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미니즘이란 개념이 등장하기 이전의 시대를 살았던 엘시 맥루한(1889-1961)은 일로쿠셔니스트이자 웅변술가였다. 그녀는 여성들에게 주어진 전통적 역할인 양육과 가사노동을 거부하고, 가정부를 고용한 뒤 공연 투어를 떠났다. 남겨진 아들과는 편지를 통해 지적 교류를 이어갔다. 그 아들은 “미디어는 메시지다” 의 태제로 잘 알려진 미디어 이론가 마셜 맥루한이다. 어머니 엘시의 공연술과 체현적 지식은 마셜로 하여금 미디어(몸,목소리)와 메시지(의미)를 분리해 사고하는 방식을 익히도록 했다. 그들의 관계성은 미디어와 구술/청각 문화의 교차점, 미디어의 재생산 혹은 변형이라는 지점을 사유하게 한다. 과도하게 발전한 기술과 그것의 촘촘한 미디어 연결망에서 ‘바깥’이라는 희망이 있을까 싶은 시대에, 우리는 과연 미디어를 페미니스트적 방식으로 ‘다시’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 여전히 ‘전시’라는 근대 식민적 형식을 통해 이런 사유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렇다면, 어디까지 가능할까?
엘시&마셜: 피드백 #7은 네덜란드 덴하그에 위치한 웨스트에서 열린 첫 번째 에디션을 시작으로, 캐나다와 미국 독일의 도시들을 거치며 재귀적으로 발전해 온 전시다. 그중 가장 야심 찬 에디션인, 대안공간 루프에서 열린 엘시&마셜: 피드백 #7은 마셜 맥루한의 미디어 이론에 집중했던 이전 에디션들과는 달리, 그의 어머니 엘시의 실천을 페미니즘적 시선으로 해석하고, 그들 모자의 관계성을 통해 미디어와 구술/청각 문화의 변화를 탐구한다.
그러나 이 전시는 단순히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것이 아니라, 전시의 방법론 자체가 어떻게 페미니스트적일 수 있는지를 실험한 과정이었다. 오프닝 심포지엄에서 진행된 사라 샤르마의 강연에서는 페미니스트 기술 결정론이 단지 여성만을 위한 것이거나, 오직 여성에 의한 정체성 정치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번 전시는 페미니즘에 관한 것(about)을 넘어, 전시라는 형식 자체가 존재론적이며 실천적으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지를 실험한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맥루한의 유명한 테제인 “미디어는 메시지다”의 페미니즘적 ‘역’ 실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의 퍼블릭 모먼트는 전시 시작 6개월 전, 지금의 엘시를 찾기 위한 드럼업 미팅을 필두로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양지윤, 바루흐 고틀립 두 큐레이터는 자신들의 의도와 기획을 공유하며 이에 대한 상호적 반응으로 작가들의 프로포절을 받았다. 이후 선정된 작가들과 함께 신작을 커미션 하여 제작 과정을 공유하는 비전형적인 방식을 택했다. 이 신작들과 함께, 기획 의도와 맞는 작가들의 기존 작업들이 초대되었으며, 한국어로 번역된 맥루한의 아카이브 자료와 함께 전시 공간을 채웠다.
이 모든 과정과 자료는 대안공간 루프의 유튜브 채널과 소셜 미디어를 통해 면밀히 기록되어 ‘지구촌’으로 송출되었다. 이 전시의 핵심은 전시장에 설치된 작업뿐만 아니라, 전시장이 하나의 송출장으로서 일시적으로 활성화되는 순간들에 있었다. 전시 기간 동안, 토크, 퍼포먼스, 렉처, 워크숍 등 총 8회의 라이브 이벤트가 진행되었으며, 다수의 논문과 아카이브가 사전에 번역되었다. 전시장의 라이브 이벤트에서는 끊임없는 순차 번역의 장이 만들어졌다. 이로써 전시 공간은 모든 프로덕션이 완료된 뒤에 보여지는, 고정된 형식의 전형적 화이트 큐브가 아닌, 지속적으로 사람들이 오가며 피드백과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연장된 프로덕션의 장소로 기능했다. 이번 전시의 큐레토리얼 방법론은 기존의 전시 방식—주로 확정성과 가시성(visibility)을 중시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고자 했다. 다만, 이러한 실험이 여전히 제도적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 또한 자각하며.

