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8의 시학, 심영물

최연우

  심영물만큼 오랜 수명을 지닌 밈은 없을 것이다. 2000년대 초중반에 생겨나 이제는 밈의 대명사라고 불릴 정도니까. 심영물은 〈야인시대〉의 64화 속 고자라고 진단을 받은 심영이 내가 고자라니!라고 외치는 장면을 절취한 것이다. DC합필갤에서 시작한 이 밈은 그때 유행했던 싱하형, 빠삐놈 등 당시 여러 밈들과는 다르게 혼자 생존해 유튜브에 살아남아 있다. 심영이 밈으로 처음 쓰일 때는 “내가 고자라니”라고 외치는 장면만 소스로 쓰인 데 비해, 지금은 야인시대 전체가 소스로 쓰이며 야인시대가 심영 이미지를 중심으로 합성되는 양상으로 쓰이고 있다. 사진 이미지에 그친 싱하형, 덧붙일 만한 서사가 없던 빠삐놈 등 합성요소는 금방 한계에 부딪혔고, 심영물은 사진에서 시작해 영상으로 진화한 밈이 되었다. 이것만으로도 심영물은 이미지사에서 주목할 만한 이미지이다.

  심영물의 유래라 할 수 있는〈야인시대〉의 64-65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공산주의자 심영은 중앙극장에 프로파간다 연극인〈님〉을 올리고, 반공척결을 외치는 김두한은〈님〉의 공연이 시작하려는 찰나에 끼어든다. “개소리 집어쳐! 님은 무슨 님을 만난다는 거야!”라고 소리친 뒤에 김두한은 심영을 전향시키려고 그를 추적한다. 그러던 중 상하이 조가 심영을 멈추게 하려 급한 대로 총을 쏘나 총알이 하필이면 심영의 고환을 관통한다. 그날 의사는 심영에게 고자가 되었다고 알려주고 심영은 괴로워한다. 다음날 심영이 입원한 병실에 김두한이 방문해서 그를 겁박해서 전향서를 쓰게 한다. 상하이 조는 그의 고환을 내려치고, 그의 어머니는 살려달라고 빈다. 심영은 마침내 전향서를 쓴다. 이 에피소드는 김두한의 피카레스크 서사라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심영 에피소드가 김두한이 녹취록에서 한 과장이 섞인 무용담을 이환경 작가가 한 차례 더 우스꽝스럽게 극화한 것을 염두로 두어야 한다. 드라마는 굳이 심영을 고자로 만드는 우악스럽기 그지없는 김두한의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여기다가 공산당과 극우가 만드는 극단적인 대립 구도, 연극적으로 과장된 연기가 어우러진 이 에피소드는 심영물의 원형 서사가 되었다.

