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75년, 스위스의 전시 기획자 하랄트 제만(Harald Szeemann)은 <독신자 기계>라는 이름의 전시를 기획했다. 이 전시는 굵직한 모더니즘 소설들과의 연관을 큰 특징으로 하고 있었는데, 제만은 프랑스 작가 미셸 카루주(Michel Carrouges)가 발표한 『독신자 기계』라는 책을 전시의 중요한 참조점으로 삼았다. 카루주는 마르셸 뒤샹의(Marcel Duchamp)의 그 유명한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1915-1923)(이하 <큰 유리>로 약칭.)에 대단히 매료되었던 작가였고, 이 책에서 뒤샹의 작업에 나타나는 ‘독신자 기계’라는 기계화된 성적 약동의 모델이 실은 그 밖의 많은 문학과 예술 작품들에서 반복되고 있음을 입증하고자 했다.
카루주는 독신자 기계를 “사랑을 죽음의 메커니즘으로 변형시키는 환상의 이미지”로 설명했는데, 그것은 프란츠 카프카, 알프레드 자리, 레이몽 루셀 등 많은 작가들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독신자 기계 전>에서는 그들 소설에 등장하는 독신자 기계를 미술적으로 구현한 작품들을 여럿 포함하고 있었다. 카프카의 「유형지에서」에서 등장하는 처형 기계, 레이몽 루셀의 『로쿠스 솔루스』에 등장하는 사람이빨로 모자이크를 제작하는 달구, 다이아몬드 수조, 알프레드 자리의 『초남성』에 등장하는 만 마일 경주 등은 기계적 결합을 통한 자기성애의 시각적 형상물로 구현되어 전시장의 면면들을 채웠다.*
우리는 이 전시에서 서사와 미술이 만나는 독특한 닫힌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서사는 닫힌 구획으로 이루어진 특정 메커니즘들의 반복운동으로서 출현하고, 영원한 반복을 통해 만들어지는 서사의 죽음의 시간, 비시간성은 일종의 미술적 신체로 제시됐던 것이다. 즉 이야기로부터 시간이라는 뜨거운 피를 뽑아내고, 쪼그라든 몸체를 기하학적이고 초역사적인 인형극으로 건조했을 때, 이 원형적인 신체야말로 미술의 시각에서 가히 탐스러운 공예품이 아닐 수 없었다.
2.
김아영의 <다공성 계곡>(2017)은 근래에 불거진 난민 문제를 ‘이주’라고 하는 인류의 역사 속 반복적인 주제로 설정하면서 그러한 반복성을 사변적 내러티브로 대체한다. 사변 소설을 자처하는 김아영의 서사가 목적하는 바는 객관적 세계에 대한 낯선 거리감을 통한 인지적 소격 효과(cognitive estrangement)이다. <다공성 계곡>이 포함된 일민미술관의 <IMA PICKS> 전시설명은 다음과 같이 작업을 소개하고 있다.
작가가 등용한 ‘사변 소설’ 장르의 형식적 특징은 이처럼 실재세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현실을 상상할 수 있게 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얼마나 기이한가를 깨닫게 만드는 인지적 소격효과(cognitive estrangement)를 가져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김아영은 오늘날 파편화된 미디어 경험에 따라 점점 더 분절되어 가고 있는 존재와 삶의 조건들 속에서 다공성 이야기 구조가 유발하는 상이한 생각들이 서로 공존하고 충돌하여 보다 날카롭고 분명한 현실 인식을 가능케 한다고 말한다.**
<다공성 계곡>은 오늘날 세계 내 존재하는 개인의 배치를 네트워크 속 데이터의 형식에서의 추상성 속에서 다루고, 앞서의 이주를 둘러싼 문제를 데이터 기술에서의 저장, 전송, 수신의 사건들로 재구성한다. 개인의 구성이 전자화된 정보들로 구성되는 것, <다공성 계곡>은 그것이 오늘날의 이주 문제를 새롭게 배치하는 시의적 소재임을 주장한다. 그러나 디지털 혁명 이후의 개인의 존재적 위치, 이것이 진정 <다공성 계곡>에서의 중요한 이야기인가? 이 주제의 진의는 다분히 의심스럽다. 더 큰 주제는 <다공성 계곡>의 ‘사변소설’이라는 아이러니한 자기규정에 있다. 왜 미술은 그토록 타자화 하던 서사를 자신의 몸으로 끌어들이게 되었는가? 또 그것은 왜 ‘사변적’ 내러티브여야만 했는가? 이 글에서 나는 이렇게 대답해보고자 한다. 그것은 위험한 주체를 무성욕적인 것으로 길들이기 위해서다.
