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고는 일본 만화가 망가F타로 작품 ‘죄와 벌’의 줄거리가 실려 있으며, 나체, 피, 구토, 설사 등 충격적인 이미지를 대거 포함하고 있기에 임산부, 노약자, 어린이, 심약자, 미성년자의 열람을 금하며, 본고에 실린 이미지로 인해 초래될 심리적 결과에 대해 책임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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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아주 가까이 있지만 동화될 수 없는 곳에서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우리를 욕망과 불안과 유혹에 빠지게 한다.
아브젝트는 갑자기 배타적이 되어 나를 의미가 붕괴되는 장소로 가게 한다.
전에는 나의 불투명하고 잊혀졌던 삶 속에 친근하게 존재했던 그 이질성은, 이제는 나와 분리되어서 혐오스러워지고 나를 집요하게 공격한다.
아브젝시옹은 도덕을 알면서도 그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어서 훨씬 더 음흉하고 우회적이며 석연찮은 어떤 것이다. 즉 자신을 숨긴 테러 행위, 미소짓는 증오, 껴안는 대신에 품는 육체에 대한 욕망, 당신을 팔아치우는 채무자, 비수로 나를 찌르는 친구.
아브젝트와 아브젝시옹은 바로 그런 내 존재의 축, 문화의 도화선, 그곳에 존재한다.*
(‘죄와 벌’의 표지. 만화의 역한 그림체와 달리 대중적인 그림체로 그려져 독자를 유도하는 함정으로 작용한다.)
줄거리
주인공 에비조(원작에서의 라스꼴리니꼬쁘에 해당)는 건물이 비는 시간을 고려하여 전당포의 노파를 살해하려 한다. 그러나 오히려 노파에게 강간당하고 만다. 극심한 충격을 받지만 이내 꿈이었음을 자각하고 현실에서 노파의 집 앞을 찾아가지만 공포에 떨며 살인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좌절하며 자살하기 위해 산으로 떠난다. 산에서 만난 한 노파를 얼떨결에 복상사시킨 에비조는 전당포 노파 또한 복상사로 살해할 계획을 갖고 전당포로 돌아온다. 한편 전당포 노파에게 강간당한 꿈은 드림맨에 의해 꾸어진 것인데, 그 꿈은 아래층에 살던 마오(원작에서의 소냐에 해당)에게도 우연히 공유된다. 마오는 제정러시아 왕국의 남존여비를 타파하기 위해 정치가를 꿈꾸는 여성으로, 모자란 학비를 충당하기 위해 살림살이를 팔던 나머지 전라로 살아간다. 학비를 대주겠다는 구실로 체육 창고에서 마오를 강간하던 선생은 복상사로 사망해버려 마오는 졸지에 도망자 신세가 된다. 이후 마오는 술주정꾼 마르멜라도프와 그의 딸을 거리에서 만난다. 마르멜라도프와 대화하던 마오는 그가 자신과 같은 남존여비 혁파의 꿈을 가졌었다는 대화를 나누면서 이 세계의 법칙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러시아의 남존여비는 그 어떤 법적 근거도, 발생 연유도 발견할 수 없으며 이를 극복하려는 사유는 금세 망각된다. 마오의 추측에 의하면 남존여비 제도는 왕이 만들었으며, 그래서 국민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법칙이다. 제정러시아왕국이란 명칭의 세계에서 그 누구도 왕에 대한 궁금증을 갖지 못하며 어떤 모순도 감각하지 못하는 이유는 왕이 된 자가 세계의 사상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왕이 되는 방법은 드림맨이 꿈을 통해 심은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원래 살해하려던 대상을 현실에서 살해하는 것이다. 왕이 되어 남존여비 사상을 혁파하려는 마오는 자신과 같은 꿈을 꾼 대상 에비조보다 서둘러 전당포 노파를 살해해야 함을 깨닫고 전당포 건물로 달려간다. 에비조와 겨룸 아닌 겨룸을 하려는 동안 방해가 되는 것은 노파의 동생 유카리인데, 유카리는 세계관 안에서 남자만이 가질 수 있는 직업 X를 선망하다 단념한 캐릭터이다. 노파의 살해를 둘러싸고 이내 만화는 끝으로 치닫는다.
