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렌즈-세계의 상리공생 : 송세진 영상작업에서의 물질성과 몸

신효진
2024.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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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는 유리를 경유한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기록된 이미지는 영사기 렌즈를 통해 보는 이에게 전달된다. 이미지의 형성 과정에서 유리는 빛의 굴절과 투과를 통해 정확한 시각적 경험을 가능하게 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물리적 세계를 시각적으로 재현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환영(Illusion) 속에서 관객은 각자 만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을 경험하고 감각한다. 인간은 단순한 공간을 특별한 장소로, 흐르는 시간을 역사로 변모시킨다. 관계를 맺으며 사건이 발생하고 이 기억을 먹고 살아간다. 시간과 공간은 우리의 실존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이미지를 지탱하는 근간일 것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더욱 뚜렷하고 명확하게 이를 남겨놓고자 부단히 애를 쓴다. 언제 어디서나 끊임없이 들려오는 카메라 셔터 소리.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문자의 등장에 따른 인간 기억능력의 쇠퇴를 진즉 예견했다. 문자가 인간 기억을 대체할 수 있다는 생각은 신체가 가진 매체적 특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의 기억은 곧 기록이며 새로운 기록 매체의 등장으로 이 능력이 쇠퇴한다는 플라톤의 생각. 휴대폰을 통해 끊임없이 사진과 동영상을 기록하는 작금의 상황 진배없을 것이다. 송세진은 이 기억의 뒤편(Behind)을 탐험한다. 전시 《Behind》(2023, 스페이스 애프터)에서 그는 영상작업 <WORK>를 통해 “스스로 클라우드 시스템에 들어가 타인이 남긴 편지를 사물에 녹음하여 여러 시간대에 남긴” 시간 여행자를 통해 기억/기록이 가진 불가해함을 이야기한다. 작품 속 화자에게 남은 기억은 “푸른 수영장 사진”과 “깃털 목도리”밖에 없지만 이 불완전한 뇌의 작용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과거를 가졌다고 착각”하게 만들어 줄 정도로 강력한 매체적 특성을 가진다.[1]

  송세진은 유리가 가진 광학적, 물질적 속성을 기반으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의 세계를 고찰한다.[2] 그에게 유리란 공예적 속성을 지닌 물질이기도, 광학 매체로 작용하는 물질이면서 영상의 (비)물질성을 드러내는 도구이기도 하다. 작가에게 영상은 유리를 투과하며 이미지를 만드는 카메라와 영사기[3]를 매개로 작가와 관객의 지각 행위와 지향성이 달라붙은 일종의 ‘몸’(film-body)과 같다.[4] 영상 매커니즘에서의 몸은 기본적으로 카메라, 영사기, 스크린 등 각각의 장치들로 구성된다. 마치 우리 몸의 각 영역이 역할을 분담하는 것처럼 영상에서의 몸도 공간적 일관성을 가지고 살아있는 몸을 이해하면서 각각의 기능을 조합하고 연합한다. 여기서 카메라는 실제 세계를 실질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 도구이며 렌즈를 통해 지각한 세계를 보고 구성하며 요약한 것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독특한 능력을 갖췄다. 영사기는 카메라와 세계가 만나는 지각 활동을 표현하는 가시성의 능력을 가진다. 그리고 스크린은 기본적으로 영사기의 표현적 활동을 펼치는 수동적 기능과 함께 하나의 지각된 단일한 위치로 작용하며 영상이 거주하는 실존의 표현공간으로 기능하게 된다.

