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역사박물관 – 세계의 주인이 되기 위한 다섯 단계

하 닌 팜(Hà Ninh Pham)

이 글은 하 닌 팜이 박사 논문으로 작성 중인 『미래를 위한 형이상학적 지도 제작(Metaphysical Cartography for the Future)』에서 발췌・편집되었습니다. 이 논문에서 그는 ‘Country X’라는 상상의 나라를 탐색하며 이곳에서 깊은 소속감을 느낍니다. Country X의 거주민들은 다양한 물리적 장소와 시간으로부터 왔지만, 이들은 모두 이 나라의 정체성을 공유하고 공동의 적을 향한 공통된 적대감으로 결속되어 있습니다.

  Country X의 역사는 전통적이고 물리적인 시간 관념을 초월한다. 그리고 그곳에서만 펼쳐지는 차원을 바탕으로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를 연결한다. 이러한 상상력 넘치는 역사 서술을 단순히 미학적 도피쯤으로 간주한다면 곤란하다. Country X를 통해 내가 나의 정체성을 확인 받듯이, 소위 허구라고 불리는 것은 현실을 바라보는 데 가장 효과적인 시선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 도출
역사에 관한 여러 가지 의문이 시작된 것은 어릴 적, 첫 글자를 대문자로 쓴 ‘History’를 마주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6학년 때 정규 교과목으로 접하기 시작한 역사(History) 수업은 12학년 때까지 계속되었다. 베트남 공교육에서의 역사 교육은 그 안에 깃든 명백한 민족주의적 편향으로 인해 학생들에게 매우 지루한 과목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 과목은 아이들이 세상을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 복잡한 현실을 둘로 나누어 빨간색은 우리 편, 검은색은 적으로 단순화시켰다.[1] 국정 교과서에 언급된 모든 역사적 사건들은 항상 ‘좋음’과 ‘나쁨’으로 거칠게 구분되었고, 학생들은 거기에 등장하는 감정적 형용사를 통해 이를 직관적으로 분류할 수 있었다. 이런 선전적인 접근 방식은 아이들의 국가 정체성 확립에는 효과적이었는지 모르지만, 역사 과목 자체를 비논리적이고 무의미한 것으로 퇴색시키면서 국가가 한없이 멀고 낯선 존재가 되게 만들었다. 대체로 시험이 끝나면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던지는 첫 번째 질문은, 어떻게 하면 역사 과목이 선전 조작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 애국심을 기르는 데 기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역사 교육에 대한 두 번째 질문은 내가 미국에 있는 동안 국제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떠올랐다. 베트남에서는 정치가 일상과 무관했기 때문에, 2016년 미국에서 경험한 이곳의 정치적 분위기는 나에게 충격적이었다. 이때, 각자의 입장에서 역사가 수많은 타당한 방식으로 서술되는 한, 역사는 정치적 대상이라는 사실을 확연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 여러 가지 서술 중에서 어떤 해석이 주목받을지는 승리한 쪽이 결정한다는 것도 말이다. 요즘은 승리한 쪽이 실리적인 시각을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베트남에서는 역사학자들이 국가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해 역사 해석을 진행하는 경향이 있는데, 특히 중국 및 서방과의 관계를 중시한다. 반면, 서구에서는 베트남 역사를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사회주의, 포스트식민주의 등 유럽의 이념적 틀을 재확인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방식 모두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게 해 주는 편리한 도구에 불과할 뿐,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 같지는 않다. 뿐만 아니라, 이 같은 역사 해석은 상당히 역설적인 이유를 배경으로 존재한다. 오로지 현상 유지를 위해서 변화를 모색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두 번째 질문은 역사를 어떻게 써야 국가가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면서도 모순이나 위선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무드 보드[2]
  나는 이 두 가지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다른 문화권이 미래를 어떻게 상상하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몇 가지 영감을 얻었다. 먼저, 미국에서는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역사를 열차에 빗대어 이 열차가 서구 자유민주주의 모델이라는 종착역에 도달한 것으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서구 자유민주주의 모델은 인류가 만들어낸 정부 형태의 최종 단계로서 이것은 이념 경쟁으로 점철된 역사의 발달을 사실상 종결 짓는다.[3] 유럽에서는 헤겔이 역사가 특정한 목적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그는 역사가 가진 목적이란 자유의 정신적 의식을 점차 드러내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에 영향을 받은 슬라보이 지젝은 “행동하지 말고 생각하라”는 모토를 가지고 복잡한 분석을 제시하며 비관적인 분위기를 내비추기도 했다.[4] 중국의 경우, ‘중국몽’이 서양에 대한 굴욕과 열등감을 치유하는 동시에 보편적 가치를 재창조할 미래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이와는 달리, 외교적 다양성을 중시하면서도 변화를 주도하는 데는 신중한 접근을 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미래관은 나에게 많은 자극을 주지만, 이 중 어느 하나도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한 완벽한 해답이 된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디자인 개발
  준비를 마쳤으니, 이제 나만의 역사관을 디자인할 차례다. 우선 진보라는 주제부터 살펴보자. 역사가 어떤 운명 위에서 전개되는지를 역설한 헤겔의 관점은 꽤 흥미롭다. 그 생각은 일면 진보적 느낌을 자아내고 있지만, 자유라는 개념에 너무 의존하고 있어 나에게는 낯설게 느껴진다. 그래서 이 역사적 원동력을 우리나라의 맥락에 더 적합한 ‘독립’이라는 개념으로 대체하는 것이 좋겠다. 반면, 후쿠야마의 이론은 다소 단순한 데가 있다. 전 세계가 운명적으로 자유 민주주의를 취할 것이라는 생각은 현실과 잘 맞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모든 나라를 구제한다고 단정지어서도 안 된다.[5] 현대적 맥락에서는 오히려 그 반대로 작동하는 것 같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상대적으로 앞선 다음에야 민주주의의 필요성을 자각하는 것이다. 또한, 어떤 나라들에게 있어 민주주의는 단순히 덤일 뿐이다. 게다가 민주주의의 본질은 다양한 형태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어, 나는 중국몽을 통해 명확하게 적을 설정하는 방법을 고찰한다. 이 방법은 현재의 소속감을 보다 강화하고 도전에 맞서려는 의지를 더욱 탄탄하게 다질 수 있다는 데 그 유용성이 있다. 그러나 나는 ‘중국몽’이라는 말에서처럼 특정 국가를 연결시키는 발상에는 반대한다. 이러한 연계는 보편적인 성공 모델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동남아시아에서의 내 경험에 비추어볼 때, 특정 지역에 뿌리를 두고 강대국의 거대 서사에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역사와 미래를 새롭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핵심은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노력하는 것이다. 역사는 창의적으로 다시 쓸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말하지 못한 목소리조차 차츰 들릴 수 있다. 의지만 있다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만들 수도 있다. 중국 작가 루쉰 (1881-1936)의 말을 상기해 보자. “희망이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곳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디자인 결과물
  우리나라의 역사는 곧 Country X의 역사다. 사상독립자주인민국 Country X 말이다. 이 나라의 역사는 특정한 물리적 장소에 묶여 있지 않으면서 이곳 국민들에게 독립이라는 공통의 이념에 대한 소속감을 제공한다. 또한 이 나라는 후기 식민주의자들, 실용주의자들, 학문적 엘리트주의자들 등과 지속적으로 맞서싸우고 있다. 이러한 갈등을 통해 Country X는 계속 발전하는 정체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Country X의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점진적으로 펼쳐지는 독립 의식이다. 고유한 정체성으로서의 Country X는 다섯 단계를 거쳐 역사의 종착지에 도착하며, 그곳에서 세계의 주인으로 탄생한다. 다섯 단계란 아래와 같다. 여기서 나는 역사에 관여하는 존재를 가리키고자 ‘주체’라는 용어를 도입한다. 그러나 이때의 주체는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이 아니다. 주체는 신념에 따라 정의되는 단위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신념을 가지고 있으면 그는 여러 개의 주체를 가질 수 있다.

