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이여, 다시 한 번 – 황예지의 사진

조재연
2024.10.01

1.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너무 많은 ‘서정’이 있다. 서정은 이제 충분하다는 얘기다. ‘일상’이라는 터전, ‘내면’이라는 수단, ‘자연’이라는 이상을 꼭짓점 삼은 삼각형에 안착한 서정은, 더 이상 스타일이기보다 메커니즘으로서 소진된다. 주변의 사소한 존재를 돌아보고 보듬는, 그로써 진부한 하루에서 특별하고 소중한 감동을 낚아 올려 깨달음에 도달하는 서정의 논리는 미술 안에서 형식으로서 반복되거나, 혹은 미술 그 자체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다음에도 삶은 도무지 특별해지지 않는다. 서정 위에서 깨달음이 도덕적으로 선하거나 미적으로 아름답기는 쉬워도 위협적이지 않은 까닭이다. 삶의 진실은 그러니까 진리는 늘 위협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자아는 진리를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삶을 새로이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놔두고, 미처 자아가 눈치채지 못한 것을 발견하면 될 뿐이라며 진실로부터 물러서는 것. 그러니까 세계엔 잘못이 없고 그저 자아의 깨달음이 문제였다는 헌신적이다 못해 숭고한 반성의 점철. 이때 서정은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을 확인하고, 자아와 세계의 일체감을 향유하는 것으로써 부조리와 동조한다.

  황예지의 사진 역시 일상과 내면, 자연 사이에서 진동한다. 평소 관계 맺는 사람들로 채용된 피사체, 그들에 얽힌 감정에 주력한 화면과 내밀한 문체로 씌어진 작업 노트, 마지막으로 이들을 품어내는 무대로서 자연…. 그러니 작가의 사진 또한 서정으로서 갈무리할 수밖에 없다,고 여겼을 때 사진은 그들이 이 삼각형에 안착하기보다 외려 그들이 서로를 균열로, 내파로 부유하고 있다는 다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그의 자아는 어떤 세계도 껴안지 못한다. 그만큼 세계 앞에서 무력하고 무능하다. 그러나 그 절박함 때문에 세계와 싸우는 괴력을 갖는다. 착하고 아름다운 깨달음이 아니라 파국과 불행을 노래하는 자아는, 자신을 갈고닦는 것 대신 세계를 물어뜯고자 나선다. 이는 서정이 어째서 모더니즘 시대에 가장 사회적인 장르였는지를 다시 밝힌다. 그것은 사회를 직접적으로 들먹이지 않는 독백이지만, 개인이 어떻게 그러한 경험을 할 수 있었는지 끝까지 묻는 것을 통해 예술가 등 뒤에 매개된 사회를 들춰내는 서정이다. 황예지는 세 개의 경로를 따로 또 같이 밟아나가며 사회 밖에서 사회를 탐색한다. 자아를 주체화하고, 타인을 타자화하고, 풍경을 상처화하는 길. 이 세 영역에서 황예지의 사진은 위협적이다.

2.

  자아는 동일화 혹은 내면화를 양식으로 성장한다. 그는 세계를 주유하면서 자신과 다른 것을 만나지만 그것은 이내 거울이 되어 자기 자신을 비추고 그를 통해 자기를 보존한다. 타인과의 조우, 일상 속 낯선 사물의 발견, 여행에서 새로운 풍경을 보는 일 등은 언제나 최종 국면에서 미지의 것과 화해하는 ‘나’에 초점이 맞춰진다. 어디에나 자신이 있고, 자신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상승은 얼마간 학대를 동반하기 때문에 숭고해 보이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것을 견뎌내는 자아를 증명함으로써 나르시시즘에 그치고 만다. 무수한 존재를 통해 ‘나’를 내세우는 것은 황예지의 사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양상이다. 그러나 여기에 나르시시즘은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는 변신의 쾌락이 아니라 탐색의 고통으로 밀고 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어미와 언니, 친구, 타인, 사물, 자연까지 이 무수한 존재를 앞세우고도 이 캐릭터들을 통어하는 중심은 없다. 언젠가 황예지는 피사체들을 모두 삼키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마치 거식증 환자처럼 폭식에 실패하고서 게워내는 방식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 것도 같다. 나는 ‘무엇’임을 규명해 나가는 과정이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 ‘나’가 아니라고 지워나가는 것을 통해 도달하는 자아. 그 점멸만이 자아를 ‘주체’라고 부를 수 있다.

