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을 부정적으로 보는 평자들은 보통 작품의 선정적 수위, 빈곤층에 대한 묘사, 그 외에도 개별적인 배역에 대한 묘사의 적절성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한 지적들은 모두 나름의 타당성을 지니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드라마의 더 본질적인 측면을 간과할 수밖에 없다는 인상을 준다. 여기서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앞서 언급한 평자들의 비판에 대해 지금까지 제출된 반론들을 떠올려보도록 하자.
<오징어 게임>의 묘사와 선정성에 대한 비판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은 드라마가 그저 게임 같은 드라마일 뿐이니 진지하게 굴 필요가 없다는 식의 논조를 취한다. 이들의 진지하지 못한 태도가 문제적이라고 생각되는가? 그렇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진지하지 못한 이들에게 지금부터라도 억지로 진지해지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잠시 우회해서 오히려 <오징어 게임>이 애당초 “게임”이라는 알리바이를 전제로 하는 콘텐츠라는 점에 주목해보도록 하자.
이것은 게임에 관한 드라마인가, 아니면 게임인가
<오징어 게임>이 게임에 관한 작품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이 드라마는 게임의 논리를 그 자체로 체화하고 있는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숱한 일본 만화와 B급 영화에서 적당히 짜깁기한 작품의 추상적인 배경부터가 그렇다. 경찰조차 믿을 수 없는 허무맹랑한 살육제가 바다 한복판의 선박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우스꽝스러운 설정은 애당초 지정학적 구체성이 소거된 게임적 배경에 가해질 진중한 비판과 여러 가지 설정 구멍을 어물쩍 흘려 넘길 수 있는 구실로 작용한다. 가령, 게임 스태프 중 한 명은 참가자가 너무 많으므로 빨리 죽여서 줄여야 한다고 조급해하는데, 정작 그 많은 참가자를 본인들이 데려와서 건축적 비효율의 극치를 달리는 파스텔톤의 인스타그래머블한 세트장에 재워주고 있다는 자기모순에 대해서는 적당히 침묵한다.
그러므로 바로 이곳에서, 주인공 기훈(이정재) 또한 게임 플레이어와 같은 방식으로 시공간을 배회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게임은 그 어떤 매체보다 자기중심적 전능함을 중심에 두는 매체다. 과거의 영화나 소설에서는 인물이나 서사가 관객의 맘대로 변형되지 않는다고 해도, 오히려 그 점이 독립적인 타자의 세계로 존중받았지만, 게임 소비자에게 게임 세계가 맘대로 왜곡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화를 내며 민원을 넣을 정당한 이유가 된다. 게임에서 세계의 모든 대상은 플레이어가 조작할 수 있는 가변적 객체로 축소되고, 죽음이라는 불가피한 실존적 사건조차 클릭 몇 번으로 리셋할 수 있는 이벤트일 뿐이다(물론 이 전능감은 게임의 서사 속 개별적인 인물에 대한 동일시 이전에 선험적으로 전제된 조작적 인터페이스의 차원에서 개시되므로, 게임 속 주인공이 종종 서사적 차원에서 죽음을 당하는 예도 있다는 식의 반박은 여기서 유효하지 않다).
