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통념과는 반대로, <자본>에서 전개되는 마르크스의 분석은 상품을 출발점으로 삼지 않으며, 부(富)를 출발점으로 한다. 이 사실은 상당한 이론적, 정치적 함의를 품고 있다.
키워드
<자본>-부-상품-현상형태/가상(假像)[1]-혁명
자본가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부(富)는 ‘상품의 방대한 집적(集積)으로 나타나며,
개개의 상품은 이러한 부의 기본형태로 나타난다.[2]
[The wealth of those societies in which the capitalist mode of production prevails, presents itself as an
‘immense accumulation of commodities’, its unit being a single commodity]
: 새뮤얼 무어와 에드워드 에블링의 영문 번역문. 감수자 프리드리히 엥겔스.[3]
The wealth of societies in which the capitalist mode of production prevails appears as an
‘immense collection of commodities’; the individual commodity appears as its elementary form.
-벤 포크스 번역본[4]
Der Reichtum der Gesellschaften, in welchenkapitalistischeProduktionsweiseherrscht, erscheintalseine ‘ungeheureWarensammlung’, die einzelne Ware als seine Elementarform.[5]
서론
<자본>에 대한 수많은 논의를 찾아봐도 책의 첫 번째 문장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마르크스가 전개한 논의의 출발점은 상품이라는 주장이 널리 퍼져있다. 그러한 견해를 따르면 사실 이 첫 문장은 그 자체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취급되어 단지 <자본>의 개막식에 불과한 것이 된다. 더 나아가서 상품에 대한 분석이라는 중요한 주제로 넘어가는 도입부 역할을 할 뿐이다. 그러나 이 첫 문장을 독해해 보면 마르크스의 논의의 출발점은 상품이 아니라는 점과 상품을 언급하기도 전에 근본적인 정치적·이론적 의미를 품고 있는 오만가지 쟁점을 제기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본고에서는 첫 문장의 주어, 목적어, 서술어를 탐구함으로써 이러한 쟁점들을 다룰 것이다. 본고의 목적은 ‘진정한 마르크스’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분석해 오늘날의 반자본주의 투쟁에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주어
[일단, <자본>에 나오는] 첫 번째 문장의 주어에 해당하는 말은 상품이 아닌 ‘부(wealth; 富)’이다. 덧붙여진 수식어구qualifying phrase의 묘사는 [주어가 가리키는 바를] “자본가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부라고 덧붙이고 있다. 바로 그러한 [성격을 띠는] 경우에 한정해서만 부가 “상품의 방대한 집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인데, 우선 이러한 내용보다는 문장의 주어 자체에 해당하는 ‘부’에 대해서 주목해 보자. 혹은 보다 분명하게 말해서 ‘자본가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부’에 대해 생각해 보자. 마르크스가 ‘부’라는 명사로 뜻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 해당 어휘가 덧붙여진 수식어구와 맺는 관계는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가?
<자본>의 첫 번째 문장이 지닌 중요성을 간과하기 쉬운 이유는 바로 이 문장이 서술하는 내용 그 자체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부가 상품의 집적으로 나타난다는 바로 그 사실이 부가 그러한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을 당연시하게 한다. 우리는 이러한 방식으로 부를 이해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다. 부에 대해 생각할 때 사람들은 흔히 물질적 부, 개인이 소유한 것들, 그리고 대개는 상품의 일반적인 등가물인 돈 따위를 떠올리곤 할 것이다. 누군가가 부를 지녔다고 할 때, 일반적으로는 그 사람이 돈을 많이 가져서 방대한 양의 상품을 소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부가 나타나는 형태로 인해 사람들은 부와 상품의 방대한 집적을 연관 짓고, 동일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의 첫 문장을 핵심쟁점인 상품에 대한 논의로 이어지는 문장으로서, 서막 구실을 하는 문장으로서 여겨야 할 테다.
그러나 부에 대해 꼭 이렇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영어권 독자들은 아마도 마르크스가 본래 쓴 용어를 되짚어보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텐데, [부wealth로 번역된] 독일어Reichtum’은 풍요(내지는 풍부함_Richness’로도 무리 없이 옮겨질 수 있었을 법한 단어다.[6]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풍요가 상품의 방대한 집적으로 나타난다는 식으로 말이다. 영어에서 풍요와 부라는 두 개념 간에 큰 차이가 있지는 않지만, 풍요 등이 더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처럼 느껴진다. 풍성히 새겨진 자수arich tapestry, 풍부한 대화an enriching conversation, 풍요로운 삶 혹은 풍부한 경험a rich life or experience, 풍부한 색조arich diversity of colours 따위의 예시를 떠올려보라.
<자본>의 첫 문장은 ‘자본가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부’를 논함으로써 자본주의가 지배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풍요로움(혹은 부)가 어떤 모습을 보일지에 대해 독자들이 물음을 제기할 계기를 제공한다. 그보다 조금 일찍 쓰인 <그룬트리세>에서 마르크스는 해당 쟁점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을 제시한다.
그러나 사실 편협한 부르주아적 형태가 탈피된다면, 부란 보편적 교환에 의해 산출된 개인들(Individuen; human)의 욕구, 능력, 향유, 생산력 등의 보편성이 아니고 무엇인가? 자연력, 소위 자연의 힘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본성(Natur; Nature)의 힘에 대한 지배의 완전한 발전? 발전, 즉 사전에 주어진 척도에 따라 측정되지 않는 모든 인간적 힘 자체의 발전의 이러한 총체성을 자기 목적으로 삼는 지나간 역사적 발전 이외의 다른 전제는 없이 그의 창조적 소질의 절대적 성취? 그가 한 규정성에서 재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총체성을 생산하는 곳? 어떤 형성된 것으로 머무르고자 하지 않고 형성의 절대적 운동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부르주아 경제학에서는 -그리고 그에 조응하는 생산 시기에는- 인간 내부의 이러한 완전한 성취가 완전한 방기(放棄; Entleerung)로 현상하고, 이러한 보편적인 대상화는 총체적 소외로서, 모든 일정한 일방적 목적들의 철거는 전적으로 외적인 목적에 대한 자기 목적의 희생으로 나타난다. [김호균 역. 2000,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II>. 백의, p. 112-113][7]
<그룬트리세>에 나온 부에 대한 설명을 읽어보면[8] <자본>의 첫 문장은 훨씬 명료한 색채를 지니게 된다. 부란 ‘보편적 교환에 의해 산출된 개인들의 욕구, 능력, 향유, 생산력 등의 보편성’이다.[9] 이는 집합적이고, 사회적이며, 인간 교류의 산물이다. 요컨대 ‘공통의 것the common’으로 일컬어지는 대상의 풍부함인 것이다.[10] 부는 운동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인간의 ‘창조적 소질의 절대적 성취’, ‘형성의 절대적 운동 속에 있’다. 그것은 다양성을 내포한 개념으로, ‘자기 목적으로 삼는’ ‘모든 인간적 힘 자체의 발전’인 것이다. 다양한 전통과 삶의 방식들로 채워진 거리가 지닌 풍부함, 시골에서 계절이 변할 때의 풍부함, 인간이나 새가 노래하는 소리에 깃든 풍부함과 같은 그런 풍부함 말이다.‘풍부함’은 잠재적으로 끝없이 풍요한 것이지만, 현재 사회에서는 상품의 방대한 집적으로 나타난다는 말이다.[11] <자본>의 첫 문장을 단순한 서막으로 볼 수는 없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긴장으로 가득한 세상에 대한 논의를 제기한다. 그는 망가진 존엄성을 상기시키고, 우리를 분개하도록 한다.
이러한 긴장은 주어부와 서술부(부와 상품)의 관계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부’라는 첫 문장의 주어부터가 이미 긴장을 내포하고 있다. 수식어구인 ‘자본가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의’라는 구절과 ‘부’라는 명사 사이에 이미 긴장이 존재한다. 이 논문의 원고에 대한 익명의 심사위원 논평 중에는 “<자본>의 첫 문장에서 주어부는 …‘부’라는 명사 자체가 아닌 ‘자본주가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부’라는 긴 명사구 전체라고 지적하는 경우도 있었다.[12] 그러나 명사와 수식어구를 하나의 단위로 볼 경우, 이 어휘들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관계와 그러한 긴장 속에서 강조되고 있는 해방적 의도를 파악할 수 없게 된다. ‘부’와 수식어구(자본가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의)는 강렬하고 동태적인 관계 속에 놓여있다. ‘부’와 수식어구에 유심히 집중함으로써, 우리는 자본가적 사회 속에서만 부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에 반하여 그리고 자본주의를 넘어서서도 존재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항등식 관계와 같은 것이 아니란 것이다. 부는 자본가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들에 국한되지 않고, 그로부터 넘쳐흐른다. 언뜻 사소해 보이는 이 논점은 <자본>과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에 맞섬에 있어서 어떠한 의의를 가지는지를 이해하는 데에 대단히 핵심적이다.
