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센서-이미지/데이터: 시각성 이후 영상 비평을 위한 이론적 조건의 탐색(1)

서동진
2024.10.01

“결국 예술의 형상들을 근본적으로 지배하던 형태론은
점차 박자와 시퀀스로 구성된 리듬학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1]

비가시적 이미지의 세계

슈테판 쿠르제(Stefan Kruse), <선명치 않음 A Lack of Clarity>(2020), 출처: https://vimeo.com/461485260

 
  덴마크의 영상 작가인 슈테판 쿠르제(Stefan Kruse)의 <선명치 않음 A Lack of Clarity>(2020)은 온라인에서 찾은 열화상 카메라의 이미지를 몽타주하여 도시의 풍경을 비춘다. 어쩌면 전자감시사회 버전의 도시교향악이랄 수도 있을 이 영상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밤의 풍경이다. 1920년대의 도시교향악(city symphonies)이란 장르가, 도시에 사는 이들을 압도한, 즉 자신들이 익숙했을 지각의 인간적 척도를 초과하는 도시에서의 경험을 심미적 대상으로 변형시키며 그것을 느긋이 관람할 수 있는 이미지로 바꾸어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슈테판 크루제의 작품은 관람자를 위한 경관으로서 도시의 풍경을 들이미는 것이 아니라 기계가 바라보는 으스스한 도시의 파편적인 모습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선명치 않음’이란 제목은 그런 점에서 시사적이다. 그것은 이미지의 해상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초점을 통해서이든 색채를 통해서이든 이미지를 서사화하려는 어떤 노력도 마다한다는 점에서 또한 해득할 수 없는, 불투명한 이미지임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이 딱 부러지게 무엇을 뜻하는지 관람자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물론 그가 그것을 알 필요도 없다. 열화상 카메라가 포착한 이미지들은 인간 관람자들을 위한 이미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느 다른 기계가 보고 반응하기 위한 이미지들이다. 혹은 (뒤에서 더 길게 이야기하겠지만) 그것은 이미지들이라기보다는 데이터이며 그 데이터를 포착하는 시각적 주체/객체는 카메라가 아니라 센서(sensor)이다.

  슈테판 쿠르제의 작업을 일종의 다큐멘터리라고 부르는 것은 이상할 수도 있다. 그것은 어떤 사회적 실재도 포착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일종의 변증법적 이미지를 제출하면서 다큐멘터리로서 효험을 발휘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만연한 기계-시각이 포착한 현실을 보여주며 그것을 바라보는 음산한 카메라의 존재를 우리에게 보고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이를 행한다. <선명치 않음>은 그 이미지를 생산하는 위치를 들춰냄으로써, 제시된 이미지 안에서는 식별할 수 없지만 그 이미지들이 속한 사회적 실재를 드러낸다. 이미지 안에 부재하는 사회적 실재는 이미지를 생산하는 기계 속에 배태된 응시 속에 있다. 하룬 파로키가 큰 관심을 보이며 비평했던 독일 영화감독 미하엘 클리어(Michael Klier)의 <거인 Der Riese>(1983)은 슈테판 크루제의 작업을 선구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독일의 감시 카메라에서 수집한 푸티지를 활용하여 악몽과도 같은 도시의 교향악을 제시한 바 있다. 하룬 파로키가 말하는 바처럼 저 높은 곳에서 변덕스레 카메라를 돌리고 줌을 맞추는 거인은, 오늘날 권력의 화신이 바로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감지할 수 있는 이미지의 집행자를 가리킬 것이다.[2]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 <카운터-뮤직Counter-Music>(2004)


