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과 절망: 미술계의 ‘불독화’ 현상과 ‘차축붕괴’ 이후의 방향상실>
#1. “어린 양이 제7의 봉인을 뜯었을 때, 하늘은 반시간 정도 침묵했다.”[1] (계 8:1)
#2. “우리들이 알고 있는 5천 년간의 인류 역사는 그보다 수백 배나 긴 선사시대와 어떠한 측정으로도 불가능한 미래 사이에 놓여 있다. 지상에 인류가 생존한 이후 그러한 역사란 장구한 시간에 비하여 보면 지극히 짧은 시간에 불과하다. 역사는 선행하는 세계에 대하여 개방되어 있고 미래 세계에 대하여 개방되어 있다.” (칼 야스퍼스, <역사의 기원과 목표> 중에서)
‘정지한 시제’의 조건
현재 한국 미술계의 비평에는 ‘시제’에 관한 사항이 삭제된 채 해당 작가의 ‘세계’ 속으로 잠수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시제’라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말할 수 없는 시대”(루쉰) 라고 할 때의 감각이다. 즉 자신이 미래에 대한 전망이라거나 과거에 대한 호고[好古] 취미라든가 하는 태도와 함께 통상 시간을 하나의 강처럼 흐름을 갖고 이어진다는 전제가 작동할 때의 그 ‘시제’이다. 그러한 ‘시제’의 감각이 한국 미술계의 평문들에서는 어느덧 일제히 사라진 상태[2]이다. 이것이 시사하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모던’, ‘모더니티’라는 시간성이 19세기 후반 인상주의의 빛이 새롭게 응결한 ‘현재’의 자기암시로부터 시작되어 20세기 모더니즘의 사조로 이어져 온 역사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소위 ‘포스트’라는 접두어는 흔히 ‘후기’ 혹은 ‘탈’로 옮겨졌으나, 지금의 시점에서 회고하면 그것은 ‘종언’으로 되새길 수밖에 없다. 이에 관해서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조슬릿은 “’포스트’는 포스트모던이라는 골치 아픈 범주에서처럼, 혹은 더 최근의 계승자인 포스트미디엄에서처럼 이전 시대와 그 시대 고유의 양식이 종료되고 변형되었음을 가리킨다”[3]라고 명료화하고 있다. 그런 흐름을 읽고 사조로서의 모더니즘은 다시 시간성으로서의 모던으로 회귀하려는 시도가 종종 발생하기도 했지만, 이는 종언의 과정에서 단말마의 필름이 풀리는 현상에 해당되었다.
이렇게 자기 시대를 스스로 시간성의 메타 언어로 휘감아서 미래로 투사하는 방식, 즉 변증법의 역사화 방식이 사라진 시대에서 미술은 이 ‘정지한 시제’의 조건에서 무엇을 하고 있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만일 무엇인가를 한다고 인정할 때, 시대의 니힐을 넘어서서 의미 있는 역사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이러한 질문을 회피하고 있으면서 앞서 말한 것처럼 해당 작가의 ‘세계’ 속으로 잠수하는 경향이 반대급부로 강해지고 있다고 필자는 진단한다. ‘내가 살고 있는 시대를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라는 자문 없이 작가마다 고유하게(?) 펼쳐내는 세계상들을 공시적으로 접근하는 평문에는 분명히 어떤 자기착란과 죄의식이 희미하게 묻어나는 법이다. 이러한 진단에 보다 박차를 가하기 이전에 선행해서 해야 할 이야기들이 있다.
차축시대의 붕괴
1996년 일본에서 강의하던 ‘다중적 근대론’의 세계적인 사회학자 쉬무엘 아이젠스타트[Shmuel N. Eisenstadt]를 만난 김우창 교수는 그러한 독특한 근대론 근저에 ‘차축시대론’ 혹은 ‘차축문명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정확한 질문을 던진다.[4]
“한국은 ‘차축문명’에 속하나요? 일본의 경우는 어떤가요?”
“한국은 중국이라는 제국 옆에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으면서 ‘차축문명’에 속해왔던 나라죠. 일본은 아닙니다. 일본은 ‘차축문명’에 속하지 않는 아주 독특한 경우죠.”
