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연×엄제현의 티티카카 [5]작은 이야기

조재연, 엄제현

엄제현(이하 U) 대망의 최종장. 밥 먹이고 달래 가며 만들어낸, 조재연 기자와의 마지막 시간이군요.

조재연(이하 C) 견디고 읽다보면 늘어가는 아트 지식! 티티카카의 마지막 화! 지금 시작!

U 오늘 대주제는 ‘작은 이야기’네요. 그전에 기획의 모태가 된 3월 호의 동시대 미술 키워드 제작비화 들려줄 만한 것 없어요? 키워드 받아본 후 편집부의 반응이나.

C 티티카카를 이어오면서 매번 이 키워드가 무슨 의미일까, 왜 나왔을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나 맥락으로 최대한 다듬었다고는 생각하는데 여전히 난맥에 머문 것 같아요. 하나의 논리로 꿰뚫을 수 없고 그저 혼잡하게 흩어져 있는 지형도를, 동시대미술의 정체성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터를 찾아내고 그를 통해 가짜와 진짜를 분별해보는 것 아니겠어요? 가장 아쉬운 점은 이런 거에요. 큐레토리얼 키워드라고는 하나 이 목록을 아티스트 키워드로 봐도 차이가 없다는 것. 다시 말하면 큐레이터의 해석과 작가의 의도가 불화를 일으키는 지점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워요. 큐레이터란 작가의 의도를 존중하고 완성하는 주체이기도 하지만 그것과 대결해 자신의 (작가 스스로도 모르고 있었던) 주제를 향해 재맥락화하는 주체이기도 하니까요. 우리가 다뤄왔던 키워드는 큐레이터가 기획의 관점에서 아티스트를 새로운 관점으로 재해석한, 적극적인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동시대 작가들이 제시한 주제를 재료 삼아 그룹을 지은 것에 가깝죠.

U 제가 아트지의 서베이에서 이상했던 건 동시대 미술의 키워드에 SNS가 없었다는 거에요. 전부인 것처럼 작동하는데도! 그러고 보면 큐레이터 그룹들도 꽤 있는데 말이에요. 근데 큐레이터가 작가들을 전시 포맷을 통해 재해석하기엔, 큐레토리얼도 지나치게 정형화되었다는 느낌이에요. 최근의 많은 전시들이 매끈하고 세련되었지만 충격을 주진 못하죠. 양으로 찍어누를 순 있을지도? 작업들의 포메이션을 고민하는 일인데도 하나의 독서처럼, 논리적 일관성에 따라 흐르는 전시도 많이 본 것 같네요. 반대로, 어떤 일관성을 가진 젊은 큐레이터는 있나 싶고요.(예술이 총체성의 학문이란 반증일지도요) 각종 프로필이나 앤솔로지에서 발견되는, 큐레이터들에 바쳐진 수사는 다음과 같죠. ‘분과를 가리지 않는 폭넓은 관심을 가지고 실천을 거듭하고 있다.’ 예외는 없어요. 불가시적인 걸 가시적으로, 일상의 남들이 지나친 것들에 주목해, 미학 안에서 정치적인 것을 모색하고… 

C 저희가 다섯 회차 동안 큐레이토리얼 키워드란 이름을 가지고 대담을 나누긴 했지만, 놀랍게도 큐레이터에 대해서 얘기한 적이 없어요. 어느 기획자가 어떤 주제를 지속해서 다룬다는지, 작가를 기존의 맥락에서 탈각시켜 새로운 방식으로 현전시킨다는지 등의 이야기는 하지 못했어요. 특집의 내용에 맞춰 키워드에 맞는 작가는 이러 이러한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 거잖아요. 이런 부분은 큐레이터(의 기획)와 작가(작품 주제)를 면밀하게 대조하지 못한 저의 한계일 수 있겠죠. 하지만 여기엔 방금 말씀드렸던 대로 큐레토리얼의 수동성 역시 있다고 생각해요. 큐레토리얼의 전선은 주어진 작업을 그루핑하거나 수합하는 것 너머에 있다고 믿어요. 마리아 린드Maria Lind가 말했듯 큐레이션은 작품에서 출발하지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작품을 염두에 놓지만 그곳으로부터 멀어지고 상반하는 ‘작업’을 통해 구성돼요. 이 점에서 단순한 2차 창작자가 아닌 1차 창작자로서 큐레이터가 출현하죠. 큐레이터의 기획은 작가와 관객 모두와 충돌하는 순간에 비로소 ‘작업’으로 이룩돼요. 저는 큐레토리얼 키워드에서 빠진 건 이런 충돌이라고 생각해요. 가령 유은순 큐레이터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을 거에요. 유은순은 그간 사회의 ‘정상성’에 맞서는 전시를 해왔어요. <틱-톡>(온수공간 2019)전은 만성 질환자의 관점에서 ‘건강한 몸’을 기준으로 편성된 사회를, <사이드-워크>(윈드밀 2021)전은 이동권 차별과 팬데믹을 계기로 정당화된 타자 혐오를 꼬집었죠. 최근 <오프-타임>(아트센터예술의시간 2023)전은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효율성의 원리를 지적했어요. 다른 전시에선 뭉뚝하게 존재했던 작품도 유은순의 기획에선 현실을 향해 튀어오르는 송곳처럼 나타나요.

U 전 큐레토리얼이 귀납성의 제단에 바쳐질 가장 아름다운 지적 강령이라 생각하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시차와 벡터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마사 그레이엄이 그랬죠. 대중이 보기에 예술가가 동떨어져보이겠지만 아니요. 예술가가 오늘을 규명하고 있고 대중이 동떨어진 거라고. 아감벤도 동시대인을 두고 그렇게 말하잖아요. 지배적인 오늘을 거부하고 자기 시대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는 이가 동시대인이라고. 유은순 큐레이터의 실천이야 물론 긍정할 수 있어요. 만성질환자, 이동권, 효율성… 모두 당대적 의의가 있는 주제들이죠. 그렇지만 큐레이터가 안전한 위치에 있다는 점에서 제 기준에선 벡터가 깎여요. 담론이 확보한 영토 내에 머무른다는 그 느낌이 절 괴롭히죠. 제가 씬에게 자주 받는 인상이에요. 유은순 큐레이터는 저보다 상상할 수 있는 범주의 영토가 크기 때문에 저런 실천을 하는 걸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제 생각은 조금 달라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느냐를 인지해야 하죠. 대중과 예술이 이만큼이나 유리되어있다면, 예술가들을 불편하게 하는 일이 제겐 훨씬 시의성 있어 보여요. 기획-기금-전시의 유기적 흐름 안에선 어렵겠지만. 어려워야 의미가 있는 거니까.