  우선 폭★8과 폭발을 구분해야 할 것 같다. 폭★8은 폭발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단어로 보이지만, 그 둘은 다른 개념으로 보아야만 할 것 같다. 심영물에서의 폭★8의 어원은 2012년에 심영물 유튜버 Ungman의 유튜브 영상 <369를 하는 심영>[1]에서 처음 드러난다. 이 영상에서는 인물들이 369를 하던 중 8을 외쳐야 하는 상황에 심영이 급작스레 폭발한다. 맞춤법으로 따지자면, 무언가가 터지는 상황은 당연히 폭발로 적혀야 마땅할 것이다. 이때 폭8이 말해지더니 급작스럽게 상황이 끝난다. 이 엔딩은 심영물의 핵심 구조가 되었다. 이 영상에서는 폭8이라고 적혀 있지만, 훗날 여러 합성물을 거친 뒤 폭8은 폭★8로 바뀌었다. 심영물이 제작된 10년간 폭★8은 심영물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설정이 되었다. 심영물을 장르로 규범화할 수만 있다면 선전 연극〈님〉을 상연하거나 고자가 되어서 병원에 누워 있는 심영을 김두한이 단죄하러 오는 상황에서 시작해, 백병원 혹은 중앙극장이라는 공간에서 심영과 김두한 사이에 해결할 수 없는 갈등이 발생하고, 이 갈등이 항상 폭★8(혹은 폭★4)로 끝나는 서사 구조를 공유하고 있는 장르라 말할 수 있겠다. 백병원과 중앙극장이라는 공간이 정해져 있고, 〈야인시대〉의 인물들이 반복해 나오는 세부적인 요소들이 있지만, 그것들은 상황에 따라서 변할 수도 있는 부차적인 요소다. 폭★8 엔딩은 심영물 장르를 규정하는 가장 큰 요소이자 심영물을 하나의 장르로 굳힌 설정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폭★8을 할리우드의 폭발과 혼동하지는 말아야 한다. 상업 영화에서 폭발의 크기는 자본에 비례한다. 블록버스터 영화의 경우, 그 영화가 스크린에 하나의 완전한 세계를 구축하고, 부술 수 있느냐가 그 영화의 자본력을 증명한다. 블록버스터 영화에서의 폭발은 세계를 부수되 세계의 근본 시스템을 전복하지는 못한다. 폭발 뒤에 남는 것은 그 세트를 만들 수 있는 자본의 힘뿐이다. 한 예로 2021년의 걸작 중 하나인 〈프리가이〉에서는 게임 안의 세계가 통째로 붕괴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때 건물이 무너지는 것을 그래픽의 입자가 부서지는 과정으로 드러나는데, 이 미장센은 뜻하지 않게 스크린 너머로 실물처럼 화면 속 모든 것이 블루스크린의 산물에 불과하단 것을 폭로한다. 기 드보르의 말대로 우리가 할리우드에서 보는 것은 폭발할 수 있는 (상품) 이미지의 집적으로만 남는다. 지구로 모자라 이제 우주까지 때려 부수는 마블의 시대에서 폭★8의 순간을 발견하기란 드물다. 폭★8이 훌륭한 저항 수단으로 작동하는 것은 상업 영화의 폭발과 정반대로 작동해서다. 폭★8은 서사 속의 시스템을 파괴하면서도, 그 시스템의 폭력성에 비례하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폭력 비판에 대하여〉라는 논고에서 법보존적 폭력과 법정립적 폭력을 구분했고, 전자가 기존 시스템을 공고히 하려는 데에 목적을 둔다면, 후자는 신적인 차원에서 법을 정립하려는 데에 목적을 둔다고 보았다. 폭발과 폭★8의 유사성은 이 두 개념의 유사성과도 같다. 다만 폭★8은 신적 폭력이 작동하나 새로운 법이 정립되지는 않고, 무정부주의적인 상황을 만든다.

  정확히 폭★8은 아니지만, 폭발은 철학자들에게 중요한 사유의 수단 중 하나로 작동했다. “폭탄은 터져서 불을 지른다”라는 유언을 남긴 키에르케고르, “나는 다이너마이트다”라고 말한 니체 등 철학자는 폭발을 패러다임의 변화를 상징하는 은유로 쓴다. 러시아의 기호학자 유리 로트만은 《문화와 폭발》에서 폭발이라는 개념어를 처음 제시하는데, 이 개념어는 앞선 철학자들이 말했듯 폭발 자체를 변화의 신호탄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오히려 폭발을 변화하기 전의 단절의 순간이라 이야기한다. 점진적 역사 발전의 안티테제인 폭발은 역사에서 변화가 가속화되어 예측불가능하고, 결정되지 않은 혼란의 시기가 다가왔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다. 패러다임의 교체를 사람들은 흔히들 비가시적인 것으로 인지한다. 폭발을 철학의 방법론으로 택한 이들은 독자가 폭발을 가시적인 신호로 독해하기를 바란다.

