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비록 구름의 모습처럼
빠르게 변하지만,
모든 완성된 것은
원초의 것으로 되돌아간다.
변화와 진척을 넘어,
더 멀리 자유로이,
당신의 첫 노래는 살아 번지고 있다,
칠현금을 든 신이여.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제1부, ⅩⅨ) 중 부분[1]
미술과 시대의 변화를 거센 물살에 비유한다면, 비평가는 맨 앞에서 파도 타는 사람인가, 아니면 맨 뒤에서 첨벙대며 따라오는 사람인가? 광풍을 맞으며 돛대 끝에 매달려 있는 사람인가? 혹시 그는 등대지기인가? 아니면 해변에서 관망하는 사람인가? 무엇이 됐든 유행의 최첨단에 서야 한다는 의무감, 그렇지 않으면 도태될 거라는 두려움. 동시대 미술비평가 중에 이런 군더더기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것을 압박감이라 부르든 은밀한 욕망이라 부르든 말이다. 미술과 세계에 대해 한마디 보태려는 사람은, 제일 먼저 인정 욕구라는 강력한 장애물이 자기 안에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남 이야기가 아니고 내 이야기다.
인공지능과 메타버스, 게임에 대해 써야 할까? 미디어 아트의 전망에 대해 써야 할까? 퍼포먼스는 어떨까? ‘비인간’이라는 키워드를 꼭 넣어야 할까? ‘-되기’는? 이미 한물갔나? ‘이머징 아티스트(emerging artist)’로 주목받는 사람은? 이런 별별 생각을 걷어내고 내 안의 일그러진 욕망을 들여다보면서 몇 주를 기다렸다. 그랬더니 가슴 속에서 천천히 떠오르는 빛이 있었다. 방혜자(1937-2022)의 영혼이 남기고 간 빛이다. 속삭이듯 말 걸어오는 빛이라서, 절대적인 침묵 속에 있지 않으면 결코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방혜자는 ‘빛의 화가’라고 불린다. 그의 작품에 대한 연구에서 ‘빛’은 빠짐없이 등장하는 키워드다. 그러나 방혜자가 『빛의 메시지』라는 책을 평생 좌우서로 삼아 그림을 그렸고, 반려자인 알렉상드르 기유모즈(Alexandre Guillemoz)와 함께 직접 이 책을 번역하기도 했다는 사실은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다.[2]
이 책이 나온 1976년부터 지금까지 우리 부부는 매일 아침 빛의 메시지를 읽고 이를 삶의 뿌리로 삼아 왔습니다. 그 신비롭고 놀라운 가르침은 마음의 빛을 열어 주었고, 영성생활(靈性生活)에 놀라운 의식의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이 책은 새로운 세상을 향해 울리는 ‘새벽의 노래’와 같습니다. 우리는 어둠과 고통 속에 살고 있는 많은 분들과 그 가르침을 함께 나누기 위해 2007년부터 한국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였습니다.[3]
‘인간/인간성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조건은 무엇인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생명이란 무엇인가?’ 아주 오래된 질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낡아빠진 건 아니다. 여전히 유효한 질문인데, 우리는 아직도 능숙하게 다루지 못한다. 골치 아프니까 건너뛰고 자꾸만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요즘 우리의 시선은 딴 데 가 있다. 인간이 아닌 모든 것에. 그리고 피상적인 표면에. 잠깐 멈춰서 생각해본다. 타자를 언급하면 곧바로 반성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이 될까? 인간에 대해서는 알 만큼 알았으니, 이제 다른 존재에게 손을 뻗쳐도 되는 걸까? 좀비든 사물이든 그 뒤에 ‘-되기’를 붙이면 정말 인간이 아닌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인간인 게 싫고, 지구에서 살아가는 것이 불편해지니 어디로든 떠나면 그만일까? 나는 우리 인간이 여전히 자신만만하다고, 늘 그래왔듯이 오만하다고 생각한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인간과 인간이 속해 있는 세계에 대한 연구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인공지능, 메타버스, 전쟁, 기후 위기는 전에 없는 무언가를 예고하는 것 같지만, 실상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물음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역사 속에서 끝없이 되풀이된 물음으로.방혜자의 삶과 작품 세계를 깊이 이해하려는 사람이라면 『빛의 메시지』를 반드시 경유해야 한다. 