<Work>(2023), 송세진, 싱글채널비디오, 한 장면, 22분 5초.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 까지(10년 프로젝트)>(2021), FHD, 한 장면, 34분 53초(2024년 9월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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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심력과 숨결을 이용해서 일정한 형태를 만드는 유리 작업은 태생적으로 신체 접촉적이다. 유리 조형물을 만들어 내는 작업에서 나타나는 직간접적인 신체 접촉과 이로 인해 환기되는 감각은 송세진의 작업 세계를 관통한다. 유리에 열을 가하면 끝없이 모양을 변할 수 있는 것처럼 그는 영상의 완결을 지연하며 물질의 구체성을 제고함과 동시에 인간-세계와의 지향적 관계를 드러낸다. 2021년 창·제작이 시작된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는 ‘10년 프로젝트’라는 부제를 통해 알 수 있듯 이미 완성된 단편 비디오 작업을 긴 시간 동안 만들어 내는 프로젝트 혹은 계획이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끝없이 변모해 나가는(그리고 나갈 수밖에 없는) 영화는 어떠한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당초 해당 작품은 파우스트가 지식과 쾌락을 위해 악마와 계약을 체결하였듯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자신의 정체성을 투영하였지만, 이제는 파우스트 서사에 관한 관심보다 ‘본다는 것의 의미와 역사’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영상 매체의 물질성’을 탐구하는 것으로 전환하였다.

  본다는 것은 인지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본다는 것은 왜곡될 수밖에 없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속 빛이 거울에 반사하는 숏들은 보는 이의 시각을 차단하고,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혼란스러워하는 작가의 고민을 드러냄과 동시에 본다는 것은 결국 실패를 전제로 끊임없이 시도한다는 명제를 이미지로 가시화한다. 서사를 구조화하는 방법론에서도 이는 대동소이하다. “오디션장에서 갑자기 글을 읽을 수 없게 된 배우 지망생의 이야기”를 표방하지만, 서사의 핍진성을 거부하며 등장인물의 행위를 요약하거나 주제를 선명하게 하기 위한 장치는 거부한다. 비선형적 시간의 흐름을 직설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작가의 개입으로 시점을 달리하거나 비논리적인 의식의 흐름을 그대로 보여주기도 하고 텍스트의 시간을 단절적으로 배치할 뿐 아니라 은유적 메타포를 곳곳에 제시하기도 한다. 제작된 시기와 성격이 판이한 여러 단편과 영상 푸티지를 하나의 작품으로 재배열하는 것은 사건들의 인과 관계나 전후 관계를 파열시키고 보는 이가 적극적인 인지적 개입을 통해 각각의 이미지를 재구성할 수밖에 없다.

  거울의 움직임으로 창조한 이미지, 작가의 기 제작된 단편을 무차별적으로 엮어낸 구조와 함께 영상을 제작하는 과정과 카메라의 안팎을 노출하는 전략은 영상의 디제시스를 즉각적으로 지각하는 것이 아닌 작가의 돌발적 개입과 도구적 조작을 먼저 인지하고 이를 통해 해석적 관계 속에서 작품을 이해하게 된다. 즉 관객은 작가가 창조한 세계에 앞서 카메라와 영사기를 인지하고 도구에 의해 해석된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지와 이미지 사이의 틈에는 실존하는 사물 혹은 사건이나 상상력으로 재창조된 이야기가 아닌 광학 매체가 지닌 능력만이 남아 있다.

