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한국 조각에서 매체의 문제: 현남과 최태훈의 플라스틱 조각을 중심으로

윤지혜

2020년 전후의 한국 조각

  “지난해 여름부터 올해 여름을 지속적이고 동일한 경험으로 잇는 나의 글쓰기는 분명히 조각이라는 범주를 강하게 의식해 왔다.”[1] 한국 미술에 대한 밀도 있고 박식한 비평을 전개하는 안소연은 2018년 『계간 시청각』에 기고한 글에서 한 해에 걸친 자신의 비평 실천 한 가운데에 조각이 있었다고 회고한다. 동시대 한국 미술에 대한 이와 같은 진단은 미술 전문지를 비롯한 미술 언론에서도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아트인컬쳐는 2021년 9월에 “지금 조각은 변하고 있다.”는 헤드라인을 내세우며 한국의 3040 조각가 57인의 작업을 나열하고 이를 통해 조각의 변화를 논의하는 특집 기사를 내놓았다.[2]

  그도 그럴 것이, 2020년을 전후로 ‘조각’ 매체를 전면에 내세운 기획전과 젊은 조각가들의 개인전이 곳곳에서 펼쳐졌다. 2017년 두산 갤러리에서 열린 신진 큐레이터 워크숍 전시 《사물들: 조각적 시도》가 새로운 방식의 조각을 하는 동시대 작가들의 작업을 점검했는가 하면, 이듬해 아트선재센터는 《포인트 카운터 포인트》에서 조각가 5인을 초청하여 전시장의 공간 형태와 맥락에 반응하는 작품을 요청했다. 한편 뮤지엄헤드는 《인저리 타임》에서 동시대 조각이 과거/전통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어긋남을 창출하는지 탐구했고, 하이트컬렉션은 오늘날 조각의 풍경을 조망하고자 한다는 의도로 《각》이라는 조각가 그룹전을 선보였다. WESS에서 노해나는 《조각 여정: 오늘이 있기까지》로 한국의 1세대 여성 조각가들의 작업 여정을 추적하기도 했다. 주목할 만한 조각 작업의 확대와 더불어 이를 이해, 정리, 진단하려는 기획자와 비평가의 다양한 실천은 국공립기관에서의 대규모 그룹전으로 이어졌다. 2022년 북서울시립미술관은 동시대 조각가 17인의 작업을 선보이는 《조각충동》을 열었다. 전시는 출품작을 ‘조각이며 조각이 아닌 조각’, ‘관계 맺는 조각’, ‘이미지, 사물, 데이터, 비물질, 위치로부터 탈주하려는 조각’, ‘존재 조건을 재구성하는 조각’ 등의 항목으로 분류하며 조각에 대한 대담, 세미나, 인터뷰 등의 연계 행사를 진행해 한국 조각의 현 위치를 살폈다. 그 외에도 3D 스캔, 프린팅, VR 기술과의 교차점에서 동시대 조각을 조명한 《조각모음Defragmentation》, 여성과 조각의 교차점에서 국내외 여성 조각가 16인의 작품을 선보인 《집(ZIP)》 등 조각 매체에 주목한 전시들이 이어졌다.[3]

  “조각이란 무엇인가,” “전통적인 조각 개념은 유효한가,” “조각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무엇이 변화했으며 그 변화의 요체는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이러한 기획들은 미술 실천의 변화를 포착하고 이에 반응하는 합당한 시도들이다. 하지만 당시 조각의 부상과 주목을 돌이켜 보았을 때 그 논의들이 전개되고 정리되는 방식에 한계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논의들은 조각 매체를 넘어서는 듯 보이는 ‘회화 조각’, ‘사진 조각’이나 설치, 퍼포먼스, 영상과 삼차원 조형을 공유하며 혼성의 양식으로 나아가는 입체 조형들을 동시대 조각의 범주에 포함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혼합매체 작품들을 다시 ‘조각’이라는 매체 용어로 지칭하는 이유가 무엇이며 이를 가능케 하는 매체 개념의 전제는 무엇인지는 상술하지 않는다. 입체적인 측면이 있는 모든 작품이 ‘조각’으로 별도의 해명 없이 불리자, 이 용어 자체에 입체성 이상의 의미가 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현재의 입체조형들을 조각 매체로 구분하고 명명하는 것이 어떤 의의가 있는가?

