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하는 이미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상작업을 중심으로(하)

조은비
2024.11.10

4. 증언하는 이미지: 영화 <메모리아 Memoria>(2021)[1]를 중심으로

  앞선 두 작품과 다르게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비교적 최근작품인 영화 <메모리아>(2021)는 랑시에르의 표현처럼 시청각 이미지의 재분배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조작(operation)에 가까운 작품이다. 영화는 인접예술과 매체들의 혼종적 결합을 통해서 지금도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 기존의 장르영화나 흥행작들과 달리 아피찻퐁 감독의 깊은 사유 속에서 만들어진 영상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속성은 영화라는 매체가 발전하면서 겪게 되는 변화에 대한 끊임없는 실험이다. 그러한 전위적인 경향은 경제적인 요인이나 내러티브에 종속되는 것을 거부하며 관객의 인식 이전에 감각체계에 직접적으로 접촉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관습화되고 있던 고전적인 영화문법으로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은 한 편의 영화 속에서 숨바꼭질을 하려고 한다. 그들은 관객에게 사건의 실마리를 던져주고, 그것을 앵글로 담아낸다. 영화 속의 인물들의 반응과 그들이 처한 상황을 추가적인 쇼트를 덧붙이면서 감독은 서스펜스와 긴장감을 지속시키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실험적이고도 급진적인 감독은 결코 카메라를 그런 방식으로 추적하지 않았다.

  사실 최초의 영화, 시네마토그라프(Cinematographe)를 만들었던 뤼미에르 형제의 다큐멘터리 영화 속에서 존재하는 인물들조차도 단 한 번도 자신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1895년 3월 19일에 뤼미에르 형제는 정오에 자신들의 공장 정문을 나서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포착하게 된다. 50초로 촬영된 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기록하기 위해 뤼미에르 형제는 약 800개의 프레임이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영화의 시작에서 부터 영화는 이미지와 공존하고 그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그 자체로서 이전과 이후에 도달하게 된다. 다큐멘터리 영화 속에 존재하고 있는 이미지는 작용과 반작용 사이에서 무한히 진동하는 간격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이 세계의 운동(움직임), 비밀스러운 단면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즉, 기록된 이미지의 이전과 이후를 되짚어가면서 움직이는 이미지에 기록된 이 세계의 잠재력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영화의 시작에서부터 그리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극장 속의 관객들은 주어진 사실들을 끊임없이 해석해야만 하는 것이다.

