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시와 추종에 사로잡힐지언정 – 류성실 작가론

남웅
2024.10.01

일등시민권

  BJ 체리장은 일인 방송을 통해 자신이 일등시민권을 받았다고 말한다. 북한이 핵을 발사하는 동안에도 그동안 경고해 왔음을 알리며 예언을 허투루 취급한 당신들을 책망하고, 죽어서도 행복하려면 후원하라는 말과 함께 자신의 스펙과 능력을 과시하는 데 열중이다.

  그는 꿈을 꾸면서 숫자의 비전을 보고 난수 방송을 해독하면서 그것이 위험을 예고하는 신호임을 읽는다. ‘오빠’를 통해 전해 들은 미래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선각자의 역할도 자임한다. 항공기 일등석을 타고 기업의 광고도 찍는 그는 올라운더와 오피니언 리더, 인플루언서를 향한 당대 성원의 욕망을 변칙적으로 재구성한 듯한 모습이다. 어떤 구체적인 모델을 참조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배경에는 한국 사회에서 SNS와 일인 미디어에 기반하여 자수성가한 이의 마인드와 태도가 서려 있다. 대관절 일등시민권을 누구에게 받았는지, 근거와 기준이 무엇인지, ‘오빠’는 대체 누구인지 일일이 열거하지 않는다. 스펙과 능력의 항목 또한 시중의 학력과 경력처럼 누구라도 노력하면 가질 수 있는 공인된 기준과는 거리가 멀다.

  화면은 홈쇼핑 광고나 아프리카TV 등 온라인 플랫폼 기반 방송 형식을 떠올리게 한다. 구석에 배치된 기록과 반려견 이미지, 출처 불명의 문장과 지침들, 계좌번호를 비롯한 각종 배너 화면은 방송의 내용을 보조하지만, 그것은 장식적이고 부수적인 정보에 그친다. 특기할 점은 그의 메시지 전달이 쌍방향 소통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현실의 라이브 방송들은 실시간 채팅이 이뤄지고 그에 맞춰 방송하는 이들이 화면 구석에 광고 배너와 정보를 띄우며 후원을 요청하고 소득을 얻는다. 체리장의 경우, 인터넷 일인 (특히 라이브) 방송을 탬플릿으로 삼더라도 온전히 그 형식을 따르지 않는다. 그는 채팅창을 띄우지 않고, 청자의 말을 직접 옮기며 소통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본인이 하려는 말을 하고, 외부의 말씀을 전한다. 중앙 집중적이고 상명하달식의 방송은 수평적 매체의 형식을 빌릴 뿐, 다분히 위계적인 태도로 일등시민의 자의식을 과시한다.

  그가 주로 타깃으로 삼는 청자들은 남성으로 추정된다. 역시 (앞서 미래를 보여준 이와는 다른) ‘오빠’라고 부르는 모습이 직접 나온 건 한번, 2018년 업체(eobchae)와 협업한 〈체리 밤(Cherry Bomb)〉에서 ‘뭉티기’를 게걸스럽게 먹으며 체리장의 말을 고깝게 취급하던 모습이 전부다. 그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동시에 체리장이 걱정하고 우월감을 느끼며 메시지를 던지는 대상을 고려하면, 그가 방송을 통해 주로 소통하는 이들의 면면을 유추할 수 있다. 대체로 ‘한남’으로 통칭할 수 있을 이들은, 일테면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의 사실과 조작을 구분하기보다 가짜뉴스의 생태계에 몰입한 채 편향된 사실을 만들고 방 안에서 자신의 강함을 전시하지만, 눈앞의 이득과 관심을 갈구하며 타인의 사사로운 치부와 결점, 불행을 캐내 이슈로 만드는 사이버렉카와 인셀(incel)[1]을 연상케 한다. 양단의 대치 속에 체리장은 상대를 흐름에 뒤처진 이들로 치부하며 애초에 내려 본다. 상호소통을 제한하면서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아 당신들이 나락을 가고 가난하게 살고 있음을 탓하면서, 그들의 소통이란 후원을 위시한 추종일 뿐임을 알린다.