  이 글에서는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포스트-매체 개념을 조각의 현 상황을 사유하는 실마리로 삼고자 한다. 크라우스는 20세기 미술사의 전개 속에서 본질주의적이고 교조적으로 오염된 매체 개념을 비판하며 매체 논의를 갱신하기 위해 그 개념을 재창안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매체 특정성을 거부하여 미술의 존립 근거를 악화시키는 경향들에 비판적인 거리를 두고, 또 기술변화에 응답하며 확장되는 미술 실천을 수용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매체의 역사에 저장된 인식적, 표현적 기능에 주목하고 이를 매체의 미학적, 구원적 가능성으로 평가한 크라우스의 접근을 이어받아, 현 입체 조형들에는 어떤 낡은 전통이 잠복해 있으며 이 작업들이 조각 특유의 인식, 감각, 표현의 가능성에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모색해 볼 것이다. 이때 기존에 조각 재료로 호출되지 않았던 대중적이고 산업적인 재료인 플라스틱을 조각의 매체로서 사용하며 동시대의 문화와 감수성을 가시화하는 현남과 최태훈의 작업을 사례로 다룰 것이다. 우선 크라우스의 매체 개념을 검토하고 이것이 현 조각 실천을 이해하는데 어떤 유용성이 있는지 살펴본다.
 

<Overdriven Cloud>, 현남(2021), epoxy resin, pigment, cement and polystyrene, 46 x 64 x 17cm.

 
매체와 매체 특정성

  매체(medium)란 창작의 아이디어와 작품으로서의 실현 사이에서 이를 매개하는 수단으로, 예술의 유형(회화, 조각, 판화 등) 및 작품이 만들어진 재료라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매체와 연계되어 사용되는 매체 특정성(medium specificity)이란 특정 예술의 유형이 다른 예술과 구분되어 갖는 특성을 의미하여 이에 대한 탐구는 각 매체의 순수하고 독립적인 특질을 모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매체 특정성은 흔히 클레먼트 그린버그를 필두로 전개된 회화론을 떠오르게 하지만[4], 조각에서도 조각의 특정성을 사유한 역사가 있다.

  조각에서는 거돌트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이 『라오콘: 미술과 문학의 경계에 관하여』에서 조각의 매체 특정성에 대한 탐구를 열었다고 평가된다. 레싱은 조각의 본성 자체에 관해 묻고 이 예술에서 얻을 수 있는 특유의 경험을 정의할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즉 조각을 다른 예술과 구분 짓는 조건을 정의하고, 조각이 제공하는 경험의 일반적인 범주를 검토하는 것이다. 조각의 특정성을 공간성이라고 보았던 레싱은, 조각이란 실체들을 공간 속에 배열하는 예술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공간적 특성은 시와 같이 시간을 매체로 하는 예술형식들의 본질과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시작으로 조각을 다른 매체와 구분시키는 조각만의 특성에 대해 여러 주장이 제기되었다. 대표적으로 카롤라 기디온-웰커(Carola Giedion-Welcker)는 『현대의 조각』에서 조각을 이루는 두 축으로 불활성의 물질과 그것을 양식화하는 투명하고 분석적인 체계로 보았으며,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현대조각의 흐름』 에서 조각이 감상자의 시간과 경험을 조직하는 방식을 조각에 대한 분석의 한 축으로 끌어들이고자 하였다.[5]

  이러한 논의들에서 매체란 우선적으로 작품이 근간을 두는 물리적 지지체로 이해되었다. 물리적 바탕이 가능케 하는 매체 본연의 과제를 규명하며 이를 그 매체의 가능성이자 가치로서 선언하는 것은 그린버그의 영향 하에 매체 특정성의 탐구가 전개될 때에도 그 핵심이었다. 이는 매체를 그 본질로서 환원하려는 “물화를 향한 충동”에서 비롯된 관점이었다. 이러한 그린버그식 매체 특정성 테제는 미술에 그 물질적 속성을 탐구하는 제한된 길만을 부여하고, 예술이 그 외부와 맺고 있는 관계를 소거한 형식주의적 작품을 양산했다.[6]

  크라우스는 매체 특정성에 대한 이러한 교조주의적 강조가 매체를 거부하는 반동을 낳았으며 나아가 유의미한 형식과 구조 자체에 대한 성찰이 부족한 작품들을 만들어내 포스트-매체 상황을 불러왔다고 말한다. 예컨대 1960년대 이후 개념미술가들은 작품의 물질성은 부차적이며 예술의 본질에 대한 논리적, 언어적 진술만으로도 작품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보았고, 설치미술은 여러 매체와 레디메이드를 혼합해 작품으로 제시하는 등 다른 장르 및 관습과 이접하였다. 이는 매체 고유의 특정성의 거부에서 더 나아가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의 차이를 말소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특정한 매체에 근거한 이미지가 디지털 이미지로 복제되고 순환되며 하나의 매체에서 다른 매체로 이전해 출력되면서 매체 중심의 기존 작품들도 매체 특정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경험되었다. 이러한 전개는 매체라는 개념이 더 이상 논의할 필요가 없는 낡은 용어처럼 보이게 했다. 크라우스는 이를 포스트-매체 조건 (post-medium condition)이라고 명명하며 이 조건 속에서 개별 작품들은 매체 특정성에 대한 지향과 전통적인 매체 개념을 무효화하며 나아가는 한편, 기존의 매체 개념을 넘어선 방식으로 이 용어를 갱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보았다.
 

