn:4

[16] 세마코랄, “가속화되는 기술의 쓰나미 속에서 생성되는 새로운 감수성”, 2024.1.4., http://semacoral.org/features/hoonidakim-new-sensitivity-created-in-accelerated-technology

[17] “A Style-Based Generator Architecture for Generative Adversarial Networks”, YouTube, Tero Karras FI, 2019.3.3, https://www.youtube.com/watch?v=kSLJriaOumA

[18] 神野智彦, “「解体されるキャラ」再考”, 2020.6, https://gnck.net/text/randr13.htm

[19] 정찬철, 〈시네마에서 포스트시네마로의 전환에 관한 연구〉, p.50

[20] WIRED, “AI Magic Makes Century-Old Films Look New”, 2020.10.12., https://www.wired.com/story/ai-magic-makes-century-old-films-look-new/

[21] 동아일보, ““생성형 AI 학습, 저작권 침해‧데이터 고갈 우려…조달시장으로 예방””, 2024.3.25., https://www.donga.com/news/It/article/all/20240325/124145258/1

[22] 씨네플레이, “AI 영상 기술의 명(明)과 암(暗) – 영화 업스케일링의 부작용 (1)”, 2024.7.17, https://blog.naver.com/cine_play/223515633297

[23] nature, “AI models fed AI-generated data quickly spew nonsense”, 2024.7.24., https://www.nature.com/articles/d41586-024-02420-7

[24] 딥 프라이드 밈은 “이미지가 거칠고 색이 바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수십 개의 필터를 적용시켜 이미지가 이상하게 색이 바랜 것처럼 보이도록 처리”하는 밈 스타일이다. 레딧에서는 딥 프라이드의 정의를 “고화질 밈이 스크린샷을 찍고 다시 게시하고 여러 번 다시 필터링하여 누렇고 저화질 해상도가 되어 마치 튀긴 것처럼 보이는 경우”로 내리고 있다. 일반적인 ‘짤방’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빈곤함’ 자체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사례다.

[25] 기존 인공지능의 딥러닝이 경사 하강법gradient descent 원리를 통해 노이즈를 억제하며 손실값을 최소화하려는 오류 역전파back propagation를 채택하지만, 딥드림 이미지의 경우 일부러 경사 상승법gradient ascent로 학습을 진행하여 오류를 증폭시키는 이미지를 가르킨다. 특유의 몽환적인 시각효과 때문에 마약 복용 후의 시각적 경험과 유사하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26] 경향신문, “웹 지식‧정보 무차별 흡수 ‘AI 학습 방식’… 혁신‧위법 ‘충돌’”, 2023.5.2, https://www.khan.co.kr/it/it-general/article/202305022204015

[27] 美術手帳, “『映像研には手を出すな!』と「プロセス」を描く映像文化”, 2020.3.11, https://bijutsutecho.com/magazine/insight/21365

[28] TheMiilk, ““그거 슬롭이야… 생성AI 시대 스팸 콘텐츠의 새용어 등장”, 2024.6.18., https://www.themiilk.com/articles/a00f0fbf8?u=15ed0645&t=a1f8f995e&from=

[29] 이러한 현상에 대한 음모론적 반응이 집약된 것이 바로 ‘죽은 인터넷 이론Dead Internet theory’이다. 이 이론에서는 “오늘날 인터넷이 대부분 알고리즘 큐레이션(영어판)을 통한 인터넷 봇 활동과 절차적으로 생성된 컨텐츠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간 활동을 밀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30] “노상호 작가의 작업세계 2부”, YouTube, 널 위한 문화예술, 2024.3.9., https://www.youtube.com/watch?v=f6KXqmaiqxo

[31] 데이비드 조슬릿, 같은 곳, p.143

[32] 데이비드 조슬릿, 같은 곳, p.85

[33] 권시우, 〈인플루언서 작가가 되기를 욕망하는 미술〉, 2024.7.16, https://blog.naver.com/shakingjoe/223514835198

[34] 콘노 유키, 전시 서문 〈모든 솔직함을 동력 삼아 탄생하고 공유되고 주장하는 이미지 속에서〉, 《ᄊᆞ이버 펑크》, 유아트스페이스, 2021

[35] 김지훈, 〈왜, 포스트 인터넷아트인가?〉, 《Art in Culture》, 2016.11, p.109

[36] ANTIEGG, “디지털 시대의 이미지 경험 안태원의 작품 세계”, 2023.6.12., https://antiegg.kr/16099/

[37] 김윤익, 전시 서문 중, 전시 《PPURI》, P21 갤러리, 2024

[38] 한국경제, “인터넷은 왜 고양이 세상이 됐을까”, 2016.8.29., https://plus.hankyung.com/apps/newsinside.view?aid=201608290097A&category=AA006&sns=y

[39] “작가 인터뷰 남다현 작가”, YouTube, Local Stitch, 2021.2.22, www.youtu.be/hIDhJ8Hi7hQ?t=122

[40] 박세진, 《레플리카》, 벤치워머스, 2018, 강조는 인용자

[41] 나원영, 《대체 현실 유령》, 마테리알, 2022, p.123

[42] 나원영, 같은 곳,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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