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라바닛과 이유진은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사제 관계로 만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2022년 이유진의 생활 및 창작 공간인 미술관옆집이 제3회 제주비엔날레 위성전시관으로 선정되면서 작가 대 기획자로 재회했다. 티라바닛의 장소-특정적 신작 <무제 2022(검은 퇴비에 굴복하라) untitled 2022 (submit to the black compost)>를 제주비엔날레에서 선보이고 1년이 지나 이유진은 티라바닛의 태국 치앙마이 집을 방문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의 일부는 곧 출판될 미술 에세이집 <바깥으로>에 실릴 예정이다.
*https://www.ironvelvet.org/editorial 에서 영어 원문을 읽을 수 있다.
유진: 우리가 제3회 제주비엔날레에 함께 참여한지 벌써 1년이 지났네요.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을까요?
리크릿: 막걸리! 내 기억은 하나의 흐름 같이 존재해서, 특별한 이야기나 에피소드를 들려줄 수는 없을 것 같고, 인상 정도만이 기억나는 것 같아.
유진: 어떤 인상이 남아 있나요?
리크릿: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거, 그리고 언젠가 다시 돌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마치 방으로 불어 들어오는 바람같이, 느낌은 확실히 기억나지만 디테일을 말하는 건 어렵네.
유진: 리크릿이 남기고 간 옹기, 퇴비통, 난로 등 비엔날레 때 만든 ‘작품’이 미술관옆집에서 여전히 쓰여지고 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리크릿: 딱히 뭐가 작품이고 뭐가 작품이 아니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쓰는 것이 쓰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
유진: 대부분의 현대미술은 ‘쓰임’이 없지 않나요?
리크릿: 글쎄, 다르게 쓰이거나 최대한으로 쓰이지 못할 뿐이지, 당연히 쓰임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태국 사람들이 불상을 단지 바라보는 데 쓰는 것처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여러 가지 상념이 떠오르니까. 하지만 어떤 것이 더 많은 시간과 공간을 지나가고, 더 많은 사람들의 손을 타면서 나이를 먹는다면 분명 더 흥미로워질 것 같긴 하네. 사람들은 혹여 작품을 손상시킬까 두려워 만지지 않는건데, 이제 유진이 깨진 그릇도 킨츠기[1]로 직접 고칠 수 있으니, 두려워할 필요도 없잖아? (웃음) 깨진 것을 고쳐 새로운 삶을 부여하는 것… 이는 꽤나 멋진 개념인걸.
유진: ‘치앙마이 집’은 리크릿이자, 리크릿의 작품이자, 리크릿의 삶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 집 또한 쓰임을 다하는 과정에서 고장이 나면 수리해서 다시 제 쓰임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예술가의 집’을 아주 매혹적인 곳이라고 생각하고 많은 영감을 받아왔어요. ‘예술과 쓰임’이라는 맥락에서 리크릿의 치앙마이 집과 다른 장소에 위치한 리크릿의 집들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어요.
리크릿: 치앙마이 집은 늘 누군가가 지낼 수 있는 공간으로 설계되었어. 마치 찻잔과 같은데, 찻잔에 차가 담기고 누군가 마시면 찻잔은 다시 비워지지. 흥미로운 점은 이 집이 모든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탄력성과 회복력을 가졌다는 거야. 그런면에서 살림집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보여주지. 뉴욕 아파트의 경우 많아야 다섯 명이 함께 지낼 수 있는 작은 공간이야. 일본 다실에 관한 전설이 있는데, 3미터에 3미터인 정사각형 공간에 10만 명의 스님들이 들어가 설교를 들었다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지. 하지만 생각해 보면 공간을 어떻게 사용하냐에 따라 쓰임이 생긴다는 거지.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사적 공간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것을 꺼리는데, 난 전혀 그렇지 않은 이유이기도 해. 치앙마이 집처럼 공간이 많으면 혼자만의 공간도 충분히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 나는 사실 집순이거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건 정말 지치는 일이야. 특히 여행이 아니라 일 때문에 돌아다니는 경우는 더더욱. 만약 내가 일을 안 해도 된다면 난 아마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유진: 흥미롭네요.
리크릿: 내가 아주 먼 곳에 있으면 사람들이 날 덜 찾을 거라고 생각해서 치앙마이로 온건데, 내 뜻대로 되지는 않았지… 누구든 혼자만의 시간, 특히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남이 원해서 하는 그런 것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해. 그래서 지금은 치앙마이로 돌아오는 방향으로 삶을 정리 중이야.
