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케이팅은 성공했다. 현실은 변조되었다. 더 정확히는 현실성이. 지난 4월 L.A.D에서 열린 ⟪STUCK⟫ 전은 작업을 보기 위한 전시라기 보단 공간을 이질적으로 개축한 코딩에 가까웠다. 환각의 가미를 위해 L.A.D의 공간성을 한껏 이용한 일은 영리했다.(L.A.D엔 정경을 1인칭 어드벤처 시점의 ‘맵’처럼 표상하는 효과가 기입되어 있다.) 공간을 두고 할 수 있는 여러 고민 중 ‘체험’에만 한정했을 때, 공간-전시-효과-체험의 사슬을 조율하는 기예는 부지불식간에 눈앞의 현실을 오픈 월드 스타일의 게임으로 바꿔쳤다. L.A.D의 지상과 지하는 카페와 전시장으로 구분되어 각자 다른 유희를 벌인다. 전시장까지 가기 위해선 카운터와 좌석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층계 옆 장막을 걷고 내려가야 한다. 동선의 양적 등차는 관람객에게 플레이어의 환상을 덧씌운다. 카운터의 알바나 좌석의 손님들은 한정된 공간만을 점유하는 정적 존재이며, 관람객은 카페 전체를 뒤지고 다닐 수 있는 동적 존재로 구별된다.
다시 말해 나는 플레이어이며, 손님과 알바는 NPC라는 불순한 사유를 충동질하면서 전시공간과 전시내용은 소급적으로 공명하게 된다. 이는 데카르트적 유아론적 주체를 떠올리게 만든다. 나만이 주체적 수행성의 담지자라는 1인칭 게임적 가상. 익숙한 비판은 게임이 그러한 상상을 주입하고 주체성을 생산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훈육이자 유화책이라고 놓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너무나 직관적이다. 이런 환상에서 우리가 지각할 점은, 그것이 사실처럼 표상하는 세계 안에 놓여있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비관계를 상상하라. 그들은 처먹고 사진 찍고 피상적인 사교성을 업로드하기 위해 소문난 가게를 찾아 우르르 몰려다니는 ‘대중’들이고, 나는 이 공간의 이스터 에그를 찾아내 ‘진엔딩’을 보려는 ‘플레이어블’한 주체처럼 차별 지어진다. 브루노 라투르가 타이베이 비엔날레에서 기획한 “당신과 나는 다른 행성에 살고 있다”를 떠올려라. L.A.D의 공간성은 바로 그 세계관의 축소판이다. 그들과 우리가 같은 공간에 있다 해도,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공간에 대해 말을 나눠도 서로는 외계어를 하는 냥 각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상대에게 접근하는 일은? 이벤트처럼 경험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헌팅’이라고 불러왔다. 게임에서의 사냥과 실제 헌팅은 여기서 동음인 이유 하나를 드러낸다. 말을 건 순간 공간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장르로 변형될 것이다. 몬스터도, 미연시 내의 히로인도 공략의 대상처럼 나타난다. 현실의 헌팅도 마찬가지로 상대를 객체로 놓는 일이다. 초등학교 1학년, 게임이 무엇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시작한 ‘바람의 나라’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 하나는 한 여성 캐릭터가 게임 내에서 밤이 찾아오자 “밤이 되었으니 섹스를 해야지.”라고 말하는 순간인데, 여러 남성 캐릭터들이 몰려가는 통에 나는 섹스가 뭔지도 모른 채 여성 캐릭터에게 가까이 가려 방향타를 연타했다. 간택(?) 받은 한 남성 캐릭터와 여성 캐릭터가 취한 행동은 마주보고 춤추는 모션 매크로를 반복하는 일이었다. 이를 단순히 저차원의 모방적 리얼리티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영상통화 앱을 통해 서로의 자위행위를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일이 창궐한 것을 보면, 외려 게임이 일찍이 도래할 현실을 예증하고 있던 것 아닐까.(물론 포르노에 관해서도 같은 논변이 가능하며, 시간의 선차성을 다툴 수 있지만 여기서는 제쳐두겠다.) 정리하자면, 절대적으로 이격되어 닿을 수 없는 게임적 거리는 현실의 반영이 아닌가. 공간이 만들어내는 분열은 인격을 사물로 환원하는 게임적 상황과 일치한다.
