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아밈의 세계
2024년 8월 25일 자 《퐁》의 익명게시판, 아고라에 피드가 올라왔다. “입시하면서부터 컨아밈을 보면서 자란 애들은 뭐가 될까.”[1] 입시생과 컨템퍼러리 아트? 살면서 거의 생각해 본 적 없는 조합이라 흥미로웠던 것도 사실이다. 한갓 어그로 끄는 인스타그램 계정 comtemporary_arts_meme(이하 컨아밈)이 끼치는 영향 때문에 미술 꿈나무를 걱정할 수도 있구나. 왜? 연이은 피드에서 슬쩍 대답이 나오는데, “냉소주의자”, 그리고 “냉소주”란 드립이었다.[2] 며칠 뒤 컨아밈을 닉네임으로 쓰는 누군가는 “똥”이라고 했다. 《퐁》이 미술전문 비평 매체임을 감안하면, 이 모든 피드가 미술계 사람들로부터 나왔을 확률이 높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컨아밈이 대체 뭐길래 입시생도 보고 자라며, 대체 뭘 하고 있길래 미술계 사람들이 불편한 기색을 보일까? 그럼에도 팔로워 수 4만이면 동시대미술 계정 중에선 대기업에 속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묻자면, 오늘날 컨아밈을 그렇게 색다르고 그렇게 매력적으로 만드는 건 무엇일까?
이게 바로 현실
컨아밈이 즐겨 다루는 소재를 하나만 꼽아 보자. 예술가. 이 방식은 매우 가혹하기 그지없다. 지피(GIPHY) 같은 해외 밈 사이트에서 퍼온 밈에다가 캡션을 붙이는 식으로 만드는 짤에서, 대다수 예술가는 자신의 현실적 무능은 부인하면서, 매우 높은 이상적 자아(ego-ideal)만을 추구하지만, 그럴수록 현실은 악화하는,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주제파악 못해서 자신과 주변을 모두 파괴시키는 안타까운 유형의 주체로 재현된다.[3] 예를 들어 한 짤에서는 소녀가 귀엽게 표정으로 능수능란하게 정면을 보며 마치 파인다이닝의 서버처럼 한 손으로 주전자(“내가 한 작업”)를 높이 들어 다른 손으로 든 찻잔(“당대의 예술쟁점을 아우르며 숭고한 목표에 도달하기”)에 차를 붇지만 과녁이 빗나가서 땅으로 떨어진다(“사람들이 내 정신 건강을 걱정하게 만들기”).[도판1] 어느 골퍼가 물가에 잘못 떨어진 공(“당신의 작업”)을 구해내기 위해 스스로 물에 들어가 신중하게 샷을 날리지만 그 공은 휘어서 도리어 호수 한가운데에 빠진다(“당신의 삶”).[도판2] 예술가는 “내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또한 작업과 별 상관없는 철학적 개념과 언어”를 스테이트먼트에 마구 때려 부어 라떼 잔을 넘치게 만들며, 두더지잡기 게임에서 짧은 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소시지를 좀처럼 입에 물지 못해 안달 난 시바처럼 공립레지던시, 창작지원금, 예술인파견지원사업 선정에 실패하고 화를 내는 소인배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4] 어찌 보면 컨아밈은 마치 메시아나 선지자와 같은 위치에 선다. 설명하지 않고 그냥 그런 거라고 제시할 뿐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짤이 “Based on true story”라는 댓글로 자주 증명하듯, (그리고 때때로 “철저히 허구를 바탕으로 했습니다” 같은 과장된 문구로 넌지시 시사하듯,) 누구나 알고 있다고 가정되는 현실,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 기반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미술계 썰’인 것이다. 사람들은 왜 썰에 매혹될까? 사실 대부분의 썰은 서점의 어떤 소설을 하나 골라잡아 비교해 보더라도 탄탄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거나 생각하지 못한 특별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썰에 솔깃하다면 그 이유는 철저히 사실 기반의 경험담이라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판춘문예 같은 말로 곧장 반증할 수 있다. 조회수를 노린 지어낸 이야기란 의미의 판춘문예는 그것이 소설로 밝혀질 경우 낚여서 실망했다는 반응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니까.[5]
아무튼, 그럼에도, 컨아밈이 판춘문예에서 완전 자유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여러 차용된 이미지와 알레고리, 이미지의 관계 속에서 사실은 열화되거나 부풀려지고 그 의미는 어떤 요소를 주목하느냐에 따라 시시각각 변한다. 특유의 반의적 표현 때문에 어떤 피드가 누군가를 조롱할 때도 그것이 문자 그대로의 순수한 조롱인지 조롱의 스테레오타입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인지도 엄밀히 말하면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컨아밈의 썰은 미술계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직접 경험하고 수집한 일종의 에스노그래피(ethnography)이면서도 어떤 주관적이고 허구적인 성질을 띄는, 말 그대로 썰이기도 하다. 이런 사실과 허구의 결합은 자주 컨아밈을 모순적인 자리에 가져다 놓지만, W. G. 제발트의 『이민자들』 같은 에스노그라피적 문학에서 진지하게 실험된 적도 있다. 『이민자들』이 독특한 점은 소설 자체가 가지고 있는 허구적 특성을 벗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치 역사에서 살아남은 개인의 디아스포라적 삶을 관찰하고 수집한 문자 그대로의 사실이라는 점을 일인칭 화자와 각종 사진을 통해서 독자에게 끊임없이 소구하고 있다는 점이다.[6] 허구든 사실이든 쨌든 모르겠고 ‘이게 현실’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Based on true story”와 “철저히 허구를 바탕으로 했습니다”가 겹쳐진다.
