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피염의 브리콜라주: 설치 vs. 연극 vs. 영화

고동연
2024.11.10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의 다이앤 쿠투(Diane L. Coutu) 편집장은 ‘역경에 부딪혀도 극복하고 일어나는 힘’, 즉 복원력의 비밀을 세 가지에서 찾았다. 첫째, 냉정한 현실 직시, 둘째, 의미 창출, 셋째, 브리콜라주(Bricolage)[1]이다. 이 중에서 적절한 도구나 재료 없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즉석에서 고안하는 능력을 일컫는 ‘브리콜라주(Bricolage)’는 어원상으로도 복원력과 연관된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반등한다’라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프랑스어로 ‘브리콜레어(Bricoleurs)’는 집안 물건을 만지작거리며 라디오를 만들거나 자신의 차를 직접 수리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적절한 도구나 재료 없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즉석에서 고안하는 능력이나 사람을 지칭한다.[2] 연장선상에서 ’정서적인 브리콜라주(psychological bricolage)‘는 기존의 연관되어 보이지 않던 지식이나 개념을 새롭게 적용해서 해결책을 찾는 경우를 말한다. 그러므로 브리콜라주는 비전문성이나 임시방편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창조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지식을 활용하는 합종 연대의 의미도 지닌다. 혹은 프랑스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는 『야생인들의 사고(Savage Mind)』에서 브리콜레어적인 태도를 언급하고 있는데 적어도 인류학자의 눈에 발달한 인류보다는 야생의 인간들이 훨씬 창조적으로 보인 셈이다.

  브리콜라주는 현대미술에서도 낯선 개념이 아니다. 현대미술가들은 특정한 매체나 장르, 문화나 취향에 함몰되기보다는 새로운 장르나 미학적 방식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왔다. 따라서 브리콜라주는 아방가르드 정신의 바탕을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세기 들라크루아는 더 강력하고 더 역동적인 장면을 신체나 동물의 움직임과 결합하기 위해서 사진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바우하우스의 기초 수업으로 유명한 칸딘스키는 소리, 색상과 같은 비물질적인 요소들의 무게를 비교하고 공부하면서 영화에 더욱 빠져들었다. 칸딘스키가 본격적으로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직후 그가 여성 공예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현대미술의 역사만큼이나 영화의 역사에서도 자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중시됐다. 바우하우스의 추상영화는 공통으로 영화를 회화와 같이 필름 그 자체에 색을 입히거나 변형시켜서 만들어낸 쾌거이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적정하다고 여겨져 온 문법이나 재료를 무시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브리콜라주, 부연하자면 이질적인 것을 연결하는 태도는 머피염의 기계미술에서도 얼마든지 통용될 수 있다. 머피염은 임시변통으로 버려진 작은 것들을 조직하고 새로 구성하고 설치 작업으로 만들어 왔다. 또한 그녀는 자신이 만든 기계나 설치의 작동 방식을 꾸준히 영상으로 기록해 왔다. 버려진 기계, 잘 작동하지 않는 부품들의 연결로 이뤄진 설치, 그리고 그 설치물을 연극적인 무대의 주인공처럼 올리고 동시에 영상으로 기록해 왔다. <금속성 오해(Metallic Mistake)>(2020, 도판 1)나 <순진함을 자극하는 법을 아세요?>(2022, 도판 2)의 경우 원래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과 함께 그저 이상한 기계가 스스로 돌아가게 한 후에 파편과 같은 영상을 최대한 간섭하지 않고 편집하였다.

  이때 설치, 연극, 영화의 장르 사이에 결합이 일어나면서 서로의 장르가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들 간의 이질적인 특성이 두드러지게 된다. 머피염은 적절한 도구나 기술을 사용해서 영화, 연극, 설치가 지닌 장점을 극대화하기보다는 오히려 결과적인 영상이 어색하게 보이도록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녀의 영상은 작품의 전체적인 형태를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 때로는 지나치게 멀리서 찍혀져 있거나 때로는 지나치게 근거리에서 촬영되었기에 형태적인 연계성을 파악하기 힘들게 만든다. 동시에 연극이라고 하기에 무대와 무대 밖의 공간적인 경계를 모호하며 영화라고 하기에 장면들 사이의 이음새가 부족해 보인다.