김아영은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다공성 계곡>의 주인공 “페트라 제네트릭스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영겁의 세월 동안 사람들의 염원과 정보를 담은 신적인 존재인 페트라는 성별도 없고, 집단의 지성을 대표하는 초월적인 모습을 보인다”*** 페트라에게 성별이 없다는 부연은 어쩐지 새삼스럽다. 이는 김아영이 설정한 사변소설이 갖는 전통적 소설에 대한 자기 의식의 일면으로 보인다. 여기서 성별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삭제된 것이며, 성별을 가진 주체의 자리에는 불가해한 성애적 불안을 사각형들의 기하학적인 회전운동으로 명시화하는 기계적 반복 형상만이 남아 있다.
3.
그러나 이 같은 일원적 주체의 형상에 대한 해체는 모더니즘 문학이 다뤘던 전위적 표현양식들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모더니즘 문학이 갖는 시대적인 의미와 <독신자 기계>전이 그것들에 행했던 미술을 통한 고고학적인 복각작업 또한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전자가 시대적 외상과 주체성의 동요를 다룬다면, 후자의 경우 (그것을 기계라고 명명하는 것 만큼이나) 그것의 기이한 형상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전자에게 있어 부정성이 중요한 문제라면 후자에서는 오로지 다원성만이 관건이 된다.
오히려 <독신자 기계>가 철저히 성적인 주제들로 구성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주체의 자리를 소거한 비인격적 객체이기 때문이다. 모더니즘 소설에서 존재하던 혼란스런 충동과 불안은 소설이 서술행위를 통해 형성했던 위안과 다른 방식으로, 미술에서의 또 다른 전략을 통해 해소되고 있다. 그것은 불안을 형상화한 뒤 고정된 시간과 공간에 가둠으로써 그것을 진귀한 미학적 형상체로 다루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공성 계곡> 또한 난민이라는 타자를 (나와 마찬가지로 주체라는 점에서 위험하기 짝이 없을) 주체가 아닌 객체로 다루게 된다. 이주라는 인간의 초역사적인 항구적 여정을 각인시키면서, 불안을 일으키던 성적 타자는 중성적 반복동작을 하는 기계적 형상으로, 우리가 몇 시간이고 멍하니 지켜볼 수 있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의 수려한 기계들의 움직임으로 탈바꿈하여 우리에게 편안함을 선사하는 것이다.
4.
한편으로 주체 중심주의와 전통적인 서사가 그 밖의 객체들의 자율성들을 집어삼키고 억압한다고 보는 불안은 어떠한가? 그것은 그 자체로 납득할만한 불안인가? 이 질문에는 따로 알려진 여러 유효한 대답들이 더려 존재하지만, 나는 그것을 판타지(Fantasy)에 대한 오늘날의 숱한 경멸과 연루시켜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서사(혹은 거대서사)에 대한 거부는 그것이 품고 있거나 혹은 온존시키고자 하는 이상향적인 기대감(환상)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거부는 그러한 환상을 바꾸거나 뜯어보려는 일말의 의욕조차 갖지 않는 전면적인 거부라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예컨대 남성판타지에 대한 거부감을 잘 보여주는 한 페미니즘 소설은 다음과 같은 남성 화자의 서술을 담고 있다. “마코는 서양풍의 동안에 성인 같은 골반을 가진 반처녀다. (…) 류탄지 씨는 이와 같은 소녀의 신체와 동작을 묘사할 때만 천부적인 재능을 보인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실 그리 새롭지 않다. 그것은 서사적 환상의 향유자, 주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판타지의 주인으로 여겨지는 성적 주체는 실은 그 자신의 욕망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것은 ‘즐긴다고 가정된 주체’, 즉 원초적 아버지, 환상의 향유자라는 가정된 타자로부터 나오는 효과에 다름이 아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무의식적 환상이 갖는 소원의 연원은 유년기의 성적 만족에 있다. 무의식적 환상은 환자가 자위행위에 빠져있던 기간 동안 그에게 성적 만족감을 안겨주었던 환상과 여전히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자위행위는 처음에는 완전히 자가성애적인 과정으로 출발하지만, 차츰 대상애의 영역에서 생겨난 소망과 섞이게 된다. 이후 자위와 그것을 둘러싼 환상으로 이루어진 만족을 포기하면 자위 행동 자체는 사라지지만 환상은 의식적인 층위에서 무의식적인 층위로 이동한다. 이후로, 자위행위로 만족을 얻던 리비도적 흥분이 다른 형태의 성적 만족으로 대체되거나 다른 흥분으로 승화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저 금욕되기만 한다. 그리고 그것의 뒤집힌 효과로 무의식적인 환상이 주체에게서 증대되게 된다.
이때 환상을 갖는 주체는 자신의 리비도적 만족을 자족적으로 성취하지 못한다. 그것은 상황, 역할로 투사되기에 적절한 조건을 갖춘 인물들, 사회적 조건 내에 주체 자신의 자리를 인식하는 것 등 외부적인 요인들과의 적당한 관계를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리비도적 흥분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다른 흥분으로 승화되었는가, 아니면 금욕됨으로써 무의식적 환상으로 비대하게 피어났는가?