또한 이 텍스트가 탄생한 배경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빛의 메시지』와 방혜자의 작품 모두 극심한 혼란기에 피어난 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혼란’이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믿음이 뿌리째 흔들리는 상황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문제는 지금 우리가 겪는 혼란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방혜자의 설명에 따르면, 『빛의 메시지』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헝가리에 독일 나치군이 쳐들어왔을 때, 네 명의 예술가(한나 달로츠, 요셉 크로이, 릴리 슈트라우스, 기타 말라스)가 영혼의 스승과 나눈 대화를 기록한 것이다.[4] 이 예술가들은 정기적으로 모여 삶과 생명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고, 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인류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으려고 애썼다.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 곳곳에서 횡행하는 악을 근절하고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토론했다. 이들의 절실한 물음에 응답하듯, 어느 날 상위 차원의 존재가 나타나(‘내면의 스승’ 혹은 ‘천사’라고 불린다) 한나의 몸을 빌려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했다. 모임의 참여자 중 기타 말라스가 이 내용을 기록해 두었다가 후일 프랑스로 망명하여 『천사와의 대화(Dialogues avec l’ange)』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방혜자와 알렉상드르 기유모즈가 이 책을 한국어로 옮긴 것이 바로 『빛의 메시지』다.[5]
인간이란 무엇이며, 인간답게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묻는 일. 이 탐구는 근원(根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몸짓과 같다. 마치 연어처럼. 연어는 알을 낳을 때가 되면 바다에서 강으로 돌아간다. 자신이 태어난 고향으로. 그런데 그냥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으러 간다. 출발할 때 연어의 몸은 급격히 변형된다. 살이 문드러지고 붉게 변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연어는 더 이상 통각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 몸으로 먹이도 먹지 않고 물살을 거슬러 오른다. 이렇게 연어가 죽음을 각오할 수 있는 까닭은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삶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개체의 죽음 끝에 새로운 탄생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새 생명이 뿌려지면, 연어의 삶은 다시 강에서 바다로 흐르기 시작한다.
이 혼란의 시대에 인간의 근원을 묻는 사람은 연어와 같다. 그는 용감한 역행자다. 혼탁한 시류에 떠밀려가지 않고, 방향을 돌려 맑은 물이 솟는 원천으로 떠난다. 그는 필멸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홀로 정화의 길을 간다. 너덜너덜해진 작은 나(ego)를 죽이고 생생한 작품을 낳는다. 이런 예술가가 있다면 비평가는 절대 그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비평가의 참 실력은 이 시대의 연어를 얼마나 잘 알아보고 지지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내가 만난 연어는 방혜자다. 가만히 지켜보니 ‘연어로서 예술가’가 헤엄쳐 가는 길에는 세 가지 관문이 있다. 차례로 손(手), 시(詩), 신(神)이다. 근원을 향해 나아가는 예술가는 어김없이 이 관문들을 통과하며 영적 성숙과 자기 완성을 이룬다. 이 글은 방혜자의 여정을 따라가며 각각의 관문에 대한 경험이 어떻게 작품 세계에 녹아들었는지 분석한다. 이 과정에서 『빛의 메시지』와 방혜자가 쓴 수필집 『마음의 침묵』의 몇몇 구절들, 그리고 그림이 서로 교차하게 될 것이다. 실제 방혜자의 삶에서 영적 수련과 일상생활, 작업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처럼.
