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포머가 등장하여 퍼포먼스가 이루어질 공간으로 걸어간다. 몇 개의 이동식 조명이 맥없이 어둠을 흐리는 곳에 작은 스크린이 설치돼 있다. 거기로 가는 중이다. 한 발을 옮기고 지팡이를 짚고 다른 발을 끌어오면서 차근차근 몸의 위치를 옮기는 중이다. 단계적으로 선명하게 구분되는 걸음으로 다다른 벽의 모서리에 지팡이를 기대어 놓고 그러므로 더 위태로워진 이동을 희끄무레한 빛 사이로 들어가 화면을 마주하고 마친다. 잠깐의 사이. 익숙한 사람에겐 많이 익숙하고 낯설 사람에겐 신기할 수도 있을 음악이 흐른다. 그것은 국민체조의 금관악기 전주다. 화면 속의 인물은 음악과 구령에 맞추어 국민체조를 수행하는 데 그는 화면 밖의 퍼포머와 동일 인물이다. 퍼포머는 Q레이터. 몸의 절반을 다루기 어려운 이유로 나머지 절반도 다루기에 녹록지 않은 몸의 주인이다. 또한 밖으로 명확하게 나와주지 않는 말의 주인이며 기억되지 않는 짧은 기억들의 주인이다. Q레이터는 화면 너머의 자신이 국민체조를 수행하는 모습을 따라 한다. 체조가 끝나면서 음악이 잦아들기가 무섭게 다시 나팔 전주가 울린다. Q레이터는 아까보다 지친 기색으로 국민체조를 완주하고 다시 나팔 전주가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 이 퍼포먼스의 이름은 〈유니콘의 춤〉이다.
체조보다는 춤이었다
어디선가 아는 음악이 들려올 때 그 즉시 제목과 전개가 떠오르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거’ 같은 대명사 수준으로 흐릿할 때도 있다. 분명 아는 음악인데 안다고 말하기 어렵고 모른다고 말할 수도 없어서 그거 있잖아 그거 주변에 물어보며 이 석연치 않은 앎의 영역이 부과하는 괴로움으로부터 서둘러 벗어나려고 애를 쓸 때가 있다. 물론 국민체조는 절대로 후자가 될 수 없는 음악이다. 전자에 속하는 음악 중에서도 가장 선명한 음악일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유년기의 반복 숙달도 주요한 이유가 되겠지만 이를 차치하더라도 이 음악은 특징적이다. 국민체조가 아니면 그 어떤 쓰임새도 갖기 어렵도록 웅장한 음색과 어떤 관점에선 난해하다고 볼 수 있을 전개의 곡이기 때문이다. 그야 국민체조만을 위해 작곡되었기 때문이 아니겠냐는 상식적인 반문이 따를 수 있겠지만, 이러한 반문에는 괴상하게 보일 수 있는 체조만을 위해 잘 어울리도록 괴상한 곡을 쓰는 게 상식적인 경우인지 반문이 뒤따르게 된다. 국민체조와 그 음악은 무엇이 먼저 만들어졌을지 감각적으로 알기 어려울 정도로 독특하면서도 서로 잘 맞물려서 춤과 음악이 한 공간에서 동시에 즉흥적으로 창작되었을 것만 같다. 이와 같은 아침조회(조회라는 단어가 이미 아침을 포함하므로 이 단어의 뜻은 아침아침모임이나 다름없는데 이와 같은 합성적 특징은 이 글에서 알아볼 국민체조의 자기 반복적 존재 조건과 잘 어우러진다.)마다 어린 나에 의해 이루어지던 질문들 또한 자연발생적이었다는 진실을 알 수 있다. ‘이런 걸 왜 하지?’
국민체조의 동작은 신체의 가동 범위를 늘리거나 유지하려는 의도를 직관적으로 알기 어려운 동시에 행위의 이유나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유별나다. 국민체조가 아니면 절대로 시도하지 않았을 몸의 형상을 박자에 맞춰 구현하고 반복하는 일을 아침아침회에서 강요할 때마다 질문 또한 반복되었다. ‘이게 다 무슨 의미지?’ 이 질문은 국민체조의 특징적인 수준만큼이나 아이들에 의해 보편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Q레이터는 반복한다. “헤쳐”(해치긴 뭘 해친단 말인가? 이 단어의 뜻을 알게 된 건 군복을 입고 나서였다.) 구령과 함께 음악이 잦아들기 무섭게 다시 전주가 시작되고 숨소리가 거칠어지며 신음이 섞이기 시작한다. 때론 비명처럼 들릴 때까지 Q레이터는 국민체조를 반복한다. Q레이터의 몸을 통해서 국민체조 동작은 재현될 수 없고 비슷하게나마 구현되기도 어려운데 그것은 틀림없는 국민체조로 감각된다. 각기 다른 이름의 동작들이 편마비의 신체적 조건을 이유로 그게 그것처럼 대동소이하게 펼쳐지는데 오히려 그래서 더 국민체조로 느껴진다. 나는 어린 시절의 내가 그랬듯 국민체조의 이유와 의미를 묻는 일은 그저 피곤하다고 느끼게 되고 이를 통해 그 이유와 의미를 알게 된다.
아무 이유도 없고 의미도 없다. 바로 이것이 국민체조의 이유고 의미다. 아무 이유도 의미도 없는 괴상한 동작을 아무 이유도 의미도 없이 반복하는 것이 이유이자 의미가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을 높은 데서 전지적으로 조망한다면 볼 수 있을 아침마다 꾸물거리는 것들이 수많은 운동장으로 나와 이유도 의미도 없는 행위를 이유도 의미도 없이 반복하는 풍경이 바로 국민체조의 이유와 의미다. 시킨다고 시키는 대로 하게 하는 것. 이유와 의미를 묻는 이유와 의미를 허탈하게 와해시키는 것.
