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혁명을 위한 절대적 지도 제작 The absolute cartographical: 《그리니치 천문대를 공격하라》에 관한 노트

누가 믿을 것인가?
들리는 말에 의하면 모든 시계탑 밑에 서 있던 새로운 여호수아가
마치 시간이 못마땅하기라도 하듯이
시계판에 총을 쏘아 시간을 정지시켰다고 한다.
– 발터 벤야민

《그리니치 천문대를 공격하라》, 사가. 2021.

  전시장은 삼양로의 언덕 중턱에 있었다. 주의 깊은 누군가는 (혹은 주의 깊은 누군가만이), 유리 출입문에 붙인 검은 비닐(vinyl) 시트가 눈높이에서 원형으로 도려내졌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었다. 문을 열면 어두운 방 안에 앉아있던 가드이자 안내자이며 [내가 방문한 날엔 그랬는데] 전시를 기획한 이가 전시 서문과 작품 배치도를 건네줬다. 그가 전시에 관해 이야기했고 바깥 풍경이 입구의 ‘구멍’에 맺힌 시간으로 수렴되어 그의 우측 벽에 투영되었다. 좌측에는 ‘위장막’(camouflage)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위장막을 들추자 전시장이 드러났다. 전시장에는 천체를 수리(數理) 광학적으로 채집하는 연구소를 보여주는 영상이 맞은편 벽면에 재생되고, 바닥에 배치된 기계-장치들은 일종의 바리케이드가 되어 위장막과 스크린-벽 사이의 이동을 막아 관람자의 움직임을 수평축으로 제한하고 있었다. 움직임이 제한되어 시간이 유예되는 4㎡ 남짓의 전시공간에서 이는 전시장의 시공간을 재정의하기 위한 정초적 폭력으로 의도됐다고 느꼈다. 이윽고 입구의 유사 핀홀은 원형의(archetypical) 재현-장치, 카메라 옵스큐라로 밝혀지고 이 전시가 표상의 문제, 그러니까 인식(-판단-지식)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질 것임을, 암시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는 이를테면 이런 것이었다. 오늘날, 새로움이라는 가능성을 이끌던 미학적 행위는 시간은 탈각되고 장소만 남은 동시대라는 시간의 루프에 빠져 무한 반복되고 한때 불가분의 전체로 세계를 조형했던 미적 실천(들)은 찢기고 부서져 기각되고 그 잔해만이 소재로 남아서 오늘날, ‘무시간적’인 미술관의 영혼 없는 벽에 갇혀 주체의 변동성을 드러내지 못하는 비어있는 표면(screen)에 덩그러니 떠다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미술이 그때까지 꿈꿔온 총체적 의미가 한꺼번에 와해되어 무너져 내리고, 결국 그 같은 붕괴는 과거를 환기하는 시선의 환기나 미래를 수렴하는 전위나 (보들레르가 말했던) 영원과 찰나가 조합되는 동시대적인 조화 전체를 파괴하여 더는 예술이 차이를 생산해 내지 못하리라는 것이었다. 이 같은 비관의 증거가 동시대 우리에게 주어진 직관형식으로서 현대 시공간의 표상 체계이다. 그것이 전시가 공격하려는 상징으로서 그리니치 천문대이다. 그러니까 ‘그리니치’가 은유하는 것은 오늘날 시공간을 표상하는 절대 기준이자 미학적 인식 판단을 제어하는 추상이고 차이를 무화(無化)하는 선험적 개념으로서 ‘그리니치-스크린’이다. 그리니치-스크린은 그 표면에 ‘플랫’이라 부를 수 있는 효과/양태를 가진다. 깊이가 제거되고 네트워크를 통해 내재적 화면으로만 존재하는 그리니치-스크린이 바로 ‘플랫’인 것이다. 요컨대 이 같은 ‘플랫’의 조건에서 미술의 실천은 불모의 황폐한 대지가 되고 있다. 전시는 그 같은 인식에서 어떻게 미학적인 실천을, 그러니까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을 차이로서 새롭게 분기해 낼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탐색하려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전시의 기획자가 기획의 에세이에서 설명하는 것이 이런 것이었다. 요약하고 보니 어쩌면 너무 많은 것을 의식하는 이 전시의 텍스트를 내가 올바르게 읽었는지 자신할 수 없다. 이 전시에 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전시는 시청각 이미지의 나열이자 충돌이고 거기에서 종합적인 판단이 이뤄져야 할 것인데, 나는 이를 전시‘의’ 어휘로 말해야 할 것이다.

