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밈은 미술에 도착할 수 있을까
1. 인터넷 밈의 나르시시즘적 주체성
치료가 필요할 정도의 심각한 밈 중독자가 되어서야 깨달은 사실이 있다. 인터넷 밈은 나 혼자서 스마트폰으로 보아야 제맛이라는 사실이다. 뜬금없고 당연한 말이라 생각하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맞다. 인터넷 밈을 모국어처럼 배운 세대라면 대부분 느끼는 사실이다. 아무리 웃긴 인터넷 밈이라도 내 스마트폰 디스플레이에 튼 다음에 상대방에게 보여주는 순간 재미가 반감된다. 차라리 인터넷 밈을 DM이나 카톡으로 공유할 때가 더욱 재밌다. 왜일까. 인터넷 밈이 나르시시즘에 기반한 1인칭을 기본값으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인터넷 밈과 미술이라는 문제의 시작이 되어야 할 듯하다. 인터넷 밈을 쓰는 미술은 왜 재미가 없을까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시작하려면 인터넷 밈의 주체성을 먼저 이야기해야 할 듯하다.
인터넷 밈의 탄생 배경을 살펴보자. 인터넷 밈은 와이-파이Wi-fi 등 무선 인터넷이 대중화되기 이전의 인터넷 문화의 산물이다. 그때 인터넷에 접속하려면 랜선이 있어야 했고 랜선을 연결할 수 있는 공간에다 컴퓨터나 노트북을 놔두어야만 했다. 시각을 모니터의 작은 프레임에 가두고 몰입해야 했던 것은 덤이다. (영화와 달리 디스플레이에는 내-화면과 무한히 확장되는 외-화면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인터넷에 접속하려면 장소를 제약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노트북 등 휴대할 수 있는 컴퓨터가 있어도 결국 랜선의 영향권 아래 있어야 했다. 인터넷에 접속해야 접근이 가능한 인터넷 문화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을 차단하고, 한 곳에 자신을 속박하는 일종의 유폐 행위인 셈이었다. 이는 저절로 온라인과 오프라인 사이의 이분법을 그려낸다. 이에 따라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에서 주체의 교란이 생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이라는 두 공간은 이어져 있으면서도 단절된 이중성을 지닌다. 이는 인터넷 인터페이스의 기원에서 비롯한다. 인터넷 인터페이스는 원래 비밀스러운 공간이었다. 미국 국방성에서 만든 군사통신망 알파넷ARPANET에서 시작되었고, 군 내부의 소통을 위해 쓰이다가 1968년에야 민간에 공개되었다. 1972년에 이르러서야 TCP/IP 프로토콜의 발명으로 민간인도 인터넷이라는 시스템을 공유한다. 이때 컴퓨터가 공적인 장치가 아니라 PC, 즉 개개인이 주인인 컴퓨터로 유행하기 시작한 것도 이 비밀스러움과 공공성이 존재하게끔 하는 모순적인 개성을 지니게 했다. 인터넷 인터페이스는 1인칭이자 닫힌 공간이면서도 그 안은 무한히 열린 공간이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이는 공개된 공공장소에서 무한히 열려 있는 캔버스와 다르다. 오히려 에디슨의 키네마토그라프에 가까운 매개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안은 이어져 있는데도 그 바깥은 차단된 이중성은 인터넷에 접속하는 주체가 외부와 차단되어 있되, 이어져 있다는 착시를 만든다. (인터넷에 달린 댓글이 여론은 그저 일차원적인 감정 표출일 뿐이지만 이것이 모이는 순간에 함께 있다는 착시를 불러일으키며 현실이 되듯이 말이다. 냉소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다섯 명 이상의 단톡방에서 그 일원과 공동체로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까. 아니다. 인원이 많은 단톡방은 그저 집단적 아무말대잔치에 불과하다.)
다만 인터페이스는 영사기도 카메라도 없으므로, 스크린처럼 시선의 동일시가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충분히 있다. 장 보드리는 영화가 영화관의 스크린에 영사되기까지의 과정과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대중의 뇌리에 각인되기까지의 과정을 유비 관계로 설명했다. 그는 영화를 보고 있을 때 우리가 우리를 둘러싼 이데올로기의 내부에 위치해 있게 되고, 주체성을 상실한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카메라는 관객이 주체적으로 대상을 보기도 전에 프레임을 노출함으로 시선의 주체성을 박탈한다는 점에서, 영사기는 영화가 상영되기까지 과정에서 관객의 주체성을 박탈한다는 점에서 관객이 스스로 주체라 생각하는 상황에 모순을 만든다. 카메라나 영사기를 통해 관객의 주체와 시선이 이데올로기에 동일시된다는 이야기다. 모니터에의 접속은 카메라나 영사기 등 장치가 부재해 있으므로, 무엇에 동일시할 수가 없는 듯하다.