<절기_2>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 60.9×60.9cm 2017

 
  대상을 삼키는 데 실패했을 때, 그러니까 피사체를 제 것으로 동일화하지 못했을 때 사진은 날것으로 현상된다. 여기서 ‘날것’은 단순히 연출의 부재를 의미하는 스냅 혹은 스트레이트 포토그래피를 의미하지 않는다. 의도가 가미되든 가미되지 않든 사진가에게 셔터는 최종적인 순간에 멈춘다. 셀피를 찍을 때 우리의 손이 가장 사실과 가까운 찰나가 아니라 가장 마음에 드는 순간에 멈추듯, 셔터를 통제하는 것은 언제나 연출이다. 그러나 황예지의 사진은 연출과 비연출 사이에서 불투명하다. 분명 촬영 현장엔 사진가와 피사체의 관계가 있으며 작가가 엄선했을 배경과 상황이 존재하지만, 그 시간엔 어떤 망설임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모델은 몰입과 소격(verfremdung)을, 상황과 배경은 정돈과 난립을 오간다. 그렇게 사진의 두 자아, 모델에 투영된 자아 그리고 상황과 배경에 비롯된 자아는 픽션을 보여주는 데에도, 논픽션을 드러내는 데에도 모두 실패한다. 내가 알고 있는 이미지와, 내가 모르고 있는 나의 진실 사이의 점멸. 정신분석은 그 점멸 속에 진실이 있다고, 그 점멸만이 ‘주체’라고 말한다.

〈mixer bowl_30〉 (2016)

 
3.

  가장 먼저 자아가 직접적으로 투사된 셀프 포트레이트가 열쇠가 될 것이다. 첫 사진집 『mixer bowl』(2016)에 등장하는 황예지의 모습은 어떤 역할에 빠져들었다가 깨어난 다음 또 빠져들고 다시 깨어나기를 반복한다. 몰입과 각성이 거듭될수록 황예지라고 불릴 어떤 ‘자아’의 모습은 점점 희미해진다. <mixer bowl_30>(2016)에서 그는 흐린 눈으로 허공을 응시한다. 혼탁한 시선은 역할에 대한 몰입의 상징이다. 카메라의 포커스 또한 뿌옇게 주위를 물들이며 초점을 잃은 안구를 반영한다. 헐벗은 몸과 힘을 뺀 채로 등을 기댄 그의 상태는 고통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나, 이는 그가 가진 것으로부터 멀어지려는 과정에 동반된 증상이다. 그러나 무엇으로든 변화할 수 있을 자아는 결국 그 변신에 실패한다. 불투명한 시야는 현실의 뚜렷함을 거두어 그를 이상향으로 보내지만, 경직된 어깨는 다시 그 정신을 다시 현실로 붙잡는다. 불확실한 윤곽은 확고한 사물의 기하학과 불화한다. 옅어지는 자아에 저항하듯 사물은 선으로 점으로 그리고 도형으로 비정형에 맞선다. 마치 수면의 초입에서 의식의 잠식과 계몽이 반복되듯이 작품에선 몰입과 각성, 소멸과 존재 사이의 진동이 존재한다.

<mixer bowl_6>(2016)
<mixer bowl_11>(2016)

 
  <mixer bowl_6>(2016)과 <mixer bowl_11>(2016)은 각각 대척점에서 작가가 어떻게 자신을 분실하는지를 보여준다. 전자는 카메라에 의해 피사체가 발견된다는 점에서, 후자는 피사체가 카메라를 발견한다는 점에서 상반된다. 그리고 이 피동성과 능동성은 사진이 현상된 순간, 스스로의 논리를 무너뜨리며 서로의 자리로 이동한다. <mixer bowl_6>에서 모델은 발각의 순간, 렌즈가 나타날 것을 예측이라도 했다는 듯 신발장에서 엉뚱한 식사를 시작한다. 이때 발견의 피동성은 상황을 따르지 않는 연기를 통해 중화된다. 그러나 동시에 인물 오른편에 자리한 현관은 그가 이곳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해명한다. 황예지는 외부를 바라보기 위해 지금의 위치에 자리 잡았을지도 모른다. 행동의 원인이 있다면 인물은 피동성의 제자리로 돌아간다. 다시 한번 진동이다. 반대로 <mixer bowl_11>은 피사체 스스로 렌즈에 뛰어들었다는 점에서 능동적이다. 인물은 평소 거울로는 볼 수 없던 과장된 포즈를 통해 기존의 자아를 변화시킨다. 그러나 이 능동성도 그에게 찍힌 낙인을 지우지 못한다. 문신이 새겨진 한, 인물은 언제나 식별될 것이기에 자신의 운명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진동은 있다. 화면의 가장자리는 인물의 변화를 징조한다. 젖은 머리는 마를 것임으로, 또 위태롭게 놓인 사물은 곧 떨어질 것임으로…, 마치 영원한 것은 없다는 듯.