  폭★8의 가장 정확한 기원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 보아도 무방하다. 에우리피데스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기보다는 소포클레스가 〈필록테테스〉에서 딱 한 번 쓴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더 가깝다. 그리스 비극은 매킨타이어의 표현에 따르자면, 양립되는 가치를 지닌 두 경쟁적 덕이 충돌하는 장이었다. 이는 〈안티고네〉에서도 신의 뜻을 중시하는 안티고네와 땅의 법을 추구하는 크레온 왕의 대립으로도 드러났다. 그리스인의 가치 규범을 결정하던 종교가 쇠락한 후에 혼란기가 도래했고, 이 혼란기의 파생물이 그리스 비극인 셈이다. 알렉산데어 매킨타이어는 〈필록테테스〉에서 팽팽히 대립하는 두 프로타고니스트인 오디세우스와 네오프톨레모스의 대립을 중요시했다. 비극은 오디세우스가 필록테테스가 활을 쏘아야만 트로이 전쟁이 끝난다는 신탁을 들은 상황에서 시작한다. 오디세우스는 이전에 필록테테스를 무인도에 버린 적 있는 인물이다. 오디세우스는 꾀를 써서 필록테테스를 전장으로 끌고 가려 하며, 네오프톨레모스는 명예를 중요시해 차라리 필록테테스를 납치하려고 한다. 그러나 네오프톨레모스는 오디세우스의 말에 따라 필록테테스를 속여 배로 데려오지만, 그에게 연민을 느끼고 둘은 다시 논쟁을 벌인다. 경쟁적 덕이 충돌하는 이 둘의 대립에서 고통받는 존재는 다리를 절고, 하루하루를 사냥으로 먹고살아야만 하는 필록테테스로 표상되는 빈민층과 소수자이며 경쟁적 덕은 필록테테스 같은 이들에게 아무런 쓸모도 없다. 민주사회에서 셋은 동등한 목소리를 지녀야만 하지만 그러하지 못한다. 이는 철학적인 논쟁이 교착 상태에 처한 아포리아aporia로 드러난다.[2] 소포클레스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상황을 해결한다. 필록테테스의 활의 주인 헤라클레스의 영혼이 내려오더니 필록테테스에게 고향으로 되돌아가라고 명령한다. 치열한 논쟁이 아무런 개연성도 없이 끝나버린 셈이다. 〈필록테테스〉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적당했느냐를 두고서 아직도 논쟁이 치열하지만 말이다. 이런 식의 종결은 라블레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의 오물의 향연, 《파우스트》의 2권에서 파우스트가 급작스레 구원되는 에피소드 등에서도 충분히 볼 수 있다.

  영화사에서 폭★8은 여러 가지 형태로 드러난다. 예로 두 영화를 들고 싶다. 오손 웰즈의 〈소송(1962)〉은 카프카의 《소송》을 영화화한 걸작이다. K는 느닷없이 소송에 휘말리고, 1년 가까이 무죄인 데도 그에게 계속 죄가 있다고 주장하는 법체계로 인해 혼란스러워한다. K는 상급 법원에 가던 중에 실직한 두 테너를 만나서 난도질당해 죽는다. 원작의 결말은 영화로는 재현하기 곤란해 보인다. 더군다나 원작 자체가 미완성인 데다가,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가득하고 인물에게 시련이 반복되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서사 구조를 지니고 있어서 영화로 찍는 작업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오손 웰즈는 이러한 난관을 저만의 방식으로 피한다. K를 호송하는 두 사내는 K를 죽이는 도구로 칼 대신에 다이너마이트를 택한다. K(안소니 퍼킨스)는 구덩이에서 폭★8한다. 난도질은 카프카가 살던 세계 1차 대전 전후에는 가장 잔혹한 설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오손 웰즈는 인터뷰에서 이 결말을 히틀러가 등장하기 전에 유대인 지식인이 쓴 발레로 표현한다. 그는 카프카의 결말이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뒤에도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K가 계속 패배주의로 물들다가 “개처럼 나를 죽여달라”고 흐느끼는 장면을 그는 K가 절규하는 장면으로 각색한다. 흐느낌에서 폭발로. 오손 웰즈가 쓴 표현이다. 이때 폭발은 누군가 부조리에 희생당하는 것을 공적인 차원의 스펙터클로 만든다. 카프카의 단편 〈법 앞에서〉 속의 문지기가 말하듯 “이 문은 오로지 당신에게만 만들어진 것”인 순간 부조리는 그것에 직면한 개인에게서만 드러나는 사적인 상황으로 그친다. 오손 웰즈의 폭발은 인간이 처한 부조리를 공적인 차원으로 드러낸 장치로 작동한다. 구조 자체, 혹은 한 인간이 처할 수 있는 폭력의 강도는 폭발이라는 장치를 통해서만 시각으로 드러난다.

