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겨운 이미지에 대해 말해볼까? 지루하고 재미없는 것에 대해서 말이야. 자, 편안히 앉아봐. 아니 서 있어야 할까? 걸어야 할지도 모르니까. 눕고 싶다고? 누워도 상관없지. 편안한 게 중요하니까. 자 그럼, 편안히 있어 봐. 이제 눈을 감고 아무것도 없는 흰 상태를 상상해보자. 아무것도 없는 흰 상태. 이 흰 것은 꽉 막힌 듯 느껴지는 움직이지 않는 딱딱한 하얌이야. 눈을 깜빡여봐도 고개를 좌우로 위아래로 돌려보아도 보이는 것은 하얌이지. 문득 이 하얌이 물질처럼 느껴져. 눈동자 앞까지 하얀 것이 가득 찬 것 같아. 냄새도 맛도 느껴지지 않는 무해한 것, 있는 줄 몰랐던 것, 하지만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이, 보인다. 너는 손가락을 움직여본다. 양손의 손가락을 구부려 주먹을 쥐었다 폈다. 손이 조금 차가워진 것 같아. 두 손을 맞잡고 손끝을 주물러본다. 그러다 서늘함이 온몸에 느껴져 양팔로 스스로를 감싸 안는다. 한동안 그렇게 있다. 팔을 뻗어 보고 어색하게 저어보고, 어색하게 한 발을 떼고 흔들거리다가 다른 쪽 한 발을 굴러 걸음을 걷는다. 걸음은 어떻게 걷는 거였지? 아무것도 보지 않고 걸어본 적이 있었나? 아무것도 보지 않고 걸음을 걸을 수 있나? 몇 발자국의 걸음으로 너는 바닥이 단단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 단단함이 어디까지 계속되는지 알 수 없다. 눈을 깜빡여 주위를 보고 있지만 보이는 것은 하양 하얌이다. 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을까?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하얄까? 그러다 몇 년 전의 하얀 방에 대해서 기억한다. 사방이 푹신한 솜으로 덧대어진 흰 레자로 씌워진 방. 간신히 일인용 침대와 한 사람이 서 있을 수 있는 간호사실 뒤에 있었던 독방. 그 방의 이름이 뭐였더라. 어떤 명패가 있었던 것 같은데, 격리실과 치료실과 휴게실 사이의 의미를 가진 단어였던 것 같은데. 사흘을 그곳에서 있었던가? 그동안은 면회가 불가능했고 너는 혼미하고 광적이다. 폭력적으로 반항하고 무기력하게 비참하다. 하지만 너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너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정신병은 아니었는데 너는 왜 갇혔을까? 기억을 잃는 것도 정신병이라는 것을 너는 슬프게도 알지 못했다. 의료진 외의 사람과는 접촉이 차단된 곳 어떤 텍스트와 색깔과 사물도 제한된 시간 속에서 너는 무언가를 잃은 동물이 된다. 검은 선이 생겨났다. 검은 선은 위에서 아래로 그어져 어느 부분에서 멈췄다. 검은 선이 자라난다. 아래에서 위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교차하고 반듯이 이어진다. 눈은 그것을 쫓는다. 고요한 선들의 생성이 한바탕 지나가고 너는 다시 몸을 움직여 선들의 생성을 탐색한다. 선과 선으로 막힌 곳은 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선은 높았고, 선으로 둘러싸인 곳은 종종 깊다. 선은 벽 같은데, 발목까지 오는 낮은 높이부터 고개를 들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높이를 가지기도 했다. 검은 선과 검은 면이 만든 지형을 살피며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야 할지 궁금해진다.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야 할까? 갑자기 검은 벽이 나타났다. 잊고 있었던 검은 벽이다. 이 벽은 한때 나를 떠난 벽이다. 과거는 돌아오는 거야? 죽어야 하나 살아야 하나. 햄릿은 왜 이 말을 했었다고 했지? 아니 햄릿이 한 말이 아닌가? 중세시대의 인간은 고개를 돌린 채 앞으로 뛰어간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앞은 어디인가? 몸이 앞을 향하고 있으니 앞으로 달리는 것인가? 머리가 뒤돌아져 있으니 뒤로 달리는 것인가? 지나온 것을 보면서 몸은 미래로 달리고 있다면 내 몸의 풍부한 시제를 감사해야 하나 울어야 하나. 너는 왜 사람들이 겨울에는 검은 옷을 많이 입는지 궁금했다. 