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가 모여서 세계가 되고, 세계가 부서져서 먼지가 된다. 먼지를 떠나서 세계가 따로 없고, 세계를 떠나서 먼지가 따로 없다. 먼지는 먼지가 아니고 세계는 세계가 아님을 말한 것이다.[1]
나는 4년 전 제주도 서쪽 시골 마을에 위치한 전통 농가를 구해 귤나무, 닭, 개, 사람 그리고 무수히 많은 지상 지하 생명체들과 동거하고 있다. 미술관옆집이라 명명한 이곳에서 창작과 기획을 동반한 예술가를 위한 ‘민박'(a.k.a. 아티스트 레지던시)[2]를 운영하며 다양한 친구를 사귀었는데, 재미있게도 최근 카셀 도큐멘타[3]에서 대대적으로 내세운 슬로건이 바로 ‘예술 대신 친구를 만들자(Make Friends, Not Art)’였다. 중심이랄 곳 없이 분산적이면서도 환대로 가득 찬 이번 도큐멘타15는 내가 생각하는 아나키즘적 로컬리티[4]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사사로운 마음으로 시작한 나의 작은 터전은 제3회 제주비엔날레의 위성전시관 중 하나로 선정되면서 기후 위기 시대를 맞아 북반구 선진국 중심의 현대미술계가 지난 몇 년간 내세운 ‘인류세(anthropocene)’, ‘객체지향존재론(Object Oriented Ontology)’,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등의 키워드들 사이에서 관계미학(relational aesthetic)[5]의 대표작가 리크릿 티라바닛(Rirkrit Tiravanija)[6]의 신작 <무제 2022 (검은 퇴비에 굴복하라)>를 선보였다. 티라바닛은 여러 도내 예술가와의 협업을 통해 장소 특정적 설치 작품을 미술관옆집의 대문, 밖거리(별채), 텃밭, 그리고 귤 창고에 전시했다. 집이라는 특성상 관람은 예약제로 운영했으며 주/5일, 1일/3회, 각 회차당 5명의 손님을 집주인이자 기획자인 내가 직접 맞이하여 약 40분 동안 창작 과정에서 발생한 다사다난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가며 제주와 티라바닛의 만남에 대해 소개했다. 마지막 20분은 귤 창고 안에 설치한 화목난로 주위에 둘러앉아 차, 막걸리, 태국 음식을 음미하며 관객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가졌다. 20년 전 티라바닛에 대한 논문을 쓴 대학교수, 서울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젊은 큐레이터, 이제 막 미대에 합격한 19살 청년, 환경운동가, 쉐프, 농부, 한의사, 예술에는 전혀 관심 없는 자칭 ‘비예술인’, 유치원생, 초·중·고등학생 등 천여 명의 비엔날레 관객의 이야기를 들으며 매회 새로운 관계와 변주를 함께 만들었다. ‘예술이 모여 삶이 되고, 삶이 부서져서 예술이 되는’ 혹은 ‘삶이 모여 예술이 되고, 예술이 부서져서 삶이 되는’ 현장이 아닐 수 없었다.