  어떤 면에서 전시는, 이제는 낡아 버린 음모론과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필립 K. 딕의 이미지 몽타주였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전시는 세 작가의 네 작품을 보여준다. 별자리(constellation)의 서사를 해체하는 천문대의 관측실을 보여주는 영상 작업(이의록), 그리니치 천문대 웹-주소의 건축적 그리드를 해킹하고 그 데이터를 해체하여 임의로 재구축한 디지털 이미지를 보여주는 모니터와 이를 그리니치 천문대의 DNA 노드로 전유한 입체설치 들(구자명), 행성의 운행을 추적하는 빛의 회절 현상이 은유하는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두 점의 설치물(조해나)을 전시한다. 그리고 이들을 접합하는 기획자(엄제현)의 군사학적 의미에서 배치-기술이 있다. 이 전시에서 (다소 논쟁적인) “작가-기획자”라는 역할을 의식하자면, 전시에 초청된 작업에 대해 내가 할 이야기는 별로 없다. 빼어난 개별 작업에 대해서라면 이미 기획자가 에세이를 통해 충분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밝히고 있듯이 이의록의 <Merry-Go-Round>는 귀납적인 사유로 신학적 빛의 묶음으로서의 별자리를 해체해버린 과학기술의 관측을 말하고, 조해나의 <Blue shift>와 <White hole>은 이에 화답하여 운동이미지에 감춰져 있는 가시적인 것의 구조로 정의되는 (즉, 가시적인 것 내부의) ‘어둠’을 다루고, 구자명의 <cd /웹사이트 구조의 편집과 활용/rmg.co.uk>는 대명사로서 ‘그리니치 천문대’라는 시간의 절대성을 분자 유닛으로 세속화하여 (혹은 뒤집힌 추상으로) 조형한 신(神) 크로노스를 보여준다. 전시는 이 같은 인식의 분열을 노출하는 미술 실천들의 나열을 (‘천궁도’의 짝패로서) ‘지궁도’라고 부른다. 지궁도는 작도법으로 “당대의 허수적 공간 자체를 유영하면서, 이를 표상할” 지도를 제작하는 배치의 실천을 지시한다. 그것은 차이를 발화(articulation)하는 예술적 실천이며, 예술품(a work of art)이고 (art의 어원으로서) 기술이기도 하다. 전시에서 그 같은 기획자의 기술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달리 말하면, 그리니치-스크린을 습격하는 미학적 해킹의 실천으로 전시는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전시의 오브제들은 결국 거짓-인식에 대항하는 보루로서 바리케이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위장되어 있으며 유예하는 시공간을 구성한 이 전시는 비밀스러운 임무에 관한 것인가. 아마 그럴 것이다. 이 전시는 포스트-파르티잔으로서 게릴라전을, 혹은 이제는 거의 잊힌 채 아무런 말의 힘도 지니지 못한 ‘혁명’이라 불리는 실천을 꿈꾼다는 점에서 그럴 것이다. 혁명의 날에 시계가 멈췄다는 유명한 일화를 떠올려 보자니 그렇다. 그런 점에서 전시에서 혁명을 연극화하는 이미지가 맴돈다고 느낀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닐 것이다. 사실 전시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이 이미지들의 충돌로 전시가 폭력의 서사를 일궈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처음, 그 같은 폭력의 서사를 전시에 부여하게 된 것이 순전히 ‘공격하라’는 제목 탓이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실제로 전시에는 공간과 시간을 적대하는 이미지가 포탄의 파편처럼 여기저기 폭발했다. 진지전의 위장막과 정세나 지형을 살피는 정찰자의 이미지, 경고하는 비프 소리의 삽입이 그렇다. 인식과 판단을 위한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접경’에서도, 형식으로서의 경험과 추상의 ‘충돌’에서도, 지각의 ‘부분적 혹은 조직적 종합’의 세계에서도, 그것은 암시되고 있었다. 그 같은 전술적 이미지는 얼마든지 소환할 수 있다. ‘잠복’해 있는 주체로서 사유를 요청하는 내적 구조에도 폭력의 분위기가 암시된다. 작품-이미지들과 이것들의 상대적 나열에서 폭력은 전시장의 공간적 은유로 작동하고 있다.

