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국밥 상호작용 ‘우리가 남이가’

  ‘우리가 남이가’라는 문구는 영남지역의 방언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1992년 초*복국집 사건 당시 돈 봉투 만찬 속에 한 엘리트 검사가 외치면서이다. 당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지역감정을 부추겨 선거에서 승리하고자 했던 모임에서 나온 이 한마디는 실제로 대한민국의 지역주의와 집단주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구가 되었다. 해당 발언은 사건의 구체적인 내용은 몰라도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정도로 파급력이 컸던 구호로 현재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2021년 대구미술관에서 진행된 ‘유머랜드 주식회사’라는 이름의 Y(Young) 아티스트 프로젝트에서 이승희 작가는 ‘우리가 남이가’라는 문구가 적힌 LED 설치 작품을 선보였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개인이 사회에서 경험하는 구조적 모순과 관습적 행위를 관찰하고 비판적으로 묘사하며 공동체의 양면성을 재치 있게 꼬집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부터 “공동체 의식은 민주시민으로 성장하게 한다” 등 인터넷상에서 검색된 ‘공동체’라는 단어의 정의는 매우 다양하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문구는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는 말이 맞다. 하지만 진짜 한통속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 문구는 때론 극단으로 치닫기도 한다.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진 운명공동체가 되어야만 한다는 가스라이팅과 함께, 이익이 걸린 상황에서 사람들은 더 쉽게 통제받기도 한다.

  예술계에서도 특정 지역 혹은 집단 커뮤니티는 항상 존재해 왔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문구를 사용해서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는 예술 안에 존재하는 몇몇 집단들의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최근 문화공동체 □□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단체와 업무적으로 엮이는 일이 있었다. 그들의 독자적인 운영 방식을 보고 있자니 ‘공동체’를 어찌 이리도 당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문화예술 속 세계는 늘 그들만의 리그로 존재하는 것 같다. 일부 지식인으로 치부되는 이들의 보수성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어 새로운 목소리나 창의적인 시도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기존의 틀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크다. 일부 단체는 권력 남용을 통한 갑질을 일삼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정말로 ‘공동체’라는 이름에 걸맞은 가치를 실현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겉으로는 잘 포장된 속 빈 강정 같다. 공정한 예술 환경 조성이 그리 힘든 일일까? 그들의 무례함에 여러 번 따져 물어봐도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직도 순진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이런 단체가 한 지역을 대표하는 영향력 있는 활동가들의 모임이라는 사실이 참 씁쓸하다.

  이번만 해도 행사명에 지역이름이 들어가 있어 마을 주민들과 진정한 연대를 위한 장이 형성되나 싶었다. 기대와 달리, 수십억의 예산을 들인 행사가 단순히 정치인들의 홍보나 개인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단체는 그저 윗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하고 정치인들은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행사를 이용하는 거 같아 이 모든 노력과 에너지가 헛되이 소비되는 것처럼 보였다. 한국의 예술씬 안에서는 아이러니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눈에 띄는 자, 소위 말하는 나대는 자들의 차지가 되는 반면, 진정한 예술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은 종종 가려지는 거 같다. 예술씬 내의 권력 구조가 사회의 불균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거 같아 안타깝다. 능력보다 모호한 정체성과 이권 취득 요령이 더 중요시되는 현실은 빈약한 집단지성을 통해 오류를 유발하고, 관계주의의 영향력은 개별 구성원의 판단력마저 흐려지게 한다.

  소수의 집단은 보편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 투쟁하기도 한다. 일부 문화예술 단체도 단순히 가치나 의미의 집합체가 아니라 개인과 집단의 이익을 조정하고 반영하는 존재인 것 같다.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의 ‘헤게모니 이론’에 따르면 집단은 이익을 추구하는 동시에 그에 따른 불안감을 느낀다. 이 양가적 감정 상태(이익과 불안)가 기존의 사회구조와 관습을 반복하게 한다. 이러한 상황은 집단이 구조적 모순을 인식하고 변화하려는 노력 대신 현재의 구조를 지속적으로 재생산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예술계의 권력 구조와 문화적 패턴 또한 단순히 개인적 욕망이나 집단의 이익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규범과 관습을 통해 지속적으로 재구성되고 있는 것 같다.

