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미술의 소요(騷擾)의 틈 속에 소요(逍遙)하기 – <2021 프로젝트 영도> 이후

  부산 영도에서 일어난 소동에 대한 본격적인 글쓰기를 하기 전, <2021 프로젝트 영도>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겠다.

‘이 프로젝트는 한 문장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만들지 않겠다”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라는 게 아니라 물리적인 것들,

예를 들어서 벽화나 조형물 같은 공공미술 하면 떠올릴 수 있는 전형의 결과들,

공공의 장소를 반영구적으로 점유하는 어떤 것들을 만들고 남기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 <2021 프로젝트 영도> 홈페이지의 설명 글, 프로젝트 매니저, 서평주[1]

  위의 글에서 알 수 있듯 <2021 프로젝트 영도>는 한마디로 ‘공공미술 프로젝트’라고 일컫는 사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만들지 않겠다”는 전제 하에 1년여 동안 진행되었다. (필자는 여러 참여작가 중 한 사람으로서 그간의 <2021 프로젝트 영도>를 함께 했다.)

부산 영도에 설치된 <2021 프로젝트 영도>현수막, 출처: 영도문화도시센터

  2021년에 시작된 이 프로젝트에 대한 피상적인 발화(發話)는 2022년 겨울, <2021 프로젝트 영도 >의 공동 프로젝트였던 ‘현수막’이 설치된 후 시작되었다. 그 발화(發話)라는 것은 너무 전형적이어서 (어디서 이미 본듯한) 기시감이 들 정도의 반응이었고, 이는 언론 기사를 통해서도 드러났다. 기사 제목은 다음과 같다.

“영도 깡깡이마을 벽화 지워도 되겠습니까” 현수막에 발칵”[2]

또 다른 (평범한 맛의) 기사 제목은 다음과 같다.

“영도문화도시센터, 공공미술 공론장 행사 개최”[3]

이로써 평안한 바다와 같았던 <2021 프로젝트 영도>는 일련의 울렁거리는 파도를 타기 시작한다.

<2021 프로젝트 영도>의 현수막 설치에 대한 국제신문의 기사 갈무리, 출처: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300&key=20220216.99099003761 (좌측), 부산영도 깡깡이 마을박물관 벽화, 출처: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phamor&logNo=221530612429 (우측)

공공미술에 대한 고백

  여기서 잠시 필자는 일종의 고백을 하고자 한다. 필자는 (지금까지 복수의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참여해왔으나) 어떤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떳떳하지 못하다. 다시 말해 공공미술에 대해 필자는 일말의 씁쓸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시각예술작가 역시 신자유주의로 축조된 세계 속에서 헤매고 있는 욕망의 주체로서 (직간접적으로) 시간이 갈수록 엉망이 되어가고 있는 이 도시 풍경에 일조하고 있다는 고백이다.

  또한 이것은 공공미술을 행하는 시각예술작가로서, 공공미술이 때로는 젠트리피케이션을 불러일으키는 발화(發火) 지점으로 기능하거나, 도덕적-윤리적 선함으로 무장하고 ‘도시미화’라는 허구적 연막 아래 ‘모범-예술’을 하려는 오류를 범하거나, 공공미술이라는 예술노동 아래 불공정한 헤게모니가 작동하는 과정을 방조-묵인하거나,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모두의 가치’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 속에 과잉-예술가-자의식이 소환되어 과시적 공공미술작품이 똥덩어리처럼 도시에 투척되는 일련의 상태에 대해 필자는 자유롭지 못하다는 고백이다.

  따라서 언제나 공공미술에 대해서는 (누구도 진지하게 묻지 않았지만) 망설이며 변명하듯 여러 말들을 늘어놓던 필자에게 <2021 프로젝트 영도>가 시작부터 추구했던 전제조건 “아무것도 만들지 않겠다”는 태도는 또 다른 공공미술의 형식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했다.(이러한 태도는 하랄트 제만(Harald Szeemann)의 대표적인 기획 ‘태도가 형식이 될 때’를 떠올리게 했고,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흥미로운 공공미술의 형식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아주 잠시 스치듯 생각했었다)

  아슬아슬하게 구축된 이 스펙타클의 세계에 (마치 막장드라마의 장면을 익숙하게 채우는 클리셰와도 같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이바지한 나의 죄를 뉘우치고, 잠시 멈추고, 뭐가 잘못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생각했다.

