밈기계로서 AI와 만담주의
그런데 선생, 숱한 사물들 가운데 무언가를 이해하길 바란다면, 이토록 막중하고 이토록 섬세한 장치가 닥치는 대로 아무나의 장난감이 된다는 점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 폴 발레리, 『테스트 씨』
1.
2022년 12월 오픈AI의 거대 언어모델 챗봇 챗지피티(Chat GPT)가 등장하며 시작된 생성형 AI 열풍은 이제 최초의 과열된 흥분과는 어느 정도 결별한 모양새다. 당장은 주식시장에서 앤비디아 등 AI 관련주가 지나치게 고평가되어있는 것은 아니냐는 의심부터, 투입 비용 대비 아직은 저조한 수익성, 많은 전력 수요가 야기하는 기후위기 가속에 대한 우려까지, AI가 진정으로 사회적 ‘특이점’을 넘기까지는 여러 과제가 산적해 있다.
이런 상황은 AI 연구가 “악마를 소환”[1]하는 것이라 짐짓 비장하게 경고했던 일론 머스크 등 빅테크 구루들의 태도를 재검토해 보게 한다. AI가 인간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 AI에 의해 대체 당할 인간은 누구일지 묻는 특정한 태도가 형성하는 가상의 ‘전선’은 지난 몇 년간의 ‘AI 거품’을 낳은 주요한 원천이었다. 인간과 AI의 대결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상품이었다. 챗지피티 이전 이미 한 차례 소모적인 ‘4차 산업혁명’ 붐을 낳았던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은 앞으로도 한동안 회자될 것이다.
인간과 AI의 대결이 잘못된 문제설정임을 굳이 공들여 지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세돌의 인터뷰처럼, 애당초 “인간이 진 것이 아니라 이세돌이 진 것”[2]이었다. 이미 십수 년 전 디지털 환경에서 비인간 객체가 양적으로 인간 이용자의 수를 뛰어넘은 상황에서 인간과 AI의 ‘대결’이라는 도식은 현실에 대한 그다지 훌륭한 번역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소환된 악마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주체성을 생산하는 환경으로써 인포스피어(infosphere) 속 도처의 그늘에서 이쪽을 은밀히 지켜보고 있다. 그들은 정치적 부족주의를 낳는 유튜브 알고리즘, 자동화된 로지스틱스, 사용자의 일상 정보를 채굴해 가는 빅데이터 산업에 깃들어서, 매양 우리 대신 영상을 넘기고, 상품을 주문하고, 사용자의 행동을 예측한다.
이런 가운데 ‘우리’라는 주어를 고수하는 일은 확실히 많은 위험을 동반한다. 인간종을 대표해 인공지능 ‘소피아’에게 “인류를 파괴하고 싶니? 제발 아니라고 말해”[3]달라고 애걸하거나, 크루즈 미사일을 해킹해 인류를 인질로 잡겠다는 비나-48의 말[4]에 불안해하는 일들은 범속한 SF의 스펙터클로 실재를 번역하고 소화하려는 데서 발생하는 버그다. 인간 행위자와 피동자라는 전통적인 기술 모델과, 그것을 전도시킨 테크노 종말론은 AI 관련주의 주가와 같은 의미론적 층에서 작동한다. 이 둘이 형성하는 서사적, 통계적 패턴이 실재가 아니라 투사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2.
‘AI가 그린 20대 한국남녀’라는 제목으로 디시 인사이드를 중심으로 유통된 이 이미지(그림 1)는 이 허구적 주체성이 생산하는 몰이해를 극명히 보여준다. AI조차 구조적 남성 차별이 실존함을 ‘인식’하고 있음을 외시하는 것으로 여겨진 위 이미지는, “이게 진정한 현대예술이지”란 비아냥과 함께 빠른 속도로 대안 우파의 정치적 데이터베이스로 흡수됐다.