  반면, 루이스 부뉴엘의 〈욕망의 모호한 대상(1980)〉의 엔딩에서도 폭★8이 등장한다. 세계가 부르주아의 손아귀 아래라는 부뉴엘 특유의 냉소와 염세주의는 그의 후기 3부작(〈부르주아의 은밀한 매혹〉, 〈자유의 유령〉, 〈욕망의 모호한 대상〉)을 관통하는 정서다. 〈욕망의 모호한 대상(1980)〉도 이의 연장선상에 있다. 부르주아인 마티유의 플래시백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콘치타와 성관계를 맺으려 하는 마티유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 영화는 마티유를 조롱하는 콘티차의 캐릭터로 부르주아가 성과 사랑까지 장악하는 세계에 나름 저항한다. 문제는 이전의 두 작품에서 폭발이 화면 너머에 은폐된 데에 비해서 유작인 이 작품에서는 폭발이 두 번이나 있다는 것이다. 영화 초반에 부르주아 남성은 자동차에 타려는 순간에 테러에 희생당한다. 서사의 흐름과는 별 상관이 없는 이 장면은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 중에서 가장 스펙터클한 장면이다. 문제는 영화의 결말이다. 마티유와 콘치타는 파리의 아케이드에서 쇼핑하다가 실랑이를 벌인다. 이 순간 급작스레 화면이 폭★8하더니 모든 것이 불길에 휩싸이기 시작한다. 아케이드는 모더니티의 상징적인 공간으로, 이 공간은 자본주의를 압축하는 공간으로 기능한다. 루이스 부뉴엘은 영화 내에서 아케이드를 파괴하는 상황으로 영화 밖의 자본주의에 저항한다. 물론 심영물 제작자가 두 영화를 참고해 합성물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앞서 제시한 사례들은 당연히 심영물과 무관하다. 그런데도 김두한이 심영을 때릴 때 폭★8이 등장하는 것은 앞서 이야기한 오손 웰즈의 〈소송〉을 연상하게 한다. 이윽고 심영물의 폭★8이 주로 영사실에 폭탄이 터지는 장면으로 구현되는 것도 인상적이다. 선전 예술을 상영하는 곳이 파괴되는 것은 구조 자체를 파괴하는 부뉴엘의 결말을 떠올리게 한다.