성기훈도 <오징어 게임>을 마치 게임 속 세계처럼 배회한다. 사회 비판적 암시가 첨가되어 있기는 하지만 실상 이야기의 배경을 다른 배경으로 대체하더라도 이 매체의 핵심적 요소인 몰입의 실감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할 정도로 타자와 세계의 실감이 희박하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아무리 주인공에게 이런저런 위기가 찾아와봤자, 어차피 주인공이 46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승리할 것이라는 점이 암묵적으로 기정사실화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고, 서사와 환경은 물론 타인의 심리마저 주인공이 원하는 대로 엿가락처럼 변형되는 가소성의 재질이라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가령, 기훈이 상우(박해수)와 마지막 결전을 벌이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바로 전 게임까지만 하더라도 돈에 눈이 멀어 살인을 서슴지 않던 상우는 여기서 언제 그랬냐는 듯 변심해서 서글픈 연기를 하더니 갑자기 자살해 기훈이 승리를 거머쥘 수 있도록 한다. 성격 일관성이 단숨에 붕괴되는 어처구니없는 장면이지만, <오징어 게임>이 게임이라는 알리바이를 내세우는 이상 그 정도 모순은 무리 없이 성립한다. 바로 여기서 상우가 자발적으로 죽어줘야만 게임 플레이어인 기훈이 도덕적 죄책감이 경감된 채 승리를 거머쥘 수 있기 때문이다. 게임에서는 중심 플레이어의 윤리적 정당성과 자기중심적 전능함을 보강하기 위해서라면 타자의 성격 일관성이나 세계관의 논리적 정합성 같은 건 얼마든지 도구적으로 만곡된다. 이것은 플레이어의 도덕적 죄책감을 가중하기 위한 장치인 징검다리 게임에서 기훈이 하필이면 마지막 주자로 배정될 수 있었던 텍스트 외적 이유이기도 하다.
소멸한 게임의 외부
지금까지<오징어 게임>이 단순히 게임에 관한 작품이 아니라 그 자체가 게임의 논리로 작동하는 콘텐츠라는 점을 간단하게 살펴봤다. 혹자들은 이런 비판에 대해서도 결과적으로 이 콘텐츠가 “게임일 뿐, 드라마일 뿐”이니 문제가 없다, 뭐가 그리 심각하냐는 식의 반박을 꺼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주장은 가능하지 않아 보인다. <오징어 게임>이 게임일 뿐이므로 이 유희에 제기될 비판을 물리칠 수 있다는 합리화는 이 유희가 끝나면 플레이어가 몰입을 중단하고 게임 외부의 사회적 삶을 살아갈 자율성이 있다고 전제할 수 있어야만 성립한다. 그런데 <오징어 게임>은 사실상 게임의 외부가 소멸한 세계인 것처럼 보인다. 이 점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다시 기훈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성기훈은 게임의 외부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징적인 인물이다. 그는 게임이 일상의 일탈인 수준을 넘어서, 반대로 게임이 없는 일상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게임에 감금되어 있다. 이 점과 관련해서 먼저 우리는 기훈이 오징어 게임을 하는 중이든 하지 않는 중이든, 도박이나 경마 같은 사행성 유희에 중독되어 있어 지속적인 사회적 책임감을 발휘할 수 있는 공동체의 자리를 박탈당한 존재라는 점을 지목할 수 있다. 하지만 보다 눈여겨볼 문제는 기훈이 이런저런 게임을 한다는 개별적 사실이 아니라, 그의 사고방식이나 주체성 자체가 근본적으로 게임적인 보상의 논리에 결박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를 아주 적나라하게 증거하는 장면이 영화의 결말부에 있다.
기훈이 456억의 상금을 탄 후 1년, 카메라는 게임이 끝난 후 기훈이 어떤 경험을 축적했는지에 대한 묘사를 삭제한 뒤, 그가 게임의 배후에 있던 원흉인 노인을 찾아가 분노를 쏟아내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런저런 영화나 만화에서 셀 수 없이 반복된 이 진부한 장면에서 주목할 점은, 노인이 여기서도 게임을 제안한다는 것이다. 그는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노숙인을 가리키며, 자정까지 그를 도울 행인이 나타날지를 두고 기훈과 내기를 한다. 이런 게임에서는 당연히 주인공이 냉소적이지 않은 편에 서게 돼 있으므로, 기훈은 행인이 나타날 것이라는 데 건다. 그리고 예상대로 승리해서 눈물을 흘린다. 이상한 점이 있다. 기훈이 그렇게까지 사회의 소외된 타자를 연민한다면 왜 그는 30분이나 되는 게임의 지속 시간 동안 직접 창밖으로 나가 싸늘한 눈을 맞는 노숙인을 돕지 않는 걸까? 왜 그는 본인이 경멸하는 노인이 정한 매뉴얼에 순응하는 타율적 승리를 갈망하고 있을 뿐, 유리창 밖으로 뛰쳐나가는 윤리적 능동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걸까.