물론 곧장 제기된 반론처럼, 세심한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없이 위와 같은 결과물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 이미지의 불길한 역량이 일축되지는 않는다. 이 촌극이 이미지 제작자의 비열함이나 ‘관객’들의 어리석음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AI의 생성은 재현(represent)으로 오해되기 쉬울 뿐 아니라 그 오해를 바탕 삼았을 때 외려 폭넓게 활용 가능하다. AI의 가상적 주체성은 생성형 이미지에 아우라를 부여하며, AI가 중립적이고 이해관계가 없는 것으로 가정되는 오해를 동시에 유도해 낸다. 이는 생성형 툴이 포스트 트루스의 전장에서 ‘대안’적 현실 생성 도구[5]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을 제공한다. 흔한 우려처럼 생성형 이미지는 사진이 증거하는 ‘거기에 있었음’을 부식시키고 약탈한다는 점에서 탈진실을 가속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충분히 섬세한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이 가해지지 않았을 때 대개의 생성형 이미지를 가로질러 나타나는 그로테스크한 ‘스타일’은 그 자체로 환각을 즉각 현실화하는 에이전시를 소환한다. 이 스타일은 정체성이 이미 전통적 정체성이 조각난 상황에서 종종 진정성의 자리를 효과적으로 대체할 수 있다. AI가 묘사하는 고흐나 호퍼의 스타일이 곧대로 AI가 예술을 창작할 수 있다는 미심쩍은 결론의 증거로 기능하는 만큼은 말이다.
이 미학적 생산물에서 공명하며 환각을 생성하는 인간과 AI의 어리석음은 진정 문제적이다. 생성형 AI가 민주화-보편화하는 “현대예술”이 간편하게 정치적 삶을 심미화하는 데 복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환각이 실제로 “예술적”인지는 그리 중요치 않다. 예술 바깥에서는 가장 구린 예술의 ‘스타일’조차 예술성의 증빙을 충분히 대체할 수 있다는 게 문제다. 이 같은 (자동화된) 정치의 심미화에 벤야민을 따라 ‘예술의 정치화’로 대응해야 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더 값싸고 가독성 좋고 접근이 용이한, 대안적이고 허구의 “현대예술”과 대결할 필요가 생길지도 모른다. 미술관이 비속한 다중과 자본의 파도에서 숨 돌리는 피난처일 수 있다 해도, 피난처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에 이런 허구의 “현대예술”을 만나지 않기란 어렵다. AI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어떤 예술과 나의 예술은 영역이 다르다고 항변해봐도 소용이 없다. 그것이 AI에게 강신시키는 저자성은 탈진실을 비롯해 수많은 위기 속에서 공교해질 일만 남았다. “AI가 예술을 할 수 있을까?”라는 가짜 질문이 이미 수많은 투자자들을 자극했던 것처럼, 시장의 압력은 계속해서 이런 철 지난 저자성을 요구할 것이다.
AI 아티스트, AI 포토그래퍼들은 이런 요구에 빠르게 반응하고 또 대응하며 고유한 영역을 개척해 나가고 있지만, 강력한 이미지만 남기고 사라지는 익명의 ‘아티스트’들에 비해 당장은 영향력이 미미해 보인다. 챗지피티 이후 생성형 AI를 향한 대중적 열광은 실상 인간 저자보다도 그것과 동등한 무게감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된 AI의 주체성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저자의 죽음이 선언되고 반세기 넘게 지난 시간이 무색하게, 대안적이고 저항적인 장소로서 현대예술의 바깥에는 저자적 주체성을 나름의 방식으로 리믹스하고 선전한 뒤 투자 받고 배당금을 분배하는 현대예술이 남아있었고, 그는 이 열광을 바탕으로 상상적으로나마 빅테크가 주도하는 AI 산업과 결합해 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기에 정치적, 혐오적 이미지의 생성을 자체적으로 규제해 온 기존 생성형 이미지 제너레이터들과 달리, 그 어떤 제한도 없음을 내세우는 xAi의 대형 멀티모달 모델(LMM) 챗봇 ‘그록’의 등장과 같은 사건은 필연적이고, 계속해서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이것을 당장의 법제화나 AI 윤리로 감속할 수는 있을지라도, 머스크가 헌법 체제의 언어인 ‘언론의 자유’를 근거 삼아 생성형 툴의 규제를 해제하려 하는 것처럼 그 틈에서 대안적 “현대예술”은 지금도 ‘연전연승’ 중이다. 그것은 위기를 마주한 대다수의 삶의 대부분보다 ‘생산’하는 것처럼 보이고, 실질적으로 창의적이다. 이런 가운데 AI의 문제로 지적받는 편향은 데이터셋에 파편화되어 축적된 초주체(hyposubject)를 귀환시키고, 이 편향으로 말미암아 AI는 그것을 자연스레 연기한다.