이런 일련의 답변과 이어지는 대화에서 강한 인상을 받은 김우창 선생은 야스퍼스의 <역사의 기원과 목표>을 공부하게 되었다고 술회한다. 이는 근대 중심의 관점으로만 역사를 상대할 수 없다는 직관 때문이었다. 즉 기원전부터 기원후까지 약 천년 동안 이루어진 ‘차축문명’[The Axial Civilization]이란 페르시아 조로아스터[=짜라투스트라]를 필두로 그리스 솔론,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등과 인도의 붓다, 아라비아의 마호멧, 중국의 공자 등등 우리가 철학과 종교로 이해하는 지혜가 역사를 구동하는 축[軸, The Axis]이 되었는데, 이 구동축의 관점 없이 근대를 바라보는 것은 글로벌 히스토리의 시야를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김우창 교수가 일본의 석학 가라타니 고진과의 대화 속에서 세계 체제의 <중심-주변-아주변>의 도식을 교환하기에 이른다. 고진만 해도 월러스타인이 제창한 세계체제론의 구도로 볼 때, 서유럽 세계가 ‘중심’이 되고 일본은 ‘주변’ 그리고 한국은 ‘아주변’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차축문명론’의 관점에서 볼 때, 김우창 교수는 일본이 되레 ‘아주변’이고 한국은 ‘주변’으로서 ‘중심’을 상대해 왔다는 통찰이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해지는 것은 어떤 경우인가.
김우창 교수가 접한 아이젠스타트의 답이 굉장히 특이하면서도 예리한 것은 일반적으로 서구 근대에만 도그마틱하게 착목해 온 시각의 역사적 맹점을 찌르고, ‘차축문명론’에 입각하여 ‘근대’조차도 일종의 ‘차축-근대’로 바라보게 했다는 것이다. 이 시각교정은 매우 중요하고, ‘정지한 시제’의 현재 미술계를 바라볼 때 매우 유효하다고 본다. 즉 ‘차축-근대’가 종언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2천6백 년 이상 지속해 온 ‘차축문명’이 현재 붕괴되고 있기에 ‘근대’ 역시 시간의 벼랑 아래로 내던져진 셈이다.
이러한 ‘차축붕괴론’에 따른 ‘차축-근대’의 종언이란 관점을 채용하는 것이 왜 긴요한가. 이에 관해서는 탈중심화된 서구라는 포지션을 우리가 진정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한국 미술계의 아젠다로 등장할 수 있다. 가장 비근한 예를 든다면, 러시아계 미국 SF작가 아이작 아시모프의 <영원의 끝>[5]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시간의 순환을 다시 한데 엮는 길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그리고 우리 능력으로 그 방법을 찾을 확률이 아주 높다는 얘기야. 이 현실이 아직 존재한다는 걸로 볼 때 해결법이 존재할 가능성 또한 아주 높다고 봐도 돼. 만약에 너나 내가 어느 순간에 잘못된 결정을 내리면, 그래, 순환을 치료할 수 있는 가능성이 일정 수치 이하로 떨어지면, 영원은 사라지겠지. 무슨 얘긴지 알겠어?”(263쪽)
이 소설은 앞서의 ‘차축문명’을 하나의 ‘영원’[The Eternity] —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태초부터 아득한 미래까지의 모든 시간들을 담수한 일종의 저수지 같은 장치 — 이라고 설정하면, 설득력을 갖게 된다. 특수공작원들이 과거 시대로 시간여행을 한 다음에 결정적인 사고를 쳐서 미래들을 바꾸는 게임을 무수히 반복하는데, 이 ‘영원’이란 시간의 저수지는 요지부동이다. 즉 칸트를 마르크스로 횡단독해하고 벤야민을 들뢰즈와 병치하고 신유물론을 애니미즘과 습합시키는 사상적 실험을 언뜻 떠올려 보자. 이런 시간순환적이고 시간횡단적인 실험이 미래에 새로운 효과를 자아낼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예술적인 방식의 시도를 하지만, <영원의 끝>이 알려주는 것은 주어진 제도 속의 끊임없는 시도가 미래사회의 변화를 열어두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 오히려 지나친 근친혼에 의해 ‘합스부르크 피드백’[6]이란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미 시간의 저수지 자체가 ‘영원’의 시간을 담수하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유한성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유한성의 저수지 안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시간이 고여서 썩고 있는 게 아닌가!