  이익과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발버둥과 지역사회=마을이 주는 묘한 동조의식에 의해 지배당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앞선 행동을 따라하고 그 집단에 고립되거나 모욕당하지 않으려 행동한다. 또한 집단의 압력은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판단력마저 흐리게 한다. 그러니 다원성과 다양성이 상실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데 집단에서 행사하는 예술이 무엇을 대표하는지, 그 복잡한 기능과 잠재적 가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술 안에서 단체 활동은 미래주의, 다다 등 근대 초기 예술 운동의 형태로부터 발전해 왔다. 이들은 보통 한 집단이나 소수를 대변하거나 제도에 반하는 목소리를 내며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해 왔다. 본격적으로 컬렉티브(Collective)의 시대가 열리면서 이는 팀, 집단, 공동체, 그룹, 단체, 모임, 듀오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예술집단이 공통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함께 일하는 예술가 그룹으로 설명할 수 있다. 예술씬에서 이들의 활약은 더욱 주목받고 있으며, 그 중요도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컬렉티브는 협업을 통해 더 큰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원의 공유와 구조적 문제에 대한 대응을 모색하며 새로운 의미와 실천의 지형을 만들어 나간다.

  최근 도큐멘타(documenta)나 비엔날레(biennale), 다수의 아트페어(fair)에서는 집단을 조명하고 그들의 작업을 중점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대부분 컬렉티브는 위기의 시기 속에 생겨나기 마련이다. 특히 인도네시아 아티스트 컬렉티브 루앙루파(Ruangrupa)는 컬렉티브의 힘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루앙루파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를 기반으로 2000년대 초반에 설립된 예술가 집단으로 시각 예술, 설치 미술, 미디어 아트, 공연,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국제적으로 활발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지금이야 루앙루파라 하면 인도네시아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단체로 알고 있지만 처음 컬렉티브를 결성할 당시 인도네시아의 시대적 상황은 개인 작가가 작업을 이어나가기 쉽지 않았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작업을 지속하기 위해 이들은 팀을 결성하고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주제를 탐구하며 지역 사회와 연계를 중요시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인도네시아는 과거 독재의 상흔을 치유하고 극복하기 위한 도구로서 존재하는 예술 형태가 대부분이다. 특히 자카르타, 욕야카르타 중심으로 정치적 저항을 보여주는 접근법을 통해 적극적인 형태의 예술적 실천을 보여준다. 루앙루파 역시 작업을 통해 지역 사회의 문제를 반영하고 전통예술과 현대예술의 경계를 허물며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꾸준히 모색해오고 있다. 또한 이들은 돌봄(care)이라는 담론을 내세운다. 라틴어로 ‘돌보다(care)’는 ‘curare’에서 비롯된 것으로, curating이라는 단어에는 ‘치료하다, 치유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콘티(Conti)는 과테말라 출신 예술가 벤베누토(Benvenuto Chavajay Ixtetelá)를 통해 이를 설명한다. Tz′utujil 언어(과테말라어)에는 예술가라는 특정 단어는 존재하지 않으며, 의사, 음악가, 치유, 공동체, 생활 공유 같은 의미를 포괄한다고 한다. 이는 현대에서 새로운 예술 집단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예술은 단순히 미적 경험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 공동체의 치유와 회복, 그리고 사회적 변화를 이끄는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다. 풀뿌리 접근 방식을 통한 혁신 가능성을 보여주며 탈중심화와 다양화 추구를 통해 폭넓은 성장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지난 도큐멘타15에서 루앙루파는 ‘룸붕(Lumcung)’이라는 주제를 내세워 어떻게 지역사회 안에서 연대하고 연결하는지 보여준다. ‘마젤리스(assembly)’라 이름 붙여진 회의 테이블에선 다수의 컬렉티브가 참여해 아무런 제약없이 사람들과 나란히 앉아 의견을 공유하고, 문제를 논하며 공동 작업을 이어나갔다. ‘연대티켓(solidarity ticket)’이라는 이벤트를 진행하기도 했는데 불특정 다수의 관람객이 티켓을 구매할 때 하나를 더 추가 구매하여 재정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전시회를 무료로 관람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티켓 값을 지불할 수 없는 사람들이 전시를 관람할 수 있게 하고 엘리트적 태도에서 벗어나 연대와 돌봄의 실천을 통해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한다. 이런 측면에서 인도네시아 루앙루파와 같은 예술가 컬렉티브의 활동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과 진정한 예술의 가치를 일깨워 준다.

  ‘주변’에 속하는 예술가들의 위기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일시적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반복을 통해 지속성의 힘을 발휘한다. ‘일시적인 반복’을 통해 그들은 새로운 정보를 생산해 낸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변화를 이루기 위해 뭉치고 조직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컬렉티브가 아닌가? 어찌 보면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은 항상 틀린 말은 아니다. 때론 새로운 목표를 가지고 ‘함께’ 작업한다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맹목적인 따름이 가져오는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한 현명한 대처법 역시 필요하다. 공동체의 목표를 잘 실현하기 위해 어떤 여건이 수반되어야 하는지, 어떤 태도가 필요한지 등 공동체라는 한계 속에서도 우리가 어떤 지점을 바라봐야 하는지 떠올려보자.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지점은 단일한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대응 방식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실천을 일궈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남이가, 2020, LED 조명, 혼합매체,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스테레오), 3분 16초, 가변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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