  체리장은 그들에게 성공한 여성상을 과시하지만, 산만한 구성의 영상들이 보이는 세계관이란 핵폭탄이 떨어지거나 말거나 모닝 루틴을 보여주고, 기후 위기에 맞서 자체 에너지를 만드는 법을 알리는 식이다. 그렇다고 호락호락하게 대상으로서 여성에 포획당하기보다 출처 없는 이국성과 계층성의 기호들을 치장하는 편을 택한다. 가부키 화장 또는 드랙 퍼포머를 연상케 하는 두꺼운 메이크업을 한 그는 변조된 목소리로 지식을 늘어놓고 자신의 특권과 자원을 열거한다. 맨얼굴을 가린 분장은 국적과 정체를 교란하며 상대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방어와 공격의 기능을 수행한다. 정체를 숨긴 채 제 지위를 과시하는 태도는 자신을 철저히 감추며 선전하고, 그것을 공격으로부터의 방패막이로 삼는다. 이는 대상화에 대한 방어 효과와 더불어, 그를 검증할 수 있는 어떤 통로도 차단할 수 있다. 관객과 구독자를 막론하고 성공한 여자를 자처하는 체리장의 모습은 방송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일등시민 자격증이나 그가 소통하는 초인간적 존재 역시 그의 발언과 그가 제시하는 이미지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항상 웃고’, ‘돕고 살며’, ‘모두가 Yes라고 할 때 No를 하면’ 일등시민이 될 수 있다는 ‘필승법칙’은[2] 주도력을 잃지 않으면서도, 논리적 정합성과는 거리가 먼 자기 계발의 엉터리 통속성을 견지한다. 물론 이를 책잡는 이가 있다면, 체리장은 일등시민권을 내세우며 예의 변조 음성으로 꼬장꼬장하게 당신의 어리석음을 타박할 것이다.

Cherry Bomb(2018), 류성실, 한 장면.

 
죽어도 죽은 게 아님

  류성실 작가는 체리장이라는 캐릭터를 제작하여 방송과 프로파간다를 바탕으로 특정 세계관을 만들어왔다. 허구성을 바탕으로 일인미디어 방송과 SNS를 통해 표현되는 과시와 관심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보이고, 그 위에서 가짜뉴스와 찌라시, 풍문을 생산한다. 이는 체리장이 금융경제로부터 일확천금을 획득한 이들, 일인방송 플랫폼에 만연한 관심경제로부터 출현한 주체상을 주요 소재이자 모티프로 삼고 있음을 상기한다. 세속적 욕망의 표현이 극단화되는 만큼 그 세계관 또한 웅장해지지만, 그런 중에도 그의 취향을 키치하게 연출하며 과잉된 자의식을 중화한다. 화려한 외양 뒤에는 집안의 잡다한 기물이 노출된다. 소주병에 꽂은 가짜 꽃들을 비롯한 생활 집기를 그대로 노출한 조악한 구성은 다분히 속물성의 너절한 미장센을 부각하며, 예의 욕망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작가의 장치이다.

  작중 세상이 망하기 직전에도 방송은 계속 이어진다. 그리고 짚어야 할 점은 작가가 세계관 속에서 일찍이 체리장을 죽게 한다는 사실이다. 2018년부터 본격적으로 모습을 보인 체리장은 2019년 과로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의 사후에도 새로운 컨텐츠는 제작된다. 장례식 컨텐츠는 이후 그의 유훈을 따른 추종자들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천국에 가서부터는 체리장의 직접적인 모습보다 그를 기억하고 그의 아래서 일하는 천국의 노동자들이 등장한다. 여기서부터 포스트 체리장의 세계관이 본격적으로 확장한다.