  필자는 머피염의 연극적인 설치, 혹은 영화로 기록된 잘 작동하지 않는 키네틱 조각을 작가의 표현을 빌려서 ’임시방편의 한시적인 설치물’이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브리콜레어로서 머피염의 작업은 기계를 사용하되 아마추어처럼 전혀 예상치 못한 부분을 조합해 놓고 있으며 나아가서 매체 이후의 시대 조각, 설치, 영화, 심지어 연극적인 특성이 혼재되어 있다. 설치를 보는 것인지, 키네틱 조각의 퍼포먼스를 보는 것인지, 혹은 이를 영화적 시선에 의해서 편집된 영상기록을 보는 것인지 혼동되는 예도 있다. 덧붙여서 시, 소음과 같은 소리, 음악이 삽입되기도 한다.

  머피염의 설치는 젠더적인 관점에서도 흥미롭다. 어린이 장난감이나 자장가 등은 이성애적이고 이상적인 가족을 상징하는 물건이자 소재이다. 실제로 그의 작업에는 어렸을 때의 기억이나 돌봄과 연관된 소재들이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즉, 머피염의 키네틱 조각은 기술적으로 불안정해 보일 뿐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불안정한 단계, 혹은 상태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그녀의 작업이 어렸을 때의 기억에 집중되어 있고, 주체와 주체를 이루는 가족의 불안정성의 암시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분석할 수 있다. 따라서 매체 이후의 시대, 조각, 연극, 영화 사이의 틈새에 존재하고 설치 작업이 지닌 정서적인 의미도 함께 논하고자 한다.

<금속성 오해(Metallic Mistake)>, 2020, 얼룩덜룩 유모차, 피셔프라이스 흔들요람, 가발, 사운드 플레이어 칩, 아빠 노랫소리 (더스트 인 더 윈드), 금속, 플라스틱 케이블 타이, 78.5 x 46.5 x 24.5 cm © 작가 이미지 제공.
<순진함을 자극하는 법을 아세요?>, 2022, 키네틱 조각, 전동크레인, 철, 컨트롤박스, 벤치, 160 x 80 x 80 cm © 작가 이미지 제공.

 
머피염의 키네틱 조각: 불안정한 기계

  “수치심이라는 감정 그 자체가 중심이 되는 작업이라기보다는 이해하는 과정에서 내가 수치를 느끼지만 이내 타협해서 뭔가 다른 에너지로 전환하는데, 대개 비생산적인 에너지로 소모시키는 방향으로 빠지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예컨대 <순진함을 자극하는 법을 아세요?>(2022)에서 볼 수 있듯이 가정용 전동 크레인의 기존 기능대로 사용하는 게 아닌, 그 기계를 가지고 무의미하게 의자를 접었다가 펼치는 움직임으로 전환하면서 비생산적인 목표로 향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조형물 안에서 기술을 이해하고 타협해 가는 과정에서 삐걱대고 불협한 과정이 다 보이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거든요.” (작가 인터뷰)[3]

  브리콜라주는 비전문인이 부적합한 재료를 사용해서 임시방편으로 문제를 해결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당연히 옳음보다는 틀림, 전문성보다는 비전문성, 온전함보다는 불완전함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어 왔다. 머피염은 <금속성 오해>를 ‘장인적 감각’을 상징하는 ‘공방이라는 장소에 값싸고 가벼운 물질의 임시변통으로 만들어진 조형물’을 놓은 작업으로 평가한다. 이를 통해 ‘상대적인 가치의 충돌을 꾀한 설치 실험’이라고 소개한다. 즉 장인의 기계와 잘 작동하지 않는 작가의 키네틱 조각 사이의 기준점을 모호하게 하고 있다.

