밈친자의 기쁨과 슬픔 – 이은 작가론
1. 언젠가 세상은 인터넷 밈이 될 것이다.
분명히 이 작가는 밈친자다. 이 작업은 (작가의 말대로라면) “밈을 맨날 보고 저장하고 전송하고를 무한히 반복하는 경지에 이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이다. 이은 작가의 전시 《바라던 대로 Bibidi-Bobbidi-Boo》의 첫인상이었다. 전시에 입장할 때부터 인터넷 밈의 세례에 놀랐다. “(무한히 같은 행동만 반복하는) GIF의 디지털 움직임에서 시지각적 운동성을 포착하고 회화적 움직임으로 변환”하는 작업은 물론 흥미로웠으나 감탄에 이르진 못했다. 전시의 한가운데에 있는 압도적인 벽화를 마주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벽화는 입이 벌어질 정도로 경이로웠다. 물론 규모 때문만은 아니다. 2022년부터 <톰과 제리> 등의 미국 애니메이션에서 파생된 움짤을 회화로 그려낸 작가의 포트폴리오를 모아둔 데에서 나온 감탄도 아니다. 이 벽화에 자신의 세계관을 부수고 갱신하는 시도를 하고 있어서다. 나아가 벽화 하나로 SNS가 일상화된 동시대의 풍경을 은유하려 해서다. 이 작가의 야심에 매혹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벽화의 시작과 끝은 분명치 않다. 전시 동선에 따라서 모서리에 걸쳐져서 그려진 맨 왼쪽에 그려진 버스를 시작점이라고 가정했다. 오른쪽으로 갈수록 (움짤을 그린) 특정한 상황과 움직임을 여러 회화가 나열되는 구성을 지니고 있다. 만화적인 그림체 덕에 회화 하나하나가 금방이라도 재생될 듯한 느낌을 준다. 또 양옆에 대상이 운동하는 잔상이 남기는 그림체는 그 대상이 움짤처럼 반복적인 움직임을 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대신 작가는 만화를 그리듯 회화를 칸으로 나눠 컷으로 보이게 연출하는 대신 같은 화폭(벽)에 그린다. 회화가 액자에 걸려 있을 때와는 또 다른 체험을 만든다. 맥락이 이어지지 않는 여러 회화가 화폭에 합쳐져 있기에 콜라주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벽화의 스타일은 콜라주와는 분명히 다르다. 벽화에 깃든 감각은 인터넷 밈이 펼쳐지는 디지털 스크린, 여러 이질적인 공간이 합쳐진 공간적 몽타주(레프 마노비치)의 감각에 가깝다. 이 스타일이야말로 이 작품의 정수라 생각한다.
뉴미디어인 디지털과 올드미디어인 캔버스는 당연히 다르다. 둘을 동일선상에 두려는 것이 아니다. 이은의 벽화에 새겨진 감각이 디지털 인터페이스의 감각에 가깝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이은은 액자 프레임에 작품을 가두지 않는다. (디지털 인터페이스에서 액자만큼 강력하게 기능하는 프레임은 드물다.) 벽화에 각각의 회화를 산만하게 펼치는 양상이 꼭 인터넷 세계를 쫙 펼쳐서 보는 듯하다는 사적인 감흥이 솟아올랐다.
이 벽화를 감상하는 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멀찍이 서서 이 벽화를 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가까이 다가가 회화 하나하나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것이다. 전자로 보았을 때 이 벽화는 산만하다. 동시다발적으로 극적인 사건이 생기고 있고 이 모든 상황이 별개인데도 같은 화폭에 있어서 한 세계처럼 보인다. 이 산만함이야말로 흥밋거리가 과포화된, 분할화면을 보는 듯한 SNS의 혼란한 감각에 가깝다. 후자로 보았을 때도 흥미롭다. 왼쪽에서 오른쪽이든, 그 반대든 한 그림을 보고 다른 그림을 보려고 시선을 옮기려 할 때마다 우리는 프레임의 영향에서 벗어난다. 두 회화는 강제로 단절되지 않고 자연스레 이어진다. 둘 이상의 회화를 보더라도 이 화화를 다른 작품이라 부를 수 있는 경계가 사라져서다. 각 회화는 초단편 애니메이션, 혹은 움짤과 숏폼을 보는 듯하며 하나의 회화에서 다른 회화로 넘어가는 감각은 경계가 없이 무한히 확장되는 SNS의 인터페이스를 보는 듯하다. 어떤 회화는 벽이 아니라 (스마트폰의 디스플레이를 닮은) 캔버스에 그려진 자리 위에 따로 걸려 있어서 화폭 사이에 도드라져 보인다. 마치 급작스럽게 화면에 뜬 광고를 보듯 말이다. 이 돌발적인 순간은 이 작품에 입체감을 한층 더한다. 이 모든 것이 살아 숨 쉬는 듯하다는 인상을 저마다의 재미를 준다. 이은은 이처럼 각자가 무한한 재미와 반복되는 운동에 중독된 세계를 그린다.
