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글에는 독자에 따라 불쾌감을 유발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쿠에타핀, 카바마제핀, 리튬, 모든 벤조디아제핀과 비벤조디아제핀계 약물에 영광과 축복 있으라. 부모는 솜씨가 서툴러 손상된 인간을 낳았고 약물이 나를 손보고 있습니다. 반 쪽짜리 인간의 우화를 악착같이 파고들었던 때가 있다. 반편이는 나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을 주는 불충분한 얘기들. 넉살 좋게 존재론을 주워섬기는 종자들은 제발 나와 약리학을 마주치는 일이 없어야 할 텐데. 쿠에타핀 반쪽에 진리가 들어있다. 함부로 삼켰다간 큰 코 다칠 것. 취급주의. 숙취보다 괴롭고 새똥보다 불쾌한 것. 감정은 너무나도 쉽게 처방, 유통, 복용, 생산, 무시되는 물질 중의 물질 중의 물질. 피하고 싶은 잔 안의 누룩. 늦은 점심을 지나서까지 드리우는 불쾌감은 “병에 비하면 사소한 부작용”이라고 의사가 말했다.
의사를 만나는 일은 만난다는 그 자체로 사건이다. 증상이 심해질 땐, 나는 그곳에 영영 도달하지 못할 것이란 강한 믿음에 시달리고 극복하기를 반복했다. 내 주관은 상대성이론의 산 증명과도 같아서 시간과 공간은 뻑하면 굴절되고 토막나는데 나만의 문제기에 결국 시간 약속을 지키지 못해 덤터기를 쓰고 마는 것도 오롯하게 내가 짊어질 죄목. 그건 제 문제가 아닌데요, 제 문제입니다. 상담은 매번 어떤 나를 연출해야 할지를 고민케 한다. 여긴 무대고요. 저는 병신입니다. 모니터에 의사가 뭘 쓰는지, 나에 대한 이야긴데 영원히 알 수 없는 이야기들. 모니터 너머로 항상 신경이 분산되기 때문에 내가 했던 말들은 쉽게 잊혀진다. 의사는 아마도 내게 관심이 없을 것이다. 때로 큰맘 먹고 내가 생각하는 어떤 심각한 경험과 그로 인한 감정에 대해서 지껄였던 적이 있었지만 “약은 잘 먹고 있어요?” 라는 대답이 푹 쑤시고 들어오면 내 병에 대해 알고자 하는 의욕과 치료에 관한 결심은 대번에 날아간다. 약과 약의 복용 여부만 따지는 의사의 목을 간간히 조르고 싶을 때가 있다. 때론 그 약 때문에 문제가 생긴단 말입니다, 선생님.
나는 모르는 어떤 증세들을 그가 발견하고 치료가 잘되고 있길 바랄 뿐이다. 내가 떠벌이는 말들에 대해서 가장 모르는 사람은 나니까. 내가 한국어와 그다지 친하지 않다는 걸 깨달은 건 성인이 되어 약물치료를 시작해서 중학교 시절을 회상할 수 있게 된 때부터였다. 이만큼의 회상도 조금은 나아졌기 때문에 가능한 반성의 일종인데, 왕따를 당했어도 나는 아팠기에, 그래서 더 망가질 수가 없었기에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그냥 그대로 쭉 아팠다면 오히려 행복하지 않았을까?) 무리가 떠들 때 모든 주제에 끼어들고 한 마디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충동은 매번 나를 지배하는데 성공해서 나를 얼간이로 만들고 난 뒤 잠적한다. 남들의 얼굴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스승. 아, 나 또 병신 짓거리를 했구나, 하고 깨닫도록 도와주는 산파법적 표정들. 감사합니다.
한 달 주기로 반복되는 혈액 검사는 나에 대해서 뭘 알려줄까? 약물의 혈중농도 같은 것 말고 병세의 농도를 다이렉트로 측정하는 검사기구가 개발되길. 의사선생님은 그것에만 관심이 있으니까요. 의사선생님은 만나면 첫 마디로 요즘은 좀 어때요? 하고 묻는다. 아 제 인생이요, 치사량입니다.