첫 번째 관문: 손(手)
방혜자는 그림을 그리기 전 매일 수련하고 기도한다. 그다음 손으로 닥지를 구겼다 폈다 한다. 자글자글한 주름 사이로 붓이 천천히 지나간다. 종이에 붉은 흙이 발리고 천연안료가 스며들면서 빛이 깃든다. 사람의 몸에 생기가 돌 듯이. 방혜자는 전신이 가볍다. 작업실에서의 일상을 찍은 영상[6]에서 그는 한 마리 새 같다. 그의 몸은 얽매임 없이, 아래로 끌어 당겨지는 느낌 없이 자유롭게 위로 흐른다. 저 멀리 가 닿는, 아득히 깊고 평온한 눈빛. 유유히 떠 있는 새의 영혼. 『빛의 메시지』를 보면, 날개는 “물성과 공기를 잇는 매개체”이며 인간에게는 팔이 날개와 같다는 구절이 있다.[7] 양팔을 넓게 펼쳐 만물을 품을 줄 아는 인간은 “물질과 정신 사이를 잇는 중개자”로서 존엄을 갖는다. 이것이 “천지창조 안에서 인간의 위치”[8]다. 그 참된 위치를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도표1]). 아래 그림을 보면 지상과 천상의 생명은 일곱 단계로 나뉜다(서두에서 인용한 릴케의 시에 등장하는 ‘칠현금’이 떠오른다). 그중 지상의 세 단계는 ‘창조된 세계’에 속하고 천상의 세 단계는 한계 너머, ‘창조하는 세계’에 속한다. 이 두 곳 사이에는 벌어진 틈, 심연이 있다. 그 한가운데, 네 번째 단계인 인간은 지상과 천상을 연결하는 사명을 갖고 태어났다. 심연을 건너는 다리이자 중개자인 인간은 천상의 힘이 지상에 이를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창조에 참여한다.
방혜자는 이런 인간의 사명을 깨달은 사람으로서 생활하고 창작한다. 그의 일상, 그가 그리는 그림은 곧 “작은 세포들 하나하나가 올리는 기도”다.[10] 기도는 다른 말로 하면 “날개 없는 자들의 날개”다.[11]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사명을 깨닫지 못해 하루하루 견디듯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은 진흙탕에 빠져 길을 잃고, 어깨에 너무 많은 짐을 진다. 하지만 누군가 진정한 길 위에 있다면, 그의 어깨는 틀림없이 가벼울 것이고 미소가 절로 나올 것이다. 삶의 방향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이 찾아야 할 것은 “새로운 미소”다. 『빛의 메시지』에서, 절망에 빠진 예술가들에게 영혼의 스승은 말한다. “일상적 삶을 가장 강도 높게 살아갈 때에만” 그 새로운 미소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12]
미소 짓는 손으로 그리는 그림은 어떠한가? 방혜자에게 그림 그리는 일은 무겁고 부담스럽고 힘에 겨운 일이 아니다. 그의 손을 통해 우주가 창조하기 때문이다. 그에겐 모든 과정이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그런 의미에서 방혜자는 진정으로 자신의 길을 갔다고 할 수 있다. 수필집 『마음의 침묵』에 실린 「또 하나의 손」이라는 글을 보면, 방혜자가 그림 그리며 느꼈을 기쁨이 활자를 넘어 파도처럼 밀려온다.
저는 그 꿈속에서 큰 화폭에 바다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물결 위로 햇빛이 금빛으로 빛나고 있는 것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반짝이는 물결 위에 금빛을 하나하나 그려 나가고 있을 때, 제 손 옆에서 또 다른 하나의 손이 그 빛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저도 그 손을 따라서 빛을 그렸습니다. 제 손이 그 손과 하나가 되어 금빛 물결을 그려 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바다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화면에 서 있는 바다, 금물결이 출렁이는 그 모습은 장관이었습니다. 꿈을 깨고 나니 온몸이 금빛 물결에 젖은 듯 황홀하였습니다.[13]
<빛의 숨결(Souffle de Lumière)>(2009)[14]은 방혜자가 회고한 꿈을 당장 눈앞에 펼쳐놓은 듯한 그림이다. 닥지를 손으로 구겨서 만든 주름 위에 금가루처럼 번쩍번쩍 빛나는 노랑이 스며들어 있고, 수평으로 드넓게 칠해진 파랑이 위아래로 화폭을 천천히 감싸며 바다의 지평선을 상기시킨다. 같은 글에서 방혜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자신의 손을 통해 그리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고 말한다. 그 보이지 않는 손의 주인을 누구라고 부르든 간에, 방혜자는 “또 하나의 손”에 기대어 그림으로써 “세포의 입자까지도 웃음소리가 들리는 고요한 자리, 대우주의 생명과 하나 되는 그 자리”에 닿는다.[15] <빛의 입자들(Particules de lumière)>(2019)과 <빛의 춤(Danse de lumière)>(2019)은 그렇게 하나 된 기쁨 속에서 웃고 춤추고 노래하는 세포들, 즉 빛의 알갱이들을 보여준다.