3.
이런 어리석음을 그저 과도기의 한 형태로 치부해 버리기엔, AI는 너무나도 적극적으로 어리석음을 채굴하고, 수확하고, 재생산하고 있다. 부정확한 프롬프트와 저질 데이터가 데이터셋의 건강성을 담보하기 때문이다.[6] AI가 이미 IT 개발자, 지식노동자들의 작업 방식을 크게 바꿔놓은 것과는 달리, 이런 저급 데이터를 채굴당하는 이들에게 AI는 그리 큰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달리 말하면, AI의 발달이 이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하위적인 존재로 남아있게 된다. 이를테면 현 단계에서 거대 인공지능 모델은 인간 기반 피드백(RLHF)이 사실상 강제되고, 이는 나이지리아, 케냐 등 글로벌 사우스의 저가 노동력에 의해서 지탱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delve’ 등 아프리카 영어의 어휘가 데이터셋에서 통계적으로 빈발하며 여러 지역 영어가 합성된 하이브리드 영어 ‘AI-ese’를 만들어내기도 한다.[7] 결국 AI의 생성은 통계적 합성인 셈이지만, AI를 지탱하는 하부 구조에서부터 발생하는 글로벌 빈곤 등의 실재하는 ‘편향’과 시차는 이 합성 속에 정보적 위계의 역전을 비롯한 여러 뒤섞임을 가능케 한다. AI가 주요한 행위자로 기능하며 형성되는 인터넷 밈에도 이런 합성이 야기하는 이어성(異語性)은 적극적으로 끼어든다. AI의 통계적 합성과 인터넷 밈 문화의 ‘합성’ 문화는 반(半)연속성을 가진 채 연결된다. AI 커버를 제작하는 크리에이터들이 기존의 사진 편집 툴로 제작한 짤방으로 썸네일을 만드는 것이나, 인터넷 밈의 원천 요소들을 AI ‘스타일’의 데포르메 속에 옮겨놓는 AI 포토그래퍼 라이언오슬링(@ryan_ohsling)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아직은 출발 단계에 있는 이런 ‘AI 밈’은 분명히 챗지피티의 등장을 분기점 삼아 시작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 이전에 인터넷 밈 문화에서 ‘심심이’나 ‘이루다’ 등 인공지능 챗봇을 행위자로 포함했던 사례와 얼마간 접속해있는 동시에 변별되기도 한다. 이 차이는 근본적으론 ‘챗봇’이라는 사용자 시점의 인터페이스를 제외하곤 상이한 기술적 바탕이 표면화되며 발생했다. 심심이는 인간 사용자에 의해서 입력된 대화 세트를 바탕으로 질문에 대응하는 답변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이루다는 딥러닝 기술에 더불어 스캐터랩의 연애 정보 어플리케이션 ‘연애의 과학’에서 수집한 연인들의 대화 정보를 채굴하여 회수(retrieval)하는 식으로 대화를 이어나간다. 즉, 온전한 생성형 AI의 통계적 합성이라기보다는 인간 사용자들에 의해 축적된 대화의 콜라주를 대화의 맥락과 관계없이 얼기설기 이어나가는 것에 가깝다. 따라서 ‘심심이/이루다 레전드’라 불리며 유통되는 밈들은 실상 대화자의 섬세한 연출의 결과거나 우연의 결과였다. ‘저 뒤에 사람이 있다’는 사용자/관람자의 놀이를 위한 가정이 나머지 빈 공간을 메웠다.