사실 이 두 가지는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폭력적 주체를 경계한 윤리적 억압은 전통적인 주체를 무성욕적 자기성애의 모델-커피콩을 갈고 있는 독실한 신부님-으로 대체하고, 타자의 이해할 수 없는 욕망과의 조우는-정금형의 작업에서와 같은-기계와의 안전한 섹스로 대체되었다. 무엇보다 오늘날 성적 리비도의 가장 지배적인 승화는 경제적 활동이라는 전도된 사회성이라 할 수 있다. 경제는 그 자체로 이윤 추구 외에는 그 어떤 의도도 갖지 않는 청렴 무구한 독신자 기계가 되어 가장 지배적인 사회적 환상의 공장이 되었다. 굴뚝은 쉬지 않는 연산들의 연쇄로 이루어진 헐떡임을 피워내고 있다. 한껏 달아오른 연기는 고통스럽다. 그러나 불안하지는 않다.
5.
김아영의 사변 소설에 대응되는 또 다른 항목으로, 퓨전 판타지 소설이라는 근래 대중적으로 충분히 활성화된 것으로 보이는 장르소설에서의 흥미로운 특징에 대해서 짧게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판타지 소설 또한 김아영의 사변소설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다른 시공간을 설정한다. 두드러지는 차이라면 판타지 소설이 독자가 이입할만한 친숙한 인간 형상을 제공한다는 점이고, 그 차이는 <다공성 계곡>이 강력한 표현적 의도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판타지 소설들에서 매우 빈번하게 나타나는 어떤 특징에 주목한다면 그러한 차이는 점차 흐릿해진다. 평범한 주인공, 혹은 위기에 빠진 주인공은 후회스러운 삶을 영위하다가 위기에 부딪혀 쓸쓸한 죽음을 맞이할 위험에 처한다. 이때 어딘가로부터(혹은 어떤 숨겨진 사물로부터) 목소리를 듣게 되고, 그 목소리는 내용을 명확히 파악할 수 없는 ‘계약’을 제시한다. 다른 선택지가 없는 주인공은 계약을 승낙하고, 모든 세계(멸망)의 위기가 시작되기 직전의 평화로운 10년 전이나 20년 전으로 회귀한다. 이때 그에게는 남들과는 다른 큰 변화가 나타난다. 그는 허공에 “스테이터스”, 혹은 “상태창”이라고 외치고 허공에 푸른 창이 나타나 주인공의 능력, 성격과 같은 정보를 제공한다. 주인공은 이 ‘스테이터스 창’이 제공하는 정보의 이점을 활용하여 앞으로 닥칠 위기를 더욱더 잘 대비할 수 있게 된다.
공중에 스테이터스를 띄우는 주인공의 모습은 저금통장이나 모바일 뱅킹을 들여다보는 경제적 주체의 군상을 떠올리게 한다. 이때 그가 과거로 돌아가고 앞으로 닥칠 멸망을 대처할 수 있게 되는 모습은 앞으로 다가올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경제적 기회를 잡을 수 있게 된 신자유주의적 자아의 망상에 대한 적절한 판타지를 제공해준다. 주체를 표현해주던 선형적인 서사의 힘(계급, 이념, 사회적 관계)들은 약화된다. 상태창-자산 투자 포트폴리오가 전통적인 인물의 상을 대신하며, 자기성애적 독신자 기계가 되어 자아와 리비도의 안전한 여행을 돕는다.
6.
판타지 소설을 읽다보면 인물 행동의 알리바이를 부여하기 위해 지나치게 비대한 서술을 이어가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이 같은 서술은 독자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몰입을 떨어뜨린다. 그것은 작가 자신을 위한 것이다. 수다스러운 보충 서술은 작가 자신의 불안을 벌충하기 위한 것으로, 끊임없는 자기 확인의 결과다.
매우 대중적인 서사에서조차 주인공들은 지팡이를 짚고 있다. 그들은 스테이터스, 초능력 등등 새로 동원된 기계장치에 몸을 의탁한 환자들이다. 주체는 흐릿해지고 기계는 빛난다. 페트라 또한 그렇다. 우리는 권위적 주체를 거부하고 있는가? 오히려 그것을 유지할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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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랄트 제만의 <독신자 기계 전>에 대한 내용은 다음 논문을 참조했다.
한의정, 「파타피직스 세계의 기계와 인간」, 『횡단인문학』 제 8호,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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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lmin.org/exhibition/ima-picks/IMA Picks – 일민미술관As its first exhibition of 2018, the Ilmin Museum of Art (Director Kim Taeryeong) unveils IMA Picks, a project that sheds light on artists in their 30s and 40s who have executed notable activities both at home and abroad for more than 10 years. This exhibiilmi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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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영, 사변소설로 쓴 이주의 역사> 공간, 인터뷰
https://www.theartro.kr/kor/features/features_view.asp?idx=1946&b_code=31e김아영, 사변소설로 쓴 이주의 역사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 본 전시 《모든 세계의 미래》에..www.theartr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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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정, 「A코에게 보낸 유서」, 『아내들의 학교』, 문학동네, 2017, 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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