마엘 벨렉(Mael Bellec) 세르누치 미술관(Cernuschi Museum) 큐레이터는 한 인터뷰에서, “방혜자의 작업은 영성을 요구하며 자연으로의 회귀와 함께 진행된다(Bang’s works demand spirituality and go hand-in-hand with a return to nature)”고 말한다.[16] 이 말을 좀 더 상세히 풀어보자. 방혜자의 그림은 모든 생명이 비롯된 근원, 즉 태초의 빛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며, 이 신비스러운 회귀는 인간과 우주가 ‘손에 손 잡고(hand-in-hand)’ 조화롭게 이루어 나간다는 점에서 영적이다. 방혜자는 단순히 작업을 위해 여러 소재 중 하나로 영성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의 삶 자체가 영적이다. 그림은 그가 자연과 연결되어 내쉬는 숨과 한층 증폭된 생명 에너지가 저절로 흐르는 통로다.
물론 방혜자에게도 마음이 어둡고 답답했던 시절이 있었다. 1961년 대학 졸업 직후 프랑스로 건너가 온갖 고생을 하며 그림에 몰두하는 동안, 끝없는 외로움과 가난에 홀로 맞서야 했다. 그런 그가 근본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작은 깨달음과 우연한 만남 덕분이었다. 늘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며 판단하고,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 서운함을 느끼던 그는, 모든 고통의 원인이 내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나쁜 씨앗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한국에서 찾아온 스님 한 분의 말 한마디가 새 삶을 시작하는 단초가 된다.
“붓 한 자국 한 자국에 원(願)을 세우시고 선생님의 그림을 보는 이로 하여금 평화와 기쁨을 가질 수 있도록 하십시오. 몸과 마음을 따로 놀게 하지 마시고 청정한 마음으로 시방세계 어디를 가나 몸과 마음이 꼭 붙어 있는 상태를 관(觀)하십시오. 이제부터는 다른 일을 하시면 몸이 아프십니다. 지금까지 해오신 일이 잘못된 것은 없으나 그림에 영양이 부족했습니다. 이제부터는 그림에 많은 변화가 올 것입니다.”[17]
그 후 방혜자는 평생 마음을 깨끗하게 비우는 데 집중한다. 마음이 비워져야 그 안에 세상이 왜곡 없이 담길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생명의 아름다움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살아 있음’ 그 자체를 기뻐하는 순수한 아이로 돌아간다. 방혜자는 말한다. “수억만 번의 변화와 변신을 통하여 맨 마지막엔 드디어 빛으로 돌아갈, 자기 완성을 향하여 억만 세포의 노래를 당당하게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신명나는 일”이라고.[18] 이제 그 ‘노래’가 어떤 것인지 살펴볼 때가 되었다. 방혜자가 한 마리의 연어로서 ‘빛으로 돌아갈’ 때, 우리에게 남기고 간 노래는 어떤 의미인가? 방혜자의 삶은 이 시대의 ‘궁핍함’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다음 관문을 통과하며 함께 실마리를 찾아보자.