유진: 영구적으로 말인가요?
리크릿: 그래, 영구적으로. 교수직을 그만둘 생각이야. 그게 내가 뉴욕에 머물러야 하는 유일한 이유니까.
유진: 제 다음 질문과 연결되네요.
리크릿: 긴 세월을 뉴욕에서 보내면서 예술교육의 변화를 체감하고 있어. 그건 전문성을 강조하면서 직업화의 극한으로 달려가는 예술계의 변화된 방향 때문이기도 해. 그래도 나는 ‘꼭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해주기 위해 학교에 남아서 대학 내 관료들과 싸우고 있지. 그런 변화에 반대하지만, 이제는 싸울 에너지도 없어. 있다 하더라도 그 에너지를 차라리 다른 대안을 만드는 데 쓰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어. 그 대안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기도 해. (웃음) 다시 말해, ‘꼭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거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한국 학생들이 매년 컬럼비아에 입학하고 있어. 그들은 마치 운동선수 같아. 좋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좋은 예술가가 되려고 훈련을 한 느낌이랄까. 예술이 그런 맥락에서 행해진다는 건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데 말이지. 예술은 스스로 질문을 던지며 ‘나’를 찾아가는 것, 즉 새로운 발견을 위한 더듬거림이야. 그래서 성공보다는 이변이 일어날 때가 훨씬 더 흥미롭고 중요한 순간이 될 수 있지. 보편적인 척도로 측정할 수 없는 것이 예술이고, 그것이 예술이 가진 매력이야. 그래서인지 요즘엔 세계 최고의 예술 기관에서 공부한 친구들보다 독학으로 예술을 실천하는 친구들에게 더 관심이 가.
유진: 하지만 리크릿 같은 예술가가 컬럼비아에서 가르치기 때문에 그곳에서 공부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요?
리크릿: 예전에는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아. 지금은 코라크릿(Korakrit Arunanondchai, 1986-)[2]처럼 젊고 유명한 작가가 졸업한 학교를 선호하지. 학생들의 목표가 달라졌고, 컬럼비아에 오는 이유도 달라졌어. 예를 들어, 컬럼비아에 다니면 더 많은 인지도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 실제로 2학년이 되기도 전에 전시에 참여해. 곳곳에 작은 갤러리들이 무작위로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고, 인스타그램을 통해 전시 기회를 얻는 일이 빈번해졌기 때문이지. 이런 현상이 의미하는 바가 뭘까?
유진: 뭐라고 생각하세요?
리크릿: 시장과 돈, 그리고 ‘이미지 메이킹’이겠지. 개념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 일단 멋져 보이는 게 중요하지. 작품이 크든 작든 상관없고, 그저 좋은 상품이 될 수 있는지, 좋은 장식이 될 수 있는지에 주목해. 그래서 학생들에게 종종 ‘뭘 하든 적어도 장식품은 만들지 말라’고 조언하지. 장식품이 꼭 나쁜 건 아니지만, 만약 장식품을 만들 거라면 스스로 예술가가 아닌 공예가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해. 솔직히 나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구 같은 멋진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을 존경해. 왜냐하면 그 물건들은 실제로 매우 높은 수준의 쓰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개념적인 척하지 않거든. 그것들은 자신의 쓰임에 솔직해.
유진: 개념이 예술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나요?
리크릿: 세상을 떠난 크레그 오웬스(Craig Owens, 1950-1990)가 떠오르는데, 그는 젊었을 적 꽤 유명했지. 모두가 그를 천재라고 생각했거든. 어쨌든, 그는 다른 예술가의 작업실을 방문해서 “이 작품의 내용이 뭐죠?”라고 묻곤 했어. 그러면 작가가 “이것저것에 관한 거예요”라고 대답을 하겠지. 하지만 그는 다시 한번 “그래서 작품의 내용이 뭐죠?”라고 되묻는 거야.
유진: 그게 무슨 의미죠?
리크릿: 충분하지 않다는 것 같아. 진짜가 아니라는 거지. 그저 몇 가지 스토리를 짜깁기하거나 구글 검색으로 떠오른 아이디어를 모아논 것에는 개념이 없다는 거야. 그건 작품이 아니라는 거지.
유진: 그러면 작품은 어디에서 나오나요?
리크릿: 나 자신을 발견하고 그 진리를 밖으로 표현하는 데서부터. 적어도 그건 진짜니까. 예술은 우리가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삶의 경험으로부터 탄생하지. 다시 돌아가자면… 그게 바로 내가 기괴한 세라믹 조형물보다 진솔함을 담은 찻잔을 더 존중하고 가치 있게 여기는 이유야.