이 점은 노인에게 “당신이 지면, 당신을 죽일 거야.”라고 내뱉는 기훈의 말이 비장하다기보다 실소를 자아내는 이유다. 그는 400억이 넘는 자산이 있으면서도 게임 밖에서 죽어가는 노숙자를 30분 동안 멍하니 구경하기만 하며, 남이 정해둔 룰을 의심 없이 따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유리창 밖의 타자와 자신을 근본적으로 갈라놓는 결계가 된다는 점을 깨닫지 못한다. 그럼에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룰 안에서 승리했다는 단순한 실감만으로 시민적 고양감에 젖어 든다. 그러므로 그가 노인과의 내기에서 승리할 때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정의는 승리한다”는 식의 상투적 교훈 같은 게 아니라, 반대로 타율적인 규칙에 인식의 틀을 완전히 점령당한 인간의 비참한 수동성이다.
드라마의 무의식 곳곳에 퍼져있는 게임의 논리는 참여자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몰입의 실감과 정해진 규칙을 통해 참여의 방식을 제한한다. <오징어 게임>을 계급적 파국에 대한 은유로 읽을 수 있다면, 기훈이 경제적 빈곤층이라는 피상적 이유를 넘어 바로 이 점에서일 것이다. 물론 그는 드라마 속 주인공이라서 456억을 손쉽게 거머쥘 수 있으므로 현실에서 일확천금의 망상에 젖어있지만 단타에 실패하는 개미와 다르다. 하지만, 게임의 논리에 갇혀있다는 점에서 그는 우리와 같다. <오징어 게임>에 스며있는 게임의 메커니즘, 나아가 그 게임이 수십억의 시청자에게 하나의 게임처럼 제공되며 거대한 자본을 창출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후기 자본주의의 통치술에 대한 정확한 예화가 된다. 놀이와 노동의 경계가 붕괴한 이 체제는 억압 대신 각종 게임과 콘텐츠에 대한 반강제적 몰입감을 착취의 미끼로 삼는 것은 물론, 연애와 정치적 참여와 같은 인간적 관계마저 상품화된 방식으로 개조해버리는 모순적인 통제의 체제다. 그 체제를 게이머처럼 배회하는 우리는 닉 서르닉의 말처럼 플랫폼에 의해 일정한 효용을 얻어가기는 하지만, 큰 틀에서는 이미 정해진 인터페이스의 규칙을 넘어서는 자율성을 얻어가지 못한다. 기훈은 각종 콘텐츠와 탈중앙화된 매체를 통한 자율성을 주장하지만, 정작 소프트웨어가 제공하는 약관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버튼을 누를 자유를 빼앗긴 우리를 닮았다는 점에서 동시대 인간의 진정한 은유로 되살아난다.
그러니, “게임은 게임일 뿐이다.”라는 식의 냉소를 내뱉으며 우리가 이 규칙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상황에 대한 자기 객관화에 실패하는 오인이다. 애초에 이 게임이 억압이나 진지한 이념, 혹은 지속적인 책임감을 요구하는 헌신적 가치와 무관한 “게임일 뿐”이기 때문에 그토록 광범하고 강렬한 몰입의 실감을 조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테리 이글턴의 말처럼, 바로 그런 종류의 냉소야말로 그들이 즐기는 유희가 이데올로기적 심문을 받지 않은 채 광범한 영향력을 얻을 수 있는 이유다. 아이돌이나 소년만화 혹은 틱톡의 조잡한 프랭크 영상을 보는 이들 중에서 콘텐츠의 허무맹랑한 세계관과 설정을 진지하게 믿는 이는 아무도 없으며 심지어 콘텐츠를 만드는 본인들조차 그걸 믿지 않지만, 이념과 책임감의 필요를 삭제해버린 그 은밀한 냉소야말로 그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몇 시간 동안 그 허무주의적인 콘텐츠들을 보며 우울해하는 핵심적인 이유가 된다.