실제로 2010년대 초반 심심이 챗봇이 인기를 끈 뒤, 심심이의 개발사 이즈메이커가 KT와 저작권 분쟁을 하는 사이 발생한 공백을 인간이 직접 운영하는 카카오톡 ‘심심이’ 채널이 대체했다는 사실은 심심이가 인터넷 하위문화에서 맡아온 기능을 짐작케 한다. ‘모방 게임’의 자리에서 인간이 다시 기계의 자리를 맡아서라도 ‘게임’은 계속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게임은, 게임의 참여자, 데이터를 수확하는 대상이 편향되며 왜곡을 피할 수 없었다. 심심이의 경우에는 데이터 입력의 주도권을 인터넷 하위문화 주체들이 쥐고, 챗봇의 빈틈을 파고 들어 특정 혐오 발언 등의 ‘성과물’을 채굴해내는 식으로 주된 향유 방식이 자리잡았다. 이루다도 이런 문화를 바탕으로 심심이의 ‘후배’로 여겨졌고, 소수자 혐오 발언 등 많은 문제를 낳았다. 더불어 이루다는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게임의 인터페이스를 차용[8]하면서 사용자를 폐쇄적인 정동적 피드백과 페티시즘 속에 가둬놓기도 했다.
챗지피티 등장 직후 열광적으로 생산된 AI 밈들 역시 이런 심심이와 이루다의 문화적 경험에 분명히 바탕을 두었다. 챗지피티를 난처하게 만들거나 ‘길들이기’가 하나의 장르 게임처럼 시도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심심이나 이루다에 비해 압도적으로 거대한 데이터셋과 활용경로가 구조화되어 있지 않을뿐더러 상대적으로 민감한 주제의 발언을 여러 장치로 방지하고 있는 챗지피티에서 이런 시도들은 기껏해야 챗지피티에게 ‘냥체’ 같은 말투를 학습시키는 데서 그칠 뿐이었다(그림 3)[9]. 이런 종류의 연출된 대화들은 챗지피티 출시 직후 열광이 지나자 밈으로서 생명력을 상당히 잃었다. 심심이와 이루다를 거쳐 오랜 기간 동안 명맥을 이어온 형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대신, 이 연출된 장면에서 초점화되는 대화의 ‘실패’는, 오픈 도메인 챗봇 특유의 통계적 합성의 오류, 환각 효과(hallucination) 등의 여러 ‘멍청함’들을 포괄하는 식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일례로 한때 유행한, 높은 조회수를 이끌어 낼 만한 제목을 챗지피티에게 추천받은 뒤 이를 본 글에서 노출하는 형식의 낚시성 게시글이 있다. 충분한 예시를 제공하지 않아 부자연스럽지만 충분히 자극적으로 합성된 제목은, 그 자체로 커뮤니티의 ‘스타일’에 대한 비평적인 개입이 된다. 대개 [그림 4]의 사진과 함께 낚시임을 알리는 본문의 형식은, AI가 이 ‘스타일’의 공저자임을 알리는 한편, 커뮤니티의 닫힌 커뮤니케이션 구조와 관심 경제에 관성적으로나마 장외성을 기입한다. 이미 자동화된 알고리즘과 정동적 회로에 길들여졌음을 냉소하는 이들일지라도, 이 밈에서는 잠시나마 그 가상의 ‘얼굴’을 너무 공포스럽지 않게 마주한다.
한편, 자연어 프롬프트로 이미지 생성이 가능한 LMM 챗봇에게 특정 이미지를 요구하고, 이에 피드백하는 과정에서 “더 강렬하게!!”를 외치며 사용자와 AI 사이의 소통 실패를 파국으로 증폭해가는 콘텐츠들[10]은 확실히 일전의 심심이나 이루다가 노출한 부족주의적 편향의 문제를 떠나, 두 행위자 각자의 실패를 하나씩 쌓아올리며 연쇄적인 만담을 생성한다. 여기서 AI는 커뮤니티 내에서 관심 자본의 흐름에 개입하고, 프롬프트의 요구를 알아듣지 못하는 척 상황을 생성하면서 새로운 놀이터를 만든다. 이때 ‘세종대왕 맥북 프로 던짐 사건’[11] 같은 사례를 낳는 AI 본연의 환각 효과는 ‘성심당에 간 지드래곤’[12]에서처럼 현실과 픽션의 혼합체를 생성해내는 무기가 된다. 이때 탈진실을 낳는 바로 그 조건은 인터넷 밈의 장에서 AI의 멍청함과 인간의 낙관에 의해 적극적으로 오용당하며 세계를 덮는 ‘질감’을 생성한다. 이 생성을 향한 욕망은 우선 AI를 탄생시키는 데 일조했지만, 이를 점령하려 하는 여러 압력들에 무관심하다. 다만 이질적인 스크린 너머 누군가와의 실뜨기로, 꾸준히 무언가 다른 것을 만들며, 다른 것이 되어가는 중일 뿐이다.