또 다른 익명의 심사자가 남긴 다음 논평을 보면 이 함의는 더욱 분명해진다. ‘<그룬트리세>에서 언급된 부에 관한 인상 깊은 구절 속에서 명료히 드러나지 않은 점은, 부르주아적 형태를 띠는 부를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그것을 새로운 사회적 목적성을 지닌 사회적 형태를 띠는 부로 대체하는 방법뿐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모든 인간적 힘 자체의 발전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다”는 목적성 따위 말이다. <그룬트리세>의 인용구는 “부”에 관한 것이 아니며, 이는 해당 문구의 설명에서도 드러난다. 정확히는 해방적이고, 탈자본주의적이며, 사회적인, 아직 명명되지 않은 부의 형태에 관한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는 잘못된 견해이다. 그보다 해당 인용구는 지금 여기에서, 현존하는 ‘상품의 방대한 집적으로 존재하며 이와 대립하고 이를 넘어서려고 하는, 아직 명명되지 않은 해방적인 부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는 편이 더 옳다고 생각된다. 부와 그 수식어구 사이의 관계는 오늘날 투쟁 속에 존재하는 대상인 것이다. 마르크스가 <그룬트리세>에서 논하고 있는 해방적인 부를 자본주의를 벗어난 미래의 영역으로 치부하는 것은 공산주의의 영역을 혁명이 이뤄진 이후로만 두는 것과 다름없는 것으로, 공산주의 지향적 공유화(communizing)가 현재의 분노와 격렬한 투쟁 속에 존재한다는 이해와 상충된다. 그리고 이는 결과적으로 공산주의 지향적 공유화의 실천을 혁명을 후일로 미루면서 인간을 정당의 손아귀에 남겨둔다. 이러한 형태의 투쟁은 과거에 비참하게도 실패한 바 있다.
‘자본가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부’로서 존재하는 오늘날의 부는 초역사적인 부의 형태가 아니다. 해당 문장의 주어는 역사적 구체성을 지니는데, 이는 자신의 역사적 특정성을 지양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이는 우리 자신이 그러하듯 당면한 역사적 상황에 맞서는 투쟁으로서 존재한다. 이러한 형태의 투쟁이 바로 마르크스가 <자본>의 서두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인간(자기형성becoming의 절대적 운동 속에 놓인 인류)의 풍부함이 그것을 구속하는 족쇄들에 대항하고 극복해 나가려는 움직임에 관한 것이다. 책의 도입부부터 마르크스는 이 책이 지배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 지배(를 비롯한 모든 구속)에 대항하는 저항에 관한 이론을 다루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인간에 깃든 창조성의 풍부함을 뜻하는 부는, 그리하여 주어로, 그것도 거침없고 끈질긴 주어로, 거듭난다. 자부심 넘치는 주어이자 <자본>첫 장의 첫 말들인 부는 종횡무진 호령한다. 필시 분노에 가득 찬 채로, 어쩌면 힘을 지닌 채로 말이다. 이 지점은 풍부함이 아닌 빈곤함을 출발지점으로 삼는 대부분의 좌익 사상에 대한 반전요소다. <자본>의 첫 문장은 다른 방식으로 사고할 여지를 남긴다. 인류는 빈곤하기 때문에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풍부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투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류가 자본주의에 맞서 투쟁하는 것은 인류가 가난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류의]창조적 소질의 절대적 성취’가 좌절되기 때문에 반자본주의 투쟁을 벌이는 것이고 ‘[인류의]절대적 형성 운동’이 개시됐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인류가 지닌 풍부함이 반기를 들고 족쇄들을 부수겠다고 포효하고 있는 것이다.
술부
부와 풍요로움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방대한 상품들의 집적’으로 나타난다. 마르크스가 둘째 문단에서 말하듯 상품이란 ‘우선은 우리의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체이며, 인간의 특정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특성을 지닌 사물’이다.[13] 상품은 판매를 위해 생산된,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이다.
마르크스는 지하감옥의 좁은 통로로 독자들을 인도한다. (절대적인 형성의 운동 속에 있는 인류가 살고 있는)풍부함의 세계를 묘사한 첫 번째 문장에서 방대한 사물들의 집적에 관한 이야기로 극적인 전환이 펼쳐진다. 마르크스는 우리를 정치경제의 끔찍한 세상으로 데려가고 있다. 극적으로 우리는 그의 저서의 부제목이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점을 되새기게 된다. <자본>의 첫 문장의 주어부와 술부 사이의 긴장감은 이 비판의 근간을 이룬다. 우리가 부에서 상품으로 이어지는 가혹한 길을 지나친 후에, 마르크스는 두 번째 문장에서 비로소 ‘우리의 탐구는 상품에 대한 분석으로 시작한다.’[14]는 말을 꺼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품이 마르크스의 분석의 출발점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상품의 세계에 대항하여 그리고 이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부유함을 뜻하는 부야 말로 여전히 그의 논의의 출발점이다. 비좁고 어두운 정치경제학의 세계를 지난 후에 비로소 상품은 논의의 출발점이 된다. 우리가 외부세계 즉 풍부함의 세계를 잊는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 비판과 적대, 그리고 진정한 출발점에 대해서 잊게 될 것이다.
첫 번째 문장에서 보이는 길은 풍요의 세계를 정치경제학의 세계로 축소∙환원시킨다. 삶의 풍부함과 억압의 형태가 지닌 복합성을 무시했다는 것이었다는 점을 들어 흔히들 마르크스가 바로 세상을 협소한 경제주의적 세계관인 정치경제학적 환원의 주범이라고 비난한다. 첫 번째 문장을 보면 이러한 견해가 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다른 경제학자들에 대한 비판적 논의에 머무르지 않으며, 되려 그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겨냥하는 대상은 인간이 지닌 풍부함을 상품의 영역으로 환원하는 세계에 대한, 경제적인 것에 대한 비판에 가깝다. 이것은 앞서 말한 <그룬트리세>의 인용문 마지막 부분에서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부르주아 경제학에서는 (그리고 그에 조응하는 생산 시기에는)인간 내부의 이러한 완전한 성취가 완전한 방기로 현상하고, 이러한 보편적인 대상화는 총체적 소외로써, 모든 일정한 일방적 목적들의 철거는 전적으로 외적인 목적에 대한 자기 목적의 희생으로 나타난다.’ 상품의 논리에 들어맞지 않는 모든 것을 축출하여 경제적인 영역으로 이 세계를 환원시켜 버린 주범은 마르크스가 아닌 것이다.
부가 상품으로 변해버린 것은 법칙에 종속된 세계, 사회적으로 촘촘히 응집된 세계, 총체로서 이해할 수 있는 세계, 종합의 세계로의 이행에 다름 아니다. 부의 생산이 어떠한 정해진 법칙을 따라야 한다는 본질적인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창조적 소질이 절대적으로 성취된 이후에는 여러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는 바, 각자 다른 방향성과 리듬을 가지고서 이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상품은 그렇지 않다. 상품은 교환을 위해 생산되며, 교환의 필요성으로 인해이 상품들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으로 생산될 필요가 생겨버리고, 그리하여 기능적 필요성에 의해서 굴러가는 세상, 사회적 결정이 의식적 통제로부터 벗어나 법칙처럼 작용하게 된 세상이 탄생하게 된다.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바로 이러한 ‘법칙’들을 검토하고 있지만 이는 다름 아니라, ‘법칙에 종속된 총체성’을 조망함에 있어서 그것에 대항하는 관점이자 그를 넘어선 관점을 취하면서 이뤄지고 있다.
부에서 상품으로의 이행은 수량화가 가능하고 또 수량화된 세상으로의 이행이다. <자본>첫 문장의 술부에 살짝 덧붙여진 ‘개개의 상품이 부의 기본 단위’라는 말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이와 달리 벤 포크스 번역판에서는 ‘개개의 상품이 부의 기본 형태’라는 번역을 채택했다)[15] ‘인간의 창조성에 대한 절대적 성취’가 바로 부라고 생각한다면, 그러한 부가 개개의 단위나 별개의 파편들로 분할 돼 버리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부가 외부 사물들의 집적으로 환원될 때, 부란 그렇게 재분할되는 것일 따름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외려, 단지 말할 수 있게 되는 수준을 넘어서게 되고, 부가 상호 교환가능한 개별 상품의 단위들로 재분할되는 상황에서는 해당 문장의 주어에서 서술부로 넘어가는 맥락에서 필수적인 부분이 돼 버린다.[16]
동사
부는 방대한 상품의 집적으로 나타난다.[17] 부가 어떤 것’으로 나타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1.
‘나타난다'(appearance)는 것은 허구적인 가상(false appearance; 假像)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부는 방대한 상품의 집적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보는 것은 오류이며 사실은 다른 대상을 가리킨다”고 말하지 않는다.[18] 그러한 해석은 현상형태를 그 토대에 있는, 그렇게 나타나는 대상과 분리시키는 결론으로 이어질 것이다. 또한 후자와 전자의 관계를 단지 우연한 것으로 다루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현상형태는 실재로 현상하는 형태를 가리키는 것이며, 보편적인 정당성과 확고한 안정성을 지녔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우리가 오류라고 지적한다고 해서 단번에 그러한 현상형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현상형태는 ‘자본가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에 의해 빚어진 것이다.[19] 우리는 이러한 현상형태의 안정성 내지 실질성을 지시하기 위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부는 방대한 상품의 집적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이 맥락에서 ‘형태’는 ‘존재 양식’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20] 요컨대, 자본가적 사회에서 부의 존재 양식은 방대한 상품의 집적이다.
2.
그러므로 현상형태는 그와 같은 보편적 정당성을 지니고 있다. 마르크스가 말한 바가 ‘이러한 사회의 부가 애덤 스미스나데이비드 리카도에게는 방대한 상품의 직접으로 보였다’는 뜻은 아니다. 또한 ‘부는 부르주아지에게 방대한 상품들로 보이지만,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그렇지 않다’[21]고 말하는 것도 아니며, ‘부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의해 방대한 상품의 직접으로 나타난다’고 말하고 있지도 않다. 오히려 자본가적 사회에서 부는 상품의 형태로 나타난다든가 그러한 형태로 존재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소속된 사람들에게 부가 그러한 식으로 보이는 까닭은 부가 그러한 현상형태를 지녔고 그러한 방식으로 존재하며, 실제로 그러한 현상형태를 지녔고, 실제로 방대한 상품의 집적이라는 양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현실 속에서 부가 일반적으로 그와 같이 취급되며 이는 곧 부가 생산되는 양태와 방식을 좌우하는 동력이기도 하다. 전술한 바와 같이, 해당 문장이 지닌 의의가 저평가된 이유를 이해함에 있어서 현실적 현상형태의 동력은 매우 핵심적인 요인으로 추정된다.