본문
현실이 감각되는 충격의 순간은 기존의 현실이 한갓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때에 찾아온다. 현실은 일종의 시효를 갖는 셈이다. 현실은 그것의 가상성에 대한 자각이 없는 상황에서 계속된다. 이때 현실은 꿈과 상통한다. 꿈을 꾸는 동안 주체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자각을 하지 못한다. 또한 꿈이 항상 시작 모를 시점에서 상연되듯이 주체의 삶 또한 자신이 명확히 자각하지 못하는 현실의 ‘어떤’ 시점부터 전개되어 왔다. 현실의 비일관성과 마찬가지로 꿈 또한 비일관적이며, 작금의 현실도 꿈도 주체를 삼인칭으로 밀어낸다. 꿈의 상연이 통제 불가능하듯이 스스로의 삶을 통제 가능한 인간도 없다. 대상에 대해 말하는 것이 언제나 은유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면 그것은 무의 간극을 두고 벌어지는 반복이며 환유의 형식이 가리키는 바는 정지와 무가 샴이라는 밀고이다. 꿈과 언어 모두가 은유와 환유의 공정이라면 꿈과 현실의 차이를 보증할 것은 무엇일까. 시야일까? ‘나를 보는 나’가 가능한 꿈과 달리 현실은 언제나 나를 특정한 시야에 못박아둔다. 허나 그나마의 차이도 매체를 통해 소멸한다. 렌즈를 통해 상연되는 세계를 보고 있는 나는 상연되는 내부의 대상에 동일시함으로써 꿈의 시야를 획득한다. 이성일까? 그렇더라도 이성이 붕괴되는 지점에 존재하는 현실을 설명할 수가 없다. 현실이 그 순간에 내리꽂혔기 때문에 이성은 붕괴된다. (그도 아니라면 꿈은 초자아의, 현실은 자아의 소관이라는 답변을 그럭저럭 납득해야 하는 걸까.)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아브젝시옹’은 우리 세계를 탐독하기 위한 요긴한 개념중 하나이다. 아브젝시옹은 주체가 혐오스러워하는 것을 배격하려는 현상. 아브젝트는 그렇게 해서 배격된 것을 뜻한다.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해선 아브젝트를 만들어내는 일이 필수적이다. 그렇게 혐오스러운 것, 그러므로 배제할 것들을 구성하고 금기시함으로써 공동체의 특수한 지평을 만들어내고 고유성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들은 그렇다고 해서 공동체의 경계선 바깥에 안주하지 않고 언제든 그 안으로 침투하거나 우회하며 주체를 유혹한다. 사회 안에서 옳고 그름은 공동체 내부의 규약, 아울러 다른 공동체와의 관계에 대한 실정적 조건들과 무관하지 않다. 다만 거기서의 옮음은 언제나 그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믿음과 추론 사이를 유영하며 애매한 결론을 도출하곤 이내 확증으로 옹립한다. 옮음의 지반이 그토록 부실하기에 아브젝트는 호시탐탐 문화를 공격한다. 따라서 무엇이 옳으냐고 묻기 전에 무엇이 그른 것인지 찾는 작업이 경계를 사유할 유용한 참조점이다. 그렇기에 범죄는 대표적인 은유일 것이다. 다만 아브젝시옹이 법과 처벌의 상징적 수준이 아닌 그 법과 상징계를 교란하고 희롱하는 초자아의 차원에 존재하는 이상 다른 방식으로 배제물을 수색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에 관해 일본 만화로 개작된 ‘죄와 벌’이 강력한 힌트를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꿈과 아브젝트는 모두 초자아와 중요한 관련을 맺는다. 망가F타로는 ‘죄와 벌’에서 꿈의 갖은 요소들을 형식화하며 아브젝트와 결합시킨다.