유진: 리크릿에게 교육자로서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어요. 학교는 여러 세대가 모여서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 중 하나니까요. 저 역시 컬럼비아에서 리크릿을 만났고, 저 외에도 많은 제자들이 리크릿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죠. 이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어요.
리크릿: 최근에 한 아이로부터 이메일을 받았어. 처음엔 모르는 사람이 보낸 이메일이라서 ‘어떻게 알고 연락했지?’ 싶었지. PS1 전시(“Rirkrit Tiravanija: A LOT OF PEOPLE”, 2023년 10월 12일~2024년 3월 4일)[3]를 관람한 그는 작가인 나를 직접 만나서 대화하고 싶어서 연락했다는 거야. 사실 누구든 내게 직접 연락해서 만남과 대화를 청할 수 있지. 그게 학교에서 배우는 것보다 효율적인 방법일 거야. 나는 그 아이를 만나기로 결심하고 그 애에 대해 찾아봤는데, 곧 예일대에 진학할 ‘철자법 천재(?)’로 유명한 거야. 그런 아이가 나와 대화하고 싶다니! (웃음) 내 지인들은 아직도 경계하고 있지만 나는 좋아.
학교는 확실히 여러 세대의 예술가를 만날 수 있는 플랫폼이었어. 하지만 지금은 타락했다고 생각해. 그 원인은 바로 돈이야. 이 돈은 어떤 흥미로운 개념을 향한 돈이 아니라 그저 학위를 위한 돈이지. 그리고 그렇게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한다면 최소한 더 좋은 스튜디오를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해. 하지만 학교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있지. 그건 거의 범죄라고 생각해. 그럴 바에야 차라리 2천 달러 정도 들여서 치앙마이로 오는 게 낫지 않을까? 이 집 한켠에 단 몇 시간만 가만히 앉아 있어도 많은 것을 얻어갈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여기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공유할 수 있으니 훨씬 더 흥미로운 경험이 되겠지.
유진: 학교에서나 학교 밖에서나, 가르치는 일은 여전히 리크릿에게 중요한가요?
리크릿: 사실 나는 가르친 적도 없고 가르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어. 그저 대화를 나눴을 뿐이야. 무엇이든 주고받으면서 연대감을 느끼게 했을 뿐이지. 삶의 경험이 쌓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위치에 있기는 하지만, 나는 그저 내가 보고 느낀 대로 말할 뿐, 예술가가 되는 법을 알려줄 수는 없어.
유진: 그렇다면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의미는…
리크릿: 그만두고 싶은 게 아니라 그만둘 거야. 그건 확실해. 20년이나 학교에 몸담고 있었으니, 연금은 다 받고 떠날 생각이야. 교수직을 그만두는 일은 한편으로는 시간에 관한 문제이기도 해. 학교는 많은 시간을 요구하지, 그 시간에 다른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는데 말이야. 다른 한편으로는 차라리 일과 지출을 아예 줄일 생각도 하고 있어. 그리고 접근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할 때이지. 다양한 지역에 사는 다양한 사람들을 위한 학교. 나는 예전부터 다른 형태의 교육 기관을 상상하곤 했는데, 치앙마이의 젊은 예술가들과 처음 협업을 시작하면서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더 보편적인 무언가를 만들 수 있을지 고민했지. 그렇게 해서 나온 게 영어 번역도 없고 편집도 없는 오리지널 사운드로 이루어진 잡지야. 예를 들어, 사운드가 일본어면 일본어로 듣고, 한국어면 한국어로 듣는 거야. 한국인이 영어로 말하는 거라면 그것도 괜찮아.
유진: 팟캐스트 같은 건가요?
리크릿: 팟캐스트가 생기기 훨씬 전이지. CD 한 장이 들어 있는 잡지인데, CD를 틀어 놓고 잡지 속 사진을 보면서 듣는 방식이었어. 영어권 지역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곳의 정보가 그대로 공유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고 싶었지. 몇일 전 투고도르(Tuguldur Yondonjamts, 1977-)와 연관된 이야기를 나눴어. 그가 내게 준 작품 도록집을 훑어보며 물었지, “왜 도록에 영어만 있는 거야? 모국어는 없네. 영어가 번역으로 들어갈 수는 있겠지만, 마치 영어가 표준이어야 한다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할 필요가 있을까? 그들도 그런 기대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배울 때가 됐다고 생각하는데?”라고. 영어권 바깥에도 수많은 예술, 예술가, 예술계, 예술 커뮤니티가 있어. 그렇기에 나와 치앙마이의 젊은 예술가들은 ‘지구를 방랑하는 학교’ 혹은 랜드처럼 ‘모든 사람이 어디에서든 찾아올 수 있는 장소’를 꿈꾸며 다양한 방법을 늘 모색 중이지.