  “각자 다른 곳에서 만들어진 기성품 (readymade)는 처음부터 서로를 위해 제작된 것처럼 사물들은 몸을 매개하여 합체될 기회를 얻는다. 모순적이지만 잘 맞아떨어지는 형상들의 병치는 혼종의 쾌를 촉발시킨다.”[4]

  머피염의 키네틱 조각은 태생적으로 효율적인 기능성을 포기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순진함을 자극하는 법을 아세요?>는 2019년부터 2021년까지 약 2년간 작가가 더디게 제작한 움직이는 조각이다. 과정이 느릴 수밖에 없는 것은 키네틱 조각의 움직임이 특별한 기능이나 역할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부품을 모아서 천천히 변형을 거듭한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에 따르면 ‘신체를 들어 올리는 기계’를 만들겠다는 막연한 기대로부터 출발하였다. 유학 당시 언어도, 기계를 다루는 솜씨도 타학생에 비해 뒤떨어진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일종의 복수심이 발동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반복해서 윗몸 일으키기를 하듯이 침대 벤치를 특정한 방향으로 일으키는 그의 키네틱 기계는 고장 난 기계에 가깝다. 작가는 설치물을 일종의 인간이나 신체에 비유하고는 하는데 의도된 목표를 향해서 매진하면서도 동시에 포기하는 인간의 한 유형을 연상시킨다. 철 구조물은 계속해서 타협점을 찾다 이내 바닥에 누워버리게 된다. 우연히 발견한 침대 벤치는 즉흥적으로 구조물 상부에 ‘끼어’ 들어가게 되어 이내 힘으로 접혔다가 펴지는 키네틱 조형물로 변모한다.

  움직이는 과정에서 기계가 지닌 구조상의 결함도 두드러진다. 두껍고 무거운 침대의 스프링과 같이 보이는 전체 구조물과 거대한 추 밑으로 실이 연결되어 있다. 누가 봐도 가느다란 끈을 끌어당겨서 베드벤치를 끌어당기는 일은 불가능해 보인다. 이때 미숙함이나 작동의 어려움은 브리콜라주 미학의 핵심적인 측면이기도 하다. 베드벤치는 위태롭게 움직임을 계속하다가 이내 궤도에서 이탈한다. 근근이 끈이 벤치를 끌어당기지만, 매번 규칙적인 경로가 아닌 살짝 이탈한 경로를 통해 위로 당겨진다.

  따라서 작가는 부정확하고 버려지고 기계로 성립될 수 없는 것들을 활용하는 정도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기계가 어렵게 작동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언급한 바와 같이 기술적인 미숙함은 문화적이고 언어적인 미숙함과 맞닿아 있다. 작가는 프랑스에 처음 가서 능력도 안 되고 자신감이 없던 시기에 느꼈던 수치심에 대하여 언급한다. 특히 프랑스 남자아이들이 기계를 능숙하게 다루는 것을 바라보면서 상반된 아시아 여성 작가의 이미지를 구축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애초의 기계가 움직이는 방식이나 목적과 그녀가 부품을 조합해서 만든 키네틱 조각이 작동하는 방식에는 큰 차이가 있다.

기계가 사람이 될 때: 경계 허물기의 브리콜라주 연극, 영화, 설치

  “2018년부터 기록해 온 설치 영상들을 파편화하고,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촬영한 영상들을 즉흥적으로 재배치한 2채널 영상이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살아있는 설치들은 영상이라는 매체를 통해 경험적 서사의 무한 증식을 꾀한다고 쓰고 있다. 연극적 용어로서 드라마투르기는 “이야기를 실행할 수 있는 형식으로 조정하는 것”으로 공연 작업의 토대와 구조를 갖추게 하는 조력자이다. 이러한 연극의 기존 문법을 뒤집어 일종의 리허설 무대로서 영상 파편들의 맥락은 서로가 유기적으로 충돌한다.”[5]

  위의 인용은 머피염의 가장 흥미로운 프로젝트 중의 하나인 영상 <어느 드라마투르기의 고장 나버린 시계>에 관한 것이다. 작가는 버려진 작은 것들을 조직하고 새로 구성해서 전혀 예상치 못한 용도로 기능과 역할을 하는 키네틱 조각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더 방점을 두고 있다. 영상 <어느 드라마투르기의 고장 나버린 시계>는 기계를 일종의 영화의 주인공과 같이 전면에 내세우고 기계가 스스로 돌아가게 한 후에 파편과 같은 영상을 최대한 간섭하지 않은 듯한 인상을 주도록 편집한 것이다.

