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표정-표면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어

강현
2024.10.20

  현대 사회에서는 밈이란 단어를 개념으로서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무엇이 밈인지 체득하고 있다. 개념적 정의를 모르더라도 인터넷상에서 누구나 능수능란하게 향유하고 있는 것이 밈이기도 하다. 그런데 밈은 단순히 인터넷에서 생성되고 유통되며 향유되는 강렬한 인상을 지닌 유머러스한 이미지나 컨텐츠 이상으로, 인터넷 환경의 전면화와 그 어느 때보다 정보화의 영향력이 강력해진 동시대에서 이미지를 다루고 감각하는 형식을 구성하는 가장 강력한 원리라고도 할 수 있다.

  때문에 현실에 미치는 인터넷의 파급력이 강력해지면 강력해질수록, 밈 원리도 미학으로서 이미지에 대한 우리 인식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지게 된다. 말투, 어휘, 스타일 등 비시각적 요소를 포함하는 인터넷 밈이지만, 그 중에서도 역시 가장 즉각적인 영향을 끼치고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짤방(jpg)이나 움짤(gif) 포맷으로 유통되는 시각적 요소로 이뤄진 인터넷 밈일 것이다. 흔히 인터넷 밈을 우리는 인터넷 안에서 마치 ‘오브제’처럼 발견하지만[1] 당연하게도 이러한 이미지들은 직접 가공‧편취‧발신된 시각적 인공물visual artefacts이란 사실을 새삼스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인터넷 밈이 영향력을 끼치고 사회적으로 다양한 현상을 만들어내게 됨에 따라 다양한 분야에서 학문적으로 분석하거나 역으로 밈을 통해서 다양한 사회적 함의를 발견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늘게 되었다. 개중에서 특히 예술에서는 밈이 이미지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활용하는 미학적 방식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예술을 비롯한 여러 학문 분야에서 채택되는 인터넷 밈이 작동하는 방식을 크게 두 가지 차원으로 제시할 수 있다. 하나는 단위로서의 밈Meme as unit(이하 MU)이고, 다른 하나는 현상Meme as phenomenon(이하 MP)으로서의 밈이다. 전자는 이미지, 말투, 형식, 동영상, 그것들에 내재된 구성적 요소, 스타일까지 포함하며 모방mimesis의 대상이 되거나 모방의 결과물 그 자체를 가르키는 반면, 후자는 모방 행위를 통해 발생하는 커뮤니케이션, 즉 “원본에서 특정 부분”을 모방-전용-반복 행위를 통해 “새로운 맥락에 집어넣”어 발생하는 “재미”의 공유과 교환이란 현상 자체를 가르킨다. 커뮤니케이션 기능에서 나아가 특정 밈 사용자들끼리 만들어지는 커뮤니티와 그에 대한 소속감 등에 집중하여 인류학적 ‘놀이’ 개념으로 인터넷 밈을 이해하는 논의가 있다.

  질리언 로즈Gillian Rose는 일반적인 이미지 연구가 지나치게 사회학적 맥락만을 보는 경향이 있기에 이미지 자체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2] 마찬가지로 국내에서 이뤄지고 있는 담론장에서의 MP에 편중된 논의도 같은 지적을 피할 수 없다. 밈을 둘러싸고 이뤄지는 수신과 송신의 커뮤니케이션 총체 혹은 일부 맥락들을 해당 밈 이미지의 본질적 속성이나 의미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괄호 쳐진 밈, 밈 그 자체meme an sich도 살펴보는 다각적 접근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에도 인터넷 밈에 대한 관심과 참여는 매우 높지만 밈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차가운’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라 할 수 있다.

  ‘밈 키드’ 작가 안태원의 작업은 밈 그 자체의 이미지를 이해하는 여러 진입 각도를 제시하는 작업으로 검토할 만하다. 〈Hiro is everywhere〉 시리즈는 인터넷 밈 이미지가 가지는 형태적으로 왜곡된 구성을 참조하여 자신의 반려묘 히로를 회화와 조형 등 다양한 형식으로 밈스럽게 표현해 낸 시리즈다.