비슷한 이유에서 <오징어 게임>이 악역을 전담하는 몇몇 ‘VIP’들에 대한 조악한 캐리커처를 집어넣은 것도 오히려 이 체제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멀어지는 길이다. 현대 자본주의의 악역이란 험상궂은 표정을 하며 시민을 을러대는 독재자가 아니라, 국정감사에서 “우리는 여러분을 위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며 능글맞은 미소를 띠는 족속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탈출구를 찾기 위해서는 게임에 참여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게임이 반강제적으로 조장하는 몰입과 자율성의 실감을 의문시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듯이 황동혁 감독은 그 실감을 강화하는 길을 택했으며, 기훈 또한 이 모순의 가혹함을 깨닫지 못한다. 기훈이 시즌2를 예고하는 비장한 대사를 내뱉으며 사실은 정의나 복수가 아닌 반강제적 유희의 장에 뛰어들 것을 예고할 때, 그 모습은 정확하게 체제를 비판하지만 넷플릭스라는 거대 자본이 제공하는 새로운 시즌을 감상할 우리의 모습과 포개어진다.
보는 매체가 아니라 소통하는 재료로서의 콘텐츠
<오징어 게임>에 내접된 역설적 강제성은 “디지털의 정언명령”(돈 드릴로)에 순응하는 것이 사회적 관계를 대체한 코로나 뉴노멀의 상황과도 상통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는 이러한 <오징어 게임>의 텍스트 내적 특징이, 이 드라마를 소비하는 텍스트 외적 문화와도 연관된다는 점을 간단하게 지적하려 한다. 앞서 나는 <오징어 게임>을 경제적 불평등의 측면에서만 독해하는 방식이 불충분한 논평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말하는 그 비판조차 어딘가 초점을 엇나가고 있다는 인상을 벗을 수 없다. 이 드라마는 애초에 딱히 비판적인 텍스트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무수한 언론과 유튜버들이 이 콘텐츠를 말하는 방식만 봐도 알 수 있다. “드라마 속 트레이닝복이 팔려서 얼마를 벌었다더라”, “출연자의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얼마가 늘어서 어디와 계약해서 떼돈을 벌 예정이더라”는 식의 보도를 보면 이 드라마는 애초에 콘텐츠가 창출한 산업적 가치로 주목되거나 “깐부”, “구슬치기”와 같은 무수한 밈과 파생 콘텐츠를 뽑아낼 수 있는 이미지들의 가변적 집합으로 여겨지고 있을 뿐, 고유한 윤리적 관점을 함축한 비평적 텍스트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도 않다. 그렇다면 여기서 <오징어 게임>을 경제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비평의 정당성을 반박하는 대신, 차라리 이 드라마를 둘러싼 새로운 관람의 방식을 그 자체로 논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텍스트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서사와 무관한 자율성을 파생하는 현상은 <오징어 게임>을 둘러싼 특징적 신드롬이다. 하지만 사실 이런 소비의 모델은 기실 이미 우리의 문화적 관습에 스며든 지 오래다. 토마스 앨새서의 말처럼 근래의 할리우드 영화나 콘텐츠 제작자들은 애초부터 텍스트가 고정된 비평적 답안을 사소화하는 다변화된 반응을 창출할 수 있는 요소들을 의도적으로 삽입해오곤 했다. 콘텐츠 소비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2년 전 개봉한 <기생충>을 둘러싼 반응을 예시로 떠올려봐도 좋을 것이다.