<살(SAL)-P2>, 최태훈(2023), urethane foam, blankets, curtains, mat, pillow skin, 370 x 335 x 964.5cm.

 
크라우스의 포스트-매체 개념

  크라우스는 매체 특정성이라는 개념이 매체의 “요소들 중 일부가 그 구조 자체를 발생시키는 규칙을 생산하는 구조”, 즉 매체가 그 자체의 특성으로 인해 자신의 부합하는 표현과 탐구의 영역을 만들어내는지를 사유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미술을 분석하고 비평하는데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았다.[7] 또한 매체를 단지 물질적 대상이 아니라 그 안에 겹쳐진 기술과 관습들의 기능의 복합체로 재정의함으로써 매체의 내적 복합성을 논의할 수 있는 장을 열었으며, 이것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져 나가는 것이라는 점을 인식함으로서 미술의 변화를 포용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크라우스는 매체 개념을 재창안하는데, 이를 위해 매체를 기술적 지지체와 관습의 겹침이자 열린 구조로 개념화한다. 물리적, 기술적 지지체란 기존 매체를 규정했던 매체의 물질적 기반을 뜻한다. 하지만 크라우스는 이에 그치지 않고 관습 또한 매체 특정성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부각시킨다. 이때 관습이란 매체의 물질적 조건으로부터 파생되며 그 매체의 역사를 형성해 온 장르, 형식, 규칙 등을 포함한다. 예컨대 매체를 이루는 장르의 역사와 위계, 재현의 관습과 기술, 구상과 추상, 재현에 대한 논의, 해당 매체의 인식론 및 존재론 등 다양한 비물질적 요소들을 매체에 대한 논의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이다. 이로 매체는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이 겹쳐 있는 구성물로서 개념화된다.

  또한 크라우스는 매체에 순수성의 당위를 부과하는 대신, 서로 다른 매체가 상호작용하고 중첩되며 변형되는 현대미술의 상황을 인정하고, 매체론을 통해 이를 보다 분석적으로 지각하고자 하였다. 크라우스는 매체의 ‘변별적 특정성’ 개념을 고안했는데, 이는 특정 매체를 해당 매체를 구성하는 여러 물질적, 비물질적 구성요소로 분석하고 각 작품에서 이러한 구성 요소들이 맞물리면서 어떠한 미적 효과를 발생시키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다. 이러한 포스트-매체 개념을 통해 크라우스는 여전히 특정한 물질적 조건, 기법, 규칙, 장르의 역사와 그 미적 효과에 주목하면서도 기존의 매체 구분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구체적인 작품에서 서로 다른 매체의 구성 요소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특유의 표현성을 가능하게 하는지를 분석할 수 있게 하였다.

  예컨대 조각의 경우 나무, 돌, 철 등의 질료를 조각의 물리적 근간으로 규정하고 이로부터 삼차원적 형상을 이끌어 내 공간성을 탐구하는 것을 조각 본연의 영역으로 규정하는 것뿐 아니라, 조각의 관습과 역사로서부터 비롯된 과제를 조각에 대한 논의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인물상 및 인체조각, 레디메이드, 추상조각 등의 장르적 구분, 조각, 소조, 캐스팅 등의 기법, 저자성, 우연성, 시간성, 움직임, 장소 특정성 및 공간과의 관계에 대한 논의 등을 조각을 구성하는 비물질적 요소로서 수용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은 우선 매체를 중심으로 한 계보를 그림으로써 새롭게 만들어지는 조각들을 위치시키고 이해할 수 있게 돕는다. 이는 동시대 조각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전 조각과의 연속성과 차이를 밝히는 역사주의적 방법이다. 이로서 작품은 과거의 형태들로부터 진화된 것으로 보이고 그 범람하는 감각적 자극은 익숙함과 새로움으로 재인식된다. 이러한 역사화는 또한 어떤 작품이 새로우며 주목할 가치가 있는지를 파악하는 바탕이 된다. 어떤 미술 작품이 새로운지 아닌지는 기존 미술사, 미술 실천과의 비교를 통해서 판단된다고 할 수 있다. 조각사의 전통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할 때, 이에 이질적인 요소들을 도입하며 조각을 확장시키는 작품들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 즉 새로움에 대한 판단은 매체에 대한 이해 속에서 가능할 수 있다.