유진: 컬럼비아를 그만두고 뉴욕을 떠난다고 하셨죠. 지난 2~30년 동안 뉴욕과 태국을 오가며 살아온 것을 생각하면, 앞으로 태국에서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작업이나 새로운 프로젝트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리크릿: 글쎄, 일단 무엇이든 덜 하려고 노력 중이야. (웃음) 내 작업을 생각하면 어쩌면 더 이상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겠어?
유진: 글쎄요… (웃음)
리크릿: 그저 사람들이 이 집에 와서 함께 저녁을 먹고 어울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작품을 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 심지어 더 좋을 수도 있지.
마치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이 작업을 중단한 후에도 모두가 여전히 뒤샹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게 내가 지향하는 바야. 나는 사람들에게 늘 오브제에 너무 집중하지 말고 오브제 주위의 삶을 보라고 해. 앞전에 현대미술의 ‘쓰임’에 대해 물었지? ‘쓰임’에 있어서도 쓰이는 물건보다 그것을 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중요해. 만약 여전히 미술관옆집에 사람들이 방문해서 함께 차나 막걸리를 마시거나 커리를 음미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해. 그게 바로 예술인 거지. 이번 PS1 전시도 오브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지만 여전히 오브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유진: 왜 그런거죠?
리크릿: 그들이 아는 유일한 방법이자 모델이니까. 이미 관습화되어서 그것밖에 모르는 거야. 100개의 작품을 한 번에 전시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해. 솔직히 말하면, 아무 작품도 없이 주방 하나만 있으면 될 일이었지. 아니면 미술관 밖 거리에 문구가 쓰인 깃발들이 나부끼는 것, 혹은 문구가 쓰인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것, 그거면 충분한데 말이야. 그리고 그게 훨씬 더 흥미롭지 않을까?
유진: 다음 질문과 연결되네요. 최근 오카야마 아트 서밋(“Okayama Art Summit 2022: DO WE DREAM UNDER THE SAME SKY”, 2022년 9월 30일~11월 27일)[4]과 태국 비엔날레(“Thailand Biennale Chiang Rai 2023: The Open World”, 2023년 12월 9일~202년 4월 30일)의 예술 감독을 맡으셨죠. 그리고 곧 서울 리움미술관에서 열릴 대규모 전시(“2024 아트스펙트럼: 드림 스크린”, 2024년 9월 5일~12월 29일)의 예술감독도요. 본인은 미술관 전시에서 오브제 없이 주방 하나면 충분하다고 하셨는데, 예술 감독의 입장에서 기관과 일할 때, 여러 예술 오브제를 선별해 전시해야 하지 않나요?
리크릿: 현장에서 무언가를 만들거나 살아 있는 것을 만드는 작가를 섭외하려 해.
유진: 예술 감독으로서 혹은 국제 전시의 큐레이터로서 많은 예술가를 한자리에 모으는 것은 어떤 경험인가요?
리크릿: 비엔날레를 흥미롭게 경험한 사람들은 내게 그것이 장소와 공동체를 다루기 때문이라고 했어. 그들은 특정한 오브제나 영상에 대해 말하지 않고,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 그 장소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경험을 말했어. 예술이 특정 장소를 거시적인 시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나는 만족했지. 아무도 특정 조각이나 그림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아. 오히려 흐르는 강 옆에 있던 그 작품이 얼마나 멋졌는지 들려주지. 마치 작품의 맥락이 장소와 얽히면서 남긴 인상처럼. 그것이 큐레이팅이 해야 할 일이자 예술이 할 수 있는 일이야. 사람들이 자신의 환경, 장소, 시간, 상황, 맥락을 이해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는 일이지. 오카야마에서도 그런 경험을 만들었다고 생각해. 매일 생동하는 서른 개의 작품을 전시했거든. 지난 도큐멘타15(“documenta fifteen: lumbung”, 2022년 6월 18일~9월 25일) 역시 그랬다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
유진: 저는 이해했어요!