출처: <2021 프로젝트 영도> 홈페이지

공론장으로서의 공공미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2021 프로젝트 영도>는 결론적으로 반영구적 공공미술 (조형물, 벽화, 아트벤치 등으로 현현하는 어떤 물리적 ‘형식’으로서의 공공미술로 일컬어지는 것들) [4]을 만들지 않는 대신에, 질문을 하기로 했다. 그 질문들은 ‘듣기’, ‘말하기’, ‘글쓰기’라는 형식으로 구현되었다. 특히 ‘글쓰기’는 부산 영도 도시 곳곳에 ‘현수막’이라는 ‘임시적 형태’로 인쇄되어 내걸게 되었다.

  앞서 언급했던, 그 ‘임시적 형태’의 현수막에 쓰여진 ‘질문’은 (평화로워 보이던) 부산 영도에 언캐니(uncanny)한 소요(騷擾, 또는 소동, 소란)를 일으켰다. 나는 그러한 소요가 ‘공론장’이라는 형태의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공공미술적 해프닝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까지 흔히 공공미술이 벽화, 조형물, 미디어월의 형식으로 구현되었다면, 공공미술 역시 ‘미술’이라는 전제로 ‘퍼포먼스로서의 공공미술’을 시도해볼 만하다. (아직까지 공공미술은 ‘미술’로서 다양한 실험이 진행되지도 못하고 있으며 ‘미술’로서 비평도 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잊지 말자)

  ‘공론장’ [5]에는 <2021 프로젝트 영도>가 던진 공공미술에 대한 질문들이 비공식적인 그물망에서 파열음을 내고 있다면, 그것이 계획적이든, 우발적이든 하나의 공간에서 서로 부딪혀보자는 ‘태도’가 전제되어 있다. (참고로 ‘공론장’은 <2021 프로젝트 영도>의 계획단계의 초반부터 이미 설계되었다. 이 사업의 기획자, 작가, 문화행정가 외 다양한 관계자들은 ‘공론장’을 저마다 다른 의미로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공론장’을 의례적인 행사로서의 사업결과보고회로 이해했을 수도 있다. 필자는 ‘공론장’을 퍼포먼스로 받아들였다) [6]

소요(騷擾)

  폭력, 대상화, 싸가지, 예의, 민주주의, 진정성, 선의, 카르텔, 대안, 돈

  위에서 열거한 것들은 이번 <2021 프로젝트 영도>의 ‘질문들’이 소요를 일으키면서 온라인상에서 첨예한 긴장감을 형성했던 ‘갑론을박’에 등장한 단어들이다. (이 단어들을 넣은 질문 또는 입장들을 상상해보라. 나는 온라인에서 스펙타클하게 펼쳐진 여러 의견들을 관찰하며 ‘싸가지없는 공공 미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반면 오프라인-공론장에서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오프라인-공론장 참여자들은 시종일관 정제된 언어와 점잖은 태도로 자신의 의견을 표현했다.[7] 그럴만한 이유는 다양했다. 우선 오프라인-공론 장의 참여자들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지금, 여기, 존재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야기를 했다. 또한 온라인상에서 <2021 프로젝트 영도>에 대해 분명하고 비판적 시각으로 의견을 피력한 사람들을 오프라인-공론장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공론장은 동일한 시간대에 유튜브로 생중계되었고, 동일한 시간대에 온라인상의 의견들은 오프라인과 결이 많이 달랐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그대로 공공미술에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공공성’, ‘공적 영역’, ‘공식적’이라 는 조건이 생기는 순간 사람들이 표명하는 주장은 달라진다. 이미 많은 공공미술이 ‘도발’, ‘비판’, ‘주장’이 걸러진 채 점잖게 진행되고 있지 않은가. ‘도발’, ‘비판’, ‘주장’이 없는 예술은 어떠한가 질문해보게 된다. (물론 비난과 비판은 엄밀히 다르다)

<2021 프로젝트 영도>공론장 모습, 출처: 권은비

  한편 <2021 프로젝트 영도>의 오프라인-공론장에서 매우 산발적인 의견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따라서 공론장의 내용은 몇 가지로 요약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다양했고 서로 맞물리는 듯, 어긋나는 이야기들이 진행되었다.