  하룬 파로키는 <카운터-뮤직 Countrer-Music>(2004)에서 역시 도시교향악의 걸작이라 할 지가 베르토프 Dziga Vertov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 Man with a Movie Camera>(1929)를 인용하며 그 영화에서 아침이 되어 밝아지며 도시의 이미지를 생산하던 것과 달리, 우리는 이제 잠든 이와 세상을 촬영한 이미지를 재생하는(reproduction) 것으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한다고 신랄하게 언급한다. 밤새 도시 도처에 설치된 감시카메라는, 침대에서 잠자는 개인의 모습에서부터 건물의 내부와 도로, 배수관, 교통시설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서 빛의 도움을 받아 도시를 이미지화하고 감시자는 그것을 해독한다. 그것은 이미지를 통해 사회의 안전과 질서를 통제하는 권력을 실행한다. 그러나 외부의 빛을 통해 이미지를 생성하는 광학적 장치가 카메라라면 슈테판 크루제의 <선명치 않음>은 그와는 다른 광학적 장치를 경유하며 오늘날 이미지가 놓인 지형을 검토하도록 이끈다. 열화상 카메라가 포착하는 이미지는 빛의 도움 없이 생산된 이미지들이다. 열화상 이미지는 적외선 파장을 통해 방출된 열을 탐지함으로써 생산된 이미지이다. 그것은 빛에 의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카메라라는 광학적 장치를 넘어 우리가 이미지를 상상하는 지평 속에서의 이미지들은 빛에 비친 세계 속에서의 이미지들이다. 빛-이미지라는 원리에 의지하는 카메라는 빛을 통해서만 감각될 수 있는 가시성(the visible)의 세계에 속한다.

  반면 열화상 카메라는 빛에 의지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도 얼마든지 세계에 관한 이미지를 생산할 수 있다. 폴커 판덴부르크는 슈테판 크루제의 <선명치 않음>을 다룬 어느 글에서 이를 시각체제(scopic regime)의 변화를 나타내는 계기로 규정한다. 그는 “감시 활동은 가시성의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어두움과 제휴한다”라고 말하며 계몽(enlightenment)-조명(illumination)-이미지라는 근대 서구의 이미지 세계를 규정한 시각성의 질서와 그를 에워싼 관념 세계가 스러지고 이제 “새로운 유형의 시각(더 좋게 말하자면 포스트-시각 post-scopic)체제”가 대두하고 있다고 역설한다.[3] 그리고 이러한 전환을 초래한 새로운 광학 기계가 센서임에 주목하며 보기(seeing)로부터 빛으로부터 독립적인 “감지(sensing/sensoring)”로의 전환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빛과 어두움을 넘어선 세계를 보여주는 이미지들의 세계가 어떤 미래의 이미지 세계를 만들어낼지 답하도록 요구한다.

광학 기계로서의 자율주행 자동차

  슈테판 크루제의 열화상 카메라 푸티지로 구성된 작품을 통해 새롭게 도래하는 시각 체제의 단서를 찾으려 한 폴커 판덴부르크의 주장은, 디지털 전환 이후 당도한 시각 문화의 윤곽을 살피는데 흥미로운 실마리를 마련해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디지털 전환 이후 도래한 새로운 이미지의 지배종(種)을 파악하기 위해 제안된 중요한 개념들이라 할 수 있을 ‘기술적 이미지(Technical Images)’(빌렘 플루서) 혹은 ‘가동적 이미지(operative/operational image)’(하룬 파로키) 등은 동시대의 이미지 질서를 이해하는 데 탐침의 역할을 하여 왔다.[4] 우리가 살아가는 시각문화의 세계에서 매일 수조 개가 넘게 쏟아지는 이미지들은 더 이상 ‘재현적’ 이미지에 속하지 않는다. 재현적 이미지 이후 들이닥친 기이한 이미지 세계의 역사적 궤적을 추적하며 새로운 이미지의 특성을 요약하기 위해 제안된 가동적 이미지란 파로키의 개념을 빌자면, 오늘날의 기계-시각이 생산한 이미지들은 무엇을 재현하거나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행하는 이미지이다. 이미지는 이제 그것을 바라보는 관람자에게 무언가를 행하도록 이끌고 지시한다.[5] 그가 <눈/기계 Eye/Machine>(2001-3)의 1부 서두에서 엄숙하게 말하는 바처럼, “사회적 목적이 없는, 편집이나 반성을 위한 것도 아닌, 이미지들”이 가동적 이미지이다.[6] 즉 가동적 이미지는 어떤 심미적, 교육적, 윤리적인 의미작용으로부터 자유로운 이미지이다. 한편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이든 아니면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이든 이미지들은 언제나 현실의 재현이다.