‘기금’ 얘기 잘했다. 당대적 의의가 있는 주제의 배후를 의심하게 만드는 것 중에 기금 제도를 빼놓을 수 없어요. 현 미술계에서 열리는 대부분의 전시는 기금 혹은 공공 재원을 통해 재정이 구비돼요. 이러한 현실은 공적 자금을 받기 위해서 작품과 전시가 공적 의제를 관통해야 하는 분위기를 만들고요. 근데 그 공적 의제가 제현씨가 말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느냐’라는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관에서 허락할 만한 선에서 멈춰요. 마치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이 작동하는 방식처럼 말이죠. 우리가 몇 차례에 걸쳐 언급한 문제잖아요. 모두가 작업으로 세상에 ‘뻐큐’를 날린다고요. 근데 그 ‘뻐큐’는 위험하지도 않고, 묵음 처리조차 비켜가는 ‘빠끄’에요. 오히려 최근엔 그냥 ‘내 맘이 이래요, 그래서 이렇게 했어요’하는 작가는 드물어요. (그게 이번 작은 이야기가 예외적으로 가치를 갖는 부분이고) 왜겠어요. 기금을 탈 수가 없기 때문이죠. 관에서 대놓고 공공성을 요구하지 않지만, 기획서 양식에 적힌 ‘의의’나 ‘기대 효과’란 공적 언어가 예술을 강제된 공공성 아래에 닻을 내리게 만들어요. 환경, 소비, 성차별 등의 주제를 권력과 불화하지 않는 선에서 기립시키죠. 블랙리스트는 암약하지만, 기금이라는 화이트리스트는 대낮에 예술계를 세상에 무해한 것으로 관리해요. 정치적 선언이 안전해진 건, 우리 것이라 믿었던 ‘영토 밖의 영토’를 형성한 자가 외려 우리가 싸우고자 했던 권력이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티티카카가 외부가 아닌 내부의 불편을 목표로 설정한 것도 그 이유 때문 아닌가요.

U 화이트리스트! 아트지의 다이너마이트 특집에서 김상진 씨가 지적했던 바이기도 하죠. 맞아요. 이렇게 많은 지원 속에서 10년대가 무엇을 낳았냐고 물으면 답하기 쉽지 않아요. ‘업계인’의 눈으로 봤을 때 지금의 생산 토대가 역겨움을 유발할 만한 실천을 쉽게 가능하게 지지하질 않죠. 다들 그냥 뭐 들어오는 일 하고, 일이 끊기지 않기 위해서 네트워킹이란 미명 하에 노력해야 하니까 내부에서부터 함열되는 실천은 찾아보기 어렵죠. 서론이 길었네… 본론으로 들어가죠.

《 오프-타임 》(2023.6.8-7.5., 아트센터예술의시간)전 전경, 출처: 아트센터예술의시간

종교

U 종교에 대해서 설명 좀 해주세요.

C 제가요? 니가 하면 되잖아.

U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친 마지막이라고 이제 이러기에요?

C 비거(肥巨)한 것만 다루다가 작은 거 하려니 버겁네요. 

U 라임 좋네요. 그래도 소주제들은 다 엄청나게 큼직한 토막이니까 힘을 내보죠. 긴 행군에 지쳤으니 아트인컬처의 힘을 좀 빌리죠. “거대 서사의 종말 이후에 주류 담론에 가려진 마이크로 내러티브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타지에 거주하는 이방인 여성 노동자, 야생동물이 작품의 주인공으로 초대받는다. 젊은 작가들은 아시아의 전통, 무속신앙, 신화에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이를 동시대적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역사에 잊힌 존재를 소화하는 사변적 픽션을 창안하거나 가상과 실제의 경계를 오간다. 또 일상을 살아가는 소시민의 자전적 경험과 기억을 드로잉으로 기록하고 자유분방한 청춘의 민낯을 사진으로 포착한다. 유머와 키치도 동시대 청년 문화를 대표하는 키워드다. 휴양지 풍경, 귀여운 동물 우스꽝스러운 이미지는 일시적으로 기분을 전환하며 불안한 시대에 대응하는 전략이다” 아트인컬처 편집부의 바느질이 대단하군요. 꿰어서 보배를 만들었네.

C 그런 점도 그렇고 거대 담론에서부터 시작해서 작은 이야기를 놓치지 않는 어떤 섬세함이 보여지는….

U 음.오.아.예.

C 저는 종교야말로 오늘날 가장 개인적인 것 중에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일정한 관점으로서 ‘세계관’이라는 말을 쓰잖아요. 종교가 사회적인 것으로 남아있을 때, 그때 종교는 사회를 주관하는 시스템으로서 교리와 신학에 비춰 세계를 표상하도록 만들었어요. 영혼과 관련된 존재론에서부터 절대 왕정의 기반이 되었던 왕권신수설, 자본주의의 정신적 토대가 된 소명론,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바로 그것이죠. 분파는 나뉘었을 망정 적어도 세계를 하나의 그림으로 그리는 바탕, 최대공약수로서 종교가 있었다고요. 근데 지금의 종교는 우리에게 신에게 비춘(신의 눈으로 바라본) 공통의 세계를 보여주지 않아요. 반대로 종교는 개인의 주관에 비춘 저마다의 사적 세계를 근거 짓는 바탕이 되었어요. 신은 이제 모두의 세계를 주관하는 게 아니라, 나만의 세계를 주관하고 거기에 근거를 제공해줘요. 제가 종교가 오늘날 개인적인 층위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이거예요. 여기서 중요한 건 인간이 어느 순간에 종교적인 것과 관계 맺느냐예요. 그리고 그 순간은 우리에게 세상을 이해할 언어가 존재하지 않을 때죠.

U 중세만 해도 종교가 생활 양식을 조정하는 원리였었죠. 종교관과 도덕관이 일치했고, 기독교적 보편주의에 의존하고 있었고. 

C 결론부터 말하면 종교는 이해 불가능한 세계를 이해하게 만들어주는 언어를 제공해 줘요. 왜 우리가 시상식을 보면 자주 나오는 말 있잖아요. ‘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라거나 ‘하나님 덕분에 이 자리에 올 수 있었습니다’ 같은. 비극적인 순간에도 하나님은 등장하죠. 이것도 다 ‘주의 시험’이나 ‘주의 계획’에 있다는 말로. 하나의 결과를 가지고 우리는 사회 과학이든, 자연 과학이든 합리적인 논증을 통해 그 원인을 분석해 나갈 수 있어요. 근데 그 논증이 합리적으로 구성되었다고 해서 ‘이해’ 가능하게 된 것은 아니에요. 고도화된 과학은 그만큼 세상일을 빽빽하게 설명하는 게 가능하겠지만, 고도화된 만큼 우리의 직관적인 이해에서 멀어져요. 그때 종교가 출현해요. 물론 이때의 종교는 기독교나 불교와 같은 기성 종교는 물론 MBTI나 혈액형, (윤석열 대통령이 신봉하는) 풍수지리, 무속까지도 포함해요. 여기엔 외적이고 물적인 근거가 존재하지 않지만, 적어도 내가 이해 가능한 범위 내에서 세상일을 설명해 준다고요. 인간은 단순히 주변의 다른 인간뿐 아니라 세계와 관계 맺고 싶고 소통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어요. 이 세계가 왜 이런지 이해하고 싶은 욕망은 보편적이에요. 별에 대해서 중력이 어떻고, 상대성이론이 어쩌구저쩌구하는 소리는 과학적일지는 모르나 ‘나’의 삶과는 전혀 상관 없는 이야기에요. 그러나 내가 어느 별이 떴을 때 태어났고, 그 때문에 이런 운명과 역할을 짊어졌다는 얘기는 터무니 없지만 ‘나’의 삶을 설명해주고, ‘나’와 세계가 어떤 교감을 주고받는지 관계를 형성시키죠. 저는 이 지점에서 작은 이야기라는 소박함이 종교라는 거대함과 연결된다고 생각해요.