대신 인터넷 인터페이스는 프레임 속 대상을 상징적 대상으로 만든다. 이는 작가의 고유한 인장이 대상에 흔적으로나마 남아 있는 캔버스와 스크린과는 다르다. 두 매체에서 대상은 일종의 지표로 남는다. 인터넷 인터페이스에서 대상을 상징으로 그리는 장치는 마우스와 키보드라는 입력 장치다. 마우스의 발명자 엥겔바트는 과학자 바네바 부시가 쓴 에세이인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속 메멕스(Memex)라는 장치에서 받은 영감으로 마우스를 구상했다. 이 단어는 기억 확장 장치(Memory Extender)의 약자로 마이크로필름 형태의 정보를 저장하고 얼마든 불러다 쓸 수 있는 장치다.[1] 작은 나무 상자에 바퀴 2개를 단 것에 불과했던 초기의 마우스는 모니터에 있는 공간의 한 좌표를 지시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마우스는 발전을 거듭하며 스크롤을 내리거나 파일을 옮기는 등 인터넷 인터페이스의 공간성을 무한히 확장했다. 다만 여기까지만 해도 마우스라는 입력 장치는 인터넷 공간에 기입된 기호를 적극적으로 훼손하지 않는 데에 그쳤다.
마우스는 행위와 시선의 주체가 동시에 작동하는 이중의 주체성을 만든다. 마우스는 발전을 거듭해 사용자가 입력하는 신호 체계에 따라서 디스플레이에 있는 기호를 자의적으로 조작하는 힘을 지닌다. 0과 1로 구성된 전자 신호의 배열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단어나 이미지 등을 상징으로 변환하게 된 것이다. 이때 기호가 자의성을 지니게 되며 디지털 속 정보는 고정된 기의를 상실한다. 말하자면 “이미 현실이 된 정보가 아니라 언젠가 현실이 될지 모르는 정보의 다발, 그리고 팩트와 픽션, 진실과 거짓말 가운데 어느 편으로도 결정되지 않는 순수한 잠재성의 차원”[2]이 열리는 셈이다. 더 급진적으로 말하면 인터넷 너머에는 인간마저 정보로 환원되고 그 정보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잠재성의 영역에 속한다. 나락? 인간이 인터넷에서 언제든 해체되고 파괴당할 수 있는 취약성을 처음부터 지니고 있다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는 인터페이스의 핵심이다. 인터페이스는 두 얼굴이 마주 보고 대화하는 상호작용을 전제로 한다. 인터넷이 행위자가 입력하는 신호를 시각적 기호로 번역하기에 인터넷은 행위자의 주체성이 작동하는 공간으로 거듭난다. 냉소적으로 이야기하면 결국 0과 1의 신호 체계를 보는데도, 내가 거기에 무언가가 있다고 착각하는 상황에 있는 셈이다. 이때 인터페이스에 속박된 행위자 시선은 인터넷 환경을 그리는 모니터 전체를 향하지 않는다. 되려 마우스 커서가 있는 매우 한정된 공간에 집중된다. 인터넷으로 타인과 소통하는 상황마저도 결국 내가 입력하는 신호를 내가 욕망하는 이미지로 변환하는 인터페이스와의 대화 상황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인터페이스는 나르시시즘, 즉 1인칭의 시점에 기반해 있다. 인터넷으로 타자와 소통하는 상황에도 우리는 타자가 아니라 말을 입력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고 있어는 존재다. 그래서 우리가 인터넷에서 자신이 주체라 생각하면서 대상을 보고, 조작한다고 생각해도 사실은 마우스만 보고 있을 뿐일 수 있다. 이는 삼중의 프레임이다. 컴퓨터에 접속하고 있는 동안에 생기는 세계와의 거리로 만든 1차 프레임, 모니터라는 2차 프레임, 모니터에서도 마우스라는 상징을 중심으로 보는 3차 프레임이 동시에 생겨나는 셈이다. 인터넷 밈을 쓸 때도 이 주체가 개입한다. 대상을 변형하고 조작하는 행위까지는 모두가 당연시하고 이해할 만한 맥락이다. 다만 이는 컴퓨터가 고정되어 있을 때의 이야기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보다 한 차례 다음에 등장한 주체다. 이제는 매체의 흐름이 달라졌다. 스마트폰의 탄생은 24시간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다. 스마트폰 탄생의 지름길이 된 일련의 기술적인 변화들-무선 인터넷의 보편화, 인터넷 속도의 가속화, 모든 것이 실시간으로 연결되어 타인과 항시 이어져 있다는 착시를 만드는 과잉-연결- 등은 이 나르시시즘에 기반한 1인칭 주체를 강화했다. 거기다 스마트폰의 디스플레이는 데스크톱 모니터보다 훨씬 더 작다. 작은 디스플레이에 시선을 집중하는 환경은 전보다 더 강렬한 관음증과 몰입을 유발한다. 관음증은 작은 구멍에 그 나머지보다 강한 진실이 있다는 음모론적 감각을 공유한다. 우리는 그 안의 진실을 더욱 가까이 보려고 신체적 변형까지 감수한다. 거북목에 시달리고, 두 어깨가 안쪽으로 말려 들어가는 진화 과정을 거치고 있다. 인터넷과 인간 신체의 거리가 가까워진 것이다.