《그리니치 천문대를 공격하라》 전시 전경. 촬영:이의록

  상징물이자 표상 체계 그리니치-스크린을 공격하는 전시는, ‘동시대’라는 개념을 물화하는 추상의 미학적 형식을 다루고 있다. 혹은 동시대 경험의 문제를 다룬다고 해도 상관없다. 전시를 보며 든 생각은 이렇다. 오늘날 미술의 공간은 ‘역사의 시간’에서 ‘공간의 시간’으로 이동하면서 광범위하게 변형되었고 동시대 미술의 위상(topology)으로는 더 이상 ‘시간’을 똑바로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역사적이며 미학적인 실천(들)으로서 비균질적이고 비선형적인 현재/현시(present)의 입체물(들)을, 시간의 절대적 흐름이자 틈으로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미술의 급진성(radicalness)은 어디에 있는가. 지궁도라는 절대적 지도 제작의 실천이 말하는 것일 것은 보지 못하는 ‘무능한 시각’(sightless vision)을 비판하고 오히려 새로운 시간성을 뚫어내는 비판이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의 결론 부분을 “재현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한다. 이때 들뢰즈가 의도하는 비판은, “어떤 것도 빠져나갈 수 없지만 동시에 이 비판이 수행해야 하는 비재현적인 사유라는 또 다른 차원을 드러내는 것이고, 이로써 비판 대상의 잔해 속에서 (차이를, 반복하면서) 비판으로 약화되거나 새롭게 드러나는 사유의 ‘발생’을 논증하는 것”이다. 《그리니치 천문대를 공격하라》는, 그 같은 전시의 장르가 있다면, 혁명을 꿈꾸는 진지전의 외양으로 추인되는 오디오-비주얼 크리틱이다. 전시에서 기획자의 몫은 작업이자 작품으로서 물리적인 문자에 있다. 그 점에서 우리는 기획자가 붙인 전시의 제목, “그리니치 천문대를 공격하라”를 하나의 작업 명제로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기획자의 몫은 혁명적 태도를 구상한 형식으로의 반미학적 실천이었던 셈이다.

  전시가 낙관하듯이, 지궁도라는 지도 제작의 실천으로 세계를 종합하여 판단할 수 있다 하더라도, 혁명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질문에 나는 대답하지 못하겠다. 나 또한 이 전시로 추인하여 시도해볼 만한 전략도 묘법도 없다. 가능한 것은 인식의 분리와 조직과 종합과 생산을 새롭게 다룰 수 있는, 폴 비릴리오의 어휘를 빌리자면 ‘속도’를 조정하는 것이다. 또 다른 가능한 것은, 알튀세르의 어휘로 ‘과잉 결정’을 이루는 인식의 모순 조건들을 비평의 실천으로 쉼 없이 발화하여 연속적으로 폭파하는 행위의 장을 펼치는 것이다. 이미 전시는 동시대와 동기화한 시공간을 개별적으로 탈락시켜, 그것의 중층적 결정을 가시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로써 혁명은 발기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전시의 미덕은 제목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파르티잔의 전술을 암시한다. 제목에서 감지할 수 있는 전시가 취했을 전략은 ‘〇〇를 폭파하라’라는 혁명을 완수하기 위한 일련의 ‘국지적이며 연속적인’ 비판일 것이다. 나는 이번 전시가 모순을 나열한 이후 이뤄질 n번째 비판 실천을 예고하고 있다고 느꼈다. 따라서 현상을 드러내는 방식에 이은, 오늘날의 인식의 모순된 결정(結晶)을 나열하여 폭파하려는 지속적인 복수(複數)의 실천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그 점에서 이번 전시는 수행문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미술의 실천은 멈춰 있는 시간으로, 비어있는 시간으로 도래할 것으로 지속하여야 한다. 전시가 말하는 것은, 결국 나의 어휘에 따르면 햄릿의 시간(time out of joint)과 (종교성 없는) 메시아가 들어올 수 있는 틈으로서 빗금의 실천이라고 생각했다.

  《그리니치를 공격하라》의 반미학적 실천은 모더니즘의 실천을 연장하고 있다. 그것은 표상의 질서를 와해시키는 비판으로, 새로운 시작을 암시한다. 그리고 그리니치를 파괴한 그다음 날,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회복하려 할 때 요청하는 것 또한 예술이라는 이름의 실천일 것이다. 혁명은 공허한 시간을 “폭파하여 그로부터 하나의 특정한 시대를 끄집어” 내는 것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예술이 대중을 혁명에 동기화할 수 있겠는가. (기획자 텍스트의 부제가 일러주듯이) “예술이 한발 앞설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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