U 세속화된 믿음도 그렇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요즘은 진리와 계시, 예언과 상징 같은, 모호하지만 객관적인 표징에 의해서 인도되는 게 아니라 내가 믿고 싶은 것들을 믿고 사는 것 같아요. 비슷하게 인터넷 커뮤니티 보면 자기네들 정체성과 믿음의 유지를 위해 데이터 검열이 이뤄져요. 요즘의 거의 모든 커뮤니티는 전체게시판에서 기준 추천수를 넘긴 게시물이 대표 게시판으로 이동하는 구조거든요. 무의식과 의식의 구조처럼 층위가 나뉘어져 있어서 커뮤니티의 특정 정체성에 위반되는 데이터는 컷 당해요. 그걸 모르진 않는 거야. 근데 “야 너 이런 얘기 여기서 안 하기로 했잖아, 몰라?” 식의 취사선택된 믿음을 유지하기 위한, 벌거벗은 왕의 믿음이 작동하는 것 같네요. 폭로의 힘이 있던 시절엔 어린아이에게 힘이 있었겠지만(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제는 왜 폭로자가 아이였고, 침묵하는 이가 어른이었는지 생각해 보게 되죠.

C ‘포스트 트루스’ 이른바 ‘탈진실’. 트럼프가 유행시킨 말이었던가요.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무엇이 진실인지 묻기보다는 어떤 ‘진실’에 동의할 것인지, 어떤 ‘진실’을 믿을지 물어요. 객관적 사실보다는 감정이나 개인적 신념이 진실을 구성하는 시대죠.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어요. 진실이란 진실을 가리고 선동의 세태를 꼬집고자 나온 단어지만, 적어도 이러한 탈진실의 상황 때문에 유의미한 전선이 형성되기도 해요.  내면에서부터 관계, 사회적인 일까지 과학의 힘을 빌어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삶에 넘쳐나죠. 우주에서 벌어지는 일의 원인까지 계산해 내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배가 부서져 299명이 죽은 현실엔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한다고요. 최근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사태를 보더라도 정부에서 입이 닳도록 떠들어낸 단어가 ‘과학’이었잖아요. 과학자들의 과학적인 검증에 왜 딴지를 거냐고요. 이때 과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꺼내는 단어가 ‘음모론’이고요. 그러나 당장 ‘권력의 과학이 내세우는 진실’에 반대할 과학이 없을 때, 적어도 공정한 검증을 실현할 기회가 오기까지, 음모론은 진실에 대항하는 (반)진실로서 우리에게 세계를 이해할 언어를 제공해줘요. 4.3과 5.18은 독재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폭동이었어요. 권위 있는(권력이 인증한)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북한 빨갱이가 한 짓이라고 했다고요. 그러나 폭동은 음모론이라는 씨앗에서 자라나 항거라는 진실이 됐어요. 물론 왜곡과 선동, 가짜 뉴스에 눈이 찌푸려지고, 상처 입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 알아요. 그러나 이러한 격랑 때문에 물이 맑아질 것이란 것도 믿고 싶어요. 아니, 믿는다고 해서만은 안 되겠죠. 싸워야죠. 음모론이 진실이 될 때까지. 다시 종교로 얘기를 돌려야 하는데…. 이런 (사실이라고 판명되기 전까지 혹은 사실이 여론이 될 때까지의) 믿음 체계도 종교적이지 않을까 싶어요.

U 사실 종교의 핵심은 믿음과 초월성이잖아요.

C 맞아요. 근대 이전의 종교는 초월적 세계와 개인을 철저하게 분리시켰어요. 기독교는 개인이 속한 현생이 거짓이고 내세만을 진실이라고 이야기했고, 불교는 자아가 허상이라는 것을 깨우치도록 가르침을 전파했죠. 개인은 철저하게 초월성에 반대되는 의미를 가졌어요. 그러나 오늘날의 종교는 개인이 형이상학적 세계에 도달하도록 하는 통로에요. 믿는 자에게 복이 온다. 개인의 욕망을 위해 초월성을 경유해야 하죠.

U 아도르노가 그런 말 했는데. 객관과 주관이 완전히 뒤집혔다고요. 본래 무분별한 인상이나 데이터로 분류된 현상의 앞면은 주관적인 건데 객관이 되었고, 인습적 판단에서 벗어나고, 대상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게 객관적인 건데 주관적인 게 되었다고요. 종교에 관해서도 그런 전복이 있는 것 같네요. 옛날엔 객관으로 주관을 일치시키려 했다면, 이제는 주관으로 객관을 끌어들이죠.

C 헤겔이 주관과 객관이 화해를 통해 정반(正反)을 거쳐 합(合)에 이를 것이라고 본 반면, 아도르노가 그 둘은 영원히 화해하지 못하고 불일치할 것이라고 본 것과 동일한 맥락이죠. 아도르노는 객관 우위의 이성 중심주의가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구체성, 특수성, 개성을 억압하는 전체주의로 향하게 될 것을 우려했지만, 그렇다고 주관이 우위에 서길 바랐던 것은 아니에요. 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지적했던 건 이성적인 사고 안에선 이성 자체에 대한 비판을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이를 타개할 돌파구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술이었죠. 예술은 객관적인 물화의 형태로 출현하지만 주관에서 출발하고, 사회에서 출현하기 때문에 사회성(객관)을 내재하지만 자율성(주관)을 통해 사회를 넘어설 수 있다고요. 어느 것도 우위에 서지 않지만 객관과 주관의 서로를 견제하고 비판하는 긴장 상태가 예술 안에서 이룩되는 것이죠. 그러나 제현 씨 말대로 지금의 상황은 아도르노의 시대와는 정반대로 객관 우위의 시대에서 주관 우위의 시대로 넘어가버렸죠.

U “미신은 사회의 표면에 흩어져 있는 파괴의 암호를 결합시켜서 본다는 점에서 인식이다. 그러나 미신은 온갖 죽음의 충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환상에 매달린다는 점에서 어리석다. 미신은, 단지 현실 세계와 맞설 때 주어질 수 있는 대답이 천상으로 옮겨진 변용된 사회의 형태 속에서 약속되는 환영에 매달리는 것이다.” 이것도 아도르노의 말인데, 완벽히 동의하긴 힘들어요. 반례로 우디 앨런의 〈매직 인 더 문라이트〉가 있어요. 마술사 남성이 심령술사 여성의 트릭을 밝혀내려고 하는데, 심령술의 트릭은 밝혀내지만 사랑의 트릭에 걸려요. 자크 라캉 식으로 말하면 환상은 오인이지만, 환상에 의해서 현실이 지속되기에 전치된 거죠. 이창동의 〈오아시스〉에서 문소리가 보던 나비의 환영이 설경구 안면에 들어앉아 환상이 전치되듯요. 뒤르켐 역시 자살론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과학이 등장해서 종교가 부서진 게 아니다. 종교가 설득력을 잃어갔기에 과학이 그를 벌충한 것이다” 정리하면 우리에겐 인식도, 믿음도 필요하다. 당신이 말한 대로 물신주의적 부인의 구조에서 믿지만요.