  이렇게 매체를 중심으로 미술사의 궤적을 따라가 봄으로써 같은 조형적 과제, 조각가의 욕망에 따라 시대와 사회를 가로질러 조각 실천들을 연결 지을 수 있다. 매체 특정성에 대한 주목은 궁극적으로는 해당 매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현 조각가들은 어떤 욕망과 필요로부터 지금과 같은 작업을 하는지, 이는 조각사에서 발견되던 충동 및 그 발현과는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묻는다. 왜 조각하는가? 왜 조각이어야 하는가? 어떤 작품이 조각이기에 가능해지는 경험은 무엇인가?

  이러한 확장된 매체의 개념으로 현재의 조각 실천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는 어떤 모습일 수 있을까? 본고에서는 그 방법적 윤곽을 플라스틱의 조형성으로 생명 조각을 시도하는 현남과 최태훈의 사례를 통해 구체화하고자 한다.

현남, 최태훈: 동시대의 알레고리로서의 플라스틱 조각

  현남과 최태훈은 산업 재료나 기성 제품을 조각의 재료로 들여와 동시대 물질문화, 제품의 생산구조 및 조각의 물질성을 탐구하는 작가이다. 현남의 대표적인 <축경>시리즈는 ‘자연의 풍경을 축소하는 기예’라는 동양 미학의 축경 개념을 경유하여 동시대 문화의 풍경을 축소한 조각이다. 작가는 폴리스티렌, 에폭시 등의 합성수지를 조색한 염료와 섞어 내부를 파낸 주형틀에 붓고 이 재료들이 화학반응을 거쳐 색을 입고 형태를 갖추어 나가도록 한다. 그 결과 인공적인 색상의 울퉁불퉁한 형상이 나오는데, 현남은 이것이 동시대 풍경을 조형하는 힘과 동일한 원리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를 축소한 형상이라고 말한다. 한편, 최태훈은 기성 이케아 가구 모듈을 기존 매뉴얼과는 다른 방식으로 조립해 조각적 형상을 만들어낸다. 2021년 이후 시작한 <살(SAL)> 시리즈에서는 레디메이드 사물들에 우레탄 폼을 투하해 형태를 갖추어 나가도록 하는데, 이를 통해 기성품 및 산업 재료의 사회역사적 맥락과 당대적 의미를 들여와 재해석한다.

  이들 작품은 “새로운 소재를 탐구”하는 조각, “레디메이드 사물의 조각적 해석으로 본격적인 조각의 가능성을 탐구” 한다고 서술되며 한국 조각의 최전선에서 조각의 귀환을 알리는 젊은 판도의 작업이라고 평가된다.[8] 또한 현남의 조각은 ‘축경’이라는 개념 및 로버트 스미드슨의 작업과 함께 언급되고, 최태훈의 작업은 레디메이드, 구축주의, 소조/부조의 조각 방법론 등 기존 조각사와 연결 지어 설명되지만 각 작가가 행하는 조각사의 참조와 재해석이 단순 조형적 유사성을 넘어서 어떤 역사적이며 동시대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아 왔다. 본고에서는 이 두 작가가 조각을 인식의 매개로 다루며 특정한 구성 체계에 입각한 조형 방법론을 통해 플라스틱 질료로부터 동시대의 플라스틱성을 이끌어낸다는 점에 주목하여, 이들의 작업을 조각 매체의 관습과 계보에 위치시키며 그 조형적 욕망과 가능성을 짚어보고자 한다.
 

<Extructed Mountain(Double Peak)>, 현남(2020), epoxy resin, polyurethane resin, pigment, cement and polystyrene, 85 x 25 x 15cm.

 
인식의 매개로서의 조각

  조각 매체의 역사를 경유해 접근할 때, 우선 이들의 작업은 조각을 인식을 위한 도구로서 사용하는 합리주의적 조각 전통에 위치시킬 수 있다. 이는 조각이 비단 임의의 감각적 입체가 아니라 인식의 매개자이자 그 결과물이라는 관점으로, 사물의 기하학적 구성원리를 형태를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구축주의나 자연물을 사용해 형상을 만들고 형상에 생명을 준 에너지의 원천을 내부의 중심공간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생명주의 등 조각사를 관통하는 욕망이며 지향이다.

  “조각의 솔직함을 통해 제 앞에 놓인 세계를 재구성해보며, 그것의 본질을 보다 명료하게 볼 수 있기”[9]를 원한다는 현남의 언급이나 조각을 통해 기성품의 형태와 유통방식을 인식하고 조각과 제품 간 “상이한 감각을 좀 더 섬세하게 분별해서 둘 사이를 선명하게 나누거나 통합하는 일을 하고 싶다”[10]는 최태훈의 말처럼 이들은 조각을 현대사회의 물질문화 전반에 대한 지각과 인식의 매개물로서 접근한다.