이런 진화에 박차를 가한 것은 촉각이다. 이전까지 인간이 인터페이스에 마우스라는 간접적 장치를 거쳐야만 했다. 마우스 장치는 인간의 촉각을 시각적인 장치로 전환하고, 그것을 인터페이스에 대신 기입한다. 이때만 하더라도 인터넷과 나 사이의 거리가 분리된다는 감각이 생겼다. 스마트폰은 직접 손가락을 댄다. 촉각이 곧 기계 장치와 이어져 있으며 그것을 통해서 접속한다는 강렬한 감각을 자극한다. 인터넷의 가속화는 이 접속의 감각에 더 설득력을 더한다. 만지자마자 링크가 다른 링크로 넘어가는 속도는 행위와 시각이 포개지는 주체성을 강화한다. 1인칭의 힘이 디스플레이에서 더욱 강렬해진 것이다. 몰입과 접속이 동의어가 되어버린 셈이다. 디스플레이와 신체 사이의 과잉된 연결은 타자의 개입을 차단한다. 따라서 디스플레이는 타인과 공유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서 인터넷 밈을 미술관에 거는 것도 불가능한 것이라는 편견을 만들 수 있다. 이러한 편견은 인터넷 밈과 미술의 관계를 회복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이는 인터넷 밈의 주체인 프로필을 구성한다. 이전에는 마우스를 통한 터치 행위가 인터넷에 있는 세계를 조작한다면 이제 터치는 나를 더욱 적극적으로 조작한다. 인터넷 밈은 이모티콘과 이모지, 인터넷 채팅에서 불가능한 비언어, 즉 얼굴의 존재감을 보완하기 위한 언어로 등장했다.[3] 인터넷 밈의 주체는 “형이 왜 거기에서 나와?”라고 할 때, 이 형이 다른 주체로 얼마든 다르게 대체될 수 있다는 데에서 나온다. 상황이 먼저 정해져 있고, 거기에 따라서 언어의 주체가 결정되는 것이다. 인터넷 밈은 진정한 나보다는 상황에 곧바로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실시간으로 구성되는 나를 그려낸다. 그것이 SNS와 카카오톡 등 일상적 의사소통의 공간에서 공유되는 것도 이같은 개성 때문일 것이다. 프로필 주체는 임시적이며 가변적이다. 타인은 실시간으로 달라지는 ‘나’의 주체성에 이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대신 프로필을 공유하는 것까지는 가능하다.
프로필은 관찰의 대상이 되는, 피드백의 대상이 되는 나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이는 진정한 나를 드러내려고 하는 진정성의 주체와 다르다. 우리 시대의 네티즌이 지닐 수 있는 진정성은 홍상수 영화 속의 인간 혹은 쿤데라 소설 속 인간처럼 자신의 짐승성과 하찮음을 거듭 긍정하면서 타인을 본인과 똑같은 인간으로 끌어내리려고 냉소하는 개미귀신에 불과하다. 더 정확히 말해 이마저 진정성이라는 프로필일 것이다. 프로필의 사회에서 ‘나’는 인터넷에 있는 나 자신을 조작한다. 인터넷에 있는 대상을 조작한 끝에 그 자신마저 조작하게된 셈이다. 이 역전은 인터넷 농담대로 지금은 오히려 현실에서 나를 알아보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온라인에서 나를 알아보는 것이 두려운 주체의 역전을 불러온다. (아즈마 히로키는 부계라 일컬어지는 온라인 정체성이 신호 체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을 섬뜩함이라 이야기한다.) 이 역전에 처한 주체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본캐의 흔적을 부캐에서 제거하거나 다나카와 김장훈의 사례처럼 부캐를 본캐로 인정하는 것이다. 버튜버와 유튜버의 차이랄까. 이러하기에 인터넷 밈은 결국 작가의 캐릭터와 이어져 있는 문제다. 인터넷 밈이 미술관에 전시하려면 온라인에서 파생되어 오프라인에 연장되는 작가만의 캐릭터가 있어야 한다. 미술관에서의 반응마저 어떤 퍼포밍으로 보일 수 있는 여지가 있어야 한다. 이 퍼포밍이 실시간으로 진행되며 결국 다음 작품도 작가의 프로필이 되어야만 한다. 행위 예술과 플레이어 사이에 있는 밈-플레이어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고도로 발달한 밈 예술가는 관종과 구분되지 않는다.