  영상으로 설치 작업을 기록하는 방식은 언급한 바와 같이 기계나 설치를 의인화하는 성향과 맞물려 있다. 자기 자식과 같이 설치가 어떤 공간에서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자연스럽게 설치 작업이 특정한 시, 공간에서 흡사 살아 있는 생물처럼 ‘자율적으로’ 매번 다르게 행동하는 과정을 영상과 사진으로 기록했다.

  “장소를 매번 달리하면서 바뀌는 실험과 함께 영상기록들을 엮어내고 있는 것인데, 등장하는 사물들을 마치 배우, 무용수, 퍼포머로 여기곤 해요. 그 이유는 제가 이 친구들과 늘 업고 끌고 옮겨가며 배치하고 움직이도록 두는 것이 꼭 영화나 무대에서 연기자들의 포즈나 연기를 디렉팅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작가 인터뷰)[6]

  흥미로운 점은 영상을 기록할 때마다 오히려 설치 작업이 잘 작동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사진으로 찍는 것보다는 비디오 때 비디오로 찍을 때는 그 사고가 되게 자주 나기도 했거든요. 그러니까 사고라기보다 사고라고 표현할 수도 있고 얘네들이 엄청 뭐라고 하죠. 이 안정적으로 끼워져 있는 상태가 아니라 진짜 잠깐 끼워져 있거나 되게 불안정한 상태로 늘 있어요.”

  작가는 원칙적으로 불안정한 움직임에 관심을 지녀왔다. 설치 작업을 영상으로 기록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왜냐면 키네틱 조각의 움직임이 불규칙하면 불규칙할수록 매번 움직이는 각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때 설치, 연극, 그리고 영화의 장르적인 결합이 일어나지만 이러한 결합은 매체 간의 차이점을 보강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분열적인 양상을 부추긴다. 설치의 중량감, 연극적인 무대의 집중도, 시, 공간 뛰어넘은 장면을 결합하는 영화적인 속성 중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하게 만족하지는 못한다.

  원래 필자가 머피염의 설치에 관심을 두게 된 것도 연극적인 성격 때문이다. 우선 연극적이라는 것은 키네틱 조각이 일종의 퍼포머이기 때문이다. 머피염은 키네틱 조각이나 특정한 설치물이 보는 이로 하여금 감정을 환기한다는 점에도 주목한다. <시간의 각인>(2023)에서 작가는 특정 장소에 놓인 물건들을 담담하게 기술한다. “임대 아파트의 하자 검사 당일 마룻바닥에 새겨진 피아노 자국. 그로 인해 회수 받지 못한 보증금’이라는 다소 사적이고 허망한 사건을 토대로 재현한 이 설치는 강마루와 피아노, 그리고 전시 공간을 가로지르는 임시 비계 등을 통하여 사물을 기억하는 방식을 제시한다.” 작가는 피아노를 일종의 기계처럼 다루는데, 피아노는 어릴 적 향유하고 ‘애착’을 형성하던 사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작가는 피아노에 대하여 “투박하고 웅장한 피아노로서, 아마추어의 선율로, 축광의 추락으로, 낭만과 처참함의 공존으로 점유한다”라고 쓴다.