아트 스쿨 컨피덴셜
대체 원래도 매우 취약한 미술계의 좋지 않은 모습을 굳이, 심지어 양념을 쳐 부풀리는 식으로 ‘미술계 현실은 시궁창’을 소구할 긴급한 이유가 있을까? 거듭, 이쯤에서 궁금해지는 것은, 처음 《퐁》의 피드로 돌아가서, 컨아밈을 누가 보는가?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컨아밈이 천기누설하는 미술계 현시창은 은폐된 비밀이 전혀 아니며, 사실은, 그럼에도 그것이 미술을 하거나 그만두는 이유가 아니기 때문에 존치되는 이상-지향 커뮤니티가 바로 미술계이기 때문이다. 미술계 안으로부터 나오는 반응이 “냉소주의”인 것은 논리적으로 자연스러운 흐름이다.[7]
사실 컨아밈은 2022년 10월 16일 출발했지만 처음부터 4만 명의 팔로워를 보유한 계정은 아니었고 호응이 좋은 편도 아니었으며 자주 게시물을 올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대개 1에서 30개 사이를 오가던 좋아요 수가 급격하게 늘기 시작한 시점은 대략 2023년 5월. 예대 1학년 선호 예술가 3대장이란 제목의 밈은 황소윤, 자비에 돌란, 고 버질 아블로 같은 힙스터를 내세워 좋아요 385개를 기록한다. 다음 회화과와 디자인과를 비교하는 피드가 좋아요 94개 기록. 며칠 뒤 컨아밈은 인서울 주요 미술대학 짤을 올린다.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한예종은 술만 마시고 홍익대는 그 자체로 폐허이며 서울대의 급을 단과별로 나누면 미대는 꼬마 급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홍대가 186개로 상대적으로 많은 좋아요 수치를 기록했다. 6월 1일, “미대를 졸업한 다음 주로 뭘 하나요?”라는 밈은 1932개, “예대입학 그리고 졸업”이란 제목의 원숭이가 졸업장 받은 사진과 5천만 원이란 캡션은 993개로 다른 피드 대비 압도적인 수치를 보였다. (이 모든 피드는 미술계 내 관계자라면 언젠가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알려진’ 스테레오타입이다.)
물론 컨아밈의 전체 피드에서 미대생 컨텐츠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고 할 순 없지만 미대생이란 지표를 의식하면서 피드 전체를 다시 살펴보면 대개 컨아밈은 예비작가나 젊은 예술가의 현실적인 상황을 자조 섞인 뉘앙스로 다루고 있으며, 2023년 8월쯤 시작한 컨아밈 상담소의 질문과 답을 보면 독자는 미술에 관심 있는 비전공자까지를 독자 범위로 쉬이 상정할 수 있다. 컨아밈의 독자는 어떠한 이유로든 미술 제도를 향한 접근성이 취약한 주체다. 이 독자를 편의상 지금부터 예붕이라고 부르자. 정리하자면 컨아밈은 예붕이에게 ‘이게 현시창이야, 도망치려면 지금’이라고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게 보면 《퐁》의 첫 번째 아고라 피드가 입시생을 거론한 건 매우 일리가 있다. 그래서, 컨아밈이 단순히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마냥 미술계 뒷담을 잘 모르는 미술계 밖에다 대고 하고 있다고만은 볼 수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컨아밈이 하고 있는 일은, 다름 아닌 예비작가를 향한 조언, 멘토링이다.