  이를 위해 두 작가는 특정한 조형 원리를 설정하고 이 체계를 바탕으로 물질을 형상화하여 의미화하는 총체적 덩어리를 만들어낸다. 작가는 자신의 표현에 도달하기 위해 특정한 체계들을 발명해 내기에 작가의 방법론에는 결국 그가 조형을 통해 무엇을 이루어 내고자 하는지에 대한 의도와 지향이 담겨있다. 개별적인 작업의 결과물은 이러한 구성적 체계에 입각할 때보다 선명히 이해될 수 있다.

  각 작가의 조형적 체계는 기존 조각의 관습을 참조하고 재해석하는 가운데 나오는데, 현남의 <축경> 시리즈는 덩어리를 깎거나 붙여 나가는 기존 조각 및 소조의 기술을 뒤집어 덩어리에 구멍을 파고 이를 물질로 채워 넣는 네거티브 조형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이 ‘빼기’의 방식을 택한 이유에는 사전에 계획된 형태를 완성해 나가는 통제된 작업 방식이 축소된 경관을 찾아 나가고자 하는 현남의 조형적 지향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남은 자신이 만들어냈지만 자연에서 발견한 듯한 유기적인 물질을 통해 현대문명과 동형인 조각을 만들고자 했고, 이를 위해서는 작가의 저자성을 자연적인 힘에 일부 위임할 수 있는 방법론이 필요했다. 작가는 파내는 네거티브 기법이 “자유롭게 원하는 형태를 만들 수 없고, 항상 뒤집어서 생각해야 하며, 작업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눈에 보이지 않기에 끊임없이 의심하고 상상해야” 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고 말한다.[11] 작가는 폴리스티렌에 굴을 파고 빈 부분에 다양한 색깔로 조색된 에폭시를 부은 후 아세톤으로 폴리스티렌을 녹이는 방법으로 작업한다. 이때 에폭시와 폴리스티렌이 만나면 열이 발생하면서 안에서 화학변화가 일어나는데, 이 결과 생겨나는 조각의 형태와 색은 확인하기 전까지는 예상이 어렵다.[12] 이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조각은 석회동굴의 흘러내린 암석들이나 해저 분화를 연상시키는가 하면 그 표면이 기포가 터져 나오는 듯 울퉁불퉁하며 섬유처럼 얇게 늘어진 가닥들이 엉겨 붙어 있기도 하다. 풍화된 것처럼 깎여 나간 수직 형태의 긴 탑들은 핫핑크, 연보라, 청록, 에메랄드 등 고명도의 인공적인 색채를 입고 있어 공장에서 합성된 듯 비유기적이다. 한편, 기성 인테리어 가구나 일상용품을 재조합하며 그 용도를 조각적으로 전이해 온 최태훈은 가구의 기존 조립 원리를 해체하고 작가의 창조적인 원리로 대체한다. DIY 가구를 활용한 시리즈에서는 기성 가구를 재조립하기 위한 조형원리를 다음과 같이 설정했다. “스스로 직립할 것, 모든 방향에서 형태가 다를 것, 어디서 보아도 완성도가 균질할 것, 오브제를 재가공(절단, 절곡 등)하지 말 것”[13]이다.

  마지막 원칙은 동시대의 산업적 생산물을 있는 그대로 수용해 이에 비평적으로 개입하기 위한 규칙이며 이러한 재구성을 통해 작가는 삼차원적으로 경험되는 다시점의 조각(원리 3), 무언가의 재현이 아닌 독립적인 사물이자, “나름의 자기 언어를 가지고 ‘자생’”하는 “형태적으로, 의미적으로 해방”된 조각을 추구 (원리 1, 2) 하고자 했다.[14]

  이러한 조형의 규칙을 통해 최태훈은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생산체계가 배태한 조형의 감각을 작품에 수용한다. 예컨대 기성 가구 유닛들은 직선적이고 모듈화되어 있으며 국가와 인종별로 표준화된 신체 규격에 따른 규모를 갖는다는 점이나 이들이 철제나 합판 등 표준화되고 대량생산이 가능한 재료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은 긴장감 있게 수직 수평으로 연결된 작품 속에서 그 형태에 그대로 반영된다. 한편 우레탄 폼이 등장하는 <살> 시리즈에서 최태훈은 소조의 기법을 참조하는데, 축대에 흙을 붙여 나가는 소조와 달리 통제가 어렵게 부풀어 오르는 우레탄 폼을 이케아 테이블이나 철제 의자 같은 기성 인테리어 가구를 축대 삼아 붙여 나가면서 새로운 방식의 소조를 만든다. 이 기성품들은 작품의 뼈가 되고 이에 붙은 살로서 자라나는 폼은 성장하는 유기물처럼 일상 사물을 점유하고 공간으로 확장된다. 이렇듯 기성품의 매뉴얼은 최태훈이 수립한 조립 매뉴얼과 소조의 방법론으로 대체되며 삼차원성, 양감, 공간감, 수직 수평성, 무게중심의 변위 등이 강조된 조형을 낳는다.
 