  2017년 시작한 〈대왕트래블〉은 제목 그대로 체리장이 설립자로 있던 사업체로 그려진다.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건 2018년경으로 보이며, 영상작업 〈대왕트래블 칭첸 투어-김첨지 리바이벌2019〉에 이어 2020년 선보인 〈대왕트래블 2020〉은 스마트폰을 통해 사용자가 인터랙션을 해야만 전개되는 작업으로 가상의 관광지 칭쳰 투어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한다.[3] 효도 관광 상품을 모티프 삼는 작업에는 남성 노인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가족 없이 노인 남성만 등장하는 여행에 젊은 여성 나타샤가 중국 조선족 말투(를 연상시키는 무엇)를 사용하며 가이드를 진행한다. 화면에는 해외여행 패키지상품이 보일 수 있는 조악한 관광지 풍광이 펼쳐진다. 게임 형태로 관객이 스마트폰 기반의 터치스크린을 통해 조작할 수 있게 연출되는 작업에서 노인 남성은 가이드와 함께 눕는 망상 속에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통속성 가득한 오컬트적 시나리오에 기반하는 작업은 시뮬레이션 게임을 연상케 하지만 여기에는 어떤 변수도 없이 노인은 죽는다. 하지만 세계관은 죽음 이후에도 펼쳐진다.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며 조상님을 등장시키고, 장례식장에서 손녀는 육개장 먹방 인스타 라이브를 하는 동안 그는 다시 나타나 가족들을 책망한다.

  마이크를 쥔 여성의 한편에 일군의 노년 남성들이 대치하는 구도는, 이원론적 성별 위계에 세대와 매체 운용능력의 기울어진 구도가 배경으로 교차하며 전개된다. 이러한 포석은 기존의 성별 규범을 교란하거나 전복하기보다는 변주하고 과장하며 양단의 관계를 우화적으로 그려낸다. 오히려 이원적인 관계를 변주하여 반복하는 과정은 허상을 노출하되 이원성을 교란하거나 탈주하지 않으며 이원성 자체를 희화화한다. 가령 노인은 그는 자식과 지식을 자랑하지만, 실상 인두겁만 남은 상황에서 젊은 여자를 좇거나 조상님 찾아 계보의 동아줄을 부여잡으려는 노골적이고 처절한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정체불명의 여성 노동자 나타샤는 그에게 탑재된 자본주의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시시때때로 성적 대상화가 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다.

  자본의 유통 아래 젠더와 세대 간 수탈과 조롱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물리는 이야기는 변주를 계속하지만, 그것은 다분히 이원 구도를 구심 삼되 철저히 허구로 밀어붙이며 시나리오를 이어간다. 여기서 노인 남성과 젊은 여성 외에 다른 성별과 다른 세대의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의 생전 모습에서 다른 여성의 존재를 호명하지 않음을 고려하면, 그가 중장년 남성과 대치하는 구도가 특정한 사회적 통념과 편견을 부각하고 반복하며, 있음직한 허구의 이야기를 위악적으로 패러디하는 것은 아닌가를 지적할 수도 있다. 기실 여기에는 실제 노인 남성도 없다. 늙어서 주름이 녹아내리는 마스크를 쓴 누군가가 노인 남성을 상연할 뿐이다. 관혼상제와 여행 또한 방송과 더불어 외부 세계에 접촉하는 의식(儀式)이자 채널이지만, 여기서는 과시를 위한 장식으로 가득한 허례허식일 뿐이다. 요컨대 인물뿐 아니라 그들이 수행하는 의식까지도 저마다의 역할을 상연하는 허구의 생태계로 펼쳐진다.