전시장으로 들어가자. 지하실의 분획된 공간은 끝과 틈을 활용해 작업들을 놓아두었다. 범속한 전시들은 작업들이 자신에 대해서 말한다. 그렇기에 관객은 전시를 읽어내기 위해서 작품을 봐야 한다. 즉 그것은 작품이 ‘내부에’ 품고 있는 이야기에 관한 독서이며, 작가의 ‘작업세계’에서부터 나왔다는 식상한 족보를 일람하는 일처럼 반복된다. 그러나 ⟪STUCK⟫에선 작품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1층의 카페를 지나 생경한 지하로 내려가면서 1인칭 어드벤처 게임은 본격적으로 인스톨된다. 이때 전시장은 미궁으로 전환되며 주체에게 관람이 아닌 탐색과 배회의 경험을 제공한다. 지하의 갖가지 작업들, 예컨대 안태원의 고양이는 미스코딩되어 맵의 완결성을 깨뜨리는 글리치처럼 나타나며, 유지오의 작업은 풍광을 조성하는데 필수적인 ‘인위적인 것’의 흔적을 남긴다.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실험 플라스크 같은 작업들과, 기계화된 부두를 수행하는 듯한 설치물들은 모두 이곳에서 어떤 음산한 실험 내지는 주술이 일어났던 공간이었다는 착각이 들도록 유도한다. 이현우의 박제와 토템들은 디아블로II와 같은 고어 디스플레이를 보여주면서 소품이자 그래픽적인 것이 된다.
결과적으로 이들이 구현해낸 것은 전시가 아닌 오픈 월드 맵이며, 그것을 현실 어딘가에 착지시켜 미학적 테마파크를 추동시켰다. 풍경과 달리 풍광은 인위적인 요소가 스며있는 낱말이다. 우리가 보는 풍광은 제작된 환상을 보도록 지시한다. 그 환상은 완결된 전체로써 나타나지 않는다. 깨진 픽셀을 통해 ‘네가 보고 있는 것은 환상일 뿐이야’라고 말하려는 듯 보인다. 그렇기에 우리는 환상에서 깨어날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 L.A.D를 빠져나오면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체험과 게임적 스테이지로 남겨둘 수 있게 되면서 현실과 환상이라는 분할을 보존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한층 더 내려가서, 보르헤스의 ‘영토를 덮은 지도’를 떠올리고 유비해본다면 어떨까. 이들이 만든 것은 하나의 ‘맵’이다. 이는 전시 경험을 효과적으로 축약하는 낱말일 수도 있지만, 인식론에 관한 직접적 힌트일 수도 있다. 보다 현실에 가까운 지도를 작도하기 위해 지구를 한 겹 덮는 1대1 축적의 지도를 그렸다는 마술적인 우화를 빌려, 이 장소가 한 겹 덮인 현실의 드러난 부분이라 여긴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현실을 들출 끄트머리를 찾았다. 그 조각은, 현실이 가장 거대한 단위로 축조된 환상이라는 구분 없는 전체로 우리를 인도한다. 즉, 현실도 (홀바인의 <대사들>에서 나타나는 해골과 같은) 저 늘어진 고양이처럼 기이하게 구부러져 있으며, 근본적으로 현실과 환상이라는 분할은 그릇된 인식이라는 결과로 말이다. 공간의 위상은 뒤집어진다. 알고 있던 현실은 진정으로 체험적인 가상이며, 가벼운 환상으로 코딩되었다고 믿은 L.A.D의 지하가 가상을 일깨우려는 시도였다는 도치. 이때 플레이어의 스킨은 주체성과 가상성의 두 겹으로 모델링되었음을 알게 된다. 안준형의 주장대로 게임 내에서 플레이어는 NPC와 반대로 주체성을 함의하는 자처럼 나타난다. 그는 “플레이어는 그들의 자율적인 의지에 따라 퀘스트를 수행하고 몬스터를 사냥한다.”고 말한다. 허나 이는 사실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자동사냥은 타동적 삶의 직유이기에 플레이어의 반복적인 플레이는 NPC의 반복되는 대사만큼이나 식상하다. 그런 점에서 플레이어가 순진하게 게임을 플레이하는 일은 외려 플레이어와 NPC의 간극을 지우는 일이 된다. ‘플레이어블’한 행위는 게임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롤과 룰을 초과하고 그것의 한계 자체를 시험하려고 들 때 나타난다.