살(SAL)- 우드 타입 8, 최태훈(2022), wood (wall shelf, stool), urethane foam, 190x85x45cm.

 
재료의 행위력을 수용하는 창작

  한편, 이 원칙을 구현하기 위한 창작 기법도 조각 매체의 기술적 특정성의 역사와 연계시켜 이해해 볼 수 있다. 현남과 최태훈이 택한 조형 방식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이들이 재료의 물성과 조형성에 인도되는 창작을 한다는 점이다. 이 둘은 모두 플라스틱의 일종인 폴리스티렌, 에폭시, 우레탄의 물성을 적극적으로 실험한다. 이에 더해 최태훈은 조각의 재료가 된 레디메이드 가구 유닛의 주어진 형태에서 조각적 아이디어가 발생하도록 한다. 창작의 시작점이자 작품의 완성까지 물질이 창작을 견인하는 방법은 조각에서 조형의 아이디어와 물질이 분리 불가능하며 그 연계를 적극적으로 작품의 과정과 의미에 들이고자 했던 직접 조각 (direct carving) 관습과 연장선상에 위치시킬 수 있다. 대표적으로 전통적인 모델링과 캐스팅 방식에 반대하며 직접 조각을 옹호한 영국 생명주의자들은 물질에 진실이 있다는 신념 하에 나무, 돌 등의 자연재료를 수집하고 이에 직접 조각함으로써 아이디어가 재료로부터 자연적으로 발생하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조각은 물질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조각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를 숨기지 않는다. 이러한 방식은 재료의 능동성을 수용함으로써 창작을 부분적으로 위임한다. 이는 작품에 우연을 위한 공간을 여는 것이다. 미술에서 ‘우연성’은 저자성의 제거나 무의식에의 접근 등 여러 의도에서 수용되었지만 현남과 최태훈의 작업에서 이는 재료의 생명력이라는 불가해한 힘에 접근하기 위한 수단이다. 제작 과정 중에 발생하는 우연적 표현성은 재료의 행위력의 발현으로 볼 수 있으며 재료에 인도되는 직관적이고 즉흥적인 조형을 함으로써 작가는 자립할 수 있는 순수한 생명과도 같은 사물을 만들어낸다. 특히 이들이 조각의 질료로서 들인 플라스틱은 작업의 주된 행위자이자, 그 행위력 자체가 곧 작업의 내용이 된다. 현남과 최태훈이 플라스틱을 사용하는 방식은 주목할 만한데, 이들은 플라스틱 재료의 유동성, 운동성, 팽창성, 비영구성, 변화 가능성을 관찰하고 수용하며 우연과 발견을 따라 재료에 의해 연역되는 대로 작업한다.

  현남은 재료가 지닌 고유한 성질에 따라 녹거나 과열되고 깨지거나 부풀어오르도록 두고 거기에서 형태를 발견한다. 최태훈 또한 물질의 속성을 존중하며 질료가 상호 관계하여 조직화하도록 기다리는 방법을 택하는 플라스틱 조각가이다. “액상 우레탄 폼은 원료와 안료를 배합하는 와중에 경화가 시작된다. 걷잡을 수 없이 증식하며 자기 마음대로 굳는다. 이에 맞춰 나도 빠른 속도로 작업을 해 나가야 한다. 우레탄 폼의 우연한 성질이 일종의 생명감을 준다. 내 작업에서 중요한 건 특정한 형태를 구현하는 일이 아니라 프로세스 자체이다.”[15] 작가가 재료의 속성에 대해 회고하듯, 우레탄 폼은 발포한 순간부터 몸체를 부풀리기 시작해 짧은 시간에 경화되며, 어떤 특정 형태를 유도하거나 예상할 수 없는 재료이기에 작가는 재료의 행위력이 펼쳐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한편 최태훈은 이에 더해 산업 생산품을 재료로 사용하며 생산 시스템이 낳는 조형성을 작품의 의미로 가져온다. 이는 작가의 자율성을 세계가 이미 조직된 방식, 이미 주어진 것의 우연성에 내맡기며 세계 자체에서 아이디어를 얻는 방식이며 세계의 사물들이 창작에 참여하도록 열어두는 것이다.
 

Extructed Mountain(Double Peak), 현남(2020), epoxy resin, polyurethane resin, pigment, cement and polystyrene, 85 x 25 x 15cm.

 
동시대의 플라스틱성

  이러한 과정으로 만들어지는 작업은 동시대의 감각을 추상화한 알레고리이다. 이 형태들은 현대사회에 대한 어떤 느껴진 특성들을 형상화한다. 조각의 재료인 플라스틱의 생명성과 조형성이 오늘날의 물질문화를 형성한 힘과 동류이기에, 이를 통해 현대 물질문화가 형성하는 감수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들은 현대의 가소성, 인공성, 가벼움, 비영속성을 조형화하며 플라스틱 조각에 동시대의 풍경이 담아낸다.