  허례허식의 미덕은 일련의 생애주기를 교환 가능한 상품으로 가공하여 탄생과 죽음에 걸친 과정을 산업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이다. 체리장의 사후에도 사업체가 계속해서 이어진다면, 노인의 사후에도 풍문과 사리사욕으로 쉴 틈 없는 에피소드는 계속 제작된다.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며 오히려 죽음은 생산의 동력이다. 죽어서도 그들은 상조 서비스와 저승행 우편 서비스에 돈을 쓴다. 이대왕이라는 중년 남성 사업가는 한참 어려 보이는 체리장을 깍듯이 모시며 모시는 행위 자체로 자신을 브랜딩한다. 코로나19로 여행 산업이 쇠퇴한 배경 속에서 작가는 재빠르게 이대왕을 애완동물 상조회사의 사업자로 자리바꿈한다. 엉뚱한 사업수완의 배경에는 모든 것을 자본 논리로 체화하면서 자신의 위치와 체신까지도 내려놓는 유연한 신자유주의적 주체상이 있다. 그리고 곧장 투기와 사기를 자행하고 이를 다시 신흥 사업가 이미지로 세탁해 버리는 동시대 경제사범 모델로 연결된다.[4] 시장이 깊숙이 개입한 생애주기에서 자본 논리에 체화된 인물은 평생에 걸친 욕망을 너저분한 껍데기와 이미지뿐인 상품으로 도배한다. 생사고락은 겉치레 상품으로 유통되고, 이를 편파적으로 재가공하는 체리장의 세계관이 정합적으로 구성된다.

대왕트래블(2020) 모바일칭첸투어 맛보기, 한 장면.

 
요절의 미덕

  가끔 생각한다. 체리장이 죽지 않고 살았으면 어떻게 생존해 있을까. 사이버렉카들의 협잡과 괴롭힘, 신상털이를 피해 그들 위에 서서 여전히 조롱과 가르침을 아끼지 않을 수 있을까. 일등시민권은 각종 의심과 조롱 속에서도 그 아우라를 유지할 수 있을까, 그저 밈처럼 가지고 놀다 버려질까, 그는 어떤 챌린지를 미션으로 남기고, 추종자들은 어떤 형태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까.

  체리장은 일등시민권을 유지하면서 알고리즘을 통해 또 다른 ‘썰’을 만들고 메시지를 남겼을지 모른다. 지금보다 많은 이들에게 일등시민이 되기 위한 생활 속 실천을 전파하고, 그러지 못해 나락에 가버린 이들을 여전히 책할지도 모른다. 혹은 그에 대한 관심이 다하여 다른 컨셉으로 방송을 시도하다 매력이 소진되어 잊히거나 그 또한 다른 치부가 밝혀져 나락으로 가는 것도 무리한 추정은 아니다.

  짧은 시간 보여준 체리장의 면모는 지금의 미디어 문화의 정동을 극적으로 집약하고 있지 않을까. 하루 종일 쇼츠와 릴스에 노출되다시피 한 이들이 강렬함에 지속적으로 자극되는 일련의 현상이 ‘도파민’이라는 단어로 유행과 밈이 되고 이 또한 한물간 상황에서, 미디어는 다양한 체리 장의 변주를 생산해 오지 않았을까. 속물적이고 허풍으로 가득한 이들은 이제 후원을 위한 노골적인 요구와 표현을, 퍼포먼스와 궤변을 전략적으로 구사한다. 그 면모들은 다양한 컨셉으로 자신을 개발하고 망가뜨리기를 과시하며 이를 컨텐츠이자 상품으로 가공해 내는 지금의 일인 방송인으로, 가상화폐로 성공을 과시하고 자신의 투자 상품을 공구 하듯 홍보하며 이득을 취하는 이들로, 그러다 다시 책잡히며 금방 꺾이고 잊히는 이들로, 불행과 비정상성을 세일즈하고 인기를 얻지만, 주류의 궤도에 서고 자신의 재력과 인지도를 과시하는 순간 언제든 트집잡히고 문제 제기당하며 나락을 향할 수 있는 이들로, 혹은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컨셉이자 부캐로 수행하는 이들의 모습으로 만날 수 있다. 체리장이 생존해 있다면 그는 주변의 온갖 음해와 모욕에 맞서고, 남성의 위력 아래 수탈의 대상이 되어 위험을 감수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후적인 평가지만 작가는 체리장을 일찍 죽임으로써 지금 남은 이름만으로 아우라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는 온갖 조롱과 추적, 음모가 난무하는 현실에서 죽음과 죽음 이후의 세계까지도 철저히 허구를 유지하며 극단적인 상호성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된 배경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런 점에 많은 미디어가 체리장의 방송을 두고 소통과 라이브 방송을 쉽게 이야기 했던 점은 작가가 참조한 탬플릿에 기댄 성급한 표현일 것이다.[5] 오히려 그는 타인의 존재와 거리를 극단적으로 좁히고 모든 것을 연결하고 개입하려는 현실에서 철저하게 타인으로 남아 타인의 거리를 유지하고, 타인의 문장을 구사하며 우위에 설 수 있다.