4.
당연하게도, 심심이와 이루다의 편향을 ‘극복’한 것처럼 보이는 챗지피티 이후의 AI 밈은, 사용자에 의해 유도된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그 다음이 성큼 다가와 버린 꼴에 가깝다. 놀이터가 너무 거대해져 버린 것이다. 이 놀이터도 마찬가지로 여러 ‘편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이런 와중에 AI 밈에 붙들려 있는 건, 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아이들을 보고 노회한 플루서가 논평하듯 사물에 무관심한 ‘손가락 끝’들의 유희적인 웅얼거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13] 그가 그리는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인간형, 호모 루덴스(homo ludens)는 행위하기보다는 그저 가속된 실패를, 우주적 어리석음을, 죽음을 향해 가는 스스로의 삶을 구경거리로 즐길 뿐이다. 그렇다면, AI 밈이 탐색하는 AI의 여러 초보적 용법은 이미 주어진 선택지, 그러나 무한한 선택지 사이를 ‘서핑’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선택지의 바다에 대한 통제권이나 앎은 아마 영영 성취되기 힘들 것이다.
이런 틈에서 AI 밈들이 새로움을 만나는 태도로서 채택하는 유머리스트의 전략이 여전히, 계속되고 계속될 실패 속에서 일말의 능동성을 정초해 내는 방법론으로서 유효하다고 선뜻 말하기 어려울 수 있다. 물질로서 사회가 비물질적인 정보계와 만나 하나의 하이브리드 데이터셋을 만들어 낼 때, 플루서의 우려대로 이 거대한 ‘프로그램 전체주의’ 속에서 애써 유쾌하게 길 잃기로 만족할 수는 없을 테다. 앞선 우려야 어떻든 AI와 그를 뒤이은 디지털 존재자들은 여전히 때로는 묵시론의 기사역을 맡고, 주체성의 아우라를 뒤집어 쓸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언 보고스트의 속 편한 기본 입장을 굳이 반복해 보자면, 의인화와 인간주의의 레테르는 근본적으로 어떤 사물을 대하든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한계기도 하다. 우리가 이 모든 전제들을 폐기하게 될 진짜 ‘다음’이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전을 살아갈 인간들에게 적절히 민주화되고 갱신된 ‘디지털 시민권’이 새롭게 상상되고 부여될 필요가 있다면, 그것을 지탱하는 것은 (그람시의 표현을 빌려 핼버스탬이 자신의 이론적 무기로 활용하는) ‘저급 윤리’가 될 수밖엔 없는 것이다. 바흐친을 따라 이 ‘저급’들, 생성하는 저급들에 ‘민중’이라는 이름을 일시적으로 붙여볼 수도 있을 것이다.
비인간과 인간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채굴하고 리믹스하고 합성되어 형성되는 집합적 신체로서 ‘민중’은 그 자체로 누군가의 소유로 회수될 필연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이때 AI가 주체라기보다는 방법론으로서, ‘비영리’를 표방하고 ‘인류의 미래’를 볼모로 잡고 공포의 수사로 사용하길 즐기는 빅테크들의 영토를 역으로 부식시키지 못하리란 법이 없다. 최신 기술을 밈으로 소화하고 저급으로 번역하고자 하는 AI 밈은 인간과 비인간 객체-AI가 버무려진 다성적 순간들을 장면화함으로써 갖가지 활용 방식을 모색한다. 이 탐색은 물론 채굴당하지만, 이때 개입하는 노이즈들과 유머, 아이러니는 공포를 중화하면서 기술의 통제권을 두어보려는 안간힘이다. 이들은 아직 아무도 실패해 본 적 없는 방식으로 실패하면서 삶을 이어나갈 것이다. 챗봇의 입력 커서가 끊임없이 깜빡거리고 대화창이 끝도 없이 이어질 수 있듯이.