2. 인터넷 밈과 마법의 원
인터넷 밈은 정의하기가 어렵다. 인터넷 밈을 이미지나 단어라 불러야 하는지, 장르적인 요소를 포함한 세계관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놀이라고 불러야 할까. 인터넷 밈을 둘러싼 반응마저도 인터넷 밈이 되어가는 상황을 보고 있으면 세상 모든 것이 인터넷 밈 같다. 단행본인 『한국 인터넷 밈의 계보학』에 적은 대로면 인터넷 밈은 “(인터넷에서 가능한 한 많이 공유된) 합성 소스를 기반으로 하는 불특정 다수의 대중이 참여하는 대안적인 놀이”이자 “일상적 창작 행위”다. 이마저 임의적인 정의다. “대안적인 놀이”라는 단어는 사실상 책임회피에 가까운 것이라고 인정하고 싶다. 프로필을 만들며 노는 놀이라고 말하면 오히려 나았을까. 인터넷 밈은 모두가 노는 듯하지만 결국은 나 자신만 노는 고독한 행위일 수도 있다. 인터넷 밈은 지금껏 정의된 적이 없는 현상이며, 하나의 경향을 지닌다고 정의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현상이다. 인터넷 밈의 속성 가운데 하나인 예술과 세계관, (경쟁이라는 점에서) 게임 분야를 아울러야만 해서 쓴 말이다.
인터넷 인터페이스의 나르시시즘적 주체를 우연히 공적인 주체로 가져다 두는 것은 무언가에 참여한다는 감각이다. 이 감각을 만드는 것이 놀이다. 하위징아는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 개념을 설명하면서 마법의 원(하위징아)의 개념을 설명한다. 마법의 원은 외부와 유리된 규칙이 통하는 공간으로, 이 규칙은 경제적 논리를 이탈하여 명예에 기반한 보상을 누리게 하는 경쟁을 만든다. 물론 이 순진한 발상은 관심경제의 시대에는 불가능하다. 명예로운 보상은 결국 관심의 총량을 늘린다는 것이며 그것이 곧 수익으로 이어져서다. 결국 저작권이라는 규제 아래서야 인터넷 밈은 어떤 마법의 원을 임시적으로 그리는 셈이다.
마법의 원 개념은 아이러니하게도 외부와의 폐쇄성을 전제로 한다. 인터넷 밈에 접속하는 것이 나르시시즘적 1인칭이라는 데에 더 설득력이 생기는 이유다. 인터넷 밈을 쓰는 각각의 개인은 밈의 시각적 쾌감에 탐닉하면서 살아갈 뿐이다. 밈에 자신의 자아를 동일시하는 사고가 유행하는 인터넷은 비트덩어리이자 모두 각자의 말만 써재끼는 아무말대잔치에 불과할 것이다. 인간은 아무와도 소통하지 못하는 나르시스트에 불과하다는 냉소는 너무도 간편하다. 또한 인터넷 밈에 남는 것이 운동성뿐이라고 이야기하는 허무주의도 쉬이 선택할 수 있는 생각이다. 또 인터넷 밈이 타인의 기성품을 아무런 생각 없이 쓰며 타인에게 폭력을 끼치는 반-인간주의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감정에 가깝다. 인터넷 밈의 유희가 이제 딥페이크와 같은 범죄로 전락하는 와중에 인터넷 밈은 반성적인 사유가 종말하고 말리라는 냉소적인 종말론의 알리바이가 되어가는 중이다. 희망은 정확히 아이언맨이 되살아날 확률인 14,000,600분의 1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도 미친 척하며 인터넷 밈의 일상성을 옹호하고 싶다. 더 정확히 말해 인터넷 밈이 만든 디스토피아적 현실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일상에서 인터넷 밈을 쓰는 재미까지 동시에 폄훼하는 것은 무리한 처사라 생각한다. 인터넷 밈 개념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일상적 의사소통에서 생기는 임시적 마법의 원의 역할이다. 인터넷 밈의 규칙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인터넷 밈은 보통 목표, 규칙, 피드백 시스템, 자발적인 참여 등 게임의 본질적 조건이 있되 제품으로 생산되는 게임이 아니라 할 수 있다. 게임은 보통 타인에 의해 규칙이 공유되어 있다. 인터넷 밈은 모든 상황을 동일한 프로필로써 공유하는 게임으로 만드는 점에서 흥미롭다. 즉, 인터넷 밈은 프로필을 통해서 타인의 상황에 임시로나마 있을 수 있는 순간을 마련하는 셈이다. 