이러한 인식을 공유하면서 시간의 저수지로서의 ‘영원’ 즉 ‘차축-근대’를 허물어뜨리는 것이 매우 래디컬하게 각성한 이가 ‘특수공작원’ 퀑탱 메이야수[7]라고 볼 수 있다. 현재 사변적 실재론자로 분류되지만, 그가 실제 의도한 것은 칸트의 철학적 정초에 의해 설계된 근대적 시공이라는 시간의 저수지를 허물어뜨리는 작업이다. 이 작업으로 저수지 아래 가라앉아 있던 ‘선조성’의 시간 — 우리가 흔히 선사시대라고 부르는, 나아가 인간이 없던 시대로까지 확장되는 시대 —을 회복하는데, 이는 칸트가 ‘물 자체’라고 봉인해 두었던 다른 시간성이다.
불독화 현상 — 합스부르크 피드백
평자들이 해당 작가의 ‘세계’ 속으로 잠수해 들어가는 것은 일종의 ‘정지된 시제’의 조건 속에서 어떤 얼어붙은 ‘우연’을 발견하기 위한 것일까. 눈앞에 들이댄 포크에 찍혀있는 점심 식사는 내사시 상태에서 어떻게 착란을 일으킬까. 한국 미술계의 비평이 ‘시간 없는 시간’이자 ‘정지된 시제’라는 결계를 인식하지 않고서 작가의 ‘세계’만을 상대하는 것은 여전히 모더니즘의 끝물이 언데드[undead] 상태로 지속되고 있는 듯이, 그러나 여전히 내색하지 않으면서 진행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의 저수지로서 ‘차축-근대’의 영원할 것 같은 착각이 깨어졌지만, 그 이후에 나타나야 할 시간-각성은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존재한다면, 저수지 아래 가라앉아 있던 다른 시간성과 그에 기초한 ‘은폐된 내러티브’가 슬슬 시동을 걸기 시작할 것이다. 여기서 ‘은폐된 내러티브’란 미술의 역사를 기술하는 다른 방식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애초에 그 기점과 얼개가 전혀 다르게 발견(!)되는 일이다. 기존의 세계체제로서의 미술계를 언뜻 무시하는 듯한 이러한 제언은 사실 현재 와닿을 수가 없다. 언데드 상태라고는 하나, 그러한 지속조차 다시 한 번 영원성의 집단적 믿음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8]
#3. “요령은 레비스트로스가 마침내 스스로를 해체시키기 바로 직전에 그를 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가늠하기 어려운 순간이다. 그것은 버스 안에서 한 사람이 어떤 정류장을 물었을 때, ‘저를 잘 보고 있다가 제가 내리기 바로 직전에 내리세요’라고 대답한 여자 이야기를 상기시킨다. 우리는 레비스트로스의 버스에서 그가 내리기 한 정거장 전에 내려야만 한다. 텍스트에 진정으로 몰두하기 위해서는 구조주의자들이 우리를 위해 말끔히 청소해 놓기 전에 한동안 텍스트의 진창에서 뒹굴어야만 한다. 나는 우리가 공허한 미시 신화에서 멈춰서는 안 되며, 이것을 텍스트로 꽉 채워야만 한다고 주장해 왔다. 이와 마찬가지로 또 다른 이론적 구축물인 거시 신화로 너무 빨리 달려가서도 안 된다. 우리는 텍스트에 오래오래 머물러야만 한다.”(360쪽)[9]