작가는 2022년에 쓴 작가 노트에서 “움짤은 불연속적인 찰나로 구획되며 우연적인 순간의 왕복으로 공유된다. 이를 바탕으로 구축된 세계를 사는 우리는 그저 찰나의 반복에 사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각각의 그림과 그 그림을 한정하는 프레임을 “짧은 동작을 반복하며 한평생을 살아가는 대상에게 머물 자리”로 보기도 했다. 움짤을 통해 현대인의 생활양식을 과감하게 연결하는 사유는 근대화된 도시 속 개인에 대한 담론과 유사하다.
도시는 저마다 일상의 굴레에 갇혀 분주하게 움직이는 노동자로 가득한 공간이다. 노동자 각각은 고립되어 있으나 멀리서 볼 때 이들은 파도처럼 하나의 방향으로 밀려드는 군중으로 보인다. 작가에게 이는 “이상하리만큼 고취된 가족성”을 벗어나 “지금의 1인 가구시대”로 가는 세계와 이어져 있다. 인터넷 공간에서도 마찬가지다. 움짤과 움짤로 비유된 “우리”는 찰나의 반복 안에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운명은 잔인하다. “제삼자가 하이라이트라고 느끼는 순간을 따와서 만든 파일은 피드를 유영하고 빛나며 때로는 있을 자리를 잃은 채 사라진”다. 어쩌면 모든 것이 멀리서 보았을 때는 허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은의 작업은 움짤을 통해 “붙잡히지 않는 순간” 각각을 기록하며 무한해서 유한한, 자유로운 만큼 고독한 데이터의 홍수 속 디지털 속 개인의 존재를 움짤로 환유해 그리려 한 셈이다.
이제 모든 프레임이 허물어졌다. 2022년부터 2024년까지 그려낸 회화는 액자라는 프레임 아래서 움짤 하나하나를 기록하고 보관하는 아카이브 역할을 했다. 프레임은 추억을 가두며 움짤의 반복적 움직임의 범주를 제한한다. 인터넷 밈의 움직임은 프레임에서 벗어나 해방된다. 작가에 따르면 미술관에서 벽화 대신에 본인의 작품을 압축한 영상 작업으로 그려내 프로젝터로 띄울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작가는 이미 인터넷에서 반복-재생되고 있는 오브제 움짤을 영상으로 제작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대신 본인의 작업 하나하나를 스크린에 펼치듯 나열하는 벽화를 택했다. 작가는 이에 “프로젝터로 쏘는 순간에 이 그림의 시작과 끝이 스크린 안에 제한된다는 느낌이 싫으며, 이 그림이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가늠하기가 힘든 감각을 의도했”다고 이야기했다. 작가는 나아가서 “인터넷 밈과 현실의 구분이 사라지기를 바란다”라고 이야기한다. 이 말을 더 정확히 설명하면 작가는 언젠가 세상은 인터넷 밈이 될 것이라는 선언하는 셈이다. 왜 작가는 움짤을 그리며, 움짤 각각을 현대인으로 비유하는 것일까.