먹고 싸기만 해도 쓸모 있는 자들의 로컬리티
이번 신작의 일환으로 티라바닛의 요청에 따라 밀폐형 퇴비통을 연구해 DIY로 만들어 미술관옆집 텃밭에 설치했는데, 의외로 많은 관객이 퇴비를 만드는 방식과 과정에 관심을 보였다. ‘퇴비’란 한 곳에 퇴적된 다양한 유기물이 썩으면서 하나의 흙이 되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엄청난 열을 내뿜는다.[7] 밀폐형 퇴비통은 이 열을 효율적으로 이용해 빠르게 퇴비를 생산한다. 잡초를 포함해 남은 음식물, 휴지, 종이 등 미술관옆집에서 나오는 모든 종류의 유기물이 이 통에 들어가 흙으로 뱉어진다. 티라바닛은 “퇴비란 버려진 유기물이 비옥한 땅으로 전환되는 것이요, 폐기되고 부패하는 잡동사니가 다시 쓸모 있는 것으로 순환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다양한 의미를 함유하는 은유이자 실제로 기능하는 이 퇴비통을 보고 어떤 관객이 다음과 같은 경험을 공유해주었다:
오랜 무력감과 우울증을 털어내고자 서울 생활을 접고 양평의 한 시골 공동체 마을에 살게 되었다. 그곳에선 인분으로 퇴비를 만드는데, 내가 싼 똥으로 만든 퇴비로 일군 밭에서 자란 토마토를 처음 따먹은 순간,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란, 먹고 싸기만 해도 이 세상에 쓸모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경제적 성공이나 사회적 공헌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쓸모없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지각하는 순간, 오랫동안 마음을 옥죄던 답답함에서 드디어 벗어날 수 있었다.
똥이 땅이 되고 땅에서 자란 생명이 다시 똥이 되는 이 생태계의 기본적인 순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그것이 바로 아나키즘적 로컬리티가 아닐까.
나는 종종 비엔날레 관객(특히 아버지뻘 중년 남성)으로부터 왜 고학력의 에너지가 넘치는 나 같은 젊은 예술가가 이런 시골에서 ‘썩고’있냐는 질문을 받곤 했다. 요즘 예술은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담는 경향이 있는데, 이렇게 자연에 둘러싸인 ‘평온한’ 농촌에서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장 시급한 문제를 어떻게 다룰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에 대한 내 대답은, ‘과연 농촌은 평온한가?’ 그리고 ‘도시와 농촌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가?’이다. 시골을 사유하며 대안을 찾는 ‘시골론’[8]은 19세기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에서 제시한 낭만주의적 실험을 넘어 오늘날 가장 중요한 이슈인 환경파괴와 생태계 붕괴로 인한 기후 위기를 다룰 수 있는 실질적 해법 중 하나다. 나아가, ‘썩는다’는 표현이 부정적으로 사용되곤 하지만 사실 썩는다는 것은 에너지를 발산하면서 끊임없이 관계 맺고 변화한다는 것이기에 내가 시골에서 썩고 있다는 표현이 꼭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시골에서 일어나는 이 ‘변화’란 공업화의 과정에서 형성된 근대도시에서의 ‘변화’와는 정반대의 개념으로 ‘탈중앙(decentralized)’, ‘탈성장(degrowth)’, ‘지속가능성(sustainable)’, 그리고 ‘생물다양성(biodiversity)’을 기반으로 한다. 그런데 내가 언급한 이 키워드들은 현재 전 지구적으로 화자되고있는 우리 사회의 중요한 키워드가 아닌가? 그렇다면, 오늘날 기후 위기를 언급하며 사회비판에 참여하고 싶은 젊은이가 있다면 시골로 이주하도록 오히려 설득해야 하지 않을까?
아나키즘적 방법론
보편적으로 아나키즘(무정부주의)이라고 하면 ‘혼란한 사회’를 상상하는데, 그것은 ‘정부’라는 체제를 일종의 ‘질서’로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강경에서 “몸 아닌 것이 가장 큰 몸”[9]이라 설한 것처럼 ‘질서(정부)’가 없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질서(정부)’일 수 있다. 무정부주의란 결국 정부라고 정의하는 모든 종류의 질서(그것이 민주주의든 사회주의든 공산주의든)를 떨쳐버리고 예측불가능하고 변화무쌍한 질서의 변주를 함께 만들고 공유하는 것이다.