  그뿐만 아니라 영상으로 기록된 머피염의 작업은 영화로 기록되어 오고는 했다. 만약 브리콜라주가 기존의 정통적인 지식이나 기술을 부정하는 태도를 지칭한다면, 머피염의 영상도 마찬가지로 혼종적이며 비전문적이다. 영화의 역사는 미숙함, 예상치 못한 수법이나 장르를 정의하려는 시도들 때문에 발전되어 왔다. 활동사진이라는 영화의 오래된 정의에 반기를 들고 클로즈업은 특정 장면에 카메라가 집중하면서 심지어 멈춰서기도 한다. 영화 카메라가 사람과 같이 부르르 떨기도 한다. 철저하게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카메라 뒤에 있어야 할 촬영인과 편집인의 모습과 시각이 두드러지는 일도 있다. 심지어 찍혀진 영상 이미지가 아니라 필름 자체를 실험의 대상으로 삼아서 셀룰로이드를 태우고 자르는 일을 반복하기도 하였다.[7] 영화사에서도 기존의 문법을 벗어나서 전혀 다른 문법을 도입한 영화 제작 방식이 등장해 왔고 이때마다 영화적이라는 표현의 정의가 변해왔다. 게다가 유튜브의 등장 이후 촬영 단계를 거치지 않고 푸티지를 이어서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다양한 시, 공간적인 배경을 지닌 이미지들이 짜깁기되어서 만들어지는 영화를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머피염의 <항공기 객실 내 발작(Seizure in the Aircraft Cabin)>에 등장하는 귀여운 털로 만들어진 기이한 형태의 캐릭터를 비롯한 백합이나 어린이 장난감과 같은 물건들은 장면 상으로는 잘 이어지지 않는다. 그녀의 영상은 사물의 전체적인 형태나 움직임보다는 작가의 주장에 따르면 사물들의 표정을 다룬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사물의 의미를 명확하게 파악하기도, 혹은 특정한 이야기를 상상하기도 쉽지는 않다.

  이에 머피염의 설치 영상은 엄밀한 의미에서 설치 그 자체에 관한 것도, 혹은 연극적 무대와 같이 놓인 전경 그 자체에 관한 것도, 나아가서 설치가 움직이는 과정을 기록하였다고 해서 영화가 말하는 연결된 이미지나 이야기를 상정하지도 않는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녀의 설치는 연극이기도 하고 영화이기도 하지만 특정한 가상의 공간을 현실의 공간과 구분하지도 않고 있으며 특별히 극적인 상황을 상정하지도 않는다.

  머피염의 작업에서 설치와 퍼포먼스 사이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그녀의 키네틱 조각은 부자연스럽고 불규칙한 움직임을 매번 새롭게 재연하기 위해 존재해 보인다. 신체를 사용하지 않고 기계를 대신 사용한 기계의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전통적인 무대와 무대 밖의 공간을 상정하거나 실제와 가상의 공간 사이의 구분을 두고 있지는 않기에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연극이나 영화와도 거리를 둔다. 따라서 조각이면서도 정적인 조각의 무게감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영화나 연극의 시간적 요인을 도입하지만 다양한 장르적이고 도구적인 경계를 허문다는 점에서 ‘브리콜레어적’이라고 할 수 있다.

<A Message for Every Mom Who Is Tired Lonely>, 2021, 가변설치, 잠자는 포 니타 피규어,금속, 유리, 당 면, 글리세린, 인공촛불 © 작가 이미지 제공.
<Techno Lullaby>, 2022, 가변설치, 목재, 퐁듀 기계 부분, 유리볼, 글리세린, 당면, 유아펜스, 전동 모빌 부분, 가발, 샤베트 메이커 부분, pvc파이프, 비닐 © 작가 이미지 제공.

 
불안정성과 젠더의 문제

  “발견되는 사물, 가정용 기계, 사적인 사물들이 한 공간에 모여있을 수 있게 된 계기에는 늘 나의 몸이 있다. 이 몸은 사물을 향해 보살핌과 파괴, 충전과 소모 등의 모순적인 행위를 반복적으로 가한다. 충돌은 혼합과 파괴를 번갈아 가며 일으키고, 마찰의 상태를 유지하다가 서로가 고갈되기도 한다.” (작가 스테이트먼트)[8]

  머피염의 작업이 지닌 다 장르적인 속성 이외에 그의 작업에 나타난 소재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 혹은 기계를 관능적이라고 부른다. 언급한 바와 같이 자신의 키네틱 조각을 의인화해 왔기 때문이다. 필자는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한국이 매튜 바니(Matthew Barney)를 머피염의 작업에 비교하고는 하였는데 그녀의 작업을 제3의 성과 연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니는 태아가 잉태되자마자 아직 성 구분이 없을 당시의 상태로부터 영감을 얻은 바 있다. 또한 남성의 성기를 올리고 내리고의 기능을 하는 근육인 ‘크레매스터(Cremaster)’를 남성의 신체에서 능동적이면서도 수동적인, 따라서 젠더적인 측면에서 모호한 곳으로 규정한 바 있다.