  혹자가 “파우스트적인 재료”라 부르기도 했던 플라스틱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적인 함축을 동시에 지니는 현대성의 집약체이다. 플라스틱은 20세기 발명과 합성의 상징물로, 기술 발달이 인류의 진보를 가져오고 제약 없는 창조를 실현하리라 꿈꾸었던 근대정신의 산물이다. 플라스틱의 개발과 확산이 불러온 물질적 유토피아는 오래도록 인간 활동에 한계를 지우던 물질 공급상의 제약을 풀어주며 물질적, 문화적 민주주의를 낳고 사회계층 간의 경계를 허물었다. 여러 천연재료의 특성을 모방하거나 보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실크, 상아, 모피 등 희귀하고 값비싼 재료로 만들었던 물건들을 값싸게 대량생산할 수 있게 되자 인류에 전례 없는 풍요가 찾아왔다. 인간은 신에 버금가는 창조력을 뽐내며 연금술사처럼 물질을 만들어냈고 그 빠른 생산과 소비주기는 모더니티가 지향한 속도와 운동감에 대한 감각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유토피아를 향한 근대의 꿈이 여러 부작용들로 재귀하였듯이, 플라스틱 또한 오늘날 디스토피아적 상상의 중심에 있다. 인간의 시간 속에서 분해되지 않는다는 특성은 악마적 은유와 연결되었고, 생명에 유해한 물질을 발생시키는 플라스틱은 환경 파괴의 주범이 되고 있다. 일회적으로 사용되다 폐기되며 때로 쉽게 부러지고 휘어 버리기도 하는 특성은 플라스틱을 저급하고 질 낮은 재료로 평가하게 했다. 이렇듯 플라스틱의 인공성, 가소성과 영속적이면서 일회적인 시간성은 근현대의 꿈과 악몽에 깊게 얽혀 있다.

  현남과 최태훈의 작업에서 다양한 종류의 플라스틱, 플라스틱 가공품, 산업재료는 조각의 합당한 질료이자 동시대 감수성에 대한 알레고리로서 표상된다. 비단 플라스틱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재료 자체의 행위력을 수용하는 체계적 조형을 통해 두 작가는 우리 문화의 기저에 흐르는 감수성을 드러낸다. 이들의 플라스틱 조각은 동시대의 플라스틱적 함축을 가시화하는 기호로 작동하며 질료를 통해 동시대의 변화, 속도, 가벼움, 비고정성, 인공성, 창조력, 저급함, 키치함 등을 인식 가능하게 한다.

  현남은 안소연과의 인터뷰에서 조각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손으로 물질을 다루어 어떠한 형태를 만드는 것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행위 중 하나이며, 여기에는 조각이라는 관습 역시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각에는 여러 가지 재료와 도구, 번거로운 공정과 절차가 요구되고,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은 무게를 갖고 실재하는 공간에서 거추장스럽게 부피를 차지하며, 우리는 그것을 경험하기 위해 몸을 움직여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동시에 조각을 다른 그 어떤 행위보다도 구체적이고 분명한 것으로 만듭니다.”[16]

  조각은 손으로 물질을 다루어 형태를 만들어내는 구체적인 행위이다. 물질과 사물의 언어를 이해하고 이를 적절히 사용하여 자신이 마주한 세계를 인식하고자 하는 바람은 조각을 지탱해 온 근원적인 충동이었을 것이다. 조각가들은 물질을 기능으로부터 떼어내어 그 속성, 구조, 원리, 감각을 탐구하고 어떤 조각 존재를 만들어내어 세계에 대한 감각적 인식에 도달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 새로운 사물들은 특정 장소에 놓여 시공간 경험을 변화시킨다. 이렇듯 조각 매체가 초점을 두고 다뤄온 인식의 문제에 현남과 최태훈은 각자의 방법으로 접근한다.

  조각 매체에 저장된 인식적 기능은 현대의 질료 플라스틱과 만나고 재료와의 상호작용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두 작가의 방법론을 통해 동시대에 다시금 펼쳐진다. 두 작가는 동시대의 광범위한 시각환경을 이루고 동시대성에 대한 담론을 구축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한 플라스틱을 조각의 질료로서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플라스틱의 행위력에 반응하는 작업을 통해 그 알레고리적 함축을 가시화한다. 이들의 작품은 조각이다. 이들은 조각 매체의 물질적, 기술적 관습을 소환하고 변형한다. 이를 통해 현남과 최태훈은 동시대의 창조성과 생명성을 형상화한 결정체로서 플라스틱 조각을 제시하며 조각의 조형적, 방법적 개념적 가능성을 확장시킨다.


