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왕: 지방 미술대생 수기, 당사자라서 반박 안 받음

황규민

지방 미술대학 생활에 관한 짧은 수기

  2012년 지방 미대의 디자인학과에 입학했다. 첫 1학년 동안은 그냥 재미가 있었다. 노는 것도 노는 것이지만, 대부분의 과제가 ‘잘’ 그리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림을 ‘잘’ 그리는 것과 미술에 대한 이해를 성숙시키는 일은 아주 다른 것이다. 당시 내가 미술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냐면, 학교에서 광주비엔날레를 데려갔었는데 아주 빠른 걸음으로 전시를 훑고, 근처 광주시립미술관에 들러 그림을 손으로 만지다가 전시실 경비 아저씨에게 크게 혼이 났던 기억만 남아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그때 손으로 만졌던 작품이 이우환의 것이었다는 그런 일화가 있다. 아무튼, 그렇게 즐겁기만 한 1년을 보낸 후 나는 군대로 떠났다.

  내가 디자인이 아니라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을 때가 2015년이다. 당시에는 주로 SNS를 통해서 다른 작가들의 그림을 접했었다. 애초에 수도권에 집중된 문화시설 덕택에 지방에선 제대로 된 전시를 볼 기회와 커뮤니티가 드물기도 했다. 당시 서울에서는 소위 SNS와 스마트폰 매체에 관한 비평적 담론과 이에 기반한 미술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음을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그들이 소위 인터넷에 기반한 초연결 예술 활동을 전개한다고 한들 이와 관련된 전시는 전부 서울이라는 물리적인 장소에서 열렸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내가 SNS를 통해서 미술을 접한 감상은 말 그대로 평면적이기 그지없었는데, 그냥 나도 SNS에서 ‘좋아요’를 많이 받는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게 그림을 그려보자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런 와중에 평소 인스타그램에서 좋아하던 작가가 수강생을 구한다는 글을 보았고 곧바로 dm을 보냈다.

  그로부터 2달 동안을 꼬박 주 1회씩 대전에서 서울에 오가며 그림을 그렸다. 곰팡내 물씬 나는 연희동 어느 지하실에서 시작된 내 그림 생활은 이후 서울에 사는 친구 집에서 10개월간을 동고동락하는 생활로 이어졌다. 그 시기에는 알바를 하며, 문래동에 작업실 공간을 구해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주로 락카와 아크릴을 이용해서 ‘자유분방해 보이는’ 무언가를 그리고자 했다. 여전히 나는 대부분의 전시나 작품들을 인스타에서 보았고, 그러다 처음으로 아트페어란 곳에 가봤다. 거기서 나는 지금까지 내가 그려오던 그림은 아무런 내용도 없고 빈 껍데기에 불과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려 아트페어를 보고서 나는 그런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다. 그때는 아트페어가 단순히 미술의 시장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진짜 미술의 필드 전부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그림은 시장이 원하는 모양새는 아니겠다는 생각에 이제부터는 좀 진지해 보이는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서울 생활을 접고 대전으로 돌아와 회화과로 전과했다.

  회화과로 전과한 후에는 역시나 과제를 열심히 수행하며, 학교가 원했던 방향으로 그림을 꾸역꾸역 채워 나갔다. 여전히 그림을 ‘잘’그리는 것에 불과한 일이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정말 신세를 망치는 지름길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처음으로 미술 제도권 안에서, 그것도 동기들보다 늦게 회화과에 왔는데도 성적이 썩 괜찮게 나오길래 난 내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학교의 강사들이나 교수들의 수업방식은 그림의 내용이나 비주얼이 비슷해 보이는 작가를 추천해주는 일이 전부였다. 지금 기억나는 수업의 내용들을 기록해 보자. h 강사의 수업은 3가지 다른 스타일의 그림을 그리라는 것,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좋아했던 작가들의 그림을 보여주며 “이런 식으로 하겠습니다.”라고 말했고, 돌아오는 대답은 “어, 그래 잘해보자”였다. 한 학기 동안 기억나는 대화는 외관상 비슷해 보이는 다른 작가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런 것도 있어”, “잘하고 있어” 가 전부였다. 다른 강사들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소수의 강사 빼고는 그림 좀 팔아본 작가들이 강사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그들 중엔 지금 와서 생각해도 괜찮은 작업을 하는 작가도 있었지만, 그것조차 운 좋게 얻어걸린 느낌이 강했다. 그들도 별반 다를 거 없는 수업을 진행한 것은 매한가지였으니까. 뭐 그래도 덕분에 시장성이 있는 작품들에 대한 감각은 꽤 터득했다. 슬프게도 그러한 감각의 유효기간은 길어야 1년이 될까 말까지만 말이다.