  체리장을 비롯하여 그의 세계관 등장하는 인물들과 그들 사이 관계는 체제에 부역하면서도 이를 좀 더 드라마틱하게 수행하거나 그 욕망에 누구보다 철저하게 동기화되고, 변칙적인 틈새에서 뒤틀린 욕망을 뒤틀린 계층성으로 표현한다. 작가는 미디어의 지독한 네트워크를 그대로 옮기기보다는 네트워크 장치와 욕망을 빌어 체리장의 위세를 상연하는 데 집중하는 모습이다. 죽음도 온전한 망각이 될 수 없는 세계관에 동일시하며 허구성을 놓지 않는 태도는, 그를 둘러싼 모든 생사를 웃음의 코드로 가공한다.

  누구보다도 자기 주도적인 이야기를 해온 면모는 자기선전에 철저하기 위해 스크린을 매개이자 벽으로 삼아 관객과 구독자들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그는 절멸의 상황에 온전히 개입하지 않고 거리를 둔 채로 예언을 귀담아듣지 않고 그 출처를 의심하는 이들을 타박하고 가벼운 연민을 갖는다. 설령 그를 음해하는 이들이 있을지라도 그가 법의 힘을 빌려 고소하고 공식 석상에 오르는 일을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모든 것을 밈으로 만들고 그 실체적 의미와 무게를 증발시키는 이의 법적 대응은 증발한 이들의 발목을 붙잡는 중력일 것이므로. 류성실 작가 특유의 농담 지상주의는 예술가 특유의 거리 두기로 볼 수 있지만, 쾌락을 추구하는 것 말고는 다른 어느 것도 할 수 없는 무능으로 이루어진 우울증적 쾌락(depressive hedonia)[6]의 증상으로도 접근할 수도 있다. 다만 이러한 진단은 성원을 균등한 장 위에 나란히 전제하고 있음을 의심할 필요가 있다. 체리장을 통해 특권적 관조를 수행하는 일은 누구라도 음해당하고 모욕당할 수 있는 현실에서 택할 수 있는 하나의 선택지이자 재현적 전략으로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을 비하하지만 정작 그 대상이 허구적 주체라고 할 때, 공격하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우스워진다. 어떤 점에서 체리장의 태도는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의 처세술의 관점으로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것은 완전한 답일 수 없다. 모두가 신자유주의 체제에 예속되었을지라도 그들 모두가 일등시민은 아닐 것이므로.

직진의 충동

  류성실의 작업은 성원의 생존을 책임져야 하는 사회와 국가의 공백에 시장이 잠식한 상황을 문화 비평적으로 보여준다. 그 과정에 세대와 젠더의 위계가 어떻게 세속화되며 우스워지는지 펼쳐낸다. 생애주기 의례가 허례허식으로 전시되고, 국가정세와 지역성이 조롱과 농담거리가 된다. 혐오의 정동은 밈으로 소구 되면서 타인을 향한 전반적인 태도는 절멸과 대상화보다는 언제라도 증발할 수 있는 희화화로 소급한다. 이를 정치적 노선이 증발한 상태에서 미학적으로 소모되어 버린 정치성이나 증발을 지향하는 정치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른다.

