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문학의 푼크툼
문학이란 무엇인가? 그 질문은 곧 문학의 역사를 되묻는 질문이기도 하고, 대문호들이나 빼어난 문학자들의 존재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내게 문학은 글로 쓰는 찌르는 행위이다. 찔리면 아프다. 현실에서 찔리면 피를 흘리지만, 문학의 상상계에서 찔리면 눈물을, 좀 더 깊은 층위에서 찔리면 검은 담즙을 흘린다. 문학 용어를 빌리면 멜랑꼴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좋은 문학이라는 말을 할 때, 역설적으로 좋다/싫다의 이항으로 사유되지 않는다. 단지 찔러 읽는 이로 하여금 진실로 욕망하게 만든다. 롤랑 바르트의 말을 빌리자면, 푼크툼이다. 말이나 글로 그 느낌을 말하고 싶고, 더 나아가 찌른 감정을 현실에서 구현하게 만든다. 대문호들의 글이 그렇고, 그에 못 미치더라도 현시대의 명품들을 읽고 나면 항상 거리로 향한다. 그것이 내게 명품 문학론이라고 하고 싶다.
팔레스타인 문학은 어떠한가? 팔레스타인 문학의 의미는 피를 나누는 데 있다. 지구상 마지막 식민 지배의 땅의 현실을 먹는 팔레스타인 문학은 잔뜩 피를 머금고 있다. 팔레스타인 문인들은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시, 소설, 산문, 희곡 등-을 통해 읽는 이에게 창을 던진다. 그 창에는 76년이라는 강탈의 역사와 그보다도 더 된 시온주의의 학살과 천대가 만들어낸 팔레스타인 민중들이 흘린 피를 반영해야 한다. 팔레스타인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차분한 독서가 아니다. 피가 묻은 창으로 독자의 몸을 찔러올 때, 이름 모를 식민지 속 타자의 피를 내 몸속에 새기는 종교적 제의이다. 지구상 마지막 식민지에 사는 이들의 슬픔을 느낌의 층위에서 공감하는 경험을 통해 일과 다른 감각을 체험한다. 감각은 애도를 야기하지만, 애도가 이어진 후 필연적으로 거리로 향해야 할 것이다. 한 마디로, 팔레스타인 문학은 아래로는 죽어간 이들의 무덤에 꽃을 놓을 줄도 알아야 하지만, 더 나아가 위로는 억압의 주체인 시온주의 국가 이스라엘과 이들의 뒷배인 제국주의 국가에게 향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팔레스타인 문학을 논할 때, 토대가 되는 기본적인 문학론이 바로 ‘저항을 위한 문학’이라고 하고 싶다. 모든 팔레스타인 문학은 저항을 통한 궁극적인 팔레스타인 해방을 논해야 하며, 더 나아가 그것은 문학의 궁극적인 목적인 인류 해방에 대한 헌사와도 맞닿아있다. 즉, 극단적으로 말하면 저항을 논하지 않는 팔레스타인 문학은 팔레스타인 문학이 아니다. 어떤 방식이든, 어떤 장르나 문법으로든 요르단강에서 지중해까지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논해야 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팔레스타인 문학이 저항의 도구로 활용될 수 있음을 전제한다. 특히 시에 집중해 팔레스타인 해방에 대한 헌사로서 어떤 방식으로 저항을 말하는지 주목한다.
점령지에서 시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폐허에서, 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곳에서 시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시에 앞서 폐허에서의 문학은 본래 무용한 것이다. 김현 평론가의 말을 빌리자면 “문학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게 만드는 것이다. 문학은 배고픈 거지를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문학은 그 배고픈 거지가 있다는 것을 추문으로 만들고, 그래서 인간을 억누르는 억압의 정체를 뚜렷하게 보여 준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기만을 날카롭게 고발한다.”[1]라고 말한다. 김현 평론가의 문학무용론을 변증법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문학은 기본적으로 무용하지만, 결정적 상황에서 그 찬란한 언론이나 프로파간다보다 훨씬 유용할 수 있다. 이를 토대로 팔레스타인 문학, 그중 주류인 팔레스타인 시 문학을 보자. 갓산 카타파니는 점령지 점령문학은 산문보다는 인쇄에 덜 의존하는 시가 주류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니 ‘국토를 잃은 국민들의 문제를 다룬 팔레스타인 문학’ 중 가장 대표적인 팔레스타인 문학은 시 문학인 만큼 책임도 막중하다. 나는 팔레스타인 시 문학을 인위적으로 세 가지 갈래로 구분했다. 이런 인위적 구분이 결코 좋은 것은 아니지만, 시론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으로 저항을 발화하기’에 있어서 저마다 강조하는 길이 다르다.