3.
이는 <자본>을 이해하는 데에의 독해와 관련해서 핵심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만약 부가 그러한 방식으로 나타난다면, 마르크스가 이런 문장을 쓰는 것은 도대체 어찌 가능했던 것일까? 마르크스가 그러한 현상형태를 초월하[여 사태를 보]지 못했다면 이러한 문장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어떻게 이를 설명할 것인가?
가장 명료한 설명방식은 개인적 차원의 설명일 것이다. 마르크스는 매우 똑똑한 사람이었고, 그의 통찰을 공유하는 우리들도 매우 똑똑하다는 점으로 인해 우리 모두가 이러한 현상형태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러한 설명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로 이는 마르크스 자신의 방법과 어긋난다. 해당 실재적 현상형태는 실재하는 토대에, 달리 말해한 현시대에 인간활동이 조직되는 구조에 근간을 두고 있다. 예컨대 스미스와 리카도의 학설이 여러 한계를 지닌 까닭은 그들의 실수나 지능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 이들의 발치와 머리가 자본주의의 사회적 관계 내부에 놓여있었다는 점에 기인한다. 단지 부르주아지의 편에 서기로 선택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소속된 사회적 관계들로 인해 이들의 학설이 제기될 수 있었던 동시에 그 한계 또한 지어질 수밖에 없던 것이다. 두 번째 문제점은 부가 단지 상품이 아니라 그 이상을 의미한다는 점을 이해하는 사람들과 현상형태의 세계에 옭매인 대중 간의 개인적인 분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한 경우, 대중을 계몽하는(혹은 의식화하는) 것이 계몽된 소수의 의무가 된다. 이러한 개념이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은 지난 세기의 경험을 통해 이미 드러난 바 있다.
마르크스가 이 문장을 쓴 것과 우리가 이 문장을 공유하게 된 것은 단지 똑똑함 따위의 개인적 차원의 설명요인 이상의 인자가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가 현상형태를 초월해서 보고, (첫 번째 문장에서 그렇듯이) 그것을 뛰어넘고서 자신의 입장을 전개한 것을 보면, 분명히 현상형태를 초월하여 그와 상충하고 그 외양에 갇혀 있지도 않은 대상 즉 비현상형태 또한 존재할 것이다. 마르크스가의 사유 속에서 이러한 현상형태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실천적인 현상형태의 파괴가 있었을 것이다. 이 실재하는 비현상형태가 바로 ‘부가 상품으로 나타난다’고 말할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해 준다. 이러한 주장을 펼칠 때 우리는 동시에 이렇게 말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진상의 일부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며, 이러한 주장은 오직 부가 상품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는, 즉 부는 상품에 대항하고 초월하여서도 존재한다는 사실로 인해 가능해진다.’ 현실에 드러나는 현상형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여러 실체를 가리는데, 달리 말해 보이지 않거나 잠복된 토대와 그 실존 등에 대한 파악을 방해한다. 그런데 이들은 <자본>의 첫 문장을 해독∙파악하는 데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따라서, 해당 문장의 내용 중 절반 가량은 투명 잉크로 쓰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품이라는 부의 현상형태에 넘어가지 않는 이러한 세상이야말로 <자본>의 독자들이 머무르고 또 머무르기를 원하는 곳이다. 우리가 부에서 상품들을 향해 이동된 것movement에 대해 사물들의 지하감옥으로 옮겨지는 것transition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본다면, <자본>의 독자인 우리들은 바닥에서 발을 떼지 않으려고 안감힘을 써가며 그 지하실에 수감될 수는 없다고, 우리를 통째로 집어삼킬 위협이 가해지는 현상형태의 나락으로 내던져지고 싶지 않다고 절규해대고 있을 텐데, 그러한 우리의 입장은 부가 놓였던 처지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두말할 나위 없다. [우리가 그런 입장에 놓여있을 사람이 아니라면]<자본>을 읽을 이유가 달리 있었겠는가?
이런 문장을 도대체 어떻게 지을 수 있었을 지에 대한 물음(그리고 어찌 이것이 무시될 수 있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서 물음)을 던져본다면, 그때부터 <자본>의 모든 내용이 달리 보이게 될 것이다. 서술 대상들을 서로 잘 맞물려 조화를 이루는 총체로서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설명하던 것처럼 보이던 내용을 이제는 그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불화를 다룬 것으로 읽히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독자로서 <자본>을 즐거이 읽혔던 이유도 깨닫게 될 것이다. 다름 아니라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체제 속에서도 그에 충돌하며 구속되지 않는 삶을 영유하는, 반골이기 때문이다.
4.
이러한 첫 문장을 쓸 수 있었던 이유는 부와 상품이 항등식 관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둘 사이의 관계는 비정태적이며, 부는 상품을 넘어서서 존재한다. 부는 상품에 넘침 없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이런 넘침이 <자본>의 첫 문장을 쓸 (읽을)수 있게 해 주는 요인이다.
마르크스는 ‘나타난다’는 표현을 (종종 그리 쓰이듯이) 느슨하게 ‘항등관계’를 지칭하기 위해 쓴 것 아니다. 즉, “자본가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부는 ‘상품의 방대한 집적’과 동일한 의미다.”라는 의도로 이런 어휘를 쓴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 동사를 통해 모종의 ‘동일성을 향한 운동’을 지칭하고자 하는 것 또한 분명하다. 현존하는 사회에서의 부는 상품의 집적과 동일성을 지닌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동일성을 향하는 과정은 분명 존재하나, 반작용 즉 저항에 맞부딪히기 때문에 그 과정이 완수되지는 못한다. 달리 말해, 현상형태와 비현상형태 사이에는 적대적 성격의 관계가 존재한다. 부를 상품의 형태로 이끌어내려는 것과 상품화의 과정에 저항하고 이를 초월하려는 두 힘 사이에는 치열한 적대 관계가 존재한다. 부가 상품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의 과정은 한 편으로는 형성, 동일화, 상품 물신화의 과정이다.[22] 반면에 동일화에 반하기도 하는, 탈물신화, 탈억제화, 부조화의 과정 또한 병존한다. 상품이라는 현상형태 그 자체는 비적대적으로 보이지만, 이는 그 근저에 존재하는 적대 관계를 숨기는 것이다. 이들 사회의 부는 방대한 상품의 집적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능동적으로 현상형태를 나타내고 형성 내지는 동일성을 향한 과정을 수행하며 그를 통해 <자본>의 첫 문장의 근간이 되는 적대적 동력을 숨기는데, 이러한 점을 보아 부는 단지 상품으로 나타날 뿐 아니라 여기에 구속되기만 하지는 않는다는 점 또한 사실임을 알 수 있다.
기정사실fait accompli처럼 보이는 바(부가 상품형태로 실존하는 것)는 치열하게 살아있는 적대관계이다. 주어부에서 서술부로 문장이 진행되는 과정을 부가 상품의 지하감옥으로 이송되는 과정과 같다고 여긴다면, 부가 상품형태에 의해 온전히 억제되지 않고 넘친다는 사실은 이 감옥문이 완전히 잠긴 것도 아니고, 이송이 완료된 것도 아니란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상품형태는 안정적으로 성립된 사실이기보다는 그 토대인 부에 대해 지속적인 공세를 가하면서, 꾸준히 이 부를 강제로 상품형태 내부로 감금하기 위해서 애쓰고 있지만, 이 공세는 꾸준한 저항과 반작용에 직면하는데, 인간의 부-창출이 이러한 억제에 대항하고 다른 형태의 사회화를 향해 나아가기 때문이다.[23] 이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부’와 ‘상품’을 명사보다는 동사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현실 속의 상품은 상품화의 운동이며 부는 부-창출 혹은 풍부화의 운동이며, 상품형태에 맞서고 뛰어넘으려고 하는 것이자, 공유화의 운동(communiszing)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이 문장이 시작 부분에서 끝부분으로 전환하는 과정은 능동적인 풍요화(‘모든 창조적 소질의 실현’)가 (‘상품’이라는) 하나의 명사로 전환하는 과정이며, 이는 여기에 제약된 풍요화 과정과 더불어 상품화 과정 그 자체의 동학 또한 나타낸다. ‘나타난다’는 표현 속에 제기된 현상형태의 문제는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나타난다’는 말은 희망의 공간을 열어젖힌다. 우리는 부를 상품 내지는 상품의 일반적 등가물인 화폐로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하지만 <자본>의 첫 문장에서는 이것이 단지 현상형태이며 진실된 것이기도 하지만 허황된 것이기도 함을 지적하고 있으며, 이는 부라는 것은 단지 상품에 국한되지 않으며 바로 이러한 형태를 넘어서려는 부 또한 존재한다는 뜻이다. 만일 상품으로써 부의 존재가 소외된 심급 속의 세계 즉 상품의 가치가 인간 능력의 풍부함 여하를 좌우하는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나타난다’는 단순한 말은 독자로 하여금 자기결정권을 추구하는 저항의 현존성(첫 문장을 쓸 수 있는 전제조건)에 대해 주목하게 한다.