  속물성이 극단화된 모든 상황을 키치적으로 가공하는 태도는 현상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할 수 있는 미적, 엘리트적 거리 두기를 전제하는 것은 아닌가. 예의 거리는 노골적인 대상화와 조롱, 혐오에 대한 혐의를 진지하게 던져지는 것조차 어색할 정도로 현상을 증발시켜 버리기를 택한다. 여기서 재현적 책임을 논하는 것은 우스워질 수밖에 없을까. 모든 것이 밈처럼 되어버리고 어떤 욕망도 시장의 상품 단위로 불태워 버리는 상황에서(2022년의 전시 ‘불타는 사랑’은 그저 통념적인 표현만은 아니다) 류성실의 인물들은 체제에 부역하면서도 산전수전 살아낸 이들을 희극적으로 수행하며 적대와 혐오를 사회적으로 해소하기보다는 밈에 가까운 소모전과 극화를 통한 소거를 이행하는 모습이다.

  2021년 작가가 뮤지션 바밍타이거, 드랙퀸 아티스트들과 함께 제작한 영상 〈(MV)대왕트래블-직진〉[7]은 화이트큐브나 극장의 공간보다는 핸드폰과 스크린에 송출하는 뮤직비디오의 형식을 취한다. 그들은 체리장 사후에 그의 유훈과 가르침을 행하는 일종의 사도처럼 등장한다. 일등시민을 표방하던 체리장의 추종자들은 시민권의 ‘필승법칙’에 딱히 어긋나지 않는 태도를 보이면서도(항상 웃고, 돕고 살며, 모두가 Yes라고 할 때 No를 외쳐라!) 어떤 공인된 제도와 기준에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능력과 지위를 과시하는 체리장의 계층의식보다도 욕망의 비규범성 자체를 무대화하고 상연하는 모습이다. 사회 질서에 동일시할 의지조차 보이지 않는 태도를 고수하며 기내를 종횡무진으로 내달리는 이들을 태운 항공기가 직진하는 동안, 드랙 퍼포머들이 플라스틱 화환으로 치장한 채 신호를 주고받는다.[8] 모든 것이 소비재가 되고 그 무엇도 진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들은 직진의 충동을 수행한다. 사회의 위기 속에서 탈주하고자 하는 이들은 탈주의 목적지까지도 밈으로 치환하며, 탈주 자체를 무대화하는 모습이다. 통속적 욕망과 허례허식의 세계관에 누구 하나 예외는커녕 잔뜩 적셔진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태도란 땅으로부터 발을 떼고 충동적으로 목적지 없이 직진하는 것일까.

  뮤직비디오는 떠나는 비행기를 멀리서 잡으며 끝난다. 하지만 그들이 국경을 넘는 순간을 상상할 수 있다. 그 상황에 무엇이 출현할까. 현실 세계에서는 등장하는 주체는 여지없이 국가가 아닐까. 생명 정치의 영역을 시장에 내어준 무책임한 국가가 구제와 징벌의 권력으로 출현하는 장면은 어렵지 않게 그려진다. 체리장의 추종자들은 예술적 형식을 갖추며 꽤 세련되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직진의 충동을 이행하고 그것을 무대로 삼지만, 체념적이고 충동적인 행위는 오히려 자기 주도권을 결핍하고 있음을 시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왕트래블 – 직진(2021), 한 장면.