저항 문학: 인티파다 시
모두 광풍으로 쓸어버려라
민족이여, 그대 드높은 외침에 깃발을 달아라
돌과 고무새총
강철같은 의지로
– 알 아쓰아드, <광풍>
갓산 카타파니의 점령지 문학론이 쓰인 시기는 인티파다 이전인 1970년대이지만, 그 이후 팔레스타인 시 문학 중 가장 점령지 문학에 충실한 시는 1987년 12월에 시작된 인티파다를 반영한 인티파다 시라고 할 수 있다. 1987년 12월 시작된 제1차 인티파다는 그동안 억압받은 팔레스타인 민중의 위대한 반란이자, 정의로운 봉기이다. 서구에서 테러리즘이라고 부르는 소수의 게릴라 전술과 달리, 광범위한 팔레스타인 민중이 스스로 투사가 되어 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그들은 강탈 국가 이스라엘에 항의해 정당한 권리를 얻기 위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그 찬란한 울분을 시로 승화시킨 것이 바로 인티파다 시이다. 송경숙은 “인티파다 문학은 기본적으로 민족 문학, 저항 문학, 민중 문학, 저항 문학, 피지배 문학으로 규정될 수 있는 지금까지의 팔레스타인 문학의 연장 선상에 있다.”[2]라고 인티파다 문학의 뿌리를 말한다. 즉, 인티파다라는 역사적 대사건을 반영한 인티파다 시는 독자의 감정에 호소해 메세지를 던진다. 인티파다 문학의 특수성 중 하나는 작가가 점령지 하의 팔레스타인 시인들이 지었다는 것이다. 갓산 카타파니를 비롯한 이름을 남긴 훌륭한 팔레스타인 문인들이 이스라엘의 암살 위협 등의 이유로 해외에서 활동한 것과 달리, 인티파다 문학은 점령지 속 시인들이 생생한 외침을 시화한 것이다. 그래서 현실의 간절하면서도 강렬한 열기를 담아냈고, 프로파간다와 비슷한 양상의 전투적인 ‘저항’ 문학이다. 인티파다 당시 팔레스타인 작가연맹이 “문학은 인티파다에 봉사해야 한다. 모든 문학 작품은 인티파다-저항의 도구다”[3]라고 선언한 것에서 볼 수 있듯, 인티파다 시는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라던 조지 오엘의 유명 명언을 떠올릴 수 있다. 그래서 주된 시의 주제는 ‘인티파다를 통한 민족국가 건립의 열망’, ‘인티파다 희생자들 추모’ , ‘돌을 들고 저항하는 민중들의 풍경’ , ‘이스라엘 감옥 경험’ 등이다.
즉, 인티파다의 시의 주제적 측면에서는 희생자에 애도와 해방에 대한 염원이라고 할 수 있다. 주디스 버틀러의 애도 이론에 따르면 애도란 상실한 사람의 흔적이 남는 것이라고 한다. 인티파다 시는 인티파다 당시 피 흘린 민중들을 비롯해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투쟁에 헌사한 모든 투사들과 억압당한 민중들을 애도하며, 해방을 향한 선두에 선다.
아쉽게도 인티파다 시중 한국어로 번역된 시는 극히 드물다. 그리고 문학 번역에 있어서, 외국어로 번역된 시는 있을 수 없다는 말처럼, 인티파다 시를 번역해서 온전히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다. 송경숙 교수의 말을 빌리면 다음과 같다. “아랍어의 가장 큰 언어적 특징인 어휘의 풍요로움과 장모음, 이중모음에서 기인하는 음악성과 전통적 노래시의 다양한 율격과 각운의 사용에 힘입어 인티파다 시들은 시가 될 뿐 아니라, 쉽게 기억되고 쉽게 기억되는 저항의 강력한 무기가 되고 있다.”[4] 한 마디로, 인티파다 시는 현대시의 미덕이라고 할 수 있는 바슐라르의 역동적 상상력이나, 가장 기본적인 명제인 ‘낯설게 하기’보다 강렬한 감정이 과잉된 언어를 구사한다. 이런 강렬한 언어적 특징으로 인해 프로파간다와 구별되지 않는다고 느낄 수 있으나, 인티파다 문학의 기본적인 명제라고 할 수 있는 ‘인티파다에 봉사하기’에는 충실하게 수행한다. 점령지 문학에게 예술성이 떨어진다고 비평하는 것이야 말로 우스운 댄디즘일 것이다.
인티파다 시는 팔레스타인 문학이 해방에 봉사하는 방식을 가장 극렬히 보여준 저항의 도구로서 문학이다. 훗날 걸프전이 터지며 아랍 시의 관심사가 걸프전 및 중동 전역으로 확산하면서 점차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한편으로 팔레스타인 민중 문학에 모든 시에는 인티파다 시의 흔적을 안고 간다고 볼 수 있다.