[1] 안소연, 「한국 현대 조각에서, 매체 변화/확장에 따른 조각 개념의 재인식 과정」, 『계간 시청각』 2호 (2018), p. 37.

[2] 편집부, 「Special Feature: 3040 한국 조각가 57인, 동시대조각의 최전선」, 『아트인컬처』 (2021년 9월호), p.85-139.

[3] 《사물들: 조각적 시도》(두산갤러리, 2017) 기획 김수정, 최정윤, 추성아, 참여작가 문이삭, 조재영, 최고은, 황수연; 《포인트 카운터 포인트》(아트선재센터, 2018) 기획 김해주, 참여작가 김동희, 김민애, 오종, 이수성, 최고은; 《인저리 타임》(뮤지엄헤드, 2021) 기획 권혁규, 참여작가 강재원, 곽인탄, 오은, 이충현, 최태훈; 《각》(하이트컬렉션, 2022) 기획 이성휘, 신지현, 참여작가 권오상, 권현빈, 김동희, 김인배, 서도호, 이불, 이수경, 임정수, 정지현, 조재영, 차슬아, 홍자영; 《조각 여정: 오늘이 있기까지》(WESS, 2022) 기획 노해나, 참여작가 김정숙, 배형경, 백연수, 윤영자, 이경희, 임송자, 황지선, 《조각충동》(북서울시립미술관, 2022) 기획 권혜인, 참여작가 강재원, 고요손, 곽인탄, 김주리, 김채린, 돈선필, 문이삭, 신민, 오제성, 우한나, 이동훈, 정지현, 최고은, 최태훈, 최하늘, 황수연, 홍예준; 《조각모음 Defragmentation》(문래예술공장 갤러리M30, 2023) 기획 박주원. 참여작가 곽인탄, 안민환, 오제성, 장준호, 정성진, 주슬아, 홍자영; 《집(ZIP)》(아르코미술관 2024) 기획 최태훈, 강민지, 방수지. 참여작가 김윤신, 박윤자, 한애규, 노시은, 김주현, 신미경, 노진아, 정소영, 정문경, 오묘초, 조혜진, 김태연, 이립, 서혜연, 홍기하, 박소연.

[4] 매체는 단지 미술 작품을 회고적으로 분석할 때만 사용되었던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미술을 주도하는 규범적인 담론이 되었다. 즉 모더니즘 미술과 그린버그를 필두로 한 비평의 권력 하에서 매체 특정성을 탐구하는 작업들이 높게 평가되었는데, 이 때 각 매체는 해당 매체의 본성을 탐구해야 하며, 이는 그 매체의 물리적 지지체의 속성을 자기반영적으로 탐색하고, 비본질적인 부분을 제거해 나가는 과정에서 발견해 갈 수 있다고 보았다. 회화에서 매체의 물리적 지지체는 캔버스와 물감이며, 이에 따라 평면성, 선, 색의 순수 조형적 요소에의 천착이 회화의 과제가 되고 서사, 환영, 연극성은 회화 외적인 것으로 제거되어야 할 속성이었다.

[5]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 『라오콘: 미술과 문학의 경계에 관하여』, 윤도중 옮김 (나남 2008; Carola Comp Giedion-Welcker, Contemporary Sculpture: An Evolution in Volume and Space (New York: G. Wittenborn,1955); 로잘린드 크라우스, 『현대조각의 흐름』, 윤난지 옮김 (예경 1997).

[6] 로절린드 크라우스, 『북해에서의 항해: 포스트-매체 조건 시대의 미술』, 김지훈 옮김 (현실문화A 2017).

[7] 위의 책.

[8] 편집부, 「Special Feature: 3040 한국 조각가 57인, 동시대조각의 최전선」.

[9] 안소연, 현남, 「현남 작가와의 인터뷰」, 『무지개의 밑동에 굴을 파다』, 전시 리플렛 (아뜰리에 에르메스 2021), p.5.

[10] 이문정, 「이문정 평론가의 더 갤러리 (66) 최태훈 작가: 조립가구의 매뉴얼을 ‘무효화’해 조각한 뜻은?」,『CNB 저널』 (2021년 7월 1일).

[11] 안소연, 현남, 「현남 작가와의 인터뷰」, p.7.

[12] 이예지, 「아틀리에 에르메스 개인전 – 작가 현남이 그린 형형색색 도시 전경」, 『아레나코리아』 (2021년 9월호)

[13] 김해리, 「‘공간 조각’의 힘. P21, 조각가 최태훈 개인전 <필드>」, 『아트인컬처』 (2023년 7월호), p.182-183.

[14] 위의 글.

[15] 위의 글.

[16] 안소연, 현남, 「현남 작가와의 인터뷰」,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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