  또 하나 재밌었던 기억은 마치 하나의 관습처럼 학교의 학생들이 너 나 할 거 없이 아시아프에 지원한다는 것이다. 아시아프 공모 기간에 수업을 들어왔던 대다수 교수와 강사들도 아시아프 공모에 참여해보라고 권유했던 터다. 그렇기에 아시아프 공모에 당선되어 전시하는 학우는 큰 부러움을 사는 대상이었고, 큰 영애를 얻은 것처럼 여겨졌다. 아시아프 말고도 ‘대전미술대전’이라는 타이틀로 작품들에 순위를 매기는 전시에도 참여하도록 교수들의 은근한 압박이 가해지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대전미술대전’의 본상은 1회만 참여해서 받을 수 없다는 얘기와 대상의 경우엔 대전지역의 대학교가 나눠 가져간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은 아니지만 실제로 대상 선정자가 취소된 경우도 있다. 대전시의 압박 때문에 그랬다고 한다. 어쨌거나, 나도 아시아프에 공모도 내보고, 대전미술대전에 출품도 했더랬다. 또 그런 전시에 알맞아 보이는 작품을 제작하려 열심히 했다. 꽤 만족스러운 1년이었다. 공모도 내보고 전시도 해보고, 어쭙잖은 나의 작품에 어쭙잖은 변명을 하면 성적도 잘 주고 장학금까지 챙겨줬으니까. 이처럼 자기 뽕에 취하며 시간을 보냈다.

  해가 바뀌고 졸업반이 되었을 때쯤 내 작업에 대해 의심을 품게 만드는 계기가 있었다. 레지던시 프로그램이란 걸 처음 알고 오픈 스튜디오란 곳을 방문하고 나서였다. 그저 회화가 아닌,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는 작가들을 처음 만났는데, 나는 그것만으로도 좀 혼란스러워졌다. 집에 돌아와 전국 각지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검색해 보고, 참여했거나 참여 중인 작가들을 찾아봤다. 작가들의 사이트에 들어가 작업을 보고, 작가 노트를 보고, CV를 보며 나는 내가 생각하던 미술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들이 작업을 하는 방식과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주제들, 태도 같은 것들이 지금껏 내가 미술이라고 배워오던 것들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느꼈다. 그 이후로 나는 전처럼 작업하는 게 어려워졌다. 소위 말하는 ‘소재주의’에 빠져 의미 없는 자기 복제 이미지만을 그려내면 됐었는데, 어찌어찌 그림은 그릴 수 있었는데 이후로는 그럴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그렇게 학부 마지막 학년은 아무런 작업도 하지 못한 채 마무리되어 갔다. 4학년 실기 수업은 진짜 별거 없었다. 졸업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명목하에 방목에 가까운 수업을 진행했다. 공허한 회화작품들로 대학 생활의 마침표를 찍었다.

지방 미술에 관심을 기울이기 위한 단서, ‘소재주의’란 무엇인가?