점령지에서 서정시, 야만이 아닌 방식으로
한편 팔레스타인 시 중 인티파다 시와 다른 방식으로, 팔레스타인 문학으로 존재하는 시들이 있다. 한국에서도, 유럽에서도 마찬가지로 참여문학-순수문학 논쟁처럼, 팔레스타인 문학에서도 저항에 헌사하는 전투적 참여시 외에도 서정성으로 억압받는 민중의 감정을 발화하는 방법이 있다. 팔레스타인에서 참여시가 현실적 참여를, 서정시가 단순히 시인의 감정을 담아낸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감정의 층위에서 저항을 호소한다. 자카리아 무하마드 시인은 인티파다 시와는 다른 방식으로, 울분을 통한 저항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새벽까지 말이 서성이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는 한국어로 번역된 유일한 자카리아 무함마드 시인의 시선집이다. 시집을 번역한 오수연 소설가에 따르면, 자카리아 무함마드 시인과 직접 소통하며, 그의 주요 작품을 묶은 시집이라고 한다. 태생이 영역본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이중번역이라는 한계가 있고, 무엇보다 아랍어 특유의 운율을 한국어로 살리는데 한계가 있어 아쉽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함마드 시인의 시선집은 보편적인 감정의 층위에서 깊게 다가온다. 이유는 언어에 있다. 무함마드 시인의 시는 시인들의 에스페란토인 사랑과 사랑을 상실한 슬픔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시라는 역사적 맥락을 알아야 깊게 다가오는 인티파다 시나 전투적 저항시와 달리 누구나 보편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이야기라, 다른 방식으로 읽는 이로 저항의 공동체에 초대한다.
탁자 위 열 개의 촛불을 단숨에 불어 끌 수도 있겠지만
하나씩 꺼나갔다
내 입, 걸신들린 도마뱀의 입이 반딧불이를 한 마리씩 삼키기를.
또, 밤의 대상이 연기와 눈물의 길을 건너가기를
– 자카리아 무함마드, <촛불> 전문
촛불이 정확히 어떤 것을 상징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스스로를 발화하며 희미하게 타오르는 이미지에서, 팔레스타인 민중의 생명성을 상징한다고 느껴진다. 이 영혼은 3연에서 말하는 반딧불이와도 겹친다. 이스라엘의 인위적인 스포트라이트와 달리, 은은하게 타오르는 촛불과, 희미하게 빛을 내는 반딧불이야말로 팔레스타인 민중을 상징하는 존재이다. 도마뱀은 팔레스타인 민중을 먹어치우는 거대한 존재이지만, 시인은 저항하기보다 한 마리씩 삼키기를 원한다. 이 점에서 전투적인 참여시보다 슬픔을 극대화하는 서정시에 가까운 방식으로 팔레스타인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감기로 코 푼 휴지를 모아서 비닐봉지에 넣어
휴지통에 버린다
내일 다른 봉지를 버릴 거다.
모레에도
그러므로, 코 푼 휴지 다음에는
눈물에 젖은 흰 휴지
그다음에는 시들어가는 흰 카네이션 무더기
맨 나중에는, 봄 우박이 아몬드 꽃가지를 쓸어버릴 거다
– 자카리아 무함마드, <우박> 전문
무함마드 시인의 상상력이 담긴 시로, 슬픔의 극대화를 통한 멜랑꼴리를 느낄 수 있다. 한국의 초기 현대시. 즉 일제 식민 통치 아래 써졌던 시들에도 비슷한 정서가 느껴진다. 그것이 서정시이던, 저항시이든 간에 슬픔의 극대화를 통해 한의 정서를 강조하는 무함마드의 시는 한국 독자들에게 슬픔의 공동체로 초대한다. 이것이 팔레스타인 서정시가 갖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서정시를 쓰는 것은 결코 야만이 아니다.
마흐무드 다르위시: 사랑과 저항을 잇기
낯선 팔레스타인 시인의 시이지만, 어디선가 익숙한 느낌이 든다. 다르위시의 시에서는 한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시인 중 한 명인 진은영 시인의 시와 비슷한 느낌이 든다. 바로 사랑과 하나인 것들로 저항을 든다는 점이다. 진은영 시인의 경우, 특유의 시 스타일로 인해 ‘미래파’라고 불릴 만큼 아방가르드한 시 스타일을 보이면서도, 세월호 참사 이후 시인으로서 목소리를 높이는 참여적 목소리를 내었다. 초기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에서부터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암시되어 있는데, 참사 이후 나온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에서는 세월호 문제를 다루면서도 사랑을 말하기를 이어나간다. 즉, 진은영 시는 사랑을 지키기 위해 저항하고, 시인의 방식으로 시를 쓴다. 다르위시의 시도 마찬가지로, 사랑이 시의 원천이다. 그의 시선집 <팔레스타인에서 온 연인>은 그의 일평생 써온 시들을 선별한 시선집이다. 그의 시 스타일에는 엄청난 격동이 있다. 마치 괴테처럼, 초기에는 낭만주의적 분위기를, 후기 시에는 엄숙한 고전주의적 분위기를 담고 있다. 그러나 시가 내포하는 주제는 한결같다. 그의 모든 시는 ‘사랑으로 저항하기’의 섬세한 변주로, 그 사랑의 대상인 팔레스타인 대지에 대한 숭고하고 애절한 사랑을 헌사한다.