두 번째 관문: 시(詩)
서두에 인용한 릴케의 시처럼, 이 세상은 구름처럼 모습을 바꾸며 시시각각 흩어진다. 변화무쌍한 세계를 흥미롭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현대인은 불안을 느끼며 산다. 우리는 이 불안을 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하이데거는 「무엇을 위한 시인인가?」라는 글에서 이 시대의 특징을 “신의 결여(Fehl Gottes)”로 규정한다. 여기서 신의 결여란, ‘어떠한 신도 더이상 분명하게 그리고 일의적으로 사람과 사물을 자기 자신에게로 모아들이지 못하는 사태’를 가리킨다.[19] 이와 더불어 이 세계에는 “근거짓는 근거로서의 근거가 사라졌다.” 무언가 뿌리 내릴 수 있는 지반이 ‘근거’라면, 가장 아래 층위에 있는 근거를 “심연(Abgrund)”이라고 한다.[20] 근거가 사라진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세계의 심연을 감내해야 하지만, 결여를 눈치채고 용감하게 심연까지 내려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오직 시인들만이 그렇게 한다. 시인은 “죽을 자들 중에서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빨리,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심연에 도달해야 하는 자”이다.[21] 그는 사라져버린 신들의 흔적, 즉 “성스러움(das Heilige)”에 눈길을 주고 이를 노래한다. 이것이 바로 “궁핍한 시대에 시인으로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다.[22]
방혜자는 「마음의 그림」에서 ‘마음으로 그린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거듭 이야기한다. 가만히 살펴보면 이는 시인이 노래하는 일과 같다. 마음의 눈으로 사물을 투시하여 본질적인 것을 포착하는 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일. 마음 깊숙이 파고들어 자아의 본성을 캐는 일.[23] 방혜자는 평생 시인이 노래하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텅 빈 가운데 / 아무도 없는 어두운 길. / 안으로 가는 길은 / 마음 여는 길. / 모든 어둠을 다 걷우고 / 밝게 피어나는 길.”[24] 그가 걸어 내려간 길은 고요한 오솔길처럼 남아 있다. 시대의 밤이 깊어질수록, “신성에 이르는 흔적(Spur zur Gottheit)으로서의 성스러움이 사라질 뿐 아니라, 이러한 잃어버린 흔적에 이르는 흔적들조차도 거의 사라져 버린다.”[25] 이 궁핍한 상황 속에서 방혜자가 남긴 자취는 존재 자체로 귀하다. 그가 심연에 도달한 고유의 방식과 다음에 올 이들을 위하여 길 위에 뿌리고 간 빛은 비교 불가능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우리를 맞아들인다.
방혜자는 어렸을 때 시인이 되기를 꿈꿨다고 한다. 시인인 외사촌 오빠와 가깝게 지내며 시를 외우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26] 이때 자연스레 체화된 시적 감수성은 화가의 길을 가는 내내 든든한 받침목이 되었다. 또한 방혜자는 한국, 프랑스의 문인들과 친밀히 지내며 여러 프로젝트를 함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지하의 첫 불역 시집인 『화개(Éclosion)』(2006)에 방혜자의 담채화가 수록되었고, 시인 샤를르 쥘리에(Charles Juliet)의 시집 『그윽한 기쁨(une joie secrète)』(2006)의 표지에 삽화가 실리기도 했다. 그 외에도 방혜자는 로즐린느 시빌르(Roselyne Sibille), 모리스 베나무(Maurice Benhamou) 등과 교류하며 시화집을 내거나 시인들이 쓴 평문을 전시 도록에 싣기도 했다.[27] 방혜자의 회고에 따르면 주말에는 남프랑스에 있는 친구 집에서 작은 시화전을 열기도 했는데, 화가와 시인들이 모여 밤새도록 즉흥시를 읊고 시를 골라 그림을 그리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때 자연스럽게 피어오른 흥과 기쁨을 붙잡아 쓴 글은 읽는 이의 마음에 잔잔한 파동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이러한 순간들을 찾기 위해서, 이루기 위해서 그 모든 어려운 일들을 참고 견디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작은 미소, 투명한 빛, 아이들 같은 순진무구한 마음, 자연스럽고 흥겨운 놀이를 위해서, 눈 속의 눈으로 보는 빛, 귓속의 귀로 듣는 소리, 가슴속의 가슴으로 느끼는 따뜻함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가장 작고 작은 미립자 세계 속에도 경이로운 우주가 살아 있음을 함께 느끼기 위해서, 어울려 노래하는 순간을 위하여, 폭풍 속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어둠 속에서도 꿋꿋하게 견뎌낼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28]