따라서 국민체조는 체육적인 관점보다 예술적인 관점 아래에서 이해될 수 있다. 신체기능의 향상과 유지엔 다소 무심한 동작들을 국민체조가 아니면 듣지 않을 음악에 맞추어 수행하기 때문이다. 허공을 젓는 신체들의 집단적인 궤적은 전에 없이 새롭다. 그러나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은 의미보다는 피로를 주기 마련이다.
진실을 덮는 반복, 진실을 드러내는 반복
Q레이터에겐 경도 인지 장애가 있다. 국민체조를 시연하는 사람이 등장하는 화면이 필요한 이유인데 화면에서 국민체조를 추는 사람은 Q레이터다. 일반적인 시연 영상으로는 바로 따라 하기 어렵기 때문에 일반적인 국민체조 시연 영상을 보고 따라 하는 Q레이터의 영상이 재생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유니콘의 춤〉은 국민체조 시연 영상을 보고 따라 하는 Q레이터의 시연 영상을 보고 따라 하는 Q레이터의 퍼포먼스다. 이는 언뜻 플라톤의 『국가』에서 나오는 유명한 예술론을 떠올리게 한다. 최초의 영상을 국민체조의 이데아(만에 하나 그런 것이 있다면)라고 본다면 그것을 모방하는 Q레이터의 영상을 다시 모방하는 Q레이터의 퍼포먼스는 국민체조의 이데아로부터 두 단계나 멀리 떨어진 것이다.
국민체조가 행위의 반복을 강제하면서 피로와 허탈을 누적시키면서 거두는 효과는 진실의 은폐다. 국민체조 같은 건 안 해도 되고 안 하는 게 낫다는 진실이 하라니까 하면 그만이고 왜 해야 되는지 안 물어보는 게 낫다는 인식을 낳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으로 길들여진 학생들은 머리를 자르라면 자르고 교복을 입으라면 입으면서 그 이유에 대해선 딱히 따져보지 않게 된다. 딱히 따져보지 않는 성질을 수정할 기회를 좀처럼 가져보지 못한 채 성인이 돼버린 사람들은 국민체조의 이유와 의미가 거두는 결과이자 목적이며 즉, ‘국민체조’의 ‘국민’이다. 이러한 근대적 국가의 기획은 구태여 말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익숙하지만 동시에 그만큼 여전히 만연하게 느껴진다.
이러한 국민체조적 사실에 대한 익숙한 반응은 적극적인 거부일 것이다. 국민체조를 요구하면 운동장에서 저벅저벅 걸어 나가는 것이다. 붙잡으면 뿌리치고 달아나는 것이다. 혹은 그러한 요구가 부당함을 주장하고 알리는 것이다. 이와 같은 거부는 국민체조를 정지시키고 부수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Q레이터는 국민체조를 반복하고 있다. 그만해도 좋지 않겠냐고 묻고 싶을 정도로 느슨해지는 동작들이 동작들로부터 떨어져 나가고 있다. 국민체조로부터 돌아서는 게 아니라 국민체조로 끊임없이 다가가며 국민체조에 대한 앎을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발생시키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관객들이 경험하는 감각은 국민체조의 국민체조로부터의 이탈이다. 서너 차례 정도의 반복 수행은 Q레이터의 편마비와 경도 인지 장애의 몸이 보이는 선명하게 완전하지 않은 국민체조가 국민체조로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국민체조는 앞서 살펴보았듯 그 동작의 분명한 구현인 체육적인 목적보다는 그저 하면 된다는 사상적인 목적을 갖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서너 차례를 초과하면서 Q레이터의 수행은 국민체조를 국민체조로 보이지 않게 한다. 그때부터 국민체조는 비틀거리기도 하고 삐걱이기도 하는 몸이며 끙끙거리며 터져 나오는 날숨이다. 그때부터 국민체조나 그 음악은 아무래도 좋은 것으로 느껴지기 시작하며 어떤 단순한 행위의 무조건적인 반복의 의미를 묻게 되기 시작한다. 국민체조의 짧은 역사, 근대 국가의 슬픈 망령 같은 것은 Q레이터 뒤편의 어둠으로 물러난다. 어떤 관점, 장구한 시간과 아득한 공간을 동반하는 느낌 아래에선 모든 게 단순화된다. 이 모든 건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을 것들이 된다.
Q레이터의 국민체조 반복 또한 그러할 것이다. 그렇지만 같은 이유로 구원적인 의미가 형성된다. 국민체조 같은 건 안 하는 게 낫고 안 해도 되는 것이며 Q레이터야말로 국민체조 같은 건 안 해도 되는 사람이다. 특히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국민체조를 반복하면 절대 안 될 것 같은 사람이다. 그런 그가 국민체조로 스스로를 위협적으로 몰아붙이면서 중요한 진실을 일깨운다. 이를테면 시지프스가 바위를 산의 꼭대기로 올리고 올리는 일을 반복하는 일이 의미도 이유도 없는 고통의 공허한 반복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의미도 이유도 없는 일을 반복하면서 건너가는 것이 삶이라면 오히려 그러한 반복은 삶의 구원이 된다는 진실 같은 것을. 질주를 무한히 반복하는 말이 그 질주를 그저 질주로서 받아들일 때 뿔이 자라나기도 한다는 것을. 그쪽으로 달리라고. 내게서 뻗어나간 뾰족한 끝이 가리키는 그쪽을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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