#덜 썩은 시체
노인의 신체는 성욕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또는 노인의 성욕은 어떻게 받아들여져야 할까. 노인은 노인끼리만 욕정해야 할까. 사회가 노인의 몸을 식별하고 수용하는 방법은 두 가지로 나뉜다. 돌봐주어야 하는 기능부전-객체로서의 몸뚱이와, 육체를 완전히 제거한 정서로서의 품이 그것이다. 몸뚱이로 다루는 방법. 그것은 적절히 고장 난 육체를 돌보는 것이다. 질병 또는 외상으로 망가진 몸뚱이여야만 사물화한 노인의 나체는 가감 없이 드러날 수 있다. 그저 그때만이 그들의 몸이 드러나도록 허용된 순간이다. 우리는 그들의 기저귀를 갈고 항문을 닦아주거나, 욕창을 케어하거나, 젖은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거나 혈압/맥박/체온을 체크하면서 그들의 몸을 ‘관리할’ 수 있다. 병에 걸린 상황을 제외하고는 노인의 신체는 함부로 드러나선 안 되는 것이다. 건강한 노인의 신체는 단정하고 조신하길 강요받으며 미라처럼 옷으로 동여매 진다. 옷으로 차마 감싸지 못하는 노인의 얼굴은 다른 방식으로 처리된다. 우리는 노인의 이목구비를 따지면서 매력을 논하지 않는다. 이목구비는 인상을 논하기 위해서만 다루어진다. 주름 역시 그런 맥락에서 오직 얼굴에서만 가치를 갖는다. 세월의 누적과 고생의 흔적이라는 추상으로써만 주름은 인정을 받는다. 노인의 신체는 언제나 이데올로기적이어서 전적으로 배제할 수 없는 이상 우회적으로 수용된다. 미성년자에 대한 성적 욕망을 아이돌을 통해 순화하고 문화 안으로 받아들이듯 노인의 혐오스러운 주름을 주름 이상의 무엇으로 의미화한 뒤 받아들인다.
(에비조를 강간하기 위해 탈의한 전당포 노파)
(에비조를 애무하는 전당포 노파)
반대로 노인의 품은 육체의 물성이 완벽하게 제거되어야 문화 안에서 수용될 수 있다. 노인과의 포옹은 성적인 뉘앙스가 섞인 ‘안기’가 될 수 없다. 노인의 몸은 극한까지 추상화/정념화해 ‘따듯한’ ‘그리움’ ‘포근함’ 따위만의 감정으로 전환되고 전달되어야 한다. 즉 완벽하게 몸뚱이거나, 완벽하게 정서여야 한다. 노인의 신체엔 중간이 없다. 달리 말해 중간의 모호함이 일렁이며 주는 것, 욕망이 깃들 자리가 없다. 노인의 몸은 성욕이 고갈되어있어야 한다. 우린 그렇지 않은 노인의 육체를 언제든 음험하고 더러운 것으로 매도할 준비가 되어 있다. 늙은 남자가 젊은 여자를 욕망하는 것은 노망이다. 늙은 여자가 젊은 남자를 욕망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주책이다. 노인은 오직 노인끼리만 차라리 헬스에 가까운 상보적 성관계를 해야 한다. 너무 자주 하는 것도 남사스러운 일이다. 또한 그들의 성생활은 언제나 점잖고 품위가 있어야 한다. 성기능이 쇠퇴해 질액이 잘 분비되지 않는 여성을 배려해 이전보다 긴 시간을 애무하는 처방은 마찬가지로 발기가 곤란한 남성에게도 적용된다. 그리고 이때 애무에 내재된 ‘파트너에 대한 배려’로서의 애무는 다음을 내포한다. “노인의 성관계는 거칠고 음탕하고 충동적이어서는 안 되고 연장된 애무만큼 신중해야 한다.” 기술이 신체를 보조하다 못해 점령하는 세계에서 노인의 성생활을 돕는 상품들은 지하철 화장실에서나 암암리에 돌아다닌다.
(에비조를 강제로 발기시키려는 전당포 노파)
그렇기에 ‘죄와 벌’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노인의 신체는 우리에게 충격을 안겨준다. 기꺼이 젊은 남자를 욕망하는 전당포 노파와 산중 노인의 신체는 끔찍하고 소름 끼친다. 그리고 망가F타로는 문명이 노인의 신체에 이식한 편견을 고스란히 제시하기 위해 더욱 두드러지고 왜곡된 방식으로 신체를 그려낸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성서에서 나타나는 최고의 아브젝트는 시체라 이른다.