  그러나 가동적 이미지는 특정한 기능적 목적을 위해 대상을 포착하고 그렇게 생산된 데이터(그것을 여전히 이미지라고 부를 수 있을까)는 다른 데이터와 결합하여 알고리듬에 따라 조율된 특정한 판단을 유인한다. 마치 휴대전화의 카메라(이미지 센서)가 생산한 데이터가 자이로스코프 센서(gyroscope sensor)가 만들어낸 데이터와 결합하여 ‘손 떨림 보정’이란 판단이 반영된 이미지를 만들어내거나 자율주행 자동차의 레이더(radar), 라이다(lidar), 그리고 카메라 등의 이미지 센서가 각기 생산한 데이터를 빅데이터가 만들어낸 정보와 결합해 순식간에 주행(driving)과 상관된 판단을 내리도록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미지 센서를 다룬 어느 글에서 이러한 주장을 읽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인간은 눈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고 인식하고 그리고 판단한다. 눈은 마음의 창(窓)이다. 그런데 그 인간의 눈은 본래 뇌의 일부가 더듬이처럼 길어진 기관이다. 눈은 뇌의 일부분인 것이다. 눈 속에 있는 120만 개의 망막세포는 시신경을 통해서 직접 뇌로 연결된다. 이렇게 수집된 시각 정보는 신체의 전체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47개의 뇌피질 중 32개의 뇌피질에 공급된다. 우리의 말과 생각과 행동의 68%는 시각 정보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뇌를 대체하는 ‘인공지능’에서도 가장 중요한 기능이 바로 ‘인간의 눈’과 ‘시각 지능’을 ‘컴퓨터와 알고리즘’으로 구현하는 역할이다. 그 인간의 눈에 해당하는 반도체가 바로 ‘이미지 센서’다. 눈이 없는 지능은 없다.”[7]

  여기에서 우리는 더 이상 카메라 옵스큐라와 망막, 원근법 따위에 의지하지 않은 채 이미지를 분절하는 주장을 접하게 된다. 이제 눈-원근법-카메라-이미지 등으로 이어지는 시각 체제의 계기들은 뇌-감지-센서-이미지 등으로 재구성되는 것으로 제시된다. 영상 이미지를 신체의 감각 기관과 연결하여 설명하는 것은 그리 낯선 주장은 아니다. 영화에 한정된 것이기는 하지만 토마스 엘세서는 영화를 둘러싼 분석과 이해의 가능성을 여러 신체 기관과 짝지어 분류, 소개한 바 있다.[8] 그러나 ‘영화적 경험’의 효과를 다루었던 그의 주장과 달리 이미지 센서의 특성을 소개하는 위의 주장은 다른 갈래에 서 있다. 그것은 새로운 시각의 해부학을 동원하며 이미지를 전연 다른 틀 속에 끼워 넣는다. 그것은 이미지 센서를 다루는 주장이라면 한결같이 언급하는 감지(sensoring)-판단-운용(operation)의 계열이다.[9] 이를테면 자율주행 자동차의 경우 센서(카메라)와 주행의 관계는 그러한 배치를 역력히 드러낸다. 자율주행 자동차의 기술 체계를 설명하는 어느 입문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4단계 이상의 자율주행을 실현하려면 센싱, 인지-판단, 조작이라는 세 구성 요소가 균형있게 발전할 필요가 있다. … 우리는 눈으로 보는 시각 정보들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려고 AI보다 몇 배나 강력하고 효율적인 뇌를 이용해 각종 추측과 판단을 하면서 운전한다. 인간처럼 작은 눈(센서)을 큰 뇌(인공지능)으로 보완할 것인지, 아니면 상대적으로 기능이 부족한 뇌를 큰 눈으로 보완할 것인지는 자율주행을 개발하는 각 주체마다 다르게 선택하고 있다.”(강조는 인용자)[10]