여기서부터 이상한 연대감이 생긴다. 또한 외부의 규칙, 즉 기출 변형에 열려 있기에 새로운 합성 소스와 규칙이 생겨도 얼마든지 다시 다르게 쓰일 수 있어서다. 인터넷 밈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를 오가는 상상력이 가능하기 위해서 그의 작업이 계속 피드백 상황에 있어야 한다. 작가 또한 반복되는 상황을 관객에게 각인하며 본인이 인터넷 밈의 되어서 본인의 프로필이 변화되는 과정을 기어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컨템포러리 아트 밈(이하 컨아밈) 계정의 밈이 전시된 사례를 살펴보자. 부산현대미술관에서의 전시 《능수능란한 관종》에서는 컨템포러리 아트 밈 계정에서 만들어지는 밈을 전시했으며 이 기획 자체는 신선했다. 밈을 전시회에 가는 것 자체만으로 인터넷 밈이 미술의 제도에 편입되어 있다는 가능성을 드러낸다. 컨아밈 계정은 자신의 서사를 통해서 기믹을 형성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그는 한국에서 예술을 하는 학생이 곤경이라는 보편적인 상황을 밈화한다. 그는 일상적 재료와 개인적 경험에 기반한다는 캐릭터성의 구축을 통해 본인이 이 모든 상황을 비평할 수 있다는 모두의 동의를 끌어낸다. 외부가 아니라 내부이자 경험자이기에 비판할 수 있다는 자격이 생겨서다. 이윽고 동어반복이라 보일 만큼, 예술하는 학생이 처한 곤경을 여러 차례나 되풀이하며 예술가가 가난하다는 상황을 고정한다. 이는 이를 드러내려 인터넷 밈의 기법 중 이미지-매크로 밈 기법을 빌린다. 이미지-매크로는 해외의 밈에서 주로 쓰이는 기법으로, 둘 이상의 이어지는 이미지를 둔 다음 이미지와 충돌하는 자막을 달아 임의의 상황을 설정한다. 또 [컨아밈의 상담소]라는 Q&A라는 피드백 시스템을 통해서 예술하는 학생에 대한 여러 편견 어린 이미지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자본과 고전적 예술가상에 대한 예술계 전반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을 가능하게 한다. 그 상황에다가 코멘트를 달 수 있거나 공유할 수 있다는 플랫폼, 즉 독자와 피드백 시스템이 그 상황의 생생함을 살려낸다. 구독자가 단 댓글은 개인의 자발적 참여를 불러온다. 그로 인해 계정주와 대화하는 듯하다는 착시가 밈을 완성한다. 목표와 규칙, 피드백과 자발적인 참여 등 게임의 조건을 만족하는 셈이다.
결국 컨아밈의 재미는 결국 보는 이가 참여하는 것을 공유하는 댓글, 혹은 그 댓글에 대한 반응에서 온다. 보는 동안에 작품 자체에 인스타그램 댓글란을 더함으로 본인의 작업에 대한 풍자적 희화를 더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생겼다. 댓글은 그 작품의 맥락을 보완하고, 설명하는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BJ체리장 등의 한국 미술계의 작품 경향을 어느 정도 아는 이에게 더욱 크게 와닿는 작품일수록 아쉬움이 생긴다.
3. 야레야레, 못 말리는 히토씨
인터넷 밈은 그 테크닉으로만 이야기할 때 전혀 신선하지 않다. 인터넷 밈을 그린다고 우스꽝스러운 패러디 기법을 쓰려는 작가가 있다면 직접 찾아가 말리고 싶다. 이미 인터넷 밈에 쓰일 패러디는 마르셀 뒤샹의 <그녀의 엉덩이는 뜨겁다L.H.O.O.Q>에서부터 완성되어서다. 마르셀 뒤샹의 이 회화는 <모나리자>에 콧수염을 더하는 장난은 인터넷 밈의 기본 중 기본인 합성 기법을 담는다. 무엇보다 그녀의 엉덩이는 뜨겁다라는 다른 이름을 더한 것도, 그것이 음차를 빌려와서는 우회적으로 성적인 코드를 암시한다는 점은 지금의 인터넷 밈에서 쓰이는 ㅅㅅ나 야스 등 섹스를 연상하게끔 만드는 저속한 성적 농담과 무엇이 다른가? <샘>은 레디메이드 오브제에 의도적으로 서명을 더함으로 원래 쓰이는 맥락을 탈맥락화한다는 점에서 인터넷 밈의 본질적인 성격과 닮아있다. 예술을 파괴하는 다다의 장난은 일회적일 때만 놀라울 뿐이지 그것이 두 번, 혹은 세 번 거듭 실행된 이후에는 파괴력이 떨어진다. 인터넷 밈은 이토록 오래된 기원을 지니고 있다.