참 스승을 기다리며
2023년 8월 31일 컨아밈은 “반응이 생각보다 좋아서 일주일에 한 번씩은 상담소를 열어보겠습니다?”란 멘트와 함께 ‘컨아밈 상담소’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그 후 가장 열의를 다해 하고 있는 것이 상담소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문답 대부분의 특징은 질문에 질문으로 맞대응하면서 실상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질문을 질문자 자신 안에 있는 문제로 가두는 데 주저함이 없다. 예컨대 “무슨 작업 하시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답해야 하나요..”란 질문에, 컨아밈은 “말만으로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면 우리는 대체 왜 작업을 해야 하죠?”라는 말로 맞받아친다. “사진 예술이 계속될 수 있을까요?” 지젝의 얼굴에 말풍선을 달고 “응 그건 자네 손에 달렸네”라고 한다. “항상 심오하고 깊은 주제를 생각하면서 작업해도 항상 엉성하고 조잡한 것 같아요”란 질문에 “미대생들은 기억하세요. 만듦새가 엉성하다고 해서 당신의 주제가 심오해지거나 당신을 지적으로 보이게 하지 않습니다”라고 반대로 답한다.
이렇게 보면, 젊었을 때 고생하면 다 성공할 수 있다는 유명한 거짓말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부터, 2010년 1월 《퍼블릭아트》에 게재되어 (컨아밈을 포함해) 아직까지 영향력을 암암리에 끼치고 있는 임근준의 「대학졸업을 앞둔 예비작가에게」를 지나, 세상 탓하기 전에 방구석부터 치우라고 해 얼트 라이트의 열화같은 지지를 받았던 조던 피터슨의 『12가지 인생의 법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멘토링 담론이 기반하는 자기의 테크놀로지를 컨아밈도 따르는 것 같다. 심지어 ”흙수저도 아닌 아예 수저가 없는 학생입니다. 저에게 미술의 꿈은 어렵겠죠? 진지하지만 조언 짤로 부탁드려요“란 무거운 질문에는 ”그만할라 했는데 이거만 대답해 줄게 친구야. 일단 생계부터 어떻게 해봐. 미술엔 은퇴가 없어 나도 마흔 살 넘어서 시작했어”라고 성심성의껏 답해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개인의 현실적인 노력, 그러니까 ‘자기 생존’에 방점이 찍힌다는 점에서는 매한가지로 이해된다.
다양한 멘토 담론이 비판받았던 지점은, ‘라떼는..’이란 꼰대의 습관적 훈계에 대한 조롱을 담은 말이 있듯이, 대략 출발선이 달랐던, 어찌 보면 운이 좋아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물이 전혀 다른 상황에 놓인 청년에게 일방적으로 하는 실효성 없는 조언이었기 때문이다. 살펴봤듯이, 컨아밈의 피드가 경험담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상 라떼는 담론으로부터 피해갈 수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컨아밈은 전 세대 멘토에 비해서 위로나 희망을 논하지도 않는 대신, 악으로 깡으로 견디거나 그만두라고, 어쨌거나 현시창이란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고 오히려 놀리는 것 같다는 점에서 더욱 악질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컨아밈 스스로도 그것을 당당하게 숨기지 않는다. “컨아밈 상담소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무료입니다. 여전히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무료입니다.”[도판4] 왜 그런 컨아밈에게 예붕이들은 질문하려는 것일까?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는지 뻔히 아는 데도?
소결: 공허함이 말해주는 것
컨아밈이 기존의 멘토와 조금 다르다면, 관찰자의 자리에 서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실로 컨아밈은 익명성 뒤에 숨어서 자신을 감추려는 노력을 전혀 내비치지 않는다. 컨아밈 계정의 주인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검색하면 바로 알 수 있으며, 자신이 누구와 친한지, 어떤 사람과 결혼했는지, 얼마나 가난한지,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 안에 놓여 있는지, 얼마만큼 실패했는지에 관하여 겁도 없이 썰을 푼다. 그러니까 컨아밈은 자신이 봇이 아니라 현시창을 맛보고 있는 살아 있는 한 예술가이자 과도한 이상적 자아를 소유한 어쩔 수 없는 관종임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컨아밈의 썰은 그래서 다른 게 아니라 컨아밈이란 계정을 쓰는 결함 있는 범박한 한 예술가가 살아온 방식이며, 그 예술가가 보는 미술계이며, 그 예술가 가지고 있는 예술관에서 비롯된다. 때문에 정치적 미술이나 공공미술에 대한 편견을 근거 없이 드러낼 때도, 때때로 기금을 향한 무조건적인 적의를 보일 때도, 때때로 소수자 스테레오타입을 무성의하게 희화할 때에도, 철학자를 인용하는 예술가를 조롱하면서도 자신의 인용구가 틀렸음이 탄로 날 때도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애초에 어떤 큰 진리를 여기서 얻을 수 있겠는가?