C 다시 말하자면 기술이 표피로서 삶과 연관되는 것과 다르게 과학은 고도화될수록 우리 삶과는 멀어져요. 예술로 키를 돌려보죠. 예술은 공감을 향하는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때로는 종교와 신화 나아가 초현실적 풍경을 통해서 삶을 이해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줘요. 내가 겪는 일이 나한테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주고, 말로 뱉을 수 없었던 감정을 대신 표현해 주고, 그 마음을 공유하게끔 도와줘요. ‘그 그림 봤어?’라고 물으면서요. 지식이 부족해서 혹은 이해하지 못해 해명할 수 없는 일은 예술에서 일어나지 않아요. 과학이라면 무언갈 사실이라고 입증할 수 없기에 그것이 거짓이라고 얘기하겠지만, 예술은 그것이 거짓임을 입증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진실이라고 이야기해요. 마치 신자들이 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할 수 없기에 신은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믿는 것처럼요. 이해할 수 없다고요? 느끼세요. 합리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이 말은 비논리적이고 불충분한 개소리죠. 근데 예술에서는 이 말로 나를 설명할 수 있다고요.

조렐루야. 저도 제가 하는 일은 사람의 수명을 늘려줄 뿐, 다른 삶을 살게 해 준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예술은 좀 다르죠. 인생의 방향을 바꿔요. 증거물은 바로 저에요. 예술이 저를 이곳까지 인도했으니까. 제가 야수파 그림을 보고 조현병에 걸린 환자의 케이스를 그저 치료적 담화 관계 안에서만 바라봤다면 글을 쓰고, 전시를 만들고, 매체를 운영하는 이 모든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겠죠. 의학 담론 안에서 그림은 단순한 맥거핀에 불과했겠지만, 만약 그 상황을 불신하지 않았다면 제가 어떻게 지금 당신과 마주하겠어요? 

<매직 인 더 문라이트>, 우디앨런, 2014, 한 장면.

내러티브

U 요즘은 비선형성이 대세라.

C 역사와 기억에 대해서 다뤘던 게 매체였나요? 거대 서사와 거대 담론으로서의 내러티브가 역사라고 한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나눌 부분은 작은 이야기로서의 내러티브, 즉 개인의 기억과 경험이라고 얘기할 수가 있겠죠.

U 그러게요. 당신 인생의 고유한 내러티브 좀 말해주세요.

C 냉장고 문을 열고, 머리를 집어넣고, 문을 닫았다던지?

U 왜요?

C 냉장고 안을 보려는 욕망과 거기에 이제 내가 먹을 것은 없다는 어떤 이성과 욕망의 대결에서….

U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거짓말하지 마…

C 진짜에요.

U 아무도 안 믿어요. 아니 진짜 좀 에픽한거 없어요? 저부터 말하면, 저는 살면서 집에 불이 두 번 나서 완전히 물욕을 잃었어요. 그 이후로 물욕을 잃어서 물질에 일말의 애정도 없어요. 전 애인에게 명품 선물 받았을 땐 날 무시하나? 아니면 날 그렇게 모르나? 싶어서 화도 나더군요. 그래서 예술을 사랑하는 걸지도 모르죠. 꽃을 꺾기보다 예뻐하고~ 옛날 사람이네요, 저.

C 그런 내러티브라면 저는 하나 떠오르는 게, 지난번 회차에서 제가 노동당에서 7~8년 동안 활동하고 있고, 대학교 때부터 운동을 해왔다고 했잖아요. 한 번은 26살 때인가 옥바라지 골목 재개발 반대 투쟁에 참여한 적이 있어요. 옥바라지 골목은 서대문 형무소 앞에 있는 골목이에요. 서대문 형무소는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가들을 가두는 데 사용됐고 그 이후엔 민주화 투사들을 가두는 데 썼거든요. 그래서 서대문 형무소 앞에는 옥바라지 골목이라고 해서 수형자들을 옥바라지하기 위해서 가족들이 거주했던 여관이라든지 단칸방 같은 곳이 굉장히 많아요. 문화적인 가치가 높은 곳이고, 정치적인 상징성도 뚜렷한 곳이죠. 민주화 투사들을 아름아름 지원했던 것을 넘어서 그 공간 자체가 어떤 민주화 운동의 어떤 진지 역할을 했던 것도 사실이니까요.

아. 고 박원순이 제지했던.

C 근데 그 공간을 재개발한다고 해서 업체들이 들어와 있고, 용역 깡패들이 곳곳에 거리를 부수고 몰아내고 쫓아내고 그랬어요. 거기에 집회를 하러 갔다가 용역 깡패들이 거기에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사람 사는 집에 막 자물쇠로 문을 걸어 잠가버리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그때는 뭔 객기였는지 모르겠는데 그 자물쇠를 막 부쉈어요. 들어가려고요.

U 스쾃을 하려고? 여기 사람이 있다, 너네들이 우리를 쫓아낼 수 없다? 강정마을처럼?

C 맞아요. 거기 점거하려고 들어갔는데 용역 깡패들이 온 거예요. 근데 그 깡패들이 경찰을 불렀어요. 얘네가 사유지에 무단으로 침입해서 지금 사유 물품을 이렇게 부쉈다고. 경찰에 조사를 받고 누가 그랬냐고 묻는데, 조금 전에 객기는 다 사라지고 덜컥 겁만 나는 거예요. 고소 얘기가 오가고, 벌금이니 손해 배상이 거론되고 유치장에 들어가니 마니 막 이런 얘기가 나오니까 진짜 심장이 벌렁벌렁하더라고요. 저는 그때 거기서 정말 가만히 있었어요. 나는 아무것도 안 한 사람처럼, 무관한 사람처럼 도망쳤던 거죠. 상상 속에 저는 이런 일에 목소리를 높이고, 몸싸움도 좀 하고, 경찰한테 ‘너희들 그러면 안 되지’ 막 이렇게 대드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멋진 어른을 어른을 생각했는데 그 자리에 가니까 너무 겁 많고 비겁하고 작은 제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 처음 깨달았던 것 같아요. 나는 투사는 될 수 없겠구나, 나는 투사로 살 수는 없는 사람이구나, 나는 이렇게나 자꾸 비겁한 사람이구나. 그 경험이 제 글쓰기를 완전히 바꿔놨어요. 더 이상 거대 담론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가 어렵더라고요. 혁명이니 진리니 하는 주제 말이죠. 내가 뭐라고, 나는 거기서 도망쳤던 사람인데 해방을 입에 올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어요. 혁명이 일어나면 난 제일 먼저 도망가고 동지를 발고할 사람이 나였는걸요. 근데 결국엔 제가 지향하는 가치를 포기하지는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찾아낸 게 지금과 같은 글쓰기에요. 그렇다면은 거대 담론에서 시작하는 얘기가 아니라 차라리 내 비겁함과 비천함을 토로하고 고백하고, 이 비겁함이 어떻게 그런 거대 담론까지 닿을 수 있는 이야기를 쓸 수 있을지에 대해서 쓰자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U 그래도 남들 읽는 이 담벼락에 공공연히 고백한 것도 굉장한 용기처럼 보이네요. 종교인들도 그렇죠. 2박 3일 합숙 수련회에서 성령 충전하지만 금세 고갈되잖아요. 인생은 길고, 삶은 계속될 텐데 하루아침에 대학생에서 범죄자가 되라고 하면 두렵겠죠. 세상이 바뀌니까. 지난 민중총궐기를 댓가로 한상균 위원장이 징역 5년 살았죠. 조계사에 피신하고 그랬어도 지키지 못했어요. 한 번 어긋나면 인생 완전 쫑난 것처럼 압박하는 사회니까 두려움은 더하고 그 두려움을 만들어내는 테크놀로지가 권력이고. 뒷바라지가 든든해야 해요. 아무튼, 당신 고백은 웹진이 소중하게 다루겠습니다.