2. 활동사진과 조에트로프의 싸움 수준 실화냐? ㄹㅇ 세계관 최강자들의 싸움이다
작가가 움짤을 그리기 전에 그린 추상화는 제법 당혹스럽다. <불신의 정지>, <Wave brings> 등 여러 그림을 보았을 때 이런 작가가 움짤을 그린 작가라곤 생각지도 못할 정도다. 다만 움짤을 그리게 된 모티프는 충분히 볼 수 있다. 2021년 이전부터 “움직임” 혹은 움직이는 것 자체에 관심을 기울인 작가의 관심을 보여준다. 움직이는 것을 정지된 캔버스에 고정하려 하는 시도는 “영상을 회화의 영역으로 그려내”려는 마음에서 생긴다. 그의 작업은 20세기 초에 사진과 영화라는 자동화된 매체와 인간 사이의 긴장을 동시대에 다시 소환한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시기의 작업은 “작업실에서 직접 카메라로 찍은 어떠한 풍경 영상을 재생한 채로 둔 다음에 “이 영상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움직이는 느낌을 어떻게 정지된 순간을 그려내는 회화에 어떻게 옮길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막연하게 던지며 시작되었다. 작가는 “정지된 오브제는 그 형상에 답을 정하고 단순화하는 듯하”며, “답이 있고 정해진 이미지보다 우리가 하나로 규정하기가 어려운 모호한 것, 즉 운동을 그리려 했”다라고 이야기했다. 이와 동시에 “나는 매일 움직이는 것들을 보며 그림을 그리는데, 내가 그리는 그림은 정지 상태로 보인다는 그 격차”를 느끼기도 한다. 정지와 운동이라는 모순적인 상태를 그리려는 작업은 영화가 발명된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초현실주의자와 입체파, 미래주의자 등에 의해서 시도된 적 있다. 이은은 이 작업을 다른 방식으로 되살리려고 한다.
작가는 “활동사진이라는 영화 이전의 초기 영화에 매혹되었으며 그것의 방법론을 캔버스에 옮기려 했”다라고 이야기했다. 작가에게 영향을 준 매체는 머이브릿지의 활동사진이 아니라 조에트로프다. (조에트로프가 영화의 시작이면서 애니메이션 매체의 시작이기도 한 것은 제법 흥미롭다.) 환영이 360도로 반복 회전한다는 작동 방식이 그를 매혹한 것이다. 이는 “일회적 움직임보다 영상에 포착된 대상의 반복적인 움직임”을 그리려는 태도와도 이어진다. 머이브릿지의 활동사진이나 마레의 사진 등에 영향을 받은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와 비교해보았을 때 더욱 선명하다. 이 회화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사람, 즉 한 쪽으로 움직이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1초에 n개의 프레임으로 포착되는 오브제의 운동을 그려내고자 그것이 움직이는 여러 형상을 포개서 입체로 그려낸다. 반면 피카소의 작품은 대상을 하나의 각도로만 포착할 수 있는 카메라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했다. 한 오브제를 여러 각도에서 포착한 파편을 합체해 대상을 완성한다. 이는 카메라의 프레임, 시선의 위치를 생각한 것이다.
반면 조에트로프는 같은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다. 카메라는 렌즈의 위치에 따라서 그 대상이 다르게 포착되는 반면에 조에트로프 안의 움직이는 대상은 위나 아래에서 포착되지 않는다. 또한 어디서 보나 똑같이 보인다. 또한 오른쪽으로 회전하든 왼쪽으로 회전하든 회전하는 동안 한 대상의 반복되는 움직임만이 포착된다. 작가는 불이 타는 순간을 만화처럼 그린 회화를 나열할 때 관람자가 움직임을 볼 수 있길 바라며 컷 방식으로 그린 삼면화 <Splash, Splash, Splash, Splash>를 그렸다. 의도와 달리 이 그림은 왜인지 빛의 흐름에 따라서 성당을 달리 그린 모네의 인상파 회화처럼 보인다. 다만 이은의 작업을 모네의 인상파 회화랑 다르게 보이게 하는 것은 바로 불 중간에 새겨진 재다.
작가의 연작화 <불신의 정지>는 <Splash, Splash, Splash, Splash>와 짝패다. 작가는 불을 찍은 영상을 바탕으로 이 두 그림을 그렸다. 나무가 탈 때 재가 솟구쳐 오르며 생겨나는 재의 날카로움과 불확실하게 일렁이는 불길의 질감을 교차해 그리며 다양한 레이어를 구축한다. 이때 재로 드러나는 점은 액션 페인팅처럼 흩뿌린 것이 아니다. 하나하나 다 정교하게 각인한 것으로, 톡톡 튀는 느낌을 통해 돌출의 느낌을 내려고 한 것이다. 작가에 따르면 “불에서 재가 튀는 것도 사실 무작위로 나오는 것이라 정확히 볼 수는 없”다. 작가는 대신 “재의 움직임을 임의적으로 포착하는 것에 불과하단 한계가 있더라도 느낌을 살리려고 했다.” 이 무작위와 임의는 필연적이다. 작가는 필름 카메라가 아닌 스마트폰으로 찍은 영상을 보고 있어서다. 필름은 인화되는 동안에 은화입자가 뿌려져 각 장면이 다른 질감을 드러낸다. 즉, 은화입자의 흐름으로 영화에 각인된 오브제가 살아 있는 듯한 착시가 생긴다. 디지털 디스플레이도 필름으로 찍은 영상만큼 유동적이다. 디지털 기기를 작동하려면 전기가 있어야 한다. 전기의 흐름이 화면에 투사되는 동시에 0과 1의 무한한 신호의 흐름이 더해져 디지털은 계속되는 울렁거림을 만든다. 그 일렁거림은 디지털 이미지가 필름으로 촬영된 이미지와 달리 고정된 것이 아님을 드러낸다. 은화입자가 새겨진 필름과 달리 디지털은 반복해 볼 때마다 달라진다. 작가는 유화의 울렁거리는 질감을 빌려와 이를 시각화하려고 한다. 물론 이는 모순적인 시도일 것이다.