나는 카셀에서 신나게 놀았다. 메이단 주말을 맞아 대낮부터 새벽까지 이어진 밴드와 DJ 공연을 보며 춤을 췄고,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과 예술을 안주삼아 먹고 마시고 노래했다. 도큐멘타15의 혹평 중 하나는 전체적으로 ‘큐레이팅’, 즉 미학이 부재하다는 점인데, 이는 역설적으로 루앙루파가 의도한 바이다. 그들은 예술감독이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구조에서 예술가를 선정해서 작품을 배치하고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미술계의 관행을 거부하고 아나키즘적 방법론을 선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국의 반 누르그 예술 문화 그룹(Baan Noorg Collaborative Arts and Culture)이 도큐멘타 할레에 설치한 스케이트보드 램프[10], 브라질 예술가 그라질라 쿤쉬(Graziela Kunsch)가 프리데리치아눔에 설치한 <공공 탁아소(Public Daycare)>[11], 그리고 로자바 필름 공동체(The Rojava Film Commune)의 쿠르디스탄 민요에 관한 다큐 영상 <외로운 나무들(Lonely Trees)>[12] 등의 작품은 대중성뿐 아니라 색다른 미학과 사회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나는 도큐멘타15의 여러 작품에서 관계예술과 연관지점을 발견했는데, 티라바닛은 이번 제주비엔날레 신작과 관련한 중앙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술’은 서구적 개념입니다. 태국인들은 오랫동안 익명으로 불상을 만들어왔습니다. 익명이라고 해서 그 불상의 다양성과 예술성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태국 문화에서는 창작물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것, 모든 것의 중심이 되려 하기보다 다양한 것들의 일부로 존재하는 것을 가치 있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물을 그저 화이트 큐브 안에서 탐미하는 대상으로 치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물과 함께 살고, 사물을 사용하며, 사물과 함께 즐길 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제주 도예가가 만든 아름다운 옹기 항아리가 피카소의 그림 못지않게 가치 있는 예술이라 생각되는 이유입니다.
카셀 도큐멘타는 1955년 출범 이래 루앙루파를 포함하여 총 12명/팀의 예술감독을 선임했는데, 그중 여성은 단 두 명[13], 비서구 출신 2명/팀[14], 그리고 1인 단독체제가 아닌 경우는 루앙루파가 유일하다. 루앙루파가 선정된 후 도큐멘타 조직위는 “최초의 남반구(Global South) 출신 예술감독!” “최초의 아시아계 예술감독!” “최초의 콜렉티브 예술감독!”이라며 대대적으로 홍보했는데, 전시 초반 특정 작가의 작품 내용을 문제 삼은 비평 글의 파장으로 북반구(Global North) 미술계의 질타를 받기 시작하자 결국 자신들이 선임한 예술감독에 대한 비판과 검열을 쏟아냈다.[15] <혼종성 담론과 로컬리티: 월경과 전복?>[16]이라는 글의 저자는 오늘날 지구화된 포스트모던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새로운 문화 소비 경향을 비판하면서 일탈과 전복을 상징했던 예술이 탈정치화, 즉 자본화되면서 이미지 메이킹용 콘텐츠로 전락해버렸다고 꼬집었다. 현대미술의 대표적인 국제행사인 도큐멘타도 결국 겉으로는 다양성과 혼종성을 옹호하고 환영하는 듯싶지만, 사실은 루앙루파를 하나의 문화적 자본으로 이용하려 했던 것은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전시 기획에 있어서 ‘탈중앙화’를 시도한 루앙루파는 그렇게 도큐멘타라는 현대미술계의 절대적 권위(질서)와 부딪힐 수밖에 없는 숙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나키즘적 로컬리티
티라바닛은 이번 제주비엔날레에 참여 작가이기도 한 강승철 도예가와의 협업을 통해 관객에게 내어줄 그린커리, 수제 막걸리, 그리고 석창포 차를 담을 멋진 검은 옹기 세트를 완성했다. 그런데 잿빛과 은빛을 내는 이 아름다운 그릇을, 협업으로 만들어진 이 특별한 그릇을, 티라바닛의 제주비엔날레 커미션 작의 일환인 이 그릇을… 기획자인 내가 산산이 조각내는 아찔한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나는 급히 베를린에 있는 티라바닛의 조수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조언을 구했는데, 그가 제안한 해법은 내가 킨츠키[17]를 배워서 깨진 그릇을 수리하는 것이었다. 나는 잠시 주저했지만, 우선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바로 실행에 옮겼다.