C 이렇게 우리가 좋은 얘기하고 나니까 그냥 하나 떠오르는 게 있는데요. 너무 상투적인 이야기인데 봉준호 감독이 오스카 상 받으면서 그런 얘기했잖아요. 마틴 스콜세지를 언급하면서 했던 얘기인가요? 봉준호가 영화를 공부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문장이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공적인 것이다’라는 말?

U ㅋㅋㅋㅋ 초딩시절 교과서랑 페미니즘 서적에서 본 주장 같은데.

C 다시 예술 얘기로 돌아가면 개인적 내러티브를 가장 늦었지만 동시에 급진적으로 받아들인 장르는 사진이었어요. 사진의 본질에 대한 고전적인 개념은 기록성과 사실성이죠. 사진은 인간의 눈이 아닌 기계의 눈으로 보았기에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었고, 현상된 사태는 반드시 현장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이벤트라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었으니까요. 존 사코우스키John Szarkowski가 《New Documents》(뉴욕현대미술관, 1967)에서 “보다 개인적인 목적을 지향하는 새로운 세대의 다큐멘터리 사진”라고 언급했듯,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기록이나 보도를 목적으로 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에서 작가의 주관을 현상하는 ‘개인적(personal) 다큐멘터리’가 등장해요. 개인적인 것에 함몰된 것이 아니라 개인을 소외시키는 사회를 다시 개인과 소통하는 사회로 연결해,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통로로서 개인을 제시한 것이었죠.

U 더 들려주세요.

C 우리는 모두가 서로에게 타자에요. 타인의 느낌과 사유에 온전히 닿는 일은 일상 세계에선 불가능하죠. 하지만 예술은 고유하고 개인적인 타자의 경험을 통해 보편적인 공감으로 나아가요. 신형철 평론가의 말처럼 “분명히 존재하지만 명확히 표명될 수 없는 느낌들의 기적적인 교류”를 통해 이해의 공동체를 이룩하죠. (자꾸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반복하게 되는데) 그런데 ‘이해’가 성립되기 위해선 그 개인이 서 있는 곳이 공통의 지평이여야만 해요. 각자의 세계에서 사는 각자의 개인이 아니라, 공통의 세계에서 사는 개인이어야 한다고요. 그런데 우리가 실컷 얘기한 것처럼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그게 불가능해요. 개인은 다른 개인과의 연결 고리를 경제를 제외하고는 찾기 힘들어졌어요. 심지어 그 경제마저도 끊임없이 개인을 더욱 분절하려고 심화되고 있죠. 미술에서도 마찬가지의 경향이 나타나요. 최근의 작은 이야기, 이른바 퍼스널 내러티브는 보편성을 향해 열어놓기보다는 각자가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해 천착해요. 이건 우리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나의 고유한 이야기라고 말하지 않고,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나만의 이야기라고 말하는 식이죠. 내가 얼마만큼 다르고 특별한지가 작가의 무기가 된 것처럼요. 이해 불가능성, 못되게 얘기하면 자폐성이 어떤 예술성을 담보하는 것처럼 나타나고 있어요.

U 주관과 객관이 항상 매개되는 것이니 나무랄 건 아닌데. 그러한 역학 안에서 미술관이 뭘 해내고 있냐를 셈해봐야 할 것 같아.

C 자소서하고 비슷한 것 같아요. 자기소개서에선 개인적인 내러티브를 끊임없이 늘어놓고 그게 얼마나 남들은 할 수 없는 고유하고 특별한 경험인지를 열심히 설명해서 나를 치장하려고 하잖아요. 작업도 비슷하다는 거죠. 내가 어렸을 때 어떤 경험을 했고, 혹은 내가 얼마만큼 타자고 흑인이고 퀴어고 제3세계의 서발턴이고, 망명했고, 디아스포라고 이런 것들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 이야기의 입체성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내러티브를 사용하는 지점이 분명 있어요. 작업을 특별하게 만드는 게 내러티브라는 듯이요. 자기 시각을 특권화하는 거죠. 어쩌면 이러한 경향은 더 이상 형식 실험으로 혹은 미감으로는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게 불가능하다는 봉착의 반증일지도 몰라요.

또는 내가 어떤 인간이냐는 물음을 궁구할 때, 과거의 궤적을 따라 설명하면서 연속성을 가진 존재로 구성해내는 스타일이 득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기서 정치적인 입장은 제한되죠. 내가 어떤 입장을 가진 인간이냐 하는 건 마이크로바이블과 같은 과거와 무관할 수도 있거든요. 그런데 마치 과거가 지금의 이런 나를 구성했다는 줄거리가 일반적인 것이 되죠. 이런 유사정신분석적이고 사이비숙명론적 갈래가 풍기는 위화감은 단순히 미학적 바운더리 안에서만 작동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2016년 옥바라지골목 철거 현장. 옥바라지 골목.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1224.html

B급감성

U 요새는 B급감성이라는 구분 자체가 안 통하지 않아? B는 요소적인 게 되어서 만연해져서 옛날엔 “이건 B네, 이건 A네.” 했는데 이젠 그런 구분이 인식을 주는 때는 지난 것 같아.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만 봐도 그렇고. 얼마 전 갤러리 현대에서 했던 사이먼 후지와라도 그렇고.

C 이제는 그런 식의 이제 구분법이 효력이 없는 지점까지 온 것 같아요. 타자성이라든지 아웃사이더적인 성격이 결국 향했던 곳은 주류였잖아요. 아방가르드조차도 미술관에 빨려 들어갔다고요.

U 10년대만 해도 저는 호머 심슨과 호메로스를 동일한 문화적 증상으로 놓는 것에 대한 애매한 반감이 남아 있었거든요. 제임슨이나 지젝을 읽고 나서도요. 근데 이제는 작업이 그러한 위계없는 실천을 이전부터 그래왔던 냥 자연스럽게 밀어붙이니까 이제 제 생각을 고쳐야 할 것 같아요. 적어도 이런 퀄리티의 문제에선 무규범성이 완전히 승리한 것처럼 보여. 이제 A와 B는 상호침투적이죠. 그렇지 않았다면 저 역시도 이세계물 웹툰의 주인공들에게서 스탈린의 초상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미친 짓은 하지 못했겠죠.