  여기에서도 저자는 뇌로서의 눈이라는 앞의 주장보다 완곡하게 눈-센서와 뇌-인공지능이라는 구분을 도입하는 시늉을 취하지만 역시 인지-판단-조작(operation)이라는 계열 속에 시각적 감지와 이미지화(imaging)를 배치한다. 따라서 우리는 파로키가 가동적 이미지라는 시각 체제의 새로운 지배종 이미지를 정의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미지란 무릇 어떤 특정한 조작을 수행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당연시되는 담론적 장 속으로 진입하였음을 깨닫게 된다. 눈과 망막, 빛과 어둠, 표현과 진실 등으로 이어지던 이미지를 구성하는 담론은 이제 뇌와 센서, 연산과 포맷, 알고리즘과 제어 등의 낯선 말들로 구성된 이미지의 담론에 이르게 되었다. 빛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초저도 상태에서 센서가 포착한 이미지, 빛이 없는 어두움 속에서 제작된 열화상 이미지나 전자파 이미지 역시 기꺼이 우리는 이미지라고 명명할 수 있다. 이미지는 더 이상 가시성의 시각적 장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비가시적인 것, 즉 인간이라는 시각 주체의 지각에 의지하지 않는 이미지라도 그것은 이미지가 된다. 이미지는 판단과 조작을 위한 전체 이미지의 플랫폼 속에 등록되고 그러한 이미지들은 특정한 조작(operation)을 위한 데이터로서 복잡한 처리 과정을 경유한다.[11] 빛이나 열, 거리와 크기, 형태, 색채, 움직임을 파악하여 산출하는 이미지(데이터)는 각기 다른 이미지 처리 시스템의 계층(classes) 속에 처리, 변환, 포맷, 결합되고 다시 알고리즘에 따라 그런 이미지의 합성물은 특정한 조작을 수행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전체가 오늘날 기계 시각의 보기와 이미지의 관계를 말하는 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미지 기계로서의 자율주행 자동차

  따라서 재현적인 이미지의 세계와 기능적 이미지의 세계를 대비하며 후자를 우리가 처한 이미지 세계의 주된 지배종이라고 파악하는 것은 억지스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세계를 드러내고 밝히는 재현적 이미지를 제작함으로써 현실을 상징화할 수 있도록 이끌었던 이미지의 세계가 재현적 이미지의 세계였다면 더 이상 우리가 볼 수도 없고 보지도 않는 수많은 이미지로 포화한 세계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이미지가 재현적인 시각적 객체로서의 이미지가 아니기에 그것을 이미지로 파악해야 하는지 아니면 범용 연산 장치인 컴퓨터가 수집, 저장, 분산, 공유, 전송, 처리하는 숱한 데이터 가운데 하나로서 정의하여야 하는지 여전히 옥신각신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미지의 리얼리즘이라는 꿈을 꾼다. 완전자율주행 자동차의 꿈이 시각 기계의 완벽한 리얼리즘을 향한 꿈이라면 어떨까. 예컨대 테슬라 Tesla나 포드 Ford, 메르세데스-벤츠 Mercedes-Benz, 현대의 자율주행 자동차는 인공지능 제어를 통해 인간 행위자의 개입과 참여 없는 완벽한 자율주행을 꿈꾼다. 그리고 그 꿈을 지탱하는 것은 이미지 센서가 포착한 이미지가 자율주행을 가능케 하는 완벽한 ‘보기’를 보장한다는 기대이다. 그러므로 자율주행이란 곧 주행을 위한 완전한 ‘보기’ 혹은 보기에 따른 운용(operation)으로서의 주행을 가리킨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자율주행 자동차가 생산하고 전유하는 이미지들을 오늘날의 모범 이미지(model image)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가 작동하는 광범한 기술적, 문화적, 법률적, 경제적 체계를 오늘날의 시각 체제가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것으로서 상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12] 예컨대 자율주행 자동차의 첨단운전자지원시스템(ADAS: Advanced Driver Assistance System)은 자동차의 (비)시각성의 발전을 통해 자율주행의 단계를 구분한다. 현재 자율주행을 판별하는 기준을 정의한 국제 자동차공학회(SAE International: Society of Automotive Engineers International)는 0단계에서부터 5단계에 이르는 6단계로 자율주행의 단계를 분류한다.[13] 운전자가 모든 면에서 차량을 제어해야 하는 0단계에서부터 방향, 속도 제어 등의 특정 기능은 자동화된 1단계 운전자 보조 단계, 부분 자동화가 이뤄진 2단계, 주행 시 모니터링과 차량의 통제권 상당 부분이 운전자에서 자동차에 탑재된 자동주행체계에 넘어가는 조건부 자동화의 3단계, 그리고 주행 시 모니터링과 차량의 통제권 전부가 자동주행체계에 주어지는 고도 자동화의 4단계, 무운전자 단계라고도 불리는 어떤 조건에서도 자동주행체계가 주행을 담당하는 완전 자동화의 5단계가 그것이다.[14]