<자본>의 서두에서는 위기의 문제가 제기된다. ‘나타난다’는 말은 끔찍하게도 상품형태로 실존하는 부가 (적어도 필연적으로)영구적이지는 않다는 점을 뜻한다. 부가 존재하는 형태에는 비영구성 내지는 불안정성이 있다. 700페이지 뒤에 가서야 다뤄지는 자본주의 종말의 전조[24]가 이 문장에서 이미 암시되고 있는 것이다. 자본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나타난다’는 말은 [부가 상품의 형태를 보이는 것이 단지 그렇게 ‘나타날’ 뿐이란 말은]섬찟한 문구다. 자본가라면 다음과 같이 절규할 노릇이다. “그러한 형태로 ‘나타난다’니 무슨 소리인가? 부란 화폐와 상품에 다름이 아니며, 오로지 그뿐일 따름이다.” 부의 현상형태인 상품형태에 위협이 되는 존재가 자본가의 인지 또는 통제의 범위 밖에 존재한다는 말이다.
자본가의 통제 밖에 놓인 것은 현재 풍부함의 ‘현상형태’와는 다른 풍부함으로 이는 잠복상태에 있으며, 상품형태의 현상형태를 취하거나 이에 넘어가지도 여기에 온전히 제약되지도 않는다. 이는 위협으로 작용한다. 분명 <자본>의 첫 문장에서 온전히 전개된 위기이론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시사하기는 한다. 바로 위기의 발생경향은 드러나지 않고 있는 무언가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우리는 현상형태라는 말을 꺼냄으로써 다른 시선에서 사태를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인간이 지닌 창조적 소질의 풍부함을 뜻하는 부 자체는 그것을 제약하는 형식에 위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구속을 넘어서고 거부하며 여기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부는 지금과는 다른 사회적 협업의 양식 즉 생산자들의 자유로운 연합을 향해 나아간다.[25]
위기가 외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부가 상품으로 변형되는 과정의 위기가 존재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부는 이제 방대한 상품의 집적으로 나타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그렇게 말한다는 것 자체가 허구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부를 상품화/전체화/종합/제약하는 운동이 작동하는 과정 속에는 엄연히 그 반작용으로 탈전체화[26]/탈종합화/탈상품화/공유화의 운동 또한 존재하며, 이러한 사실은 상품형태가 겪는 위기의 토대를 정초한다. 후자의 운동은 <자본>의 뒷부분에서 ‘사회적 생산력’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5.
‘나타난다’는 것과 현상의 ‘형태’에 관한 문제는 우리를 이 모든 쟁점과 전선(戰線)의 한가운데에로 몰아간다. 이제 숨을 공간은 없다.
우리는 <자본>의 첫 문장은 세 번 읽게 된다. (이미 봤듯이) 처음 읽힐 때에는 별달리 유의미하지 않다고 여기며 그저 넘겨 버리기 십상이다. ‘자본가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모든 부는 상품의 방대한 집적으로 나타난다’는 문장을 읽을 때 독자들은 이를 ‘당연할 말씀’이라고 생각하며, 상품에 대한 고찰로 넘어간다. 달리 말해, 비판 대상이 돼야 할 현상형태에 매혹되고 마는 것이다. 게다가, 이 첫 문장에 별다른 중요성을 부과하지 않음으로써 부가 상품이라는 현상형태를 띠는 과정에 일조하는 꼴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자본>의 첫 문장을 재독 할 때 독자들은 분노하며 경악한다. 마르크스가 서술하고 있는 바의 끔찍함이 보이기 때문이다. 끝없이 풍부한 인간의 자기성취 과정이 방대한 상품의 집적이라는 형식에 구속되게 되는 것 말이다.
마르크스는 곧바로 독자들에게 비판으로서의 과학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상품에 대해서 그 어떠한 말도 하기 전에, 그는 상품을 비판의 대상으로 상정한다. 부가 상품으로 나타난다고 표현함으로써 마르크스는 독자들이 해당 현상형태와 그 원천, 현상형태가 그 발생 동력과 맺는 관계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접근해 볼 것을 주문한다. 마르크스는 결과적으로 ‘자본가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모든 부는 상품의 방대한 집적으로 나타나며, 따라서 우리의 탐구는 바로 그 현상형태인 상품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 셈이다. 마르크스는 같은 맥락에서 부를 비판의 원점으로 설정한다. 집적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기도 하는 부, 현재 존재하는 형태로부터 벗어나려는 부가 바로 이러한 표준점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비판은 현상형태에 감춰진 대상의 자기발견을 뜻한다. 여기서 이뤄지고 있는 비판은 부를 생성하는 주체들이 상품형태에 의해 가려진 자신의 부를 생성하는 과정을 복원/발견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자본>의 첫 문장이 삼회차로 읽을 때 독자들은 또 한 번 경악한다. 독자들은 이 세계에 대해 분노를 느낄 뿐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보면서도 분노하게 된다. 처음에는 도대체 어떻게 <자본>의 첫 문장을 읽고도 경악을 금할 수 있었단 말인가? 어떻게 우리는 인간의 풍요로움이 방대한 상품의 집적으로 변형돼 버리는 끔찍한 일을 당연한 일인 마냥 받아들였단 말인가? 어떻게 이 문장이 가리키는 고통에 그리도 무감각할 수 있었단 말인가? 독자들은 이러한 무감각함이 혹시 아우슈비츠와 같은 비극이 일어날 수 있었던 조건[27]이 된 것인지, 관타나모 수용소가 유지되고 있는 조건인지, 혹은 온갖 기아와 세계의 파괴행위들이 바로 이 무감각함 탓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답은 그것이 사실이라는 점이다.
그리하여 비판은 곧 자기비판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한 개인의 자아비판에서 그치지 않는데, 이는 주지하다시피 <자본>의 첫 문장에 대한 이해가 오랜 기간 ‘경악할 것 없는 방식의 독해’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짚어보자면 특정한 ‘형태로’ ‘나타난다’는 표현의 문제가 있는데, 이 구절에서 거론하는 대상에는 허위적 현상형태뿐 아니라 실재적 현상형태 또한 해당되기에 관련 문제제기가 겨냥하는 대상은 자본가적 사회는 물론이요, <자본>의 독자 개개인 역시 포함된다. 이와 같은 현상형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편적인 정당성(유효성?)을 지니고 있는데다가, 각자가 자신을 영민함이나 혁명성의 수준을 어떻게 생각하건 간에 우리 모두가 해당 자본주의 사회에 소속돼 삶을 영위하고 있다. <자본>의 첫 문장을 읽음으로써 우리가 이러한 현상형태 속에서 파묻혀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그리하여 비판은 단지 상품형태로 부가 존재하는 상황만을에 대해서만 겨누지 않고, 우리 스스로의 사고방식과 존재양식에 대해서도 경종을 울리고 있는 셈이다. 단지 우리가 취하는 비판의 견지가 상품형태를 초월한 부라는 점을 지적한다고 해도상품형태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형태들로부터 우리가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과학적으로 사유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겨냥해야 한다. ‘자본가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부는 상품으로 나타난다’는 구절을 논할 때 독자들은 스스로가 이러한 현상형태 속에 파묻혀 살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게 되며, 동시에 이 현상형태에 대항하며 살고 있으며, 이러한 외양에 대한 비판가로서 이를 초월한 삶을 영위하고 있음을 인지하게 된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도 결국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는 점으로 인해 자기적대적이고 (자아가 분열돼 있다는 점에서)‘정신분열증적’ 상태로 이끌린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혁명적 순수성이나 이론적 정확성을 운운하는 것은 하찮아진다.
하지만 비단 우리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 당신도 마찬가지다. 분명히 그럴 것이다. 마르크스 자신 또한 현상형태로 구성된 세계에서, 상품의 집적이 인간이 지닌 풍부함의 존재와 등치되는 것이 당연한 세상에서 살았던 사람이다. 독자들은 한편으로 마르크스가 현재 상황에서 경악할 만한 것들을 지적하기 하지만 동시에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 것 수용하는 듯한 지점들이 있다. 그가 형식의 세계에 대해서 집중을 하면서(상품-화폐-자본) 논의를 진행할 때 그는 대항하며 초월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출발하는 것을 잊어버린 듯하다. 이는 바로 다름 아닌 그의 저작에 서두에 나오는 구절 속에서 지적되는 바이고 그의 비판적 분석에 날을 세워주는 요소인데도 말이다. 고로 독자들은 ‘어느 마르크스, 어떠한 독해’에 대한 문제제기를 불가피하게 맞닥뜨리면서 <자본>을 독해하게 된다. (무엇인가로 ‘나타난다’는 표현을 쓴)첫 구절은 독자 모두와 마찬가지로 마르크스 자신에게조차 불가결하게도 긴장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물론 독자 모두에게 두 가지 측면이 있듯이 두 명의 마르크스가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 긴장은 알튀세르가 주장한 청년 마르크스와 성숙한 마르크스 사이의 단절과는 다른 문제로 현상형태와 그 토대가 되는 실체 사이의 적대에서 비롯된 긴장이다. 마르크스가 이 첫 문장에 해제를 달았다면, 아마 다음과 같지 않을까 예상해 본다.
자본가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부는 ‘방대한 상품의 집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형태(나타남)는 단순한 오류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회의 본성 탓에 생겨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한, 결론적으로는 그러한 현상형태의 외양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형태를 비판할 때, 우리는 단지 이것이 현상형태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면서, 우리는 자기자신과 현상형태들 내부에 존재하는 긴장에 대해서도 지적하게 되고, 그 자체로서의 현상형태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도 지적하게 된다. 따라서 본 저서를 읽을 때 ‘진정한 마르크스’나 단일하고 정확한 독해법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접는 편이 좋을 것이다. 본서의 텍스트를 그렇게 읽느니, 독자 자신이 영유하는 모순적 실존의 일부분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자극제라고 생각하시라.
물론 마르크스가 직접 이렇게 쓴 것은 아니지만, 그가 이런 식으로 표현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된다.
6.