오프닝 심포지움
오프닝 심포지움에서는 김다우 배우의 오프닝 스피치 퍼포먼스, 콜비 리처드슨의 사운드 퍼포먼스, 줄리아 E. 디크의 최면 퍼포먼스, 그리고 사라 샤르마의 키노트 발제와 이를 확장한 패널 디스커션이 진행되었다. 그중에서도 사라 샤르마의 키노트 발제는 이번 전시에 미디어 이론과 페미니스트적 사고를 연결하는 프레임을 제공했다.
그녀는 키노트 발표에서 기술이 젠더 문제를 가진 것은 잘 알려졌지만, 우리가 젠더의 기술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질문하며 테크노 페미니스트 비평을 소개하였다. 그녀는 아마존, 테슬라 등, 우리가 때로는 좋아하기까지 하는, 빅 테크의 가부장들이 맥루한의 “미디어가 메시지다”라는 격언을 가부장제 자본주의와 백인 인종 국가주의를 유지하는 기술적 전략으로 차용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효율성과 생산성 같은 기술 논리가 그들의 지배 도구로 설계됨을 강조했다.
사라는 페미니스트 기술 결정론을 통해 특정 기술 환경 속 권력 구조와 감수성을 살펴야 함을 강조하며, 이 논의가 국가, 인종, 젠더의 정체성 정치를 초월해야하는 문제라고 설명했다. 그녀는 이 기술의 논리에 내재된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문제를 들어내는 페미니스트적 사고 방식으로 ‘고장난 기계(Broken Machine)’ 라는 개념을 소개하는데, 이는 테크 월드 뿐 아니라 일상 속 문제로 확장되며, 가부장적 논리에 호환되지 않는 시간성, 공간성, 리듬, 이동성 등을 탐구하는 것임을 이야기했다.

때때로 ‘고장난 기계 (Broken Machine)’
사라의 키노트 발제 이후에 이어진 패널 디스커션에서는 이 ‘고장난 기계 (Broken Machine)’라는 용어가 존재론적 개념인지 실천적 개념인지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또한, 한국 사회의 기술과 젠더 문제 사례와 더불어 고장난 기계의 개념이 수사학적으로 머물지 않고 실현될 (비)가능성에 대해 다뤄졌다. 열띤 토론은 페미니스트 기술이 가부장적 테크 욕망과 어떻게 다른지, 고장난 기계가 되는 것이 미디어 기술이 촘촘히 모든 것을 연결하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자살 행위가 아닌지, 고장난 기계가 되어야 하는 목적은 무엇인지를 물으며, 재생산과 변형의 가능성과 한계를 탐구하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필자는 사라가 고장난 기계의 개념을 소개하며 완전히 고장난 전구가 아닌 꺼지기 직전의 깜빡이는 전구를 언급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우리는 이미 때때로 고장난 기계이고, 때때로 잘 작동하는 기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둘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인식론의 이분법은 가부장적일까? 그녀가 페미니스트 기술 결정론을 위해 강조한 시간성, 공간성, 리듬, 이동성 그리고 여기에 ‘일시성’ 혹은 ‘유동성’ 또한 함께 제시될 수 있을까? 그것은 일관된 정체성에 반하는 것이며, 확정성에 반하는, 모두 각기 다른 ‘현재들’을 인정하는 것이다. 때로는 불이 들어오고, 때로는 나가버리는 그래서 깜빡. 깜빡. 되려 여기에 있다고. 아니, 없다고. 그 동시를 인정하는 것이 아닐지.