봉준호는 <기생충>이 액면 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텍스트로 읽히도록 영화를 만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메시지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관객이 “짜파구리”를 만들며 자본주의 소비를 활성화하더라도 별다른 윤리적 자의식이나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도록 만들었다. 관객은 <기생충>을 사회 비판적 텍스트로 읽거나, 시네필리아적 영화로 읽거나, 그런 건 모르겠고 짜파구리가 맛있어 보이는 작품으로 생각하거나, 잠깐 등장한 “피자박스녀”의 인스타를 찾아보고 싶게 만드는 작품으로 생각하거나, 그게 아니면 이런저런 유튜버들이 허랑한 해석을 창출할 수 있는 멀티유스 콘텐츠로 간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한 관점을 특권화하며, “다른 관점으로 읽는 것은 <기생충>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는 길이다.”라는 식의 시네필적 단언을 꺼내놓는 것은 불가능해졌고, 가능하다고 해도 진지충 소리나 듣기 마련이다. 애초에 제작진이 그중 어느 관점을 취사선택해도 무방하도록 설계해뒀기 때문이다. <오징어 게임>에 관해서라면 무수한 게임들과 “이러다가 다 죽어~”와 같은 대사들이 <기생충>의 “짜파구리”에 대응하는 요소일 것이며, 내러티브의 구심성이 보다 형해화된 유튜브와 뉴미디어의 콘텐츠에서는 이러한 밈의 파생성이 더 적극적으로 조장된다. 비평에 대한 냉소주의는 이제 관객의 반응에서 사후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라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선험적으로 도입되는 메커니즘이 되었다. 이것은 각종 콘텐츠를 기획해본 이들이라면 너무나도 당연하게 전제하는 요소지만, 대체로 시장과 거리를 두는 진중한 이론가와 비평가들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간과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경계 너머의 언어와 터미널을 떠도는 밈의 언어
그렇다면 <오징어 게임>을 비롯한 근래의 콘텐츠들이 게임의 논리를 서사적으로 내장하는 차원을 넘어, 그것을 소비하는 방식조차 게임화한다고 말할 수 있을 테다. 이런 국면은 서브컬처나 SNS 이후 극심해진 경향이지만, 그전에도 징조는 있었다. 이를테면 고다르가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를 만든 후 조너선 로젠봄과 진행한 인터뷰를 떠올려보자. 여기서 고다르는 비행기에 탑승하는 행위와 영화 관람의 유사성을 지목하며 운을 띄운다. 관람자가 간직한 기존의 인식을 넘어서는 세계의 실재를 들춰낸다는 점에서 영화 관람은 비행기를 타고 타지를 방문하는 여행의 행위를 닮아있다는 논지다. 하지만 고다르와 로젠봄은 그 여행의 성격이 점차 변모를 겪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20세기 후반의 영화 문화를 논하던 그들은 “영화 자체가 상호 소통을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고 관객들이 영화를 이용해서 상호 소통하는” 변화를 관측한다. 이어지는 고다르의 아포리즘은 이 변화를 비범하게 수식한다. 이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역이나 터미널이라고 즐겨 생각한다. 기차나 공항들 사이를 오가는 비행기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나 자신을 공항이 아니라 비행기로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고다르는 <록키 호러 픽쳐 쇼>를 보며 컬트적 팬덤을 형성하던 관객을 지칭한 것이었지만 비행기에서 공항과 터미널로 변모하는 관객의 은유는 SNS가 영화의 지배적 관람 양식을 대체한 오늘날의 영상 문화에 진정으로 부합하는 카산드라의 예언이 되었다. 이제 이미지를 보는 관객은 불가지한 타자에 대한 고유한 인식을 산출하는 이질성의 경험을 기대하지 않는다. 대신 콘텐츠란 취향의 동일성을 확인시키며 상호소통의 장을 마련하는 유사성의 멤버십 카드로 변질되었다. 