“시체는 생명 없는 부패한 육체, 완전히 배설물로 화한 생물과 무기물의 경계 사이에서 흔들리는 요소이다. 그것은 또한 중간 과정이므로 생명이 상징계와 일체화되어 있는 인간성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분신으로서, 가장 근본적인 오염물이다. 영혼 없는 육체, 비육체, 흔들리는 물질,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같은 영역에서는 배제되어야 할 존재이다.…시체가 쓰레기나 과정 중의 물질, 즉 혼합물로 나타나지 않을 때에는 상징성이나 영혼, 신성한 법칙의 이면으로 드러나는 점이다.”**
공포의 권력에서 묘사된 성서 속의 시체는 물론 번제 속의 시체가 갖는 두 조류의 의미 과정, 번제의 상징적 기능, 혐오의 체계로서의 성서, 살해의 욕망을 진정시키려는 시도 등의 독서이다. 그러나 시체가 쓰레기 아니면 영혼으로 나타나듯 노인의 육체 또한 몸뚱이 아니면 품으로만 나타나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아울러 와상 노인의 생명 없는 부패한 (상징적)육체, 욕창에서 보이는 덜 썩은 살이자 잠재적 시체로서 그가 보여주는 경계선, 삶과 죽음의 중간과정 등의 특징은 시체와 일치한다. 노인은 걷는 시체이다. 걸핏하면 구울이라 폄하되고 집구석에나 있으라(이불 속에 ‘파묻혀’ 있으라) 위협받는다. 욕망 없는 신체는 죽은 신체이다. 사회가 노인의 성을 앗아간다면 시체로 간주하고 있을 따름이다. 망가F타로는 그러한 경계 너머의 혐오를 소환하여 시각적으로 큰 충격을 안긴다. 이 과정을 지켜보는 만화의 독자들은 어느 틈엔가 에비조에 동화되어 극도의 혐오감과 괴로움에 사무친다. 그러나 함부로 만화를 내팽개칠 수도 없다. 그것은 내러티브의 마력이기도 하지만, 독자를 의미와 주체성의 폭발점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내면에서 무언가 파괴되는 것을 느껴가면서, 충격을 견뎌가면서, 스스로를 다독이고 참아가면서 만화를 읽어간다.
(에비조에게 삽입을 요구하는 산중 노파, 턱선은 남근을 상징하듯 그려졌다.)
(산중 노파와 성교중인 에비조. 쾌락으로써의 성교라는 공식을 파괴한다. 아울러 독자의 거울-표정?)
#비현실성으로서의 반복, 그리고 누빔점
차이와 반복이 현실을 생산하는 원리임을 천명한 들뢰즈와 대조적으로, 만화에서의 반복은 현실의 이질성을 증거하려는 목적으로 사용된다. 들뢰즈에게 있어 반복은 차이를 드러내는 기제이다. 그러나 만화에서 반복은 다시 한번 뒤집힌다. 만화에서 반복은 끊임없이 동일한 시그널을 보내고 있는 듯하다. 만화에서 다양한 캐릭터의 시점에서 전개되던 내러티브들을 반복적인 패턴으로 뭉개버리는 일은 차이와 변주를 나타내는 메시지라기보다는 차이라는 것의 허구 그 자체를 드러내는 메시지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무의미를 구조화한다. 현실의 비일관성, 우연성은 대개 반복을 통해 의미를 각인하고 필연을 역설하면서 주체에게 모종의 신념을 부여하기 일쑤이다. 반면 만화 속의 반복은 차이와 의미를 붕괴시키는 반복으로 나타난다. 반복은 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가? 그래서 왜 차이들이 오히려 반복 속으로 수렴되고 중화되는가? 개별적인 사건들이 동일한 패턴으로 파괴되는 형식은 하나의 중심성을 전제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그 중심성은 친절하게도 만화 안에서 ‘왕’으로 표현된다.