  10년 동안 매만지는 영상의 실험 끝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지 모르겠지만 작가에게 이미지는 재현(representation)만이 아니라 재생(replay)하는 행위가 기록된 시간 물질인 퇴적층이자 예술의 표현물이라는 점을 영상을 창작하는 태도로써 함께한다. 오랜 시간 변형 과정을 겪으며 무경계적인 시공간의 체험을 한다는 것은 빛을 동굴 안에만 머무르게 하는 것이 아닌 관객에게 ‘물질을 감각할 수 있는 살아있는 몸’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Camera , glasses>(2020, 하이트컬렉션 제작 지원), 4K, 한 장면, 21분 33초.
<Lip-Sync For Your Life>(2016), HD, 한 장면, 6분 3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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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세진이 가지고 있는 광학 매체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카메라/인간 시선에 관한 관심은 이미 2020년 <Camera, glasses>을 통해 드러낸 바 있다.[5] 영화사 속 안경을 낀 여성에 대한 클리셰를 리서치하며 시작된 영상은 “안경녀”가 등장하는 영화 푸티지뿐 아니라 일상에서 너무나도 흔하게 찍고/찍히는 이미지(하늘, 바다, 동물과 같은 자연물과 셀피 등), 드론샷, CCTV 그리고 직접적으로 카메라를 들고 있는 수많은 인물과 그 광학 매체를 리드미컬한 편집을 통해 드러낸다. 유리라는 현실 세계의 실제 물질을 바탕으로 시작된 송세진의 창작활동은 진즉부터 광학 매체, 그리고 이 물질을 통해 지각되는 감각에 집중하고 있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2016년 작 퍼포먼스 영상<Lip-Sync For Your Life>는 대통령 탄핵 집회가 끝난 이후 군중 사이에서 작가 홀로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촬영한 작품이다. 작품은 3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작가의 퍼포먼스 영상’과 ㉡그 영상 아래 테두리만이 가시화되어 있는 ‘미국 국기 앞에서 연설하는 인물 영상’ 그리고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의 연설 음성’이 바로 그것이다. 집회 현장에서 행해지는 퍼포먼스 현장의 소리는 의도적으로 제거되어 있고 민주주의에 상징과 같은 연설문을 소환하며 작품은 다층적인 세계를 지향한다. 두 개의 이미지 레이어는 사운드와 별개로 작동되며 작품과 관객과의 간극과 혼란을 의도한다. 그리고 이 세계관의 시작과 끝은 영사기 소리와 (실제와는 무관하게) 필름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노이즈가 포함되었다는 점에서 영상이 가지는 물성을 강조하고 있다.

  즉각적으로 관찰되는 표피적 특성뿐 아니라 작품은 영상 내 감각의 충돌과 몸으로 매개되는 재현 체계의 불안정성을 전면적으로 드러낸다. 드랙퀸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춤을 추는 작가의 몸은 스스로를 기호화하지만 자기 자신의 형상을 동시다발적 구성으로 인해 전적으로 기호로서 작용하기 어렵게 한다. 즉 화면에 드러난 (작가) 몸의 움직임과 연설 영상, 영상 속 세계와 별개의 목소리 등 겹친 재현 체계 사이의 오차를 스스로 명백히 드러내어 작품 내 지표 관계의 혼란을 가중한다. 이 혼란스러운 관람 체험에서 관객의 몸은 이미지와 상호작용 관계를 형성하고 여러 겹의 이미지-사운드와 결합하며 관객의 세계-공간과의 지향성을 극대화한다. 하나의 화면(혹은 공간) 속에서 인터페이스의 중첩은 관객의 수행적 차원을 강화하고 작가의 ‘도구 매개적인 몸’-‘광학 매체로서의 작용’-‘실제 정치 상황과 결부된 관객의 몸’과 작품 속 작가의 몸은 상호 침투할 수 있도록 구조화된다.

  퍼포먼스에서 인간의 몸이 움직임을 매개하면서 기호화된다면 이 움직임을 촬영한 영상은 그 자체로 매개적이다. 영상이 물리적인 매체가 되기에는 한계가 많고 매체적 특성이 심리적 나르시시즘에 있다는 주장[6]도 일견 타당성을 지니지만 <Lip-Sync For Your Life>에서의 퍼포먼스는 과거 시위 현장에서의 움직임을 직접적으로 현재화하는 것에는 관심이 두지 않는다. 이질적인 이미지와 사운드를 통해 몸과 움직임의 이미지 부유하게 만들고 관객이 처한 정체 현실에 직접적으로 닿을 수 있도록 자기 강화의 과정을 겪으며 순환적으로 작용한다. 카메라-영사기의 작동시간 속에서 작가의 몸은 자아와 가시화된 이미지 사이 발생한 격차를 포착하고 일상 뒤편의 세계를 감지하게 만든다. 그 뒤편은 연속적인 세계가 아닌 형식적 불화로 가득 차 있고 이 불안감은 정연한 세계(예컨대 성별 이분법, 이성애중심주의 등)가 은닉한 뒤편의 세계를 파헤치기 위한 장치로 작동한다.