  인터넷 문화를 살펴보았을 때, 폭★8의 기원을 허무송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허무송(혹은 이것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허무개그)는 유머가 성립할 수 있는 조건을 일부러 무너뜨린다. 두 사람이 상황의 맥락을 공유한 뒤에 그것을 뒤틀어야 유머가 성립하는데, 허무개그와 허무송은 작품과 수용자가 맥락이 공유되려는 순간 모든 것이 멈추고 만다. 웃대를 위주로 제작된 허무송의 한 예를 들어보자. 〈뽀뽀뽀〉[3]를 재생하던 중 “아빠가출”이라는 데에서 노래를 끊는다. 이 순간 한 남자의 표정이 좌절하듯이 일그러진다. 노래를 급작스레 끊는 이 같은 전개는 그 상황에 몰입하려는 관객의 기대치를 무너뜨리고, “아빠가출”이라는 가사를 보게 하는 브레히트식 소격효과를 만든다. 관객들은 이 노래가 가족 서사라는 것을 알기에 “아빠가출”, “엄마가 안아(와)”, “만나면 (담배) 반갑” 등 문장이 만드는 동심파괴에 당혹감을 느낀다. 이 영상들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상황을 스스로 허무로 인식하며 콘텐츠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거기에 드러낸다. 나는 급작스러운 맥락의 단절이 모든 것이 재생과 멈춤이 가능해진 디지털 매체의 조건의 부산물이라 생각한다. 현실과 달리 재생 매체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멈추고 재생할 무한한 권한을 지니고 있다. 허무송은 그런 단절을 극대화해 재생되는 상황이 언제든지 종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만든 것이다. 인터넷에서 대화에 깔린 기본 전제들이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고 인터넷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은 전적으로 허무한 것으로 표현된다. 놀랍게도 허무송이 유행한 시기에 H.O.T의 멤버 문희준을 모욕하는 왜날뷁 등 노래 일부만을 따다가 욕하는 악플 문화가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은 징후적이다.

  허무송의 감수성은 플래시 〈판타지개그〉[4]시리즈로 이어졌다. 이 시리즈의 서사 구조는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졸라맨들이 나와서는 썰렁하기 그지없는 아재 개그를 친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더니 이박사 노래가 삽입되더니 멈추어 있던 졸라맨들이 과격하게 막춤을 춘다. 순식간에 모든 사건이 해결되어서 그다음 에피소드로 넘어간다. 이 시리즈의 개그는 조악하지만, 잠깐의 정적과 그 개그를 끝맺는 방식은 병맛 코드의 기원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판타지개그〉와 허무송에는 아득한 차이가 있다. 허무송은 특정 상황의 성립이 불가능해지는 데에 비해서 〈판타지개그〉는 상황이 발생하나, 그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인식 자체에서 비롯된다. 〈판타지개그〉가 만들어질 시기에 일베의 기원이라고 추정되는 씨벌교황과 싱하형 등 악플러가 등장했고, 코갤이 부상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판타지개그〉의 감수성은 훗날 이말년이 야후코리아에서 연재하게 될 이말년 시리즈에서 쓴 “와장창”이라고 불릴, 상황의 급작스러운 종결 서사를 만든다. 귀귀, 컷부 등 병맛이라는 키워드를 자신의 작품을 정체화하는 데에 쓴 작가들은 허무의 감수성, 〈판타지개그〉의 유전자를 저마다 방식으로 이어받은 셈이다. 또한 이는 MBC 〈뉴스데스크〉의 폭력성 실험 밈에서 한 차례 더 반복된다.

한편으로 플래시 문화는 아마추어, 혹은 잉여들이 활동하는 인디 문화이기도 했다. 이러한 감수성을 구체화한 것은 DC합필갤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아햏햏의 줄임말인 햏자라고 부르지만, 그 단어는 스스로도 정의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햏자는 주류와 그에 속하지 않은 그 자신을 구분하는 수단이었다. 밈 생산자들이 머물렀던 DC합필갤의 문화는 오프라인에서는 비트덩어리에 불과한 것에 몰두해서 쓸데없는 고퀄(혹은 재능낭비)를 만들어 내려는 열정으로 가득했다. 잉여로 정체화된 그들은 이러한 힘을 잉여력이라 불렀다. 〈고추참치송〉의 돌카스, 〈랑카스〉시리즈의 후렛샤 등을 만든 이들은 플래시를 하나의 작품이라 생각했다. 이는 합필갤의 밈 생산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DC를 인류학으로 분석한 이길호의 《우리는 디씨》에서는 이러한 짤방 제작자들의 열정을 네임드로 거듭나려는 열정으로 설명했는데, 플래시 형식이더라도, 혹은 조악한 형식이더라도 자신의 서사가 발화되어야 한다는 욕망이 영상 단위로 만들어지는 콘텐츠의 이면에 깔려 있다. 영상 심영물은 플래시의 후계자지만, 폭★8로 자신의 잉여력을 징벌해, 영상의 서사가 완결성을 지니기를 거부한다.