  〈Hiro is everywhere〉 시리즈가 자신의 반려묘를 ‘밈스타’로 만들어보겠다는 밝힌 창작 동기를 통해서, 이 시리즈를 단순히 인터넷 밈의 이미지 문법을 채용하여 회화에서 전용하는 것이 아니라 밈에 대한 일종의 예술적 기획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밈이 되는 것이 목표로 만들어진 밈, 그리고 그 밈을 창작자 본인이 꾸준하게 증식시키는 작업이란 점에서, 이는 인터넷 밈 중에서 소위 ‘억지밈’으로 불리는 것과 매우 유사한 성질을 공유한다.

  본래 밈은 인터넷 공간 내에서 ‘자연스럽게’ 전파되고 이후 점차 속도를 붙여 다양하게 향유‧전용된다. 그러나 억지밈은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인위적으로 유행을 유도하거나 억지로 유행인 척 군다. 이러한 인위성이 강요처럼 느껴지고 또한 일반적으로 재미를 찾기 쉽지 않기 때문에 억지밈은 커뮤니티 유저들에게 배척되곤 한다. 그러나 현재는 정식(?) 밈으로 정착한 억지밈도 여럿 존재한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자연스러운 밈과 억지밈의 구분이 명확하게 갈린다고 하기는 어렵다.[3] 히로가 고양이 밈계에 억지밈이 된다고 해서 밈으로서 가치가 없거나, 밈-되기란 기획 자체가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억지밈에서 출발하여 안태원 작가를 좋아하는 관객들 사이에서 인스타그램과 같은 인터넷 공간을 통해 히로가 실제로 ‘밈 대상’이 되어가는 과정은 밈-되기 기획을 관계미학적 차원에서의 탐구로 나아가게 된다. 이와 같이 인터넷에서의 관계미학적 성질을 탐구하는 작업으로서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활발한 활동을 했던 일본 예술 집단 카오스*라운지의 작업을 참조할 수 있다.

  팀 카오스*라운지가 2010년 3월 14일 GEISAI #14에서 공개한 〈츠카사를 만들자!つかさをつくろう!〉는 인터넷 기반 연결성을 민감하게 의식하면서 이를 자기반영을 통해 흥미로운 방식으로 주제화한다. ‘츠카사’는 2004년에 방영된 애니메이션 〈러키☆스타〉에 등장하는 캐릭터로 큰 인기를 얻어 인터넷상에서 무수한 ‘동인’ 창작의 대상으로 재현되었다. 모두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츠카사란 캐릭터를 만들자’라는 지시 하나만을 가지고 집단 제작된 ‘작품 츠카사’는 해당 캐릭터로 겨우 인식할 수 있는 ‘꼴’을 유지하는, 다양한 파생물(동인 창작물과 공식 굿즈 등)로 이뤄진 아상블라주 조형물이 되었다.

  이데아처럼 모두에게 깃든, 현대적 의미에서 밈처럼 퍼진 캐릭터의 상징성 그리고 그것을 육화하기 위한 ‘인체연성’의 흔적[4]에는 정작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낙서와 채색의 흔적이 혼재되어 있다. 이러한 집단 제작의 과정은 오타쿠 컬처의 핵심을 이루는 2차 창작 활동의 반영이자, 오타쿠 컬처가 기반으로 삼는 인터넷에서의 ‘익명성(소비자)’과 그에 대비되는 ‘유명성(작가)’이란 정체성의 혼재를 주제로 자기반영하고 있다.[5]

그림 1 〈츠카사를 만들자つかさをつくろう!〉, 2010
(출처: https://hasaqui.hatenadiary.org/entry/20100411/1270917742)