앞서 이야기한 시대의 어둠, 심연에 대한 인식이 위 글에도 드러나 있다. 방혜자의 말처럼, 우리는 ‘그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다 함께 ‘어울려 노래하는 순간’을 위해서 살아간다. 살아 있음을 찬미하며, 아주 작은 생명에도 경이를 느끼며. 방혜자는 예술가가 가야 할 정도(正道)가 “창작을 통하여 삶의 경이롭고 눈부신 참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말한다. “겉으로는 대수롭게 보이지 않는 일상에서도, 전 우주를 볼 수 있는 혜안을 열어가는 일이 예술가의 몫”이라며.[29] 이 말이 너무 평범하고 단조롭게 들리는가? 나는 지금 한국의 예술가와 비평가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지나친 자극과 껍질뿐인 화려함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혼탁해지고 감각은 더럽혀졌다. 실로 우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 그런 와중에, ‘눈 속의 눈’으로 보고 ‘귓속의 귀’로 듣고 ‘가슴속의 가슴’으로 느끼는 인간이 우리 곁에 있었다는 사실이 정말 기적처럼 느껴진다. 방혜자의 귀함, 그가 남기고 간 빛의 경이로움을 글로 표현하는 일이 어려운 이유도 이와 같을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또한 심신을 수천 번 수만 번 갈아엎고 다시 태어나야 방혜자의 그림을 제대로 느끼고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이 깨어나 해방에 이르는 과정은 그 한 사람의 삶을 바꿔 놓는 데 그치지 않는다. 달라진 그의 진동은 주변의 생명체에게 반드시 전해진다. 진동수를 높여 가며 우주와 하나 되는 여정은, 아주 미세한 점에서 시작하여 세계 전체로 확장된다. 한 사람이 흥얼거리기 시작하면 다른 이가 하나둘씩 동참하여 널리 퍼져 나가는 노래처럼. 방혜자는 그 사실을 잘 알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했다. 어둠을 뚫고 오르는 빛 한 줄기를 그리는 일. <마음의 빛(Coeur de lumière)>(2018)은 그로부터 생겨난 동심원을 보여준다. 이 그림과 어울리는 또 하나의 흔적, 방혜자가 남긴 글을 옮겨 적는다.
넓고 넓게 그려 온
반지름 줄여 가면서
하나의 작은 원점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티끌 같은 미립자 되어
우주의 숨결 속에
호흡을 맞추고 싶습니다.
어둠 속에 묻혀 있는
작은 씨앗이 되어
깊은 침묵 속에서 피어나는
꽃이 되고 싶습니다.[30]
세 번째 관문: 신(神)
비대한 자아의 반지름을 줄여 태초의 점으로 돌아가는 길. 방혜자가 헤엄쳐 간 길이다. 그의 그림은 나를 비우고 자아의 한계를 초월하는 과정이며, 내면을 깊이 파고 들어갔을 때 만나는 근원, 빛의 현현(顯現)이다.
마음의 눈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마음을 들여다보고 자아의 본질을 파헤치는 방법입니다. 그것은 끝없이 껍질을 깨고 원래의 삶의 형태로 돌아가는 자기 수련입니다. / 우리가 마음으로 그리는 길은 마음을 비우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31]
방혜자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근원을 다른 말로 하면 ‘원래의 삶의 형태’다. 이것이 신성이다. 본래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신(神)이 깃들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육체는 신이 거주하는 성소(聖所), 신의 집이다. 그런데 이 집이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겉보기에 휘황찬란한 대궐이라도, 그 속에 살아 숨 쉬는 생명이 없다면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또한 사랑 없는 집은 지옥일 뿐이다.
죽어 버린 시대! 장사치들의 손은 빈 그릇을 움켜쥡니다. 그들은 예술가들에게 향불을 바칩니다! 예술가들이 바쳐야 될 향불을 그들이 바칩니다! 연기는 사그라들고 카인의 말뿐입니다. 모든 것은 메말라 버리고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새장 안에 푸른 새를 가두는데 그 새는 잿빛 참새가 됩니다. 수집된 그림들, 그림의 보관소, 창고. 그곳엔 죽은 껍질들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지하 묘소의 냄새. 앞을 바라보는 눈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모두들 뒤를 바라봅니다. 누가 신을 섬깁니까? 누가? 당신은 누구를 섬깁니까?[32]
예술가는 본디 섬기는 존재다.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첫 번째 관문에서 살펴보았듯이 예술가의 손은 기도를 올리는 손이며 빛이 흐르는 통로, 즉 매개일 뿐이다. 그러나 시장은 예술가를 떠받드는 척하면서 본질을 왜곡한다. 예술가는 자기 안의 빛을 보지 못하고 자꾸만 바깥의 인정을 갈구하면서 몸을 부풀린다. 그렇게 부풀려진 작품 안에는 놀랍게도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다. 이런 공허는 방혜자가 말한 ‘텅 빔’과는 전혀 다르다. 두 번째 관문에서 진단한 ‘신의 결여’, ‘궁핍함’과 연관 지어 이해해야 한다.