‘플레이어블’함에 관해선 다음 몇 가지 실제 사례를 참조하자.
울티마 온라인 리처드 게리엇 암살 사건
울티마 온라인 게임에는 운영자이자 개발자인 리처드 게리엇의 GM캐릭터인 ‘로드 브리티쉬’가 있었다. 게임은 이 캐릭터가 있어야만 시나리오를 전개할 수 있었기에 ‘로드 브리티쉬’는 게임의 플레이어이자 NPC인 잡종적 정체성을 가졌다. 베타 테스트 도중 ‘레인즈’ 외 2명의 캐릭터가 GM 살해(?) 공모를 하고, 다른 2명이 GM의 시선을 끄는 사이 레인즈라는 유저가 은신 능력으로 몰래 GM의 뒤로 이동해 ‘파이어 월’을 연타해서 GM을 죽이는 데 성공한다. 분노한 리차드 게리엇은 발록 수백 마리를 필드에 소환해 당시 게임을 즐기던 유저들을 깡그리 학살한다. 이후 게임 약관을 어겼다는 이유로 레인즈라는 유저는 영구 추방된다.
울티마 온라인 슬라임 테러 사건
울티마 온라인의 슬라임은 공격을 받으면 2체로 분열하는 특성이 있었는데, ‘Chrae’라는 유저가 이 특성을 활용해 슬라임을 포획해 집 안에서 슬라임을 반복 분열시켰다. 이후 문을 개방해 걷잡을 수 없는 수의 슬라임을 마을로 출격시켰다. 물량공세를 감당하지 못한 마을은 초토화되었고, 심해진 렉에 서버까지 무너졌다. 이후 그는 운영진에게 대량의 게임머니 송금을 요구하며, 거절 시 도시 전체를 테러하겠다는 협박을 한다. 다시 서버는 터졌고, 운영진은 슬라임의 특성을 패치하여 사건을 종결한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W) 전염 사건
게임 내 레이드 던전의 보스 학카르는 ‘오염된 피’라는 디버프 기술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디버프는 걸리면 지속적으로 250~300의 피해를 입고 주변의 플레이어에서 오염된 피를 전염시키는 전염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본래 던전에서 나가면 디버프가 사라지도록 설정되어 있었지만 디버프에 걸린 펫을 잠깐 소환 해제한 후 던전에서 나간 뒤 재소환하면 디버프에 유지가 된다는 버그가 있었다. 결국 한 플레이어가 도시에 전염된 펫을 소환시키는 테러를 벌이고 전염병이 퍼지기 시작한다. 병은 NPC에까지 퍼지게 된다. 결국 블리자드가 서버를 리셋시키면서 오염된 피 사건은 막을 내린다.
메이플스토리 암허스트의 왕 목격 사건
초등학교 5학년 즈음, 이 매력적인 사이드 뷰 게임은 레벨이 8이 되면 마법사로, 10이 되면 전사, 도적, 궁수로 전직하도록 했다. 암허스트는 그때까지 레벨을 올릴 수 있는 초보존으로, 각자 맞는 레벨이 되면 암허스트를 떠나 전직을 하러 다른 맵으로 떠나야 했다. 당시 나는 마법사로 전직하기 위해 열심히 사냥 중이었는데, 거기서 ‘암허스트의왕’이라는 ID를 가진 유저를 만난다. 그 유저의 레벨은 15. 그저 달팽이만 나오는 맵에서 캐릭터의 장래가 망가지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특정 스테이지 내 최고 레벨로 군림했다. 모르긴 몰라도 그는 전 서버, 전 시간대를 통틀어 초보존에서 가장 높은 레벨을 구가하는 유저가 되었을 공산이 크다.