 
  〈츠카사를 만들자!〉는 2000년대에 폭발적으로 확장하며 오타쿠 컬처의 토대를 이루는 인터넷의 감각과 논리를 직접적으로 자기 안에 담아내려고 한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의 맥락에서 보자면 넓은 의미의 ‘인터넷 밈’ 원리, 그 중에서도 ‘동인’이라는 익명적 오디언스의 자기생산적 창작이라는 유통과 향유, 이미지를 동원하기 위한 절취와 변조 방식, 개방된 네트워크 연결의 감각에 대한 탐구였던 셈이다. 이처럼 일반적으로 인터넷 밈이 창작과 유통 그리고 향유 모든 단계에서 익명의 유저들에게 개방되어 있다면, 이와 달리 억지밈은 특정 단계(들)에서 ‘닫혀’ 있다. 그런 의미에서 〈hiro〉 시리즈의 (억지)밈-되기는 익명의 오디언스들이 틈입할 수 있는 개방된 연결성이 부재하다. 좀 더 부연하자면 미술관에 전시되는 방식, 즉 작품으로서의 물리적 네트워크 환경 속에서 연결되는 것은 활성화되어 있지만, 디지털 이미지로서 디지털 네트워크 안에서의 연결은 답보되어 있는 중간적 단계에 놓여 있다. 실제로 안태원은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한 바 있다.

Q. 가상공간의 시각적 경험을 물리적 공간에 선보이는 전시의 형태와 동시에 이 작품이 SNS에서 작품이 ‘밈화’되는 현상을 경험하며 작업하실 거 같아요. 작업이 가상과 현실 사이에서 무수히 넘나들며 작동하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을 작가님께서는 어떻게 느끼시는지 궁금합니다.

A. 의도한 결과라서 만족스럽습니다. 처음에는 신기했습니다. 의도하긴 했지만 정말로 그렇게 될 줄은 몰랐거든요. 온전히 일반적인 디지털 밈처럼 소비되기에는 한계가 있는 듯하지만요. 어쨌거나 물리적 공간을 기반해야 존재할 수 있는 작업이다 보니 디지털 밈이 온라인 공간에서 퍼져 나가는 것처럼 익명의 사람으로부터 재변형, 재유통되는 것이 쉽지는 않아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물리적 공간에 고립된 ‘밈’스러운 이미지의 고정력이 다음 작업을 위한 영감이 되는 것 같습니다.[6]

  밈-되기 기획으로서 히로 시리즈는 엄밀히 말해서 “가상과 현실 사이에서 무수히 넘나드”는 하이브리드적 횡단성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물리적 공간과 가상적 운동성이 서로 온전히 혼융되지 못하고 잔여하는 감각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미지의 고정력’이 뜻하는 온전히 해소되지 못하는 감각은 안태원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노스탤지어적 태도와도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전시 《표피는 드러내는 동시에 보호한다》(2024)의 작가 노트에서 “닿을 수 있는 거리는 무한에 가까워지는데 어쩐지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는 것들은 오히려 멀어진다. 나는 그것들을 붙잡고 싶다”라고 적은 안태원의 고백은 물리적 실재들에 대한 감각이 점차 상실되는 것에 대한 불안과 그것에 대한 회복을 소망한다. 그렇다고 곧장 물리적인 속성만을 복권시키는 식의 반동적인 접근이 아니라 디지털화-밈화 안에서 히로의 변화 과정 속에서[7] 시시각각 변화하는 물리적 속성의 표현형을 탐구하고 이를 붙잡고자 한다.

  이런 비물질적인 상황 속에 놓여 있으면서 동시에 물질화로 나아가는 지향성은 인터넷 밈을 직접 인용하던 초기 작품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초기 밈 회화에서 캔버스를 다양한 형태로 변형시킨 점은 컴퓨터 소프트웨어가 제공하는 아트보드, 레이어 병합, 자르기, 자유변형, 언랩과 텍스처 모핑 기능과 같은 디지털 컴포지트 감각의 반영인 동시에 조형적인 감각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조형으로서 캔버스는 더 이상 회화 전통 아래에 놓인 평면flat이 아니라 컴퓨터 모니터나 휴대폰의 액정 화면과 같은 스크린 혹은 소프트웨어에서 ‘새로 만들기’ 되는 가변형의 창window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한편으로 앞서 언급한 것처럼 ‘창’으로서의 캔버스가 전시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입체적인 방식으로 디스플레이 됨으로써 다시 캔버스로서의 존재양식을 불러들이는 것뿐만 아니라 조형적인 존재양식마저 포함하는 운동성을 보여준다.