  머피염의 경우 부적응, 혹은 장애와 같은 단어를 흔히 사용하고는 하는데 어렸을 때의 장난감 또한 유사한 맥락에서 해석해 볼 수 있다. <A Message for Every Mom Who Is Tired Lonely>(2021, 도판 3)나 <Techno Lullaby>(2022, 도판 4)에서 어린아이의 장난감과 자장가 “어린아이를 흔들어 재워라(Rock-a-bye baby)!”의 경우 순수하고 성적으로 대상화하지 않은 시기를 소환하지만, 그녀가 다루는 영유아의 세계는 평온하기보다는 기이하다. 머피염의 작업에도 매튜 바니의 작업에 자주 등장하는 바셀린이 사용되는데 바니에 따르면 바셀린은 신체와 연관되어서 다양하게 사용된다. 신체의 고통을 완화시키거나 성적 관계 시 윤활유로서의 기능을 하기도 하고 잉여적인 성적 분비물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움직임, 신체, 성에 관심을 지녀온 머피염의 작업에서도 바셀린은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재료이다.

  따라서 그녀가 다루는 어린아이의 장난감은 표정이나 감정을 담은 키네틱 조각물을 확대해서 해석한 경우이며 나아가서 동심의 세계를 철저하게 순수하고 아름다운 방식에서부터 벗어나서 해석한 결과이다. 예를 들어 《자장가에 관하여(On Lullabies)》(2024)는 모성이나 헌신적인 돌봄의 세계를 해체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사회가 낳은 사물의 궤적에서 이탈하고 그들이 비추는 돌봄의 이미지 뒤편에 진 그림자에 놓인 몸을 들여다본다”고 설명한다. 사회가 역사적으로 돌봄의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해 왔을 뿐 아니라 그로부터 각종 금기와 이미지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생겨난 ‘거대한 피로감’에 대하여 작가는 돌봄의 이미지는 부드러운 것이 아닌 파괴적이거나 기이한 것과 연관시킨다. 실제로 머피염의 설치에서 기계나 어린이 장난감은 잘 작동하지 않는다. 《자장가에 관하여》에서 배경은 흡사 공포영화를 연상시킨다. <조용한 각성(Quiet Alertness)>(2022, 도판 5)에서 전동 요람과 신체가 털로 덮인 기이하게 생긴 캐릭터가 등장한다. 역사적으로 어린아이들의 두려움이나 판타지로부터 많은 공포영화나 소설이 탄생하였다. 프로이트의 유명한 언캐니의 배경이 된 호프만(E. T. A. Hoffman)의 『샌드맨(The Sandman)』(1819) 또한 오래된 동화를 인용하고 있다. 가장 순수한 상태야말로 가장 두렵고 나약하고 실망할 소지가 큰 시기이기도 하다.

  머피염은 장난감이나 육아 도구를 사용해서 기이한 생명체를 만들어낸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자장가를 시구처럼 적어 놓고 관객이 읽도록 유도한다. “가지가 부러지면 요람이 떨어지고 아기가 내려올 것이다.” “나무 꼭대기에서 흔들어라 아기야” (때로는 “나무 꼭대기에서 조용히 해라. 아기야”)는 잘 알려진 동요의 가사이지만 곱씹어보면 오만한 사람들에 대한 경고일 수도 있다.[9] 자장가는 익숙하고, 정상적이지만 동시에 많은 교훈과 알레고리를 담고 있기도 하다. 머피염의 작업도 일상적인 피아노, 어린이 장난감, 털로 덮인 캐릭터 인형과 같이 일상적인 사물로부터 장면이나 설치가 시작되지만 이내 관객의 숨겨진 상상력을 자극하게 된다.

  머피염의 자장가는 모성애나 어린아이의 순수함에 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잘 알려진 자장가의 가사를 시처럼 관객에게 프린트해서 보여준다. 덕분에 관객은 비로소 돌봄과 돌봄을 받는 이의 관계성에 주목하게 된다. 순진하고 도움이 필요한 어린아이를 제목으로 한 룰라비 전시에는 바셀린, 털을 비롯하여 성적인 의미를 암시하는 사물이 등장한다. 은연중에 어린아이의 세상에 성적인 알레고리도 숨길 수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어린아이는 순수의 상징물이 아닌 성인의 세상이 감추고 있는 다양한 판타지나 숨겨진 욕망을 투여하는 대상처럼 등장한다.