배가 부르지 않아도 자꾸 처먹는 건 오랜 습관. 보상으로 얻은 위식도역류질환으로 인해 뻑하면 쓴물이 올라온다. 그만 처먹으라고, 더는 들어갈 자리가 없다고 반송된 거겠지만 쓴물까지 삼킨다. 배가 고파서 먹는다기보다는 아무것도 안하는 내 자신보단 뭐라도 하는 게 나은 일이니까 먹는다. 먹는 건 아주 쉬운 일이니까. 먹고 나서 덩치를 불려 찾아온 후회는 끝내 자백을 들어야 약간이나마 가벼워진다. “어차피 나, 쓰레기니까.” 회개는 무한정 가능하다는 부분이 진정한 신의 자비이다. 불교, 실존주의, 미술에선 비어있는 것에 대한 지독한 탐구가 있었는데, 나도 다른 방식으로 철학한다고 잠깐 위안한다. 불교는 경전과 명상으로, 실존주의는 무의 인정으로, 미술은 환영적 대체로 그것들을 극복할 궁리를 할 때 나는 처먹는 것으로 공허함을 채운다. 적어도, 난 하루에 다섯 번까지도 극복할 수 있다. 공허-공포는 멋진 말이다. 위장도 공간이니까 같은 표현일 수 있길. 제발.
그렇다고 할 일이 없진 않은데. 더 낫게 말하면 실제로 해야 할 일은 산적해있는데 병신으로 사는 삶의 메리트를 좀 즐길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신체 장기들을 줄지어놓고 달리기를 시키면 아마 내 주댕이가 우승할 것이다. 생각도 거치지 않고 발 빠르게 튀어나가는 주댕이는, 직장에서 다른 사람들이 조금만 잘해주거나, 조금만 질책하면 묻지 않았음에도 내가 가진 병에 대해 펄럭펄럭 잘도 지껄인다. 이제 소문은 시간문제. 아까도 말했지만 표정이 많은 것을 알려준다. 누군가 전보다 약간은 어색하거나 뜨듯한 어투로 나를 대하면 금세 알아챌 수 있다. 너 이 새끼, 나에 관해 들었구나. 앞으로는 저 사람도 같은 실수를 반복해도 좋게 말하거나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약간 온화해졌거나 감사하고 역겨운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눈매. 은근한 배려. 소외에 가까운 그 배려.
점차로 내가 맡은 업무가 줄어들고, 질책도 줄어든다. 만세. 이제 나는 얼마간의 동정과 배제를 통해 나의 무능함을 더욱 키울 것이다. 세계는 얼마간 부드러워지고 존재는 배려 속에서 익사한다. 배려의 이면엔 언제나 압박이 있다. 다만 배려도, 압박도 부드러워 분간이 쉽지 않다. 인식은 질식 후에 찾아온다. 이 온기 어린 도덕의 작동으로 나는 성장할 기회도, 어떤 통과의례도 마다한 삶을 살아가면서 존재 자체가 폐가 되는 하나님의 계획을 완수한다. 이러라고 절 이런 꼴로 세상에 내놓은 거 맞으시죠, 하나님?
유일하게 자랑거리라면 동네 만화방에 있던 거의 모든 만화책을 섭렵했던 것인데, 적어도 만화를 보는 동안에는 나는 친구가 여럿 있었다. 만화 속에는 나와 같은 찐따들이 많았다. 다른 게 있다면 그들은 성장하고 나는 그대로라는 것. 괜찮았다. 다른 만화책의 1권을 집어 들면 해결되는 문제였으니까. 만화와 현실의 시간이 각자 다르게 흐른다는 일은 축복과도 같았다. 현실에서 보기 힘든 나 같은 루저 캐릭터들은 성장이라는 시간성을 위해 제물로 바쳐졌다. 나는 그냥 병신으로 살았다. 현실에서 도피한 문제는 꿈에서 나를 찾아오는 숨바꼭질이 계속됐다. 답은 간단했다. 약을 중단하면 3일 쯤은 잠에 들지 않아도 괜찮았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은 눈꺼풀이란 말은 시시한 농담. 가장 무거운 건 졸피뎀 두 알이다. 때로는 세 알요.
가장 강한 건 집안에서의 나고요. 나는 내 처지를 다루는 법에 익숙해졌다. 부모 앞에서 한없이 강해지고, 직장에서 한없이 나약해지는 일, 나로 인해 더 많은 일을 하는 동료들에게 미안해 할 일은 글쎄, 니들은 나처럼 아프지 않잖아.