앞서 언급한 익명의 심사자는 추가적으로 덧붙여야만 하는 사항이 있다는 취지의 다음과 같은 비판적 제언을 하였다. 본고에서의 ‘나타남’과 그 ‘형태’에 관한 내용을 보면 전반적으로… 마르크스의 논의에서 중추적인 것으로 보이는 내용을 다루고 있지 않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의 집적으로 부가 나타나는 것이 단순한 허상은 아닐지 언정 자본주의 사회를 상품사회 혹은 시장사회와 동일시하는 부적절하고도 이데올로기적인 관점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화폐와 상품은 핵심적 범주가 된다. <자본>에서 ‘상품의 집적’에 관해 보여주고자 하는 진실은 이들 상품이 자본가적 생산양식의 산물이라는 점, 따라서 상품자본의 보다 복잡한 형태에서 산출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마르크스가 상품자본의 범주에 해당하는 내용을 전개하고 있는 <직접적 생산과정의 결과들>과 <자본> 2권에서 강조하고 있는 사항이다.
이와 같은 지적은 비단 흥미로울 뿐 아니라 심사자와 필자의 접근법에 드러나는 차이를 짚어내는 데에 유용하다. 심사자와 같은 입장에서 보면, 마르크스의 논의에 있어서 ’중추적인 것’은 더할 나위 없이 평등해 보이는 ‘상품교환 관계’의 토대가 실상은 착취관계일뿐더러 더 나아가 그러한 관계를 은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착취관계는 노동력이 상품이 되어 상품관계에 의하여 지배당하는 사회에 내재적이다. 따라서 핵심적 적대는 착취관계이며 노동과 자본 사이의 계급투쟁이 핵심적 갈등이 된다. 여기에서 필자는 또 다른 차원의 갈등에 대해 강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마르크스가 노동-자본 간의 대립구도를 도입하기에 앞서서 그에 못지않게 (심지어는 보다)근본적인 갈등이 지닌 중요성에 주목하고 있음을 지적할 것이다. <자본>의 서두에서부터 부와 상품 사이의 긴장이라는 형식을 빌어 이미 개괄된, 구체노동과 추상노동 사이의 대립 말이다. 노동과 자본 사이의 적대[28]가 벌어지기 위해서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에 앞서서 인간의 활동은 추상적인 노동으로, 부는 상품으로, 사용가치는 가치로 환원[축소]돼야 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자본>의 첫 문장을 다시 독해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이는 <자본>의 세 권 모두에 해당하는 사안이지만 출발점이 되는 것은 첫 문장이다.)
반향
필자가 주장하려는 바는 단순하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상품이 아닌 부를 논의의 시발점으로 삼았고, 이 차이가 가지는 이론적, 정치적 함의는 방대하다.
이러한 주장은 <자본>에 관한 논평 문헌들의 주요 방향성과 대치된다. 첫 문장을 언급하는 논평이 드물거니와, 언급한다고 해도 본고와 같은 결론에 다다른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다른 이론가들을 비판하려는 목적이 아니지만, 본고에서 제시된 논의의 고유한 특징이 무엇인지를 짚어보고자, 필자는 영향력과 기여도가 누구보다 두드러지는 학자들의 논평 네 편을 꼽아 간략히 다뤄 보고자 한다.
데이비드 하비의 <마르크스 자본 강의>는 마르크스가 쓴 첫 문장을 인용함에 그치지 않고 ‘나타난다’는 것과 ‘형태’의 용어 문제에도 주목하고 있는 글이다.[29] 하비는 이 표현이 드러나지 않은 어떠한 다른 과정 또한 외관적 현상형태의 표면 아래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신호라고 지적한다.[30] 허나 하비는 <자본>의 첫 문장에서 ‘마르크스가 다루는 대상이 오직 자본가적 생산양식일 뿐’이라고 주장한다.[31] 바로 이 점에서 그의 해석은 본고와 다르다. 필자가 보기에 이 첫 문장이 중요한 까닭은 마르크스가 단지 자본주의만을 논의의 지평으로 국한 짓지 않으며 그 이상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하비는 이와 일관되게도 꾸준히 부라는 쟁점은 다루지 않고 곧이어 문장의 후반부로 넘어가 상품을 논한다. 약 십여 페이지 후 자본론 초입부를 요약하면서 하비는 이 부분에 대한 견해를 제시한다. “거칠게 요약해서, 본저를 통해 마르크스는 자본가적 생산양식의 작동원리를 규명하려고 하며, 그가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상품개념이다.”[32]
미하엘 하인리히의 대단히 명료한 해설서 <새롭게 읽는 자본론>[33]를 읽으면 첫 장인 ‘가치, 노동, 화폐’[34]에서 <자본>의 첫 문장이 인용되지만 그 또한 바로 상품에 대한 논의로 직행하여 오직 자본주의에서만 상품이 부의 전형적인 형태가 된다고 지적한다. 또한 하인리히의 다른 저서 <맑스의 자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자본>의 첫 문 단에 수 페이지 가량의 분량을 할애한다.[35] (이 논문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첫 문장을 흔히들 중시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면서,[36] 하인리히는 ‘나타난다’는 표현의 중요성에 주목한다. 이 말이 ‘그런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뜻도, ‘그렇게 보인다’는 것과도 다르다는 것이다.[37] 하인리히는 이 점에 착안하여 해당 구절에 부가 사회의 유형에 따라 다른 형태를 지니고 있다고 말한 스미스의 <국부론>에 대한 암묵적 비판이 함축돼 있다고 주장한다.[38] 그러고 하인리히는 상품에 관한 논의로 넘어가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자본>의 첫 문단이 지닌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전개가 된다. 이 문단이 단지 해당 저작에 담긴 핵심주제에 관한 서론 격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기존적으로 첫 문단은 단지 마르크스가 그의 논의를 상품에서 출발하며 그럴 만한 중요한 이유가 있다는 점을 서술할 따름이다.’[39] 이에 따르면 여기에서 부와 상품 사이의 긴장은 논의의 핵심 주제가 되지 않으며, 마르크스가 이러한 주장을 할 수 있게끔 한 이유에 대한 의문도 제기하지 않는다. 하인리히는 상품과 가치이론에 관한 그의 독해가 가진 함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가치이론을 통해서 마르크스가 밝히고자 하는 바는 모든 개인은 자신이 생각하는 바가 어떻든 간에 특정한 사회구조에 반드시 순응해야 한다는 점이다.’[40]
모이셰 포스톤은 그의 역작 <시간 노동, 사회적 결정>[41]에서 해당 문장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고 있지만, 가치와 ‘물적 부’ 사이의 모순은 그의 분석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필자와 동일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는 측면이 있지만, 그와 필자의 의견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는 ‘물적 부’와 필자의 주장에서 강조하는 ‘풍부함으로서의 부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물적 부’라는 단어를 통해 포스톤이 지적하는 바는 ‘양적/질적 측면에서 측정되는 산출물’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42] 필자가 생각하기에 ‘풍부함으로서의 부’은 ‘물적 부’의 창출 또한 포함하는 보다 폭넓은 개념이다. 그러나 핵심은 ‘풍부함을 뜻하는 부’라는 개념이 일상적 경험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적대에 관해 논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사람들의 경험 속에서 (가치가 취하는)상품형태의 지배는 저항과 반역의 대상인 폭압으로 취급된다. 부와 상품 사이의 모순은 계급투쟁의 중추에 위치한 적대관계이다. 포스톤의 해석에 따르면 물적 부와 가치 사이의 모순은 자본주의의 핵심적 모순이지만 그는 이를 적대관계로 간주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포스톤이 논하는 모순은 그 전개 속에서 사회변혁의 가능성을 논할 수 있게 해 주며, 이는 반복적으로 언급되지만, 단순한 추상적 논의 이상으로 이를 가능케 하는 사회적 세력에 대한 논의는 찾아볼 수 없다. 필자가 보기에 투쟁에 뿌리내리지 않은 사회변혁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탁월한 비판을 제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포스톤은 여전히 그가 비판하는 부류의 마르크스주의와 마찬가지로 구조와 투쟁 사이의 분리를 답습한다. 구조주의의 치명적 영향에서 벗어나 마르크스주의 이론(특히나 그 핵심저작인 <자본>)을 (단지 투쟁이 발생하는 맥락에 관한 논의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투쟁의 이론으로서 이해하지 않으면,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반자본주의 투쟁 사이의 분리가 벌어지는 것을 극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해리 클리버의 중요한 저작 <자본론 정치적으로 읽기>(1979)는 이런 점에서 필자의 해석과 더 친화성을 지니고 있는데, 클리버 역시 상품형태의 논리를 탈주불가능한 구조로서 이해하지 않고 투쟁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품형태 그 자체에 내재된 논리가 존재하듯 상품교환에는 모종의 규칙성 내지는 ‘법칙’이라는 것이 반드시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논리와 법칙은 오직 자본이 부과하는 데 성공한 법칙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논하고 있는 내용은 자본이 제정한 ‘게임의 규칙’에 관한 것이다.”[43]그러나 상품형태를 투쟁의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음에도 (따라서 그러한 점에서 필자와 근본적 공통점을 지니고 있음에도)클리버는 여전히 정통적 견해와 마찬가지로 <자본>의 출발점이 ‘상품’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클리버는 <자본>의 처음 두 문장을 인용하면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의 기본 단위가 상품이기 때문에 이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이후의 논의를 따라가면서 독자들은 부르주아적 사회의 모든 부가 상품형태로 나타나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44] 요컨대 클리버는 가치, 화폐, 자본의 범주를 투쟁의 범주로 간주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형태들에 대한 투쟁은 <자본>의 논의 영역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 필자의 견해는 이와 달리 반자본주의 투쟁이 ‘부’에 관한 논의를 담고 있는 <자본>의 서두에서부터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투쟁은 지배의 영역 밖에 있는 전투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지배-피지배의 관계 그 자체 속에 존재하며 우리의 일상 경험 속에 내재한다. 바로 이러한 범주들이 저항에 관한 것이다.[45]
이상에서 다룬 저자들에 관해 더 논의한다고 해서 본고의 논의가 더 탄탄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본고의 관점을 공유하고 있는 <자본>에 관한 논평은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필자가 아는 한에서 마르크스가 그의 분석대상인 현상형태를 뛰어넘은 논의를 전개할 수 있었는지에 관해서 문제를 제기한 논자는 없다. 또한 아무도 부와 상품의 관계를 능동적 투쟁의 관계로 간주하지 않았다. 가장 일반적인 입장은 하비가 언급한 바와 같이 마르크스의 논의에서 출발점이 되는 범주가 상품이라는 것,[46] 이른바 ‘마르크스의 목적은 자본가적 생산양식의 작동 법칙을 밝혀내는 것에 있다’는 것 정도이다. 이러한 법칙은 인간의 자유의지와는 독립적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마치 하인리히가 언급한 대로 ‘모든 개인은 자신이 생각하는 바가 어떻든 간에 특정한 사회구조에 반드시 순응’해야 함이 진리인 냥 여기게 된다.