<조용한 각성(Quiet Alertness)>, 2022, 전동요람, 석고, 가발 © 작가 이미지 제공.

 
나가는 말: 포스트시네마 시대의 조각, 연극, 영화

  결론적으로 머피염의 기계는 잘 작동하지 않는 기계이다. 통상적인 수법, 장르, 부품을 무시한 브리콜레어의 자세로 만든 기계이다. 또한 전통적인 사물의 쓰임에 반하는 기계이다. 게다가 그는 설치를 영화와 접목하였다. <어느 드라마투르기의 고장 나버린 시계>는 2018년부터 기록해 온 설치 영상들을 파편화하고,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촬영한 영상들을 즉흥적으로 재배치한 2채널 영상이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살아있는 설치들은 영상이라는 매체를 통해 경험적 서사의 무한 증식을 꾀한다. 연극적인 용어로서 드라마투르기는 ‘이야기를 실행 가능한 형식으로 조정하는 것‘을 공연으로 정의하였다. 반면에 머피염의 영상은 리허설이나 편집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제멋대로 움직이는 영상의 움직임을 기록한 파편화된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머피염의 작업은 연극적이라고 하기에는 무대 안과 밖의 공간이 모호하며 영화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단편적이다. 특정한 방향성을 감지하기 어렵다. 즉 연극이나 극영화의 역할이 온, 오프 스크린의 관계성을 통하여 눈앞에 장면, 무대 위에서 보여지는 이야기와 당장 경험할 수 없는 이야기를 엮는 것이라면 머피염의 설치와 설치 영상은 그러한 역할을 거부한다. 그런데도 그녀의 작업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브들은 쓸모를 잃어버린 기계, 쓰임이 변질된 물건들이 효용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마찬가지로 장난감으로 그득한 머피염의 세상은 불안한 상태이지만 동시에 두려움, 불안전함을 받아들이는 솔직한 세상이기도 하다.

  나아가서 디지털을 통한 이미지의 조작이 한층 더 용이해졌고 영상이 제작되는 과정보다는 재생되고 공유되는 방식이 한층 더 중요해진 시대에 머피염의 설치는 어떻게 영화가 조각, 연극과 만날 수 있을지 새로운 방향성을 보여준다. 더 이상 영화 카메라나 편집의 고전적인 의미는 퇴색되고 있다. 다양한 방식으로 영상을 만드는 것이 가능해진 포스트시네마 시대 기계, 설치, 연극, 영화의 역할과 구분은 더욱 모호해지고 있으며, 머피염과 같이 기술적인 숙련도를 부정하는 브리콜레어가 우리 시대 주도적인 예술가 상이 되고 있다.

  * 이 원고는 예술경영지원센터 지원 특별 기고로 게재되었습니다.


[1] Diane Coutu, “How Resilience Works – Improvising Your Way Out of Trouble,” Harvard Business Review, Vol. 80, No. 5, May 2002.

[2] 브리콜라주는 원래 불어로 동사인 bricoler (“손수 수리하다”)로부터 유래하였으며 영어로는 단어 DIY (“직접 수리한다”)와 가장 긴밀하게 연결된다.

[3] 머피염, 작가 인터뷰, 2024년 7월 22일.

[4] 머피염, 작가 스테이트먼트.

[5] 앞의 글.

[6] 머피염, 작가 인터뷰, 2024년 7월 22일.

[7] https://labocinemedias.ca/wp-content/uploads/2024/07/657li.pdf

[8] 머피염, 작가 스테이트먼트.

[9] <나무 꼭대기에서 아기를 흔들어 주오>나 또 다른 제목으로는 <나무 꼭대기에서 아기를 조용히 해주오>는 원래 밭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아기를 데리고 일할 때 나뭇가지에 요람을 묶어 바람이 아기를 흔들어 잠재우도록 했던 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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