  여러분들은 지방 미대의 학우들이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최소한 그들의 그림은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너무 공격적인 질문인 걸까? 어쩌면 그들 스스로가 비평의 대상이 되기를 원치 않을 수 있다. 실은 나 또한 그랬기 때문이다. 일단 비평이 무엇인지 접할 기회가 없었다. 학교의 교수, 강사진들은 모두 작가들로 채워져 있고 그들은 비평에 관해서 그다지 말하지 않거나, 지독하게 냉소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 그냥 뭐 유명한 평론가에게 글 하나 받으면 유리하다 정도의 인식이다. 그러니 비평의 내용에 관해서도 그다지 진지하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흥미로운 점은 이 같은 비평에 관한 냉소를 마치 확고한 미적 태도로 포장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의 작품들이 비평적으로 선호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까닭일까, 작품의 해석에 관해서 한없이 관대한 태도를 보인다. 그들은 이 같은 태도를 작품에 대해 열린 해석이라는 둥, 다원주의적인 태도로 포장하곤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뭐 작품에 대한 해석이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은 번듯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비평이라는 것이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 속에서 일관된 해석을 개진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런 열린 해석을 가장한 관대함 속에서 비평이 싹트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아무튼, 그래서 ‘소재주의’란 무엇인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지방의 미술은 방어적인 다원주의를 특유의 미학적 태도로 삼는다. 이 때문에 그들의 미술은 다원적으로 다양해야 마땅한데, 놀랍게도 그들의 작업은 하나의 경향성으로 수렴되곤 한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소재주의다. 소재주의의 의미는 말 그대로 특정한 소재에 천착하는 작업의 경향을 일컫는다. 지역의 미술은 유독 이 같은 소재주의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원인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일단 대학 커리큘럼 자체가 개개인의 학생들이 각자의 소재주의를 개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또한 그들이 중요한 미술 필드로 삼는 아시아프나 여타의 미술시장들이 그러한 소재주의 미술로 여겨지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 한 번쯤 아시아프를 관람해본 적이 있다면 어렴풋이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촌스러운 작품들 사이에는 놀랍게도 어떤 경향성이 있는 것 같다고, 물론 그 누구도 아시아프를 진지한 비평의 대상으로 삼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경향성이 규명될 길은 없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경향성에 관한 적절한 해설을 찾은 적이 있는데, 이는 아시아프의 1회 총감독이기도 한 유진상 평론가의 글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그는 놀랍게도 당시 아시아프에 출품된 작품들 사이의 경향성을 읽어내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국 팝아트는 상품과 상표, 일본 팝아트는 망가(만화의 일본식 표현)와 전통 목판화인 우키요에에 뿌리를 두고, 중국 팝아트는 전통 인물화와 아픈 근대사를 냉소적으로 다루는 정치적 팝아트라면 《아시아프》의 한국 작품들은 한국적인 이야기(스토리)에 대한 선호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 “자신이 직접 체험한 경험의 작은 부분을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한국 작가들의 작품“이 하나의 경향성으로 나타나며, 이어서 그는 이를 ‘드라마틱 팝아트’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고 평한다. 아시아프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 미술의 미학에 관한 실로 적절한 해설이 아닌가 싶다.[1]

동 대학원 가기 = 자폭하기

  같은 학교 대학원에 왔다. 여태까지 내가 쓴 말들에 의하면 난 동 대학원에 가면 안 된다. 그래도 핑계를 대보자면 4학년에 올라갈 무렵 ‘학’ 석사 통합 과정(대학교 수업과 대학원 수업을 병행하는 과정)을 신청했기에 대학원 1년 과정을 마친 꼴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대학교 졸업 후 대학원을 1년만 다니면 졸업을 할 수 있는 메리트가 생겼었고, 조교 일을 하게 되면 대학원 수업비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점 때문에 대학원을 진학하게 되었다. 내가 여기서 뜻깊은 무언가를 배워서 작업에 임해야겠다는 생각은 진즉에 없었고, 학비를 내지 않고 작업실을 쓸 수 있다는 생각에 안일한 선택을 하게 되었다. 애초에 생각이 글러 먹었기에 작업도 진전이 없었고, 서울에 많은 전시회를 다니며 ‘나는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건지’라는 생각으로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이때까지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잘 몰랐다) 이러한 증세는 net 세상을 디깅하는 나로부터 더 가속화되었다. 재미있는 비평 글을 발견하면 나의 생각 따윈 존재하지 않고 공감하기 바빴으며, 좀 힙한? 힙해 보이는? 작업을 한 이들을 보면 ‘나도 저런 거 해야 하나’, ‘나도 저런 거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이런 쓰잘머리 없는 생각들로 고민만 하며 시간을 낭비하게 되었다. 결국엔 대학교 4학년 때부터 대학원 마지막 학기까지 1년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작업 하나 제대로 한 게 없다. 그러다 보니 미술은 너무 어렵고, 나와는 맞지 않는다는 핑계로 자연스레 작업에 대한 욕망을 숨기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으로 여길 수 있는 건 애초에 없던 기대감으로 실망감도 가져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런 걸 다행으로 여긴 나에 대해 생각하니 너무 한심하고, 가엽고, 딱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지잡대’라는 로컬리티를 경유하는 정체성