겨울철 짧은 낮의 길이와 부족한 일조량을 이유로 삼는 사람도 있고, 두꺼운 옷을 자주 세탁할 수 없음에서 생겨난 것이라고도 했고, 의류 회사들이 화사한 색감의 옷을 만들지 않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자외선 아래 검은 천을 덧댄 사과는 그렇지 않은 사과에 비해 빨리 늙는다고 했는데, 냉장고 속에서 다른 청과류를 더 빨리 늙게 하는 사과에게도 산화를 촉진하는 색을 사람들은 어쩌자고 입냐며 궁금해하던 너는 하얀 것에 감싸진 죽은 몸을 보았던 애도의 순간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숨 쉬는 동안 검은 옷은 거의 입은 적이 없던 몸을 떠나보내며 색으로라도 애도할 수 있기를 바랬다. 세상의 모든 것이 가진 공평한 모순적 진실이 양가성이라면, 애도의 색으로 스스로를 애도하는 많은 젊은 사람들의 스타일과 화사한 색의 생명력을 덧입는 나이 든 사람들의 무의식은 너무도 균형 잡힌 것이다. 걸음이 걸음으로 이어지듯 검음은 검음을 먹고 자라지. 투명한 검음은 검음을 만나 조금 더 진해지고 짙은 검음은 옅은 검음에게 너무 매력적이다. 검음은 검음을 알아보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들었지. 굿바이, 미스터 블랙! 당신의 블랙은 무엇이야? 쉽게 생각하면 다 쉬워진다고, 말하는 대로 이뤄지고, 그리는 대로 그려진다고. 하지만 그려지는 것이 없을 때, 희미해서 간신히 초점이 맞춰질 때는 어떻게 해? 뒤에서 보면 모두 이상한 것 투성이였는데, 전혀 일반적이지 않았는데. 일반적인 게 뭐지? 그런 거 말야 사랑하니까 결혼하고 결혼해서 몇십 년을 살아도 외롭고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 그러다 사랑을 사랑했지 상대방을 사랑한 게 아니었다는 걸 깨닫고 이 사랑이 끝나면 또 다른 종류의 사랑이 생겨나고 그럼에도 상대를 온전히 포용하지는 못하는 거. 하지만 이 사랑은 생존본능이었고, 생존본능에 따라 애인, 인생의 동반자, 파트너, 내 편, 자기를 만들고 가정을 형성하고 가족이 되고 운이 좋으면 나와 너의 유전정보를 가진 2세를 만들어내는 거. 일반적인 거. 이 시간 속에서 신기하고 이상하고 행복하고 기쁘다가 고되고 힘들고 억울하고 우울하고 죽고싶다에 다다르면 정말 몸이 죽고 있다. 살다 보니 서로의 얼굴을 닮는데 알고 보니 닮은 사람에게 끌리고, 동물도 자기와 닮은 동물을 키우는 것은 무엇을 나타내는 건가. 엄마의 이름을 물려받은 로렐라이는 엄마와 구분하기 위해 평소에는 로리라고 불렸어. 실제 이름은 로렐라이 길모어이기 때문에 둘의 이름이 함께 적히는 문서를 보면 이 로렐라이 길모어가 엄마 로렐라이인지, 딸 로렐라이인지 알 수 없었고, 로렐라이는 오히려 로렐라이와 로리를 구분 못하는 사람들을 한참 모자란 듯이 우스꽝스럽고 어처구니없이 쳐다봤어. 길모어의 부인은 길모어가 되어 길모어를 낳았고 길모어는 16세에 임신을 하고도 학교에 다니고 씩씩하게 아이를 낳았지만 자신이 자라며 부딪혀 온 상류층 부모의 가치관과 숨 막히는 강압적 환경에서 로렐라이를 데리고 길모어 몰래 집을 나갔지. 소박하고 정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 스타즈 할로우에서 혼자 로렐라이를 키우던 로렐라이는 어린 로렐라이가 회를 거듭하며 어째선지 미래 없는 관계와 자아실현에 목을 매며 자신의 가정에 대한 미래는 그리지 않은 채 성장한 시즌 7에 이르러서는 로렐라이가 로렐라이처럼 사람들에게 인기 있으나 불안정한 관계를 맺고 불안정한 것을 쫓으며 살게 되었다는 것을 알까? 약 10년 뒤 번외편으로 이어진 한 해의 스케치는 픽션 속 캐릭터가 살아가는 방식의 표본이 되며 뜬금없이 등장하는 뮤지컬로 억지스러운 현재 감각을 가미하는 안쓰러운 노력을 보이기도 했지만, 로렐라이는 결국 자신의 곁에서 식사와 커피를 책임지던 루크와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오랜 시청자를 만족시켰고, 한밤중 자기가 내심 바랐다는 소규모 결혼식을 하며 스스로를 만족시켰다. 장장 8개의 시즌 마지막에 이르러 대망의 피날레 몇 초를 남겨두고 로렐라이가 로렐라이에게 말한다. 엄마, 나 임신했어.

  자, 이제 소리가 들리면 너는 눈을 뜰 거야. 기계적인 알람 소리인데, 너는 어디선가 이 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었던 소리니까. 익숙한 소리에 왜인지 모를 안도감과 그리움과 반가움이 느껴질 거야. 소리가 들린다.

  “인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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