팝 아트의 작업도 마찬가지다. 리히텐슈타인 등 팝아트 작가는 고급문화와 저급문화의 경계선을 허문다는 목적으로 대중문화를 가져다 쓴다. 리히텐슈타인이 만화책 일부를 잘라내거나 그 스타일만 빌려서 서명을 더한 다음에 무턱대고 순수 회화라고 지칭했을 때 모두가 놀란 것은 그 맥락 없음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말년의 만화를 그대로 잘라서 회화로 칭한다고 해도 어색할 건 없을 거다. 탈맥락화 등을 통해서 인터넷 밈이 탄생하기도 전에 인터넷 밈의 기법을 쓴 것이다. 실크크스린 기법은 또 어떤가. 원본을 다른 색으로 전환한 빨리 효율적으로 생산한다는 점에서 인터넷의 Ctrl+C, Ctrl+V를 보는 듯하다. 팝 아트와 다다, 초현실주의의 꼴라주 등 우리는 인터넷 밈을 만들 만한 시각적 상상력을 이미 구비하고 있던 셈이다.
여기에 자막을 제멋대로 가져다 쓰는 상황주의자의 전용은 이미지-매크로 밈 기법으로 발전한다. 상황주의 미학을 계승하는 바바라 크루거의 미술과 애국보수가 뿌리는 찌라시의 차이는 무엇인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펼치는 퍼포먼스의 수행적 미학은 관종과 릴스 영상와 다를 바 없다. 담론에 대한 존중 없이 거장이 작업을 멋대로 난도질한다고 불만이 있는 독자가 있을 것이므로 이제는 그만두겠다. 내 말의 핵심은 인터넷 밈을 미술관에 걸어도 미적으로 새로울 것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인터넷 밈은 온갖 곳에서 이미지를 합성하는 방법론을 훔친다. 그 대상은 영화나 미술 등 장르를 넘나든다. 인터넷 밈은 우리가 지금껏 익히 봐온 스타일의 총합인 셈이다. 인터넷 밈이나 인터넷 밈 스타일을 모방한 작업은 “어 느새 부터 안 멋지”다. 젊음을 과시하려는 치기 어린 도전이자 몸부림으로밖에 안 보일 것이다. 2019년 일민 미술관에서 열렸던 르르르의 《짤방전》은 인터넷 밈과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린다는 목적으로 여러 짤방을 그대로 그린 회화를 전시한 기획전이었다. 이 전시는 화제를 모았으나 짤방을 있는 그대로 모방한 회화는 기획 의도조차 알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르르르의 컨셉은 모호하기 그지없어서 왜 인터넷 밈이 전시가치가 있는지를 끝내 증명하지는 못했다. 인터넷 밈의 스타일만 힙하게 빌려오려는 작업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 자체가 이미 힙하게 빌려온 것이며 어떻게 해도 새롭지 않다. 결국 인터넷 밈의 스타일을 미술에 옮기겠다는 시도는 실패할 것이다. 맥락과 규칙, 그 사이에서 생기는 프로필과 상황 등이 전제되지 않는 인터넷 밈은 조악한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우리가 인터넷 밈을 다른 장르로 옮길 때 할 수 있는 것은 인터넷 밈을 쓰는 작가 혹은 작업자의 정체성, 즉 밈-플레이어를 빌려오는 것 정도다.
밈-플레이어가 왜 전시 가치가 있을까라는 문제도 생길 것이다. 감히 묻고 싶다. 홍상수 본인을 둘러싼 프로필을 밈화하고 캐릭터로 그려낸 홍상수 영화가 극장에 걸리듯, 인터넷 밈-플레이어도 미술관에 걸려도 되지 않을까. 밈-플레이어로의 작가는 퍼포먼스와 작품 창작 중간에 있는 흥미로운 존재다. 제도권 아래서, 혹은 대중의 환상 아래서 제작된 예술가라기보다 특정한 상황을 반복하면서 스스로를 예술가로 정박하려고 한다. 밈-플레이어는 본인의 작업을 담론에 기입하는 것이 아니라 작업을 생산하는 자신을 담론의 대상으로 기입하는 셈이다. 이는 지금 이 순간 하나의 행동이 실시되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퍼포먼스 아트와 다르다. 인터넷 밈은 반복되며 캐릭터를 더욱 견고하게 그려낸다. 이에 대한 하나의 반발은 인터넷 밈을 전시회에 걸려면 그것이 일정한 틀이 있는 물성으로 고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서 인터넷 밈과 숏폼 콘텐츠는 기승전결을 제거하고 순간적인 자극을 추구한다. 더 정확히 말해서 이러한 자극을 바라는 인간의 본능에 심리적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동시에 그 감각을 디지털 장치의 속도감으로 감각화한다. 신문 기사의 제목만 보던 습관은 디지털 시대에 이르러서 내용마저 제목의 감각으로 보려는 “세 줄 요약”의 욕망을 가속화하는 댓글로 전환되었다. 이제 피드백 시스템 안에 갇힌 텍스트는 자연스럽게 쉬운 문장을 떠나서 헐겁고 앙상한 육하원칙을 지키는 한에서만 서술된다. 아니 사실은 그마저 안 하는 경우가 다수다. 인터넷 밈은 이 왜부터 시작해 어떻게까지 육하원칙이 만드는 텍스트의 입체적 시공간을 파괴하면서 이를 가속화한다. 시공간이 부재해 있는 인터넷 밈을 시공간이 명확한 미술 작품이 그리는 작업이 불가능이라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이는 디지털 대상의 존재론과도 이어져 있는 질문이다.