인간관계는 대부분 거리로 은유된다. 그와 난 사이가 멀어, 또는 가까워. 전 무인도에 살고 있어요.
아픈 사람은 배려 받아야 한다는 배움이 실천될 때 윤리는 가장 냉정해졌다. 그들이 나에게 온정을 베푸는 순간은 내가 조절할 수 없는 증세가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기 전까지만 존재했다. 사회는 분명 아픈 이들을 도우라고 가르쳤다. 싸가지 없는 아픈 이에 관해서는 가르쳐주지 않았나보다. 아픈 이를 도왔다가 손해를 봤다는 뒷담화가 늘어갔다. 그럼 박씨라도 물어다 줄줄 알았던 건가?
나보고 부적응자라고 지껄이며 모욕하는 이들이 있을 때면 차라리 기분이 나아졌다. 비로소 받을 대접을 받는 기분, 이제야 당신 뇌 속 섹터에서 알맞은 분류로 안착했다는 느낌. 타인과의 첫 만남은 이윽고 나에 대한 경멸로 귀결될 뿐이기에 만남의 순간들은 짜증만 유발했다. 저 사람은 언제쯤 나를 파악하고 찐따 취급하게 될까? 차라리 그 순간이 빨리 오는 게 속이 편하다. 그렇지 않으면 더 많은 거짓말과 허세와 후회가 쌓이고 말 테니.
이런 삶에선 모든 원망이 뒤섞이게 된다. 약물, 부모, 사회, 나까지 집어삼키는 절망의 블랙홀은 시간까지 삼키진 못해서, 또 내일을 살게 만든다. 내겐 내일이 있다는 사실이 형벌이다. 살고 싶지 않은 세계를 만들어놓고 왜 자꾸 도태니 낙오니, 북으로 가라느니 훈계를 하는지 모를 일이다. 예전에 한 선생은 세상은 부조리하고, 그것이 사실이며,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비정상이라고 말했었다. 나는 그녀야말로 성실하게 미쳤다고 생각했다. 불만을 삭히는 게 당연한 세상이면 세상도 나만큼 미친 게 맞는 거잖아.
미술 전시를 보러 다닐 때면 아포칼립스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접한다. 제발 나처럼 살고 있어서 이 지랄을 떨고 있기를. 딱 보니까 다들 연대할 생각도 없고, 연대가 어려운 삶이 닥쳐 있다. 연대가 어렵다면 공범이 되자고 속삭이고 싶다. 집단자살의 경이로운 순간을 상상한다. 한 때는 자살 사이트를 기웃거리거나 복수의 상상 안에서 배회하는 것이 일과의 마지막이었다. 알고 있던 몇 개의 사이트가 폐쇄되고는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힘든 사람이 모인 공간에서, 우리는 어둠의 성찬을 즐길 수 있다. 각자의 고통과 원한을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공평하게 나누고 다함께 무와 영원으로 가는 것이다. 삶에 더 이상 어떤 희망적인 게 없으니 희망의 관성은 죽음으로 향한다. 무와 영원은 무와 영원이기에 나도 없고 나의 문제를 애꿎은 내가 떠맡는 그런 불합리한 일도 없을 것이다. 죽음, 더 이상 내일이 없다는 그 묵직하고 관대한 약속. 나와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 모든 비참했던 삶들을 함께 씹고 들이키며, 추악함과 너절함을 펴 바르고서 단숨에 죽음까지 언도되는 장면을 거듭 거듭 상상한다. 모든 분노, 모든 비토, 모든 비탄, 설움, 고발, 눈물, 애수, 광기가 초단위로 풀썩여 심장 속으로 파고들고 분출되길 반복하면서 들숨 날숨의 순환을 따라 확산되는 죽음이 이윽고 밀폐된 방 안 대기를 가득 채우는 숭고를. 세계에 감정의 총량을 달아볼 수 있다면 집단 자살의 순간 슬픔은 줄어드는 것이고, 바꿔 말해 세상은 조금 더 밝아지는 것이다. 지구에서 불행이 그만큼 제거되었으니, 의사 선생님도 기뻐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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