리크릿: 도큐멘타15는 보지 못했지만 나는 오히려 그들이 사는 곳인 인도네시아에서 그들을 만나고 싶어. 마치 여행 책자를 읽는 것처럼 독일에서 그들을 볼 필요는 없으니까. 한 번쯤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까? 그렇지만 “우리는 살아있다. 우리는 살아있는 예술이다. 우리는 살아있는 오브제다. 우리는 저 멀리 있고, 당신은 우리를 전혀 알지 못한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중요했다고 생각해. 하지만 나는 관계예술(relational art)이라는 정의에 집착하지는 않아.
유진: 저는 리크릿에게 관계예술에 관해 물어보고 싶었는데, 편집자는 관계예술을 이야기하지 않고 관계예술에 관한 책을 만들고 싶어하기 때문에 리크릿에게 관계예술에 관해 질문하는 것을 꺼려했어요. (웃음) 하지만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 1965-)와 90년대 현대미술의 맥락에서 리크릿은 ‘관계의 미학(relational aesthetics)’을 대표하는 예술가 중 한 명이잖아요… 관계예술 작가로 알려진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벌써 30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 관계예술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해요.
리크릿: 편집자 친구가 관계예술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한 것에 아주 공감하는데? 사실 모든 것이 관계적이기 때문에 관계를 예술의 한 장르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아. 그건 그저 관계일 뿐이니까. 사람들은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오브제나 예술에 초점을 맞추려 하는데, 나는 그냥 관계, 경험, 느낌을 이야기하면 좋겠어. 방 안으로 불어 들어오는 바람을 뭐라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모두 느낄 수 있는 것처럼, 관계란 정의할 필요도 없고, 특정 시대에 국한된 것도 아니야. 그것은 늘 일어나고 있어. 관계예술 작가라고 알려진 대부분의 작가들은 그 용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적어도 내 친구들 중 상당수는 말이야. 그리고 참고로 나는 아직 그 책을 읽어 보지 않아서 딱히 할 말이 없네.
유진: 그렇지만 그 책은 꽤 흥미로운걸요.
리크릿: 그렇겠지. 그런데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어. 아마 죽기 직전에 읽지 않을까? (웃음) 언젠가는 읽겠지. 그런데 사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통해서 나를 바라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그리고 무엇이든 정의 내려지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아. 관계의 미학이니 뭐니 하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관계 자체에 관심이 있고 그 관계는 도처에서 늘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관계예술에 관해 이야기하기보다는 예술이라는 개념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것, 예술과 함께 하는 것, 혹은 예술을 통해 함께 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면 돼.
유진: 그럼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나 영감을 주었던 현대미술 작품이 있을까요?
리크릿: 당연하지. 하지만 그게 꼭 예술인지는 모르겠어. 예술보다는 사람 혹은 그 사람의 일생으로부터 영감을 받지. 뒤샹이 살아간 방식이나 고든 마타-클락(Gordon Matta-Clark, 1943-1978)[5]이 죽은 방식처럼. 작품에 관해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그저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살았는지에 관심이 있지. 특정 작품이 나에게 이런저런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워. 나에게 영향을 준 것은 사람이야. 나는 구체적인 것에 집중하기보다 큰 흐름을 보려고 해. 플럭서스 미술(Fluxus art, 1960-70s)이 아무도 모르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처럼. 백남준이 한국 미술에 끼친 영향처럼.
유진: 다시 기획자로서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죠. 전시를 기획하는 것은 큰 흐름을 보는 것, 다시 말해, 여러 예술가를 한데 모아 하나의 큰 맥락을 만드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리크릿의 생각은 어때요? 기획하는 걸 즐기나요?
리크릿: 맞아, 기획하는 일은 즐거워. 나를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게 만들거든. 기획은 어떤 개념을 세상에 보여주는 또 다른 방식이야. 나는 사람들이 예술과 예술가의 삶을 통해 어떤 흐름을 읽을 수 있길 바래. 작가의 작품보다 작가의 사고방식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고 싶어. 서로 다른 성질의 것들을 나열해서 보는 것이 중요한데, 거기서 새로운 상념이 떠오를 수 있기 때문이지. 그것이 바로 좋은 기획이야.
유진: 전 세계가 정치, 사회, 환경 이슈로 시끄럽지만, 예술이 그런 이슈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현대미술과 정치는 애증의 관계 같기도 한데, 예술이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나요? 이 질문은 저의 개인적인 답답함에서 나온 것 같아요. 큰 흐름 속에서 예술가로서 제 위치에 대해 늘 고민하거든요. 예술가로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어요.