그런 점에서 왓챠 같은 애플리케이션에서 영화가 창출한 구체적인 논점을 확인하는 비평적 행위가, 자아의 대변물로 설정된 ‘인생영화’를 타인과 비교하며 상호동질성을 확인하는 교류보다 부차화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안에서 “역이나 터미널”이라는 객관적 상관물의 현대적 원관념에 해당하는 것은 플랫폼만이 아니라, 취향의 해시태그로 축소되어가는 우리의 실존 그 자체다. 유운성은 최근에 “오늘날 예술가들은 점점 태그와 해시태그와 카테고리 자체가, 혹은 적어도 그 비슷한 것이 되어가고 있습니다.”고 말했는데, 이 말을 비단 예술가들에게만 적용되는 언술이 아니라, 해시태그나 콘텐츠 취향이 유사-시민권과 같은 것으로 변형되고 있는 요즘의 부족주의적 세태에 대한 포괄적 논평으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니 이미지란 게임의 논리에 따라 재편된 사회적 관계에서 동종성을 증빙하는 매개물이 되었다 말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의 대표적 예시로 밈의 작용을 거론할 수 있다. 밈이란 기존의 언어처럼 명확한 객관적, 사전적 의미를 전제하지 않으며, 오직 소공동체 내부의 문화적 흐름에 따라 얼렁뚱땅 생성되어 자의적인 소통의 규약을 창조하는 언어다. 그러므로 밈의 소통에서 중요한 것은 애당초 없거나 모호한 구체적인 의미 같은 게 아니라, 그 밈이 어떤 식으로든 특정한 집단 내부에서 발화되면서 자의적인 게임의 규칙을 창조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다. 그게 뭔 의미건 하여간 밈의 존재를 안다는 사실이 동질적 소통의 구성원을 호명하고 감염시키는 전제조건으로 기능한다.
(적어도 MZ 세대인 내가 체감하기에는) 2010년대 초중반 정도까지만 해도, 한 편의 작품에서 흘러나온 밈은 1차 자료에 비해 부차적인 요소로 간주됐지만, 이제 밈이 작품의 비평적 실질을 압도하면서 텍스트를 둘러싼 커뮤니케이션과 경제적 파급력을 확장하는 콘텐츠의 시대에 이르자 상황은 정반대로 역전된 것처럼 보인다. 고다르의 표현을 비틀자면, 우리는 <오징어 게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오징어 게임>을 ‘통해서’ 커뮤니케이션하고 있다. 요컨대 <오징어 게임>을 둘러싼 사태에서 진정 주목할 점은 이 드라마가 실제로 뭘 말하고 있냐 보다,우리의 소통방식과 언어 자체가 밈적 화용론으로 개편되고 있다는 현상일 테다. 물론 나도 이런저런 밈을 재밌게 찾아보는 인간이기야 하다만, 앞서 말했다시피 밈에 의한 소통은 근본적으로 동종성을 공유하지 않는 타자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성립하는 것을 원리로 삼고 있으므로 많은 평자들이 네티즌들의 활동에 거창한 의미를 덧씌우며 낙관의 근거로 인용하는 랑시에르의 “감각적인 것의 분배”나 벤야민의 “아우라” 이후의 정치적 실천 같은 개념들과 거의 상관이 없어 보인다.
물론 이런 상황은 개인이 돌이킬 수 없는 초국적인 현상이다. 그렇다면 나는 적어도 개별적인 실천의 차원에서 우리가 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밈적 화용론의 예시를 간단하게 지적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밈은 애당초 청자가 발화자와 이런저런 맥락을 상호 합의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발설되므로 우리의 공동체를 구축하는 화술도 그에 따라 자동적으로 자폐화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잠시 우회해서 아즈마 히로키가 살펴본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의 한 구절을 예시로 떠올려보도록 하자. 아즈마는 언젠가 오타쿠 서브컬처의 작품이 텍스트 내적 실질을 중시하는 “콘텐츠 중심적” 매체보다는 텍스트 외부의 2차 창작과 커뮤니티를 촉발하는 “커뮤니케이션 중심적” 매체로 변형됐다고 지적함으로써 우리가 살펴본 고다르와 로젠봄의 대화에 상응하는 비평적 진단을 내놓은 바 있다. 이때 주목할 점은, 이런 커뮤니케이션 중심적 소통의 특성이 작품 내부의 형식적 특성으로도 스며든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서브컬처의 전설적인 작품인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의 원작 라이트노벨에서 주인공인 쿈은 여성 캐릭터인 나가토 유키의 모에적인 외관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후술할 문장은 아즈마의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에서 인용했다).