작가는 우연과 무작위를 작업 방식으로 선택한다. 풍경이 담긴 영상을 반복해서 시청하는 중 임의로 포착되는 오브제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는 영상을 찍기 전까지는 자신도 무엇을 그릴지 모른다. 영상을 찍은 후에는 그리려고 하는 순간의 시간대를 움짤로 제작한 다음에 반복 재생한다. 작가는 그때마다 매번 다른 오브제를 마주하며, 거기서 오브제의 모호함을 포착하려고 한다. 나아가 대상을 선별하려 들거나 일부러 아름다운 것을 고르려하기보단 움직임을 포착하려 하는 개인적 미감이 여기에 더해진다. <불신의 정지>를 포함한 2021년에 작가의 작업은 모두 비슷한 작업 방식을 고수한다. 불을 찍은 영상을 반복해 보며 일렁거림의 반복에서 드러난 미세한 차이는 재의 이미지를 통해서 드러난다. 작가는 과학관에서 본 모래통을 그린 <Waves bring>도 이 맥락에서 주목해야 할 작품이다. 이는 왜인지 눈동자로 보인다. 우리가 보는 세계가 마치 이 반복과 울렁거림의 연속이라는 듯이 말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작가는 자연스럽게 움짤에의 매혹을 느낀다. 마침내, 2022년부터 움짤을 그리기로 했던 결심이 움트기 시작한 작품이 <Small painting for Castaway>다.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듯 이 작품은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한 장면을 모티프로 한다. 움짤, 혹은 대중문화에 대한 인용이 처음으로 제시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작가는 불타오른 장면에서 바닷가 컷으로 바뀌는 디졸브를 보는 순간 불이면서 물일 수 있는 그 모호함에 사로잡혔다. 작가는 한편 자신을 “세계를 디졸브 숏으로 상상할 수 있는 세대”라고도 이야기한다. 둘 이상의 사물이 혼동되는 산만함, 혹은 정체성의 혼란이 그의 작품 이면에 깔려 있다. 반복되는 움직임 아래서 불이자 물일 수 있는 혼란은 이윽고 만화적 선으로 전환된다. 나아가 이 움직임은 동시대의 혼란으로 확장된다.
3. 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심각한 밈 중독증입니다
이은 작가의 작품은 동시대의 미디어를 비판하려는 목적으로 인터넷 밈을 빌려다 쓰는 통상적 작품과는 거리감이 있다. 이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2022년 이후에 그려진 이은의 회화는 인터넷 밈에 대한 중독, 부정적인 말로는 패티시에 가깝다. 인터넷 밈으로 보이지 않는 대상은 과감히 화폭에서 배제된다. 보통의 창작자는 인터넷 밈을 재현하면서도 담론을 그리려고 할 때 거리를 둔다. 인터넷 밈이라는 혼란스러운 현상과 이를 해석하고 미술로 재현하는 자신 사이의 거리감을 통해서 자신을 동시대의 관찰자로 설정하며 담론을 드러내려고 해서다. 일례로 히토 슈타이얼의 경우 인터넷 밈에 좌파 메시아주의라는 렌즈를 덧입힌다. 이은의 회화는 인터넷 밈을 둘러싼 담론에 괄호를 친다.