  공론장 참여자는 저마다 질문들을 던졌지만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은 돌려받지 못했다. 주도적으로 공론장의 분위기를 이끄는 ‘전문가’도 없었다. 또한 참여자들은 서로 누가 누구인지 모른 채 같은 공간에서 토론을 진행했기 때문에 발언자의 주장이, 주장 외의 요인들로 설득력을 가질 만한 것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발언자가 현장에서 표명하는 주장과는 다른 요소들이 (사회적 지위 또는 직업적 역할, 경험의 축적들이) 설득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즉 어떤 집단이 모이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헤게모니적 영향력이 이번 공론장에서는 생성될 수 없었다. 이번 공론장에서는 지역주민, 문화전문가, 기획자, 예술가, 청소노동자, 어린이에 상관없이 같은 의자에 앉아 서로를 보고, 서로에게 말할 수 있었다. 공론장 참여자들의 불분명하면서도 묘한 위치들이 오히려 발언자의 주장을 더 집중해서 듣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소요(騷擾)의 틈 속에 소요(逍遙)하기

  공론장이 진행된 후 나는 공공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완결 짓지 못하고 파편화된 입장과 상황들만 어설프게 되짚어 보게 되었다. (핑계를 대자면) 로잘린 도이치는 이미 ‘모든 가능한 미학적 접근을 동원해도 최근 공공미술 작품의 상황을 설명하지 못하며, 대안적이고 변혁적인 실행에 맞는 적당한 용어도 제안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정리가 불가능한 상태 자체가 공공미술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따라서 지금부터 나는 <2021 프로젝트 영도>의 소요(騷擾) 속을 소요(逍遙, 산보, 산책, 유보)하듯, 그동안의 과정을 서술해보고자 한다. 여기서 ‘소요’ 속을 ‘소요’한다는, 말장난 같은 이 표현에 나는 꽤 진심인 편인데, 이 두 ‘소요’는 같은 소리와 철자를 이루는 단어이지만 중의적 의미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공공미술이 불러일으키는 어떤 사고상태와 매우 흡사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소요(騷擾) 속을 소요(逍遙)하면, 일정 시간 동안 지속된 이동을 통해 얻어진 정보의 경험과 기억들이 축적되는데, 그것은 소요(騷擾, 또는 소동, 소란)라는 특성이 가지고 있는 번잡스럽고 집중하기 어려운 산만함으로 인해 파편적인 단상을 만들어 낸다. 따라서 이 글 또한 어떤 부분과 부분이 필연적으로 연결되고 들어맞지는 않는다. 나는 그렇게 들어맞지 않는 틈 사이의 불편한 긴장감과 어색한 사고의 경로를 따라가 보고자 한다. 마치 <2021 프로젝트 영도>의 공론장에서 하나로 정리되지 못하고 배회했던 주장들처럼.

혁신도시의 절영마 동상[8]

  공공미술의 공적 자금(흔히 공공미술을 비판하는 언론 기사의 제목 ‘국민 세금으로 이런 걸…’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빌미 또는 비판)은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한다. 웬만한 대형 전시에 사용되는 예산과 맞먹는 공공미술의 사업규모로 인해 공공미술은 무리한 정당성을 부여받게 된다. 즉 ‘모두’를 생각해야 하고 ‘모두’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영웅적인 신화 같은 당위를 요구받게 된다. 그러나 공공미술은 자주 ‘모두’ 만족할 수 없는 초유의 사태를 일으키는데, 결국 신화는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환상 같은 허구라는 사실을 공공미술 사업이 끝난 후에야 알게 된다.

영도 동삼혁신지구 아미르공원의 절영마 동상. 출처:&nbsp;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300&key=20181220.99099008983

‘재개발 르네상스 조합원 모집’ 벽보

  공공미술은 1960년대 미국이 경제적 호황을 누리며 거대한 메트로 폴리탄의 마천루를 세우던 시점에 발명되었다는 점을 잊지 말자. 여기서 핵심 질문은 ‘누가, 왜 발명했는가’이다. 이제는 그 발명품을 좀 다르게 써볼 수도 있지 않을까.

흰여울마을의 울퉁불퉁한 시멘트 계단

  서울 강남과, 인천의 송도, 부산의 센텀시티의 공공미술은 생활권과 거리가 있는 장소에 놓이며 (그곳의 거주공간은 거주자의 삶이 구경거리가 될 빌미를 차단한다), 높고, 크며, 반짝이고 매끄러운 반면, 서울의 이화마을, 통영의 동피랑, 영도의 흰여울마을에는 그와 정확히 반대되는 (실 주민들의 거주공간과 벽돌만큼의 두께로 밀착되어 있는) 공공미술이 실행되는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관음증적 시선을 즐거워할 만한 사람은 없다.