  극장이라는 관람조건의 특수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플라톤의 『국가』에서의 동굴의 우화를 잠시 인용해보고자 한다.『국가』에서 인간이 지각하고 있는 이 세계에 이데아의 그림자를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된 비유를 영화에 적용시켜 본다면, 동굴처럼 극장 역시 어두우며 관객은 동굴 속의 노예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 영사기에 의해 상영되는 스크린 역시 동굴 속의 벽과 흡사하다. 동굴 속의 노예는 태어날 때부터 한 쪽 방향만을 보도록 손과 발이 묶여져 있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뒤에 위치한 횃불에 의해 비춰진 ‘그림자’만을 볼 수 있다. 이와 비슷하게 극장의 관객들 역시 동굴 속의 노예들이 벽면에 비춰진 그림자를 실제처럼 여겼듯이, 스크린 위의 이미지를 관객들은 실제처럼 받아들인다. 하지만 『국가』에서도 나와 있듯이 동굴 벽의 그림자 앞에서 풀려난 노예에서 중요한 부분은, 역설적이게도 반드시 가장 먼저 그림자로 비춰진 실제 사물, 즉 그림자가 가리키는 실제의 형상을 반드시 먼저 돌아보아야만 한다는 점이다. 동굴 뒤 쪽의 횃불을 바라보고, 또 입구 밖을 나와 “그림자”와 “사물의 이미지”를 보게 된다면 그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다. 동굴 밖에서 비로소 시각적 해방을 경험한 ‘사람’은 결국 “사물 그 자체”, 그리고 세계의 구성 원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영화를 보고나서 극장 속 관객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거부하거나 혹은 변화시킬 힘을 가진 자는 이제 감독이 아닌 극장을 나서는 관객이다. 이제 우리는 더 많이 극장의 어둠 속에 머물러야만 되고 영화를 보고나서 또 다시 과감하게 극장 밖을 박차고 나와야만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들의 반복 속에서 이 세계를 구성하는 잃어버린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는 잠재적 이미지의 힘이 감지될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영화의 존재론에 오랫동안 깊이 천착했던 프랑스의 영화이론가 앙드레 바쟁식의 사유나 혹은 영화를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로 파악하려고 했던 질 들뢰즈 사유에서 명쾌한 해답을 얻지 못하였다. 들뢰즈는 자신의 이론을 설명할 때 언제나 맨 처음에는 베르그송을 전유하며 자신의‘운동’이론을 설명하였다. 베르그송을 전유한 들뢰즈가 보기에 지나온 공간은 나누어 질 수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무한히 분할 가능하지만 운동은 나누어지지 않거나 매번 나뉠 때마다 그 속성을 변화시켜야만 한다. 운동이 가로지른 공간들은 모두 하나의 균질적인 공간에 속하지만 운동들은 이질적이고 서로 환원될 수 없다. 들뢰즈가 보기에 운동은 항상 둘 사이의 틈에서 이루어질 것이며 그러므로 파악되지 않는다. 아무리 운동을 파악하기 위해서 시간을 나누고 또 재분할하여도 소용없다. 운동은 항상 구체적 지속(duree) 속에서 이루어지며 개개의 운동은 자신의 고유한 질적 지속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운동의 속성을 상기해야만 한다. 운동의 속성은 결국 어떤 잠재적인 차이를 상정하며 스스로 그것을 메꾸는 것이다. 전체는 주어지지도 않고 주어질 수도 없다. 실제적 전체란 나뉘지 않는 연속성, 운동 그 자체일 것이다. 하지만 베르그송을 전유하여 영화를 운동과 시간으로 이해하고자 한 들뢰즈와 달리 랑시에르가 보기에 오히려 영화는 재현적 체제로부터 물려받은 이야기의 법칙과 요구로 이루어진 미학적 체제가 낳은 산물에 가깝다.

  랑시에르는 이미지 연구와 관련된 몇몇 저작과 칼럼 등을 통해서 기존의 예술체제 속에서 행해졌던 불평등한 분과성에 우리의 관심을 주목하게끔 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체제를 전복하고, 변형시키고자하는 운동에 힘쓰고 있다. 그는 이러한 가능성을 예술 속에서 발견하고자 한다. 그가 주장하는 미학적 체제 내에서 작동되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distribution/partage)은 공유되는 동시에 배제된 자들의 몫들이기도 한 공동의 그 무엇일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나눔은 반드시 기존의 질서를 다시 분배하는, 즉 재분배(redistribution)되어야 될 것이다.

  하지만 이제 랑시에르는 더 나아가서 보이는 것과 말하는 것의 경계, 즉 경계와 분과를 구별하는 태도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때문에 재현적 체제와 윤리적 체제의 한계를 인지하고 새로운 대안으로써 등장한 그의 ‘미학적 체제’는 말하기와 행하기의 배치 속에서 변동을 야기 시킬 수밖에 없다. 랑시에르의 미학적 체제는 예술을 단일성 속에서 식별하고, 예술을 어떤 특정한 규칙, 주제, 장르들의 위계로부터 자유롭게 해방하려는 체제이다. 이 체제는 삶과 예술 구획을 고정하여 만들어낸 기존의 견고한 장벽을 파괴함으로써 가능하게 한다.

  그렇다면 왜 영화를 통해 역사를 다시 재고해 볼 수 있는 것인가?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역사서에 텍스트의 형태로써 기록되어 있는 기억의 편린들은 세계를 구성했던 이들의 목소리라고 여기기엔 너무나도 단성적(monopoly)이고 단정하고도 또 균질적인 형태로 느껴진다. 하지만 세계의 참상을 기억하고 있는 지나간 역사가 과연 질서 정연한 모습으로 간단하게 규정할 수 있을까? 질서 정연한 목소리로 기록되는 과정에서 기억에도 무의식적으로 위계가 작용될 수도 있다. 역사에서 무엇인가를 덜 기억해야 할 사건으로 구분하여 전승되고 있는 역사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기록의 엄밀함이라는 확정적 사고에서 잠시 벗어나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즉, 영화 속의 이미지를 통해서 기억에게 부여되었던 위계질서에 저항하며 역사 속에서 누락되어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를 되살려볼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역사 속에서 전해지고 있는 이야기는 사실은 ‘폭력’에 관한 이야기(들)이다.‘역사는 폭력적인 태도로 무연한 것들 사이의 인과관계를 만들어내고 그러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시간이라는 객관화된 수치를 통해서 이 세계를 구성했던 목소리들을 날카롭게 찌르면서’ 그들의 목소리를 제거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과관계에 기인하고 있는 역사서 속의 단수의 목소리를 잠시 망각하고 예술을 통해서 역사서에 누락되어 왔던 미묘한 질문들을 던져야 된다. 즉 역사 속에 기입된 어떤 것의 움직임에 집중하기 보다는 무언가를 움직이게 하는 존재(들)은 과연 무엇을 통해서, 혹은 어떠한 방법으로 이 세계를 움직이고 있었는가에 대해서 집중해야 될 것이다.