나의 삶의 터전에서 비엔날레라는 국제행사를 주최한 지 절반이 지난 시점에서 매일 저녁 깨진 옹기의 작은 조각 하나하나를 꿰맞추면서 킨츠키를 하고 있는 내 모습이 그저 황당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지만, 명상하듯 그릇을 수리하면서 여러 생각이 수면위로 떠올랐다. 우선, 만약 미술관에서 이 작품을 깼다면 보험 등 복잡한 행정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을 것이고, 내가 기획만 하는 전문 큐레이터였다면 킨츠키를 할 전문가를 고용해야 하는 비용 문제에 부딪혔을 것이다. 이 예측불가능했던 상황에 이토록 빠르고 유연하게 응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나에게 위험감행(risk taking)을 할 수 있는 실험적인 환경(로컬리티)과 실패를 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내공(아나키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조그마한 시골 땅에서 가능한 일인 것이다.
[1] 홍정식. 금강경. 반야심경/금강경/법화경/유마경/회쟁론/육조단경, 동서문화사, 1977, pp122.
[2] 나의 집이자 작업실인 ‘미술관옆집’에서는 지난 4년간 정부지원금으로 혹은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는다는 생각으로 다수의 국내외 예술가를 초청해 함께 놀고 먹고 마시고 창작했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달간 함께 생활하면서 미술관옆집을 떠날 즈음엔 모두 좋은 친구가 되었고, 현재까지도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3] 2022년 카셀 도큐멘타15의 예술감독은 2000년부터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를 중심으로 활동해온 예술 콜렉티브 루앙루파(ruangrupa)로, 그들은 하나의 개념 혹은 주제를 앞세우기보다 그들에게 주어진 실질적 자원(공간과 예산)을 함께 나누는 시스템으로 ‘룸붕(Lumbung)’을 제시했다. 룸붕은 인도네시아어로 공용 쌀 헛간이라는 뜻으로 루앙루파의 목표는 100일이라는 전시 기간 동안 룸붕을 실천하면서 전시 후에도 건강한 예술 생태계를 지속할 원동력을 마련하고자 했다. 루앙루파는 총 14개의 예술 콜렉티브/단체를 룸붕 멤버로 초청해 상하 수직관계가 아닌 수평적이고도 느슨한 연결고리 안에서 이번 도큐멘타를 실현했는데, 최종적으로 전시에 참여한 예술가의 수가 무려 1,500명에 달한다. 이번 도큐멘타는 전시뿐만 아니라 관객이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행사를 주최했는데, 그중 메이단 주말(Meydan Weekend)이라고 명명한 3회의 주말 축제는 카셀의 공원, 극장, 클럽 등을 다양한 로컬 스팟을 활용해 주최자, 예술가, 관객, 지역민 등이 모두 함께 즐길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했다.
[4] 영어에서 ‘locality’는 실생활에서 흔히 사용하는 단어는 아니다. ‘인근(vicinity)’라는 뜻 혹은 아주 구체적인 ‘장소’를 지칭할 때 쓰인곤 한다. (예: locality of the school = 학교가 위치한 곳) 그래서 문득, 한국에서 이 ‘로컬리티’라는 단어가 학계에서 ‘지역성’ 혹은 ‘지역 연구’라는 뜻으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마치 콩글리시처럼 ‘장소’도 ‘지역’도 아닌 지구화된 포스트모던 후기 자본주의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정체성을 담아내는 신조어처럼 느껴졌다. 나는 여기에 ‘아나키즘’을 더해 이 학술적 용어를 전복시켜 다시 일상으로 회귀하고자 한다.