  심영물의 폭★8 엔딩은 〈필록테테스〉에서 시작해 허무송, 〈판타지개그〉, 이말년의 문화적 유전자를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어떠한 논쟁이 있을 때 양측 둘 다 소통불가능한 상황에서 맥락 자체를 파괴해버리는 방식으로 대화 자체를 무효화시키려는 이 에너지는 인터넷 문화에서 강박적으로 드러난다. 다만 이번 차례에는 심영물의 이미지를 빌렸을 뿐이다. 김두한의 사딸라도 이의 연장선상이며, 김두한을 연기했던 배우 김영철이 연기해서 심영물에 포함된 궁예의 누가 기침을 하였느냐 밈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차단이 일상화된 SNS시대의 징후라고만 독해한다면 너무 납작해질 것이다. 또한 이를 두고 청년 세대가 정치가 무너지기를 바라며, (벤야민의 말대로) 법체계를 무효화하는 신적 폭력으로의 공산주의 혁명이 도래했다는 메시아니즘의 무의식적 발현이라고도 말하지 않을 생각이다. 또한 정치의 주체가 되지 못한 이들이 무력감이 폭★8의 형상으로 되돌아온 것이라고도 말하지 않을 생각이다. 폭★8은 역사 너머에서 언제든 드러난 상황이었고, 이를 완전하게 장르로 고착한 것이 심영물이라고 말하고 싶다. 폭★8은 예술에서 희귀한 사례고, 때로 작가가 이야기를 만들기 귀찮아서 택한 선택으로도 오해를 받았다. 이말년이 침착맨으로 정체성을 바꾼 뒤 사라져 버린 전복성을 심영물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결국 뭘 하든지 간에 시스템 자체가 잘못되었으므로 전복해야 한다는 상상력은 밈 안에서만 쓰일 것이다. 폭★8은 실패하고 비웃음거리로 전락하지만 동시에 폭★8에 쾌감을 느끼게 한다. 이 쾌감의 순간이야말로 예술이 혁명적일 수 있는 순간이다. 극단적인 두 개의 대립항이 허무라고 폭로되고, 그것이 무의미해지는 순간에야 우리는 또 다른 삶의 선택지를 상상할 수 있다. 그러니까 예술은 폭★8이다.


[1] 〈369를 하는 심영〉, Ungman, https://www.youtube.com/watch?v=QIaY1CzzpI0, 2012

[2] [충격] 김두한, 무대 난입해서 심영 뺨때려…차커https://www.youtube.com/watch?v=7bVeVPXX0QQ, 2022 대부분 심영물이 이러한 구조를 따르지만, 가장 최근의 사례로 이 심영물을 드는 것이 가장 탁월할 것이다. 2022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생긴 윌 스미스의 폭력은 지금 가장 큰 이슈다. 약자를 희화화해 조롱하는 크리스 락의 행태와 폭력을 저지른 윌 스미스의 행태 둘 다 옹호할 만한 것이 안 되며, 이는 인터넷 담론장에서 답이 드러나지 않는 논쟁으로 번졌다. 심영물은 둘 다 난처한 이러한 상황을 폭발로 해결하며 이를 유희로 승화한다.

[3] 허무송 모음집, https://www.youtube.com/watch?v=LfCLOMroWOE

[4] 판타지개그 1탄, 장땡, https://www.youtube.com/watch?v=rOYidR_H0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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