 
어떤 피드백 – 온전한 죽음의 불가능성 속에서

  음모와 술수와 협잡과 온갖 아는 척과 인정 없는 세계관에 상응하는 대응은 철저히 거리를 두거나 산만함의 상태에 지독하게 몰입하는 것 말고는 없을까.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환경은, 떠나도 떠날 수 없음을 재차 확인하며 자조의 굴레를 반복하는 상황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이미 미디어 환경에 체화된 사용자로서 피할 수 없는 피로를 감당하는 일은 어떤 재현의 난관을 또한 품고 있을까.

  그 세계는 오히려 죽어도 상관없고, 죽어서도 그의 흔적들이 데이터풀을 유영하며 온전히 기억되지 못하지만 망각 되는 것조차 쉽지 않은 회색의 폐허가 끈적하게 이어지는 모습일지 모른다. 항상 자동 로그인되어 연결을 중단할 수 없는 일상에서, 사용자들 사이의 위계와 계층을 무대화하고, 이를 소비하며 변주하고 증식하며 상품과 언어를 만드는 일은 성원으로 하여금 상황에 몰입하고 금세 분리하기를 끝없이 이행하도록 한다. 세계에서 탈주할 수 없고, 그 안에서 수탈당함을 알면서도 온전히 서는 것도 어려운 상황은 체념과 분열, 냉소를 직진의 충동으로, 엉망의 몸짓으로, 웅얼거림과 외침 사이 어디쯤 있는 리듬을 만들며, 그에 불화하는 표상들을 남긴다.

  그것은 그리고 오늘의 가혹한 현실의 풍경으로 나타난다. 류성실 작가가 설계한 체리장의 세계관이 반영하는 모든 것이 유희이고 밈으로 연결된 세계는, 실존을 위협하는 긴급한 상황을 필연적으로 잠재해둔다. 말하자면 그의 세계는 현실에 틈새를 벌려 유머를 양산하고 세계의 감각을 재분할할 가능성을 열지만, 한편으로 누구라도 유머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상품일 수 있으며, 타인으로서 무게가 증발 당할 수 있는 지옥도를 연다고도 쓸 수 있다. 특히 현실의 위계와 위험의 감각이 허구의 생태계에 확장 반복되어 누군가는 딥페이크의 데이터로 전락하여 얼굴과 몸으로 수탈되고 착취되는 상황은 배제할 수 없는 재현의 조건이 되지 않았을까. 착취물을 소비한 이들 또한 협박과 채무에 시달려 그들이 다시 급전을 위해 타인을 아무렇지 않게 쉬운 방법으로 이어진다. 몸의 파괴 자체를 생산물이자 상품으로 바꾸는 ‘고어 자본주의’가 온라인 미디어 시장에 이르면, 여성혐오와 성적 대상화를 유머의 층위로 소비하며 제 극단성을 세탁한 채로 악순환을 재생산한다.[9] 피해자의 대다수가 여성이라는 점은, 밈 천하가 그저 균질하게만 펼쳐지지 않음을, 죽음과 멸망도 사리사욕 아래 펼쳐내는 농담지상주의의 세계에서 사회의 위계와 구조가 고스란히 반복하고 있음을, 농담의 세계는 그 자체가 빈틈 자체일 수밖에 없음을 역설적으로 보인다.

  하여 여성의 실존까지도 밈이 되고 장식이자 교환 가능한 도구가 되는 상황에서, 체리장은 저승에서 어떤 딥러닝을 하며 암중모색하고 있을까. 요지는 그것이 더 이상 일등시민의 계도만으로는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 이 원고는 예술경영지원센터 지원 특별 기고로 게재되었습니다.


[1] ‘비자발적 금욕주의자’로 정의되는 온라인 하위문화의 남성들은, 수잔 팔루디의 지적처럼 신자유주의 질서와 정상성, 나이주의(ageism) 아래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배신당한(stiffed) 채로 패배주의와 허무주의에 압도되면서도 국가를 비롯한 거시구조와 기구에 불만을 가지며 자신의 권리와 변화를 요구하기보다 여성과 소수자를 혐오하며 적개심을 높여가며 나이 들어간 일군의 남자 집단을 가리키기도 한다. 자세한 내용은 수잔 팔루디, 『스티프트:배신당한 남자들』, 손희정 옮김, arte, 2024.를 참고할 수 있다.