[5]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는 1998년 출판한 <관계의 미학>이라는 책에서 리크릿 티라바닛 외 소피 칼(Sophie Calle), 필립 파레노(Philippe Parreno), 안드레아 프레이저(Andrea Fraser), 카르스텐 휠러(Carsten Höller), 펠릭스 콘잘레스 토레스(Félix González-Torres) 등 동시대 미술가를 소개하면서 예술은 만남이고 관계의 미학은 만남의 지속성이라고 정의하면서 “관계 예술은 매우 비옥한 땅인 우리의 일상에서, 지극히 평범한 삶을 좌우하는 여러 과정에서 영감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다.
[6] 2013년 가을, 뉴욕 컬럼비아 미술대학원 교수님으로 티라바닛과 인연을 맺은 지 벌써 10년이 흘렀다. 제주비엔날레라는 국제 행사에서 기획자 대 참여 작가로 만났지만, 그는 여전히 나를 한 명의 예술가로, 또 오랜 친구로 대해준다. 지금까지 그는 단 한 번도 내게 무엇을 가르치려 하지 않았지만, 나는 늘 어떤 배움을 그로부터 경험하곤 했다. 그런데 이번 비엔날레에서는 그의 예술이 나의 일상에 투영되고 나의 매일이 그의 예술이 되면서 가르침도 없고 배움도 없는, 예술도 없고 관객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삶의 터전(locality of life)’이 공개되었다.
[7] 퇴비는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불을 지필 수 있을 정도의 열과 바이오가스(biogas)를 생산한다. 이는 신재생에너지인 바이오에너지(bioenergy)로 활용할 수 있는데, 퇴비의 열은 열전발전기(thermoelectric generator)를 통해 전기로, 퇴비의 바이오가스 메탄(CH4)은 포집하여 적정 과정을 거처 메탄가스나 수소가스로 바꿔 석유를 대체하는 에너지원으로 사용할 수 있다.
[8] 장정희, “골짜기로 가면 희망이 있다”, 평화뉴스, 2022년 10월 19일, (www.pn.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748)
[9] 홍정식은 이를 몸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상, 아무리 크다 해도 그보다 더 큰 것 속에 있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에 진리와 먼 것이라 해석한다.
[10] https://www.lumbunggallery.theartists.net/artist/baan-noorg-collaborative-arts-and-culture
[11] https://www.youtube.com/watch?v=j0kjC9RSjtE
[12] https://www.youtube.com/watch?v=XSPg9UxRsb8
[13] 프랑스 미술사학자이자 전시 기획자 캐서린 데이비드(Catherine David)와 이탈리아계 미국인 미술사학자이자 전시 기획자인 캐롤린 크리스토프-바카르기에프(Carolyn Christov-Bakargiev) 모두 백인 여성이다.
[14] 나이지리아 큐레이터이자 비평가 오쿠이 엔위저(Okwui Enwezor)와 인도네시아 예술 콜렉티브 루앙루파(ruangrupa)
[15] 태국 콜렉티브 타링 파디(Taring Padi)의 작품이 이번 논란의 중심에 섰는데, 복잡한 역사적 배경과 비서구 관점에서 차용된 문화적 상징이 가져온 오해와 혼란 등으로 옳고 그름을 명확하게 가르기 매우 어려운 지점이 있다. 이번 논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링크 참조(영문): The Documenta, Indonesia, and the Problem of Closed Universes – The New Fascism Syllabus
[16] 조관연. (2017). 혼종성 담론과 로컬리티: 월경과 전복?, 로컬리티 연구총서27: 로컬리티 담론과 인문학. 소명출판.
[17] 킨츠키는 ‘금으로 수리하다’라는 뜻의 일본어로 깨진 도자기나 그릇을 천연도료인 옻으로 붙여 금가루나 은가루로 마무리하는 공예기법이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