<노화된 기술>(2023), 퍼포먼스(싱글채널비디오), 한 장면, 36분 4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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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세진은 렉처 퍼포먼스 <노화된 기술>(2023)를 통해 달팽이관의 노화로 이명(Tinnitus)에 시달리는 자신의 상황을 기반으로 인공지능(AI)과 인간의 데이터 수집 방법을 유비한다. AI가 이미지를 생성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정보 데이터를 판별하고 분류하는 과정이 선행된다. 이러한 과정에는 인간의 편견이 포함된 기준이 포함될 수밖에 없고 오류는 필연적이다. 작가는 “AI를 노화한 기술”이라 평하며 AI가 우리에게 의미 있게 사용되지 못하는 이유를 편향된 데이터에서 찾고 있다. 데이터 수집/판별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 단편적 사고방식은 AI의 한계를 드러내고 지배 언어의 개입으로 정치적 권력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또 다른 억압과 폭력의 기제로 작용하는 디지털/인공지능의 메커니즘은 결과적으로, 디지털 세계에서 생성된 데이터와 알고리즘은 불균형한 권력관계를 재생산한다는 점을 직시한다.

  몸밖에 음원의 부재에도 귀에서 소리가 들리는 이명은 <Work>(2023) 안에서 서로 다른 세계의 만남과 이별을 매개하며 “기억과 기록이 일치하지 않음”을 현시한다. 영상 촬영을 위해 등산하는 인물의 움직임으로 시작하는 작품은 현상을 하는 사진사의 ‘일(work)’, 데이터를 스캔하고 분류하는 ‘일(work)’ 등 이미지를 창조하고 편집하는 다양한 활동에 집중하며 서로 다른 차원의 시간을 여행한다. 타임슬립을 시도하는 불법 여행자의 존재는 비-구술 언어의 중심에 인간과 기계의 ‘몸’을 소환하여 작품의 여백을 채워나간다. 텔레비전, 카메라, 필름, 스캐너, 모니터 등 이미지와 결부된 이 ‘몸’(film-body)은 과거와 미래, 환상과 현실, 환영과 실재, 기록과 기억, 소리와 신호의 합일을 이뤄내는 실체적 수단이다. 혹은 양자 간을 교류할 수 있게 해주는 역할도 수행한다. 몸의 기능은 우선 몸 자체가 지니는 근원적인 ‘매개성’ 즉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관념적 사유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직접적인 소통을 끌어낼 수 있는 특별한 매개 능력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몸은 환영이 출현할 수 있는 전제를 만들고, 그 자체로 비가시적인 것의 가시성인 환영은 구체적인 몸이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육신의 겉모양 없이는, 어떠한 환영도, 어떠한 정신의 유령화도 존재하지 않으며 환영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신체로의 복귀가 있어야 한다.”[7]

  <Work>의 세계관을 보완해 주는 작품 <Behind>(2023)에는 일본의 식민 지배 목적으로 수집한 각종 이미지가 나열된다.[8] 송세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타자들, 또는 아직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 미래, 현재 살아 있는 것들로 존재하지 않는 타자들’에 대해 끊임없이 암시하며 그들과 함께 공명하려고 한다. 끊임없이 그들을 (작품) 세계에 소환함으로써 사회가 강요하는 질서의 허상을 드러내고 그 폭력적인 억압성을 지시한다. 태생적으로 1초에 24번의 죽음을 전제로 하는 무빙이미지는 노화, 질병, 타자, 오류, 허상이라는 환영을 재생함으로써 물질세계에서 유한하게 지속하는 환영이라는 이미지를 부각하고 유한한 물질 그 자체인 삶을 사랑하게 할 수 있게 한다. 송세진의 이미지는 “죽음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경계 위에서의 삶(survie)”[9]을 지향하며 움직인다.