“나는 다시 한번 그 괴상한 문예부원을 관찰했다. 하얀 피부에 감정 없는 얼굴, 기계처럼 움직이는 손가락. 보브 커트를 한층 더 짧게 자른 것 같은 머리카락이 그 나름대로 단정한 얼굴을 덮고 있다. 가능하다면 안경을 벗은 모습도 보고 싶은 심정이다. 어딘가 인형 같은 분위기가 존재감을 희박하게 한다. 노골적으로 말해, 좀 뻔한 표현이지만, 신비한 무표정계(系)인 녀석이랄까.”
– 다니가와 나가루,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통상적인 순문학에서 찾아보기 힘든 이러한 서술은 아즈마의 말처럼, 인식 이전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을 내면적 풍경으로 묘사해낸다는 근대 문학의 표준적 계율을 역주행한다. 대상은 이미 인식되기도 전에 서브컬처 커뮤니티에서 유통되는 “~류”, “~물” 등의 유형화된 서사에서 마치 공유재처럼 편재하고 있으며, 작가가 그 공유재를 아웃소싱해 만든 피조물들은 ”‘그러한 상황에서 이 녀석은 분명 그러한 일을 할 거야’라는 확률 분포를 여러 겹 겹쳐놓은”(신조 가즈마) 모에 요소로 기능할 뿐이다. 작품을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인식의 도구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 독자 사이에 상호 합의된 맥락을 재확인하는 기지의 도구로 활용하는 것. 이는 정확히 밈적 이미지의 존재론에 상응하는 서술의 방식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서술 방식이 비단 서브컬처에서만 통용되는 문법이 아니라, 이런저런 커뮤니티에서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혐오 발언과 짤방을 참조하는 것만으로 실재하는 인격체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외주화하는 오늘날의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소통의 체계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언젠가 회화를 보는 사람은 군주를 알현하듯 그림이 감상자에게 들려주고 싶어하는 말을 기다려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오직 자신의 말을 듣게 될 뿐이라고 말했는데 이 통찰은 오늘날 전복된다. 밈을 내뱉는 이는 애초부터 자신과 같은 목소리가 들려오리라는 확신이 전제될 때만 소통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대중적 콘텐츠의 소비자나 커뮤니티의 유저뿐 아니라, 진지한 인문학적 소견을 나누는 평자나 블로거의 언어도 이 밈적 화용론에 지배된다는 사실은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일반인은 전혀 모르는 난해한 인문학적 개념을 “당연한 말이지만”, “진부하기 짝이 없는”과 같은 불필요한 표현들과 함께 남용하거나, 본인과 독자가 합의된 맥락을 가정하고 있는 듯이 구체성이 결여된 표현들을 중얼중얼거리는 상황만 봐도 알 수 있다. 물론 밈이 통용되는 인터넷에서는 개별적인 유저의 글이나 표현뿐만 아니라 커뮤니티 자체가 모종의 거대한 밈처럼 기능하기도 한다. 그래서 요즘 같은 때에 어떤 커뮤니티(펨코, 일베, 클리앙, 더쿠 등…)를 한다는 사실은 더 이상 정보를 얻기 위한 중립적인 채널을 활용한다는 뜻이 아니라, 특정한 정체성을 표식하는 집단의 가치관에 동기화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증빙자료가 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플랫폼에 종속된 담론의 장 또한 팬덤적 동질성의 여부에 따라 편을 가르는 데 자족하는 정체성 정치로 축소되어가고, 우리 편에서 배제된 존재에게는 몇 마디 냉소적인 짜증을 덧붙이며 쉐도우복싱을 하는 게 인터넷의 보편적 규범으로 자리 잡은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게 소통인가? 우리가 “깐부”가 맞긴 한가? 글쎄, 이런 조건에서라면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일단 나는 사람이 아니라 조건에 대해서만 회의적이고 싶다. 날이 갈수록 이런 믿음이 좀 어려워지는 것 같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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