그림 2 〈Who is the king〉, 2021
그림 3〈My four moods of a day〉, 2021
그림 4 〈Far away〉, 2021

 
  캔버스에서 출발하여 조형으로 나아가는 지향성은 주제적 측면에서도 반복된다. 평면 회화 안에서 기괴한 디지털 형태로 변형되는 히로의 이미지들은 시리즈가 진행될수록 점차 조형물을 통해 물리적인 형태를 ‘취하기’ 시작한다. 디지털화된 히로의 회화적 표피가 물리적 대상들에게 ‘텍스처 매핑’되며 여러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는데 이러한 과정은 실제에서 디지털화로, 다시 디지털에서 실제로 ‘포맷’을 전환하면서 나타나는 실제로부터의 멀어짐과 차이의 증폭을 현현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히로의 텍스처가 특정 대상의 표면에 덮어씌워지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즉 표면이 물체를 자신이 빙의하기 위한 지지대로 사용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히로가 출몰하는 물체는 특정한 기능도 존재하지 않으며 정체를 알 수 없는 형태를 가진다. 히로 시리즈에서 ‘뒤틀린 표면(고양이)’와 ‘뒤틀린 실체(조형물)’는 서로에 대한 지시성을 배반하며 우연한 결합 혹은 임의적 배치 중간에 놓여 있다. 이는 어느 한쪽 지평으로 복속되지도 않으며 어느 한쪽으로 존재적 지평이 확정되지 않는다는 존재론적 아이러니를 담지한다. 이러한 특징에 대한 탐구가 《뿌리PPURI》 전시에서 좌대, 특히 히로 조형과 ‘수직적’으로 결합하기 위해 제작된 좌대와의 ‘수평적’ 관계 속에서 이뤄진다.

  안태원은 “평범한 화이트 전시 좌대 위에 작업물을 올려 놓은 것을 보면 어색하게 보였다”며 좌대를 특별히 제작한 이유로 밝히고 있다. 폴리우레탄으로 제작된 좌대는 나무나 콘크리트, 우레탄폼, 석재와 같은 질감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표피’가 혼재되어 적용되어 있다. 또한 좌대를 포함한 조형물에도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골프공의 딤플과 유사한 울퉁불퉁한 표면이 혼재되어 있기도 하다. 이러한 시각적 통일성은 좌대 위에 놓인 작품의 표피가 마치 좌대까지 ‘전염’시킨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어색함’을 제거하는 동질화는 ‘밈 오염’의 물리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좌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조형물 자체의 물성과의 충돌이나 물성을 위장-배반하는 시각적 표피의 적용은 조형물 실체에 대한 불가지성으로 드러난다. 설령 물체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기이한 형태를 갖는 조형물의 기능과 용도는 ‘무의미’로 드러날 것이 예정되어 있음은 아이러니함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이러한 아이러니함은 좌대뿐만 아니라 좌대 위에 놓인 작품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표면상 고양이의 텍스처와 골프공 딤플의 텍스처는 동일한 존재적 위상을 가지기 때문에, 조형물을 ‘히로’로 파악하고 히로의 텍스처가 아닌 부분을 ‘안쪽’이나 ‘배면’을 이해하는 것은 존재론적 아이러니의 함정에 빠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안태원의 작품이 ‘과정’이나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을 평면과 조형, 디지털과 피지컬 등의 이항대립을 넘어서는 하이브리드 ‘상태’로 설명하는 것도 존재론적 아이러니함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그렇다면 히로 시리즈에서 반려묘의 다양한 판본을 통해서 밈이라는 존재양식이 담지하고 있는 존재론적 아이러니함을 ‘상황’으로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논할 수 있는 것은 ‘○○란 무엇인가’란 상태적 답으로 환원되는 존재론적 질문에서 ‘○○란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 혹은 ‘○○은 어떻게 이뤄져 있는가’란 힘과 방향, 비율과 스펙트럼의 문제로 구체화된다. 즉 디지털과 피지컬의 하이브리드로서 나타나는 히로-물체 시리즈는 어떤 특정 비율에서 다른 특정 비율로 다양한 매개변수 값들이 조정되고 있으며 변화하고 있는, 에폭시의 맨들거리는 표면으로 인해 아말감의 유동적인 이미지로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앞서 다룬 ‘조형으로의 지향성’은 엄밀히 말하자면 회화-캔버스에서 입체-조형으로 상태가 전환되는 것이 아니라 회화-입체의 비율에서 입체의 비율이 높게 조정되고 있던 것이었던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좌대와 조형물의 관계를 다시 살펴본다면 그 두 관계도 관습적인 ‘작품’과 ‘좌대’의 관계가 아니라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으로 조정되어 가는 스펙트럼의 관계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제 전시장에 펼쳐진 상황은 ‘조형물’이 ‘좌대’를 ‘받치고’ 있으며, ‘고양이’가 ‘좌대’가 되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히로는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그것은 미래 시제의 장소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안태원은 밈을 통해서 하이브리드란 유동적인 존재양식을 포착하고 구현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러한 ‘상황’을 눈앞에 두고 취하는 태도는 약간의 안타까움 내지는 노스탤지어적이다. 같은 인터뷰에서 안태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지만 요즘은 짤줍(밈줍)을 많이 하고 있지 않아요. 단순히 밈을 향유했던 시기를 넘어 작업을 위한 레퍼런스로써 저돌적인 태도로 밈을 수집하게 되며 시각적 피로를 경험했거든요. 디지털 이미지의 빠른 생성과 소비 패턴에 휘말려 ‘이미지’ 자체의 운명의 무게를 가늠하는 내면의 장치가 제대로 된 기능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미지를 대하는 한없이 가벼워지는 태도에 회의를 느끼고 요즘은 현실의 것들에 집중합니다. 그럼에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디지털 감수성을 현실 감각과 섞으려고 합니다.[8]