  그런데 이러한 자율주행의 기술적 발전의 단계들은 곧 이미저(imager) 즉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기술적 장치의 발전을 함의한다. 그것은 곧 이미지 센서의 발전과 동일시된다. 이를테면 자율주행 단계의 진화를 ‘자동차 비전’의 진화로 제시하는 어느 보고서는 “차량 운행 방식이 운전자가 온전히 차량을 제어하는 방식에서 운전자 지원 기능을 통해 궁극적으로 차량이 모든 운전 작업을 수행하는 방향으로 변화함에 따라, 차량이 주변을 감지하는 것이 필수적이게 됐다”고 단언하며 “현재 많은 차량에서 고속도로 차선이탈 보정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제어가 가능한 레벨2 운행이 가능”하지만 3단계에는 “더욱 자동화된 차량 이동 제어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미지 센서는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보다 4배 강화된 8메가픽셀(MP)의 해상도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보다 높은 해상도를 가지게 된다면 모든 상황에서의 자율주행 운행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예상한다.[15] 이러한 관례적인 ‘해상도 서사’는 이미지 센서 뒤에 자리 잡은 이미지 빅데이터와 알고리듬, 플랫폼 등을 무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율주행 자동차의 주행을 극명히 시각화/이미지화 능력과 결부시키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는 리얼한 주행을 보장하는 것은 바로 센서-데이터(물론 가동적 이미지를 둘러싼 서사는 언제나 카메라-이미지라는 비유에 의지하길 좋아한다)가 객체를 완전히 인지하는 것임을 확언한다. 미디어 역사학자인 주시 파리카는 어느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도시는 포스트-휴먼적인 감지(sensing) 형태의 장소가 되어가고 있다, 만일 이 감지란 것이 여전히 ‘이미지’라고 부르는 것들의 다수를 처리하는 자율적 체계들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말이다. 이론적으로 개관된 카메라 미디어의 고고학은 현재까지 인간 신체와 보기 행위로부터 보는 눈의 분리에 초점을 맞춰왔다면, 우리는 지금 이 카메라-눈이 자율주행 자동차에 어떻게 장착되는지, 그리고 단지 보기일 뿐만 아니라 모델링, 맵핑, 측정, 예측 및 광범한 인프라스트럭처적인 함의들을 위한 길을 열어줄 여타의 일련의 문화적 테크닉들이기도 한 방식을 통해 어디에서 보는 것인지를 밝힐 수 있다. 달리 말해, 지금 도입되고 있는 – Wifi 신호, 라이다, 레이더, 혹은 측정기로서의 카메라이든 – 보기의 형태들은, 장치나 지각하는 주체의 신체라는 장소에서의 보기 행위가 아니라 다양한 피드들이 실시간 속에서의 역동적인 이미지 구성의 일부가 되는 연결 네트워크에 주목하는 가동적 존재론(the operative ontologies)의 부분이다.”[16]