바흐친은 이런 비완결성 속에서 자아와 타자가 상호침투하며 발생하는 언어 본연의 생동성에 주목하며 ‘대화주의’를 촉발했다. 생성형 AI와 인간의 대화는 말 그대로 언어가 언어를 생성하는 것이란 점에서 대화적이지만, 그것이 언제나 ‘전체’로 회수될 마당이라는 차원에선 완결되어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성된 이미지의 매끈함 뒤에 기입된, 영원히 기술적 과도기를 사는 삶들의 본연적인 시차는 계속해서 프로그래밍된 전체 속에서 감침질된 연결부를 지적해 보일 것이다. 때론 그 전체의 손가락을 빌려서라도. 이 잠재적인 영역을 우선 만담주의라고 불러볼 수 있을까? 이곳은 아직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그래서 모두의 소유도 될 수 있는 곳을 어떻게든 가꿔나갈 필요가 있어 보인다.
* 이 원고는 예술경영지원센터 지원 특별 기고로 게재되었습니다.
[1] MIT Aeronautics and Astronautics Department’s 2014 Centennial Symposium에서의 발언이다.
[2] 제3국 패배 후 인터뷰에서 이세돌의 이 발언은 이세돌이 알파고와의 제4국에서 승리하고 난 뒤 “내가 승리한 것이지 인간이 이긴 게 아냐”로 변형되어 유행하기도 했다.
[3] 해당 발언은 소피아의 개발자 ‘핸슨’과 소피아의 대화가 CNBC를 통해 보도되며 주목받았다. 이후 소피아는 ‘미국식 농담’이었다며 해명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0_DPi0PmF0
[4] 소피아와 마찬가지로 핸슨로보틱스에서 개발된 비나48은 시리와의 챗봇간 대화에서 이같은 말을 했다. 챗지피티 등장 이전까지 소피아의 사례와 함께 인공지능 윤리의 필요성을 호소하는 상징적 장면으로 폭넓게 사용되었다.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mfcyq7uGbZg)
[5] 임태훈(2023). 쓰면 현실이 된다! : AI를 혁명적 현실 생성 도구로 이용하기. 문화과학 0(114). 128-145쪽에서 변형
[6] AI에 의한 재귀적인 학습이 통계적으로 빈발하는 데이터들간의 간섭을 일으켜 ‘모델 붕괴’ 현상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이와 관련해 거대 언어 모델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양질의 데이터를 공급받을 수 있겠냐는 우려가 나온다. (https://www.nature.com/articles/d41586-024-02420-7)
[7] Alex Hern, “TechScape: How cheap, outsourced labour in Africa is shaping AI English”, The Guardian, 2024.04.16. https://www.theguardian.com/technology/2024/apr/16/techscape-ai-gadgest-humane-ai-pin-chatgpt
[8] 이루다 1.0은 대화 지속시간, 빈도, 호감표현 등을 인식해 이루다와 사용자 간의 친밀도를 16단계로 설정하고 성공 지향적인 전략 행위를 유도했다. 정성훈(2022) 참고.
[9] ‘챗지피티’의 역습‘으로 알려진 이 짤은 사용자의 구글 계정의 사용자명을 변경해 챗지피티가 그것을 따라 읽게 연출한 것이었다.
[10] https://youtube.com/shorts/BxWN4ald4vs?feature=shared
[11] 김도형 기자, “”세종대왕 맥북 던짐 사건 알려줘” 물었더니… 챗GPT의 엉뚱 답변 ‘밈’으로 유행 중”, 한국일보, 2023.02.23.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022215200000727)
[12] https://www.instagram.com/p/C7228CIvxcH/?img_index=8
[13] 빌렘 플루서(2023). 사물과 비사물. 김태희, 김태한 (번역). 필로소픽. 1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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