  일견 포스트모던적인 재귀 전략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이것은 포스트모던의 정신분열schizophrenia적 태도―어떤 경계와 구분이 우선 명확히 존재하고 그것을 위반하고 교차하며 그로부터 도주하는 전략이 전제하는 분명한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디지털과 피지컬이 하나로 혼융되어 있으며 이러한 하이브리드 상태에서 이뤄지는 것은 바깥을 향한 탈주가 아니라 끊임없는 임시방편적인 유동적 조정과 적응이다. 때문에 현실을 향한 집중은 그 대상과 강도를 조정해내는 분산의 일환, 즉 정신과 관심의 배치를 재조정하는 일이다. 안태원의 자세는 분명 복고적 의미에서 노스탤지어적이지만 동시에 노스탤지어 자체가 과거를 재조명하고 동시에 현재의 맥락에 위치시켜 새롭게 창조해내는, 일종의 ‘밈’화를 거친다는 점에서 관심의 재배치에 대한 의지 또한 재생적인 의미에서 노스탤지어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과 가상이 착종된 상황에서 현실의 비중을 높이고자 하는 ‘집중’과 재배치의 힌트를 안태원의 작업에서 확인할 수 있을까.

  안태원의 작업에 대한 분석들에서 상대적으로 잘 다뤄지지 않는 부분은 바로 인물의 초상 작업이다. 특히 이번 《뿌리PPURI》 전시에서 선보인 가상의 인물이 그려진 초상 오브제와 오프닝 이벤트로 이뤄진 방문 관객의 초상을 스피드 페인팅하는 작업은 히로 시리즈가 다룬 ‘표면’이란 주제 중에서도 인물의 얼굴에 대한 탐구를 심화한다.

  MU에서 출발하여 MP에 대한 탐구까지 확장되던 히로 시리즈와 주제적으로 어색한 거리감을 가지는 이 초상화 작업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히로라는 실제 반려묘가 밈이라는 디지털 대상화의 과정을 거치고 그 안에서 다양한 물체와 그 표면과의 마주침 등, 기존 물리적 세계에서는 불가능했던 이질적인 배치들에 놓이는 ‘존재론적 오디세이’를 겪는 과정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초상화는 분명히 밈이나 디지털 상황과는 조금 동떨어져 있다고 느껴진다.