나는 거시서 왔다. 내게는 추억들이 있다.
사람들이 태어나듯 나도 그렇게 태어났다.
내게는 어머니와 창문이 많은 집이 있다.
내게는 형제들과 친구들, 그리고 창문이 차디찬 감옥에 있다.
내게는 바다갈매기들이 낚아채 간 파도가 있다.
내게는 나만의 풍경이 있다. 내게는 자라나는 풀이 있다.
내게는 언어의 가장 먼 곳에서 달 하나와 새들의 양식, 그리고 영원의 올리브나무가 있다.
(…중략….)
나는 모든 말들을 배웠다, 그리고 오직 하나의 어휘를 조립하려고 그 말들을 해체했다.
그것은:조국
– 마흐무드 다르위시, <나는 거기서 왔다> 일부
팔레스타인 고향에 대한 향수가 느껴진다, 이 시가 실린 <더 적은 장미들>이 출간된 시기는 1986년이다. 무함마드 시인이 팔레스타인을 떠나 베이루트에서 생활하다가 쫓겨나 키프로스와 튀니지 등을 떠돌았다. 당시 유랑 생활을 하며 쓰여진 이 시에는 고향에 대한 강렬한 향수가 느껴진다. 그에게는 모든 어휘보다, 조국 팔레스타인이 더 그리운 대상이다.
내 사랑하는 이들의 걸음걸음은 쇠주먹에 깔린 바위의 신음
나는 잠들지 못한 채 빗소리를 듣고 있다
나는 공연히 먼 데를 응시한다
나는 바위 위에…. 바위 밑에 굳건히 남아 있으리라
– 마흐무드 다르위시, <돌아온 이들을 기다리며> 중
너는 그늘과 증오의 시선으로부터 나를 지켜 준다
나는 환희의 노래를 부르리라
눈꺼풀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어도
폭풍이, 나의 나라에 불어닥쳐
포도주와 무지개들은 내게 약속했기에
– 마흐무드 다르위시, <폭풍으로부터의 약속> 중
시인은 사랑을 지킬 것을 시로 언약한다. 사랑의 대상이 연인인지, 아니면 다른 존재인지는 나와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대상은 궁극적으로 팔레스타인 대지이다. 팔레스타인 땅을 상실함으로써 사랑하는 존재들과 단절되었고, 그러니 시인으로서 팔레스타인 땅을 지키기 위해 사투한다. 그런 층위에서 무함마드 시인의 시는 사랑이라는 서정성으로부터 시작해 인티파다의 정치적 참여성을 간직한 명품이다. 팔레스타인 문학으로서 해방에 있어 봉사하면서도, 단지 봉사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예술적 미학도 내포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시는 문학을 대표하는 장르로서 점령지 문학의 책임성을 갖는다. 인티파다 시, 서정시, 그 둘이 모두 담겨있는 다르위시의 시를 통해 팔레스타인 시의 의미를 검토했다. 팔레스타인 시는 사랑으로 저항해야 한다는 명제로 이어진다. 인티파다 시는 저항을, 서정시는 사랑을 강조하나, 다르위시의 시는 이 둘을 예술적으로 통합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학살을 비롯한 중동에서 만행이 거세지는 지금, 다르위시의 시가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으면 한다. 팔레스타인 시가 깊게 찔러와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해방을 위한 사투에 합류하길 바란다.
[1] 김현,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문학과 지성사, 1977
[2] 송경숙, 이스라엘 점령하의 팔레스타인 인티파다 시 연구,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문학연구소, 2003, p7
[3] ibid, 7p
[4] ibid, 8p
참고문헌
1. 자카리아 무하마드, 《우리는 새벽까지 말이 서성이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오수연 옮김, 서울: 강, 2020
2. 갓산 카나파니, 《아랍 민중과 문학》, 임헌영 옮김, 서울: 청사, 1979
3. 마흐무드 다르위시 ,《팔레스타인에서 온 연인 : 마흐무드 다르위시 시선집》, 송경숙 옮김, 서울:아시아, 2007
4. 송경숙, 《갓산 카나파니의 삶과 문학》, 서울: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2005
5. 송경숙, 《팔레스타인 문학의 이해》, 서울: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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