  사회학자 최종렬은 가상의 지잡대 복학생 ‘우기명’이란 캐릭터의 앰생 일대기를 다룬 웹툰 ‘복학왕’으로부터 착안하여 소위 지잡대생이라 불리우는 앰생들의 이야기를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는 텍스트를 저술했다. 그는 글에서 지잡대생이라는 독특한 정체성이 갖게 되는 습성 4가지에 관해서 이야기하는데, 그중 3가지는 지금 우리들의 이야기에도 의미심장하게 시사하는 바가 있어 보인다. 이 3가지의 습성은 다음과 같다. ‘알지 않으려는 의지’, ‘성찰적 겸연쩍음’, ‘적당주의 집단 스타일’. 물론 이 같은 습성은 결코 그들의 지능이 딸리거나 태생적으로 못나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수도권에 대부분의 자본과 기회가 집중된 사태 속에서, 배제된 자들이 갖게 되는 일종의 방어적인 심리 기제인 셈이다. 그리고 그가 보기에 수도권에 집중된 것은 자본과 기회뿐만이 아니다.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 수도권은 담론까지도 독점하곤 한다. 그는 최근 십몇 년간 한국 사회에 나타났던 청년 담론이 실제로는 ‘서울에 거주하는 청년’에 국한되었음을 지적한다. 지방 청년은 단순히 자본과 기회에서 박탈되어 있을 뿐만이 아니라 이야기와 담론에서도 소외되어 있다. 특히나 신자유주의 시기의 청년 주체를 상징하는 이른바 ‘자기 계발하는 청년 주체’는 그가 도출한 ‘알지 않으려는 의지’를 갖는 주체와는 극명히 대비된다. ‘자기 계발하는 주체’가 끊임없이 경제적으로 자신을 계발하는 주체, 즉 현재를 경제적으로 관리하며 경제주의 바깥의 미래를 상상할 수 없게 된 주체를 비판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면 ‘알지 않으려는 의지’를 가진 주체는 그런 협소해진 미래마저도 박탈된 이들일 것이다.

  이 같은 이야기를 지방 미대생에게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자기 계발하는 청년 미술가 주체가 있다. 이를테면 수도권의 이름 있는 미대를 졸업해서 이를 가치 있는 커뮤니티와 이력의 자원으로 삼으며 작가 생활을 시작하고, 졸업 후에는 서울 문화 재단의 공모에 지원하여 작품을 창작하고 전시를 하며 또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포트폴리오 속의 CV와 커리어를 계발하는 청년 미술가의 초상이다. 그런데 이 같은 초상은 과연 지방의 청년 미술가에게도 반영할 수 있는 모습일까?

  계속 한탄만 늘어놓게 되는 이 같은 이야기들 속에 다음은 있을까? 자기 계발 청년 미술가들이 감각할 수 없는 지점이 어쩌면 우리들의 정체성이자 로컬리티이진 않을까? 그들은 자신들이 망했다고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다년간의 지방 대학/대학원 생활로 어차피 망했다는 걸 감각하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의 다음이 유효한 지점은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미술왕 황규민

[1] 이야기 품은 이미지… 한국형 ‘드라마틱 팝아트’의 출현:

http://art.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8/05/2008080500257.html 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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