  여기에서 그는 자율주행 자동차가 연루된 이미지의 질서를 참조하면서 현재 우리에게 보기란 무엇이며 보기의 주체는 무엇인지를 간략히 요약한다. 최근 앞다투어 쏟아지는 이러한 주장들은 어쩔 수 없이 우리로 하여금 시각적 지각과 그 경험이 무엇인지를 재정의해야 함을 촉구한다.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각적 경험이란 무엇인가. 시각적 객체란 무엇인가. 어느 대상에 대한 리얼한 재현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은 가동적 이미지가 지배하는 시각 체제에서 새로운 단계를 맞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플랫폼화된 시각적 지각이 생산하는 특정한 기능적 효용은 사진적 리얼리즘이 만들어낸 리얼리즘의 이데올로기를 뛰어넘어 새로운 리얼리즘을 생성한다. 그 리얼리즘은 메타버스에 구현된 가상현실에 환호하는 이들이 만끽하는 리얼리즘일 수도 있고 헤드셋을 통해 보이는 이미지에 넋을 잃으며 몰입하는 이들이 전율하는 정동적인 리얼리즘일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자율주행 자동차 운전석의 매끈한 대시보드 모니터 위에 펼쳐진 이미지를 응시하며 보다 ‘리얼한’ 제어를 하고 있다는 만족 속에 도사린 가동적 이미지의 리얼리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잡다한 리얼리즘은 우리가 처한 현실(reality)을 지나치게 축소하거나 지나치게 과장하며,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현실과 이미지 사이에 놓인 관계를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다. 이미지 프로세서라는 센서가 대상의 크기와 색채, 거리를 계산하여 시각화한 이미지를 두고 그것이 ‘리얼’한지 물을 때 우리는 이미지를 물리적 객체의 시각적 재현으로 축소한다. 온도, 거리, 크기, 형태, 색채, 움직임 등 온갖 것을 감지하고 그렇게 수집된 시각적 데이터를 거대한 빅데이터와 통합하여 비교하고 그를 통해 그 대상의 미래 방향까지 예측하는 거대한 기계 시각의 마력은, 이미지의 리얼리즘을 걷잡을 수 없이 증폭한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우리가 처한 현실을 이미지화하는 혹은 서사화할 가능성은 걷잡을 수 없는 원심력과 더불어 멀어진다.

대항-시각을 향하여

벤 그로서(Ben Grosser), Computers Watching Movies (Taxi Driver)(2013), 출처:https://vimeo.com/79080737