리크릿: 유진 스스로를 행복하게 하는 일을 하면 좋겠어. 장식을 만드는 것만 하지 않는다면 뭐든 괜찮아. 나는 주변 사물, 시간, 장소, 사람에 관한 작품을 만들어. 사실 인간은 큰 그림을 보지 못해. 거시적인 시점에서 보면, 인간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작은 세계에 살고 있지. 최근에 누구에게 “21세기인데 왜 아직도 같은 문제들이 존재하는 걸까?”라고 물은 적이 있어. 뭐, 더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이란 어리석은 존재이기 때문이겠지. 우리는 20세기에 걸쳐 철학, 문학 등 여러 학문을 바탕으로 배우고, 사고하고, 개선하고, 이해의 폭을 넓혀왔음에도 왜 더 어리석어진 걸까?
유진: 왜 그렇다고 생각하세요?
리크릿: 그냥 인간은 어리석은 것 같아. (웃음) 어리석게만 굴지 않고, 현명하게 행동하면 되는데 말이지. 예술도 마찬가지야. 어떤 작품은 정말 쓸데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또 어떤 작품은 아주 흥미롭지.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중요한 건 예술가의 삶이야. 우리가 에텔 아드난(Etel Adnan)[6]의 그림을 존경하는 이유는 그의 삶, 사상, 글, 역경 때문이지. 그의 그림을 다른 누군가가 그렸다면, 그것은 그저 멋진 색감의 회화일 뿐이야. 흥미로운 예술은 예술 자체로서가 아니라 누가, 어떤 삶을 살면서, 어떤 이념을 품고, 어떤 형태로 그 개념을 드러내는지가 중요해. 그렇다면 바라건대, 그 개념은 오래도록 지속될 수 있을 거야
유진: 이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지만, 혹시 진정성에 대한 것일까요?
리크릿: 먼저 스스로를 알아야 해. 그다음 예술을 실천할 의지를 찾아야지. 사람들은 제각각 다른 개성을 가졌기 때문에 방식은 모두 다를 수 있어. 하지만 자신을 알고 행복하게 하는 무언가를 행하고 있다면… 여기서 내가 말하는 ‘행복’은 ‘하고 싶은 일을 찾은 상태’야. 그건 다른 의미에서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을 말하지.
유진: 예술계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행동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모나리자에 스프를 뿌린 기후 운동가(2024년 1월)라든지 이스라엘 군사 무기에 투자한 뉴욕현대미술관 이사의 사퇴를 요구하는 친-팔레스타인 시위(2024년 2월)와 같은 사례와 그런 행위에 대한 검열 혹은 억압의 사례들에 대해서요.
리크릿: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 무언가를 지우려는 것은 실수를 부정하는 것과 같아. 사람이나 사물을 지우는 행위를 통해 그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물론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하고 행동해야 하지. 하지만 필요한 곳에 가서 직접적인 도움을 주거나 금전적 지원을 할 수도 있어. 지우는 행위는 가장 쉬운 방법일 뿐이야.
유진: 권력자에게 압력을 가하는 것인데도요?
리크릿: 물론 권력자들은 나쁜 짓을 많이 해. 하지만 자신의 삶을 조금만 돌아보면 아마 그런 그들을 매일매일 지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거야. 예를 들어, 세븐일레븐은 아주 낮은 임금을 주고 돼지를 사육하고, 심지어 GMO 옥수수를 돼지 농장에 강매하고 있어. 그걸 알면서도 세븐일레븐에서 물건을 사지.
유진: 저항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을 수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정치적 시위를 선택하는 것 같아요. 일부 권력 기관이 그런 사람들을 지우려 하는 것이 문제 아닐까요?
리크릿: 둘 다 짧은 생각이야. 옳음을 가장한 허울일 뿐이지.
유진: 예술계를 시끄럽게 한 주요 현대미술 기관에서 일어나는 시위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리크릿: 시위는 늘 있었어. 시위에 참여하는 건 좋아. 하지만 대신 그런 기관으로부터 자신의 작품이 수집되기를 기대하거나 전시에 참여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아야 해. 차라리 대안이 될 수 있는 미술관을 만들거나 다른 쓸모 있는 일을 찾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시위의 대상이 결국 자신의 플랫폼이니까.
유진: 그들은 자신의 플랫폼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닐까요?
리크릿: 사실 시위에 참여하는 예술가 대부분은 ‘액세스(접근성)’가 없기 때문에 행동할 수 있는 거야.
유진: 액세스가 있는 예술가라면요?