섬김에 대해 숙고해보자. 섬김의 몸짓은 어떠한가? 그것은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손짓이다. 섬김은 상승, 수직적 진화다. 고양이다. 그런데 인간은 차원을 높여 가는 과정에서 여러 단계의 저항에 부딪친다. 『빛의 메시지』에 등장하는 스승은 십자가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수직적 힘과 수평적 힘의 교차를 이렇게 표현한다.
십자가! 그것은 두 가지 힘입니다!
(아래에서 위로 손짓을 하시면서) 이것은 길이고, (수평으로 손짓을 하시면서) 이것은 저항입니다. 첫 번째 저항은 땅, 수평의 힘이고, 두 번째 저항은 물, 세 번째 저항은 공기입니다. 네 번째 저항은 이미 물질과 비물질 사이에 위치해 있습니다.
(…)
당신들은 저항을 꿰뚫어 가고 있는 중입니다. 두 힘이 만나는 모든 지점들은 경계점입니다.[33]
이 글의 ‘첫 번째 관문’에서 언급한 ‘날개’의 이미지를 상기할 때, 오늘날 인간은 공기의 저항을 뚫고 올라가 물질과 비물질(영혼)을 연결하는 사명을 띤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를 자각하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는 사람들이 많다. 수평적 힘에 굴복한 사람들은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한 행위를 하는 데 실패한다. 반면 때를 맞추어 행동하는 사람은 ‘영원에 닿는다’. 그 모습은 “예리한 칼날처럼 더없이 가느다랗고 진동하는 수직선”의 형상을 띤다.[34] <빛에서 빛으로(De lumière en lumière)>(2018)는 이 수직선을 생생히 품고 있다. 짙은 남색으로 표현된 심연에서 빛 기둥이 치솟는다. 아래에서 위로 길이 뚫리고 나면, 빛은 다시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이 순환이 반복되면서 생명력이 강화되고 창조가 이루어진다.
언제나 섬기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던 방혜자는 불교와의 인연도 깊다. 법정 스님의 제안으로 파리 길상사의 후불탱화를 그린 바 있고, 그 인연으로 익산 원불교 중앙중도훈련원에 추상화로 된 불화를 그려 보내기도 했다. 또, 평창동에 보각사가 지어질 때도 불화 작업에 참여했다.[35] 방혜자의 그림은 전통적인 불화에서 탈피한 현대적 작업이지만, 자아의 초월과 자비의 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 불화만큼이나 자연스럽게 절 안에 자리 잡았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 방혜자는 프랑스 샤르트르 대성당 종교참사회의실에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설치하기도 했다. “빛은 생명이고 생명은 사랑이며 사랑은 평화다.”라는 메시지를 담은 네 점의 작품이 제작되었다. 이 작품은 물질의 빛이 어떻게 신성의 빛으로 변환될 수 있는지 탁월하게 보여준다. 이처럼 자신의 내면에서 신성을 일깨운 방혜자는 그 자체로 수직적인 힘이 흐르는 빛의 통로가 되었다. 저항을 뚫고 올라가는 방혜자의 모습은 이런 의미에서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생명의 근원인 빛에 대한 탐색과 특정 종교에 국한되지 않는 종교성, 즉 포괄적이고 통합적인 의미에서의 영성은 방혜자의 삶과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이다.