C 엉뚱한 얘기일 수도 있는데, 가끔은 A급 감성이 타자성같이 느껴져요.  꽃 그림은 명백하게 주류에 해당되는 미술 양식이죠. 근데 오늘날 꽃 그림은 완전 B급이잖아요. 진은영 작가가 한 말인데, 가치가 진부해지는 것보다 식상해졌다는 이유로 그 가치를 저버리는 게 무섭다고 했거든요. 사랑 우정 평화 평등 이런 이야기들은 정말 진부한 이야기가 됐어요. 그러나 진부해졌기 때문에 안 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전히 그런 것들이 달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에 목 매이는 사람들도 있어요. 진부한 건 달리 말하면 순수함으로 이해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 순수함만이 만들어내는 새로움이 있고, 진부해질 만큼 헌신해 온 역사와 결부된 진리가 존재하죠. 그런 측면에서 저는 사진작가 정희승이 시도하는 정물 사진에 매혹되곤 해요. 최근에는 <Rose is a Rose is a Rose>라는 꽃 그림을 사진 언어로 재해석한 작품을 발표했죠. 얼핏 보면 촌스럽다고 느낄 수도 있어요. 이미 숱하게 반복된 도상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여전히 거기에 천착한다면 그리고 그곳을 말미암아 이룩할 가치가 있어 발이 묶인 사람이라면 저는 싫어하지 못하겠어요.

U 방의 온도가 올라간다.

C 글을 쓸 때도 읽을 때도 아름다운 문장을 발견하는 것을 좋아해요. 저는 비평에 관해서는 유미주의자에요. 제게 가르침을 주셨던 선생님들께 숱하게 혼이 났지만 예쁜 말에 치중해 글이 산만해질 때도 많아요. 저는 글을 잘 쓰는 필자들은 많지만, 글을 아름답게 쓰기 위해서 노력하는 필자는 드물다고 생각해요. 좋은 철학, 좋은 관점을 담고 있는 비평가들은 너무너무 많아요. 정말 존경해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요. 진심이에요. 근데 그것을 담는 그릇을 세공하는 필자는 정말 정말 드물어졌다고 생각해.

U 요샌 비평 자체가 먹물 잔뜩 낀 레퍼런스 게임이 돼버린 것 같던데. 모두가 학력이 높고 하니까 듣도 보도 못한 어떤 해외 작가나 학자들 레퍼런스 긁어와서 상큼한 레서피로 조립하는 데 결론은 되게 진부해. 결국 뭐 다양성이나 찬양조에요. 닭 사이즈는 그대론데 칼만 살이 쪄요. 당신 불만 좀 더 얘기해 줘요.

제가 생각하기에 비평은 논문과 분명히 분리되는 것이고 저에게는 작품에 더 가까운 영역이거든요. 제가 문학 비평의 영향을 받은 걸 수도 있는데, 문학 비평이 하나의 산문이 아니라 문학(예술) 장르로서의 평가가 되는 것이고, 작품을 읽지 않아도 비평만을 보는 재미가 있다는 점이 늘 부러웠어요. 아도르노, 카프카, 바르트, 들뢰즈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이 글을 쓸 때 그 글을 담는 언어에 대해서 늘 고민을 했다는 거예요. 새로운 진리, 철학, 이론은 일상적이거나 학술적인 주류의 언어로는 절대 그것을 담아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요. 그러나 우리가 만들어 내는 건 새로운 내용일 뿐 아니라 새로운 언어고, 그렇기에 모든 글은 모든 텍스트는 외국어로 쓰여져야 된다라고 얘기를 했어요. 제게도 정답은 없고, 저도 원고지를 낭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요. 그러나 새로움을 찾고, 새로운 것을 예술 작품에서 발굴해 내려고 하는 사람들이라면 그 그릇에 관해서는 다른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여전히 논문에 가까운 정돈된 글을 추구한다는 거는 분명 비평가나 이론가로서의 책임을 일정 부분 방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U 논문에 비하면 비평은 늘 자기증명을 위해 분투해야 하죠. 퐁 입장에선 ‘아, 이 사람 글이네’ 하는 게 끌려. 필자들을 탐색하고 청탁하는 기준도 그래요. 주류 지면에 관성적인 쓰기 안 하는 사람이나, 도발적인 아이디어 가진 사람들, 블로거, 비전공자, 관심사 특이한. 테크니컬이 강점인 사람은 별로 안 끌리면서도, 비평에서 스타일 보긴 또 힘들어진 것 같네요. 응? 이거 주제 뭐였죠?

<Who King Body Free>, Simon Fujiwara, 2023, Oil on Paint. 출처: https://www.wkorea.com/2023/04/20/%EC%98%88%EC%88%A0%EA%B0%80-%EC%82%AC%EC%9D%B4%EB%A8%BC-%ED%9B%84%EC%A7%80%EC%99%80%EB%9D%BC%EC%9D%98-%EC%84%B8%EA%B3%84/

K

U 메타버스, 코로나19, 챗-GPT, 그리고 K. 최근 몇 년간 없었으면 한국을 침묵에 빠뜨렸을 낱말들. 특히 K는 진짜 오진다고 느낀 게 ‘K 반도체 벨트’ 구상이에요. 아니 뭔 부두술도 아니고 지도에 K를… 심지어 밑에 이미지 보면 K도 아니고 n 모양이야.

C 많이 나왔는데 다 실패했죠. 모든 수사들이 K아트로 이렇게 점철됐었잖아요. 여전히 미술 시장에 대한 기대에 가까운 진단을 보면 한류의 열풍이 결국에는 미술로 올 거다라고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굉장히 많아요. 프리즈 서울 개최 역시 한류 열풍의 연장선상으로 여기는 시각도 꽤 있고요.

U 한국의 상상력이 항상 그래요. 아이돌은 잘 만들어진 상품인데 이제 국가대표보다 더 국가를 대표하죠. bts가 미래문화 특사로 임명되면서 외교관 여권까지 받고. 이젠 뭐 하나 잘 나가면 그냥 K로 퉁치는 거야? 최근엔 프리즈라는 태양 주위를 공전하도록 모든 대안공간들이 제물로 바쳐졌음. 하긴 대안이라는 말도 이젠 참칭하는 이들에 의해 의미가 완전히 변성돼서.

C 근데 로컬리티라는 게 과연 존재하는지부터 물어야 할 것 같아요. 모두가 다 글로벌화되고, 자본주의로 세계의 모든 도시가 빨려 들어가는 상황에서, 흔히 얘기하는 전남 미술이니 부산 미술이니 이런 것들을 동시대미술에서 발굴하는 일이 과연 가당키나 하냐고요. K팝 역시 그냥 팝이지 어떤 특별한 특색을 갖고 있는 부분은 찾기 힘들잖아요. 많은 곡들이 해외 작곡가와 해외 안무팀을 기용하고 있고요. 그중에 인상 깊었던 진단은 한류의 열풍을 PC주의와 연결시키는 관점이었어요. 미국 팝의 외설적인 가사과 달리 K팝은 사랑과 평화를 노래하고, 백인 남성의 주류 문화에서 벗어난 서사가 누구나 들을 수 있는 범주를 형성해낸다는 것이요. 반면에 K아트는 어떤 독자적인 문화성을 형성하기보다는 뉴욕과 홍콩의 트렌드를 따라가려고 하고 있거든요. 이번 키아프 서울은 작년을 반면교사 삼아 더욱 글로벌 트렌디를 따르는 작품이 나왔어요. 흔히 말하는 해외에도 먹힐 만한 스타일이요. 마치 최근 K팝에 저지 클럽, 드릴 장르가 적용된 것처럼요. 차라리 K팝은 그래도 믹스팝이라는 특성을 통해 독자성은 아니어도 일종의 식별가능한 최대 공약수를 만들었다면 시장에서 거론하는 K아트는 그 정도의 포커싱조차 갖지 못해요.