리크릿: 액세스가 있다면 적극 활용해야지. 어떤 문제의식이 있다면 관련 정보를 자세히 공유하고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플랫폼으로 활용해야지. 그러한 과정에서는 어떤 것도 ‘캔슬(cancel)’하지 않아.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어.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올바르게 살아가면 돼. 시위를 하고 소리 지르는 것만이 방법은 아니야.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의 예술은 올바른 방식으로 펼쳐나가면 돼. 내가 사람들에게 타협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타협하지 말라는 거야. 그렇지만 처음부터 타협하지 않는다면 아마 예술가는 될 수 없겠지.
유진: 잠깐만요, 처음부터 타협하지 않으면 예술가가 될 수 없다고 하신 건가요?
리크릿: 그래. 왜냐하면 현대미술에서 예술가의 위치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거든.
유진: 리크릿 자신도 타협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리크릿: 그럼. 나도 많은 타협을 했지. 하지만 오히려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타협’을 했다고 생각해. 상대방이 어떤 거부를 하면, 그건 그 사람의 입장을 더 명료히 드러내기 마련이거든. 그들이 자신을 드러내기도 전에 입을 막아버리는 게 아니라 타협을 통해 그들의 입장이 수면 위로 드러나게 하고 문제의 중심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할 수도 있어. 예를 들어, 나는 이번 PS1 전시를 준비하면서 기획자에게 “작품 백 개를 전시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지?”라고 계속해서 물어봤거든.
유진: 그랬더니 뭐래요?
리크릿: 내 질문의 의도는 알겠다고 하더군.
유진: 그렇지만 실제로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요?
리크릿: 그래. 그래도 예일대 천재가 전시를 보고 나와 얘기하고 싶다고 하니, 완전히 쓸데없는 짓은 아니었지. (웃음)
유진: 아, 맞네요. 그 천재 소년. (웃음)
리크릿: 타협의 끝이 장식품이라면 그것은 의미 없는 일이지만, 타협 이후에도 여전히 질문들이 잔재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멋진 일일 수도 있어. 사람들은 행동하는 것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이 두 가지의 가치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유진: 리크릿이 아시아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계획이라고 하니 저에게는 아주 기쁜 소식인데요, 아시아로 돌아온다는 것은 리크릿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중요한 결정인가요, 아니면 단순히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일 뿐인가요?
리크릿: 뭘 하든 나는 그것이 변화로 이어지면 좋겠다고 늘 생각해. 유진이 내 이웃 카민을 보러 가면 좋겠어. 그는 정말로 의식 있고 끝없이 노력하는 친구지. 그게 그의 방식이자 자존심이거든. 유진이 나에게 한 모든 질문을 그에게 던져봐도 좋을 것 같아. 그는 불의를 못 참지, 내가 불의를 참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사실 모든 것에 동의하지만, 아주 상반된 방법으로 응답해. 그는 사람들에게 생각하는 방법을 알려주지만, 나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지. 나도 당연히 사람들이 깊이 생각해 보기를 원하지만, 그들에게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싶지는 않아. 나는 사람들이 스스로 해결책을 찾길 바랄 뿐이야. 이런 내 방식은 오랜 시간을 요구하기에 정치인들은 아마 못 견딜 거야. 하지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고 모두가 ‘올바르게’ 생각하도록 하는 것은 일종의 서구식 사고방식이야. 애초에 자신이 옳다는 것을 어떻게 장담할 수 있지?
정답은 없어. 깨달음에는 다양한 길이 있고, 그 길은 모순으로 가득하지. 하지만 모든 길은 무언가를 향하고 있어. 충분한 시간을 가지는 것만이 그런 다양한 길들을 존중하는 방법이지.
아시아에는 다양한 갈등이 존재하는데, 특히 태국에서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불만이 많아. 하지만 나는 거기에 별로 공감할 수 없어. 예를 들어, 나는 어제 강연에 참석한 모든 사람에게 내 생각을 말할 수 있었지. 사실 모두가 내 입장을 이미 알고 있고, 다들 동의한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그렇다면 모두가 이미 동의하는 것을 꼭 입 밖으로 내뱉어야만 하는지 질문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말하지 않으면 그것은 실존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 우리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이미 알고 있어. 그렇다면 더더욱 말해야 해. 말하면서 살아내고 변화해야 해. 어제 강연 참석자 중 누군가 “우리는 표현의 자유가 없다. 특히 권력에 대해 말할 수 없다”라고 했는데, 난 좀 의아했어.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 자리에서 권력에 대해 말하고 있었거든. 커뮤니티가 중요한 이유는 공간을 만들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토론할 수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들과 연결되겠지. 어떤 방식으로든 권력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고 우리만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해, 그렇지?