그러나 바로 그 확정성을 요구하는 것은 기술 미디어뿐만 아니라 또 다른 미디어인 언어에도, 그리고 그것을 작동하는 우리의 기계론적 사고관에도 내재한다. 원인과 결과의 논리를 따르고, 질문과 정답을 요구하는 이 ‘언어’라는 선형적 문법을 가진 매체는, 로고스가 체현되어 우리의 존재에 입혀질 때 글이 몸을 통해 말이 될 때. 그것은 재생산인지, 체현인지 혹은 변형인지에 대한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전시장에서는 이 매체로서의 몸과 언어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예술적 실천들을 만날 수 있었다.


김다우 – 훈련된 몸, 가능한 몸
김다우의 <사변체>는 이번 전시를 위해 커미션된 작업이다. 그러나 <사변체>라는 제목은 단일한 작품이나 퍼포먼스를 지칭하지 않는다. 대신, 김다우가 전시 공간 안에서 수행하는 모든 활동에 메타적 이름을 부여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몸이 공간 안에서 시간을 재생하고, 이를 통해 작업이 활성화된다. 대개 관행적으로 퍼포먼스를 촬영한 비디오를 재생해 놓는 것과는 달리, 그가 없으면 그의 작업도 없다. 따라서 <사변체>는 그의 신체적 몸짓과 긴밀히 연결된 작업이다.
사변체는 배우가 놓이는 극장, 스크린, 혹은 텔레비전과 같은 사각형의 공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전시 기간 동안 김다우는 이너하우스 퍼포머로서 수차례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그는 민예은 작가의 블랙박스를 상징하는 조각들을 화이트 큐브 안에 설치한 <블랙&화이트>를 하나의 유동적인 무대로 활용했다.
그는 진행된 퍼포먼스 대부분에서 글자를 몸으로 재생시키는 연기/낭독의 형식을 취했다. 그중에서도 연극 퍼포먼스 <아다다>는, 1930년 전후 평안도 선천 지방의 언어장애 여성이 겪는 가부장제와 혐오 사회의 폭력과 자본에 관한, 계용묵의 소설 <백치 아다다>를 바탕으로 한다. 김다우는 <아다다>를 관객과의 대화로 시작하며, 자신이 지금 선보일 무언가는 자신이 혼자 준비한 것을 내보이는 자리가 아니라, 공간의 음향과 설치물, 그리고 참여한/부재한 관객들과의 소통을 도모하는 방편이라고 소개한다.
또한 그는 자신이 적극적으로 소통을 도모하는 또 다른 존재는 바로 종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종이는 종이에 쓰여진 글자를 의미하며, 배우에게는 스크립트가 된다. 그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관객 참여를 유도한다. 그때 관객은 ‘관객(참여자)’이라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보통은 관객을 등진 채로 무대를 향해 놓이는 프롬프터를 상기시키는 스크린은, 그의 퍼포먼스에서 되려 관객을 향해 뒤집혀 지문과 해설의 역할을 한다. 특히, 아다다가 말을 못 하기에 말로 뱉어질 수 없는 말들, 즉 배우가 말을 통해 실현할 수 없는 장면들에서 스크린은 자막을 통해 3인칭 화자의 역할을 대신하기도 했다.
먼저, 김다우의 퍼포먼스에서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의 훈련된 목소리와 그것을 발현하는 몸이다. 그가 자신의 프로포절 프레젠테이션에서도 언급했듯이, 배우는 말을 잘 옮기기 위해 연습하고 훈련한다. 그의, 아마도 반복적으로 훈련되었을 숙련된 ‘블랙박스적’ 몸은 화이트 큐브 세팅 안에서 어딘지 생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는 종이를 들고, 글자를 들고, 그것을 활성화시키지만, 거의 글자가 없어도 될 정도로 이미 그의 몸에 잘 체현되어 있다. 물론 우리는 체현과 낭독 사이에 확실한 선을 그을 수 없다. 그 선명하지 않은 지점들을 상상해보는 것이 그의 연극 퍼포먼스를 감상하는 흥미로운 지점이 되기도 했다.