그림 5 〈Woman, man, bruise, stare〉
그림 6 스피드 페인팅 인물 초상 (출처: 작가 인스타그램 @ppuri_)

 
  당장 사람의 얼굴로 주제가 전환된 것은 고양이에서 인간으로, 가상에서 현실의 것으로, 밈이란 인터넷 소통 형식에서 표정이란 인간의 비언어적 소통 형식으로의 이행으로 앞에서 살펴본 것과 다르게 복고적인 혹은 반동적 운동처럼 읽힐 수 있다. 그러나 히로 시리즈 속 반려묘의 모습처럼 어딘가 과장되고 변형된 가상의 인물 초상이라는 사실과 히로 조형물들이 독립적인 물체로 좌대 위에 올라가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온전히 평면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평면에 가까운 형태의 파괴된 콘크리트 질감의 ‘석판’에 떠오르고 있다는 점에서 앞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다시 매개변수 값의 비중에서 회화적인 것이 높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거칠고 크고 작은 흠집이 새겨진 콘크리트 질감의 판과 직사광선에 의해 탈색된 프린팅 같은 색조가 특징적이다. 고대 그리스의 인물화 모자이크와 같이 어떤 유물처럼 물리적 혹은 시간적 파괴와 손상으로 여겨지는 흔적―제목에서 말하는 ‘멍bruise’과 같이 ‘피부 아래under the skin’로부터 기이하고 모호한 얼굴이 떠오르고 있다.

  나아가 《뿌리PPURI》 전시 공간의 벽면에 꾸며진 ‘피폭자의 그림자’라고 불리우는 불에 탄 음영 주변에 이 초상화 시리즈가 놓여 있다는 점에서 느슨하지만 이 그림자 주인의 초상이지 않을까 하는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한다. 가상 인물의 가상적 초상과 그 옆에 있는 강렬한 가상화의 회로 안에서 불타버린 잔해로서의 가상적 그림자. 이 가상의 연쇄 속에서는 부재를 통해서 역으로 ‘존재’를 음각으로 드러내고 있다.

  관람객의 초상을 에어브러쉬로 스피드 페인팅하는 이벤트는 이 가상의 초상화의 반대편에서 존재를 포착한다. 피폭자의 그림자가 만들어진 것과 동일하게 에어브러쉬로 분사되어 화지에 순간적으로 흡착하는 얼굴들. 명암으로만 그려지는 얼굴들은 히로 시리즈처럼 조형물의 표면에 드러나지도 않고 밈적으로 자유롭게 변형되지도 않는다. 디지털적인 특징을 강조하기 위한 도구로 여겨지던 에어브러쉬도 전통적인 인물 초상 스케치에는 적합하지 않은 도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초상 속 얼굴들은 평면 안에서 그 자체로 고유한 입체성을 지닌다. 에어브러쉬의 분사가 빚어내는 우연적인 경계들은 도구 스스로의 의지를 통해 변형을 추동하기도 한다. 이러한 에어브러쉬의 용법은 에어브러쉬가 사라지게 만든다고 여겨지던 화가의 신체성을 다시―그러나 온전히 같은 방식은 아니게―재생시킨다.

  안태원의 손에서 점차 증식하는 ‘얼굴’들은 과연 밈일까 아니면 비-밈non-meme적인 실재의 귀환일까. 어쩌면 하이브리드적인 얼굴-상황인 것은 아닐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얼굴들에 대한 ‘집중’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이미지들은 다시 디지털화되어 매개변수의 이퀄라이저를 통해 히로처럼 증폭‧변조되고 유통되어 밈으로서 나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밈이 참신함과 의미를 빚어내기 위해 위반과 충격을 통해 이미지를 내외부적으로 변형시키지만, 얼굴과 그곳에 피어오르는 표정은 그 자체로 의미이자 존재의 표현이다. 표정은 밈meme이 아니라 감정을 동반한 제스처로서의 외견mien이며, 단위와 현상이 구분되지 않는다. 회화적인 것의 비중을 높이는 것이 자연스럽게 초상이라는 전통적 회화 주제로 변해가는 것은 한 존재와 그 존재 뒤에 놓여 있을 삶과 역사가 자연스럽게 따라오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얼굴이 단순한 안면 근육의 종합이 아니라 항상 배제되지 않는 감정이라는 잔여가 존재하는 장이라는 것과 유사하게 말이다.