검우강호 반전시위 사건
모바일 자동사냥 게임이 번창하면서, 나 역시 그것의 경험을 위해 무협 게임을 다운로드했다. 일정 레벨을 올리고 길드에 가입했고, 길드는 게임 내 컨텐츠인 길드전을 시작했다. 나는 곧바로 게임의 전쟁 필드로 이동하지 않고, 일반 맵 내의 연무장으로 이동해 그곳에서 반전시위를 펼치고 월드맵 채팅을 통해 전쟁을 중지하라고 외치며 동료들을 모았다. 전쟁터로 강제이동 된 후엔 길드마스터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별동대를 조직했다는 컨셉을 쓰고 따로 돌아다니면서 맘대로 특공을 자행했다. 이후 길드에서 전력이 되지 않고 훼방을 놓는다는 이유로 추방당했다.
위의 세 사건과 아래 두 사건은 성격상 큰 차이를 갖는다. 위의 세 사건은 시스템의 구멍을 발견하고 그 구멍을 외번시켜 전체를 장악하는 위력을 떨쳤다. 순간 주체성의 압도가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래 두 사건은 아주 미약한 거부거나, 반항이거나, 컨셉질에 지나지 않는, 초주체적인 것에 가까운 행위였다. 현실은 어떻게 다를까? 현실은 게임보다 몇 배는 복잡한 룰을 통해 주체성을 규정하고 생산하며 인간을 플레이어 격의 ‘개인’으로 호명한다. 그러나 반복되는 행위들. 학업, 취업, 여행, 전시 등의 컨텐츠는 모두 사회적으로 용인되어 있는, 개발된 컨텐츠이다. 허락된 컨텐츠이기에 그것을 답습하는 일은 플레이어로 살아간다는 착각에 머물게 한다. 시스템과 얽혀들지 않는 수준의 일탈 역시 반짝 주체적일 수 있겠지만 아무 일도 없을 사소함에 그친다. 그렇다면 플레이어는 명명될 수 없고, 오직 ‘플레이어블’한 수행성 속에서 적극적으로 규명되고 발견될 뿐이며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선 바로 그런 행위를 찾아내야 하는 걸까?
이때 고개를 주억거렸다면 당신은 다시 한 번 속고 만다. 고약한 농담처럼 들리겠지만 이 지점이 수행성을 통해 주체성이 조감될 수 있다는 궁극의 자유주의적 착각으로 당신을 몰아넣는 트랩이다.(논의를 고작해야 버틀러와 근사한 수준에서 마감치려 했다면 애초에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플레이어가 두 겹으로 모델링되었다면, 스킨도 두 번 찢어져야 한다.(왜 원코인 플레이가 두 개의 목숨을 지녔겠는가?) 우린 이제 겨우 주체성이라는 한 겹을 찢었을 뿐이고, 가상성이라는 다른 한 겹의 스킨을 마주하고 있다. 두 번째의 스킨은 어쩌면 게임 캐릭터가 일시적으로 붕괴되었을 때처럼 그저 ‘무’만을 내부에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스킨 너머의 내부로 향하자고 제안하는 일은 관두겠다. ‘개인’의 차원에서, 주체성과 수행성의 차원에서 대답을 기대하는 일은 단념하자. 가상 너머의 내핵이자 리얼리티로 돌진하자고 성급하게 외치지도 말자. 그렇다면 향할 곳은 어디인가. 전시가 주는 힌트를 믿어 봐도 되지 않을까. 글리치에 관한 뜨거운 관심은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오늘날 현실은 무엇인가? 그것은 버그이다. 전체의 완결성을 자체 내에 부정하고 있는 조각을 품은 오픈 월드 맵이다. 그렇다면 주체란 무엇인가? 그것은 상동증이다. 버그 맵 안에서 강박 섞인 반복을 지속하며 쾌락을 겁내는, 동적 정지 상태의 불투명한 스킨이다. 현실이 모순덩어리기에 요점은 모순을 감추고 현실을 작동시키는 착란의 베일을 수색하는 일이다. 최근 들어 무지막지하게 늘어나는 회귀물 만화들은 ‘이번 생은 망했다’는 비극의 문화적 보상기제는 아닐까? 아쉽게도 우리는 원코인 투라이프의 게임 캐릭터가 아니다. 그렇다고 과거로 갈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지금이 망해버린 시간대라면, 다른 분기가 가능했던 과거의 선택지들을 여기에 소환해라.
현실도 환상도 펄럭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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