(팔다리가 잘리는 에비조와 마오)
(꿈 속에서 트럭에 치인 에비조, 마오를 잡으려고 계단을 내려오다 겹쳐지고 트럭에 치이는 마오의 주변인물들,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반복상연하는 유카리와 드림맨들)
(만화가에겐 터부에 가까운 컷의 재활용을 밥 먹듯이 반복한다.)
왕은 제정러시아 왕국의 근저에 깔린 이념 ‘남존여비’를 지탱하는 신체-법칙이다. 이 부권적 권위(만화 안에서 미쳐버려 있는 왕 스비드리가일로프로 은유되는 무근거한 법칙과 권위)는 세계관의 압정이다.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담론들을 상기시킨다. 이데올로기는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이념이 아니며 우리의 수행성속에 이미 기입되어 있는, 수행성의 추동 형식이라는 담론 말이다. 제정러시아왕국을 살면서도 왕의 존재를 자각하지 못했던 마르멜라도프는 자본주의가 부르주아를 계급 아닌 속성으로 용해시키며 정치적 심급에서의 철저한 은닉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감춘다는 자각을 하지 못한 채 대의민주제를 희생 제의로 봉헌하는 우리들의 초상이 아닌가? 남존여비 사상에 대한 부조리를 사유하지 못한 채 여자가 가질 수 있는 직업은 오직 매춘부뿐인 미친 세계는 세계를 구성하는 근저의 법칙을 회의하지 못하고 그 법칙성 아래서만 삶을 희구하려는 동시대인의 소묘가 아닌가. 역설적으로 마르멜라도프와 마오는 그런 점에서 차라리 동시대적인 인물이다. 아감벤의 주장대로 동시대인이 자신의 시대와 완벽히 어울리지 않으며 자기 시대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는 자, 그래서 비시대적이고 비현실적인 자라면 말이다. 자기전개중인 현재를 파괴함으로써 현실을 드러낼 수 있는 최소조건은 응당 현실의 비현실성을 자각할 수 있는 자일 것이다. 그러한 타파의 가능성은 현실의 격자가 추상과 깊이 상관한다는 사실과 짝을 이룬다. 현재를 구성하는 법칙의 전개가 꿈의 구조와 전적으로 상동이라는 메시지는 만화 곳곳에 숨겨져 있다.
(노파의 변하는 몸, 에비조의 시점에선 노파의 몸은 주름투성이지만 3인칭의 꿈의 시야에선 변용된다.)
(몇 발자국만에 뒤집하는 주변 풍경, 중세적 유럽거리와 현대적 일본거리가 순식간에 오간다.)
(난데없이 젖을 빠는 마르멜라도프의 두 아이. 마오는 코믹만화 클리셰처럼 놀라긴커녕 아무 언급도 없다. 심지어 마오의 다리는 세 개. 이 모든 착란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려진다.)
#그리고 그리고
전당포 노파를 죽이려던 에비조의 도끼는 산중 노인을 복상사시키는 과정에서 남근으로 대치되었다. 그러나 여성기가 ‘도끼자국’이라는 속어로 불리는 것에 미루어보면, 공격성에 있어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아브젝시옹이 도덕을 알면서도 그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라면 에비조는 아브젝트이다. 그렇기에 한편으론 중대한 전환이기도 하다. 도끼의 폭력이 직접적이고 가시적이었다면 남근의 폭력은 쾌락을 빌미로 하는 교묘한 위장이고 은닉된 폭력이라 쉽게 감지하기 어려운 형태로 전환되었다. 치료를 가장해 노파를 살해하려는 한 꺼풀의 요망함은 아브젝트하다. 트로이 목마가 항복을 가장한 살해병인 것처럼 에비조의 남근은 치료를 가장한 살해의 욕망이다. 전당포 노파는 도끼는 피했을지언정 남근을 피하지는 못한다. 상사 이완을 죽이려던 마르멜라도프가 직접적 폭력을 저지르려 하자 토와 똥을 연신 쏟아내며 죽을 때 그는 모종의 법칙에 의해 검열을 당했다. 허나 에비조는 그러한 직접성을 우회함으로써 검열을 통과하고 성관계에 이른다. 그렇다면 에비조가 결국 노파를 살해하고 왕이 되었을까?