웬디 도니거 같은 여성신화학자는 ‘차축붕괴’의 파국이자 폐허로부터 로제타석 같은 생명서판을 발견하여 그 내부의 ‘은폐된 내러티브’를 읽기를 제안한다. 이는 미술사가 조슬릿이 문화유통의 세 패러다임으로 설정한 1) 이주 예술품 2) 토착 예술품 3) 기록 예술품 중에서 2)와 3)에 해당할 수 있다.[10] “팔거나 줄 수는 없지만 보존해야 하는 것”[11]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실제로 이 영역에서 ‘정지된 시제’의 조건에서 반 시진 정도의 천상의 침묵을 활용하여 이러한 작업을 하는 작가들도 많이 있다. 일일이 열거하는 것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하지만 그보다는 한국 미술계에 ‘불독화’ 현상이 오히려 두드러지는 것이 미술사회 내부의 유행하는 모티브와 작품 경향이 포지티브 피드백을 타고 있기 때문이다. 이 피드백은 인접성의 원리를 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난다기보다 ‘정지된 시제’가 주는 불안과 방향상실 때문에 일어난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표면으로 드러나건 드러나지 않건 많은 표절과 영향 관계의 모호성 사이에서 동종교배의 혐의가 짙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붕괴된 ‘차축-근대’의 언데드 상태를 오히려 강화하는 근친혼적 시도가 미술계 내부에서 더욱 많아지고 있는 것은 ‘불독’처럼 유전적인 병증을 보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불독화’는 비유적인 표현인데, 애초 20세기 초 영국에서 불독이란 견종은 턱의 교합이 잘 맞고 다리 역시 질주에 적합하게 길었다고 한다. 하지만 ‘못생김’이라는 특이성에 착안한 선호층에 의해 열성교배가 활성화되어 지금 우리가 보는 불독, 즉 턱의 심한 부정교합, 가만히 있어도 거친 호흡, 짧은 다리 그리고 각종 유전적 질환 등등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에 비견되는 것이 ‘합스부르크 피드백’이었으며, 이 피드백 하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권력으로 유전적 병증을 위장했고, 여러 겹의 거울상으로 은폐한 사례가 있다. 말하자면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란 그림의 비밀은 푸코의 <말과 사물>이 해명하는 것과 달리 다른 곳에 있다. 초반에 삼중 거울의 중첩 시스템에 비춰지는 복잡한 상[像]의 분석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실은 숨겨진다. ‘불독화’의 휴머니즘을 빚은 소위 ‘합스부르크 피드백‘ 자체 그리고 그 위장술에서 직접적으로 찾아야 할 것은 가장 앞서서 서 있는 공주이다. 유년기임에도 그녀의 턱은 소위 ’합스부르크의 턱‘의 징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러니 푸코가 근대에 만들어진 인간이 소멸할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은 이 턱의 불행에 비춰서 보는 것이 맞는다는 것이다.[12] 해변의 모래밭에서 지워지는 인간의 얼굴은 ’합스부르크 턱‘을 갖고 있음을 상기하면서.
사실 한국 미술계의 다수 작가들이 이러한 턱의 단계에 들어가 있다는 것 — 표절, 도용, 편취, 전유 등등의 광범위한 유행에 의한 피드백 — 이 필자의 견해지만, 그렇다고 구체적인 사안을 지적하는 것은 유보하겠다.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정도에서 그치도록 하겠다.