 ‘대한민국 조선 1번지’ 돌 조형물

  부산 영도는 이른바 ‘소멸도시’로 고시되었다. 그럼에도 외국인과 다문화가정은 증가 추세인데, 그중 다수는 조선소의 노동자들이다. 영도의 조선소의 크기는 쉽게 묘사할 수 없는 스케일과 아우라를 형성하고 있는데, 그 속에 외국인 노동자들 또한 위험의 외주화가 되는 육체가 되고 있다. 부산 영도의 대표 기업인 한진중공업에서 한 노동자는 309일 동안 고공농성을 했다. 이 사실 앞에 ‘대한민국 조선 1번지’라는 영도의 공공미술은 어떤 것이 가능할까.

국제결혼 현수막

  <2021 프로젝트 영도>에서 임시적 설치했던 현수막들은 질문들과 몇 가지의 언명들 (가령, 이 벽화를-, 이 마을을-, 이 기억을-, 지워도 되겠습니까?)로 인쇄되어 도시 곳곳에 설치되었는데, 그로 인한 언캐니한 소요(騷擾)는 매우 다양하게 드러났다. 그렇다면 부산 영도의 ‘국제결혼’, ‘남성수술’, ‘우리도 새 아파트’라고 쓰인 현수막들 (또는 공공게시물)에 대해서도 열화와 같은 소요(騷擾)를 일으켜야 마땅하지 않은가.

포토존

  공공미술로 보기 좋은(인스타 사진을 찍기 좋은) 마을을 만든다는 것은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 그 ‘보기 좋은 상태’를 만들기 위해 지우고 없애야 하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고, 근본적으로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보기 좋아야 하는가’를 질문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질문들의 끝은 결국 공공미술은 의외로 (사실은 당연히) 부동산 문제에 천착할 수밖에 없다는 씁쓸한 결론이 도출된다. (‘예술을 이야기하는데 부동산이 여기서 왜 나와?’라고 누군가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물망

  공공미술이 실행될 때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관계된다. 그 속에는 크고 작은 헤게모니가 (촘촘하게) 작동된다. 알고 보면 공공미술을 결정짓는 것은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가 아니라 공공미술을 이루고 있는 관계망이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예술가가 아닌 이상, 예술가 뜻대로 되는 공공 미술은 매우 드물다)

  <2021 프로젝트 영도>의 기획은 ‘공공미술(벽화, 아트벤치, 조형물)을 하지 않는 공공미술’이라 도 말할 수 있는데, 이러한 예술가들의 실험이 이른바 주최 측에게 ‘결재’될 수 있었다는 지점은 매우 고무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공공미술은 ‘성과’와 ‘모범사례’를 창출하여 공적자금을 지출하는 주최 측에게 (담당자의 진급에) 긍정적 요소를 제공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2021 프로젝트 영도>의 주최 측은 파격적인 행보를 실행했다. 사실 ‘파격’이란 문화계 공무원이 가장 기피해야 할 태도다. 즉 ’파격’ (또는 실험)은 ‘적당히’ 문제없이 사업을 종료하여 ‘민원’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피해 갈 수 있는 안전한 방법의 반대말이다.

  그러므로 공공미술은 완료 후,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누군가가 제기하는 민원에도 끄떡없는 것이어야 한다. 시작과 방향, 진행은 주최 측과 기획자, 예술가가 만들 수 있으나 결국 ‘민원’이라는 화살이 공공미술의 존폐를 결정지을 수도 있다. 공공미술은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도시적 재난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민원과 항의로 인해 힘없이 사라지고 마는, 별 것 아닌 것이다. (공공미술에 가해지는 여러 비판의 강도만큼 공공건축에도 비난은 난무하지만 그렇다고 건축물이 철거되는 일은 웬만해서는 벌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하자. 앗, 재개발 재건축은 예외사항이다.)

<2021 프로젝트 영도> 공론장 모습, 출처 : 권은비

영도 어딘가의 창고

  <2021 프로젝트 영도>는 ‘이 벽화를 지워도 되겠습니까?’라는 질문을 시작했지만 이 질문의 방점은 사실 ‘벽화’보다는 ‘마을’ 또는 ‘도시’에 있었다. 특히 지난겨울에 진행되었던 <2021 프로젝트 영도>의 공론장에서는 서로 이해되지 않는 질문과 이어지지 못하는 대화, 어긋나는 답변들이 출몰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애초에 ‘하나의 답’이자 ‘모두의 답’이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공공 미술에 대한 여러 개인들의 상이한 입장들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 자체로 입장과 입장 사이에 얼마만큼의 거리와 차이가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벽화를 쉽게 그리고 지우는 것처럼 마을과 도시를 쉽게 만들고 지워도 되겠냐는 <2021 프로젝트 영도>의 물음은 일종의 수사학적 소거법이었는데 미지수는 풀리지 못했다. 풀지 못한 문제들과 질문의 의도가 제대로 누군가에게 닿지 못한 ‘질문들’은 늘 그렇듯, 사업기간 종료를 맞이하여 박스채 창고에 쌓여있게 되거나 폐기되기 마련이다.