[2] 〈BJ 체리 장 2018. 9〉, Youtube ‘Cherry Jang’ 채널, 2018. 12. 15 게시, 마지막 접속: 2024. 8. 31.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JRLUwQOEQ8k

[3] 〈대왕트래블 2020〉은 류성실 작가의 홈페이지 https://www.bigkingtravel.com/ 에서 접속할 수 있다.

[4] 2022년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진행한 전시 《불타는 사랑의 노래》에 설치한 이미지 정글에 담긴 QR코드를 타고 들어가면 이대왕의 실체를 폭로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 내용은 온라인 전시 가이드북을 통해 알 수 있다. 링크: https://assets.hermes.com/is/content/hermesedito/_South_Korea/The_Burning_Love_Song_guidebook.pdf

[5] 생각해 보자. 작가가 체리장으로 하여금 직접 쌍방향 라이브방송을 진행하도록 했다면, 방송은 허구의 캐릭터를 얼마나 유지할 수 있을까. 그 사례로 이반지하의 라이브 방송을 떠올릴 수 있지만, 체리장의 경우 작가의 언급처럼 방송 자체보다 화면에 레이어를 올리는 작업의 조형성을 강화하는 점에 소통보다는 과도한 소통임 직한 방송의 프레임을 조형 문법으로 따른다는 점에 그와는 다르다. 류성실이 방송 컨텐츠의 조형성을 논하는 내용은 다음의 인터뷰를 참고할 수 있다. 〈체리 장, 그녀는 누구인가 : 류성실 _interview〉, 앨리스온::국내 최초 미디어아트 채널, 2019. 12. 23. 게재, 마지막 접속: 2024년 8월 31일. 링크: https://aliceon.tistory.com/3114

[6] 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 박진철 옮김, 리시올, 2018. pp.44-45.

[7] 〈대왕트래블-직진(feat.Omega Sapien, Mudd the student, Lil Cherry, GOLDBUUDA)〉은 아래 링크로 접속할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lr0PxjE1zI

[8] 뮤직비디오에서 왜상처럼 보이는 이는 노인 여성이다. 그는 불만을 표시하고 조롱받는 대상으로 등장한다. 앞서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남성 노인과는 달리 눈을 흘기며 불만을 표시하는 이로서 그들에게 포획되기 위해 나타난다. 모두가 욕망의 체제에 종속되어 있는 중에 노년 여성의 모습은 제일 어색하게 등장하지만, 또 어딘가에 존재했을 마지막 비평적 관객의 알레고리는 아닐까. 이후 그가 재현하는 노인 여성은 《불타는 사랑의 노래》전시에 선보인 ‘대왕애견상조’에서 반려견 ‘공주’를 화장하고 하늘로 보내는 의식을 지켜보며 의심은커녕 하염없이 슬퍼하는 노인 여성의 마스크로, 액자형 예능 프로그램의 리액션 화면 안에 등장한다.

[9] 고어 자본주의에 대한 설명은 샤아크 발렌시아, 『고어 자본주의』, 최이슬기 옮김, 워크룸프레스, 2021. p.18. 문화평론가 손희정은 ‘악플문화-여성에 대한 능욕과 멸시, 괴롭힘이 자원과 돈이 되는 시장-사이버레커-여성을 착취하는 포르노그라피 산업-n번방/딥페이크-디지털교도소-불법도박사이트-사채시장’ 의 고리를 언급한 바 있다. 손희정, 〈어떤 놀이의 결말〉, 경향신문 오피니언, 2024. 9. 24. 링크: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40911205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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