 
  디지털 전환 이후 당도한 시각 문화의 세계를 어떻게 규정할지를 둘러싼 논란을 살피고 또 그에 응답하고 개입하는 일은 동시대 영상 예술이 취해야 할 가장 중요한 반응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시각예술 내부에서 쏟아지는 다양한 작업으로부터 이러한 반응에 참여하는 이들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다양한 디지털 영상 제작 기술과 디스플레이 장치, 편집 툴과 소프트웨어를 활용하면서 진기하고 몰입적이며 스펙터클한 영상 이미지를 기하급수적으로 쏟아내며 미술관과 갤러리, 미디어 파사드를 장악하고 있는, 이른바 ‘영상 작업’들은 분명 새로운 시각 기술들이 뿜어내는 심미적 효과에 주목하고 있을 것이다. 또한 그러한 이미지들이 허구적이든 비의적이든 서사이든 혹은 탈인격적인 시점이든 이미지-서사를 만들어내는 데 효과적인 조력자가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디지털-애니미즘이라 불러도 좋으리만치 사물이나 동물과 같은 객체의 시점을 극화하는 영상 작품들의 홍수에 직면해 있다. 그것은 모두 새로운 이미지 테크놀로지들에 의해 가능해진 것들이다. 인공지능 생성 이미지는 그 어떤 허구적인 이미지도 만들어낼 수 있다는 환상을 보증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그런 작품들은 디지털 전환 이후의 시각문화와 시각성의 질서에 대해 자각적인 물음을 던지는 일에 소홀하다. 흔히 말하듯 이른바 영상 작업(대개의 작가가 디지털카메라와 컴퓨터 편집, 믹싱, 전송, 디스플레이 등을 활용하여 영상 작업을 하기에 굳이 ‘디지털’ 영상 작업이라고 토를 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일 것이다)은 ‘재현적’ 이미지를 생산한다. 그러나 그것은 가동적 이미지의 세계에 포섭된 이후의 세계에서 어쩌면 퇴행적이라고도 불러도 좋으리만치 현재의 시각 체제를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이미지 생산과 소비의 기술적 수단을 재현적 이미지의 신종 테크놀로지로서만 채택한다. 그리고 이는 좋은 소식은 아니다. 오늘날 편재한 기계-시각이 생산하는 가동적 이미지가 형성하는 시각 체제에 맞서는 대항-시각(counter-vision)이 중요해지는 것도 그 탓이다.

  * 이 원고는 예술경영지원센터 지원 특별 기고로 게재되었습니다.


[1] 폴 비릴리오, 『시각 저 끝 너머의 예술』, 이정하 옮김, 열화당, 2008, 7쪽.

[2] Harun Farocki, Notes Michael Klier The Giant, https://www.ercatx.org/michael-klier-the-giant-1983-by-harun-farocki/

[3] Volker Pantenburg, No Light Required. Nilas Andersen & Matt Wolff eds. Stefan Kruse: A Lack of Clarity, Walther König, 2023, pp. 212-213.

[4] Harun Farocki, Phantom Images. Public, (29), 200. https://public.journals.yorku.ca/index.php/public/article/view/30354 한편 파로키의 가동적 이미지에 관한 선언적 주장을 확장하며 작업하는 트레브 패글런이나 파로키의 열정적인 해석자인 폴커 판덴부르크의 글 역시 가동적 이미지를 통해 동시대 이미지 세계와 기계(컴퓨터)-시각(machine/computer-vision)의 세계를 분석한다. Trevor Paglen, Operational Images, e-flux journal #59, 2014. https://www.e-flux.com/journal/59/61130/operational-images/, Volker Pantenburg, Harun Farocki and the operational image, Image operations, J. Eder and C. Klonk eds. Manchester University Press, 2017.

[5] 여기에서 관람자(viewer)라는 보기의 행위자(agent)가 반드시 인간-관람자가 아니라는 것도 강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보는 행위자들은 다양하게 분산되어 있고 그러한 행위자들이 ‘본(seeing)’ 혹은 감지한(sensing) 객체에 대한 시각적 정보들은 플랫폼을 통해 복잡한 연산 과정을 거쳐 다시 시각화된다. 이는 물론 알고리듬이 특정한 판단과 조작을 하도록 사용하는 이미지/데이터로서 구실한다.

[6] 파로키의 가동적 이미지를 가리키는 단어인 ‘operative/operational’을 가동적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따져 볼 일이다. 그러나 어떤 객체를 감지하고 표현하는 재현적 이미지와 달리 그 이미지가 재현이 아니라 특정한 실행을 하도록 한다는 뜻을 두드러지게 한다는 점에서 그것을 가동(可動)이라고 옮기는 것이 파로키의 의도에 가까우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 그러한 이미지에 의해 행해지는 활동을 가리키는 낱말인 operation은 문맥에 따라 조작, 집행, 실행, 작업 등의 말로 옮길 것이다.