그다음 인터넷 밈 중독자의 정체성을 마음껏 드러낸다. “작품에서 개념이나 아름다움보단 밈에서 우러나오는 시각적인 쾌감을 우선시하”는 그녀의 창작론은 영감과 일상과 유리된 생활 등에 기반한 기존의 예술가에 덧입혀진 낭만적 이미지와 다르다. 그녀는 도파민을 샘솟게 하는 자극적인 콘텐츠를 소비하고 디깅하고, 아카이빙하는 평범한 현대인의 생활 양식에 따라 창작한다. 또한 이 아카이빙은 역사적 맥락을 지니는 것이 아니다. “이 대상이 가진 유구한 역사보다는 대상이 어떤 행위를 반복한다는 사실만이 나를 흥미롭게 만든”다는 작가의 말은 흥미롭다. 원본의 미학적 의의와 무관한 인터넷 밈의 개성을 설명하기도 하며, 작업의 개성을 설명하기도 한다. 작가가 풍경을 움짤로 잘라서 무한히 반복하듯이, 작가는 인터넷 밈을 인터넷 공간에 쓰이는 맥락을 제거해 무한히 반복하며 그린다. 또한 역사성의 부재는 프레드릭 제임슨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개성 중 하나로 이야기한 것이기도 하다. 인터넷 밈이 원본에서 벗어나듯 인터넷 밈이라는 원본이 인터넷 서브컬처에 기반해야 한다는 맥락을 일부러 거부한다. 이은은 인터넷 밈 하나를 잘라내어 반복되는 운동 자체에 집중하며, 인터넷 밈에 깃든 일상성과 감정 자체를 부각한다.
이은의 태도를 가장 잘 드러내는 개구리 페페가 두루마리 휴지를 쌍안경처럼 든 순간이 담긴 회화다. 심상찮았다. 개구리 페페 밈을 둘러싼 담론에 무관심한 듯해서다. 맷 퓨리의 만화 <Boy’s Club>의 한 컷을 자른 사진에서 시작한 개구리 페페 밈은 4chan에서 활동하는 미국 대안-우파의 정치적 상징으로 쓰인 이력이 있다. 2017년에는 혐오 상징으로 등록되었으며 작가가 이에 반응해 페페의 장례식을 치렀다. 이 밈의 생애를 그려낸 다큐 <밈 전쟁:개구리 페페 구하기>(2020)는 홍콩 민주화에서 페페가 쓰인 푸티지를 통해 이 밈이 긍정적으로 쓰일 수 있다는 결론으로 일단락했으나, 이를 조롱하듯이 개구리 페페는 곧 <조커>의 아서 플렉과 합쳐진다. 이처럼 페페가 정치적 표현 수단으로 수많은 루저를 모이게 하고 정치적 격전장이 되는 원동력은 슬픈 눈동자다. 개구리 페페 밈은 억울하고도 무기력한 눈동자를 웃음과 분노 등 여러 감정으로 변형하면서 파생되었다. 이 작가는 눈동자를 두루마리 휴지로 은폐하는 방식으로 밈의 규칙에 편승하되 정치적 맥락을 중지한다. 페페는 그제야 인터넷에서 해방되어서 평범한 오브제로 자리한다. 이은의 회화에서 유일하게 페페가 격하게 움직이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 아닐까.
작가는 오브제의 무해함을 강조한다. “내가 회화의 대상으로 선택한 것들은 나에게 익숙하며 (신체적, 감정적) 해를 끼치지 않는 것들이다. 곁에 두고 볼 수 있어 자주 만날 수 있는 것들. 때로는 어린 시절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보던 주말 디즈니 만화동산의 추억” 등을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이 무해함은 작가가 그리는 오브제와도 이어져 있다. 본인을 “오래된 추억의 아카이브를 꺼내 부수고 재구성하는 작업이 가능한 세대”라 지칭한다. 그는 움짤 회화를 디깅이자 아카이빙의 일부라고 말한다. 개인적인 경험에서 기반한 이 아카이빙은 사적 추억으로 기능한다. 동시에 엘모나 커밋 등 계속 비명을 지르는 오브제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상하리만큼 고취된 가족성과 지금의 1인 가구시대, 늘 발랄할 것만 같은 캐릭터들과 그들이 주입시키는 가치관 등을 내 몸을 통해 옮”기는 것이어서다.
이때 흥미로운 포인트는 작가가 아카이빙하는 작업의 대상이다. 작가는 어릴 적 또래 사이에 유행했던 투니버스의 아니메에 흥미가 없는 듯하다. 니켈로디언이나 재능방송, 카툰 네트워크 등 영미권 애니메이션을 아카이빙한다. 작가는 “일본 아니메의 정의, 열혈 등은 제 감성과 좀 다르다. 톰과 제리나 커밋, 엘모처럼 맨날 당황하고 서로 괴롭히는 게 오히려 제 인생, 보편적인 인생에 더욱 가깝다”라고 이야기했다. 나아가 “<톰과 제리> 같은 미국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가 지니는 북실북실한 느낌”, “<패트와 매트>와 <월레스와 그로밋> 등 찰흙으로 제작된 클레이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질감”에 것에 매혹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이은이 이야기하는 무해함과도 이어진다.