물론 인터넷 밈은 전자 신호에 불과하며 그 자체가 유동적이다.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인터넷 환경에 있어야 하며 불특정 다수의 네티즌이 계속해 합성 소스를 가공해서 인터넷 밈의 맥락, 규칙에 참여하는 한 생명력이 생긴다. 인터넷 밈을 전시회에 걸어야만 하고 작품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면 결국 인터넷 밈이 움직이는 경향 중 한 곳에 멈출 수밖에 없다. 이는 여전히 인터넷 밈을 전자적 세계에 불과하다는 이분법적인 사고의 결과가 아닐까. 인터넷과 전시회는 더는 구분되지 않는다. 전시회가 도리어 인터넷에 올릴 인증샷의 수단이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터넷에서의 예술가와 오프라인의 예술가가 상호작용하는 동안에, 예술가는 둘 다에서 밈-플레이어로의 입지를 늘리고 있다. 오프라인에서의 작업이 온라인에서 그를 밈으로 만들고, 그는 이 밈을 다시 오프라인에 그려내면서 피드백 시스템이 생겨나는 것이다. 밈-플레이어는 수용자-창작자의 피드백 시스템의 무한한 충돌을 가장 잘 드러내는 사례로 보았을 때 전시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인터넷 밈을 둘러싼 사회적 담론을 시각화하는 작업도 대중에게 다가가기 어렵다. 대부분 아는 인터넷 밈을 책에다 쓰기보다는 인터넷 밈이라는 대상 전체를 상위 개념으로 그려내려 해서다. 독일의 작가 히토 슈타이얼의《히토 슈타이얼: 데이터의 바다》의 첫인상이 그러했다. 렉처 퍼포먼스 <미션완료: 밸런시지>는 발렌시아가와 그것을 밈화하면서 탄생한 밸런시지를 이야기한다. 히토 슈타이얼은 밈 이미지보다는 밈 이미지가 유통되는 경로를 이야기한다. 발렌시아가가 밈 마케팅을 하듯이 그 반대로 노동자의 연대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히토 슈타이얼은 빈곤한 이미지poor image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예술 혹은 정치와 정보 자본주의의 중심에서 밀려나 있는 이미지가 인터넷에 유통되는 매커니즘을 작품에 그려낸다. 스팸메일이나 노동자 등 이미지는 일상에서는 흔히 접할 수 있으나 SNS에서는 아니다. 인스타그램이 알고리즘을 통해 아름다운, 자본주의를 무한히 확장할 수 있는 이미지 등을 개인에게 매개해서다. 히토 슈타이얼은 이 빈곤한 이미지가 유통되는 경로 가운데에 침투하면 그것을 보는 이 사이의 연대를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인터넷 밈은 일상을 무기로 가공하는 격전장인 셈이다. 이는 벤야민식 좌파 메시아주의와도 이어져 있다. 히토 슈타이얼은 밈 이미지가 정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은폐된 인민을 드러내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도 본 것이다. 의도는 잘 알 듯하다. 인터넷에서 소련 밈을 볼 때의 반가움을 시각화한 것으로 보여서다. 인터넷 밈을 둘러싼 거대 담론을 담느라 급급해서 인터넷은 결국 생명체라기보다는 해부 대상으로 보인다. 인터넷 밈 각각에 통용되는 규칙과 재미, 유저 등은 그의 한없이 진지한 메타적인 논의 아래에서 사라진다. 그의 인터넷 밈이 공허한 이유다.