#4. “포스트인터넷 아트를 해온 것을 후회한다. 구미의 많은 젊은 작가들은 이미 오래전에 시작하여 그 완성도가 뛰어나 경쟁이 되지 않는다. 지금은 그림을 그리고자 한다.” (어느 작가의 사담 중에서)
#5. “작업에 올인할 것인가,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 남는 시간으로 작업할 것인가. 이게 문제이다. 작품이 쉽게 나오지 않고, 그 작품은 적정한 값으로 팔리지 않는다. 기본적인 재생산 구조가 만들어질 것 같지 않다.” (어느 작가의 사담 중에서)
사실 ‘불독화’ 현상이자 역사로서는 ‘합스부르크 피드백’이라고 진단했지만, 작가의 삶의 토대 역시 연약하고 사실상 절망적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객관과 주관은 현재의 자본주의가 곧 근대라고 말하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우울한 어조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2008년 세계금융 대위기 이후, ‘차축붕괴’의 거대한 조류 속에 휩쓸렸지만 그럼에도 언데드 상태의 으스스한 자본주의는 과연 대체가능한 체제인가 라는 근원적인 절망이 있는 것이다. 이 절망은 ‘차축붕괴’ 자체가 자본주의를 파괴한다는 비저너리에도 불구하고 그 붕괴라는 파국은 자본주의와 그 체제를 둘러싼 인간종의 문명 내부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합스부르크 피드백’ 식으로 계속되는 반복강화는 있을지언정 그 바깥으로 나올 수 없으리란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일탈이냐 해탈이냐
김윤호 작가는 이러한 삶의 조건 속에서 “나는 ’절망의 부정적인 것의 반대‘를 선호합니다”[13] 라는 식의 어떤 돌파를 선언한다. 마치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가 직접적으로 부정하지 않고 일탈적으로 우회하듯이. 그런데 우회하지 않으면 그 부정적인 것 자체를 상대하면서 부정적인 것에 상관관계로 연루된다는 듯이. 그의 언어로는 “일탈이냐 해탈이냐” 라는 화두이다. 이 화두는 사실 김윤호 작가가 읽은 일본 망가 <군계>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의 장면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다.
“우리들 방식대로 이겨나가는 거야. 놈들과 맞서려면 정당한 방법으로는 안 통해.”[14]
“일탈해! 쓰잘 데 없는 상식이나 룰에 얽매이지 말고 일탈해라!”[15]
‘영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라고 어느 조언자에게 문의하자, 그는 ‘놈들에겐 ‘룰’이라는 무기가 있어. 간단하진 않을 거다’ 라는 답이 돌아온다. 이 조언에 따라 필연적으로 주어진 게임의 룰을 넘어서는 파해법을 궁리하게 된다. 이 주인공 고뇌의 과정에서 결국 스승이 마치 선불교의 화두 같은 것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일탈과 해탈’ 사이의 관계를 구명하는 물음이다. 김윤호 작가는 주인공이 처음에는 정면으로 맞서지만 주어진 게임의 룰을 움켜잡고 있는 인사이더에 대해 아웃사이더가 주관적 결심만으로 사태가 바뀌지 않음을 깨닫는 과정에 대해 게임의 룰을 바꿔야 할 필요성을 절감한다.[16]
처음에는 “이따금, 많은 시간과 흔적들로 축적된 것이 한 순간에 무너지거나, 새로운 것으로 대처되는 상황들을 접하게 되면서, 그때 발생하는 황량함을 담아보고자 하였습니다.”[17] 와 같은 대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김윤호 작가의 최근 전시에서도 엿보일 정도로 일관된 그 무엇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한편, 그는 ‘차축 붕괴’ 이후의 파국적 과정과 그 너머에서 ‘정초하는 예술’의 과정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끝물 지속하는 예술’이 아니라 ‘정초하는 예술’은 이 시대의 파국을 예감으로 수용하고 그 파국이 빚어낼 수밖에 없는 새로운 대지의 조건에 밑돌을 놓는 작업을 제시한다. 그런 점에서 김윤호 작가는 문제적인데,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정초하는 예술’은 기존의 미술계 체제에서, ‘시간 없는 시간’이자 ‘정지된 시제’의 조건에서 파악하기가 힘들다.
실제로 김윤호 작가의 작업 중에서 <새사람>은 배드민턴을 구성한 새의 깃털을 되뽑아서 원래의 새로 조형해 간다. 배드민턴 아마추어 선수로서 선심이 취하는 시각적 태도를 이러한 조형을 보는 시각으로 적용한다. 즉 한쪽 눈은 셔틀콕의 라인 터치를 감지하기 위해 크게 뜨고, 또 한쪽 눈은 셔틀콕의 속도를 체크하기 위해 가늘게 뜨는 것이다. 일로이스 리글이 제시한 ‘통상시야’의 일탈적인 시각 연출이다. 셔틀콕의 깃털이 선조로서의 새를 찾아서 시간 역행을 하는 것을 지켜봐야 한다는 듯이. 그럼으로써 ‘정지된 시제’ 내부에서 시간의 저수지 아래 가라앉아 있는 ‘선조성’의 시간을 들어 올리듯이.