이은 작가는 무해함이 가능한 미국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신체에 집중한다. 캐릭터의 외형이 고정되어 있어야 하고 서사가 전개되어야 하는 아니메와 달리 일상적 에피소드를 반복한다. 일상적 에피소드가 반복되는 것을 막고자 매번 다른 액션으로 승부해야 한다. 캐릭터는 다치더라도 그다음 에피소드에서는 회복되어 있어야 한다. 톰과 제리의 몸은 온몸이 자유자재로 달라지더라도 손상을 입거나 트라우마를 경험하지 않는다. 아무리 괴롭히고 당하는 관계라 한들 다음날에는 화해하고 애정을 지닌다. 서로가 당하고 투닥거리는 데에서 작가는 일상성을 발견하는 듯하다. 다만 일상적인 것은 <톰과 제리> 속 톰과 제리의 신체가 기호적 신체(오쓰카 에이지)라고 불릴 만한 성질과 이어진다. <미키마우스>에서부터 시작된 기호적 신체는 슬랩스틱에 기반한 재미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고안되었다. 슬랩스틱은 몸의 기계적 움직임을 통해 형성된다. 버스터 키튼의 영화에서 드러나듯이 인간이 슬랩스틱 개그를 할 때 신체에 적지 않은 무리가 간다. 2021년까지 작가는 무한히 반복되는 일상을 그린다. 지루함을 반복적으로 서술한 움짤을 그려내는 <Boring>은 그 증거일 것이다.
처음엔 개인적인 움짤만 그리던 작가는 2022년부터 대중이 아는 움짤을 그리기로 한다. 또 이때부터 인터넷 밈의 어설픔과 서브컬처적인 성격을 본인만의 색채로 중화한다. 작가는 “인터넷 밈을 그대로 회화에서 인용하는 것은 마치 어른이 인터넷 밈을 따라한다는 느낌”을 주기에 “인터넷 밈을 고른 다음에 움짤을 제 나름대로 분석한 다음에 그리기 시작”한다. “인터넷 밈을 회화적 표현 기법으로 번역하려고 깊이 연구하는” 과정에서 움짤은 서브컬처의 영역을 이탈한다. 페페를 그린 […]처럼 사회적 맥락을 의도적으로 소거하기도 한다. (<Rainbow slide>에서처럼) 균형이나 조화에 기반한 고전적인 미나 완성도가 아니라 어설픔과 짜깁기 등 인터넷 밈의 어설픔을 재현하면서도 인터넷에 속하지 않으려고 한다. 사회적인, 정치적인 맥락이 휘발되고 반복되는 움직임의 흔적에서 남는 산만함과 착란이라는 동시대적인 감각만 남는다. 움짤을 통해서 반복과 가속, 과잉된 자극이 가득한 현대적 삶의 본질을 파고드는 것이다. 작가는 본인의 몸을 통해 그 본질을 그림에 각인하는 셈이다. 각각의 그림을 통해 현대인의 초상 하나하나를 그리려 한 작가는 벽화를 통해 작가는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 전체의 총체를 그리려 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모든 것이 순간과 반복 뿐인 지옥도를 그리려고 한다. 밈친자의 기쁨은 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밈친자의 슬픔도 이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순간과 반복의 세계에 영원히 살아가는, 밈에 중독된 사람만이 본인을 반면교사로 삼아서 작품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작가가 스스로가 체화하는 중인 숙명이기도 할 것이다. 이은 작가는 이 기쁨에서 나오는 슬픔, 슬픔에서 나오는 기쁨을 오간다. 작가의 세계관이 소중한 이유는 이 모순 때문이다. 덕후이기에 그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동시에 중독될 수 있음을 드러낸다. 나는 이 작가의 작업이 먼훗날에 움짤의 감각을 이해할 수 있는 인류학적 기록이 되리라 생각한다.
* 볼드체는 작가와의 인터뷰 및 사담에서 나눈 말을 인용한 것이다. 그 외의 인용은 https://leeeun.myportfolio.com/2022-1 에서 했다.
* 이 원고는 예술경영지원센터 지원 특별 기고로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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