4.

  확실히 황예지의 사진에는 황예지가 없다. 그리고 이는 그의 사진에 타인이 ‘타자’로 등장한다는 말과 같다. 자아의 놀라운 위력은 타인에게서 자신의 거울상을 찾아내는 데 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 서정의 일반은 일상에서 맺는 타인과의 경험, 관계를 주재료로 삼지만, 이는 사실 자기 자신과의 재회에 가깝다. 타인과의 거리는 궁극적으로 통합되기 위해서만 인식되고, 차이란 결국 자아의 확장에 종사하고자 등장한다. 사랑을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이 되는 개구리와 야수처럼 자아는 타인을 끌어들이고, 타인은 ‘나’의 세계 일부가 된다. 누군가에 대한―혹은 누군가를 통한― 이해는 내가 이미 알았고, 이해했던 것들이다. 마찬가지로 사랑은 내가 이미 시인했으며, 사랑했던 것들이다. 그러나 황예지의 사진에서 개구리는 개구리, 야수는 또한 야수일 뿐이다. 사진집 『절기』(2017)에서 10년 만에 돌아온 어미에게서 이해가 아닌 ‘간극’을 선택하며, 자신을 가장 많이 닮은 타인과 가까워지는 것 대신 “얼굴과 몸에 남은 궤적을 따라 둘의 간극을 선명하게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읊조릴 때, 그 간극을 지키는 투쟁을 말미암아 타인은 자아에 삼켜지는 일 없이 영원히 ‘타자’로 남는다.

<mixer bowl_17>(2016)
<마리아>(2019),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 40×60cm

 
  황예지는, 개구리와 야수는 결국 개구리와 야수일 뿐이라는 ‘실재’를 회피하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카메라에 의해서 세워지기보단, 카메라가 세워진 장소에 불시착한 것처럼 보인다―그리고 나는 이 문장을 카메라가 피사체의 장소에 불시착한 것처럼 보인다고 고쳐 쓰고 싶다―. 서정적 동일화와 무관한 것은 물론 작업의 모델이라고 말하는 것조차 무색해질 만큼 피사체는 작가로부터 자유로워 보인다. <mixer bowl_17>(2016)의 화면에서 상념에 잠긴 인물을 향해 감상자가 몰입해 들어갈 수 없는 이유는, 그의 고민이 가벼워서가 아니라 그가 옆에 놓인 상자와 같은 배색으로 가구와 다름없이 타자로서 놓여있는 까닭이다. 이는 화면의 색감에 캐릭터가 동조하는 것과는 다르다. 노란색과 적갈색으로 쌓아 올려진 상자와 똑같이, 노란색과 적갈색으로 신체를 쌓아 올린 존재는 스스로 자신이 누군가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 ―여기서는 모델로써― 사용되는 것 외에는 간극을 좁힐 수 없는 사물로 존재함을 강변한다. <mixer bowl_48>(2016)과 <절기_18>(2017), <절기_21>(2017), <절기_24>(2017), <마리아>(2019) 등에서도 인물은 주변의 패턴과 다르지 않게 적재되거나, 들어있거나, 부착돼 있다. 각자가 어두워질 때까지 카메라와 존재는 따로이 존재한다. 가구끼리는 말하지 않는다.