국제 아트페어는 환차익의 논리가 주요하게 작동하는 것 같아요. 글로벌 마켓의 미학적 버전이죠. 일전에 우리 필자 이계성 님이(똑똑하니 자주 언급되는군요) 전 아트포럼 편집장인 캐롤라인 버스타의 글을 번역해 줬는데,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백인 주류 아티스트의 작품값은 이미 솟을 대로 솟았기 때문에 시장은 제3세계와 유색인종 예술들을 새로이 발굴하고 몸값을 띄워 팔아넘기기 위해 담론들을 동원했다고요.(다시 읽고 쓰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워딩 아님) 프리즈가 K아트에 원하는 것도 그런 거겠죠. 여기서 아트에 K가 붙으면 그건 더 이상 Asset이 아니라 Currency에요. K-아트-머니를 싸게 구매해서 차익을 올려야 하는 시장 입장에서 자꾸 서구가 하던 작업의 유사 판본만 등판하니 그들 입장에선 위조지폐처럼 보이겠죠. 실제로 아르코 관계자 말론 그들이 K 이머징 아티스트들과 매개하길 원했으나, 아르코 나잇은 그냥 어영부영 얘기하다 친한 사람들끼리 2차 가는 폭망한 행사였다고 하더군요. 별개로, K아트는 속지주의 개념을 따르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K와 아트가 결합가능한 언어인가 싶은 생각도 자주 들지만 또 그런 비변증법적인 결합으로 가득 찬 게 우주죠. 뭐 볼 때 K가즘 느끼시나요?

C 이상한데 또 손흥민 골 넣는 거 보면 왠지 국뽕이 막 차올라요.

U 아시아인의 유럽리그에서의 삶을 투쟁적이라 여기는 사람도 많죠. 뭐 현대화된 전쟁이니까… 전쟁영웅처럼 보이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돈도 잔뜩 벌어오니까.

C 근데 그렇게 따지면 사실 BTS급만큼 해외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던 작가들이 이미 있잖아요. 백남준 있죠. 양혜규도 그렇고요.

U 백남준은 속지주의 K 가설에 의해 기각. 딴소린데요 ㅋㅋ 얼마 전에 누가 썼지? 그런 글 봤는데. 양혜규가 커리어로 보면 백남준보다 훨씬 화려하지만, 결코 백남준처럼 되진 못할 거라고. 어디 인스타에서 힐끗 본 거 같아서 기억도 안 나네요. 아, 당신도 K 시켜드릴게요. 고재연 씨.

출처: https://m.segye.com/view/20210513518989

기분 좋은

고재연(이하 K) ‘기분 좋은’은 유미주의랑은 조금 다르죠 유미주의가 어떤 형식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얘기한다면, ‘기분 좋은’은 미감적으로 시인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일 때 형용 가능한 범주에요. 대표적인 예시는 가와이아트죠. 굉장히 대중적인 키워드에요. 대중이 미술에게 바라는 건 사실 그것을 보고서 내가 행복해지고, 내가 거주하는 공간을 좀 더 예쁘게 꾸며줄 수 있게 하는 것을 원하는데, 사실 그 미술은 대중의 그런 요청하고는 좀 거리가 멀잖아요. ‘기분 좋은’은 그런 대중성을 지향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말이 부정적으로 들린다면 민주적이라고 하면 될까요? ㅎㅎ

U 저는 이게 동시대 미술의 키워드가 될 수 있다고 봐요. 형식, 구성, 색, 면 같은 게 아니라 그 종합 왠지 좋아. 그럼 좋은 거죠. 이유는 천천히 찾으면 돼요. 뿌리 작가도 고양이 매체로 뷔페를 쏟아내잖아요. 세상에 누가 고양이를 미워할 수가 있어요? 전 고양이 때문에 눈물도 흘리는 사람이란 말이에요. 촉각적이고 정서적인 전회가 이뤄졌어 이미. 또 한편으론, 기분에 의탁한다는 건 나쁜 의미에서 정치적이죠. 전체에게 동의를 구할 필요 없는 정치요. 특정 지분만 확보하면 된다는 식으로, 주주총회처럼 상상하고 굴러가요. 몇 큐레이터, 몇 컬렉터만 있으면 된다는 듯 굴죠.

K 이 키워드가 정확하게 양분하고 있는 장소가 미술관과 갤러리죠. 아트페어와 비엔날레. 팔리는 그림과 팔리지 않는 그림과 같은 의미에서요. 우국원 작가는 미술시장에서 내로라하는 블루칩 작가지만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적은 없어요. 미술관 단체전에 초청되는 일도 드물고요. 하지만 때때로 ‘기분 좋은’ 혹은 ‘귀여움’은 낯설고 어려운 주제가 친밀하게 다가가도록 돕는 장치가 되기도 해요. 최근 페레스프로젝트 삼청에서 개인전을 열었던 애드 미놀리티가 대표적이었죠.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개최한 《쉿》도 마찬가지고요. 누구나 다 귀엽다고 여길 만한 순정 만화의 눈을 떼오고, 슬라임의 외형에 어떤 도깨비의 장난기 많은 표정으로 화면을 채웠지만, 그 귀여움을 통해서 작가가 은연중에 전달하려고 했던 거는 페미니즘이나 타자성에 대한 정치적인 어젠다거든요. 이런 방식을 주로 사용하는 작가로는 배윤환과 장종완도 빼놓을 수 없죠. 귀여움에 속아 넘어가면 거기에 기다리고 있는 건 사회에 대한 예리한 일침이에요. 일종의 트로이 목마처럼 귀여움을 무기로 사용하는 작가들의 존재도 중요한 대목이라고 생각해요.

U 한편으로는 이런 기분 좋음이라는 걸 단순히 반이성적이라는 식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그거 자체를 하나의 어떤 지적 개념으로 정조한 것들이 이제 정동 같은 것들이잖아요. 어우, 지지하는 개념이 아니라 더 말 안 할래요. 그보다 아트의 말을 받아보죠. ‘휴양지 풍경, 귀여운 동물 우스꽝스러운 이미지는 일시적으로 기분을 전환하며 불안한 시대에 대응하는 전략이다.‘ 끄덕거릴 만한 말이죠.(저는 공포와도 관련되어 있다 보지만요) 20세기에 주요한 감정이 불안이잖아요. 하이데거나 레나타 살레츨에게서도 중요하게 다뤄지죠. 그보다 훨씬 더 전엔 남성이 제스스로 두려워하는 여성을 프레임 안에 결박하고 누드의 형태로 포착함으로써 남성적 불안을 덜고 ‘안전하게 보기’를 즐겼단 말도 있고요. 동시대인에게, 특히 우리 세대에게 불안은 뭔가 상황이 더 악화되리란 불안이라기보단, 현재로부터 어떤 반전도 없을 거란 불안에 가까운 것 같아요. 아닌가요?