필자는 김다우의 모든 퍼포먼스를 직접 관람하지는 못했다. 이 글은 그의 퍼포먼스와 사전 프로포절 발표를 기록한 소셜 미디어와 퍼포먼스 기록 영상을 토대로 감상한 바에 대한 소회다. 그의 말이 기술적 상태에 따라 얼마나 잘 전달되었는지, 혹은 비교적 제한적으로 전달되었는지 질문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미디어를 통한 퍼포먼스 경험은 그가 소통을 도모하려 했던 참여자의 경험인가, 아니면 부재자의 경험인가?

히토 슈타이얼 – 이론이 연극이 되려면
다시 미디엄으로서의 몸에 주목하게 된 것은 히토 슈타이얼의 렉처 퍼포먼스를 통해서였다. 히토 슈타이얼은 작가이자 비평가로 활동하며, 미디어와 예술의 교차점을 탐구하는 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설치 영상 작업 외에도 그녀의 대표적인 작업 형식인 ‘렉처 퍼포먼스’는 아카데믹한 접근과 예술적 접근을 결합하는 실천 방식이다. 이는 이론(theory)과 연극(theater) — 보는 것과 보여짐이라는 시간의 교차—을 그녀의 몸을 매개로 하여 관객에게 선보이는 흥미로운 방식이다.[1] 그녀는 이 형식을 통해 기술과 권력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탐구한다. ‘세계 미술’을 무대로 활동하는 그녀의 강연 방식은 마치 캐나다와 미국 전역을 돌며 1인극 공연을 펼쳤던 엘시를 연상시킨다.
이번 전시에서 히토는 가고시제와 밀로시 트라킬로비치와 함께 집필한 새로운 에세이를 바탕으로 한 렉쳐 퍼포먼스 <불을 지른 건 우리가 아니다(We Didn’t Start the Fire)>를 선보였다. 그 티켓이 몇 초 안에 매진될 만큼, 그녀에게 ‘입혀진’ 맥루한 못지않은 인기를 실감하게 했다. 그녀의 렉처 퍼포먼스는 전시 오프닝으로 부터 2주 뒤인, 12월 14일에 진행되었다. 전시가 오픈하고, 그녀의 몸이 전시장에 도착하기 전까지의 2주 동안의 간극에는, 2023년 아르스 일렉트로니카에서 진행했던 데이터와 데이터 채굴주의에 관한 작업, <누가 세상을 소유하는가>가 기록된 영상의 형태로 전시장에 설치되어 관람객들에게 공개되었다. 이 작업은 원래 그녀의 라이브 퍼포먼스 이후 대체될 계획이었다.
그러나 라이브 렉처 퍼포먼스가 진행된 날, 히토 슈타이얼은 건강상의 문제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그녀의 몸이 ‘완벽히 기능’하지 못했던 상황은 단순히 강연의 내용뿐 아니라, 강연이 퍼포먼스로서 작동하기 위해 요구되는 몸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그녀의 컨디션 난조와 전시 공간의 음향 기술적 문제는 메시지의 전달을 위해 요구되는 미디어인 몸과 몸의 확장으로서의 기술의 상호작용을 그 자리에서 드러냈다.
14일에 진행된 그녀의 라이브 렉처 퍼포먼스는 현장에서 촬영되어, 그것을 대신 기다려 온 <누가 세상을 소유하는가>를 대체해야 했지만, 예정대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사전 제작 방식을 택하지 않고, 에러와 불확실성을 감수하는 방식이 즉흥성과 자발성을 강조한 기획 방식에 더 자연스러운 실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 않기 위해서 해야 하는 것
전시의 마지막 이벤트로 열린 큐레이터 토크에서 바루흐는 진정한 페미니스트는 아마도 전시장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전시라는 비즈니스도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시스템의 예외가 아님을 반증한다. 기관의 전시가 무대에 오르는 순간, 이미 국가 펀딩을 중심으로 하는 제도와 행정에 어느 정도 타협이 이루어진 결과임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급진적 전시에서 ‘전시’는 아이러니하게도 하나의 수단이자 장애물로 작용한다. 그러나 전시장이라는 공간에서 발생하는 각기 다른 시간들과 대화들 마저 전시의 식민 근대적 유산과 가부장적 시스템에 완전히 포섭될 수는 없을 것이다.