다섯 단계

  1. 원시적 단계: 이 단계에서 주체는 이념에 대한 인식이 없다. 주체는 이념의 영향을 받지 않고, 희망이나 욕망 없이 그저 살아간다. 세상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도 없다.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그림에서 이러한 원시적인 주체를 찾아볼 수 있다.

  2. 노예적 단계: 이 단계에서 주체는 이념을 인식하기 시작하지만, 이에 순응하거나 그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영향력을 줄이려 한다. 이러한 시도는 대개 세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주체 자신을 향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노예적인 주체의 예를 일부 종교 전통이나 자기계발서에서 볼 수 있다.
  3. 고아적 단계: 이 단계에서 주체는 이념의 중요성을 완전히 인식하고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다룰 방법을 찾지 못한다. 주체는 이념의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때로는 모호한 언어나 불확실한 논리, 또는 비윤리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주체는 진정한 희망이나 비전을 가지고 있지 않다. 현재의 이념적 의존에 만족하지는 않지만 강력한 반대 의견을 형성하는 것 또한 능력 밖의 일이다. 이념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행동은 너무 큰 대가를 수반하기 때문에 과감하게 나아가지 못한다. 이 단계에서 주체는 일관성과 확신이 부족하다. 현재의 제도에 굴복하면서 과거를 개탄하고, 동시에 미래를 조롱한다. 현대 서구 철학, 특히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식민주의에서 이러한 고아적 주체를 찾을 수 있다.
  4. 혁명적 단계: 이 단계에서 주체는 억압적인 이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큰 대가를 치르기로 한다. 주체는 이제 처음으로 독립을 위해 강력한 주장을 내세울 수 있는 개척자가 되어 있다. 그리고 그가 외치는 주장은 다른 주체들의 호응을 얻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지불하는 가장 큰 대가는 이념에 대항하여 싸운 뒤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싸움은 주체를 전투자로, 나아가 성공적인 전투자로 규정한다. 그리고 주체는 완전한 독립을 느끼기 위해 더욱 이 같은 상황을 따른다. 이 단계의 주체는 성공적이고 희망적이며 사명감에 차 있지만, 자신의 성공을 독립적으로 정의할 수 없다. 주체는 타인이 만든 이념에 기반하여 존재한다. 파블로 피카소와 같은 회화 거장들이 바로 이 단계에 해당하는 혁명적인 주체다.
  5. 주인적 단계: 이 단계에서 주체는 독립에 대한 종합적인 개념을 완성할 뿐만 아니라, 이를 실제로 실현하고 재창조한다. 또한, 이 상태에서 주체는 자신만의 이념을 실천하며, 자신의 포괄적인 아우라를 통해 이념을 투사하고 주위에 영향을 미친다. 비로소 주체는 역사가 어떻게 흘러왔고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지를 결정하는 세계의 주인으로 보인다. 해당 주체는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보편성을 만들어낸다. 이 보편성은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해 본 것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이 단계에서의 주인적 주체를 대표하는 예로는 주류 예술계를 벗어나 독창적인 시각을 내뿜는 예술가들을 꼽을 수 있다.