<병과 악과 귀_19>(2016),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 27.9×20.3cm
<병과 악과 귀_20>(2016),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 27.9×20.3cm

 
  모델이 사물화되었다는 것은, 황예지가 앞서 “간극을 선명하게 만든 작업”을 한다고 적었듯, ‘나’와 물리적·정서적 거리가 확고한 탓이다. 여기에는 이해의 길을 열어내는 상황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진집 『병과 악과 귀』는 인물은 대부분 클로즈업되어 표정의 연유를 추측할 수 없거나, ‘배경’이 소거된 채로 뒷모습만이 제시돼 그 맥락을 들여다보는 것을 막는다. 가령 <병과 악과 귀_29>(2016)에서 확인 가능한 내용은 자아가 감정을 이입(동일화)하고 그로부터 도출할 내러티브적 ‘진실’이 아니라 한 인간이 등을 돌리고 서 있다는 ‘사실’일 뿐이다. <병과 악과 귀_19>(2016), <병과 악과 귀_20>(2016)에서 어미는 연달아 같은 장소에 나타나 이야기를 엮어보라 도발하지만, 자아는 그의 다문 입을 조금도 열 수 없다. 화면은 어쩌면 추상과 같아서 검게 물든 눈은 고통 대신 그저 원, 주름은 시간 아닌 그저 선만을 쥐여준 채로 이내 시선을 돌려보낸다. 자아의 전횡이 금지된 곳에선 반대로 타인의 타자성이 분출한다. 작가의 의지와 다르게 불쑥 나타난 어미처럼 타인은 의도, 사진과는 불쑥 나타나고, 그는 당황하며 셔터를 터뜨리는 식이다.

5.

  일상을 담은 미술에서 자연이 ‘매트릭스’로 나타나는 현상은, 가상화가 징후가 된 시대의 반영인 동시에 서정성에 내재한 본래적 위험이기도 하다. 자연은 언제나 재발견된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 도돌이표처럼 자아의 재발견으로 돌아온다. 숭고, 무한함, 생명력, 아름다움… 자연에서 출발하는 경탄이 자연에 바치는 찬사가 아니라, 그러한 감정, 개념을 조우하는―역량을 지닌― 자아에 대한 헌사로 마무리되는 까닭이다. 이들은 성찰이라는 태도로서 자아를 갈무리하지만 결국 그 성찰을 도모하는 자아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나르시시즘에 어긋나지 않는다. 이때 자연은 ‘풍경’일 뿐이다. 풍경은 책임을 묻지 않는다. 말없이 포용만을 띨 풍경 앞에서 누구나 한마디쯤은 할 용기가 있지만, 반대로 지금의 풍경이 왜 그렇게 비칠 수밖에 없는지 책임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반면 황예지의 자연에서 인물은 끊임없이 입을 벌려야만 한다. 그에겐 변명하고 또 비명을 질러야 할 의무가 있다. 여기의 풍경이 세계의 상처이기 때문이다. 풍경은 어디 외딴곳에 분리된 장소가 아니다. 설령 참사의 폐허와 투쟁의 전선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일지라도 이 모든 처소는 서로 이어져 있다.

<노란>(2020),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 51×51cm
<흩어지는>(2018),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 28×40cm

 
  황예지의 최근 사진에서 참사와 투쟁을 읽어내는 일은 새삼스럽지 않다. 그가 찍은 사진엔 깃발을 들고 어깨를 겯은 일군의 사람들이 있고, 팽목항의 풍경과 노란 리본이 듬성듬성 발견되니까. 생경함은 도리어 그곳으로부터 연역되는 평범한 자연에서 드러난다. 어떤 참사도 투쟁도 느껴지지 않는 일상의 랜드스케이프에서 시선은 이 장소가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니까 별일 없는 거리는 사실 성난 대오가 걸었던 길과 지독히 연결되고, 잠잠한 하늘은 죄 없는 이들이 목숨을 잃었던 바다와 기어코 이어진다는 것. <노란>(2020)에서 결백하게만 보이는 노을은 세월호에 대해서 입을 벌리게 만든다. 수풀이 지르밟힌 듯 몸을 뉘인 것은 슬픔을 말미암은 탓이며, 홀로 우뚝 서 제 무게를 견디는 거중기는 무엇도 길어내지 못한 죄책을 견디는 까닭이다. 눈이 내리는 장면을 건조하게 포착했을 뿐인 <흩어지는>(2018)에선 저 날씨를 건너오지 못한 이들을 염려하게 만든다.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쌓이는 눈을 흩뿌리는 하늘은 분명 사진의 하늘이 아니라 그로써 고통받을 이들의, ‘현실’의 하늘이다.