  영화를 통해 지금까지도 분열하고 있는 시대정신을 <메모리아>는 다시금 새롭게 파악해보고자 한다. 영화의 시작부터 등장하는 새벽녘의 둔탁한 소리, 시작점이 어디인지 조차 파악할 수 없는 커다란 굉음은 오로지 여주인공인 제시카의 청각적 감각 속에서만 실재하였다. 감독은 굉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소리의 스펙트럼을 <증발>의 입체적 질감과는 달리 가장 두껍고 평평하게 만드는 작업에 오랜 시간 고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영화 <메모리아>는 이 소리의 근원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콜롬비아에 살고있는 이주민인 제시카가 만나게 되는 콜롬비아 거주인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어긋나는 내러티브의 작용/반작용 과정을 통해서 주인공 제시카는 끝없이 세계의 근원을 더듬어나가고자 한다. 때문에 감독의 이전 작품들과 달리 이 영화는 과정으로서의 영상이미지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서 예술에서의 미메시스(재현원리)를 벗어나서 세계의 근원 위에서 현실과는 조금 동떨어져 있는 존재들의 몸짓을 다시금 기억하는 과정에서 감독의 영상작업을 관통하는 증언하는 이미지의 참된 의미가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아피찻퐁 감독의 영상 속에서 등장하는 존재(연기에 둘러쌓인 태국마을, 하얀 침대위에서 우글거리는 벌레들, 남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의 근원을 찾아가는 인물 등)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공통점은 그들이 역사 속에서 주체화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세계의 역사 속에서 지워진 존재들에게 관심을 가졌던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영상작업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이미지, 매끈한 인과관계를 찾는 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어색한 요청일 것이다. 낙원의 재현이 아닌 세계의 근원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증언하는 이미지의 역량을 강조될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역사 속에서는 누락되었지만 여전히 우리의 삶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존재들의 움직임, 목소리를 몽타주화하는 감독의 실천이 귀중한 이유가 바로에 여기에 있다.

5. 나가며

  글을 마무리하며 다소 거친 표현이지만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그리고 역사 속의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이미지 속에는 기입되어 있을 것이라 확신하며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영상작업을 오래도록 복기해보려고 노력하였다.

  감독은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존재인 인간과 환경을 관찰하고, 그들에게 지금까지 주어졌던 모든 것들을 의심하는 순간부터 ‘몫 없는 자’들의 목소리는 다시 기억될 것이라고 오랜 시간 증언하고 있다. 왜냐하면 감독이 보기에 인류의 역사, 혹은 한 인간의 삶이란 텍스트나 몽타주의 결합만으로는 온전히 기록될 수 없는 다층적이며 복합적인 요소의 연속(혹은 지속(la durée))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증발 vapour>(2015), <Night Colonies>(2021), <메모리아 Memoria><2022) 세 작품의 관람환경은 모두 상이하였지만(미술관과 영화관을 넘나들며) 영상작업을 통해 시대를 반영하고 삶을 반영하는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이미지를 감각함으로써 우리는 모호하지만 동시에 흥미롭게 세계의 증언, 증언하는 이미지의 역량을 매순간 새롭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 이 원고는 예술경영지원센터 지원 특별 기고로 게재되었습니다.


[1]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메모리아 Memoria>, 장편 극영화작품, 상영시간 136분, 2021년 제작(콜롬비아,태국,프랑스,독일,멕시코,카타르,영국,중국,스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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