결론
  Country X의 역사는 역사 문제에 대한 잠재적인 해결책을 제공한다. 이 역사 개념은 누구나 자신을 그 안에서 새롭게 재창조할 수 있게 도와준다. 우리가 스스로를 역사 속에서 발견할 때 우리는 그 역사를 소중히 여기고 책임감을 느끼게 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과정이 있어야 비로소 어떤 역사든 ‘진정한 역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 역사 속 어디에 위치하고 있을까? 예술가이자 학술가로서 나는 지금 이 순간, 나의 장기 예술 프로젝트 가 위의 4단계에 속한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내가 나아가야 할 단계는 아직 하나 더 남아 있는 셈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로서는 내가 그 마지막에 도달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누군가는 세계의 주인이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을 내게 이렇게 일러 주었다. 지금과 같은 소통과 교류로부터 기대를 거둔 채 외딴 곳에 정착한 뒤, 좋은 작업실을 마련하고, 나의 이념을 알뜰히 실천하며 그 속에서 삶을 마감하는 것이라고.

저자 소개
1991년생 하 닌 팜은 베트남 하노이 출신 예술가다. 그의 작업은 영토를 멀리 떨어져 바라볼때 이에 관한 이해가 어떻게 구축되는지를 탐구한다. 하 닌 팜은 2014년 베트남 미술대학교 (Vietnam University of Fine Arts)에서 학사, 2018년 펜실베이니아 미술아카데미 (Pennsylvania Academy of the Fine Arts)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2019년 뉴욕 FRONT Art Space에서 열린 ⟪Cheat Codes⟫ (Passenger Pigeon Press 큐레이션), 2021년 싱가포르 S.E.A Focus에서 열린 ⟪Institute of Distance⟫ (Michael Lee 큐레이션), 2022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A+ Works of Art에서 열린 ⟪Recursive Fables⟫ (Vân Đỗ 큐레이션)가 있다. 하 닌 팜은 A+ Works of Art의 전속 작가이며, 현재 RMIT University Vietnam에서 디자인 학부 강사로 재직 중이다.

역자 소개
김보슬은 문화를 근간으로 하는 국제교류 사업 매니저로, 실내건축, 공공예술, 지리학을 전공한 뒤 미시적 접근과 거시적 접근을 아우르는 다양한 스케일의 장소 기반 콘텐츠를 만들어 왔다. 국제대회의 문화행사, 아티스트의 해외 진출, 지방정부의 로컬 브랜딩, 글로벌 기업의 디지털 브랜딩 등 공공과 민간 부문을 넘나들면서 초국적 공간에서의 문화 마케팅 활동과 예술 프로젝트를 다룬다. 지도와 사전 읽기를 좋아하여 공간과 언어를 오랫동안 벗삼고 있으며, 도시와 인물을 취재하고 글을 쓰며 번역 작업을 진행한다.


[1] Voice of America. (2017). Tranh luận chung quanh từ ‘ngụy quân’, ‘ngụy quyền’. [online] Available at: https://www.voatiengviet.com/a/tranh-luan-chung-quanh-tu-nguy-quan-nguy-quyen/3995968.html [Accessed 26 May 2024].

[2] 역자주: ‘무드 보드’는 일반적으로 디자인 프로젝트나 예술 작업에서 시각적 아이디어 또는 감성적 영감을 모아 정리한 자료판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개념과 표현의 방향을 정립하기 위해 다양한 이미지, 색상, 텍스처 등을 조합한 한 장의 자료다.

[3] Mueller, J. (2014). Did History End? Assessing the Fukuyama Thesis. Political Science Quarterly, 129(1), pp.35–54. doi:https://doi.org/10.1002/polq.12147.

[4] Big Think. (n.d.). Don’t Act. Just Think. [online] Available at: https://bigthink.com/videos/dont-act-just-think/.

[5] Guha, R. (2008). India after Gandhi : the history of the world’s largest democracy. New York, N.Y.: Ec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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