두 가지 모범 사례를 이야기하고 싶다. 하나는 이은의 사례다. 이은은 밈-플레이어로 밈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차원을 벗어나 밈의 규칙을 지키는 한에서 회화에 새긴다. 특히 본인이 2022년부터 움짤의 상황과 움직임, 그 움짤이 담은 감정은 지키되 그것을 회화의 방법으로 그리는 스타일 자체를 매력으로 삼고 본인의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에 기여했다. 작가도 본인의 시선대로 밈을 해석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녀의 포트폴리오는 밈 아카이빙의 기능을 한다. 그는 보는 이에게 자신도 밈 사용자임을 고백한다. 이런 방법은 밈을 사진첩에서 꺼내 쓸 수 있도록 디깅과 아카이빙을 연달아 하는 현대인의 생활과 닮아있다. 작가가 밈 사용자라는 것을 노출하되, 작업 안에 인터넷 밈의 규칙을 단번에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류성실의 성공도 체리장이 극우 BJ의 클리셰를 온몸으로 소화하며 그 세계관을 체험하게 하는 데에서 생긴다. 결국 인터넷 밈에 우리가 바라는 것은 재밌는 룰이고 그 룰을 대리 체험하게끔 하는 게임적 체험을 안겨야 한다. 이의 작품은 여전히 미술관에 걸려 있는 그림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작가가 관객과 함께 인터넷 밈의 규칙을 플레이하고 있다는 감각이 관객을 감동케 한다. 또한 이 작가의 발전하는 작품을 보는 동안에 오프라인에서의 반응이 이 작가의 캐릭터를 더욱 공고히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 그를 밈-플레이어로 있게 한다.
또 하나의 모범 사례는 <소련여자>다. 이 채널에는 편집자로 알려진 박힘찬의 편집과 퍼포머인 크리스의 공동 합작으로 이해해야 하는 영상이 수두룩하다. 그들이 제작한 영상은 아직 전시회에 걸린 적이 없다. 기회가 생기면 그들의 유튜브 영상을 한데 모아다가 미디어아트 전을 열고 싶은 마음이다. 왜일까. 일단 <소련여자>의 영상은 전형적인 서사가 아니라 전복적인 서사와 형식을 지니고 있어서다. 니들이라고 말하는 청자를 가정하면서 대부분 작품에서 렉처 퍼포먼스의 형식을 고수한다. 게임을 패러디하듯 찍은 영상 등 여러 광고 영상을 패러디하면서 그것의 의의를 설명하거나 체험하기도 한다. 자막이 달린 것도 인상적인 지점이었다. 렉처 퍼포먼스를 통해 소련 여자는 외국인이라 불리는 본인의 정체성을 유희의 소재로 쓴다. 물론 유튜브 영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도 이처럼 큰 의의를 더하는 것은 인터넷 밈을 통해서 망가진 한국의 정치적 무의식이 이 작품만큼 흥미롭게 드러난 적이 없어서다. 게다가 러시아에서는 모든 대상이 넌센스한 것이므로 온갖 것이 허용된다. 그녀는 러시아와 한국을 빗대 몬티 파이선Monty Python 식의 부조리한 일본 코미디의 문법을 통해서 소련 여자는 환단고기, 푸틴 등 한국에서는 유행하는 온갖 황당한 음모론과 정치적 밈을 나열한다. 게다가 인터넷 밈과 그것의 규칙을 매번 학습하며 클리어하듯 본인의 몸으로 소화한다. 이를 하나의 전시에 모아두었을 때의 충격은 충분히 클 것이다. 그러므로 감히 추천하고 싶다.
두 사례는 결국 인터넷 밈과 인터넷 밈에 대한 담론이 아닌 본인이 인터넷 밈을 플레이한다는 정체성을 전시한다. 아니 더 정확히는 인터넷 밈을 인터넷 밈은 보는 이가 1인칭 시점으로 이입해 참여하기까지 해야 완성된다. 전시는 관객을 단순하게 관람자의 위상에 둔다. 사례로 든 인터넷 밈 미술은 E-Sport에 가깝다. 훌륭한 게임 플레이를 볼 때 쾌감을 느끼듯, 훌륭한 인터넷 밈을 볼 때 그것을 예술이라고 느낄 수 있는 법이다. 작가가 기믹을 통해서 인터넷 밈의 규칙과 룰을 독창적으로 플레이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면 인터넷 밈이 인터넷 바깥으로 전시되어도 설득력을 주지 않나 싶다.
* 이 원고는 예술경영지원센터 지원 특별 기고로 게재되었습니다.
[1] 메멕스는 90년대 말과 00년대 초에 유행한 하이퍼텍스트 이론, 무한한 공간의 매개를 통해서 텍스트의 무한한 가능성을 실험하려 했던 문학 실험의 원형인 셈이다.
[2] 《우애의 미디올로지》,임태훈, 2012, 갈무리, p.129
[3] 《인터넷 때문에》, 그래천 메컬러, 어크로스. 2022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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