전형성을 따르지 않기 위해서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 많은 노동이 요구되기도 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끊임없는 자료의 번역과 대안공간 루프의 미디어 채널을 통해 이례적으로 많은 정보가 송출되었다. 이 지점은 오프닝 심포지엄에서 사라의 강연 막바지에 나온 발언과 함께 어떤 질문들을 불러일으켰다. 발언은 다음과 같다. —“We have to once elevate the negated processes and techniques that have historically subjugated the category of women as inferior. We have to do this without expanding the category of what counts as the domain of women.” 즉, “우리는 역사적으로 여성을 열등하게 만들어 온 억압적 과정과 기술들을 새로운 차원에서 재평가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여성의 역할이라고 여겨지는 범주를 확장하지 않은 채 말입니다.”
이 발언은 그 추상적 표현으로 인해 현장에서 여러 차례 재번역되고 조율되었는데, 그 작은 번역 해프닝은 흥미로운 질문을 남겼다. 가부장적 자본주의 시스템에 호환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이 추가적 노동은 과연 사라가 말한 ‘역할 늘리기’와 어떻게 다를까? 번역의 노동을 감당해야 하는 주체는 누구이며, 번역은 항상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지는가? 하지 않기 위해서 더 많은 것을 해야 하는 역설에 대해 질문하게 했다.

같은 시간에 존재하기, 동기화? 공존?
두 큐레이터는 예술 기관이나 예술가들이 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사람들이 모여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러한 관점은 필자로 하여금 현대 미디어 환경에서 전시 공간의 역할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게 했다.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예술 작품이 언제 어디서든 쉽게 송출되고 접할 수 있는 시대에, 왜 관객은 여전히 물리적 전시 공간에 직접 방문해야 하는 것일까?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가능성은 ‘동시에 존재하는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전시 공간은 단순히 작품을 감상하는 장소를 넘어, 관객들이 물리적으로 같은 공간에 머물며 서로의 공감각적 존재를 느끼는 장소가 된다. 이는 단순히 화면을 통해 전달되는 디지털 경험과는 다른 차원의 경험을 제공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우리가 ‘함께-여기(에만)’ 있다는 타인의 존재를 느끼는 감각이다. 타인은 나의 알고리즘에서 벗어난, 내가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존재다. 이러한 타인의 절대적 타자성은 우리의 일상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우연성과 맞닿아 있다.
물리적 전시 공간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우연성과의 만남 때문일지도 모른다. 전시 공간은 각기 다른 배경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거나 교차하는 장소를 제공한다 –물론 특정한 전시 공간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타겟 관람객이 있고, 어떤 전시공간에서는 다시 스크린들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교차는 디지털 환경의 정제된 알고리즘 속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는 동기화의 일률성이 엇나가는 각자의 리듬과 차이가 존재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전시 공간에서의 경험은 단순히 작품을 감상하는 시간을 넘어, 우리가 공유하는 공간과 시간, 그리고 그 안에서의 타인과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공존의 경험이다.
마셜 맥루한은 “기술은 우리의 감각을 확장시키지만, 동시에 다른 감각을 마비시킨다”라고 말했다. 기술 미디어가 마비시킨 타자라는 감각. 전시가 다시 그 감각의 회복을 시도할 수 있을까?
[1] 두 단어에 공통되는 어근 ‘Thea (θέα)’는 그리스어로 ‘보다(seeing)’ 라는 의미를 갖는다. Theory(이론)는 개념적 사유를 통한 ‘보는 행위’를, Theater(연극)는 물리적 공간에서 ‘보여지는 행위’를 포함한다. 이 공통된 어근은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의 관계를 내포하며, 이론과 연극이 몸이라는 매개를 통해 연결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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