  데리다는 자신이 키우는 반려묘 앞에서 어느 순간 발가벗겨진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이를 철학적으로 탐구한 바 있다. 동물이란 타자의 시선을 통해서 인간을 시선의 대상으로 역전된 경험을, 모든 곳에 있는 히로란 고양이의 눈 앞에서 우리가 경험하게 될 것이다. 디지털 세계를 유영하고 있는 히로가 바라보는 우리의 얼굴은, 표정은 어떤 모습일까. 반려종으로서의 고양이와 마찬가지로 고양이의 반려종으로서의 인간. 이제 후자에 대한 탐구가 앞으로 이뤄질 안태원의 작업에서 이뤄지리라 기대된다. 그리고 그 작업을 마주한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게 될 것이다.

  * 이 원고는 예술경영지원센터 지원 특별 기고로 게재되었습니다.


[1] ‘짤줍’ 행위는 그러한 발견과 함께 수집이라는 심미안적 관점을 어느 정도 암시한다.

[2] 질리언 로즈, 반윤철 옮김, 《시각 방법론》, 경남대학교출판부, 2014

[3] “야 꿀벌” 밈, 조혜련의 태보 밈, 척추의 요정 밈 등은 ‘꾸준글’과 ‘어그로’, 누구나 모방할 수 있는 복제가능한 단순한 형식을 통해서 억지밈으로 이뤄진 ‘컨셉’이었다. 그러나 해당 밈의 낚시 활동에 동참하는 ‘○○단’이란 ‘트롤’들이 나타나게 되어 해당 밈을 공유‧전파하는 익명의 공동체가 형성되고 빠르게 확산‧변형되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해당 밈 자체의 황당무개함이 유머로서 수용되게 된다. 이후 널리 유통되고 또 재변형이 가해지며 ‘매운맛’이 빠지게 되어 온전한 정식 밈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온전한 밈과 부자연스러운 억지밈의 차이는 밈 자체의 운동성에 따르면 크게 의미가 없다는 점이 재확인된다.

[4] 카오스*라운지 참여 작가였던 우메자와 카즈키 블로그에 게재된 〈츠카사를 만들자!〉 제작 당시 현장 사진, umelabo log, 2010.4.27., https://umelabo.hatenablog.com/entry/20100427/1272328247

[5] カオス*ラウンジ Archive, カオス*ラウンジ2010 in 高橋コレクション日比谷, http://chaosxlounge.com/wp/exhibition/ex_chaos2010intakahashi

[6] ANTIEGG, 〈디지털 시대의 이미지 경험, 안태원의 작품 세계〉, 2023.6.12., https://antiegg.kr/16099/, 강조는 인용자

[7] “안태원이 자신의 작업을 고정된 ‘상태’가 아닌 진행 중인 ‘상황’에 놓인 유동적인 대상으로 여긴다는 사실이었다. … 우리가 경험하는 가상의 것을 포괄하는 동시에 실재하는 모든 것을 연결하는 인터넷은 그가 앞서 언급한 두 대립항의 긴장 속에서 작업을 지속케 하는 동력이 되었다”, 모희, 전시 비평 〈안태원의 작업에 관한 소고: 이미지의 뿌리를 찾아서〉, P21, 2024

[8] ANTIEGG, 같은 곳

[9] “정신분산은 한편으로는 집중을 못하는 상태를 이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 가지에 지나치게 정신이 쏠려 다른 것을 다 잊어버리는 상태를 뜻한다. 다시 말해 산만함은 몰입의 이면인 것이다.”, 이경진, 〈정신분산 시대의 인문학적 탐구〉, 《브레히트와 현대연극》 제41호, 2019, p.404

댓글

  1. 잘 읽었습니다. 정말 좋은 글입니다.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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