  결국 공공미술을 통해 부산 영도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도시의 모순들과도 화해하지 못했다. (애초에 화해 자체가 불가능했는지도…) 그러므로 공공미술에서 소요(騷擾)는 계속 벌어질 수밖에 없는 과정이라는 것을 이제 받아들이고, 관망하기보다는 그 속에서 함께 소요(騷擾)하기를, 소요(騷擾) 중에 소외되는 존재들을 소환하고, 잊혀진 존재들이 스스로 발화할 때, 그때에야 비로소 공공성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묻는다.

이 벽화를 지워도 되겠습니까?

이 좋아요를,

이 공장을,

이 크레인을,

이 아파트를,

이 도시를,

이 기억을,

이 바다를,

이 욕망을




[1] <2021 프로젝트 영도> https://ydct.works2021 프로젝트 영도사물의 기호들 : 익숙함 공공 미술 프로젝트에서는 공간에서의 대내외적인 홍보와 교육 등의 방식으로 사람들의 불만을 유예하거나, 불식시키는 과정이 있다. 이러한 과정은 기획자 혹은 기획ydct.works

[2]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300&key=20220216.99099003761“영도 깡깡이마을 벽화 지워도 되겠습니까” 현수막에 발칵부산 영도구 한 문화단체가 내건 현수막이 논란이 되고 있다. 영도구의 유명 벽화를 지워도 되냐고 묻는 등 난해한 내용에 주민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있다…www.kookje.co.kr

[3] https://www.metroseoul.co.kr/article/20220217500429영도문화도시센터, 공공미술 공론장 행사 개최영도문화도시센터는 오는 19일 블루포트2021에서 예술가, 시민, 기획자 등 다양한 구성원이 모여 공공미술에 관해 토론하는 공론장 ‘이 벽화를 지워도 될까요?’가 열린다고 밝혔다. 이번 프로젝트www.metroseoul.co.kr:443

[4] 여기서 언급하는 조형물, 벽화, 아트벤치 등을 무조건 부정적인 의미로 상정하는 것은 아니다. 천 가지 형태의 공공미술 이 있다면 그중에 하나쯤은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의미다.

[5] <2021 프로젝트 영도> 공론장은 2022년 2월 19일 19일 부산 영도의 블루포트 2021에서 온-오프라인으로 진행되었다. 공론장 참여자들은 소위 전문가와 일반인 구분 없이 산발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선택할 수 있었다. 의자는 참여자들이 서로 마주 보는 형태로 놓여 누군가가 발언을 할 경우 쉽게 발언자를 볼 수 있도록 배치되었다. 참여자가 발언할 때 자기소개를 하지 않고 진행되는 경우가 다수였기 때문에 공론장 참여자들은 서로 어떤 역할로서 입장을 표명하는지를 명확히 알 수 없었다.

[6] 공론장에 참여했던 제3의 시선을 볼 수 있는 글을 여기를 참조하길 바란다. https://culture-policy-review.tistory.com/207[리뷰] ‘이 벽화를 지워도 되겠습니까?’가 남긴 것 – 영도 공공미술 공론장 후기올해 2월 ‘프로젝트 영도’의 공공미술 공론장 사전 퍼포먼스로 게시된 현수막에 대한 반응이 뜨거웠다. “이 벽화를 지워도 되겠습니까?”라는 문장은 한 동안 문화예술계 인culture-policy-review.tistory.com

[7] 공론장에 대한 언론 기사 내용은 여기 http://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22022015022422369‘이 벽화를 지워도 되겠습니까?’ 도발적 질문의 내막은…공공미술에 대한 공론장을 만든 ‘프로젝트 영도’ 팀이 영도구 대평동 아파트에 그려진 벽화 옆에 ‘이 벽화를 지워도 되겠습니까?’ 현수막을 걸었다가…www.busan.com

[8] 절영마’는 그 속도도 너무 빨라 그림자가 따라오지 못하고 끊어진다는 부산 영도의 전설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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