[7] 김정호, 자율주행차의 ‘눈’ 인공지능 이미지 센서, 진짜 승부가 시작됐다, 『조선일보』, 2021. 5. 5.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1/05/05/2JXT75FCM5BIZFNBSTPR7WQSHY/(2024. 8. 30, 접속)

[8] 토마스 엘새서, 말테 하게너, 『영화 이론-영화는 육체와 어떤 관계인가?』 윤종욱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12.

[9] 안성원, 자율주행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 기술들, 2017. 5. 30. https://spri.kr/posts/view/21781?code=column 신광근, 정태영, 자율주행기술과 전망, 『오토저널』, 제36권 제7호, 2014. 임헌국, 자율주행 차량 영상 기반 객체 인식 인공지능 기술 현황, 『한국정보통신학회논문지』, 제25권 제8호, 2021.

[10] 이정원, 『자동차 자율주행 기술 교과서』, 보누스, 2024, 34쪽.

[11] 이런 관점을 강조하며 가동적 이미지에 대한 또 다른 가설을 제안하는 어느 저자들은 기계-시각에 의한 보기를 ‘플랫폼 보기(platform seeing)’라 명명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지의 플랫폼화를 ‘도해로 포맷하기(plat-format-ing)’란 말로 고쳐 쓰면서, 다른 이미지 처리 형태들의 분산과 통합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전체적인 감지 플랫폼(sensing platform)임을 역설한다. 현재의 이미지 장치들 속에서 보는 주체는 한 개의 초소형 마이크로프로세서 혹은 비전 칩(vision chip)에서부터 이미지 데이터베이스, GPU 배열체, 서버 팜(server farms), 나아가 데이터센터에 이른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오늘날 기계-시각 이미지에서 이미지 처리 조작의 전체(ensemble)를 바라볼 수 있는 특정한 위치와 장소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Adrian MacKenzie & Anna Munster, Platform Seeing: Image Ensembles and Their Invisualities, Theory, Culture & Society, Vol. 36(5), 2019.

[12] 코로나 팬데믹을 전후한 시기에 법석이 난 공급사슬 대란의 주요한 계기였던 반도체 공급망 위기는 미중 간의 신냉전, 경제 안보 등과 연결된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시각 체제를 뒷받침하는 인프라스트럭처의 위기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시각 데이터를 처리해야 하는 데이터센터는 물론이려니와 자율주행자동차를 비롯한 거의 모든 상품에 탑재되어야 하는 반도체는 곧 이미지의 생산, 처리, 저장, 공유, 전송에 있어 불가결한 것이다. 한편 이러한 공급망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과 유럽이 앞다투어 제정한 법률, 자기 지역 내에 반도체 생산시설의 유치 등을 둘러싼 다양한 재정적 지원과 인센티브 등을 동시대의 시각 체제와 무관한 것이라고 시치미를 뗄 수 없다. 그러므로 시각 체제를 광범한 층위의 사회적, 문화적 실재로서 고려하는 일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를 자세하게 다루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다.

[13] LEVELS OF DRIVING AUTOMATION, https://www.sae.org/news/2019/01/sae-updates-j3016-automated-driving-graphic

[14] 박평종, 황서이, 문규민, 『인공지능 사회문화학』, 태학사, 2024, 68~70쪽.

[15] 세르게이 벨리치코, 자율주행을 위한 자동차 이미징 기술의 발전, 올포칩, https://all4chip.com/archive/report_view.php?no=14899((2024년 8월 30일 접속))

[16] Jussi Parikka, On Seeing Where There’s Nothing to See: Practices of Light beyond Photography, Photography Off the Scale: Technologies and Theories of the Mass Image. Tomáš Dvořák and Jussi Parikka, eds.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21, pp. 187-188.

[17] 폴 비릴리오, 앞의 책, 101쪽.

댓글

  1. 잘 읽었습니다. 많은 인사이트가 되네요.

    Yuri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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