K 귀여움에 대한 추구를 불안에 대한 증상으로 보자는 이야기죠? 저도 제현 씨의 말에 방금 끄덕였어요. 이건 앞서 얘기한 귀여움을 무기로 사용하는 작업과는 다른 이야기에요. 여기에 선을 긋고 넘어가죠. 제현 씨가 말한 ‘상황이 악화되리란 불안’ 더 나아가 ‘지금에서 어떤 반전도 없을 거란 불안’이 시대의 분위기가 된 지금에서, 개인에게 주어진 제1명령은 ‘즐겨라’라는 말일 거에요. ‘즐겨라’라는 명제 자체가 나쁜 건 아니죠. 그러나 이 말이 자본주의와 결속되면서 쾌락적 소비는 인생을 고양시키는 동력이자 목표가 되었어요. 무언가를 통해 행복해지지 않는다면 그것을 소비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요. 행복이 지상 과제가 될 때 거기에 포섭된 미술이 ‘기분 좋은’ 혹은 ‘귀여움’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미술이 탄생하는 것이겠죠.

U ‘즐겨라’라는 명령을 반영하는 귀여움이라… 하긴 귀여움엔 정치적으로 대립할 필요도, 이성을 동원할 필요도 없죠. 도취되면 그만이니까요. 그 무조건반사적 무해함이 상품의 전위가 된 지 오래라 귀여움을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들도 있지만, 북문을 막았는데 남문으로 치고 들어오는 격이라 매번 민감하게 대응하기는 불가능해요. 한편 귀여움이 기호작용이라는 점을 터득한 이후로, 세계 전체가 귀여워지고 있는 것 같아요.

숭고미를 통해 인간 주체의 인식적 한계를 깨닫고 동시에 그 너머로 고양케 했던 풍경화는 언젠가 한번쯤(한 번 더) 가봤으면 좋겠을 장소를 담은 버킷리스트 같은 풍경화로 전락하고, 현실을 부정함으로써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하게 했던 초현실주의화는 개인의 쾌락이 투영된 판타지로 환원되죠(마치 스노우캠으로 본 제 얼굴처럼요). 진리의 형체를 기하학과 비정형으로 포착하겠다던 추상화는 어떤가요? 그저 인테리어를 해치지 않을 만한, 동시에 오래 봐도 질리지 않을 만한 소품이 되지 않았던가요.

U 말씀하신 점에서 귀여움은 미숙함이기도 해요. 귀여움에 천착하는 키덜트도 그렇지만, 우리가 귀엽다고 생각하는 형태를 보세요. 대부분 미니멀하고 순화되어 있죠. 만화 같은 경우엔 하드보일드가 귀여움을 주기도 하지만, 그건 형태에서라기보단 거리감에서 비롯되는거고요. 거리가 우주를 장난스럽게 만든다는 성찬경의 시처럼요. 구닥다리 같은 말이지만, 이렇게 귀여운 것들이 가득하니, 실제 우리 세계가 얼마나 위협적인가? 하고 자문해보게 되네요.

철학이 그랬듯 미술 역시 시대가 지닌 불안의 궤적을 따라 움직였어요. 앞서 말한 인간, 현실, 진리와 관계된 문제도 마찬가지겠죠. 그러나 불안을 마주보기 위한 미술과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미술은 다르다고 생각해요. “세상에 살지 않는 것, 노골적이고 고루한 선생들로 가득한, 잡초 하나 없는 깨끗한 전원주택지에서 아침을 맞이하지 않는 것, 이런 것들이 사실상 의식적인 정치적 동기가 되었다.” 조지 오웰이 「사회주의자는 행복할 수 있을까」에서 한 말이에요. 오웰은 행복이란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고, 기꺼이 불행해져야 한다고 말해요. 이 말에 동의해요. 저는 미술을 보고 제가 더 불안했으면 그래서 더 불행했으면 좋겠어요.

끄덕. 언제까지고 불행할 수 있도록 기도하겠습니다. 이제 마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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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우리 만담이 모두 소진되었네요. 사실 당신에겐 청탁을 줄까 어쩔까 하다가, 자네가 늘상 쓰는 스타일 말고 당신이 가진 지적 역량을 소개해보고 싶단 생각에 동시대미술 키워드 추격전에 초대했어요. 우리가 일일이 담아내기엔 벅찬 주제들도 많았고, 당연히 나이브한 구석들도 있었지만 이렇게 생각해요. 미대생 수준에선 우리 대화가 적당히 유익할 테고, 플레이어들에겐 반례를 기꺼이 사유할 스낵 텍스트가 될 거라고요. 제게는 대화라는 걸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어요. 일전에 누군가 ‘비평적 글쓰기’가 뭐냐 물었을 때 제가 떠올렸던 건 스스로를 타자화하는 대화였어요. 나 자신이 써놓고도 조금 이따 보면 석연치 않아서 끊임없이 고쳐써야 하죠. 이 과정은 자폐적이기라기보단 개념을 위한 무한한 지연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런 대화를 사랑하고요. 일상에서의 많은 대화들이 한담에 그치고, 사유는 희박하고, 물꼬를 트기 난해하니까요. 미술계에서의 대화도 지적 과시, 집단적 독백, 차이의 불신, 관계를 우선하는 적당한 주억거림을 많이 목도했어요.(나도 크게 다르진 않았았음) 당신과 나눈 대화는 조금 다르게 기억하려 합니다. 일종의 복화술 같은 것으로요. 때론 당신 입에서 내가 하려던 말이 나오기도 해서, 아주 멋진 복화술을 경험했다고 생각해요. 내 입이 아닌 곳에서 내 말이 나오고, 내가 말했으되 아닌 것 같은 느낌으로.

제현 씨가 티티카카를 시작하면서 첫회부터 “이번 토크로 몇 명의 적을 만들 각오까지 하셨죠?”라고 물었잖아요. 그 말을 듣고 ‘아씨 괜히 한다고 했다’라는 생각이 바로 들었어요. ‘내가 뭐라고 이런 말을 할 수 있나’하는 생각을 밥먹듯 하면서 글쓰는 사람에게는 심신미약에 걸릴 것 같은 기획이었다고요. 방금 한 말을 듣고보니 제가 당신의 전략에 제대로 걸려들은 셈이군요. 내러티브 파트에서 언급한 것처럼 진리니 혁명이니 하는 얘기는 꺼내지 않기로 했는데 말이죠. 하지만 제현 씨가 그랬듯 만족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담기엔 벅찬 주제가 많았고, 틀린 말도 많이도 지껄였지만요. ‘비판’은 오류에 대한 수정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철학적으로는 어디까지 인식할 수 있고, 어디까지 알 수 있는지 한계를 그려보는 것이잖아요. 아마 당신이 말한 ‘타자화하는 대화’란 그런 걸 의미하겠죠. 같은 맥락에서 제가 뱉은 말들은 ‘나 이만큼 알아’라기 보다는, 제가 아는 것은 여기까지라는 한계를 드러내는 고백에 가까웠어요. 아마 우리가 무언가 잘못됐다고 말한 것은 그것의 가능성을 놓친 오류에서 기인한 것일지도 모르죠. 근데 우리가 두려워 해야 하는 것은 틀리는 것보다, 틀리는 게 두려워 말하지 못하는 상황이겠죠. 그러니 마지막까지 못난 모습으로 남겠어요. 저는 여전히 예술은 당파적이어야 한다고 믿어요. 그리고 예술이 정치가 되어야 한다고 의지합니다. 임화의 묘비명으로 끝내죠. “오호 적이여, 너는 나의 용기이다.”

댓글

  1. Muchas gracias. ?Como puedo iniciar sesion?

    mzdhwheir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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