2.
본고의 목적은 마르크스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찾아내는 것도, 그가 진정으로 논하고자 했던 바를 고증해 내는 것도 아니다. 마르크스가 자신의 저작이 지닌 함의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는지 여부는 부차적인 문제다. 더 중요한 것은 <자본>이 반자본주의 투쟁의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투쟁의 형태들이 변화를 겪고 있는 와중에 우리는 <자본>이 여전히 오늘날의 투쟁과 관련해서 유의성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재검토는 불가피하다. 이 문제는 해당 저작에 대한 해석의 문제와도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 몰역사적이고 몰정치적인 자본의 독해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자본>에 관한 (마르크스의 논의가 상품으로부터 시작되며, 자본주의 체제의 ‘작동원리’에 관한 설명이 핵심이라는) 정통파적 독해는 혁명적 변화를 먼 미래의 문제로 치부하는 개념, 혁명을 국가권력의 쟁취와 사회체제의 교체로 규정하는 개념과 공생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혁명관은 지난 세기의 경험과 최근의 정치경제적 위기 속에서 불신을 초래하고 있다. ‘미래의 혁명’을 조금이나마 지향하는 정당이 존재하는 나라조차 거의 없다시피 한다.
핵심은 영역 설정의 문제다. 만일 상품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이미 비판대상이 되는 체제 내부에서 비판을 진행하게 된다.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논의는 우리가 수감된 감옥에 관한 박식한 분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감옥은 탄탄히 짜인 사회적 형식의 연쇄로 구축돼 있다. 상품형태(사회적 관계의 형식으로서 상품)를 출발점으로 삼음으로써, 마르크스의 논의는 사회적 관계의 총체가 더욱 전개된 형태의 총체를 이루고 있다는 점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는 한 단계 한 단계씩 더욱 발전된 형태로 연쇄된다. 가치형태에서 상품형태로, 화폐형태에서 가치형태로, 자본형태에서 화폐형태로, 등등의 단계를 거쳐가면서 말이다.[47] 마르크스는 (특히 푸르동에 대한 비판을 전개하면서)형식들 사이의 상호연관을 강조하고자 고심한 바 있고, 화폐 없는 상품교환에 근간한 사회 내지는 자본 없는 화폐경제에 관한 구상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서로 다른 형식들이 단단히 결합되어 하나의 총체를 이룬다. 논의를 여기에서 멈추게 되면 이러한 총체를 분쇄하기 위해서 가능한 유일한 방도는 총체로서 이에 대항하는 것이며, 총체의 강인한 결합으로 인해서 그 개별적 위상을 돌파하려는 시도는 무위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자본>을 닫힌 체계에 대한 엄격한 분석으로서만 이해할 경우 우리는 두 결론 중 하나에 이를 수밖에 없다. 첫째는 미래의 혁명을 이끌 정당에 의존하는 것이다. 강고한 총체성을 분쇄할 유일한 방도는 강인하고 통일된 혁명적 정당을 건설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되는 방향에서, 필자가 보기에 최근 논의의 지배적 결론이 된 경향이 하나 있다. 바로 <자본>의 독해를 그 어떤 방식으로든 혁명에 관한 고찰과 분리시켜 버리는 것이다. 혁명은 총체적으로 이뤄져야 하나 그러한 혁명을 수행할 전망이 보이는 정당은 존재하지 않는 듯해 보인다. 따라서 <자본>을 읽는 것은 그저 자본주의 체계의 작동방식을 잘 이해하는 데에 의의가 있을 뿐이다. <자본>에 대한 ‘엄격한’ 독해는 현실에서의 반자본주의 투쟁의 운동과 완전히 유리된 몰정치적 비관주의와 결합되기 십상이다. <자본>을 읽는 것과 반자본주의 투쟁은 그저 다른 길로 이어질 뿐이다.
마르크스가 전개한 논의의 출발점이 상품이라는 전통적 견해에 대한 반박은 단순히 정치적이지만은 않다. 이는 텍스트적이기도 하다. 반자본주의 투쟁의 변화로 인해 <자본>을 새로이 독해할 필요가 생겨나고 있으며 그때 우리는 마르크스의 논의의 출발점이 상품이라는 견해는 그릇됐고, 부가 그 출발점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억지로 마르크스를 그렇게 독해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명료한 문제다. 마르크스는 부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마르크스는 비판대상이 되는 체제 내부에 우리가 위치시키면서 출발하지 않는다. 반대로, 상품형태에 넘침 없이 들어맞지 않는 대상인 부(풍부함)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견고히 짜여진 자본주의적 사회 형식들에 관한 논의로 진입하기 전에, 마르크스는 이 자본주의적 사회 형식 속에 들어맞지 않은 범주를 논하면서 이론적 입장의 근거를 여기에서 정초하고 있다. 이는 다른 사회 형식들에 관한 논의 전개의 설명력을 약화시키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형태들을 과정 즉 형태-과정, 형태조성의 과정으로 이해하게 해 준다.[48] 따라서 자본주의적 총체성이란 총체화의 과정이며, 생명의 강렬한 불안[49]을 자본의 논리로 종속시키고 인간의 모든 행위를 숨 막히는 사회적 동질성 속에 옭아매는 과정에 다름이 아니다. 촘촘히 짜여진 자본-논리의 감옥으로 나타나는 대상은 강력하고 끈질긴 공세의 동학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사실 그 안에 자체적 위기를 지니고 공세이기도 하다는 점을 보면 더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이 공세는 전능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이해대상 또한 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사회적 형식들은 까다로운 내용들을 형성하는 과정이며, 이러한 내용들은 단지 그에 상응하는 형식에 조화롭게 조응되지 않는다. 부는 상품형태와, 사용가치는 가치형태와, 구체노동은 추상노동과, 노동능력은 노동력 상품과 부조화를 이루고 생산력 또한 자본형태와 부조화를 이루는 일 등이 벌어지는 것이다.[50] 이러한 형식들은 수많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도 같지만, 프로크루테스의 침대는 그곳에 누울 대상인 내용을 온전히 끼워 맞출 수 없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취약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51] 각각의 경우 내용은 형식에 제약되지 않고, 형식에 반해서 그리고 더 나아가 형식을 초월해서 존재한다. 마르크스의 새로운 독해 학파는 <자본>을 이해하는 대에 있어서 형식형태의 개념이 핵심적이라는 점을 부각했다는 점에서 공로가 있다. 그러나 형식과 내용 사이의 관계를 비정태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형식을 거스르고 초월하는’ 동학의 관점에서 이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독자들은 구조주의적 오류를 반복하는 함정에 걸려들 수도 있을 것이다. 투쟁과 <자본>의 독해를 분리시킨 바로 그 관점을 채택하게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자본>에 담긴 이야기는 그 서두에서부터 사회를 동화시키려는 억압적 세력과 부조화를 이루는 세력을 대비시킨다. 지배의 공포가 아닌 저항의 존엄성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부와 인간의 창조성 그리고 완전한 자기성취야말로 <자본>의 중심 주제이다. 마르크스의 논의는 부조화의 세계에 관한 논의로 이뤄지며, 이에 따르면 인간의 창조성은 자본주의 발전의 법칙에 온전히 제약된 적이 없다. 자본주의 발전의 법칙들 속에서 사회적 형식들은 인간에게 족쇄를 채우려고 하지만 그것은 자체적으로 위기를 품고 있다. <자본>의 서두는 여러 파열구들이 존재하는 자본주의적 형식들과 부조화를 이루는 다중적 반역을 통해 혁명을 사유하고 창출해 내는 데에 산재하는 가능성과 난관들에 관한 고찰이라고 할 수 있다.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바로 그러한 유형의]정당The Party과 ‘미래에 다가올 혁명’은 생명력을 잃었고, 지금 여기에서 수 없는 파열구와 균열을 통해서 자본을 분쇄하는 것은 극도로 시급한 문제인 동시에 이미 발생하고 있는 과정이다. 이것이 바로 <자본>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그 첫 문장부터 말이다.
* 본 고는 Historical Materialism 23.3(2015) 3-26에 게재된 것을 저자와 출판사의 동의를 얻어 번역, 게재하였습니다.
** 본 고의 저작권은 Brill에게 있음을 밝힙니다.
*** 역자의 사족:역자는 <자본>의 출발점에 관한 홀로웨이의 새로운 견해가 정치경제학적으로 상당한 이론적 함의가 있으며, <자본>의 정치적 교훈을 찾아가는 데에도 많은 힌트를 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종적인 정치적 결론이 그와 반드시 일치해야 하는지 여부는 개별 독자의 판단에 달려있을 것이다.