  이러한 인식이, 사진이 자아를 도덕적인 존재가 되게끔 요구하기 때문에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참여를 종용하는 힘은 자아가 아니라 사진의 자연이 되물을 것도 없이 ‘실제로’ 사회에 놓여져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황예지는 자연을 경치로 전락시켜 내면으로 환원하려는 욕망 대신, 또 작품이 내세우는 화면을 완결된 세계로 내세우는 것 대신, 자연 그 자체가 세계의 상흔을 더 선명하게 부조하도록 외부로 향하는 프레임을 열어놓았다. 그러니 작가의 사진에서 그 풍경이 사회적 사건의 처소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방점은 장소의 사회적 성격이 아니라 한 장면을 사회의 일부로서, 즉 사회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데 찍힌다.―그리고 이 지점에서 황예지 사진은 리얼리즘이 아닌 서정적 예술에 머문다― 반복하자. 그저 허랑한 밤바다에 불과하더라도(<Y의 밤>(2023)) 시선은 그 자연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윤리적 죄책감을 떠맡게 만든다. 혹시나 단지 유희를 목적으로 해원으로 들어가는 이를 촬영했을지라도(<길고 깊은 물>(2023)) 평온한 바다는 이전처럼 자아의 상처를 치유하기보단 그것이 덧나도록, 그러니까 관념적인 것으로 일반화되지 않고 끊임없이 외상으로 돌아오도록 기여한다. 이 순간 윤리적인 것은, 나아가 위협적인 것은 자연이다.

6.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너무 많은 ‘서정’이 있다. 서정은 여전히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 글은 미술의 중심이 된 서정에 대한 의구심을 드러내면서도, 그것을 돌파하려는 황예지의 특징을 반서정 혹은 비서정으로 범주화하기보다 여전히 서정의 테두리에서 관점과 개념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의 사진에는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엔 자명한 ‘나’가 지워져 있고, 무엇으로든 변화할 수 있는 ‘나’의 역량은 소실되어 있다. 자아의 나르시시즘을 벗어나 점멸하는 비아(非我) 사이에서 ‘나’가 아닌 것을 향해 나아간다. 동시에 타인을 자기화하는 서정적 메커니즘을 포기하고―애초에 그럴 능력은 버렸으므로― 타자와 만나기 위해 사진의 연출적 권력을 거부하는 실험을 거듭한다. 작가는 또한 자연을 풍경화해 가상의 아르카디아를 구축하려는 갈망과 위안을 기각한다. 이는 점차 탈물질화돼 가는 현실에서 ‘가상의 가상’을 건설하려는 공모를 꿰뚫고 있다. 그에게 자연은 당장의 직접적인 현실(reality)이 아닐지 모르나, ‘나’와 ‘타자’가 함께 있는 ‘실재(the Real)’을 향해 나아간다. 자아란 사실 무력하다는 것, 자아는 타인에게 영원히 가닿을 수 없다는 것, 자연은 동떨어진 형이상학이 아니라 상처를 지닌 세계의 연장이라는 것. 무력하고 외로운 그리고 상처를 목도하는 사진은 위협적이다. 그렇다고 그가 아름다움을 저버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전히 서정의 세 항에 매달린 그의 사진이 아름답지 않다면 비평은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서정은 세계와 싸울 때조차도, 아름다움을 위해, 아름다움과 함께 싸워야 한다. 변혁론? 그것은 서정이 급진화될 때 도래하는 것 아닌가.

0.

서동진, 「“서정시와 사회”, 어게인」, 『동시대 이후: 시간―경험―이미지』, 현실문화연구, 2018, pp.188–207.

신형철, 「문제는 서정이 아니다」,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 pp.181–203.

신형철, 「시의 천사 ―진은영 《훔쳐가는 노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출판, 2018, pp.270–273.

Theodor Adorno, “On Lyric Poetry and Society,” Notes to Literature vol.1, trans. Sherry Weber Nicholsen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1), pp. 37–54.

  * 이 원고는 예술경영지원센터 지원 특별 기고로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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