<버섯과 명상>(2022), 싱글채널비디오, 한 장면, 25분 53초.
<Swell Mushroom>(2022), 가변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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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개최된 그의 개인전 《상리공생》에서 전시된 영상작업 <버섯과 명상> 그리고 병치된 유리 작업<Swell/Mushroom>은 영상매체가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시각 중심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면서 감각의 동시성을 도모한다. 버섯의 균근망과 관동 대지진 당시 거짓 뉴스로 인해 다수의 조선인이 학살당한 사건을 결부시킨 영상물. 그리고 작가의 기억과 감정이 담긴 숨으로 제작된 버섯 모양의 유리 조형 작업. 영상과 유리의 병치는 매체적 특성을 직시하며 사고와 인지 범위의 확장을 욕망한다. 상이한 혹은 상보적 표현 매체가 한 공간에서 전시되는 순간 그것을 받아들이는 관객의 육체는 이를 상호유기적 관계로 독해하고 매체가 담지하는 정보에 관해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작가의 기억/감각과 연동하며 지각하게 된다.

  <버섯과 명상>에서는 개인의 기억 그리고 집단기억의 확산과정을 각종 네트워크와 관계된 푸티지와 편집하여 버섯 균근망으로 은유한다. “5만 7600초 동안 감각하며 수집된 데이터”는 개인의 기억으로 남게 되고 “개인이 속한 집단이나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아” 개별 기억은 집단기억으로 나아가며, “한 사람의 기억이 다른 사람 기억 속에 뿌리”를 내리면서 기억의 구성과 재구성, 확산과 상호작용을 탐구한다. 작가의 신체를 경유하여 창작된 <Swell/Mushroom>은 바통을 이어받아 작가의 신체에 개입된 기억이 추가로 결부될 수 있게 구성된다. 형태가 무너지거나 녹아버린 버섯은 기억의 불완전성과 왜곡을 은유적으로 드러내며 진실과 허구의 경계선에서 마치 모든 기억이 단단히 고정된 진실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흐릿한 경계 안에서 끊임없이 변형되고 있음을 환기한다.

  전시명인 “상리공생(相利共生)”은 서로 다른 종이나 개체가 서로 이익을 주고받으며 함께 살아가는 관계를 의미하는 생물학적 개념이다. 송세진은 개인-집단의 기억과 교환 사이에서 서로 다른 개체나 공동체가 협력하여 각자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과정을 역사적 사건을 대입하여 역설적으로 보여주며 생물학적 개념을 사회적 관계 그리고 인간의 상호작용으로까지 그 외연을 확장해 나간다.

  이 상리공생은 한편 작가와 ‘작가가 바라보는 세계’-‘작품을 이루는 물질’-‘관객과의 관계’에서의 이익을 뜻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이익의 중심에는 유리라는 하이퍼매개체(Hypermedium)가 자리 잡고 있다. 카메라와 영사기의 몸을 이루며 이미지를 직조하고 버섯 조형물을 통해 작가의 기억을 환기하며 프레임 내부와 외부를 상호작용케 하면서 전시를 탈영토화된 공간[10]으로 변모시킨다. 작가는 물질의 가역성을 비물질화의 영역으로 확장하고, 이 가역성은 작가와 관객와의 관계에서도 근본 조건이 된다. 관객은 자신이 보는 것을 지각함과 동시에 보여지는 대상으로 인식하며 자기 몸을 작품의 특성과 작용하며 관람하는 것이다. 즉 “관객은 몸을 통해 ‘역동적이며 방향의 변화가 가능한 행위에 참여자’로 개입”[11]하며 끊임없이 작품과 상호작용하며 현전화(present)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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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적 전통에서 환영은 참된 실재와 대비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또한 카메라 옵스큐라, 사진, 영화와 같은 매체들은 세계를 2차원으로 구현하는 방식으로, 실제와 가상의 경계를 탐구해 왔다. 인류사에 있어 이러한 예술적 이미지들은 가상의 영역들을 매개된 재현으로서 드러냈다. 작금의 상황을 살펴보자. 온라인을 통해 너무나도 흔하게 접하는 디지털 이미지. 0과 1이라는 이진코드. 혹은 가장 작은 원자적 요소인 비트(bit). 이진법의 조합과 코드의 조합, 알고리즘에 의해 생성되고 변형되는 전자적 이미지.