방혜자는 오늘날의 예술이 “순수 생명의 자리에 초점을 맞춘 ‘처음의 나’, 인간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는 길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고 우려한다.[36] 하지만 진정한 예술은 “사랑과 평화의 미”라고 믿기에, “하나의 색을 고르고, 하나의 선을 긋기 위해서 온 마음을 기울여 일생을 바치는 예술가들이 많을수록 세계 평화는 우리 앞에 더욱 가까워질 것”이라고 이야기한다.[37] 방혜자의 유산을 기리며, 우주의 손과 하나 되어 그리고, 시를 읊는 가슴으로 어둠을 밝히고, 신성한 빛으로부터 생명과 사랑과 평화가 태어나는 과정을 우리 눈앞에 펼쳐 줄, 새로운 예술가를 기다린다.
[1] 라이너 마리아 릴케, 『두이노의 비가』, 손재준 옮김, 열린책들, 2014, p.348.
[2] 국내에 출간된 연구서 중 방혜자를 단독으로 다룬 책은 윤난지의 『마음의 빛: 방혜자 예술론』(풀잎, 2009)이 유일하다. 그런데 윤난지는 방혜자의 작품 세계와 『빛의 메시지』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다.
[3] 기타 말라스, 『빛의 메시지』, 방혜자·알렉상드르 기유모즈 옮김, 열화당, 2018, p.7.
[4] 기타 말라스, 위의 책, p.5.
[5] 기타 말라스, 위의 책, pp.6-7.
[6] <방혜자의 삶> 영상, 메타갤러리 라루나, 2022. https://youtu.be/7XsSvEAxcZ0 (검색일: 2023-08-15)
[7] 기타 말라스, 위의 책, p.71.
[8] 기타 말라스, 위의 책, p.262.
[9] 기타 말라스, 위의 책, p.263.
[10] 기타 말라스, 위의 책, p.235.
[11] 기타 말라스, 위의 책, p.47.
[12] 기타 말라스, 위의 책, p.41.
[13] 방혜자, 『마음의 침묵』, ㈜여백미디어, 2001, p.42.
[14] https://www.metagallerylaluna.com/Exhibitions/Artist_Bang/tour.html 방혜자 초대전 《빛의 메시지》(메타갤러리 라루나, 2022) (검색일: 2023-08-15) 이 전시는 메타버스 전시로 진행되었으며, 2022년 9월 15일 방혜자 화백 별세 후 영구 추모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 글에 언급된 모든 작품은 이 전시의 웹사이트에서 관람할 수 있다.
[15] 방혜자, 위의 책, p.43.
[16] <원로작가 디지털 아카이빙 – 방혜자> 영상(영문), 예술경영지원센터, 2022. https://youtu.be/6IgfrKebtqk (검색일: 2023-08-15) 인용문 내 강조는 필자.
[17] 방혜자, 위의 책, p.18.
[18] 방혜자, 위의 책, p.19.
[19] 마르틴 하이데거, 『숲길』, 신상희 옮김, 나남, 2020(2판), p.363.
[20] 마르틴 하이데거, 위의 책, p.364.
[21] 마르틴 하이데거, 위의 책, p.366.
[22] 마르틴 하이데거, 위의 책, p.367.
[23] 방혜자, 위의 책, p.71.
[24] 방혜자, 위의 책, p.74.
[25] 마르틴 하이데거, 위의 책, p.368.
[26] 방혜자, 위의 책, p.119.
[27] 윤난지, 『마음의 빛: 방혜자 예술론』, 풀잎, 2009, pp.78-79.
[28] 방혜자, 위의 책, p.47.
[29] 방혜자, 위의 책, p.37.
[30] 방혜자, 위의 책, p.38.
[31] <원로작가 디지털 아카이빙 – 방혜자> 영상(영문), 예술경영지원센터, 2022. https://youtu.be/6IgfrKebtqk (검색일: 2023-08-15)
[32] 기타 말라스, 위의 책, p.162.
[33] 기타 말라스, 위의 책, pp.214-215.
[34] 기타 말라스, 위의 책, p.55.
[35] 방혜자, 위의 책, pp.39-41.
[36] 방혜자, 위의 책, p.64.
[37] 방혜자, 위의 책, pp.64-66.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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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작가를 알게되어 기쁘네요. 가슴이 두근두근 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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