컨아밈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음을 약속하면서도 질문하라고 하고, 예붕이는 질문에 대한 답을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에 기뻐한다. 이들의 약속대련은 어떤 면에서 우리가 익히 아는 멘토-멘티 담론의 파산을 나름대로 조롱하면서 도파민을 즐기는 커뮤니티 안의 오락인 것 같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먼저 태어난 사람, 선생이 살아오면서 얻은 지혜는 후대 세대에게 정말로 불필요한 것일까? 혹시 목욕물 버리면서 아이까지 버린 것은 아닐까? 이 지점에서 생각해 볼거리는 엄기호의 조금은 철 지난 『단속사회』에 잘 나온다. 그는 10여 년 전에 생존을 위해 각개전투하고 있는 청년을 걱정하며 이렇게 말했다. “삶의 실제적 경험으로부터 조언과 충고가 나온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나와 다름 경험이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망이 필요하다. 우리보다 더 오래 살고 더 많은 것을 경험한 사람으로부터 배울 것이 하나도 없다면 그 사회는 망한 사회라고 봐도 무방하다. 한 사회가 ‘사회’일 수 있는 것은 연속성을 갖췄기 때문이다. 연속성을 지녔다는 것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의 경험과 지혜가 끊임없이 갱신되면서 후대들에게 전승될 수 있음을 뜻한다.”[8]
한편 내용 없는 형식의 공허한 반복은 멘토와 멘티가 동시에 사라졌다는 강력한 트라우마에 대한 병리학적 반응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컨아밈은 단순히 약속대련의 상대가 아니라 정말로 멘토의 자리를 대신 하는 대상으로 상상된다. 사실 이렇게 말하는 게 농담만은 아닌 게, 2024년 4월 10일 컨아밈은 건국대학교 현대미술과 학생을 위해 컨아밈 상담소를 열었다. 디지털워크숍1 수업에 대한 특강 요청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가장 보수적인 교육 개념을 가진 대학에서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는다고 소문난 컨아밈 상담소를 특강에 호출한 이런 기막힌 사연은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불길한 위기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지점에서 컨아밈의 상담소는 멘토-멘티 담론을 조롱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의 공허는, 현시창을 살아가는 예붕이들을 위한 진정한 선생의 출현을 긴급히 요구하는 다잉 메시지일 수도 있다.
* 이 원고는 예술경영지원센터 지원 특별 기고로 게재되었습니다.
[1] 《퐁》, 2024. 8. 25., https://pong.pub/agora/ (접근: 2024. 10. 5.)
[2] 《퐁》의 아고라는 댓글이나 트위터의 리트윗 기능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이 반응이 정확히 #60에 대한 것인지는 엄밀히 말하자면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본고에서는 맥락상 댓글에 해당한다고 본다. 위의 페이지.
[3] 컨아밈의 게시물은 엄밀히 말해서 밈이라고 할 수 없다. 박상권의 연구에 따르면, 인터넷 밈이 하나의 집합이자 현상이라면, 짤은 밈이 되지 못한 하나의 단일 컨텐츠다. 컨아밈은 인터넷 밈을 개작한 단일한 온라인 시각물, 그러니까 짤이라고 파악하는 것이 온당하다. 박상권, 「밈, 바이럴, 패러디, 짤과의 비교를 통한 인터넷 밈의 개념적 고찰」, 『상품문화디자인학연구』, 72, 2023, p. 179.
[4] 누가복음 23장 34절
[5] 송혜진, 「오늘도 당신은 ‘판춘문예’에 낚이셨나요?」, 《조선일보》, 2017. 1. 14.,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1/13/2017011301535.html (접근: 2024. 10. 9.)
[6] 이렇게 에스노그라피가 문학화하는 이유는 사회과학적 관찰자의 시각이 절대로 어떤 집단과 문화의 특징을 객관적으로 기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포스트모던 에스노그라피는 고전적 에스노그라피에서 전제하는 여러 불평등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원윤희, 「에스노그래피로서의 문학의 가능성」, 『독일어문학』, 제88집, 2020, p. 144, 161를 볼 것.
[7] 이 대목은 김영하와 조영일의 논쟁을 떠올리게 한다. 이 논쟁은 문학 지망생을 향한 조언으로부터 시작해 예술가 주체에 대한 상반된 견해로 확장했는데, 요약하자면 김영하는 예술가를 자율적 주체로 본 반면, 조영일은 사회적 존재라고 했다. 본문에서 말하는 미술계 내부 커뮤니티, 즉 이상-지향 커뮤니티는 현시창인줄 알면서도 그것을 초월한 삶을 살기로 자기 결정했다는 의미에서 김영하의 예술가론과 가깝다. 곽영신, 「작가가 굶어죽는 사회의 작가론」, 《오마이뉴스》, 2011. 2. 16.,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24158 (접근: 2024. 10. 15.)
[8] 엄기호, 『단속사회』, 창비, 2014, p.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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