역자 김종현은 경제학 석사로, MSG(마르크스주의연구모임(준))에 소속된 정치경제학 연구생이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학습해왔으며, 학위과정을 거치며 표준적 화폐이론에 대한 비판적 논의에 집중하고 있다. 관련 분야 번역서로는 《사회 생태 전환의 정치》(두번째테제, 근간)이 있다. 공역서는 《동아시아 자본주의》와 《동아시아 마르크스주의》(진인진), 그리고《팬데믹 이후 세계경제》(책갈피) 등이 있다.
[1] 역자주: 영어 원문의 키워드는 Appearance이다. 번역어로 현상형태와 가상을 병기한 이유는 다음의 두 용례를 참조한 것이다. 헤겔 철학 개념 중 ‘가상Schein’을 영어로 옮기는 경우 appearance라는 번역어가 채택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본문에도 이와 관련된 지적이 짧게 나온다. 한편 현상형태라는 번역어는 김수행 역 <자본론>(2001년판) appearance와 대응되는 표현으로 채택된 부분들이 있다. 예컨대 3권 995페이지에 나오는 저유 명한 문장 “사물의 현상형태와 본질이 직접적으로 일치한다면 모든 과학은 불필요하게 될 것이다.”은 펭귄 출판사의 영역본에서 appearance라는 표현을 쓴 부분이다. 이 논문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appear as’라는 표현의 용례와도 들어맞는다.
[2] 저자주: Marx 1965. p.35 [역자: 김수행역 <자본론> 43페이지]에 해당 문장이 나온다.
[3] 역자주: <자본>의 인용문을 한국어로 옮길 때에는 김수행 번역본을 거의 그대로 따랐다. 단 ‘자본주의’라는 번역어는 지양했다. ‘Capitalism; Kapitalismus’라는 표현은 마르크스의 저작을 포함한 당시의 문헌에서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이미 ‘자본’, ‘자본가’라는 표현은 널리 쓰였고 그 개념도 중요시되기 시작했지만, ‘자본(가) 본위의 체계’에 대한 개념의 정립과 인식이 아직 보편화되기 전이었던 까닭 같다. (해당 용어 관련하여 홍기빈(2010. <자본주의>, 책세상)을 참조했다.)
따라서 <자본>에서 ‘자본주의적’으로 번역된 표현은 사실 “’자본가적’Capitalist; kapitalistische”에 조응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단, 동시대인인 홀로웨이의 문장을 번역할 경우에는 ‘자본주의’라는 표현 또한 사용했다.
[4] Marx 1990 p. 165
[5] Marx 1985, p.49. 주목할 점은 <자본> 초판보다 8년 앞서 초판이 발행된 1985년도 저작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의 첫 문장으로, 다음과 같다. “한눈에 부르주아적 부는 하나의 거대한 상품 집적으로 현상하고 개별적인 상품은 이 부의 기본적 현존으로 현상한다.” (Marx 1971, p.27)[2007. 김호근 역, 개정재판 4쇄 p.13. 중원문화. (sic)]
원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Auf den ersten Blick erscheint der bürgerliche Reichtum als eine ungeheure Warensammlung, die einzelne Ware als sein elementarisches Dasein.’ (Marx 1961, p. 15.)
[6] 역자주: Richness처럼 Reichtum 역시 (rich와 조응하는) 형용사 reich를 명사화한 것이다. 두 단어 모두 사전에 ‘풍부함’으로 등재돼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맥락에서는 그렇게 번역했다.
[7] Marx 1973, p. 488. 독어 원서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In fact aber, wenn die bornierte bürgerliche Form abgestreift wird, was ist der Reichtum anders, als die im universellen Austausch erzeugte Universalität der Bedürfnisse, Fähigkeiten, Genüsse, Produktivkräfte etc. der Individuen? Die volle Entwicklung der menschlichen Herrschaft über die Naturkräfte, die der sog. Natur sowohl wie seiner eignen Natur? Das absolute Herausarbeiten seiner schöpferischen Anlagen, ohne andre Voraussetzung als die vorhergegangne historische Entwicklung, die diese Totalität der Entwicklung, d.h. der Entwicklung aller menschlichen Kräfte als solcher, nicht gemessen an einem vorhergegebnen Maßstab, zum Selbstzweck macht? Wo er sich nicht reproduziert in einer Bestimmtheit, sondern seine Totalität produziert? Nicht irgend etwas Gewordnes zu bleiben sucht, sondern in der absoluten Bewegung des Werdens ist? In der bürgerlichen Ökonomie – und der Produktionsepoche, der sie entspricht – erscheint diese völlige Herausarbeitung des menschlichen Innern als völlige Entleerung; diese universelle Vergegenständlichung als totale Entfremdung und die Niederreißung aller bestimmten einseitigen Zwecke als Aufopferung des Selbstzwecks unter einen ganz äußeren Zweck.’ (Marx 1954, pp.387-8) [역자주: 원문의 독일어 표현과 더불어 김호균이 번역한 <그룬트리세>의 국내 정발본과의 용어 조응을 고려하여, 영어 문장에서는 창조적 ‘잠재성’(potentialities)에 가까운 표현들은 전부 이상과 같이 옮겼다.]
[8] 필자는 마르크스의 초고로서 <그룬트리세>가 이처럼 <자본>의 독해에 유용함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룬트리세>의 출간은 그간의 정통적인 <자본> 독해에 대한 이견제시를 촉발되는 데에 중요한 구실을 했다. 그러나 단언컨대 <자본>과 더 혁명적인 <그룬트리세> 사이에 대치가 있다고 보진 않는다. [역자주: 안토니 오네그리의 <맑스를 넘어선 마르크스>를 위시한 <요강>을 더 중시하는 입장을 겨냥한 비판 같다. 헤겔적 마르크스주의 일각 또한 <요강>을 중시한다.]
[9] 독어판 본래의 용어 Austausch를 ‘교환exchange’가 아닌 ‘교류interchange’로 번역하는 편이 더 나았을 것 같다. 분명히 마르크스가 염두에 둔 것이 상품교환은 아니다. 본 논문의 원고에 대한 리차드 건Richard Gunn의 매우 유용한 논평에서 지적된 바 대로라면 독어 원문대로 볼 경우 ‘보편적 교환’이 더 중추적 위상을 갖게 된다(직역하자면, ‘부란 다름 아닌 인간의 욕구, 능력, 향유, 생산력 등의 보편성이 보편적 교환을 통해 창출된 것이지 않겠는가?’이다.) 그는 또한 보편적 교환이란 말을 상호인정으로 봐야 하고 따라서, ‘부란 상호 인정이다’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10] 다름 아닌 공통적 부(common wealth)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는 하트와 네그리의 삼부작 중 마지막 책(2009)에 붙은 제목(common wealth; ‘공통체’로 번역됨)과 일치한다. 그러나 그들의 개념전개는 다른 방향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자본>의 첫 문장에서 이뤄진 대비가 아니라, 공통적 부와 상품형태 사이의 대조에 주목한다.
[11] 비슷한 맥락에서 “생활의 결핍 즉 생존의 난관에 대한 최선의 해결책은 바로 사람들이 자신으로부터 즐겁고 창조적이며 사랑 가득하고 상품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의 풍성함을 발견하는 것이다.”라는 Vaneigem 2012의 지적이 있었다. (저자가 직접 번역함)
[12] 그는 논평을 이어가며 “필자가 다루고자 하는 저술의 첫 문장이 ‘산업혁명기 잉글랜드 북부 도시지역에 대한 연구’이었다면 문장의 주어를 도시로 보고 그것이 이 서적에서 다루고자 하는 바를 함의한다고 주장해야 할까? 그렇게 보면 안 되리라 생각한다’고 적었다. 재미있게도 필자가 보기에는 ‘도시지역’과 ‘잉글랜드 북부’ 사이에는 대척점이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이와 달리 ‘부’와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에는 간극이 아주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자본>의 요체는 그러한 적대의 전개에 다름없다. 요컨대 익명의 심사위원이 제시한 가상적 예문과는 달리 <자본>의 첫 문장에는 [이 둘 간의] 강렬한/동태적인 관계에 대한 내용이 들어있다.
[13] 이상은 새뮤얼 무어와 에드워드 에블링의 번역본을 인용한 것이다. (Marx 1965, p.35) 벤 포크스 판본(Marx, 1990 p.125)에서는 다음과 같이 다소 인상이 강하지 않은 번역문을 싣고 있다. “상품은 무엇보다도 외적인 사물로서, 그 자체의 속성을 통해 특정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어떠한 사물을 의미한다.” 독일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Die Ware ist zunächst ein äußerer Gegenstand, ein Ding, das durch seine Eigenschaften menschliche Bedürfnisse irgendeiner Art befriedigt’ (marx 1985, p.49)
[14] 벤 포크스 번역본, Marx 1990, p.125. 무어와 에블링의 번역에 따르면 “우리의 탐구는 그러므로 상품에 대한 분석에서 시작해야 한다.’ (marx 1965, p.35) ‘Unsere Untersuchung beginnt daher mit der Ware.’ (Marx 1985, p.49)
[15] 역자주:위에서 인용한 김수행 역 <자본론>에서는 벤 포크스의 영역처럼 ‘기본적인 형태’라고 나와있다.
[16] 필자는 이러한 점을 지적해 준 리처드 건에게 감사를 표한다,
[17] ‘erscheintals’가 원문에서 쓰인 표현이고, 에블링과 무어의 판본에서는 ‘그 자신을 현상한다’고 번역 돼있다.
[18] 이러한 맥락에서의 Erscheint와 scheint가 갖는 차이점에 관해서는 Heinrich 2008, p.51을 보시오.
[19] 상품 교환 과정으로 인해 실재적인 현상형태의 발생에 관한 논의는 상품 물신성에 대해 다루는 <자본> 1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뤄지고 있다.