일본 망가에서 추출해낸 “일탈이냐 해탈이냐” 화두는 김윤호 작가가 지금의 시간성으로부터 일탈하는 방식에 관한 연구가 전제되어 있는 셈이다. 그것이 해탈인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그럼으로써 ‘차축-근대’의 모든 황금률을 벗어나 자기 언어의 내러티브를 꾸려간다는 것이다. 역시 아직까지는 무엇인지 분명치 않지만, 그 모호함이야말로 현행하는 시간의 정지 상태에서 일탈하는 퍼포먼스가 일어나고 있음의 징후이다.
* 이 원고는 예술경영지원센터 지원 특별 기고로 게재되었습니다.
[1]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영화 <제7의 봉인>(1957) 자막에서 인용
[2] 서동진의 <동시대 이후 : 시간-경험-이미지>(2018) 정도만이 비교적 솔직하게 동시대 예술이란 ‘시간 없는 시간’의 예술이며, 바로 이 ‘시간 없음’을 사유하지 못하는 데 기억과 경험이라는 개념이 작동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다만 이 책은 이러한 역설적인 시간성 자체를 본격적으로 쟁점화하고 있지는 않다.
[3] 데이비드 조슬릿, <예술 이후>, 11쪽.
[4] 네이버 열린연단 중에서 김우창 교수의 강연 <역사의 근원과 목적>, 2015. 중에서
[5] 아이작 아시모프가 1955년 발표한 <영원의 끝 The End of Eternity>은 과거-현재-미래의 근대적 시간관을 흔드는 시간여행 공작이 결국 거시적인 사회의 진보를 이끌어낼 수 없다는, 수학적으로 극한값은 0에 수렴한다는 니힐리즘적 문명비판을 보여준다.
[6] ‘합스부르크 피드백’은 6백 년간 지속된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나친 근친혼에 의해 주걱턱, 호두만 한 심장, 한쪽뿐인 고환 등등 유전병을 낳는 사이버네틱한 과정을 일컫는 용어이다.
[7] <유한성 이후>는 칸트 이후 정초된 서구적 의식 혹은 언어와 상관없는 절대적 외부, 즉 물 자체를 사유하고자 한다. 그는 실제로 SF의 혁신을 주장하면서 지금의 서구적 프로토콜 너머의 ‘과학 밖 SF’를 내세운다.
[8] 백남준 작가는 이런 어록을 남기고 있다. “영원성에 대한 숭배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질병이다.”
[9] 웬디 도니거는 자신의 저작 <암시된 거미>에서 기존에 쓰여진 남성 중심의 텍스트 안에서 여성적 자아가 숨은 내레이터로서 미세하게 울리는 목소리를 복화술로 읽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원래의 시간의 정류장에서 내리기 한 정거장 전에 내려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그 복화술로 숨은 텍스트를 읽기 위해 단편에 오래오래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다.
[10] 데이비드 조슬릿, 같은 책, 26쪽.
[11] 인류학자 모리스 고들리에가 시도한 ‘줄 수 있는 것’ ‘팔 수 있는 것’ 그리고 ‘팔거나 줄 수는 없지만 보존해야 하는 것’이라는 분류에 닿아 있다.
[12]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영화 <이스턴 프라미스>(2007)에서 비고 모텐슨의 강인한 턱 중심의 연기는 매우 인상적인데, 이러한 ‘합스부르크 턱’에 대항하는 의미가 짙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헝가리-오스트리아 제국으로 표현되었고, 그 영향력은 동유럽과 슬라브족에게까지 미쳤다.
[13] 이르멜린 리비어와의 백남준 인터뷰(1975) 중에서
[14] <군계> 5권에서 주인공 대사
[15] <군계> 11권에서 스승의 대사
[16] 이는 백남준이 역사가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를 읽고 그 서구중심의 세계사 사관에 대항하기 위해 이렇게 명제화한 것에 비견된다. “세계의 역사는 우리에게 알려준다, 주어진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면 게임의 규칙을 바꿔라!”
[17] <새하얀 인테리어> 작품에 부기된 작가의 설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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