(구토와 설사를 반복하는 이완)
(액자에 걸려있는 국왕 마오)
액자에 걸려있는 마오의 초상으로 보아 노파를 살해하고 국왕이 되는 것에 성공한 것은 마오처럼 보인다. 이는 내용적인 측면에서 남존여비에 대한 투쟁에서의 여성적 승리를 보장하는 것 같기도 하고, 동시대인들을 위한 정치적 요강처럼도 보이며, 현실을 지양하는 이들을 위해 미리 마련된 축전처럼도 보인다. 여성이 단지 여성성에 국한되지 않고 약자를 표상하는 낱말이라면 노파의 여동생 유카리가 변혁된 세계에서 획득한 직업 ‘편집자’는 의미심장하다. 편집자는 페이지를 할당하는 공간의 지배와, 작가의 마감 기간을 통보하는 시간적 지배를 갖고 있다.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는 편집자의 지배적 권위는 만화 내에서 남성에게만 허용되어 있었고, 마침내 만화 말기에서 그러한 금지는 전복된다.
그러나 마오가 에비조와 꿈을 공유할 수 있던 이유는 둘의 뇌 구조가 놀랄 정도로 유사하다는 만화 내의 서술이 있다. 에비조가 노파를 살해하려는 동기가 전당포 주인이라는 직업이 갖는 권위에 대한 것이었다면 노파의 살해자의 위치는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원작은 초인사상에 입각한 살인이지만, 만화 내에서 노파의 살해 동기는 밝혀져 있지 않다.) 사물의 가치를 결정하고(가격을 ‘명명’하고), 장물을 분류하고, 납기일을 일방적으로 설정하고, 조건을 스스럼없이 제시하는 지배의 권위는 익숙한 권위 아닌가. 가늠하고, 후려치고, 볼모로 잡는 전당포의 타락한 권위는 화폐의 권위이다. 그렇다면 얼굴 없는 지배로서의 알레고리로 마오의 초상을 읽어 왕은 에비조라고 주장할 가능성도 부상한다. 또한 산중 노파와의 성관계 컷이 전당포 노파와의 성관계 컷에 복사되어 있다. 산중 노파처럼 전당포 노파의 복상사도 유력해진다. 또한 마오의 편을 들자면 마오로 인해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진 유카리가 트럭을 부르는 만화 내의 반복을 추동하면서 원자력을 실은 트럭이 들이닥치고 폭발해 스비드리가일로프를 살해했을 가능성이 있다.
(원자력이든 트럭, 스비드리가일로프, 펑)
‘죄와 벌’은 여러 의미로 방사되는 만화를 제작함으로써 일말의 진리를 계시한다. 본고가 텍스트의 방향성을 위해 잘라낸 곁가지들은 만화 안에서만 음미 될 수 있는 풍부함이고, 가지치기에 대해선 졸고로서의 멋쩍음마저 느껴진다. 또한 만화 내의 형식적 위반을 차용해 만화 내의 발화들을 위반하여 더욱 흥미로운 전개를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이제 꿈과 아브젝트의 결합이 어렴풋이 이해되었을까? 망가F타로가 하려는 말은 도덕법칙의 임의성, 나아가 도덕을 뒷받침하는 현실의 경계 자체의 임의성이 아닐까. 꿈의 논리는 현실의 논리를 폭로할 힌트처럼 이용된다. ‘죄와 벌’은 아브젝트와 더불어 꿈의 여러 특징들을 수사적으로 동원해 나르시즘적 현실을 강타한다. 실로 얼얼한 아픔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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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트예프스키의 원작과 유비 되어가면서 초자아의 탐독이 이루어져 더욱 확장된 견해가 표명되었다면 좋았을 거란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만화 내부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허구 자체를 이용해서 더욱 재치 있는 해석을 전개할 여지도 넘치게 보인다. 무엇보다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재독서 된다면 무척이나 흥미롭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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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 크리스테바, 공포의 권력, 서민원 옮김, 동문선, 2001, 각각 21p, 22p, 2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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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책, 각각 166p, 16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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