예전에 튀르키예를 방문했을 때, 독재 정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어. 그들은 권력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독립적인 마을과 조직을 꾸리는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했지. 우리도 그들처럼 권력에 휘둘리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어. 방콕에 살지 않는 것이 그런 선택 중 하나야. 산에 들어가 살거나 자급자족하는 것 또한 그런 선택이라고 할 수 있지. 그건 하나의 대안이자 위계, 기득권층, 제도권에 저항하는 방식이야.
유진: 시간 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리크릿.
리크릿: 그래. 참, 내일 저녁 7시에 사람들이 식사하러 올꺼야.
태국 예술가 리크릿 티라바닛(Rirkrit Tiravanija)은 1961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관계 예술(relational aesthetic)’ 작가로 유명한 그의 작품 세계는 순수예술(회화, 조각, 설치 등)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정치 참여적 공공 예술 프로젝트, 예술/생태 교육 등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티라바닛은 컬럼비아 대학교 예술대학 교수이자 태국 치앙마이에 위치한 랜드 파운데이션(The Land Foundation)의 공동 창립자이며 예술가, 미술사학자, 큐레이터로 구성된 콜랙티브 유토피아 스테이션(Utopia Station)의 창립 멤버다.
시각 예술가이자 독립 기획자 이유진(Yujin Lee)은 1986년 대한민국 대구에서 태어났다. 미국 코넬대학교에서 순수미술 학사를 뉴욕 컬럼비아대학교 예술대학원에서 시각예술 석사를 졸업했다. 2018년 제주로 이주한 후 시골 농가를 구입해 국제 아티스트 레지던시 ‘미술관옆집’을 운영하며 살림, 농사, 번역, 돌봄, 창작을 병행중이다.
미술관옆집은 2022년 제3회 제주비엔날레 위성전시관으로 선정되어 티라바닛의 장소-특정적 신작 <무제 2022(검은 퇴비에 굴복하라)>를 선보였다.
[1] 킨츠기는 일본어로 ‘금’을 뜻하는 킨과 ‘이어붙이다’라는 츠기의 합성어로 깨진 조각들을 생옻과 밀가루를 사용한 천연 접착제로 붙인 뒤 이음면에 금 혹은 은분을 덧씌우는 기법이다.
[2] 태국 방콕에서 태어난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는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RISD)에서 학사학위를 받고 컬럼비아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아룬나논차이는 2013년 대학원을 졸업하자 마자 예술계의 주목을 받으며 뉴욕 모마 PS1(2014), 파리 팔레드도쿄(2015), 베이징 올렌스 현대미술관(UCCA, 2015), 겐트의 S.M.A.K.(2016), 비엔나 시세션(2019), 포로투 세할베스 현대미술관(2020), 취리히 미그로스 미술관(2022), 스톡홀름 모더나뮤제(2022)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그리고 베니스 비엔날레(2019), 휘트니 비엔날레(2019), 이스탄불 비엔날레(2019), 광주비엔날레(2021)등에 참여했다. 2021년에는 국제갤러리 전속 작가가 되면서 한국에서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3] 티라바닛의 회고전 “Rirkrit Tiravanija: A LOT OF PEOPLE”이 뉴욕 MoMA PS1에서 2023년 10월 12일부터 2024년 3월 4일까지 진행중이다. 대대적인 회고전으로 40년에 걸쳐 활동한 작가의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100여개 이상의 작품을 전시하며 전시 기간 중 다양한 퍼포먼스, 모임(gathering), 토크와 파티를 주최한다.
[4] 2016년 시작된 오카야마 아트 서밋은 3년마다 개최되는 국제적인 현대미술 트리엔날레로 큐레이터 대신 현대미술 작가에게 예술감독을 맡기는 것이 특징이다. 첫 해인 2016년은 리암 길릭(Liam Gillick), 2019년은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 2022년은 리크릿 티라바닛(Rirkrit Tiravanija), 그리고 다가올 2025년은 필립 파레노(Philippe Parreno)가 예술감독을 맡았다.
[5] 고든 마타-클락은 1978년 8월 27일 만 35세의 젊은 나이에 췌장암으로 별세했다.
[6] 에텔 아드난(1925-2021)은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태어난 아랍계 미국인으로 평생 전 세계 곳곳을 오가며 시인, 수필가, 여성운동가이자 시각 예술가로서 다양한 삶을 살았다. 알제리전쟁(1954-1962)이 발발하자 “나는 더이상 프랑스어로 글을 쓸 필요가 없다, 그림을 그릴 예정이다”라며 프랑스어로 글을 쓰는 일을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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