[20] 존재양식에 관한 이해를 증진시키고자 한다면 Gunn 1992, p.14를 참조하라.
[21] 문제점도 있지만 그럼에도 오늘날까지 대단히 영감의 원천이 되는 저작인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죄르지 루카치가 핵심적으로 논하고 있는 테마가 바로 이것이다. Lukács 1988.
[22] 상품물신성을 ‘물신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의 중요성에 관해서 필자의 저서,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홀로웨이, 2002)를 참조하라.
[23] 이와 같은 정식화와 관련하여, 필자의 벗 세르지오 티슐러Sergio Tischler에게 감사한다.
[24] “자본가적 사적 소유의 조종이 울린다.” Marx 1965, p.763/ Marx 1985, p.929.
[25] 이를 마르크스는 다름 아니라 ‘생산력’이라고 지칭했다. 후세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것을 생명력을 상실한 개념으로 변형시켜 버렸다. 그러나 그들과 달리 인간의 ‘절대적인 자기형성 운동’ 속에서 동력 구실을 하는 실체로 생산력을 이해하는 편이 더 옳다.
[26] 탈전체화에 관하여 Tischler 2014를 참조하라.
[27] 이것은 단지 아도르노가 지적한 바의 되풀이일 따름이다. “아우슈비츠는 순수 동일성은 죽음이라는 철학 명제가 진실임을 확증했다.”(Adorno 1990. p.362; 국문판 <부정변증법> p.433)
[28] 이에 관한 탁월한 분석으로 Nasioka 2014를 참조하라.
[29] Harvey 2010, p. 15.
[30] Ibid.
[31] Ibid.
[32] Harvey, 2010, p.25
[33] 필자의 벗인 워너본펠드는 하인리히의 책에 추천사를 쓰면서 ‘이제까지의 마르크스의 <자본>에 대한 해설서 중 최상이며 가장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썼다. 실제로 <자본>에 대한 그의 해설이 매우 깔끔하기 때문에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까닭을 느끼진 않는다. 하지만 <자본>에 관한 하인리히의 해석과 필자의 해석에는 차이가 있다.
[34] Heinrich 2012, p. 39
[35] Heinrich 2008, pp.50-54
[36] Heinrich 2008, p.50
[37] Heinrich 2008, p.51
[38] Heinrich 2008, p.52
[39] Heinrich 2008, p.53; 필자의 번역문
[40] Heinrich 2012, p.46; 강조는 원문과 같다
[41]Postone 1996.
[42]Postone 1996.p.193
[43]Cleaver 1979, p.66
[44]Cleaver 1979, p.71
[45] 이에 관해서 보다 온존한 논의를 보기 위해 클리버가 구체노동을 투쟁의 범조로 취급하기를 거부하는 것에 대한 필자의 논평을 참조하라. Holloway 2010b, pp. 189-190.
[46] (적어도 필자가 찾아낸 한에서)눈에 띄는 예외는 협동과 생산적 육체에 관한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견해를 다룬 레옹 로치트히너(Leon Rozitchner)의 저술이다. 그중 한 장에서 로치트히너는 마르크스의 <자본>이 상품이 아니라 부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본고에서도 인용한 <그룬트리세>의 문구를 인용하고 있다. (Rozitchner 2003, pp. 88,98) 그러나 부와 상품 사이에 존재하는 적대적 관계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는 본과와는 달리 그의 저작에서는 이에 관한 논의가 전개되고 있지 않는다. 필자에게 로치트히너의 저작에 관해 짚어준 부르노보스텔스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
[47] 이러한 접근법을 가장 정교하게 발달시킨 입장은 마르크스에 관한 ‘새로운 독해([노이에렉튀레] 학파’라고 볼 수 있다. 이 학파의 주요 구성원으로는 헬무트 하이헬트, 게오르크 바크하우스, 모이셰 프스톤, 그리고 미하엘 하인리히와 같은 학자들과 연계돼 있다. ‘새로운 독해’에 관한 설명과 논의로는 Bonefeld 2014를 참조하라. 해당 학파에 관한 필자의 비판적 입장에서 핵심은 이들이 형식과 내용 사이의 관계를 정태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둘 사이의 관계를 정태적으로 이해하게 된다면 부정당한 실존양식이 그를 부정하려고 하는 형식에 대항하여 그리고 초월하여 존재한다는 점 역시 불가결하게 놓치게 된다. 이 둘을 역동적 관계 속에 놓인 것으로 보게 되면 존재양식은 형식과 부조화를 이루고 갈등하게 된다. (형식에 관한 건의 규정을 참조하라. Gunn 1992, p.14_
[48] 형태-과정으로서 형태에 관해서는 Sohn-Rethel 1978과 Holloway 1991, 2010a를 보시오.
[49] ‘생명의 강렬한 불안sheer unrest of life’에 관해서는 Hegel 1977, p. 27을 보시오.
[50] ‘사람들의 열망을 투표함 속에 온전히 담아내버릴 수는 없다’고 덧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51] 필자는 마이클 페럴만이프로크루테스의 침대에 관한 우화를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시장의 규율을 수용할 것을 강제하는 경제적 제도들과 실천들을 묘사했던 것에 주목하고자 한다. (Perelman 2011)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상품형태)에 관한 논의를 통해 그 자차에 내재된 위기 (즉, 그 형식과 부조화를 이루는 부)에 대한 논의로 나아간다는 점이다.
References
Adorno, Theodor W. 1990 [1966], Negative Dialectics, translated by E.B. Ashton, London:Routledge.(국역: <부정변증법>)
Bonefeld, Werner 2014, Critical Theory and the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OnSubversion and Negative Reason, London: Continuum.
Cleaver, Harry 1979, Reading Capital Politically, Brighton: Harvester Press. <국역: 자본론 정치적으로 읽기>
De Angelis, Massimo 2007, The Beginning of History: Value Struggles and Global Capital, London: Pluto Press.
Gunn, Richard 1992, ‘Against Historical Materialism: Marxism as a First-orderDiscourse’, in Open Marxism, Volume 2: Theory and Practice, edited by WernerBonefeld, Richard Gunn and Kosmas Psychopedis, London: Pluto Press.
Hardt, Michael and Antonio Negri 2009, Commonwealth, Cambridge, MA.: HarvardUniversity Press. (국역: <공통체>)
Harvey, David 2010, A Companion to Marx’s Capital, London: Verso. 국역: <맑스 자본 강의>
Hegel, Georg Wilhelm Friedrich 1977 [1807], Hegel’s Phenomenology of Spirit, translatedby A.V. Miller,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국역: <정신현상학>)
Heinrich, Michael 2008, Wie das MarxscheKapitallesen?: HinweisezurLektüre undKommentarzumAnfang von ‘Das Kapital’, Stuttgart: SchmetterlingVerlag 국역: <자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 2012 [2004], An Introduction to the Three Volumes of Karl Marx’s ‘Capital’, translatedby Alex Locascio,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국역: <새롭게 읽는 자본론>
Holloway, John 1991 [1980], ‘The State and Everyday Struggle’, in The State Debate, edited by Simon Clarke, Basingstoke: Palgrave-Macmillan.
——— 2010a, Change the World without Taking Power, New Edition, London: PlutoPress. 국역: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 2010b, Crack Capitalism, London: Pluto Press. 국역: <크랙 캐피털리즘>
Lukács, Georg 1988 [1923], History and Class Consciousness: Studies in Marxist Dialectics, translated by Rodney Livingstone, Cambridge, MA.: The MIT Press. <역사와 계급의식>
Marx, Karl 1953 [1857], Grundrisse, Berlin: Dietz Verlag.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 1961 [1859], ZurKritik der PolitischenÖkonomie, in Marx-Engels-Werke, Volume13, Seventh Edition, Berlin: Dietz Verlag.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 1965 [1867], Capital, Volume 1, translated by Samuel Moore and Edward Aveling, Moscow: Progress Publishers. <자본론>
——— 1971 [1859], A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London, Lawrence and Wishart.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 1973 [1857], Grundrisse: Foundations of the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translatedby Martin Nicolaus, Harmondsworth: Penguin Books. (국역: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 1985 [1867], Das Kapital. Band 1, Berlin: Dietz Verlag. (국역: <자본>)
——— 1990 [1867], Capital: A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Volume 1, translated by BenFowkes, Harmondsworth: Penguin Books. <자본론>
Nasioka, Katerina 2014, Ciudad e insurrecciónen el siglo XXI.Espacialización y subjetivaciónen las revueltasurbanas de Oaxaca (2006) y Atenas (2008), Doctoral thesis, Instituto de CienciasSociales y Humanidades, Benemérita Universidad Autónomade Puebla, Puebla.
Perelman, Michael 2011, The Invisible Handcuffs of Capitalism: How Market TyrannyStifles the Economy by Stunting Workers,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국역: <무엇이 우리를 무력하게 만드는가>)
Postone, Moishe 1996 [1993], Time, Labor, and Social Domination: A Reinterpretation ofMarx’s Critical Theor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Rozitchner, León 2003, Freud y losProblemasdelPoder, Buenos Aires: Losada.
Sohn-Rethel, Alfred 1978, Intellectual and Manual Labour: A Critique of Epistemology, translated by Martin Sohn-Rethel, London: Macmillan and Co. Ltd.
Tischler, Sergio 2014, ‘Detotalization and Subject: On Zapatismo and Critical Theory’, South Atlantic Quarterly, 113, 2: 327–38.
Vaneigem, Raoul 2012, Lettre à mesenfantset aux enfants du monde à venir, Paris: cherchemidi.
Wright, Steve 2002, Storming Heaven: Class Composition and Struggle in ItalianAutonomist Marxism, London: Pluto Press.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