  이 전자적 이미지는 이른바 “메타세계”(meta world)를 구축하며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이 디지털 이미지가 갖는 메타적 성격은 실제 세계가 아닌 알고리즘에 의해 형성되는 것으로 원본의 상실과 물질로부터의 해방, 일상적인 지각의 시공간성으로부터 멀어져 기호학적으로 시뮬레이션의 체계를 구성하는 것이다.[12] 사진이 제시하는 자연의 경험적 객관성을 재생산하는 것으로부터도 벗어나 있고, 영화가 보여주는 개별적 주관성과 무의식을 표현하려는 것으로부터도 벗어나 있는 그런 메타적 이미지의 범람. 그리고 그 속을 살아가는 우리.

  송세진의 영상 작업은 메타적 이미지에 대항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미지는 물성과 긴밀히 관계하며 본질의 정체성의 변화를 추동한다. 이미지는 (인간/기계)몸에 적극적으로 연루되고 몸은 이미지와 결합된 정체성을 부여받게 된다. 작품들은 한결같이 영상의 서사나 캐릭터가 아닌 표현된 영상의 물질에 주목하며, 동일시를 인식하는 주체가 아닌 물질적인 것을 감각할 수 있는 ‘살아있는 몸’임을 인지시킨다. 이 지각의 역동성과 능동성은 몸-지각의 역할에 대한 끊임없는 재고와 성찰을 환기하며 가상과 현실, 이미지와 환영, 주체와 대상, 기억과 역사를 가로지르며 지각 체계의 저항 가능성을 제시한다.

  * 이 원고는 예술경영지원센터 지원 특별 기고로 게재되었습니다.


[1] 작품에선 다음과 같은 내레이션으로 이를 드러낸다. “유난히 뜨거웠던 여름, 호크니 그림의 한 장면 같아서 찍었던 푸른 수영장 사진, 무지개색 장식이 아름다웠던 깃털 목도리, 그게 내가 기억하는 이미지의 전부입니다.”, “우리가 헤어진 날부터 이미지는 더 선명해져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과거를 가졌다는 착각하게 해주었습니다.”

[2] 그는 유리조형학을 전공하기도 하였다.

[3] 다수의 송세진의 전시에서는 영사기뿐 아니라 모니터를 통해 관객과 영상 이미지를 전시하였지만, 본고에서는 우선 “영사기”와 “스크린”으로 용어를 일원화하였다.

[4] 영화-몸(film-body)의 개념은 비비안 섭책(Vivian Sobchack)의 저서 『The Address of the Eye; A Phenomenology of Film Experience』의 개념 참조

[5] 해당 작품은 해체되어 <죽음을 갈라놓을 때까지>의 푸티지로 사용된다.

[6] 로잘린드 크라우스, 「Video: The Aesthetics of Narcissism」, 옥토버 Vol. 1(1976)

[7] 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진태원 역, 그린비, 2014, p. 246

[8] 그리고 이 이미지들은 후에 제작될 <버섯과 명상>의 세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9] 자크 데리다, 앞의 책, p. 15

[10] 들뢰즈와 가타리의 개념으로, 구조화되고 고정된 영토를 해체하여 하나의 구조나 체계를 벗어나는 것.

[11] Vivian Sobchack, The Address of The Eye: a Phenomenology of Film Experience,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2, p. 41

[12] Vivian Sobchack, “The Scene of the Screen: Envisioning Cinematic and Electronic “Presence”, in Film Theory : An Introduction, Robert Stam(ed.), Malden, MA : Blackwell, 2000, p.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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